댄스 유토피아 – 안은미의 안무에 관하여

Trisha Brown in “Watermotor”, by Babette Mangolte (1978)

1.

나만 그런 걸까. 안은미의 공연을 보고 난 직후면 나는 여지없이 어디 숨어있다 자신이 있음을 기별하는 듯한 발작적으로 움찔대는 몸의 느낌에 찔끔 놀라곤 한다. 그것은 늘 비자발적인 리듬 속에 온순하게 작동하며 자신과 함께 하던 몸속에 마치 이물스런 다른 몸이 매복하여 있다 신호를 보내는 듯한 기분이다. 걷거나 하품하거나 의자를 당겨 앉거나 하는 외엔 가급적 몸을 의식하지도 자극한 적도 없는 게을러터진 내게 안은미의 공연은 그런 매복하고 있던 몸과 대면하게 한다. 그것은 현란한 브레이크 댄스를 보거나 힙합 무용을 보았을 때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무용은 시시각각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화려하고 매끈한 이미지들의 계열 속의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잘 난 이미지 한 조각에 그친다. 또한 이는 완벽한 포즈로 점프를 하며 우아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동작을 수시로 선보이는 <댄싱 나인>같은 케이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보곤 하던 일급 무용수의 춤을 보아선 좀체 상상할 수 없던 것이기도 하다. 섬세하거나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탁월했다고 안무가나 일급 무용수들이 촌평을 늘어놓는 동작을 보아도 나는 그것이 어쩐지 신파 같아 보이기만 하고 감정적 경험의 화석 같은 표본을 따분하게 전시하는 듯 보이기만 하다. 그것은 도식적인 감정의 구조를 나열하는 멜로드라마의 단편에 가깝다. 이는 몸의 탄성(彈性)과 완력을 명징하게 전시하는 스포츠 중계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축구 경기나 체조 경기를 보여주는 TV의 중계 프로그램은 이곳저곳에 빽빽이 보이지 않게 놓인 카메라의 눈을 통해 클로즈업되고 잊지 않고 곧 저속으로 출력되는 완벽한 동작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슬아슬하리만치 우아하게 진동하고 경련하는 몸의 이미지들을 전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익히 보아온 미적인 신체의 이미지들의 앨범 속으로 곧 처분되고 만다. 문득 무용이든 스포츠이든 거기에서의 몸이란 전시되는 몸, 이미지가 되어버린 몸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렇게 신통찮은 몸의 시각적 행렬 속에 안은미의 무용이 지닌 비범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댄스 유토피아 – 안은미의 안무에 관하여 더보기

내가 꼽은 한국 다큐멘터리 10선



노동자뉴스제작단 – 노동자뉴스1호

1. 김동원, 상계동올림픽 (1988)
<상계동올림픽>은 (반)제도적 실천으로서 독립 다큐멘터리의 기원을 이룬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개입과 참여의 주체로서 감독이란 저자의 면모를 뒤잇는 작가들에게 생생히 각인했다. 김동원이라는 감독의 등장을 세상에 알린 것만으로 이 작품은 가치가 크다.

2. 노동자뉴스제작단, 노동자뉴스 1호, 1989
노동자뉴스제작단은 한국 다큐멘터리 운동의 역사적인 형식을 증언한다. 운동으로서의 다큐멘터리, 교육과 선전으로서의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이어가고 있고, <노뉴단>은 그 원점에 있음에 분명하다. 다큐멘터리의 저자가 사회적 저자임을 환기하고 작업이 항상 역사적 시간에 정박해 있음을 알리는 급진 다큐멘터리운동의 원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변영주, 낮은 목소리(1995), 낮은목소리2(1997), 숨결(1999)
변영주의 위안부 할머니 3부작은 전시 성폭력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치며 이것이 손쉽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도록 더할 나위 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피해자라는 창백한 이미지에 관해서도 역시 저항하며 할머니들에게 말문을 열어준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란 물음에 이 다큐 시리즈는 성실하게 대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꼽은 한국 다큐멘터리 10선 더보기

스트롱맨(strongmen)의 척추해부학: 신자유주의와 남성성의 정치

    • Janelle Monáe – Q.U.E.E.N. feat. Erykah Badu

1. 여기,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여기에 세 명의 남자가 있다. 먼저 첫 번째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을 소설에서 부르는 대로 이부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는 임성순의 장편소설 자기개발의 정석의 주인공으로 중년의 기러기아빠이다. 그의 아내는 “당신도 알잖아. 이 나라엔 답이 없어”라며 아이와 함께 외국으로 떠난다. 이부장은 말문이 막힌 채 “답이 없는 곳에 자신은 왜 남겨두는지 궁금했지만 결국 아내 뜻에 따르기로”한 사내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아내와 아이를 보낸 후 만성 전립선염에 걸린 걸 알게 된 이부장이 뜻하지 않은 ‘자기개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발견한 자기개발이란 흔히들 ‘드라이 오르가슴’이라고 말하는 자가 성애적인(autoerotic) 쾌락이다. 이부장은 자신의 물건이 왜소하다고 느껴 언제나 주눅 들어 살던 그에게 처음 관계를 한 날 “내꺼 너무 작지 않아”라며 던진 물음에 “왜? 귀여운데. 난 좋아”란 답을 듣고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소심한 남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의 최대의 위기인 전립선염을 극복하는 여정에 진입한다.

“어떤 사정이 있다 해도 다 큰 어른이 다른 남자 앞에서 사정없이 사정하는 일은, 사정상 사정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해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용납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가 전립선염 진단을 듣고 “인생의 굴욕 1위에 빛나는 전립선 마사지”를 받은 뒤 스스로 되뇐 말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기생충, 혹은 에일리언의 알처럼” 보이는 ‘아네로스’라는 전립선 마사지 도구와 애증의 시간을 보낸 후 그것에 깊이 빠져든다. “그 동안 자신이 불행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아네로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리만치. 급기야 “아네로스를 사용하는 일은 그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닌 완벽히 여러분 자신을 위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족적인 행복 추구이자 완전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고 기염을 토하는 드라이 오르가슴 인터넷 동호회의 오프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스트롱맨(strongmen)의 척추해부학: 신자유주의와 남성성의 정치 더보기

천박하고 진부한 마이클, 그렇지만….



Crosby Stills Nash and Young Live at Fillmore East 1970

1.

다큐테인먼트(docutainment)의 기린아, 마이클 무어가 다시 방문했다. 팝콘을 우물거리면서, 가끔은 킬킬 웃다가 또 가끔은 어이없어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 그를 능가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따분하고 진지하다고 알려졌던 다큐멘터리를 매우 재미난 오락거리로 만들어 내는 비상한 재주로 다큐멘터리의 지형을 바꾼 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가 선사하는 재미는 그저 그런 심심풀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심드렁하게 화면을 보던 자세를 냉큼 고쳐 앉도록 만드는 무어의 정교하면서도 신랄한 도발과 적극적인 개입의 퍼포먼스를 통해 생산되는 특별한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다큐멘터리의 절대적 공준이었던 재현의 객관성을 위반하면서 진실(truth)을 생산하고자 했던 그의 값진 노력의 성과이기도 하다. 포스트-진실의 시대에 그는 집요하게 진실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 점이 무어를 둘러싼 숱한 시비의 쟁점일 것이다.

천박하고 진부한 마이클, 그렇지만…. 더보기

존재론적 (비)유물론의 매혹 혹은 그것은 충분히 유물론을 쇄신하고 있을까

Leviathan (2012) – Official Trailer

한때 주체가 점유했던 비어있는 왕좌에 객체를 앉히는 것이 비판적 사유의 목적은
아니다
그 자리에 선 객체라면 단지 우상일 따름이다비판적 사유의 목적은 그러한 위계를 폐지하는 것이다.”(Th. W. 아도르노)

철학 생도들의 인터넷 블로그 사이트들이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서로의 블로그를 방문하고 코멘트를 남기며 교류하던 이들은 자신들이 어딘가 공통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기존의 초월적 인간주의가 공언하던 지식의 확실성에 의문을 품은 채 자유로운 사고를 실행하고 있으며(그런 점에서 그들은 사변적(speculative)이다), 저 악명 높은 칸트 이후의 비판철학에 의해 선언된 좁디좁은 현상계를 넘어 물-자체(An Sich, Thing-in-itself)란 이름으로 접근 금지된 세계, 불가해한 그 세계의 존재자들을 발견하고자 분투하고 있음을(그런 점에서 그들은 실재론(realism)을 지지한다) 확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영국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마련된 학술대회에서 한 자리에 모인다. 새로운 유물론의 대표 종(種)이랄 수 있을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이 탄생한 순간이다. 레이 브레시어 R. Brassier, 이언 해밀튼 그랜트 I. H. Grant, 퀭탱 메이야수 Q. Meillassoux 그리고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그래엄 하먼 G. Harman이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유물론의 탄생을 이렇게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철학적인 운동 혹은 프로그램은 다양한 개념을 낳고 다양한 이론적 프로그램을 생산하며 또 흥미진진한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번성하여 왔다.

존재론적 (비)유물론의 매혹 혹은 그것은 충분히 유물론을 쇄신하고 있을까 더보기

디자인 속에 숨은 몇 개의 사회

Aphex Twin – T69 Collapse

언제부터인가 디자인을 규제하는 가치들을 지시하는 말들이 스멀스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장 생각나는 말들을 몇 개 꼽자면 이런 것들 아닐까. “참여적”, “경험적”, “상호작용적(interactive)”, “개방적”, “협력적” “사용자 중심적” 등. 이는 디자인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디자인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상상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최근 나타난 디자인 실천의 변화를 아우르는 말로 디자인의 ‘사회적 전환(social turn)’이란 개념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각예술에서 나타난 사회적 전환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숱한 시각예술 분야 작가들이 택한 접근은 디자인에서의 사회적 접근과 딱히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을 띠기도 한다. 이를테면 유명세가 대단한 영국의 터너상(Turner prize)을 2015년에 수상한 시각예술 콜렉티브인 어셈블(Assemble)은 오랜 동안 지역을 먹여 살렸던 제조업이 사라진 후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이를테면 리버풀의 산업용 도자 노동자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고 노동자의 공동체를 되살려내면서 동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판매함은 물론 그 결과를 전시의 형태로 소개한 등의 활동이 그에 해당될 것이다. 건축적이면서 디자인적이기도 한 이들의 작업은, 그럼에도 엄연히 시각예술 분야의 최근의 추이를 대표한다.

디자인 속에 숨은 몇 개의 사회 더보기

노동의 줌-인

Dj Koze – Pick Up

줄리앙 프레비유의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궁극의 핀치투줌)>은 타공판 위에 설치된 물리치료기계에 연결된 손을 보여준다. 타공판의 지지대에 장착된 고리와 끈은 ‘핀치-투-줌(pinch-to-zoom)’ 동작을 완강히 제약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또는 구속에 저항하며 그 동작을 실행하려는 안간힘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꼬집어 확대해 보기란 동작을 가리키는 ‘핀치투줌’은 태블릿이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이들에겐 익숙한 관습적 동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복잡한 지식을 터득하고 조작을 수행할 필요를 절약하며 그 모두를 우아한 동작 하나에 집적한다. 이미지를 확대하기 위해 해당 영역을 설정하고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의 복잡한 정보처리와 명령을 행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두 손가락을 모았다 벌린다.

노동의 줌-인 더보기

반둥의 밤-대본 초고

BING SLAMET – Genjer Genjer

 

#1
암전된 채 겐제르-겐제르 재생(Bing Selamet)
반둥의 밤 제목만 프로젝션

#2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오늘 나임 모하이멘의 <두 번의 회의와 한 번의 장례식>이라는 작업에 대한 주석이자 또한 그를 보충할만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눠볼까 합니다. 그럼 오늘의 강연을 시작하기 위해 어쩌면 진부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발터 벤야민의 저 유명한 역사철학테제 가운데서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출발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비동맹운동과 제3세계주의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이 될 시간의 변증법을 벤야민이 마침 매우 능숙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른 문장은 이런 것입니다.

“다만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만이 매 순간 자신들의 과거가 인용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류가 살았던 순간들 하나하나가 그날, 즉 최후의 심판일이 될 날의 의사일정에 인용 대상이 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테제3 중에서

이 짧은 단락에서 벤야민은 과거를 둘러싼 우리의 흔한 상식을 바로잡겠다는 듯이 숨 가쁘게 말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놀랍고 흥미로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나간 시간에 벌어지고 기록된 객관적인 사태들”로서의 과거만이 과거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다만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가 완전하게 주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여기에서 완전하게 주어지는 과거와 불완전하게 주어지는 과거가 있으며 이를 분간할 필요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 즉 역사적인 한 단계가 종료하고 다른 단계가 열리는 순간,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인류의 전사가 끝나고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 그것은 물론 혁명적 단절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인류가 구원되지 못했을 때 과거는 불완전하게 주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또한 우리가 구원을 원한다면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잘못을 바로잡는 위대한 실천을 하고자 한다면, 과거를 완전하게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반둥의 밤-대본 초고 더보기

고통의 현상학을 넘어, 갑의 폐절을 위하여: 민주주의에 머물지 말자

Oneohtrix Point Never – The Station

 

“괴로움(Leiden)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모든 진리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괴로움이란 주체에 짐 지어진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신의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 즉 주체의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되어 있다.” Th. W.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73쪽.

“경제는 핵심영역이고 전투는 이곳에서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주문(呪文)을 깨야 한다. 하지만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S.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 이서원 옮김, 길, 157쪽

1. 을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적 프로젝트

프랑스와 유럽의 급진 정치철학의 충실한 번역자이자 주해자인 진태원은 <을의 민주주의>에서 그간의 자신의 작업을 한데 결집시킴과 동시에 그것을 한국에서의 급진 정치의 조건을 위한 사색으로 발전시킨다. 문재인 정권의 집권과 더불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더욱 중요한 토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한국에서 진행된 경제 개혁과 민주주의 사이의 착종은 민주주의란 언표를 둘러싼 희구와 애착의 정념을 휘발시킨 듯 보인다(적어도 우리는 김지하가 자신의 시의 선율, “신새벽 뒷골목에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읊을 때의 민주주의를 향한 정념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권력의 게임에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라면 누구든 제 입맛대로 가용할 수 있는 타락한 기표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동요의 상황에 개입하고자하는 시도로서 매우 큰 가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재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둘러싼 회의와 냉소적 체념을 극복하는 데 요청되는 사고의 주춧돌을 마련하고자 애쓰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여기에서 나는 <을의 민주주의>에서 그가 참조하고 주해하는 ‘포스트-포스트주의적’인 정치철학에 대한 농밀한 대화에 주의하기보다는 그를 통해 그가 수확한 일종의 정치적 프로그램, 즉 을의 민주주의론에 스민 사고에 대하여 간략한 비평을 하고자 한다.

고통의 현상학을 넘어, 갑의 폐절을 위하여: 민주주의에 머물지 말자 더보기

알로리 괴르제 & 앙투완 드푸르의 <제르미날>에 관하여

무대란 소우주

<제르미날>은 에밀 졸라의 전설적인 소설, <제르미날>을 제목으로 삼는다. <제르미날>은 광부들의 척박하고 고단한 삶에 관한 소설이다. 알로리와 앙투완은 자신의 작업이 소설 <제르미날>과 무관하다고 능청을 부리지만 그것은 그저 시치미 떼기에 불과할 것이다. 무대의 표면을 채굴하는 퍼포먼스의 주된 동작들은 분명 광부의 몸짓을 빌린다는 점에서나, 자연주의적 역사소설이 기대했던 것처럼 역사의 재현을 기대하고자(기대할 수 없음을 토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나 두루 이 작업은 <제르미날>로부터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발신하고자 한다.

알로리 괴르제 & 앙투완 드푸르의 < 제르미날>에 관하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