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지구>의 헤테로토피아적인 꿈의 안스러움


Bruce Springsteen – State Trooper

1.
<문래지구>는 장소특정성이란 개념과 공동체적 실천으로서의 미술이란 개념을 결합한 근년의 미술적 실천의 경향에 온전히 충실하고자 하는 전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문래동’이라는 쇠락한 혹은 소멸 중인 공장지대가 예술가들의 거주로 인해 재조명되고 또 관심을 끈 것도 제법 오랜 일이 되었다. 따라서 ‘문래’라는 ‘장소 명’은 장소특정적인 공동체 미술을 위한 소재이자 현장 자체로서 남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장소 – 이미 많은 이들이 비장소(non-place), 무장소, 장소상실(placeless-ness)에 대해 말하며 오늘날에는 장소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했음을 상기하자 – 가 여전히 실재한다고 역설하는 것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은 무언가를 놓치는 성급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사라진 세계에 대한 반발이자 장소를 회복하려는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깃든 의지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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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책


Bessie Smith – St. Louis Blues (1929)

  • 이런 허접한 글을 올려도 될 지 싶지만, <타이틀매치> 전시를 위해 내가 선별해 추천한 책들에 대한 간략한 선정의 변을 부탁받고 급하게 몇 줄 적었다.

1.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일 엮음, 책읽는오두막, 2013.

브레히트의 글은 일종의 암호 해독이다. 그의 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비밀이 숨은 곳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가장 명료한 말로 그것을 풀이한다. 사이비 예언가들이 넘쳐나는 오늘, 현재의 세계의 해부학자가 어느 때보다 요긴하다. 그 탓에 브레히트의 글은 더욱 긴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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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기호증 Traumatophilia : 무빙-이미지의 (비)서사적 경로들에 관한 메모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I’ll Be Your Mirror”

묘사(description)의 지배란 결과일 뿐만 아니라 원인이며,
서사시의 의미성에서 그 후의 문학이 결별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산문이 내적인 인간 경험의 시를 지배하는 것, 사회적 삶의 계속적인 비인간화,
인간성의 일반적 타락,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객관적 사실들이다.
묘사의 방법은 이러한 발전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일단 확립된 이 방법은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찾기에 골몰하는 지도적인 작가들에게 선택되고, 다음에는 그 방법이 현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삶의 시적인 차원은 쇠퇴하게 되고, 문학은 그 쇠퇴를 격렬하게 만든다.”
루카치, 서사냐 묘사냐, <리얼리즘과 문학>, 최유찬 외 옮김, 지문사, 1985, 196쪽.

 

서사라는 것

그러니까 가짜 뉴스의 시대에 산다는 것은 온갖 이야기가 포화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사 과잉이라면, 한편 그것은 세계를 온전히 재현하는 서사가 희박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서사의 과잉과 과소 사이에서 요동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무엇이든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는 전에 없는 속도와 양으로 우리를 덮쳐누른다. 이른바 넷플릭스 Netflix나 왓차 Watcha같은 영화 플랫폼에 접속했을 때 순간적으로 아연함을 느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유튜브 Youtube에 접속했을 때 검색창에 무슨 단어를 쳐야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던 적도 숱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우리가 그것을 지금껏 알아오던 서사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미처 가늠할 겨를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어떤 장르인지조차 눈여겨볼 틈도 없이 오늘의 추천작과 같은 알고리즘적인 판단이 내게 투여하는, 이를 서사라 말할 수 없다면 그냥 흔히 하는 말대로 ‘콘텐츠’를, 게으르게 덥석 문다. 그렇지만 이를 미술관과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무빙이미지를 두고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말과 이미지와 사운드로 채워진 무빙이미지를 접한다. 그 많은 이미지와 사운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에 직접 답하기보다는 하나의 단서에서 출발해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이 글에서 서사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성의 아포리아 혹은 이율배반을 해결함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좌초하고 있는지 묻고자 한다. 그리고 순간 혹은 지금이라는 시간 없는 시간이 지배하게 될 때 어떻게 충격 혹은 외상의 경험만이 득세하게 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지의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어떻게 위기에 처하게 되는지, 짧게나마 사색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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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경험

아다치 마사오 – 약칭 연속사살마

풍경과 진실

지난 수년간 마주하는 이미지마다 풍경이 도드라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심이 싹을 틔웠다. 그리고 그 의구는 나날이 곰팡이처럼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먼저 사진이 가장 두드러졌다. 버젓한 시사 잡지의 화보 면에서도 시위, 파업 장면을 담은 사진이나 정치가의 초상 사진만큼이나 같은 비중으로 풍경 이미지가 빽빽이 도열해 있었다. 왜 그럴까. 주변에 물어봤자 난감하다는 기색의 표정만 돌아왔다. 나는 풍경 사진의 난데없는 회귀가 어쩌면 사진이 그 자체 느낌을 만들어내는 질료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스스로 내려 보기도 했다. 비판적 사실주의의 사진으로부터 독특한 감각적 유물론으로 사진적 실천이 귀환하는 현상은 ‘사진-물질’ 혹은 ‘사진-객체(object)’에 주의하도록 촉구하는 작가들과 비평적 추세를 모르지 않던 터라 더욱 신경이 거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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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알겠는데,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STANDING ON THE CORNER – Angel (Life and Death of the Earth in the Key of F)

우리와 ‘그들’ 혹은 우리와 ‘당신들’

‘우리 대 그들’은 포퓰리즘의 정치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어구라 할 것이다. 포퓰리즘의 부상은 다분히 많은 이들이 기피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정치적인 징후이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내적인 한계를 폭로하는 징후로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다. 이를테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의 주장을 떠올려보자. 그는 지난 수십 년간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이론가이자 대표적인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로서 급진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란 독특한 가설을 주창한 바 있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2.
그의 급진민주주의론이란 정치적인 실천의 궁극적인 근거나 토대란 존재하지 않으며(이를테면 정치를 결정하는 토대로서의 생산양식이나 계급 같은 것을 주장하는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다양한 요구들의 헤게모니적인 접합 혹은 등가적인 연쇄를 통해 정치란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라클라우는 말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급진민주주의론을 포퓰리즘론으로 변형하고자 애썼다. 이는 헤게모니적인 접합의 논리를 통해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하였다. 다양한 요구들이 등가적 연쇄로 접합될 때, 즉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실업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적 위치에서 비롯된 요구들이 하나의 기표(예컨대 민주주의)로 응축될 때, 이는 항상 불가피하게 ‘우리 대 그들’이라는 주체성의 배치를 필연적으로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탓에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적 이성에 관하여이란 대담한 그의 마지막 주저에서 정치적 실천의 근본논리로서 포퓰리즘을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다. 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London & New York, Verso, 2007.
그는 모든 정치적인 이성의 기저에 이러한 포퓰리즘이 관통하고 있다고 보았던 셈이이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 마비되면서 나타나는 우연한 현상으로서 민주주의를 정상화하면 해소될 수 있다는 흔해빠진 생각과 포퓰리즘에 매료된 이들 사이의 생각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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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버치가 “생각했던” 에세이 영화

Sufjan Stevens – America

에세이 영화의 좌표

앨런 세큘라 Allan Sekula와 노엘 버치Noël Burch의 잊혀진 공간 The Forgotten Space(2010)이 공개되었을 때, 노엘 버치는 이 영화의 공식 사이트에 흥미로운 노트를 기고하였다. 노트의 제목은 “에세이영화”이다. 그는 그 글에서 에세이영화란 관념을 가장 먼저 고안했던 인물로 자처한다. (그러나 영화이론가들은 에세이영화란 용어를 발명한 최초의 인물로서의 역할을 수여할 인물로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를 꼽는다. 1940년 한스 리히터는 “영화 에세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새로운 형식(The Fim Essay: A New type of documentary film)”를 발표하였다. 이 글은 다음의 에세이영화 비평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 Nora M. Alter and Timothy Corrigan eds. Essays on the essay fil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7.)
그간 쏟아져 나온 많은 에세이영화에 관한 저작들 역시 에세이영화란 관념을 제안한 초기의 개척자 가운데 한 명으로 노엘 버치를 꼽는데 인색하지 않는다. (노엘 버치의 에세이 영화론이 에세이 영화를 선구하는 이론적 선언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은 에세이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보라. Elizabeth A. Papazian and Caroline Eades eds. The essay film: dialogue, politics, utopia, London & New York: Wallflower Press, 2016. Laura Rascaroli, How the Essay Film Think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Nora M. Alter, The essay film after fact and fict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Nora M. Alter and Timothy Corrigan eds. op. cit.)
영화이론가이자 감독으로서 또는 영화 교육자로서 그의 경력에 익숙한 이들에겐, 그와 세큘라의 공동 작업에 관해 일종의 비평적 주해를 추가한다고 해서 그를 엉뚱한 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잊혀진 공간을 에세이영화로 분류하려는 선제적인 조처라면 이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에세이 영화를 둘러싼 토론에 늘 따라붙는 다큐멘터리인가 에세이 영화인가란 성가신 논쟁을 다시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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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세계를 업로드하기 혹은 피드하기

Sam Cooke – Blowing in the Wind

일본의 하위문화의 속사정에 밝은이들이라면 훤히 알 이야기에서 출발해 보자. 일본에선 ‘제로연대’를 전후해 새로운 하위문화의 부족이 출현(더불어 해체)했다고 일컬어지곤 한다. 이는 저 유명한 전설적인 오타쿠의 자기 배반과 관련이 있다. 일본 문화평론가들의 말을 쫓자면, 오타쿠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몰두하면서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꿈을 보전했던 이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전공투의 기괴한 자멸적인 파산을 끝으로 유토피아적인 꿈이 소멸한 뒤에도 음습한 자기만의 세계에서 암약하며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꿈을 지속시켰던 이들이었다고 평해진다. 그러나 이런 오타쿠들은 ‘제로연대’, 긴 불황의 시대를 지나며 맞이한 새 천년에는 더 이상 꿈을 지속시키지 못한다. 그러면서 등장한 새로운 하위문화의 흐름이 세카이계(せかい系)와 일상계(日常系)이다. 세카이계는 이름과 달리 세계가 없는 세계에서의 삶을 가리킨다. 세카이계란 “세계의 문제를 자의식의 문제로 왜소화시킨다”는 것을 가리킨다. 세카이계, 그들에겐 세계가 없거나 있다면 그것은 나와 너만 있는 세계이다. 일상계는 세카이계가 더욱 숙성한 것이자 동시에 세카이계의 감수성에 대한 자기패러디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비사회의 끝나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난 다른 세계를 원하는 주인공들이 초능력자, 우주인, 미래인 등과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실은 변함없이 일상을 즐기기 위한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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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변증법: 한국전쟁을 아시아화하기

Power To The People –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

나는 한국전쟁이 벌어진지 15년도 훌쩍 지난해에 태어났다. 전흔은 거의 모두 사라지고 없었을 무렵이었으리라. 그런데도 어린 소년이었던 내게 또렷이 기억에 남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의수나 의족을 팔던 상점들의 정경이었다. 그 상점들은 시청 근처 관상대를 오르는 언덕 옆에 자리했던 원호처 옆에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그 상점의 진열창 안에는 먼지를 뒤집어 쓴 목발이나 기괴한 분홍빛이 감도는 살색의 의족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오랜 동안 닦지도 손을 보지 않아 거무튀튀한 갈색으로 변해버린 의수(義手)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나는 가지런히 정렬된 다른 길이의 그 플라스틱 손가락들을 오랜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비명과 포연, 고통으로 일그러진 무시무시한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나는 그 손가락들이 언젠가 벌어졌던 불길한 재앙을 가리키는 손짓처럼 보였던 싶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강원도 북쪽의 작은 소도시였다. 그곳에서 한국전쟁은 언제나 음산한 안개처럼 머물고 있었다. 시내의 유명한 내과병원의 원장이 대한항공 납치사건으로 북으로 갔다거나, 남대천 건너 개량주택 마을에 살던 누군가가 이불 아래에서 단파라디오를 듣다 간첩으로 끌려갔다거나, 동네 끝 시장 어귀에 늘 얼씬대던 미친 거지는 실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너무 똑똑해 빨갱이가 되었다가 곤욕을 치르곤 저렇게 실성하곤 말았다거나 하는 소문 또는 괴담이 늘 먼지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정작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 속에는 없었다. 경포대 옆에 있던 충혼탑으로 이끌려가 억지춘향으로 묵념을 할 때에나 한국전쟁은 공식적으로 세상 속으로 등장했다. 반공웅변대회나 무장공비 사건 같은 것이 터지면 곧잘 공설운동장에서 열리곤 했던 궐기대회 같은 곳에서, 6.25는 미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다. ‘잊지 말자 6.25’라고 외치곤 했지만, 잊지 않아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는 요령부득이었다. 그 즈음 인기 있던 TV 드라마인 <전우>에서 보던 그 전쟁의 풍경을 통해서는, 도무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그저 악(惡)이거나 적(敵)이기라는 추상적인 호명을 통해 집요하게 상기될 뿐, 구체적인 원망과 적의를 동원하기가 난감하기만 것이었던 ‘북’이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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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추상적) 부정의 노동 – 서평주 <괴상한 춤> 전시에 관하여

Duke Ellington & John Coltrane – In a sentimental mood


브레히트는 뚱한 어조로 독일의 산업자본을 상징하던 아에게(AEG)나 크루프(Krupp)의 공장 사진을 두고 훈계조의 이야기를 던진 적이 있다. 브레히트 가로되, 그런 사진들은 공장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루프 공장이나 아에게 공장 사진은 이 회사들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드러내주지 못한다. 현실은 기능적인 것의 영역 속으로 미끄러져 버린다. 이를테면 인간관계의 물화 즉 공장은, 그런 관계들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구성해야 할 무엇’, ‘인위적이고’, ‘고안되어야 할’ 무엇이 있다.”(B. Brecht, Brecht on Film and Radio, London: Methuen drama, 2000, pp. 164-5. 여기에서 브레히트가 말하는 추가되어야 할 무엇은 물론 ‘예술’을 가리킨다. 그는 영화의 불완전한 재현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예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화가 예술을 만나 예술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영화의 자연적 재현은 언제나 자신이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뜻에서 예술이라는 추가적인 조처를 통해 그러한 재현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브레히트 식의 생각은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에 등장하는 주식거래소를 두고 “주식거래소는 단지 주식거래소가 아니라 수천 개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이젠슈테인의 발언을 참조하여 볼 수도 있다. S. 에이젠슈테인, <자본>에 대한 노트, 김수환,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  이때 브레히트는 사진적 리얼리즘에 대하여 퉁명스럽게 타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때문이다. 자본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혹은 자본이라는 ‘현실적인 추상(real abstraction)’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현실적 추상 혹은 실제 추상이라고도 옮겨지곤 하는 것에 대한 획기적인 논고로는 다음의 저작을 참조하라. 알프레드 존-레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황태연․윤길순 옮김, 학민사, 1986.) 나아가 사이비구체(성)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는 비판적 구체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이런 물음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리고 이는 굳이 마르크스주의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예술적 실천에 참여하는 이들에겐 달아날 수 없는 쟁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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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닦으며 – 서문을 대신하여

Bon Iver – Naeem

반란자 내 아들이 눈 뜨면
다른 태양을 보게 할 거예요
– 에메 세제르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2015)은 반세기 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의 기억을 쫓는다. 그 기억을 쫓는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에 비친 슬픈 눈길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공산당이 있었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는 1965년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대학살이 있었다. 학살당하고 유배당한 이들은 공산당원들뿐 아니라 노조 활동가, 농민운동가, 비판적 지식인, 청년학생들이었다. 공산당 학살은 반둥회의에서 전환점을 맞이했던 인도네시아의 제3세계 프로젝트가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이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검안사(檢眼士) 아디 룩쿤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잔인하게 살해당한 형의 살해자들을 찾는다. 자신의 형, 람리의 살해 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웃음과 연극적인 몸짓으로 당시의 학살을 증언한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왜 이미 지나간 일들을 들추려고 하느냐고, 지나간 역사를 다시 말해 무엇 하냐고 아디에게 다그쳐 묻는다. 급기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고 역정을 낸다. 이 책은 바로 그를 하고자 한다. 문제를 일으키고 가능하다면 말썽을 일으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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