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적 정동과 신자유주의 그리고 가족 

Perfume Genius – Describe

1. ‘빚투’ 가족: 신자유주의의 가족 프로젝트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돌림병이 창궐하는, 거의 초현실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간의 현실 속에 잠긴 채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질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압도하는 또 다른 시름에 맞닥뜨린 것처럼 보인다. 한 해 내내 거의 언론의 전면을 차지하는 주택난과 전세난은 단지 ‘주택 문제’를 넘어 지난 수십 년간 전면화 되었던 신자유주의적 병리를 압축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확진자 수’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하는 ‘오늘의 부동산 시세’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현재의 원근법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거 위기’라는 것을 지난 시대에 흔히 사회과학에서 지칭하던 것과 같이 ‘사회문제(social problem)’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동산 관련 대출을 규제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더 이상 재정 정책이 아니라 금융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는 이자율의 규제를 통해 흔히 말하는 마이너스에 가까운 저금리를 통해 시장에 통화를 푸는 통화정책과도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개인과 가족이 살아갈 집을 마련하는 종래의 ‘복지’ 문제는 ‘금융’ 정책의 문제이자 ‘통화’ 정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족생활을 조정하고 규제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금융적 정동과 신자유주의 그리고 가족  더보기

기억_인터내셔널


Dziga Vertov, Kino-Eye, 1924

1. 지가 베르토프 Dziga Vertov 키노-아이 Kinoglaz/Kino Eye 1924

지가 베르토프는 선언했다.

“키노-아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명료하지 않은 것을 명료하게,
숨겨진 것을 명백히 밝히고,
위장된 것을 드러나도록,
연기된 것을 연기하지 않은 것으로,
즉 거짓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어떤 눈이기에?

기억_인터내셔널 더보기

세 편의 다큐멘터리

손영아, OVERSEAS, 2019.

올 해 본 다큐멘터리 가운데 세 편의 리뷰. Docking 매거진의 청탁을 받고 썼다.

해외 (Overseas)
감독 윤성아 (Sung-A Yoon)
제작년도 2019
키워드 이주, 이주노동, 세계화, 여성, 빈곤, 국가주의
주요내용 필리핀 해외 이주 엄마 노동자들의 노동의 페다고지(pedagogy)

<해외>는 필리핀의 이름 모를 어느 가사노동도우미의 훈련기관의 여성들을 좇는다. 필리핀은 세계 최대의 이주노동자 송출 국가이다. OFWs라는 약어로 지칭되는 이들을 가리키는 낱말은, ‘해외 필리핀 노동자(Overseas Filipino Workers)’이다. 정치지도자들은 이들을 곧잘 나라의 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들은 무엇보다 필리핀 경제의 영웅이다.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본국으로 송금하는 미국 달러는 필리핀 경제의 버팀목이자 필리핀 페소화의 가치를 유지하는 지렛대이다. 필리핀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압도적인 다수는 여성 그 가운데서도 양육과 돌봄에 있어 수완이 있다고 여겨지는 기혼여성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들과 생이별을 하고 자신을 고용한 이들의 갖은 수발을 든다. 가사노동도우미를 부르는 흔한 이름은 ‘메이드(maid)’이다. 공식적인 표현으로는 ‘헬퍼(helper)’. 감독은 이들이 다시 다음의 일자리를 얻기 위한 훈련의 과정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통해 현장에 없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노동과 차별을 상기하는 기억을 직조한다. 카메라는 훈련기관에서의 일과를 좇을 뿐이다. 그러나 청소와 빨래, 요리, 식사 시중, 유아 목욕과 노약자의 수발을 익히는 수업은 쿠웨이트, 오만, 두바이, 홍콩, 싱가포르라는 다른 노동현장에서의 차별과 모욕, 폭력들을 증언하는 자리가 된다. 인터뷰가 아닌 서로의 대화와 수업 속에서 오가는 대화들은 놀라운 리얼리즘을 끌어낸다. 이 작품은 불행이나 비참과 같은 윤리적인 시선에 의해 수척해진 삶의 내용을 거부하고 ‘노동 속의 삶’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마치 그들은 의식고양(consciousness-raising)을 위한 초기 여성주의의 대화의 실천을 여성노동자들의 세계 속에서 부활시키는 듯이 보인다. 삶의 세부들을 윤리적 정조를 운반하기 위한 배경으로 축소하는 근년의 다큐멘터리들에 지친 이들에겐 어쩌면 계시와도 같은 작품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세 편의 다큐멘터리 더보기

미술관은 금융시장인가?


Ana Roxanne ‎– ~​~​~ (2019)

#1

주름 장식을 달고 검은 모자를 쓴 자신을 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2020년 18,722,168 미국 달러에 판매되었다. 1970년 경매에 그것이 나왔을 때의 가격은 1,560 미국 달러였다. 약 1,2000배로 성장한 가격이자 매년 20.4% 가격이 인상된 것이다. 브라보!

그러니까 이 그림은 자산(asset)이 될 수 있다. 가격변동성이 있다면 자산이 될 수 있다. 또 가격 변동을 예측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자산이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미술은 자산 카테고리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포트폴리오에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서이든 자신의 자산 수익을 늘리기 위해서이든 예술 자산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자산 미술은 금융기관의 금고에 아니면 면세 창고에 보관된다. 그것은 투자자를 위한 미술이자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알리바이가 된 미술이며 탐욕의 추한 낯에 영원한 아름다움의 가면을 이식하는 성형요법이다.

미술관은 금융시장인가? 더보기

<문래지구>의 헤테로토피아적인 꿈의 안스러움


Bruce Springsteen – State Trooper

1.
<문래지구>는 장소특정성이란 개념과 공동체적 실천으로서의 미술이란 개념을 결합한 근년의 미술적 실천의 경향에 온전히 충실하고자 하는 전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문래동’이라는 쇠락한 혹은 소멸 중인 공장지대가 예술가들의 거주로 인해 재조명되고 또 관심을 끈 것도 제법 오랜 일이 되었다. 따라서 ‘문래’라는 ‘장소 명’은 장소특정적인 공동체 미술을 위한 소재이자 현장 자체로서 남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장소 – 이미 많은 이들이 비장소(non-place), 무장소, 장소상실(placeless-ness)에 대해 말하며 오늘날에는 장소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했음을 상기하자 – 가 여전히 실재한다고 역설하는 것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은 무언가를 놓치는 성급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사라진 세계에 대한 반발이자 장소를 회복하려는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깃든 의지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래지구>의 헤테로토피아적인 꿈의 안스러움 더보기

10권의 책


Bessie Smith – St. Louis Blues (1929)

  • 이런 허접한 글을 올려도 될 지 싶지만, <타이틀매치> 전시를 위해 내가 선별해 추천한 책들에 대한 간략한 선정의 변을 부탁받고 급하게 몇 줄 적었다.

1.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일 엮음, 책읽는오두막, 2013.

브레히트의 글은 일종의 암호 해독이다. 그의 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비밀이 숨은 곳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가장 명료한 말로 그것을 풀이한다. 사이비 예언가들이 넘쳐나는 오늘, 현재의 세계의 해부학자가 어느 때보다 요긴하다. 그 탓에 브레히트의 글은 더욱 긴급해진다.

10권의 책 더보기

외상기호증 Traumatophilia : 무빙-이미지의 (비)서사적 경로들에 관한 메모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I’ll Be Your Mirror”

묘사(description)의 지배란 결과일 뿐만 아니라 원인이며,
서사시의 의미성에서 그 후의 문학이 결별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산문이 내적인 인간 경험의 시를 지배하는 것, 사회적 삶의 계속적인 비인간화,
인간성의 일반적 타락,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객관적 사실들이다.
묘사의 방법은 이러한 발전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일단 확립된 이 방법은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찾기에 골몰하는 지도적인 작가들에게 선택되고, 다음에는 그 방법이 현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삶의 시적인 차원은 쇠퇴하게 되고, 문학은 그 쇠퇴를 격렬하게 만든다.”
루카치, 서사냐 묘사냐, <리얼리즘과 문학>, 최유찬 외 옮김, 지문사, 1985, 196쪽.

 

서사라는 것

그러니까 가짜 뉴스의 시대에 산다는 것은 온갖 이야기가 포화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사 과잉이라면, 한편 그것은 세계를 온전히 재현하는 서사가 희박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서사의 과잉과 과소 사이에서 요동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무엇이든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는 전에 없는 속도와 양으로 우리를 덮쳐누른다. 이른바 넷플릭스 Netflix나 왓차 Watcha같은 영화 플랫폼에 접속했을 때 순간적으로 아연함을 느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유튜브 Youtube에 접속했을 때 검색창에 무슨 단어를 쳐야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던 적도 숱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우리가 그것을 지금껏 알아오던 서사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미처 가늠할 겨를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어떤 장르인지조차 눈여겨볼 틈도 없이 오늘의 추천작과 같은 알고리즘적인 판단이 내게 투여하는, 이를 서사라 말할 수 없다면 그냥 흔히 하는 말대로 ‘콘텐츠’를, 게으르게 덥석 문다. 그렇지만 이를 미술관과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무빙이미지를 두고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말과 이미지와 사운드로 채워진 무빙이미지를 접한다. 그 많은 이미지와 사운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에 직접 답하기보다는 하나의 단서에서 출발해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이 글에서 서사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성의 아포리아 혹은 이율배반을 해결함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좌초하고 있는지 묻고자 한다. 그리고 순간 혹은 지금이라는 시간 없는 시간이 지배하게 될 때 어떻게 충격 혹은 외상의 경험만이 득세하게 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지의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어떻게 위기에 처하게 되는지, 짧게나마 사색해보고자 한다.

외상기호증 Traumatophilia : 무빙-이미지의 (비)서사적 경로들에 관한 메모 더보기

풍경과 경험

아다치 마사오 – 약칭 연속사살마

풍경과 진실

지난 수년간 마주하는 이미지마다 풍경이 도드라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심이 싹을 틔웠다. 그리고 그 의구는 나날이 곰팡이처럼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먼저 사진이 가장 두드러졌다. 버젓한 시사 잡지의 화보 면에서도 시위, 파업 장면을 담은 사진이나 정치가의 초상 사진만큼이나 같은 비중으로 풍경 이미지가 빽빽이 도열해 있었다. 왜 그럴까. 주변에 물어봤자 난감하다는 기색의 표정만 돌아왔다. 나는 풍경 사진의 난데없는 회귀가 어쩌면 사진이 그 자체 느낌을 만들어내는 질료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스스로 내려 보기도 했다. 비판적 사실주의의 사진으로부터 독특한 감각적 유물론으로 사진적 실천이 귀환하는 현상은 ‘사진-물질’ 혹은 ‘사진-객체(object)’에 주의하도록 촉구하는 작가들과 비평적 추세를 모르지 않던 터라 더욱 신경이 거슬렸을 것이다.

풍경과 경험 더보기

그들은 알겠는데,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STANDING ON THE CORNER – Angel (Life and Death of the Earth in the Key of F)

우리와 ‘그들’ 혹은 우리와 ‘당신들’

‘우리 대 그들’은 포퓰리즘의 정치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어구라 할 것이다. 포퓰리즘의 부상은 다분히 많은 이들이 기피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정치적인 징후이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내적인 한계를 폭로하는 징후로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다. 이를테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의 주장을 떠올려보자. 그는 지난 수십 년간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이론가이자 대표적인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로서 급진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란 독특한 가설을 주창한 바 있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2.
그의 급진민주주의론이란 정치적인 실천의 궁극적인 근거나 토대란 존재하지 않으며(이를테면 정치를 결정하는 토대로서의 생산양식이나 계급 같은 것을 주장하는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다양한 요구들의 헤게모니적인 접합 혹은 등가적인 연쇄를 통해 정치란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라클라우는 말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급진민주주의론을 포퓰리즘론으로 변형하고자 애썼다. 이는 헤게모니적인 접합의 논리를 통해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하였다. 다양한 요구들이 등가적 연쇄로 접합될 때, 즉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실업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적 위치에서 비롯된 요구들이 하나의 기표(예컨대 민주주의)로 응축될 때, 이는 항상 불가피하게 ‘우리 대 그들’이라는 주체성의 배치를 필연적으로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탓에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적 이성에 관하여이란 대담한 그의 마지막 주저에서 정치적 실천의 근본논리로서 포퓰리즘을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다. 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London & New York, Verso, 2007.
그는 모든 정치적인 이성의 기저에 이러한 포퓰리즘이 관통하고 있다고 보았던 셈이이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 마비되면서 나타나는 우연한 현상으로서 민주주의를 정상화하면 해소될 수 있다는 흔해빠진 생각과 포퓰리즘에 매료된 이들 사이의 생각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들은 알겠는데,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더보기

노엘 버치가 “생각했던” 에세이 영화

Sufjan Stevens – America

에세이 영화의 좌표

앨런 세큘라 Allan Sekula와 노엘 버치Noël Burch의 잊혀진 공간 The Forgotten Space(2010)이 공개되었을 때, 노엘 버치는 이 영화의 공식 사이트에 흥미로운 노트를 기고하였다. 노트의 제목은 “에세이영화”이다. 그는 그 글에서 에세이영화란 관념을 가장 먼저 고안했던 인물로 자처한다. (그러나 영화이론가들은 에세이영화란 용어를 발명한 최초의 인물로서의 역할을 수여할 인물로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를 꼽는다. 1940년 한스 리히터는 “영화 에세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새로운 형식(The Fim Essay: A New type of documentary film)”를 발표하였다. 이 글은 다음의 에세이영화 비평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 Nora M. Alter and Timothy Corrigan eds. Essays on the essay fil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7.)
그간 쏟아져 나온 많은 에세이영화에 관한 저작들 역시 에세이영화란 관념을 제안한 초기의 개척자 가운데 한 명으로 노엘 버치를 꼽는데 인색하지 않는다. (노엘 버치의 에세이 영화론이 에세이 영화를 선구하는 이론적 선언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은 에세이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보라. Elizabeth A. Papazian and Caroline Eades eds. The essay film: dialogue, politics, utopia, London & New York: Wallflower Press, 2016. Laura Rascaroli, How the Essay Film Think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Nora M. Alter, The essay film after fact and fict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Nora M. Alter and Timothy Corrigan eds. op. cit.)
영화이론가이자 감독으로서 또는 영화 교육자로서 그의 경력에 익숙한 이들에겐, 그와 세큘라의 공동 작업에 관해 일종의 비평적 주해를 추가한다고 해서 그를 엉뚱한 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잊혀진 공간을 에세이영화로 분류하려는 선제적인 조처라면 이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에세이 영화를 둘러싼 토론에 늘 따라붙는 다큐멘터리인가 에세이 영화인가란 성가신 논쟁을 다시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노엘 버치가 “생각했던” 에세이 영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