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닦으며 – 서문을 대신하여

Bon Iver – Naeem

반란자 내 아들이 눈 뜨면
다른 태양을 보게 할 거예요
– 에메 세제르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2015)은 반세기 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의 기억을 쫓는다. 그 기억을 쫓는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에 비친 슬픈 눈길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공산당이 있었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는 1965년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대학살이 있었다. 학살당하고 유배당한 이들은 공산당원들뿐 아니라 노조 활동가, 농민운동가, 비판적 지식인, 청년학생들이었다. 공산당 학살은 반둥회의에서 전환점을 맞이했던 인도네시아의 제3세계 프로젝트가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이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검안사(檢眼士) 아디 룩쿤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잔인하게 살해당한 형의 살해자들을 찾는다. 자신의 형, 람리의 살해 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웃음과 연극적인 몸짓으로 당시의 학살을 증언한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왜 이미 지나간 일들을 들추려고 하느냐고, 지나간 역사를 다시 말해 무엇 하냐고 아디에게 다그쳐 묻는다. 급기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고 역정을 낸다. 이 책은 바로 그를 하고자 한다. 문제를 일으키고 가능하다면 말썽을 일으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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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미술관 Museo de la Solidaridad, Museum of Solidarity (1971-1973)

Agnes Baltsa – To Treno Fevgi Stis Okto(The Train Leaves At Eigh)

칠레 산티아고 공화국 거리 475번지에는 귀환한 ‘살바도르 아옌데 연대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1991년, 세상을 떠돌던 ‘살바도르 아옌데 국제 저항 미술관’(1975-1990)이 드디어 칠레로 돌아온 것이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죽음 이후, 이 미술관은 칠레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표류하였다. 아옌데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20년째 되는 해, 이 미술관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되찾으며 부활하였다. 그것은 비엔날레나 마니페스타와 같은 전지구적인 미술 이벤트가 흥청대며 새로운 미술관들이 다투어 건설되던 하던 오늘의 풍경과 대조할 때 너무나 거리가 먼 미술관이었다. 이 미술관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가 만들어낸 ‘글로벌 컨템포러리(global contemporary)’ 미술이 상상하는 미술과는 전연 다른 미술을 상상하였다. 무엇보다 그 미술관은 미술관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국제주의적인 유토피아 미술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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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Salvador Allende (1908-1973)

Santiago Alvarez – Now! (1965)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일 파블로 네루다.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이렇게 기억한다. “방금 우리 민중은 사막의 초석 광산에서, 해저 석탄 광산에서, 험준한 고산 지대의 구리 광산에서 장엄한 해방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의 결과 아옌데라는 인물은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는 즉시 개혁을 단행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외국인의 손아귀에 들어간 국민의 자원을 환수하라는 뜻이었다. 먼 외국에서도 아옌데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경의를 표했고, 우리 정부의 특출한 다원성을 칭송했다. 뉴욕의 국제연합 본부가 창설된 이래, 세계 각국의 대표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은 사람도 없었다. 여기 칠레에서는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희생정신과 국민적 자부심과 주권이라는 기초 위 진정으로 올바른 사회를 건설하고 있었다. 헌법과 법률, 민주주의와 희망이, 우리 편 즉 칠레혁명의 편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불과 3년을 버티지 못했다. 미국의 CIA가 주동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는 칠레 혁명을 짓밟았다. 무엇보다 아옌데가 구리를 국유화한 것이 문제였다. 만약 이것이 다른 나라들이 따를 모범이 된다면 이는 미국은 물론 모든 발전된 국 식민국가에겐 악몽이 될 것이었다. 막대한 수입의 원천인 구리를 소유하고 있던 미국 기업들은 군부를 은밀히 지원했다. 칠레의 또 한 명의 대통령이었던 1백 년 전 발마세다 대통령이 영국이 차지한 질산염 광산을 국유화하려다 역시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던 일이 다시금 반복되었다. 네루다는 다시 이어 말한다. “불멸의 국민적 가치를 지니는 아옌데 정부의 정책과 업적은 칠레 해방을 원치 않는 적들의 분노를 샀으며, 그 비극적인 상징이 바로 대통령 궁 폭격으로 나타났다. … 칠레의 공군 조종사들은 180년 동안 민선 정부의 보금자리였던 대통령 궁에 급강하 공격을 퍼부었다.” 모두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에 실린 글이다. 이 겸손한 시인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향한 뜨거운 탄식을 토하며 자신의 자서전을 맺는다. 그의 자서전의 말미는 간략한 아옌데의 전기인 셈이다. 네루다는 아옌데가 숨을 거둔 후 얼마 뒤 같은 해에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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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한 기술 유토피아: 4차산업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

Project CyberSyn – Allende’s omniscience

빅데이터 사회주의?: 사이버신(Cybersyn)이라는 기술 유토피아의 꿈

1970년 영국의 인공지능 전문가인 스태포드 비어(Stafford Beer)가 산티아고의 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훗날 칠레인들의 회상에 의하면 산타클로스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풍성한 턱수염에 건장한 체구의 이 영국인은 칠레인에게 숨겨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그 선물이란 아직 많은 이들이 먼 나라의 낯선 말처럼 들리기만 하던 인공지능이란 것이었다. 칠레에서 급파된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그에게 칠레를 찾도록 요청했다. 인공지능 전문가이며 그것에 바탕해 경영 컨설팅을 하곤 했던 비어는 곧 아옌데의 새 정부를 위하여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어떤 이는 회한과 그리움의 탄식을 내뱉을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그는 전후 냉전체제에서 기적과도 같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고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와 가까웠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칠레의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였고 경제 계획 과정에서 노동자의 참여를 약속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기술적인 비책을 비어는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칠레에 도착하여 동료 과학자, 기술자들과 함께 열흘을 꼬박 칠레 경제를 조절하는 역할을 맡게 될 기술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아옌데를 만나게 된다. 1971년 11월 12일이었다.
비어는 대통령 아옌데와 독대하였다. 전직 칠레 해군장교 출신의 인물이 통역을 위해 함께 자리했을 뿐이다. 1950년대부터 경영 인공지능학(management cybernetics) 분야를 개척하고 활동했던 비어는,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운용할 것인지 대통령 아옌데에게 설명했다. 인공지능에 관한 한 오늘날 그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해박한 우리지만 아마 비어의 설명을 다시 듣는다면 전문 용어와 난해한 논리에, 우리 역시 쩔쩔 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비어는 인간 신경체계에 기반한 5층 구조의 실용 시스템 모델을 설명했고, 병리학자 출신의 대통령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그가 말하는 바를 금방 이해했다. 아니 이해한 듯 보였다. 그는 이따금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페인어로는 “신코(Synco)”, 영어로는 “사이버신(Cybersyn)”이란 이름이 붙게 될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게 될 대화는 계속 되었다. 사이버신은 인공지능을 가리키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시너지(synergy), 두 낱말에서 따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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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으로서의 정치: 미술이 정치와 상관하는 법

Bow Wow Wow – I Want Candy

1.
동시대 미술은 무정부주의적 직접민주주의와 오랜 동안 밀월 관계를 맺어왔다. 스스로 자신을 말해야 한다는 명령은, 참여, 협업, 대화, 소통, 공감 같은 윤리적 구호를 미술이 취해야 할 마땅한 정치적 좌표로 내세웠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 투명한, 자기중심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더불어 그것은 시간을 공간에 종속시킨다. 그 때 정치란 특정한 장소에 현전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 맺기로 축소된다. 그렇기에 자신이 경험하지 못할 미래를 바꾸는 일이자 자신이 겪어본 바가 없는 과거의 역사적 효과를 전복하는 것이 정치라는 관념은 맥을 못 춘다. 동시대미술이 짐작하는 정치란 현전적인 경험으로서의 공감과 동일시, 그리고 그러한 신체적 움직임을 서로 응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전시장이 자신의 의지와 의견을 투명하게 대표하고 반영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흩뿌린다. 미술관은 끊임없이 유사 무대 장치나 세트장 같은 장소로 자신을 변형하며 미술관이 민주주의적 경험의 장소라는 것을 과시하려 애쓰고 있다. 그 때문에 부쩍 자주 듣는 미술관은 민주적인가라는 물음은 실은 미술관의 정치를 은폐하려는 질문이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미술관은 자신을 가리는 숱한 가면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이벤트 공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미술관의 임시변통의 일시적 가장(假葬)은 정작 미술관이란 무엇인지 묻지 못하게 하는 눈속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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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 신식민주의, 탈식민주의 colonialism, neo-colonialism, post-colonialism, 植民主義, 新植民主義, Post植民主義

Beatrice Dillon ‘Sonnier (Walk in the Light)’

총독과 군대가 물러나자 사람들은 제3세계에서 식민주의란 것은 마침내 종료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유럽의 제국주의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마지막 위기에 직면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하였다. 먼저 식민주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저항이 끈질겨 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투쟁들은 그들의 싸움을 지지하는 구소련, 중국, 쿠바 등의 지원으로 인해 더욱 힘이 강해졌다. 그들은 더 이상 고립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기진맥진해진 상태였다. 따라서 자신이 지닌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할 여유가 없었다. 때마침 자신들이 지배하는 식민지 민중들로부터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월등한 힘을 가지고 과거의 제국주의 나라들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은 지난 시절에 만들어진 무역 블록이 자신들의 경제적 힘을 확장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겐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불필요할뿐더러 별반 이익을 주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 맹주는 과거의 제국주의를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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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제국주의 nuclear imperialism 核帝國主義

Gil Scott-Heron – New York Is Killing Me

1954년 3월 1일, 서태평양 비키니 환초 동쪽 167km 지점에 일본 참치잡이 어선 ‘제5 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가 떠 있었다. 고기잡이가 시작되기 전인 이른 아침이었다. 갑판에 나와 있던 서남은 명의 선원은 서편 멀리에서 작은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한참 뒤 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검은 재가 갑판에 쌓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선원들은 조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아이즈(燒津)로 향했다. 선원들은 구토와 두통을 호소하며 다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신도 카네토(新藤 兼人) 감독의 영화는 이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얼마 뒤 일본 수산청은 “미국이 비키니 환초에서 행한 수소폭탄 실험의 낙진이 이 배를 덮쳤다”고 발표했다. 미국도 책임을 인정했다. 실험현장에서 103km까지의 해역을 통제했지만, 풍속과 풍향이 돌연 바뀔 가능성까지는 내다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9월, 선원 한 명이 사망했다.

이들을 덮친 방사능 낙진은 비키니 환초에서 실행된 ‘캐슬 작전’의 일환으로서 15메가톤 급의 수소폭탄 폭발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핵폭탄의 끔찍한 위력에 고통을 겪은 바 있던 일본인들은 제5후쿠류마루 사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도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시민들의 청원이 모여졌다. 전국적으로 3천2백만 명이 서명에 참여했고 외국에서도 6억 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때마침 등장하고 있던 정치적 좌파와 노동운동 주도의 반핵운동이 가세하면서 이 움직임은 1955년 히로시마에서 국제 원자 및 수소 폭탄 반대 회의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대중들의 분노와는 상관없이 이미 일본은 ‘플로토늄 경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른바 1955년 체제라고 불리는 시대에 일본은 접어들고 있었다. 그해 자민당(自民党)이 창당된다. 그리고 같은 해 요미우리신문은 ‘평화를 위한 원자’라는 전시를 공동개최하고, 그해 12월에는 원자력 기본법이 통과되어 다음 해 1월 일본원력위원회(JAEC)가 설립된다. 위원회의 의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원자력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는 마츠모토 쇼리키(正力 松太郎)였다.

마츠모토 쇼리키는 전범용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구소련의 영향을 억제하기 위한 트루먼 행정부의 ‘진리를 위한 캠페인’을 위한 적역의 인물로 선택되었다. 미국 대사관과 중앙정보부 및 미공보국은 전시 체제에 활동했던 고위 관료들을 등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비밀경찰이나 생물학 및 핵무기 개발자들, 마피아 두목들이 미국이 관심이 둔 인물들이었다. 미국은 이들이 구소련의 영향을 차단하는 데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가운데 가장 적역은 쇼리키였다. 그는 전범으로 감옥에 있다 나온 후 요미우리 신문을 창간하고 일본텔레비전을 개국하는 것은 물론 프로 야구를 도입했다. 그는 일본 국민이 핵무기에 대해 품고 있던 반감과 원망을 잠재우고 평화적인 원자력 개발을 향한 길을 닦는 나팔수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에게 제5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 사태는 눈하나 꿈쩍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만주국을 이끌었던 역시 전범 출신의 정치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함께 자민당을 이끌어갔다. 자민당의 입장은 분명했다. 친핵, 친미였다. 그들은 ‘자유 아시아를 수호함으로써 공산주의를 억제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을 든든히 떠받쳐주었다. 기시는 중국의 인해전술에 맞서 국민을 지키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전술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은 이미 여러차례 중국에게 핵폭탄을 투하하겠다는 위협을 가한 바 있었고, 그럴 작정으로 이미 일본의 오키나와 기지에 TM-76 핵미사일을 비축해두었다. 이리하여 미국의 가장 큰 핵 의존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핵폭탄에 의해 초토화되며 패전을 경험한 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역전이었다.

1945년 이후 지구 행성의 대기, 땅, 해양 전체에서 자연방사선 수치가 급격히 증대했다. 급기야 소련과 미국은 1963년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무기 경쟁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내내 가속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핵우산 아래 놓인 나라들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핵 체제를 보완하는 무기급연료, 항공 수송 체계, 위성시스템을 위한 연료 등을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미국은 핵 억제를 위해 유엔이 주도했던 비핵지대 형성을 위한 다자간, 지역간 협약을 무시한 채 자신들에게 유용한 양자간 협약을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미국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핵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을 핑계로 핵무기를 향상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1955년 4월 24일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는 반둥회의를 결산하는 최종 성명(Final Communiqué)이 발표되었다. 모두 7개의 항목으로 이뤄진 성명의 주된 내용 가운데 두 개의 항목은 세계 평화와 협력의 진작 그리고 세계평화와 협력의 진작에 관한 선언으로 이뤄져 있었다. “핵무기 및 열핵무기의 생산, 실험 및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인류와 문명을 절멸의 공포와 염려로부터 구제하는 데 있어 절대적임”을 밝히고 이를 이룩하기 위한 “신속하고 단호한 노력들”이 행해져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열강들에게 핵무기와 관련된 일체의 실험을 중단하고 핵무기의 생산과 사용을 최종적으로 근절하는 목표로 나아가도록 촉구했다. 그리고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 실험, 사용 금지를 비롯해 일체의 군사력과 무기를 신속히 규제, 제한, 통제, 축소하도록 모든 당사국들에게 호소”했다. 이러한 반둥회의의 호소는 곧 결실을 맺었다.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가 창립된 것이다. 그러나 비동맹운동이 제안한 이러한 호소는 강대국들을 움직이는 데 실패했다. 반둥회의 참가국 가운데 하나였던 일본은 이미 보았듯이 은밀하게 평화적 핵 이용이라는 선전과 더불어 핵폭탄에 대해 품고 있던 자신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었다.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의 버섯구름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영국은 호주 남부 사막지대에서 잇단 핵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 때문에 마랄링가와 피짠짜짜라 지역의 원주민들은 영원히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러나 핵무기의 원료인 우라늄을 채굴하던 광산도 역시 위험하긴 매일반이었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우라늄 분열 과정에서 배출된 물질을 흡수했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이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될지 알고 있었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는 이러한 우라늄에 의한 방사능 물질의 위험도를 측정하는 일을 수행했다. 그들이 마련한 연간피폭선량(mSv/year)의 기준은 100에서 다시 50으로, 이후엔 다시 20으로 수정되었다. 그 사이에 이러한 안전 기준에 따라 숱한 우라늄 채굴과 핵 실험이 이뤄진 뒤였다. 그럼에도 장기간의 잠복기를 틈탄 채굴과 실험은 지속되어 왔다. 콩고와 나미비아와 같은 지역에서 농민들은 부유한 나라들의 핵에너지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우라늄 채굴을 위해 삶의 기반이 되는 농업을 포기해야 했다. 이들 나라의 광산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이끌어가는 자본과 직접 연결되고 또한 이로부터 이권을 얻으려는 군사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내전의 인질이 되어왔다. 비동맹운동도 제3세계프로젝트도 힘을 잃은 지금 우라늄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을 저주와도 같은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구해낼 길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된 미국의 군사기지와 시설들은 핵제국주의를 지켜주는 보루의 역할을 할 것이다.

민족경제론/민족문학론 民族經濟論/民族文學論

Grimes – Delete Forever

1970-80년대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을 가장 강렬하게 매혹시킨 담론은 ‘민족문학론’과 ‘민족경제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이론 혹은 입장은 공통적으로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어 민족을 내세웠다. 여기에서 민족은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이 내세우던 유구한 전통과 함께 자신의 얼을 간직한 종족적인 공동체로서의 민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세에 종속된 탓에 자신의 자립적이고 민주적인 발전을 저지당한 사회적, 경제적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외세에 결탁함으로써 사회의 발전을 꾀한 탓에 그에 유착해 자신의 권력을 가지게 된 소수의 반민족적인 세력과 그들로 인해 억압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대다수 민중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종속적인 발전이란, 발전하면 할수록 민족의 이해에 반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종속적 발전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다른 제3세계에 속한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질서에서 미국과 일본이 우호적으로 제공한 자본으로 인해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국제분업 체제로 인해 전무후무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신흥공업국으로 도약이 절정에 이르렀던 그 때인 1970년대에 민족문학론과 민족경제론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 두 이론은 암묵적으로 제3세계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데 적극 참여했다. 반둥회의에서 타전된 제3세계주의의 신호는 십 수 년이 지난 뒤 한국에 도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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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Third World 第三世界

Video Hasta siempre Che Guevara Song أغنية غيفارا مترجم عربي مع فيديو

“제3세계는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프로젝트였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그들은 무엇보다 인간적 존엄성을 그리고 삶의 필수재인 토지, 평화, 자유를 염원했다. 그들은 불만과 열망을 다양한 형태의 조직으로 모아냈고, 민족 지도자들은 이 조직들을 통해 요구사항을 수렴할 발판을 마련했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가나의 크와메 은크루마,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같은 지도자들은 20세기 중반의 10여년간 여러 회의에서 만났다. 반둥(1955), 아바나(1966) 등 여러 곳에서 만난 민족지도자들은 인민의 희망을 담아낼 사상과 일련의 기구를 만들어갔다. ‘제3세계’란 이러한 희망과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들을 아우르는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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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달러 Petrodollar

The Clash – Lost In The SuperMarket

석유는 제3세계 나라들에서 발견된 가장 수익성 높은 1차 산품이다. 흔히 소비사회라고 불리는 시대는 비록 선진적인 자본주의나라들의 몫이었지만 그것은 자동차와 플라스틱, 나일론 같은 석유화학제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바야흐로 ‘악마의 똥’이면서 ‘검은 황금’이기도 했던 석유의 시대가 소비사회의 시대였다. 얄궂게도 바로 이 석유는 제3세계라는 프로젝트의 운명을 쥘락펼락하는 마법의 힘을 발휘했다. 단지 그것은 석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많은 석유를 수입하고 소비하는 미국과 미국의 화폐인 달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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