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자본주의! 절대 물신주의!: 물신주의를 역사화하기

Hama – Terroir

“사물의 현상 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쓸데없게 될 것이다.”

“감각을 통해 우리가 접하게 되는 사실은 이미 이중으로 사회적 특성을 지니는 셈이다. 즉 지각되는 대상이 지니는 사회적 성격으로 인해서, 그리고 지각하는 기관(器官)의 역사적 성격을 통해 그러하다. … 개인이 스스로를 종속적이고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데 반해, 같은 개인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사회는 무의식적이고 그래서 비본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활동적인 주체인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존재에 있어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점은 이제까지 사회생활의 역사적인 형식을 특징지어 온 우월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 시민사회의 경제양식 속에서는 사회의 능동성은 맹목적이고 구체적이며, 개인의 능동성은 추상적이고 의식적이다.”

  1. 절대 자본주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날씨보다 인간의 의지대로 조작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길들이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장마철을 지날 때이다. 다가오는 태풍의 피해를 걱정하며 그에 대한 대비를 다그치는 기상예보관의 목소리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맹목적 힘을 알린다. 그런 점에서 끈질긴 외적인 힘으로서의 자연을 표상하는 것 가운데 날씨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이나 기상학자들 나아가 철학자나 사회이론가, 비평가들은 자연 가운데 가장 인간에 의해 크게 변형되고 조작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날씨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후 변화의 정치는 기후가 인간에게 외적으로 자율적인 대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변형된 것으로 표상된다. 기후 변화는 이제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두가 강박적이리만치 유의하는 주제가 되어왔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을 둘러싼 지난 수십 년간의 근심어린 토론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를 출범케 했고, 이를 통해 대기 중에 탄소를 비롯한 기온 상승을 유발하는 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한 다양한 권고와 대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를 제안했던 크뤼천(Paul Crutzen)이 그러한 것처럼, 지구공학자들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자연 조건의 변화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해결책으로 돈벌이에 나선다. 인류세는 재앙이지만 또한 새로운 사업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을 재수탈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를 위해 자연은 그 어느 때보다 물신화된다. 그것은 인간화된 자연을 역설하는 인류세 주창자들의 견해와 달리 보다 추상화되고 또 그만큼 더 객체화/대상화된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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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유토피아 – 안은미의 안무에 관하여

Trisha Brown in “Watermotor”, by Babette Mangolte (1978)

1.

나만 그런 걸까. 안은미의 공연을 보고 난 직후면 나는 여지없이 어디 숨어있다 자신이 있음을 기별하는 듯한 발작적으로 움찔대는 몸의 느낌에 찔끔 놀라곤 한다. 그것은 늘 비자발적인 리듬 속에 온순하게 작동하며 자신과 함께 하던 몸속에 마치 이물스런 다른 몸이 매복하여 있다 신호를 보내는 듯한 기분이다. 걷거나 하품하거나 의자를 당겨 앉거나 하는 외엔 가급적 몸을 의식하지도 자극한 적도 없는 게을러터진 내게 안은미의 공연은 그런 매복하고 있던 몸과 대면하게 한다. 그것은 현란한 브레이크 댄스를 보거나 힙합 무용을 보았을 때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무용은 시시각각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화려하고 매끈한 이미지들의 계열 속의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잘 난 이미지 한 조각에 그친다. 또한 이는 완벽한 포즈로 점프를 하며 우아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동작을 수시로 선보이는 <댄싱 나인>같은 케이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보곤 하던 일급 무용수의 춤을 보아선 좀체 상상할 수 없던 것이기도 하다. 섬세하거나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탁월했다고 안무가나 일급 무용수들이 촌평을 늘어놓는 동작을 보아도 나는 그것이 어쩐지 신파 같아 보이기만 하고 감정적 경험의 화석 같은 표본을 따분하게 전시하는 듯 보이기만 하다. 그것은 도식적인 감정의 구조를 나열하는 멜로드라마의 단편에 가깝다. 이는 몸의 탄성(彈性)과 완력을 명징하게 전시하는 스포츠 중계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축구 경기나 체조 경기를 보여주는 TV의 중계 프로그램은 이곳저곳에 빽빽이 보이지 않게 놓인 카메라의 눈을 통해 클로즈업되고 잊지 않고 곧 저속으로 출력되는 완벽한 동작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슬아슬하리만치 우아하게 진동하고 경련하는 몸의 이미지들을 전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익히 보아온 미적인 신체의 이미지들의 앨범 속으로 곧 처분되고 만다. 문득 무용이든 스포츠이든 거기에서의 몸이란 전시되는 몸, 이미지가 되어버린 몸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렇게 신통찮은 몸의 시각적 행렬 속에 안은미의 무용이 지닌 비범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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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롱맨(strongmen)의 척추해부학: 신자유주의와 남성성의 정치

    • Janelle Monáe – Q.U.E.E.N. feat. Erykah Badu

1. 여기,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여기에 세 명의 남자가 있다. 먼저 첫 번째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을 소설에서 부르는 대로 이부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는 임성순의 장편소설 자기개발의 정석의 주인공으로 중년의 기러기아빠이다. 그의 아내는 “당신도 알잖아. 이 나라엔 답이 없어”라며 아이와 함께 외국으로 떠난다. 이부장은 말문이 막힌 채 “답이 없는 곳에 자신은 왜 남겨두는지 궁금했지만 결국 아내 뜻에 따르기로”한 사내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아내와 아이를 보낸 후 만성 전립선염에 걸린 걸 알게 된 이부장이 뜻하지 않은 ‘자기개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발견한 자기개발이란 흔히들 ‘드라이 오르가슴’이라고 말하는 자가 성애적인(autoerotic) 쾌락이다. 이부장은 자신의 물건이 왜소하다고 느껴 언제나 주눅 들어 살던 그에게 처음 관계를 한 날 “내꺼 너무 작지 않아”라며 던진 물음에 “왜? 귀여운데. 난 좋아”란 답을 듣고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소심한 남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의 최대의 위기인 전립선염을 극복하는 여정에 진입한다.

“어떤 사정이 있다 해도 다 큰 어른이 다른 남자 앞에서 사정없이 사정하는 일은, 사정상 사정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해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용납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가 전립선염 진단을 듣고 “인생의 굴욕 1위에 빛나는 전립선 마사지”를 받은 뒤 스스로 되뇐 말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기생충, 혹은 에일리언의 알처럼” 보이는 ‘아네로스’라는 전립선 마사지 도구와 애증의 시간을 보낸 후 그것에 깊이 빠져든다. “그 동안 자신이 불행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아네로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리만치. 급기야 “아네로스를 사용하는 일은 그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닌 완벽히 여러분 자신을 위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족적인 행복 추구이자 완전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고 기염을 토하는 드라이 오르가슴 인터넷 동호회의 오프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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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과 제3세계 그리고 세계사: 68혁명을 역사화하는 하나의 시론


DN AIDIT -PKI(인도네시아공산당) 지도자에 대한 회고

1. 들어가며

“태국에서 공산주의에 가담하게 된 신참자들의 상당수는, 특히 1975-6년 이후에는, 태국 일류 대학 출신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마르크스주의의 일부는 문화혁명 중국과 베트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들은 또한 1960년대의 아이들로서 북유럽과 미국의 신좌파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그람시, 알튀세르, 프랑크푸르트학파도 역시 접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주 존 바에즈와 밥 딜런에게 열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 두 사람은 국제무대에 너무나 뒤늦게 도착했던 터라, 인도네시아의 합법적 공산당 당원들이 이들을 즐겼으리라 생각할 수 없다.”

(Anderson, 1998: 291)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아시아 제3세계 기획의 흥망성쇠를 온 몸으로 지켜본 이였을 것이다. 비록 그가 평생 연구한 지역은 동남아시아였지만 그것은 중소분쟁 이후 마오주의에서 개방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영향이 깊이 드리워진 보다 확장된 아시아이기도 하였다. 그는 수카르노의 교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와 ‘나사콤’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 운이 좋았더라면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공산당과 거의 같은 시기에 합법적 지배정당이 될 수 있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수하르토의 집권과 더불어 순식간에 궤멸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아직도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구 소련과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당원을 거느리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궤멸과 오늘날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의에 대한 인도네시아 동시대적 관점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삐삣, 2011)
그는 수하르토가 이끈 군사 쿠데타의 전말을 둘러싼 나름의 조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요약한 보고서를 발표한 연유로 인도네시아로부터 영구 입국 금지를 당한다. 그는 수하르토의 ‘신질서(New Order)’의 시대에, 다시는 인도네시아를 찾지 못할 운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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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잃은 세계의 기억 : 임흥순의 작업에 관한 메모

Damon & Naomi – Song to the Siren

사례로서의 임흥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영국의 철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는 제법 오랜 동안 철학의 무대에서 물러나 있던 관념, 역사철학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행했던 강의 노트와 이른 죽음으로 미처 출판되지 못한 원고를 모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 저작은 20세기 역사학을 뒷받침하는 기초적 관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더 이상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기억에 대한 적대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사변을 꼽자면 이런 것일지 모른다.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반성이다. 왜냐하면 반성이란 사고행동에 대한 사고이며 모든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그러한 사고라는 것을 이미 보아왔다. … 이 문제는 기억이나 지각에 대한 역사가 성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R. G. 콜링우드, 서양사학사: 역사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 김봉호 옮김, 탐구당, 2017, 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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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회과학: 사회성격논쟁과 마르크스주의

Four Tet – Planet

사회성격논쟁 ‘속’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성격논쟁 혹은 사회구성체논쟁으로 알려진 논쟁은 한국의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논쟁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라는 사회학, 정치학, 지리학 등의 사회과학 분야의 분과학문을 넘어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분야에 역시 큰 영향이 반향 되었던 ‘학술적인’ 사건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회상되곤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분단 이후 남한에서 거의 전례 없는 마르크스주의의 부활 또는 재기를 가리키는 사태로 기억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논쟁이 촉발된 시점의 일종의 시대착오성(anachronism)은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한국의 민주항쟁 이후 도래한 잇단 세계적 사태들, 중국 천안문사태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리고 ‘현실사회주의’란 이름으로 지칭되던 동구권의 잇단 몰락 혹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이나 쇠퇴를 예고하였다. 물론 19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형태로의 서구 자본주의의 전환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폄훼하고 나아가 악마시하는 과정을 통해 성사되었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와 그것에 관련된 사회주의 정치는 전례 없는 쇠퇴를 겪고 있던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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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


赵亮-上訪 Petition

踏遍靑山, 問計人民
청산을 다니며 인민에게 계책을 묻는다.

계시와도 같은 영화들

얼마 전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조망하는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19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사회참여적 독립 다큐멘터리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이 책의 저자인 댄 에드워즈(Dan Edwards)는, 서두에서 자신의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예기치 않은 계기를 술회한다. 그는 홍콩국제영화제의 프레스룸에서 작은 TV 화면으로 자오량(赵亮, Zhao Liang)의 다큐멘터리 작품 <고소(上访 Petition)>을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뇌리에서 떨치지 못했을 한 고통스러운 장면을, 그 역시 마주했던 순간을 전한다. 그가 보았던 장면은 어느 노구의 고소인들이 자신을 쫓는 이들을 피해 달아나다 기차에 치여 온 몸이 산산조각 난 후의 모습이다. 그의 사체를 수습하기 위해 주변의 고소인들은 철로를 누비고, 철로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그의 살점, 머리 조각을 찾아내다 결국 바닥에 뒹굴고 있던 손가락 하나를 주워든다. 몇 년간 중국 정부가 소유했던 월간 잡지에서 일하던 댄 에드워즈는 자신이 매일 북경의 거리를 오가며 감지했던 불편하고 음산한 느낌의 정체를 설명해주는 한 영화와 마주쳤다. 개혁과 개방 이후 무서운 기세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 그것도 수도인 북경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곧잘 맞닥뜨려야 했던 남루한 행색의 겉도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는 마치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소>는 번영하고 있는 표면의 현상 뒤앙에 놓인 중국 동시대적 상황의 숨겨진 구석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나의 중국 다큐멘터리 세계에 대한 열광과 몰두는 그 첫 상영을 통해 굳어졌다.” Dan Edwards, Independent Chinese Documentary: Alternative Visions, Alternative Public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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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


Billy Bragg – The Internationale

“사회적 긴장관계들의 저 건너편에서 존재론적인 즉자존재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한,
음악은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절규한다. 혁명은 죽었다! 혁명 만세!”

노래하지 않는 역사

1980년대 후반, 종로나 영등포의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생들은 시위에 참여할 이들을 부르는 구호를 외치고 곧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근처에서 딴전 피우듯 눈길을 던지던 이들은 노래를 이어 부르며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로 시작되는 <흔들리지 않게>이기 일쑤였다. 그 노래는 어쩌면 연행될지 모를 불안, 미리 누설된 정보로 들이닥칠 경찰에 대한 염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그 순간에도 계속되어야 할 투쟁에 대한 다짐을 전송하였다. 그것은 여기에 모인 그들의 노래였으며, 함께 할 미래의 누구와 함께 되는 하나를 예언하는 노래였으며, 놀라운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는 이들에게 투쟁을 간청하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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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James Brown – It’s a Man’s World(Paris 1967)

“그의 노동은 경험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밀봉 처리되어 있다.
즉 그의 노동에서 연습은 그 권리를 상실했다.
놀이공원에서 다양한 놀이기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은
비숙련공이 공장에서 받게 되는 기계적 훈련을 시험해 보는 것에 불과했다.
… 포의 텍스트는 야만성과 규율 사이의 진정한 상관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묘사하는 행인들은 마치 기계장치에 적응되어 단지 자동적으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의 행동은 충격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이다. ‘서로 부딪힐 경우 사람들은 자기를 밀친 상대방에게 깊숙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W.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 김영옥, 황현산 옮김, 길, 2010, 218쪽.(강조는 인용자)

1

심상찮은 일일까? 잘은 모르겠다. 2017년이라는 한 해는 한국에서 문학 저널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숨 가쁘게 바뀐 해이다. 어떤 역사적인 풍파에도 끄떡없던, 아니 아랑곳하지 않던 문학잡지들이 거듭나거나 변신을 꾀하는 시늉을 했다. 세계의 문학은 릿토르 Littor라는 격월간지로 변신하였고, 문학과사회는 재 창간에 가까운 혁신을 꾀하였고, 문학동네는 새로운 편집진을 꾸림으로써 이전과 다른 문학 저널로 변신하고자 했음을 기별하였으며, 창작과비평은 제3문학이라는 자매지를 창간함으로써 어쨌든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부응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문학잡지를 챙겨보는 일이 시들해진 내게도 이런 동정이 알려질 정도라면 문학 저널리즘에 가까이 있는 이들에겐 큰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신의 풍경은 대중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진 일이라 그것을 달리 복기하는 짓은 불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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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수상한 유물론들: ‘기분의 사회학’을 읽는다 (2)


In The Mood For Love. Song Yumeji’s theme

 

기분의 사회학 – 세계는 존재인가 아니면 객체인가

“여기서 내의 의도는 철학에서 인정받지 못한 유물론적 전통 하나가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마키아벨리, 홉스, (두 번째 <논고 Discours>인간불평등기원론의) 루소, 마르크스, 하이데거의 전통입니다. 그들이 주장해 온 공백(vide), 한계, 주변(marge: 여백), 중심의 부재, 중심의 주변으로의 전위(傳位)(또 그 반대), 그리고 자유라는 범주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것은 통상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것으로 돌려지던 유물론, 즉 합리주의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다시 말해 관념론의 위장된 형태인 저 유물론을 포함하여 유물론으로 인정받던 유물론들에까지 대립하는 마주침의 유물론, 우연성의 유물론, 요컨대 우발성의 유물론(matérialisme de l’aléatoire)입니다.” (L. 알튀세르)

나는 하이데거에게 먀르크스주의와 매우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소위 실용주의적 하이데거, 즉 도구, 그리고 작업과 생산의 하이데거지요.이것이 일상 삶의 현상학인데, 갖가지 역사적․철학적 이유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의 일부는 아니었어요.일상 삶의 현상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틀 전체 그 어디에서도 개발된 적이 없는 텅 빈 영역입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실용주의적 측면은 마르크스주의의 실천 개념을 위한 토대로서 매우 매력적인 것이 됩니다. 그와 같은 것이 다른 형태로 싸르트르에게도 존재했어요.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여기저기에 보이는 처음에는 행동적이며 나중에야 명상적이거나 인식론적이 되는 현존재(Dasein)에 대한 전체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의 틀에서도 매우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F. 제임슨)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경험, 인식하고 드러내는 일들이 심리학적이거나 혹은 감정 혹은 정동이란 렌즈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은 것이 그리 새삼스런 일은 아닐 것이다. 감정적, 정동적 전환이라고 으스대며 자신들의 주장이 그간의 ‘이론’을 대단히 혁신하는 듯 강변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경험하는 지배적 방식을 꽁무니에서 졸졸 쫓아다니는 것에 불과한 짓일지도 모른다. 물론 정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정색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를 빌려 대꾸하기로 하고, 일단 심리학적 개념이나 용어로 현실을 묘사하거나 밝히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심리적인 언어로 제시하고 병리화하며 진단하고 처방하는 일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에 사는 우리들이 겪어야 하는 저속한 관습 가운데 하나라는 것 역시 강조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를 따로 상세히 소개하는 일 자체가 불필요하리만치 우리는 이런 변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단지 지난 수십 년간 베스트셀러가 되어 온 책들이나 유행했던 어휘들이나 언어적 표현들을 되짚어보기만 해도 사정은 뻔히 짐작된다. 불안, 우울, 과잉행동장애, 정동장애 같은 말들이 우리 주변에서 개인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적시하며 버티고 있게 된 꼴은 신자유주의라는 체제가 갖는 특징을 요약한다. 그것은 스스로 사회적 불행을 개별화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을 서술하고 표현하는 언어를 개인을 위해 마련된 언어인 심리적 언어를 채택하도로 몰아부친다. ‘긍정의 심리학’이나 다중지성, 감성지능, 자기주도성, 자존감 같은 악취를 풍기는 심리적 개념은 과학인 듯 생색을 낸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학적이면 과학적이고 그것이 제시한 처방이 효험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이는 현실에 달라붙어 그것에 상응하고 타협하는 것이란 점을 입증해준다. 그리고 이 모두는 한 가지를 겨냥한다. 그것은 고립된 개인들에게 스스로 세상을 살피고 겪는 방식을 헤아리도록, 스스로를 더 현명하게 주조하도록 윽박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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