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한 기술 유토피아: 4차산업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

Project CyberSyn – Allende’s omniscience

빅데이터 사회주의?: 사이버신(Cybersyn)이라는 기술 유토피아의 꿈

1970년 영국의 인공지능 전문가인 스태포드 비어(Stafford Beer)가 산티아고의 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훗날 칠레인들의 회상에 의하면 산타클로스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풍성한 턱수염에 건장한 체구의 이 영국인은 칠레인에게 숨겨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그 선물이란 아직 많은 이들이 먼 나라의 낯선 말처럼 들리기만 하던 인공지능이란 것이었다. 칠레에서 급파된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그에게 칠레를 찾도록 요청했다. 인공지능 전문가이며 그것에 바탕해 경영 컨설팅을 하곤 했던 비어는 곧 아옌데의 새 정부를 위하여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어떤 이는 회한과 그리움의 탄식을 내뱉을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그는 전후 냉전체제에서 기적과도 같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고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와 가까웠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칠레의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였고 경제 계획 과정에서 노동자의 참여를 약속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기술적인 비책을 비어는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칠레에 도착하여 동료 과학자, 기술자들과 함께 열흘을 꼬박 칠레 경제를 조절하는 역할을 맡게 될 기술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아옌데를 만나게 된다. 1971년 11월 12일이었다.
비어는 대통령 아옌데와 독대하였다. 전직 칠레 해군장교 출신의 인물이 통역을 위해 함께 자리했을 뿐이다. 1950년대부터 경영 인공지능학(management cybernetics) 분야를 개척하고 활동했던 비어는,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운용할 것인지 대통령 아옌데에게 설명했다. 인공지능에 관한 한 오늘날 그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해박한 우리지만 아마 비어의 설명을 다시 듣는다면 전문 용어와 난해한 논리에, 우리 역시 쩔쩔 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비어는 인간 신경체계에 기반한 5층 구조의 실용 시스템 모델을 설명했고, 병리학자 출신의 대통령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그가 말하는 바를 금방 이해했다. 아니 이해한 듯 보였다. 그는 이따금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페인어로는 “신코(Synco)”, 영어로는 “사이버신(Cybersyn)”이란 이름이 붙게 될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게 될 대화는 계속 되었다. 사이버신은 인공지능을 가리키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시너지(synergy), 두 낱말에서 따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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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변증법의 시금석이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 신유물론

Destroyer – Cue Synthesizer

“구태의연한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연합적 인류 die vergesellschafttete Menschheit이다.”(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0)

  1. ‘인류세’ 이후의 유물론: 다시 엥겔스를 읽는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를 이해하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면 어떨까. 뉴런과 원자에서 행성과 인공지능에 이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합당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 기준을 충족할 때 온전한 마르크스주의가 될 수 있다면? 만일 이러한 요구가 터무니없고 지나친 것이라고 반발하며 마르크스주의란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사회관계의 비판에 불과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여야 하는 것일까.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만물의 유물론’을 구성한다고 강변한다면 이는 독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배격해야 마땅할까. 이러한 잇단 질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이론적 논쟁에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의 뒤꼍에서 마치 배음(背音)처럼 윙윙거렸던 어떤 질문(마르크스주의는 역사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한 것인가 아니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공식 ‘철학’과 무관한 역사유물론일 뿐인가)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이른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구(舊)소련의 공식마르크주의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로서 간주되어 왔다. 또한 이는 나아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를 비롯해 엥겔스의 저 악명 높은 ‘자연변증법’에 대한 고발과 거부를 둘러싼 오랜 쟁점과 관련되어 있다. 비록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친밀한 지적인 협력자로서 활동하였고, 엥겔스 자신의 지적 업적을 인정한다하더라고 마르크스의 사고와 엥겔스의 사고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널리 퍼져왔다. 물론 엥겔스의 지적 이력에서 가장 마르크스와 먼 것으로 지목된 것은 그의 자연변증법일 것이다. 그것은 나쁜 자연주의(naturalism)로 채색되어 있고 마르크스를 ‘만물의 유물론’을 고안한 인물로 오인되도록 한 모든 오해의 원천이었다.

모든 정신, 사고, 표상, 의식 등을 신경뉴런의 신경생물학적인 메커니즘의 작용 효과로 환원하는 인지주의(오늘날 성행하는 기계적 유물론의 주된 형태)나 인간의 사유 활동에 고유한 것을 자연에 투사하면서 자연에 어떤 일반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보편적 자연이라는 대상을 상정하는 자연주의(naturalism)을 선뜻 받아들이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외적 세계나 자연의 독자성을 손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은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것(푸코나 라클라우와 같은 담화적 유물론을 포함하여)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도 결국엔 뇌라는 물질의 활동에 불과하다는 식의 극단적인 인지주의나 생물학주의적 입장을 유물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이 이러한 유물론과 구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유물론인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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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반구의 비엔날레는 새로운 삼 대륙 예술 인터내셔널을 만들 수 있을까?

Victor Jara – Manifiesto

태풍이 온다

지난 해 그러니까 2018년 늦여름, 나는 소설가 최인훈의 부음을 듣고 잠시 망설였다. 그를 조문하러 간다는 것이, 터무니없지만은 않지만 너무 어색한 일이란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 탓에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겠다는 의지를 접어 버렸다. 하물며 그의 장례를 문인장으로 치른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문학과는 먼 자리에서 사는 처지에 불쑥 그의 마지막을 찾는다는 것이 뜬금없는 일이리란 망설임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를 찾고 싶었다. 한국에 사는 여느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최인훈의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가끔 다른 이유로 그의 소설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나는 또다시 그의 소설들로 회귀하였다. 그의 소설에서 나의 온 몸을 불붙게 하는 듯한 또 다른 충격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로 ‘비동맹운동’이었다. 그의 소설 속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낱말, 그러나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비동맹운동이었으리라고 확신했다. 마침 나는 비동맹운동이라는 프로젝트를 몇년간 추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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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자본주의! 절대 물신주의!: 물신주의를 역사화하기

Hama – Terroir

“사물의 현상 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쓸데없게 될 것이다.”

“감각을 통해 우리가 접하게 되는 사실은 이미 이중으로 사회적 특성을 지니는 셈이다. 즉 지각되는 대상이 지니는 사회적 성격으로 인해서, 그리고 지각하는 기관(器官)의 역사적 성격을 통해 그러하다. … 개인이 스스로를 종속적이고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데 반해, 같은 개인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사회는 무의식적이고 그래서 비본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활동적인 주체인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존재에 있어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점은 이제까지 사회생활의 역사적인 형식을 특징지어 온 우월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 시민사회의 경제양식 속에서는 사회의 능동성은 맹목적이고 구체적이며, 개인의 능동성은 추상적이고 의식적이다.”

  1. 절대 자본주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날씨보다 인간의 의지대로 조작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길들이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장마철을 지날 때이다. 다가오는 태풍의 피해를 걱정하며 그에 대한 대비를 다그치는 기상예보관의 목소리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맹목적 힘을 알린다. 그런 점에서 끈질긴 외적인 힘으로서의 자연을 표상하는 것 가운데 날씨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이나 기상학자들 나아가 철학자나 사회이론가, 비평가들은 자연 가운데 가장 인간에 의해 크게 변형되고 조작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날씨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후 변화의 정치는 기후가 인간에게 외적으로 자율적인 대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변형된 것으로 표상된다. 기후 변화는 이제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두가 강박적이리만치 유의하는 주제가 되어왔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을 둘러싼 지난 수십 년간의 근심어린 토론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를 출범케 했고, 이를 통해 대기 중에 탄소를 비롯한 기온 상승을 유발하는 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한 다양한 권고와 대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를 제안했던 크뤼천(Paul Crutzen)이 그러한 것처럼, 지구공학자들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자연 조건의 변화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해결책으로 돈벌이에 나선다. 인류세는 재앙이지만 또한 새로운 사업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을 재수탈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를 위해 자연은 그 어느 때보다 물신화된다. 그것은 인간화된 자연을 역설하는 인류세 주창자들의 견해와 달리 보다 추상화되고 또 그만큼 더 객체화/대상화된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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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유토피아 – 안은미의 안무에 관하여

Trisha Brown in “Watermotor”, by Babette Mangolte (1978)

1.

나만 그런 걸까. 안은미의 공연을 보고 난 직후면 나는 여지없이 어디 숨어있다 자신이 있음을 기별하는 듯한 발작적으로 움찔대는 몸의 느낌에 찔끔 놀라곤 한다. 그것은 늘 비자발적인 리듬 속에 온순하게 작동하며 자신과 함께 하던 몸속에 마치 이물스런 다른 몸이 매복하여 있다 신호를 보내는 듯한 기분이다. 걷거나 하품하거나 의자를 당겨 앉거나 하는 외엔 가급적 몸을 의식하지도 자극한 적도 없는 게을러터진 내게 안은미의 공연은 그런 매복하고 있던 몸과 대면하게 한다. 그것은 현란한 브레이크 댄스를 보거나 힙합 무용을 보았을 때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무용은 시시각각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화려하고 매끈한 이미지들의 계열 속의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잘 난 이미지 한 조각에 그친다. 또한 이는 완벽한 포즈로 점프를 하며 우아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동작을 수시로 선보이는 <댄싱 나인>같은 케이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보곤 하던 일급 무용수의 춤을 보아선 좀체 상상할 수 없던 것이기도 하다. 섬세하거나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탁월했다고 안무가나 일급 무용수들이 촌평을 늘어놓는 동작을 보아도 나는 그것이 어쩐지 신파 같아 보이기만 하고 감정적 경험의 화석 같은 표본을 따분하게 전시하는 듯 보이기만 하다. 그것은 도식적인 감정의 구조를 나열하는 멜로드라마의 단편에 가깝다. 이는 몸의 탄성(彈性)과 완력을 명징하게 전시하는 스포츠 중계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축구 경기나 체조 경기를 보여주는 TV의 중계 프로그램은 이곳저곳에 빽빽이 보이지 않게 놓인 카메라의 눈을 통해 클로즈업되고 잊지 않고 곧 저속으로 출력되는 완벽한 동작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슬아슬하리만치 우아하게 진동하고 경련하는 몸의 이미지들을 전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익히 보아온 미적인 신체의 이미지들의 앨범 속으로 곧 처분되고 만다. 문득 무용이든 스포츠이든 거기에서의 몸이란 전시되는 몸, 이미지가 되어버린 몸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렇게 신통찮은 몸의 시각적 행렬 속에 안은미의 무용이 지닌 비범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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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롱맨(strongmen)의 척추해부학: 신자유주의와 남성성의 정치

    • Janelle Monáe – Q.U.E.E.N. feat. Erykah Badu

1. 여기,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여기에 세 명의 남자가 있다. 먼저 첫 번째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을 소설에서 부르는 대로 이부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는 임성순의 장편소설 자기개발의 정석의 주인공으로 중년의 기러기아빠이다. 그의 아내는 “당신도 알잖아. 이 나라엔 답이 없어”라며 아이와 함께 외국으로 떠난다. 이부장은 말문이 막힌 채 “답이 없는 곳에 자신은 왜 남겨두는지 궁금했지만 결국 아내 뜻에 따르기로”한 사내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아내와 아이를 보낸 후 만성 전립선염에 걸린 걸 알게 된 이부장이 뜻하지 않은 ‘자기개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발견한 자기개발이란 흔히들 ‘드라이 오르가슴’이라고 말하는 자가 성애적인(autoerotic) 쾌락이다. 이부장은 자신의 물건이 왜소하다고 느껴 언제나 주눅 들어 살던 그에게 처음 관계를 한 날 “내꺼 너무 작지 않아”라며 던진 물음에 “왜? 귀여운데. 난 좋아”란 답을 듣고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소심한 남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의 최대의 위기인 전립선염을 극복하는 여정에 진입한다.

“어떤 사정이 있다 해도 다 큰 어른이 다른 남자 앞에서 사정없이 사정하는 일은, 사정상 사정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해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용납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가 전립선염 진단을 듣고 “인생의 굴욕 1위에 빛나는 전립선 마사지”를 받은 뒤 스스로 되뇐 말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기생충, 혹은 에일리언의 알처럼” 보이는 ‘아네로스’라는 전립선 마사지 도구와 애증의 시간을 보낸 후 그것에 깊이 빠져든다. “그 동안 자신이 불행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아네로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리만치. 급기야 “아네로스를 사용하는 일은 그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닌 완벽히 여러분 자신을 위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족적인 행복 추구이자 완전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고 기염을 토하는 드라이 오르가슴 인터넷 동호회의 오프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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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과 제3세계 그리고 세계사: 68혁명을 역사화하는 하나의 시론


DN AIDIT -PKI(인도네시아공산당) 지도자에 대한 회고

1. 들어가며

“태국에서 공산주의에 가담하게 된 신참자들의 상당수는, 특히 1975-6년 이후에는, 태국 일류 대학 출신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마르크스주의의 일부는 문화혁명 중국과 베트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들은 또한 1960년대의 아이들로서 북유럽과 미국의 신좌파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그람시, 알튀세르, 프랑크푸르트학파도 역시 접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주 존 바에즈와 밥 딜런에게 열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 두 사람은 국제무대에 너무나 뒤늦게 도착했던 터라, 인도네시아의 합법적 공산당 당원들이 이들을 즐겼으리라 생각할 수 없다.”

(Anderson, 1998: 291)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아시아 제3세계 기획의 흥망성쇠를 온 몸으로 지켜본 이였을 것이다. 비록 그가 평생 연구한 지역은 동남아시아였지만 그것은 중소분쟁 이후 마오주의에서 개방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영향이 깊이 드리워진 보다 확장된 아시아이기도 하였다. 그는 수카르노의 교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와 ‘나사콤’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 운이 좋았더라면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공산당과 거의 같은 시기에 합법적 지배정당이 될 수 있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수하르토의 집권과 더불어 순식간에 궤멸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아직도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구 소련과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당원을 거느리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궤멸과 오늘날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의에 대한 인도네시아 동시대적 관점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삐삣, 2011)
그는 수하르토가 이끈 군사 쿠데타의 전말을 둘러싼 나름의 조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요약한 보고서를 발표한 연유로 인도네시아로부터 영구 입국 금지를 당한다. 그는 수하르토의 ‘신질서(New Order)’의 시대에, 다시는 인도네시아를 찾지 못할 운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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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잃은 세계의 기억 : 임흥순의 작업에 관한 메모

Damon & Naomi – Song to the Siren

사례로서의 임흥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영국의 철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는 제법 오랜 동안 철학의 무대에서 물러나 있던 관념, 역사철학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행했던 강의 노트와 이른 죽음으로 미처 출판되지 못한 원고를 모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 저작은 20세기 역사학을 뒷받침하는 기초적 관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더 이상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기억에 대한 적대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사변을 꼽자면 이런 것일지 모른다.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반성이다. 왜냐하면 반성이란 사고행동에 대한 사고이며 모든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그러한 사고라는 것을 이미 보아왔다. … 이 문제는 기억이나 지각에 대한 역사가 성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R. G. 콜링우드, 서양사학사: 역사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 김봉호 옮김, 탐구당, 2017, 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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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회과학: 사회성격논쟁과 마르크스주의

Four Tet – Planet

사회성격논쟁 ‘속’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성격논쟁 혹은 사회구성체논쟁으로 알려진 논쟁은 한국의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논쟁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라는 사회학, 정치학, 지리학 등의 사회과학 분야의 분과학문을 넘어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분야에 역시 큰 영향이 반향 되었던 ‘학술적인’ 사건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회상되곤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분단 이후 남한에서 거의 전례 없는 마르크스주의의 부활 또는 재기를 가리키는 사태로 기억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논쟁이 촉발된 시점의 일종의 시대착오성(anachronism)은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 한국의 민주항쟁 이후 도래한 잇단 세계적 사태들, 중국 천안문사태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리고 ‘현실사회주의’란 이름으로 지칭되던 동구권의 잇단 몰락 혹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이나 쇠퇴를 예고하였다. 물론 197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형태로의 서구 자본주의의 전환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폄훼하고 나아가 악마시하는 과정을 통해 성사되었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와 그것에 관련된 사회주의 정치는 전례 없는 쇠퇴를 겪고 있던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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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


赵亮-上訪 Petition

踏遍靑山, 問計人民
청산을 다니며 인민에게 계책을 묻는다.

계시와도 같은 영화들

얼마 전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조망하는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19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사회참여적 독립 다큐멘터리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이 책의 저자인 댄 에드워즈(Dan Edwards)는, 서두에서 자신의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예기치 않은 계기를 술회한다. 그는 홍콩국제영화제의 프레스룸에서 작은 TV 화면으로 자오량(赵亮, Zhao Liang)의 다큐멘터리 작품 <고소(上访 Petition)>을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뇌리에서 떨치지 못했을 한 고통스러운 장면을, 그 역시 마주했던 순간을 전한다. 그가 보았던 장면은 어느 노구의 고소인들이 자신을 쫓는 이들을 피해 달아나다 기차에 치여 온 몸이 산산조각 난 후의 모습이다. 그의 사체를 수습하기 위해 주변의 고소인들은 철로를 누비고, 철로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그의 살점, 머리 조각을 찾아내다 결국 바닥에 뒹굴고 있던 손가락 하나를 주워든다. 몇 년간 중국 정부가 소유했던 월간 잡지에서 일하던 댄 에드워즈는 자신이 매일 북경의 거리를 오가며 감지했던 불편하고 음산한 느낌의 정체를 설명해주는 한 영화와 마주쳤다. 개혁과 개방 이후 무서운 기세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 그것도 수도인 북경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곧잘 맞닥뜨려야 했던 남루한 행색의 겉도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는 마치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소>는 번영하고 있는 표면의 현상 뒤앙에 놓인 중국 동시대적 상황의 숨겨진 구석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나의 중국 다큐멘터리 세계에 대한 열광과 몰두는 그 첫 상영을 통해 굳어졌다.” Dan Edwards, Independent Chinese Documentary: Alternative Visions, Alternative Public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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