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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 Cooke – Blowing in the Wind

일본의 하위문화의 속사정에 밝은이들이라면 훤히 알 이야기에서 출발해 보자. 일본에선 ‘제로연대’를 전후해 새로운 하위문화의 부족이 출현(더불어 해체)했다고 일컬어지곤 한다. 이는 저 유명한 전설적인 오타쿠의 자기 배반과 관련이 있다. 일본 문화평론가들의 말을 쫓자면, 오타쿠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몰두하면서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꿈을 보전했던 이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전공투의 기괴한 자멸적인 파산을 끝으로 유토피아적인 꿈이 소멸한 뒤에도 음습한 자기만의 세계에서 암약하며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꿈을 지속시켰던 이들이었다고 평해진다. 그러나 이런 오타쿠들은 ‘제로연대’, 긴 불황의 시대를 지나며 맞이한 새 천년에는 더 이상 꿈을 지속시키지 못한다. 그러면서 등장한 새로운 하위문화의 흐름이 세카이계(せかい系)와 일상계(日常系)이다. 세카이계는 이름과 달리 세계가 없는 세계에서의 삶을 가리킨다. 세카이계란 “세계의 문제를 자의식의 문제로 왜소화시킨다”는 것을 가리킨다. 세카이계, 그들에겐 세계가 없거나 있다면 그것은 나와 너만 있는 세계이다. 일상계는 세카이계가 더욱 숙성한 것이자 동시에 세카이계의 감수성에 대한 자기패러디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비사회의 끝나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난 다른 세계를 원하는 주인공들이 초능력자, 우주인, 미래인 등과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실은 변함없이 일상을 즐기기 위한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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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변증법: 한국전쟁을 아시아화하기

Power To The People –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

나는 한국전쟁이 벌어진지 15년도 훌쩍 지난해에 태어났다. 전흔은 거의 모두 사라지고 없었을 무렵이었으리라. 그런데도 어린 소년이었던 내게 또렷이 기억에 남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의수나 의족을 팔던 상점들의 정경이었다. 그 상점들은 시청 근처 관상대를 오르는 언덕 옆에 자리했던 원호처 옆에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그 상점의 진열창 안에는 먼지를 뒤집어 쓴 목발이나 기괴한 분홍빛이 감도는 살색의 의족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오랜 동안 닦지도 손을 보지 않아 거무튀튀한 갈색으로 변해버린 의수(義手)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나는 가지런히 정렬된 다른 길이의 그 플라스틱 손가락들을 오랜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비명과 포연, 고통으로 일그러진 무시무시한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나는 그 손가락들이 언젠가 벌어졌던 불길한 재앙을 가리키는 손짓처럼 보였던 싶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강원도 북쪽의 작은 소도시였다. 그곳에서 한국전쟁은 언제나 음산한 안개처럼 머물고 있었다. 시내의 유명한 내과병원의 원장이 대한항공 납치사건으로 북으로 갔다거나, 남대천 건너 개량주택 마을에 살던 누군가가 이불 아래에서 단파라디오를 듣다 간첩으로 끌려갔다거나, 동네 끝 시장 어귀에 늘 얼씬대던 미친 거지는 실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너무 똑똑해 빨갱이가 되었다가 곤욕을 치르곤 저렇게 실성하곤 말았다거나 하는 소문 또는 괴담이 늘 먼지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정작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 속에는 없었다. 경포대 옆에 있던 충혼탑으로 이끌려가 억지춘향으로 묵념을 할 때에나 한국전쟁은 공식적으로 세상 속으로 등장했다. 반공웅변대회나 무장공비 사건 같은 것이 터지면 곧잘 공설운동장에서 열리곤 했던 궐기대회 같은 곳에서, 6.25는 미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다. ‘잊지 말자 6.25’라고 외치곤 했지만, 잊지 않아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는 요령부득이었다. 그 즈음 인기 있던 TV 드라마인 <전우>에서 보던 그 전쟁의 풍경을 통해서는, 도무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그저 악(惡)이거나 적(敵)이기라는 추상적인 호명을 통해 집요하게 상기될 뿐, 구체적인 원망과 적의를 동원하기가 난감하기만 것이었던 ‘북’이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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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추상적) 부정의 노동 – 서평주 <괴상한 춤> 전시에 관하여

Duke Ellington & John Coltrane – In a sentimental mood


브레히트는 뚱한 어조로 독일의 산업자본을 상징하던 아에게(AEG)나 크루프(Krupp)의 공장 사진을 두고 훈계조의 이야기를 던진 적이 있다. 브레히트 가로되, 그런 사진들은 공장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루프 공장이나 아에게 공장 사진은 이 회사들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드러내주지 못한다. 현실은 기능적인 것의 영역 속으로 미끄러져 버린다. 이를테면 인간관계의 물화 즉 공장은, 그런 관계들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구성해야 할 무엇’, ‘인위적이고’, ‘고안되어야 할’ 무엇이 있다.”(B. Brecht, Brecht on Film and Radio, London: Methuen drama, 2000, pp. 164-5. 여기에서 브레히트가 말하는 추가되어야 할 무엇은 물론 ‘예술’을 가리킨다. 그는 영화의 불완전한 재현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예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화가 예술을 만나 예술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영화의 자연적 재현은 언제나 자신이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뜻에서 예술이라는 추가적인 조처를 통해 그러한 재현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브레히트 식의 생각은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에 등장하는 주식거래소를 두고 “주식거래소는 단지 주식거래소가 아니라 수천 개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이젠슈테인의 발언을 참조하여 볼 수도 있다. S. 에이젠슈테인, <자본>에 대한 노트, 김수환,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  이때 브레히트는 사진적 리얼리즘에 대하여 퉁명스럽게 타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때문이다. 자본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혹은 자본이라는 ‘현실적인 추상(real abstraction)’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현실적 추상 혹은 실제 추상이라고도 옮겨지곤 하는 것에 대한 획기적인 논고로는 다음의 저작을 참조하라. 알프레드 존-레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황태연․윤길순 옮김, 학민사, 1986.) 나아가 사이비구체(성)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는 비판적 구체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이런 물음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리고 이는 굳이 마르크스주의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예술적 실천에 참여하는 이들에겐 달아날 수 없는 쟁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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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닦으며 – 서문을 대신하여

Bon Iver – Naeem

반란자 내 아들이 눈 뜨면
다른 태양을 보게 할 거예요
– 에메 세제르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2015)은 반세기 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의 기억을 쫓는다. 그 기억을 쫓는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에 비친 슬픈 눈길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공산당이 있었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는 1965년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대학살이 있었다. 학살당하고 유배당한 이들은 공산당원들뿐 아니라 노조 활동가, 농민운동가, 비판적 지식인, 청년학생들이었다. 공산당 학살은 반둥회의에서 전환점을 맞이했던 인도네시아의 제3세계 프로젝트가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이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검안사(檢眼士) 아디 룩쿤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잔인하게 살해당한 형의 살해자들을 찾는다. 자신의 형, 람리의 살해 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웃음과 연극적인 몸짓으로 당시의 학살을 증언한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왜 이미 지나간 일들을 들추려고 하느냐고, 지나간 역사를 다시 말해 무엇 하냐고 아디에게 다그쳐 묻는다. 급기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고 역정을 낸다. 이 책은 바로 그를 하고자 한다. 문제를 일으키고 가능하다면 말썽을 일으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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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미술관 Museo de la Solidaridad, Museum of Solidarity (1971-1973)

Agnes Baltsa – To Treno Fevgi Stis Okto(The Train Leaves At Eigh)

칠레 산티아고 공화국 거리 475번지에는 귀환한 ‘살바도르 아옌데 연대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1991년, 세상을 떠돌던 ‘살바도르 아옌데 국제 저항 미술관’(1975-1990)이 드디어 칠레로 돌아온 것이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죽음 이후, 이 미술관은 칠레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표류하였다. 아옌데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20년째 되는 해, 이 미술관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되찾으며 부활하였다. 그것은 비엔날레나 마니페스타와 같은 전지구적인 미술 이벤트가 흥청대며 새로운 미술관들이 다투어 건설되던 하던 오늘의 풍경과 대조할 때 너무나 거리가 먼 미술관이었다. 이 미술관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가 만들어낸 ‘글로벌 컨템포러리(global contemporary)’ 미술이 상상하는 미술과는 전연 다른 미술을 상상하였다. 무엇보다 그 미술관은 미술관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국제주의적인 유토피아 미술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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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Salvador Allende (1908-1973)

Santiago Alvarez – Now! (1965)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일 파블로 네루다.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이렇게 기억한다. “방금 우리 민중은 사막의 초석 광산에서, 해저 석탄 광산에서, 험준한 고산 지대의 구리 광산에서 장엄한 해방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의 결과 아옌데라는 인물은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는 즉시 개혁을 단행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외국인의 손아귀에 들어간 국민의 자원을 환수하라는 뜻이었다. 먼 외국에서도 아옌데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경의를 표했고, 우리 정부의 특출한 다원성을 칭송했다. 뉴욕의 국제연합 본부가 창설된 이래, 세계 각국의 대표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은 사람도 없었다. 여기 칠레에서는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희생정신과 국민적 자부심과 주권이라는 기초 위 진정으로 올바른 사회를 건설하고 있었다. 헌법과 법률, 민주주의와 희망이, 우리 편 즉 칠레혁명의 편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불과 3년을 버티지 못했다. 미국의 CIA가 주동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는 칠레 혁명을 짓밟았다. 무엇보다 아옌데가 구리를 국유화한 것이 문제였다. 만약 이것이 다른 나라들이 따를 모범이 된다면 이는 미국은 물론 모든 발전된 국 식민국가에겐 악몽이 될 것이었다. 막대한 수입의 원천인 구리를 소유하고 있던 미국 기업들은 군부를 은밀히 지원했다. 칠레의 또 한 명의 대통령이었던 1백 년 전 발마세다 대통령이 영국이 차지한 질산염 광산을 국유화하려다 역시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던 일이 다시금 반복되었다. 네루다는 다시 이어 말한다. “불멸의 국민적 가치를 지니는 아옌데 정부의 정책과 업적은 칠레 해방을 원치 않는 적들의 분노를 샀으며, 그 비극적인 상징이 바로 대통령 궁 폭격으로 나타났다. … 칠레의 공군 조종사들은 180년 동안 민선 정부의 보금자리였던 대통령 궁에 급강하 공격을 퍼부었다.” 모두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에 실린 글이다. 이 겸손한 시인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향한 뜨거운 탄식을 토하며 자신의 자서전을 맺는다. 그의 자서전의 말미는 간략한 아옌데의 전기인 셈이다. 네루다는 아옌데가 숨을 거둔 후 얼마 뒤 같은 해에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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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으로서의 정치: 미술이 정치와 상관하는 법

Bow Wow Wow – I Want Candy

1.
동시대 미술은 무정부주의적 직접민주주의와 오랜 동안 밀월 관계를 맺어왔다. 스스로 자신을 말해야 한다는 명령은, 참여, 협업, 대화, 소통, 공감 같은 윤리적 구호를 미술이 취해야 할 마땅한 정치적 좌표로 내세웠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 투명한, 자기중심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더불어 그것은 시간을 공간에 종속시킨다. 그 때 정치란 특정한 장소에 현전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 맺기로 축소된다. 그렇기에 자신이 경험하지 못할 미래를 바꾸는 일이자 자신이 겪어본 바가 없는 과거의 역사적 효과를 전복하는 것이 정치라는 관념은 맥을 못 춘다. 동시대미술이 짐작하는 정치란 현전적인 경험으로서의 공감과 동일시, 그리고 그러한 신체적 움직임을 서로 응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전시장이 자신의 의지와 의견을 투명하게 대표하고 반영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흩뿌린다. 미술관은 끊임없이 유사 무대 장치나 세트장 같은 장소로 자신을 변형하며 미술관이 민주주의적 경험의 장소라는 것을 과시하려 애쓰고 있다. 그 때문에 부쩍 자주 듣는 미술관은 민주적인가라는 물음은 실은 미술관의 정치를 은폐하려는 질문이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미술관은 자신을 가리는 숱한 가면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이벤트 공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미술관의 임시변통의 일시적 가장(假葬)은 정작 미술관이란 무엇인지 묻지 못하게 하는 눈속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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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 신식민주의, 탈식민주의 colonialism, neo-colonialism, post-colonialism, 植民主義, 新植民主義, Post植民主義

Beatrice Dillon ‘Sonnier (Walk in the Light)’

총독과 군대가 물러나자 사람들은 제3세계에서 식민주의란 것은 마침내 종료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유럽의 제국주의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마지막 위기에 직면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하였다. 먼저 식민주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저항이 끈질겨 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투쟁들은 그들의 싸움을 지지하는 구소련, 중국, 쿠바 등의 지원으로 인해 더욱 힘이 강해졌다. 그들은 더 이상 고립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기진맥진해진 상태였다. 따라서 자신이 지닌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할 여유가 없었다. 때마침 자신들이 지배하는 식민지 민중들로부터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월등한 힘을 가지고 과거의 제국주의 나라들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은 지난 시절에 만들어진 무역 블록이 자신들의 경제적 힘을 확장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겐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불필요할뿐더러 별반 이익을 주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 맹주는 과거의 제국주의를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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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제국주의 nuclear imperialism 核帝國主義

Gil Scott-Heron – New York Is Killing Me

1954년 3월 1일, 서태평양 비키니 환초 동쪽 167km 지점에 일본 참치잡이 어선 ‘제5 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가 떠 있었다. 고기잡이가 시작되기 전인 이른 아침이었다. 갑판에 나와 있던 서남은 명의 선원은 서편 멀리에서 작은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한참 뒤 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검은 재가 갑판에 쌓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선원들은 조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아이즈(燒津)로 향했다. 선원들은 구토와 두통을 호소하며 다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신도 카네토(新藤 兼人) 감독의 영화는 이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얼마 뒤 일본 수산청은 “미국이 비키니 환초에서 행한 수소폭탄 실험의 낙진이 이 배를 덮쳤다”고 발표했다. 미국도 책임을 인정했다. 실험현장에서 103km까지의 해역을 통제했지만, 풍속과 풍향이 돌연 바뀔 가능성까지는 내다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9월, 선원 한 명이 사망했다.

이들을 덮친 방사능 낙진은 비키니 환초에서 실행된 ‘캐슬 작전’의 일환으로서 15메가톤 급의 수소폭탄 폭발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핵폭탄의 끔찍한 위력에 고통을 겪은 바 있던 일본인들은 제5후쿠류마루 사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도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시민들의 청원이 모여졌다. 전국적으로 3천2백만 명이 서명에 참여했고 외국에서도 6억 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때마침 등장하고 있던 정치적 좌파와 노동운동 주도의 반핵운동이 가세하면서 이 움직임은 1955년 히로시마에서 국제 원자 및 수소 폭탄 반대 회의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대중들의 분노와는 상관없이 이미 일본은 ‘플로토늄 경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른바 1955년 체제라고 불리는 시대에 일본은 접어들고 있었다. 그해 자민당(自民党)이 창당된다. 그리고 같은 해 요미우리신문은 ‘평화를 위한 원자’라는 전시를 공동개최하고, 그해 12월에는 원자력 기본법이 통과되어 다음 해 1월 일본원력위원회(JAEC)가 설립된다. 위원회의 의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원자력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는 마츠모토 쇼리키(正力 松太郎)였다.

마츠모토 쇼리키는 전범용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구소련의 영향을 억제하기 위한 트루먼 행정부의 ‘진리를 위한 캠페인’을 위한 적역의 인물로 선택되었다. 미국 대사관과 중앙정보부 및 미공보국은 전시 체제에 활동했던 고위 관료들을 등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비밀경찰이나 생물학 및 핵무기 개발자들, 마피아 두목들이 미국이 관심이 둔 인물들이었다. 미국은 이들이 구소련의 영향을 차단하는 데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가운데 가장 적역은 쇼리키였다. 그는 전범으로 감옥에 있다 나온 후 요미우리 신문을 창간하고 일본텔레비전을 개국하는 것은 물론 프로 야구를 도입했다. 그는 일본 국민이 핵무기에 대해 품고 있던 반감과 원망을 잠재우고 평화적인 원자력 개발을 향한 길을 닦는 나팔수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에게 제5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 사태는 눈하나 꿈쩍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만주국을 이끌었던 역시 전범 출신의 정치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함께 자민당을 이끌어갔다. 자민당의 입장은 분명했다. 친핵, 친미였다. 그들은 ‘자유 아시아를 수호함으로써 공산주의를 억제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을 든든히 떠받쳐주었다. 기시는 중국의 인해전술에 맞서 국민을 지키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전술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은 이미 여러차례 중국에게 핵폭탄을 투하하겠다는 위협을 가한 바 있었고, 그럴 작정으로 이미 일본의 오키나와 기지에 TM-76 핵미사일을 비축해두었다. 이리하여 미국의 가장 큰 핵 의존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핵폭탄에 의해 초토화되며 패전을 경험한 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역전이었다.

1945년 이후 지구 행성의 대기, 땅, 해양 전체에서 자연방사선 수치가 급격히 증대했다. 급기야 소련과 미국은 1963년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무기 경쟁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내내 가속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핵우산 아래 놓인 나라들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핵 체제를 보완하는 무기급연료, 항공 수송 체계, 위성시스템을 위한 연료 등을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미국은 핵 억제를 위해 유엔이 주도했던 비핵지대 형성을 위한 다자간, 지역간 협약을 무시한 채 자신들에게 유용한 양자간 협약을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미국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핵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을 핑계로 핵무기를 향상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1955년 4월 24일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는 반둥회의를 결산하는 최종 성명(Final Communiqué)이 발표되었다. 모두 7개의 항목으로 이뤄진 성명의 주된 내용 가운데 두 개의 항목은 세계 평화와 협력의 진작 그리고 세계평화와 협력의 진작에 관한 선언으로 이뤄져 있었다. “핵무기 및 열핵무기의 생산, 실험 및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인류와 문명을 절멸의 공포와 염려로부터 구제하는 데 있어 절대적임”을 밝히고 이를 이룩하기 위한 “신속하고 단호한 노력들”이 행해져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열강들에게 핵무기와 관련된 일체의 실험을 중단하고 핵무기의 생산과 사용을 최종적으로 근절하는 목표로 나아가도록 촉구했다. 그리고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 실험, 사용 금지를 비롯해 일체의 군사력과 무기를 신속히 규제, 제한, 통제, 축소하도록 모든 당사국들에게 호소”했다. 이러한 반둥회의의 호소는 곧 결실을 맺었다.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가 창립된 것이다. 그러나 비동맹운동이 제안한 이러한 호소는 강대국들을 움직이는 데 실패했다. 반둥회의 참가국 가운데 하나였던 일본은 이미 보았듯이 은밀하게 평화적 핵 이용이라는 선전과 더불어 핵폭탄에 대해 품고 있던 자신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었다.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의 버섯구름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영국은 호주 남부 사막지대에서 잇단 핵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 때문에 마랄링가와 피짠짜짜라 지역의 원주민들은 영원히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러나 핵무기의 원료인 우라늄을 채굴하던 광산도 역시 위험하긴 매일반이었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우라늄 분열 과정에서 배출된 물질을 흡수했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이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될지 알고 있었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는 이러한 우라늄에 의한 방사능 물질의 위험도를 측정하는 일을 수행했다. 그들이 마련한 연간피폭선량(mSv/year)의 기준은 100에서 다시 50으로, 이후엔 다시 20으로 수정되었다. 그 사이에 이러한 안전 기준에 따라 숱한 우라늄 채굴과 핵 실험이 이뤄진 뒤였다. 그럼에도 장기간의 잠복기를 틈탄 채굴과 실험은 지속되어 왔다. 콩고와 나미비아와 같은 지역에서 농민들은 부유한 나라들의 핵에너지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우라늄 채굴을 위해 삶의 기반이 되는 농업을 포기해야 했다. 이들 나라의 광산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이끌어가는 자본과 직접 연결되고 또한 이로부터 이권을 얻으려는 군사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내전의 인질이 되어왔다. 비동맹운동도 제3세계프로젝트도 힘을 잃은 지금 우라늄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을 저주와도 같은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구해낼 길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된 미국의 군사기지와 시설들은 핵제국주의를 지켜주는 보루의 역할을 할 것이다.

민족경제론/민족문학론 民族經濟論/民族文學論

Grimes – Delete Forever

1970-80년대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을 가장 강렬하게 매혹시킨 담론은 ‘민족문학론’과 ‘민족경제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이론 혹은 입장은 공통적으로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어 민족을 내세웠다. 여기에서 민족은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이 내세우던 유구한 전통과 함께 자신의 얼을 간직한 종족적인 공동체로서의 민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세에 종속된 탓에 자신의 자립적이고 민주적인 발전을 저지당한 사회적, 경제적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외세에 결탁함으로써 사회의 발전을 꾀한 탓에 그에 유착해 자신의 권력을 가지게 된 소수의 반민족적인 세력과 그들로 인해 억압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대다수 민중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종속적인 발전이란, 발전하면 할수록 민족의 이해에 반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종속적 발전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다른 제3세계에 속한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질서에서 미국과 일본이 우호적으로 제공한 자본으로 인해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국제분업 체제로 인해 전무후무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신흥공업국으로 도약이 절정에 이르렀던 그 때인 1970년대에 민족문학론과 민족경제론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 두 이론은 암묵적으로 제3세계의 일원으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데 적극 참여했다. 반둥회의에서 타전된 제3세계주의의 신호는 십 수 년이 지난 뒤 한국에 도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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