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세계를 업로드하기 혹은 피드하기

Sam Cooke – Blowing in the Wind

일본의 하위문화의 속사정에 밝은이들이라면 훤히 알 이야기에서 출발해 보자. 일본에선 ‘제로연대’를 전후해 새로운 하위문화의 부족이 출현(더불어 해체)했다고 일컬어지곤 한다. 이는 저 유명한 전설적인 오타쿠의 자기 배반과 관련이 있다. 일본 문화평론가들의 말을 쫓자면, 오타쿠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몰두하면서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꿈을 보전했던 이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전공투의 기괴한 자멸적인 파산을 끝으로 유토피아적인 꿈이 소멸한 뒤에도 음습한 자기만의 세계에서 암약하며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꿈을 지속시켰던 이들이었다고 평해진다. 그러나 이런 오타쿠들은 ‘제로연대’, 긴 불황의 시대를 지나며 맞이한 새 천년에는 더 이상 꿈을 지속시키지 못한다. 그러면서 등장한 새로운 하위문화의 흐름이 세카이계(せかい系)와 일상계(日常系)이다. 세카이계는 이름과 달리 세계가 없는 세계에서의 삶을 가리킨다. 세카이계란 “세계의 문제를 자의식의 문제로 왜소화시킨다”는 것을 가리킨다. 세카이계, 그들에겐 세계가 없거나 있다면 그것은 나와 너만 있는 세계이다. 일상계는 세카이계가 더욱 숙성한 것이자 동시에 세카이계의 감수성에 대한 자기패러디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비사회의 끝나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난 다른 세계를 원하는 주인공들이 초능력자, 우주인, 미래인 등과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실은 변함없이 일상을 즐기기 위한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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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변증법: 한국전쟁을 아시아화하기

Power To The People –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

나는 한국전쟁이 벌어진지 15년도 훌쩍 지난해에 태어났다. 전흔은 거의 모두 사라지고 없었을 무렵이었으리라. 그런데도 어린 소년이었던 내게 또렷이 기억에 남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의수나 의족을 팔던 상점들의 정경이었다. 그 상점들은 시청 근처 관상대를 오르는 언덕 옆에 자리했던 원호처 옆에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그 상점의 진열창 안에는 먼지를 뒤집어 쓴 목발이나 기괴한 분홍빛이 감도는 살색의 의족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오랜 동안 닦지도 손을 보지 않아 거무튀튀한 갈색으로 변해버린 의수(義手)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나는 가지런히 정렬된 다른 길이의 그 플라스틱 손가락들을 오랜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비명과 포연, 고통으로 일그러진 무시무시한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나는 그 손가락들이 언젠가 벌어졌던 불길한 재앙을 가리키는 손짓처럼 보였던 싶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강원도 북쪽의 작은 소도시였다. 그곳에서 한국전쟁은 언제나 음산한 안개처럼 머물고 있었다. 시내의 유명한 내과병원의 원장이 대한항공 납치사건으로 북으로 갔다거나, 남대천 건너 개량주택 마을에 살던 누군가가 이불 아래에서 단파라디오를 듣다 간첩으로 끌려갔다거나, 동네 끝 시장 어귀에 늘 얼씬대던 미친 거지는 실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너무 똑똑해 빨갱이가 되었다가 곤욕을 치르곤 저렇게 실성하곤 말았다거나 하는 소문 또는 괴담이 늘 먼지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정작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 속에는 없었다. 경포대 옆에 있던 충혼탑으로 이끌려가 억지춘향으로 묵념을 할 때에나 한국전쟁은 공식적으로 세상 속으로 등장했다. 반공웅변대회나 무장공비 사건 같은 것이 터지면 곧잘 공설운동장에서 열리곤 했던 궐기대회 같은 곳에서, 6.25는 미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다. ‘잊지 말자 6.25’라고 외치곤 했지만, 잊지 않아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는 요령부득이었다. 그 즈음 인기 있던 TV 드라마인 <전우>에서 보던 그 전쟁의 풍경을 통해서는, 도무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그저 악(惡)이거나 적(敵)이기라는 추상적인 호명을 통해 집요하게 상기될 뿐, 구체적인 원망과 적의를 동원하기가 난감하기만 것이었던 ‘북’이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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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추상적) 부정의 노동 – 서평주 <괴상한 춤> 전시에 관하여

Duke Ellington & John Coltrane – In a sentimental mood


브레히트는 뚱한 어조로 독일의 산업자본을 상징하던 아에게(AEG)나 크루프(Krupp)의 공장 사진을 두고 훈계조의 이야기를 던진 적이 있다. 브레히트 가로되, 그런 사진들은 공장에 관하여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루프 공장이나 아에게 공장 사진은 이 회사들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드러내주지 못한다. 현실은 기능적인 것의 영역 속으로 미끄러져 버린다. 이를테면 인간관계의 물화 즉 공장은, 그런 관계들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구성해야 할 무엇’, ‘인위적이고’, ‘고안되어야 할’ 무엇이 있다.”(B. Brecht, Brecht on Film and Radio, London: Methuen drama, 2000, pp. 164-5. 여기에서 브레히트가 말하는 추가되어야 할 무엇은 물론 ‘예술’을 가리킨다. 그는 영화의 불완전한 재현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예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화가 예술을 만나 예술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영화의 자연적 재현은 언제나 자신이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뜻에서 예술이라는 추가적인 조처를 통해 그러한 재현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브레히트 식의 생각은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에 등장하는 주식거래소를 두고 “주식거래소는 단지 주식거래소가 아니라 수천 개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에이젠슈테인의 발언을 참조하여 볼 수도 있다. S. 에이젠슈테인, <자본>에 대한 노트, 김수환,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  이때 브레히트는 사진적 리얼리즘에 대하여 퉁명스럽게 타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때문이다. 자본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혹은 자본이라는 ‘현실적인 추상(real abstraction)’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현실적 추상 혹은 실제 추상이라고도 옮겨지곤 하는 것에 대한 획기적인 논고로는 다음의 저작을 참조하라. 알프레드 존-레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황태연․윤길순 옮김, 학민사, 1986.) 나아가 사이비구체(성)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는 비판적 구체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이런 물음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리고 이는 굳이 마르크스주의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예술적 실천에 참여하는 이들에겐 달아날 수 없는 쟁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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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으로서의 정치: 미술이 정치와 상관하는 법

Bow Wow Wow – I Want Candy

1.
동시대 미술은 무정부주의적 직접민주주의와 오랜 동안 밀월 관계를 맺어왔다. 스스로 자신을 말해야 한다는 명령은, 참여, 협업, 대화, 소통, 공감 같은 윤리적 구호를 미술이 취해야 할 마땅한 정치적 좌표로 내세웠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 투명한, 자기중심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더불어 그것은 시간을 공간에 종속시킨다. 그 때 정치란 특정한 장소에 현전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 맺기로 축소된다. 그렇기에 자신이 경험하지 못할 미래를 바꾸는 일이자 자신이 겪어본 바가 없는 과거의 역사적 효과를 전복하는 것이 정치라는 관념은 맥을 못 춘다. 동시대미술이 짐작하는 정치란 현전적인 경험으로서의 공감과 동일시, 그리고 그러한 신체적 움직임을 서로 응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전시장이 자신의 의지와 의견을 투명하게 대표하고 반영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흩뿌린다. 미술관은 끊임없이 유사 무대 장치나 세트장 같은 장소로 자신을 변형하며 미술관이 민주주의적 경험의 장소라는 것을 과시하려 애쓰고 있다. 그 때문에 부쩍 자주 듣는 미술관은 민주적인가라는 물음은 실은 미술관의 정치를 은폐하려는 질문이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미술관은 자신을 가리는 숱한 가면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이벤트 공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미술관의 임시변통의 일시적 가장(假葬)은 정작 미술관이란 무엇인지 묻지 못하게 하는 눈속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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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반구의 비엔날레는 새로운 삼 대륙 예술 인터내셔널을 만들 수 있을까?

Victor Jara – Manifiesto

태풍이 온다

지난 해 그러니까 2018년 늦여름, 나는 소설가 최인훈의 부음을 듣고 잠시 망설였다. 그를 조문하러 간다는 것이, 터무니없지만은 않지만 너무 어색한 일이란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 탓에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겠다는 의지를 접어 버렸다. 하물며 그의 장례를 문인장으로 치른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문학과는 먼 자리에서 사는 처지에 불쑥 그의 마지막을 찾는다는 것이 뜬금없는 일이리란 망설임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를 찾고 싶었다. 한국에 사는 여느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최인훈의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가끔 다른 이유로 그의 소설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나는 또다시 그의 소설들로 회귀하였다. 그의 소설에서 나의 온 몸을 불붙게 하는 듯한 또 다른 충격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로 ‘비동맹운동’이었다. 그의 소설 속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낱말, 그러나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비동맹운동이었으리라고 확신했다. 마침 나는 비동맹운동이라는 프로젝트를 몇년간 추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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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비평을 쓴다는 것

Icona Pop – I Love It (feat. Charli XCX)

1.

어쨌거나 좋든 실든 요즈막의 미술을 동시대 미술이라 부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이는 이전의 역사적 단계의 미술과 다르다는 것은 혹은 달라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수긍하는 것이다. 그럼 동시대는 어떤 시간대일까. 현재주의le presentisme라는 시간 없는 세계의 시간성을 가리키는 개념을 굳이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시간을 지각하고 경험하는 방식이 ‘순간’에 집중되었음을 알고 있다. 현재라는 시간이 압도하는 세계에서 미래와 과거는 전에 없던 모습을 취한다. 미래란 시간의 표지에 대해 품었던 뭉클하고 아찔한 기대와 감각은 더 이상 만회할 길 없어 보인다. 과거를 전시하고 상연하는 숱한 장소들은 과거가 실종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저런 박물관에 전시된 숱한 이미지와 사물들은 과거를 현재의 파편으로 통합한다. 이는 동시에 시간이 공간화되었음을 증언한다. 뉴트로나 레트로, 빈티지, 노스탤지어 등은 오늘날 과거가 취한 의장(意匠)이랄 수 있다. 과거는 오늘날 집어 들어 맛보고 냄새 맡고 눈요기해야 할 취미의 곳간에 다름 아니다. 진로 소주 신제품 ‘진로이즈백’이 새로운 진로소주이지만 지난날의 진로소주인 식이다. 조너선 크래리의 말마따나 극단적인 산만함을 이겨내기 위해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치닫는다. 그것은 바로 여기 지금의 충격이라는 방향이다. 그 방향을 향하는 이미지나 행위를 가리키는 우아한 말들이 ‘숭고’이든 ‘언캐니’이든 ‘트라우마’이든 그건 일단 논외로 치자. 문제는 충격만이 남은 듯 보이는 세계, 주목과 주의가 희귀해진 찰나적 지금의 세계에, 비평은 가능할 것인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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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기원: 9X0X를 시대구분하기

Bill Callahan — So Long Marianne

1.

모르긴 몰라도 비평가라면 자신이 어떤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고 느낄 때 되풀이해서 찾아가는 텍스트가 두엇 남짓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렇게 이따금 의탁하는 텍스트가 있다. ‘변증법적 비평’이라는 비평적 실천의 모델로, 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 한 편을 가끔 방문한다. 글제는 간단히 “1960년대를 시대구분하기(Periodizing 60s)”이다. Fredric Jameson, Periodizing the 60s, Social Text, No. 9/10, 1984, pp. 178-209. 이 글은 후일 제임슨의 비평모음집에 재수록되었다. The ideologies of theory, London & New York: Verso, 2009.
여느 다른 글의 제목이 그렇듯이 그가 택한 글의 제목은 무뚝뚝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글은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 Fredric Jameson, Cognitive Mapping,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Cary Nelson & Lawrence Grossberg eds.,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0.
라는 그의 비평 방법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제임슨은 열광과 환멸이라는 성마른 감정적 반응에 휩싸였던, 그리고 그런 까닭에 더없이 불투명해 보이기만 하던 역사적 연대인 1960년대를 분석하고자 시도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 글은 이중적인 목적을 겨냥한다. 먼저 이제 반세기에 접어든 저 휘황한 ‘1960년대’를 둘러싼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평을 하자는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바로 그 시간대를 특수한 역사적 시대로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방법론적 하위 종목 가운데 하나일 ‘시기구분(periodiza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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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약속 – 사진이 사라진 세계에서 사진을 되찾는다는 것

 

안옥현,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따라서 나는 사진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 때문에 드러난 이런 무질서와 딜레마가 내가 항상 시달렸던 다음과 같은 일종의 불편함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즉 나는 표현적 언어와 비판적 언어라는 두 언어 사이에서 흔들리는 주체라는 것이다. … 결국 나는 그 어떤 담론에도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자신 안에 있는 확실한 유일한 것(설령 이것이 순진하다 할지라도 말이다)을 나타냈다. 그것은 모든 환원적 체계에 대한 결사적 저항이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응권 옮김, 동문선, 20-21쪽.

1.

이제 사진은 기록이라는 생각보다 사교성 혹은 사회성을 이루려는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처럼 보인다. 창틈으로 고개를 내민 고양이 사진이거나 종려나무 앞에서의 ‘셀피’ 사진이나 석양 아래에서 노랗고 붉은 빛으로 반사되는 교각 사진이나 모두 겨냥하는 바는, 이른바 소셜 미디어에서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을 향해 건네는 가벼운 인사말이다. 난 사진을 통해 말을 건네고 친구들은 나에게 응답을 한다. ‘좋아요’와 ♡, 그리고 ‘댓글’은 사진을 ‘읽거나’ ‘보는’ 일을 교감하기 혹은 소통하기로 대신한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사진은 ‘말-이미지(speak-image)’가 되어버렸다고 꼬집는다. 어떤 이는 사진은 이제 이미지가 되었다거나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으로 대체되었다거나 하는 등 사진이 겪고 있는 변모를 분주히 정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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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속에 숨은 몇 개의 사회

Aphex Twin – T69 Collapse

언제부터인가 디자인을 규제하는 가치들을 지시하는 말들이 스멀스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장 생각나는 말들을 몇 개 꼽자면 이런 것들 아닐까. “참여적”, “경험적”, “상호작용적(interactive)”, “개방적”, “협력적” “사용자 중심적” 등. 이는 디자인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디자인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상상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최근 나타난 디자인 실천의 변화를 아우르는 말로 디자인의 ‘사회적 전환(social turn)’이란 개념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각예술에서 나타난 사회적 전환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숱한 시각예술 분야 작가들이 택한 접근은 디자인에서의 사회적 접근과 딱히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을 띠기도 한다. 이를테면 유명세가 대단한 영국의 터너상(Turner prize)을 2015년에 수상한 시각예술 콜렉티브인 어셈블(Assemble)은 오랜 동안 지역을 먹여 살렸던 제조업이 사라진 후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이를테면 리버풀의 산업용 도자 노동자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고 노동자의 공동체를 되살려내면서 동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판매함은 물론 그 결과를 전시의 형태로 소개한 등의 활동이 그에 해당될 것이다. 건축적이면서 디자인적이기도 한 이들의 작업은, 그럼에도 엄연히 시각예술 분야의 최근의 추이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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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줌-인

Dj Koze – Pick Up

줄리앙 프레비유의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궁극의 핀치투줌)>은 타공판 위에 설치된 물리치료기계에 연결된 손을 보여준다. 타공판의 지지대에 장착된 고리와 끈은 ‘핀치-투-줌(pinch-to-zoom)’ 동작을 완강히 제약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또는 구속에 저항하며 그 동작을 실행하려는 안간힘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꼬집어 확대해 보기란 동작을 가리키는 ‘핀치투줌’은 태블릿이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이들에겐 익숙한 관습적 동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복잡한 지식을 터득하고 조작을 수행할 필요를 절약하며 그 모두를 우아한 동작 하나에 집적한다. 이미지를 확대하기 위해 해당 영역을 설정하고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의 복잡한 정보처리와 명령을 행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두 손가락을 모았다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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