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비평을 쓴다는 것

Icona Pop – I Love It (feat. Charli X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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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좋든 실든 요즈막의 미술을 동시대 미술이라 부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이는 이전의 역사적 단계의 미술과 다르다는 것은 혹은 달라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수긍하는 것이다. 그럼 동시대는 어떤 시간대일까. 현재주의le presentisme라는 시간 없는 세계의 시간성을 가리키는 개념을 굳이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시간을 지각하고 경험하는 방식이 ‘순간’에 집중되었음을 알고 있다. 현재라는 시간이 압도하는 세계에서 미래와 과거는 전에 없던 모습을 취한다. 미래란 시간의 표지에 대해 품었던 뭉클하고 아찔한 기대와 감각은 더 이상 만회할 길 없어 보인다. 과거를 전시하고 상연하는 숱한 장소들은 과거가 실종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저런 박물관에 전시된 숱한 이미지와 사물들은 과거를 현재의 파편으로 통합한다. 이는 동시에 시간이 공간화되었음을 증언한다. 뉴트로나 레트로, 빈티지, 노스탤지어 등은 오늘날 과거가 취한 의장(意匠)이랄 수 있다. 과거는 오늘날 집어 들어 맛보고 냄새 맡고 눈요기해야 할 취미의 곳간에 다름 아니다. 진로 소주 신제품 ‘진로이즈백’이 새로운 진로소주이지만 지난날의 진로소주인 식이다. 조너선 크래리의 말마따나 극단적인 산만함을 이겨내기 위해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치닫는다. 그것은 바로 여기 지금의 충격이라는 방향이다. 그 방향을 향하는 이미지나 행위를 가리키는 우아한 말들이 ‘숭고’이든 ‘언캐니’이든 ‘트라우마’이든 그건 일단 논외로 치자. 문제는 충격만이 남은 듯 보이는 세계, 주목과 주의가 희귀해진 찰나적 지금의 세계에, 비평은 가능할 것인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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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기원: 9X0X를 시대구분하기

Bill Callahan — So Long Mari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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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몰라도 비평가라면 자신이 어떤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고 느낄 때 되풀이해서 찾아가는 텍스트가 두엇 남짓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렇게 이따금 의탁하는 텍스트가 있다. ‘변증법적 비평’이라는 비평적 실천의 모델로, 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 한 편을 가끔 방문한다. 글제는 간단히 “1960년대를 시대구분하기(Periodizing 60s)”이다. Fredric Jameson, Periodizing the 60s, Social Text, No. 9/10, 1984, pp. 178-209. 이 글은 후일 제임슨의 비평모음집에 재수록되었다. The ideologies of theory, London & New York: Verso, 2009.
여느 다른 글의 제목이 그렇듯이 그가 택한 글의 제목은 무뚝뚝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글은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 Fredric Jameson, Cognitive Mapping,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Cary Nelson & Lawrence Grossberg eds.,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0.
라는 그의 비평 방법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제임슨은 열광과 환멸이라는 성마른 감정적 반응에 휩싸였던, 그리고 그런 까닭에 더없이 불투명해 보이기만 하던 역사적 연대인 1960년대를 분석하고자 시도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 글은 이중적인 목적을 겨냥한다. 먼저 이제 반세기에 접어든 저 휘황한 ‘1960년대’를 둘러싼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평을 하자는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바로 그 시간대를 특수한 역사적 시대로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방법론적 하위 종목 가운데 하나일 ‘시기구분(periodiza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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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약속 – 사진이 사라진 세계에서 사진을 되찾는다는 것

 

안옥현,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따라서 나는 사진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 때문에 드러난 이런 무질서와 딜레마가 내가 항상 시달렸던 다음과 같은 일종의 불편함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즉 나는 표현적 언어와 비판적 언어라는 두 언어 사이에서 흔들리는 주체라는 것이다. … 결국 나는 그 어떤 담론에도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자신 안에 있는 확실한 유일한 것(설령 이것이 순진하다 할지라도 말이다)을 나타냈다. 그것은 모든 환원적 체계에 대한 결사적 저항이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응권 옮김, 동문선, 20-21쪽.

1.

이제 사진은 기록이라는 생각보다 사교성 혹은 사회성을 이루려는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처럼 보인다. 창틈으로 고개를 내민 고양이 사진이거나 종려나무 앞에서의 ‘셀피’ 사진이나 석양 아래에서 노랗고 붉은 빛으로 반사되는 교각 사진이나 모두 겨냥하는 바는, 이른바 소셜 미디어에서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을 향해 건네는 가벼운 인사말이다. 난 사진을 통해 말을 건네고 친구들은 나에게 응답을 한다. ‘좋아요’와 ♡, 그리고 ‘댓글’은 사진을 ‘읽거나’ ‘보는’ 일을 교감하기 혹은 소통하기로 대신한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사진은 ‘말-이미지(speak-image)’가 되어버렸다고 꼬집는다. 어떤 이는 사진은 이제 이미지가 되었다거나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으로 대체되었다거나 하는 등 사진이 겪고 있는 변모를 분주히 정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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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속에 숨은 몇 개의 사회

Aphex Twin – T69 Collapse

언제부터인가 디자인을 규제하는 가치들을 지시하는 말들이 스멀스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장 생각나는 말들을 몇 개 꼽자면 이런 것들 아닐까. “참여적”, “경험적”, “상호작용적(interactive)”, “개방적”, “협력적” “사용자 중심적” 등. 이는 디자인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디자인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상상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최근 나타난 디자인 실천의 변화를 아우르는 말로 디자인의 ‘사회적 전환(social turn)’이란 개념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각예술에서 나타난 사회적 전환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숱한 시각예술 분야 작가들이 택한 접근은 디자인에서의 사회적 접근과 딱히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을 띠기도 한다. 이를테면 유명세가 대단한 영국의 터너상(Turner prize)을 2015년에 수상한 시각예술 콜렉티브인 어셈블(Assemble)은 오랜 동안 지역을 먹여 살렸던 제조업이 사라진 후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이를테면 리버풀의 산업용 도자 노동자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고 노동자의 공동체를 되살려내면서 동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판매함은 물론 그 결과를 전시의 형태로 소개한 등의 활동이 그에 해당될 것이다. 건축적이면서 디자인적이기도 한 이들의 작업은, 그럼에도 엄연히 시각예술 분야의 최근의 추이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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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줌-인

Dj Koze – Pick Up

줄리앙 프레비유의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궁극의 핀치투줌)>은 타공판 위에 설치된 물리치료기계에 연결된 손을 보여준다. 타공판의 지지대에 장착된 고리와 끈은 ‘핀치-투-줌(pinch-to-zoom)’ 동작을 완강히 제약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또는 구속에 저항하며 그 동작을 실행하려는 안간힘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꼬집어 확대해 보기란 동작을 가리키는 ‘핀치투줌’은 태블릿이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이들에겐 익숙한 관습적 동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복잡한 지식을 터득하고 조작을 수행할 필요를 절약하며 그 모두를 우아한 동작 하나에 집적한다. 이미지를 확대하기 위해 해당 영역을 설정하고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의 복잡한 정보처리와 명령을 행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두 손가락을 모았다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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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둥의 밤-대본 초고

BING SLAMET – Genjer Genjer

 

#1
암전된 채 겐제르-겐제르 재생(Bing Selamet)
반둥의 밤 제목만 프로젝션

#2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오늘 나임 모하이멘의 <두 번의 회의와 한 번의 장례식>이라는 작업에 대한 주석이자 또한 그를 보충할만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눠볼까 합니다. 그럼 오늘의 강연을 시작하기 위해 어쩌면 진부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발터 벤야민의 저 유명한 역사철학테제 가운데서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출발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비동맹운동과 제3세계주의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이 될 시간의 변증법을 벤야민이 마침 매우 능숙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른 문장은 이런 것입니다.

“다만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 이 말은 구원된 인류에게 만이 매 순간 자신들의 과거가 인용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류가 살았던 순간들 하나하나가 그날, 즉 최후의 심판일이 될 날의 의사일정에 인용 대상이 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테제3 중에서

이 짧은 단락에서 벤야민은 과거를 둘러싼 우리의 흔한 상식을 바로잡겠다는 듯이 숨 가쁘게 말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놀랍고 흥미로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나간 시간에 벌어지고 기록된 객관적인 사태들”로서의 과거만이 과거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다만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가 완전하게 주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여기에서 완전하게 주어지는 과거와 불완전하게 주어지는 과거가 있으며 이를 분간할 필요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 즉 역사적인 한 단계가 종료하고 다른 단계가 열리는 순간,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인류의 전사가 끝나고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 그것은 물론 혁명적 단절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인류가 구원되지 못했을 때 과거는 불완전하게 주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또한 우리가 구원을 원한다면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잘못을 바로잡는 위대한 실천을 하고자 한다면, 과거를 완전하게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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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리 괴르제 & 앙투완 드푸르의 <제르미날>에 관하여

무대란 소우주

<제르미날>은 에밀 졸라의 전설적인 소설, <제르미날>을 제목으로 삼는다. <제르미날>은 광부들의 척박하고 고단한 삶에 관한 소설이다. 알로리와 앙투완은 자신의 작업이 소설 <제르미날>과 무관하다고 능청을 부리지만 그것은 그저 시치미 떼기에 불과할 것이다. 무대의 표면을 채굴하는 퍼포먼스의 주된 동작들은 분명 광부의 몸짓을 빌린다는 점에서나, 자연주의적 역사소설이 기대했던 것처럼 역사의 재현을 기대하고자(기대할 수 없음을 토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나 두루 이 작업은 <제르미날>로부터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발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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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거주자의 알레고리적 실천

DCNXTR Live at “เห็ดสด#2” โดยฟังใจ

– 전보경이 동시대 미술에 간섭하는 방식에 관하여

전보경 작가의 궤적은 동시대미술의 현장에서 레지던시라는 제도를 통해 생존하는 작가의 전기(傳記) 혹은 인류학적인 자료로서 손색이 없는 듯하다. 물론 이런 훔쳐보기의 태도가 작가 스스로에게는 탐탁지 않은 것이리란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호기심을 지우기 어렵다. 1990년대 이후 유학을 다녀온 시각예술 작가들은 호기심과 욕망에 의해서이든 아니면 생존을 위해서이든, 레지던시라는 제도에 의지해 왔다. 전시를 위한 기회는 희박하며, 작업을 할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더욱 힘들고, 넓디넓은 미술계에서 ‘오지랍’은 좁디좁은 작가들이라면 마침 등장해 구원의 손길을 뻗어가던 레지던시는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작은 유토피아적인 장소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전보경 작가와 만났을 때 첫 대화의 주제가 탈출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더 나은 미래가 없을 듯 뵈는 세계에 살 때, 도래할 찬란한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다른 곳을 찾는다. 미래 시제의 시간은 다른 곳이라는 공간으로 이항(移項)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여행을 꿈꾼다. 여행이란 적어도 혁명은 불가능하겠지만 탈출은 가능하도록 도울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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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스펙터클 그리고 이미지 ‘비판’

Beach House – Black Car

기억과 기념이 역사적인 의식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눈여겨 본 이들에겐 상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을 대신해 기억학(memory studies)이라는 학문이 부상한 것이나, 역사적 경험이 놓였던 자리에 트라우마, 국가폭력, 애도 등이 기세를 떨치는 것이나 모두 역사의 상실 혹은 패주를 가리키는 징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인 시간성을 의식하고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일차적인 소임인 줄 알았던 미술적 근대성 자체가 패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예술, 그 가운데서도 시각예술은 처음부터 자신을 ‘모던’ 아트라고 명명하며 자신의 역사적 시간성을 모든 실천 속에 기입하는 기염을 토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동시대’, ‘당대’, ‘컨템포러리’ 예술같은 낱말로 슬며시 대체되었다. 이런 추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둘러싸고 여전히 분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지간한 합의가 있다면 그것은 미래라는 시간이나 유토피아적인 정치 기획을 둘러싼 적의,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회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카이브적인 실천 혹은 전시의 범람, 역사적 건축 유산을 기억의 경험을 상연하는 장소로 둔갑시키는 전시시설이나 제도의 성행 등은 어쨌거나 반(反)역사라고 불러도 좋을 추세에 모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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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의 재미와 교훈

Itsuroh Shimoda – Everybody Anyone (1974)


자기-패러디로서의 퍼포먼스

1. 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는 동시대 예술의 동시대성을 구성하는 미학적 원리를 추궁하고 풍자하는 코미디 퍼포먼스이다. 비록 관객들은 떠들썩하게 웃지 않았지만 말이다.

2. 헤첼은 자신의 렉처 모두에서 노골적으로 동시대성의 으뜸가는 미학적 원리인 <현존 presence>을 비웃으며 시작한다. 설치와 더불어 동시대 예술의 양대 장르로 부상한 퍼포먼스의 인기 뒤에서, 그는 현존(성)에 대한 애착을 발견하고 조롱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재/현(re-presentation)의 비판으로서의 미술, 즉 반미학적 예술과 <동시대> 예술이 자신을 구분하는 결정적 간극이다.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의 냄새를 풍기는 그리고 그의 재현(표상) 비판으로서의 철학을 상기시키는 진정성, 직접성, 본래성, 고유성, 지금-여기-있음, 현존재, 함께-있음(Mit-Sein) 등등은 퍼포먼스가 애호하는 미학적 긍지이자 격률이다. 헤첼은 그것을 교활하면서도 신랄하게 비웃는다. 그의 작업이 사회사업가를 흉내내는 그저 그렇고 그런 작업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시큰둥하게 무대를 지켜보던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입안에서 가득 군침이 돌았다.(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야유는 얼마나 애교스럽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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