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당에게

Andy Williams ~ Can’t Take My Eyes off You

나의 당(黨)에게

그대는 내게 모르는 일을 향한 형제애를 주었다.
귿는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힘을 내게 보태주었다.
그대는 다시 태어나는 조국을 내게 돌려주었다.
그대는 외로운 사람이 갖지 못한 자유를 주었다.
그대는 친절에 불을 댕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대는 나무가 필요로 하는 올곧음을 주었다.
그대는 인간의 단결, 인간의 차이를 보게 가르쳐주었다.
그대는 한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모든 이의 승리 안에서 죽었는지 보여주었다.
그대는 내 형제들의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대는 현실이라는 바위 위에서 건설하도록 했다.
그대는 내가 미친 자들의 벽, 나쁜 사람의 적이 되도록 했다.
그내는 내게 세상의 밝음, 기쁨의 가능성을 보게 해주었다.
내가 그대와 함께한다면 죽지 않으니, 그대는 나를 파괴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 파블로 네루다, <모두의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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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으로서의 정치: 미술이 정치와 상관하는 법

Bow Wow Wow – I Want Candy

1.
동시대 미술은 무정부주의적 직접민주주의와 오랜 동안 밀월 관계를 맺어왔다. 스스로 자신을 말해야 한다는 명령은, 참여, 협업, 대화, 소통, 공감 같은 윤리적 구호를 미술이 취해야 할 마땅한 정치적 좌표로 내세웠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 투명한, 자기중심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더불어 그것은 시간을 공간에 종속시킨다. 그 때 정치란 특정한 장소에 현전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 맺기로 축소된다. 그렇기에 자신이 경험하지 못할 미래를 바꾸는 일이자 자신이 겪어본 바가 없는 과거의 역사적 효과를 전복하는 것이 정치라는 관념은 맥을 못 춘다. 동시대미술이 짐작하는 정치란 현전적인 경험으로서의 공감과 동일시, 그리고 그러한 신체적 움직임을 서로 응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전시장이 자신의 의지와 의견을 투명하게 대표하고 반영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흩뿌린다. 미술관은 끊임없이 유사 무대 장치나 세트장 같은 장소로 자신을 변형하며 미술관이 민주주의적 경험의 장소라는 것을 과시하려 애쓰고 있다. 그 때문에 부쩍 자주 듣는 미술관은 민주적인가라는 물음은 실은 미술관의 정치를 은폐하려는 질문이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미술관은 자신을 가리는 숱한 가면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이벤트 공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미술관의 임시변통의 일시적 가장(假葬)은 정작 미술관이란 무엇인지 묻지 못하게 하는 눈속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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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반구의 비엔날레는 새로운 삼 대륙 예술 인터내셔널을 만들 수 있을까?

Victor Jara – Manifiesto

태풍이 온다

지난 해 그러니까 2018년 늦여름, 나는 소설가 최인훈의 부음을 듣고 잠시 망설였다. 그를 조문하러 간다는 것이, 터무니없지만은 않지만 너무 어색한 일이란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 탓에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겠다는 의지를 접어 버렸다. 하물며 그의 장례를 문인장으로 치른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문학과는 먼 자리에서 사는 처지에 불쑥 그의 마지막을 찾는다는 것이 뜬금없는 일이리란 망설임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를 찾고 싶었다. 한국에 사는 여느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최인훈의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가끔 다른 이유로 그의 소설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나는 또다시 그의 소설들로 회귀하였다. 그의 소설에서 나의 온 몸을 불붙게 하는 듯한 또 다른 충격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로 ‘비동맹운동’이었다. 그의 소설 속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낱말, 그러나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비동맹운동이었으리라고 확신했다. 마침 나는 비동맹운동이라는 프로젝트를 몇년간 추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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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비평을 쓴다는 것

Icona Pop – I Love It (feat. Charli XCX)

1.

어쨌거나 좋든 실든 요즈막의 미술을 동시대 미술이라 부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이는 이전의 역사적 단계의 미술과 다르다는 것은 혹은 달라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수긍하는 것이다. 그럼 동시대는 어떤 시간대일까. 현재주의le presentisme라는 시간 없는 세계의 시간성을 가리키는 개념을 굳이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시간을 지각하고 경험하는 방식이 ‘순간’에 집중되었음을 알고 있다. 현재라는 시간이 압도하는 세계에서 미래와 과거는 전에 없던 모습을 취한다. 미래란 시간의 표지에 대해 품었던 뭉클하고 아찔한 기대와 감각은 더 이상 만회할 길 없어 보인다. 과거를 전시하고 상연하는 숱한 장소들은 과거가 실종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저런 박물관에 전시된 숱한 이미지와 사물들은 과거를 현재의 파편으로 통합한다. 이는 동시에 시간이 공간화되었음을 증언한다. 뉴트로나 레트로, 빈티지, 노스탤지어 등은 오늘날 과거가 취한 의장(意匠)이랄 수 있다. 과거는 오늘날 집어 들어 맛보고 냄새 맡고 눈요기해야 할 취미의 곳간에 다름 아니다. 진로 소주 신제품 ‘진로이즈백’이 새로운 진로소주이지만 지난날의 진로소주인 식이다. 조너선 크래리의 말마따나 극단적인 산만함을 이겨내기 위해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치닫는다. 그것은 바로 여기 지금의 충격이라는 방향이다. 그 방향을 향하는 이미지나 행위를 가리키는 우아한 말들이 ‘숭고’이든 ‘언캐니’이든 ‘트라우마’이든 그건 일단 논외로 치자. 문제는 충격만이 남은 듯 보이는 세계, 주목과 주의가 희귀해진 찰나적 지금의 세계에, 비평은 가능할 것인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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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기원: 9X0X를 시대구분하기

Bill Callahan — So Long Marianne

1.

모르긴 몰라도 비평가라면 자신이 어떤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고 느낄 때 되풀이해서 찾아가는 텍스트가 두엇 남짓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렇게 이따금 의탁하는 텍스트가 있다. ‘변증법적 비평’이라는 비평적 실천의 모델로, 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 한 편을 가끔 방문한다. 글제는 간단히 “1960년대를 시대구분하기(Periodizing 60s)”이다. Fredric Jameson, Periodizing the 60s, Social Text, No. 9/10, 1984, pp. 178-209. 이 글은 후일 제임슨의 비평모음집에 재수록되었다. The ideologies of theory, London & New York: Verso, 2009.
여느 다른 글의 제목이 그렇듯이 그가 택한 글의 제목은 무뚝뚝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글은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 Fredric Jameson, Cognitive Mapping,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Cary Nelson & Lawrence Grossberg eds.,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0.
라는 그의 비평 방법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제임슨은 열광과 환멸이라는 성마른 감정적 반응에 휩싸였던, 그리고 그런 까닭에 더없이 불투명해 보이기만 하던 역사적 연대인 1960년대를 분석하고자 시도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 글은 이중적인 목적을 겨냥한다. 먼저 이제 반세기에 접어든 저 휘황한 ‘1960년대’를 둘러싼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평을 하자는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바로 그 시간대를 특수한 역사적 시대로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방법론적 하위 종목 가운데 하나일 ‘시기구분(periodiza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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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읽기

Bon Iver – Naeem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출간되었을 때, 거의 문화 현상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만치 뜨거운 관심과 토론이 쏟아졌다. 문화비평 관련 책으로서는 드물게, 책이 미친 반향을 반영한 2차 서적이 출간될 정도였다(한국어판의 부록으로 추가된 조디 딘과의 대화는 <Reading Capitalist Realism>에 수록된 바 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이라는 서구 자본주의 중심지의 두 나라에서의 사정을 배경으로 작성된 글이라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겐 낯설고 무리한 주장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크게 의지하는 지젝 같은 철학자나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인 제임슨, 프랑스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바디우 같은 이론가들의 주장을 자주 참조하는 탓에 이들의 생각에 익숙치 않은 이들에겐 매우 어려운 책처럼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들을 한쪽으로 밀어둔다면 이 책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숨막히는 변화의 풍경들을 조감하며 그것이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자극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세대적 차이로 나타나는 1990년대 이후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그 이전 세대 간의 대립과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클 것이다. 여기에서는 마크 피셔의 생각을 동시대 자본주의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서 간주하고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 그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비판’을 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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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문학이라는 이 씨앗을 어떻게 수확하면 좋을까



Olivia Newton-John – Physical (1981)

< 바이 유어 네임> 개봉되었을 즈음이었다. 이상 퀴어 영화에 관심이 시들하던 나를 움직여 극장으로 걸음을 딛게 만들 일이 있었다. 세상 둘도 없이 같은 성정을 지녔다고 알려진 누군가가 영화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굉장하군, 울렸다니. 나는 역시 세상 둘도 없는 헤테로인 친구를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사랑이니 열정이니 하는 화제가 나오면 수석(壽石)처럼 멀뚱멀뚱 눈만 끔뻑이던 친구에게 무엇이 심금을 울렸을까 궁금했다. 짧은 여름 휴가 기간 동안의 불꽃같은 사랑, 그리고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수락해야 하는 비통함과 비통함을 견디는 꿋꿋함.

그리고 영화를 나는 정작 시대착오적인 퀴어 드라마에 적잖이 놀랐다. 퀴어의 전사(前史) 쓸데없이 해박했던 미욱함 때문이다. 영화는 포스트게이 시대에 접어든지 오래인 지금, 게이 시대의 어떤 신화를 천연덕스럽게 참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고 능청스럽다.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 이전’, 그러니까 게이 이전(pre-gay) 시대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나 가까스로 식별할 있을 동성애 담론의 유산 가운데 하나를 영화는 끌어들인다. 그것은 흔히들그리스 () 사랑(greek-love)’이라고 부르곤 했던 심미적인 동성애이다. 아니 동성애라기보다는 심미적인 열정과 등가인 것이었다. 동성애는 추하고 부덕하며 사악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허용하는 방편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리스 사랑이라면 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리스 사랑이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동성의 육체도 사랑하는 심미적 감수성을 축복하는 이름이다. 그리스 조각들은 미의 정수이다. 그리고 위대한 서구 문명과 문화의 기원이다. 얄궂은 점은 그리스 조각의 다수가 남성의 나체란 점이다. 그렇기에 그리스 조각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과 남성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다를 없다. 동성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애호하는 마음일 뿐이다. 그리스 사랑은 심미적인 감수성이 대단한 자들끼리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리스 사랑을 나누는 이들은 대단한 미감을 지닌 특권적인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기괴한 생각은 예술사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고자 했던, 그리고 역시 동성애자였던, 요한 요하임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에게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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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자본주의! 절대 물신주의!: 물신주의를 역사화하기

Hama – Terroir

“사물의 현상 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쓸데없게 될 것이다.”

“감각을 통해 우리가 접하게 되는 사실은 이미 이중으로 사회적 특성을 지니는 셈이다. 즉 지각되는 대상이 지니는 사회적 성격으로 인해서, 그리고 지각하는 기관(器官)의 역사적 성격을 통해 그러하다. … 개인이 스스로를 종속적이고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데 반해, 같은 개인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사회는 무의식적이고 그래서 비본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활동적인 주체인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존재에 있어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점은 이제까지 사회생활의 역사적인 형식을 특징지어 온 우월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 시민사회의 경제양식 속에서는 사회의 능동성은 맹목적이고 구체적이며, 개인의 능동성은 추상적이고 의식적이다.”

  1. 절대 자본주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날씨보다 인간의 의지대로 조작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길들이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장마철을 지날 때이다. 다가오는 태풍의 피해를 걱정하며 그에 대한 대비를 다그치는 기상예보관의 목소리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맹목적 힘을 알린다. 그런 점에서 끈질긴 외적인 힘으로서의 자연을 표상하는 것 가운데 날씨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이나 기상학자들 나아가 철학자나 사회이론가, 비평가들은 자연 가운데 가장 인간에 의해 크게 변형되고 조작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날씨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후 변화의 정치는 기후가 인간에게 외적으로 자율적인 대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변형된 것으로 표상된다. 기후 변화는 이제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두가 강박적이리만치 유의하는 주제가 되어왔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을 둘러싼 지난 수십 년간의 근심어린 토론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를 출범케 했고, 이를 통해 대기 중에 탄소를 비롯한 기온 상승을 유발하는 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한 다양한 권고와 대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를 제안했던 크뤼천(Paul Crutzen)이 그러한 것처럼, 지구공학자들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자연 조건의 변화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해결책으로 돈벌이에 나선다. 인류세는 재앙이지만 또한 새로운 사업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을 재수탈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를 위해 자연은 그 어느 때보다 물신화된다. 그것은 인간화된 자연을 역설하는 인류세 주창자들의 견해와 달리 보다 추상화되고 또 그만큼 더 객체화/대상화된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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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약속 – 사진이 사라진 세계에서 사진을 되찾는다는 것

 

안옥현,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따라서 나는 사진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 때문에 드러난 이런 무질서와 딜레마가 내가 항상 시달렸던 다음과 같은 일종의 불편함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즉 나는 표현적 언어와 비판적 언어라는 두 언어 사이에서 흔들리는 주체라는 것이다. … 결국 나는 그 어떤 담론에도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자신 안에 있는 확실한 유일한 것(설령 이것이 순진하다 할지라도 말이다)을 나타냈다. 그것은 모든 환원적 체계에 대한 결사적 저항이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응권 옮김, 동문선, 20-21쪽.

1.

이제 사진은 기록이라는 생각보다 사교성 혹은 사회성을 이루려는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처럼 보인다. 창틈으로 고개를 내민 고양이 사진이거나 종려나무 앞에서의 ‘셀피’ 사진이나 석양 아래에서 노랗고 붉은 빛으로 반사되는 교각 사진이나 모두 겨냥하는 바는, 이른바 소셜 미디어에서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을 향해 건네는 가벼운 인사말이다. 난 사진을 통해 말을 건네고 친구들은 나에게 응답을 한다. ‘좋아요’와 ♡, 그리고 ‘댓글’은 사진을 ‘읽거나’ ‘보는’ 일을 교감하기 혹은 소통하기로 대신한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사진은 ‘말-이미지(speak-image)’가 되어버렸다고 꼬집는다. 어떤 이는 사진은 이제 이미지가 되었다거나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으로 대체되었다거나 하는 등 사진이 겪고 있는 변모를 분주히 정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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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미술관을 위한 페다고지

CHAI _ CHOOSE GO!

클레어 비숍은 래디컬 뮤지엄이란 짧지만 도발적인 보고서에서 오늘날 번성하는 미술관이라는 제도를 품평한 바 있었다. 그녀는 그 책에서 미술관이 “엘리트 문화의 귀족 기관이었던 19세기 박물관 모델이 오늘날 여가와 오락을 위한 포퓰리즘 사원으로 바뀌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예술작품과의 심도 있는 만남이 새로운 경험 목록을 만드는 것보다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감상이나 반성과 같은 관람 방식은 소멸하거나 희박해졌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좋은 전시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전시이고, 전시 중인 작품보다는 미술관이라는 건축적 대상을 경험하는 게 더 흔하고 재미난 일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인정하는 공공연한 진실이다. 영원한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당분간의 역사적인 시대의 범위만큼이나 아우를 수 있는 미적 지각과 경험의 형태를 찾아내어 그를 동시대의 미적 진실이라고 이름붙이는 일은 이젠 언감생심이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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