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기원: 9X0X를 시대구분하기

Bill Callahan — So Long Marianne

1.

모르긴 몰라도 비평가라면 자신이 어떤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고 느낄 때 되풀이해서 찾아가는 텍스트가 두엇 남짓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렇게 이따금 의탁하는 텍스트가 있다. ‘변증법적 비평’이라는 비평적 실천의 모델로, 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 한 편을 가끔 방문한다. 글제는 간단히 “1960년대를 시대구분하기(Periodizing 60s)”이다. Fredric Jameson, Periodizing the 60s, Social Text, No. 9/10, 1984, pp. 178-209. 이 글은 후일 제임슨의 비평모음집에 재수록되었다. The ideologies of theory, London & New York: Verso, 2009.
여느 다른 글의 제목이 그렇듯이 그가 택한 글의 제목은 무뚝뚝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글은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 Fredric Jameson, Cognitive Mapping,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Cary Nelson & Lawrence Grossberg eds.,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0.
라는 그의 비평 방법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제임슨은 열광과 환멸이라는 성마른 감정적 반응에 휩싸였던, 그리고 그런 까닭에 더없이 불투명해 보이기만 하던 역사적 연대인 1960년대를 분석하고자 시도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 글은 이중적인 목적을 겨냥한다. 먼저 이제 반세기에 접어든 저 휘황한 ‘1960년대’를 둘러싼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평을 하자는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바로 그 시간대를 특수한 역사적 시대로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방법론적 하위 종목 가운데 하나일 ‘시기구분(periodiza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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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읽기

Bon Iver – Naeem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출간되었을 때, 거의 문화 현상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만치 뜨거운 관심과 토론이 쏟아졌다. 문화비평 관련 책으로서는 드물게, 책이 미친 반향을 반영한 2차 서적이 출간될 정도였다(한국어판의 부록으로 추가된 조디 딘과의 대화는 <Reading Capitalist Realism>에 수록된 바 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이라는 서구 자본주의 중심지의 두 나라에서의 사정을 배경으로 작성된 글이라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겐 낯설고 무리한 주장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크게 의지하는 지젝 같은 철학자나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인 제임슨, 프랑스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바디우 같은 이론가들의 주장을 자주 참조하는 탓에 이들의 생각에 익숙치 않은 이들에겐 매우 어려운 책처럼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들을 한쪽으로 밀어둔다면 이 책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숨막히는 변화의 풍경들을 조감하며 그것이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자극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세대적 차이로 나타나는 1990년대 이후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그 이전 세대 간의 대립과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클 것이다. 여기에서는 마크 피셔의 생각을 동시대 자본주의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서 간주하고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 그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비판’을 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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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문학이라는 이 씨앗을 어떻게 수확하면 좋을까



Olivia Newton-John – Physical (1981)

< 바이 유어 네임> 개봉되었을 즈음이었다. 이상 퀴어 영화에 관심이 시들하던 나를 움직여 극장으로 걸음을 딛게 만들 일이 있었다. 세상 둘도 없이 같은 성정을 지녔다고 알려진 누군가가 영화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굉장하군, 울렸다니. 나는 역시 세상 둘도 없는 헤테로인 친구를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사랑이니 열정이니 하는 화제가 나오면 수석(壽石)처럼 멀뚱멀뚱 눈만 끔뻑이던 친구에게 무엇이 심금을 울렸을까 궁금했다. 짧은 여름 휴가 기간 동안의 불꽃같은 사랑, 그리고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수락해야 하는 비통함과 비통함을 견디는 꿋꿋함.

그리고 영화를 나는 정작 시대착오적인 퀴어 드라마에 적잖이 놀랐다. 퀴어의 전사(前史) 쓸데없이 해박했던 미욱함 때문이다. 영화는 포스트게이 시대에 접어든지 오래인 지금, 게이 시대의 어떤 신화를 천연덕스럽게 참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고 능청스럽다.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 이전’, 그러니까 게이 이전(pre-gay) 시대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나 가까스로 식별할 있을 동성애 담론의 유산 가운데 하나를 영화는 끌어들인다. 그것은 흔히들그리스 () 사랑(greek-love)’이라고 부르곤 했던 심미적인 동성애이다. 아니 동성애라기보다는 심미적인 열정과 등가인 것이었다. 동성애는 추하고 부덕하며 사악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허용하는 방편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리스 사랑이라면 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리스 사랑이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동성의 육체도 사랑하는 심미적 감수성을 축복하는 이름이다. 그리스 조각들은 미의 정수이다. 그리고 위대한 서구 문명과 문화의 기원이다. 얄궂은 점은 그리스 조각의 다수가 남성의 나체란 점이다. 그렇기에 그리스 조각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과 남성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다를 없다. 동성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애호하는 마음일 뿐이다. 그리스 사랑은 심미적인 감수성이 대단한 자들끼리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리스 사랑을 나누는 이들은 대단한 미감을 지닌 특권적인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기괴한 생각은 예술사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고자 했던, 그리고 역시 동성애자였던, 요한 요하임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에게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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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자본주의! 절대 물신주의!: 물신주의를 역사화하기

Hama – Terroir

“사물의 현상 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쓸데없게 될 것이다.”

“감각을 통해 우리가 접하게 되는 사실은 이미 이중으로 사회적 특성을 지니는 셈이다. 즉 지각되는 대상이 지니는 사회적 성격으로 인해서, 그리고 지각하는 기관(器官)의 역사적 성격을 통해 그러하다. … 개인이 스스로를 종속적이고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데 반해, 같은 개인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사회는 무의식적이고 그래서 비본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활동적인 주체인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존재에 있어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점은 이제까지 사회생활의 역사적인 형식을 특징지어 온 우월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 시민사회의 경제양식 속에서는 사회의 능동성은 맹목적이고 구체적이며, 개인의 능동성은 추상적이고 의식적이다.”

  1. 절대 자본주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날씨보다 인간의 의지대로 조작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길들이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장마철을 지날 때이다. 다가오는 태풍의 피해를 걱정하며 그에 대한 대비를 다그치는 기상예보관의 목소리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맹목적 힘을 알린다. 그런 점에서 끈질긴 외적인 힘으로서의 자연을 표상하는 것 가운데 날씨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이나 기상학자들 나아가 철학자나 사회이론가, 비평가들은 자연 가운데 가장 인간에 의해 크게 변형되고 조작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날씨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후 변화의 정치는 기후가 인간에게 외적으로 자율적인 대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변형된 것으로 표상된다. 기후 변화는 이제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두가 강박적이리만치 유의하는 주제가 되어왔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을 둘러싼 지난 수십 년간의 근심어린 토론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를 출범케 했고, 이를 통해 대기 중에 탄소를 비롯한 기온 상승을 유발하는 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한 다양한 권고와 대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를 제안했던 크뤼천(Paul Crutzen)이 그러한 것처럼, 지구공학자들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자연 조건의 변화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해결책으로 돈벌이에 나선다. 인류세는 재앙이지만 또한 새로운 사업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을 재수탈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를 위해 자연은 그 어느 때보다 물신화된다. 그것은 인간화된 자연을 역설하는 인류세 주창자들의 견해와 달리 보다 추상화되고 또 그만큼 더 객체화/대상화된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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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약속 – 사진이 사라진 세계에서 사진을 되찾는다는 것

 

안옥현,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따라서 나는 사진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 때문에 드러난 이런 무질서와 딜레마가 내가 항상 시달렸던 다음과 같은 일종의 불편함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즉 나는 표현적 언어와 비판적 언어라는 두 언어 사이에서 흔들리는 주체라는 것이다. … 결국 나는 그 어떤 담론에도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자신 안에 있는 확실한 유일한 것(설령 이것이 순진하다 할지라도 말이다)을 나타냈다. 그것은 모든 환원적 체계에 대한 결사적 저항이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응권 옮김, 동문선, 20-21쪽.

1.

이제 사진은 기록이라는 생각보다 사교성 혹은 사회성을 이루려는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처럼 보인다. 창틈으로 고개를 내민 고양이 사진이거나 종려나무 앞에서의 ‘셀피’ 사진이나 석양 아래에서 노랗고 붉은 빛으로 반사되는 교각 사진이나 모두 겨냥하는 바는, 이른바 소셜 미디어에서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을 향해 건네는 가벼운 인사말이다. 난 사진을 통해 말을 건네고 친구들은 나에게 응답을 한다. ‘좋아요’와 ♡, 그리고 ‘댓글’은 사진을 ‘읽거나’ ‘보는’ 일을 교감하기 혹은 소통하기로 대신한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사진은 ‘말-이미지(speak-image)’가 되어버렸다고 꼬집는다. 어떤 이는 사진은 이제 이미지가 되었다거나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으로 대체되었다거나 하는 등 사진이 겪고 있는 변모를 분주히 정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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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미술관을 위한 페다고지

CHAI _ CHOOSE GO!

클레어 비숍은 래디컬 뮤지엄이란 짧지만 도발적인 보고서에서 오늘날 번성하는 미술관이라는 제도를 품평한 바 있었다. 그녀는 그 책에서 미술관이 “엘리트 문화의 귀족 기관이었던 19세기 박물관 모델이 오늘날 여가와 오락을 위한 포퓰리즘 사원으로 바뀌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예술작품과의 심도 있는 만남이 새로운 경험 목록을 만드는 것보다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감상이나 반성과 같은 관람 방식은 소멸하거나 희박해졌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좋은 전시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전시이고, 전시 중인 작품보다는 미술관이라는 건축적 대상을 경험하는 게 더 흔하고 재미난 일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인정하는 공공연한 진실이다. 영원한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당분간의 역사적인 시대의 범위만큼이나 아우를 수 있는 미적 지각과 경험의 형태를 찾아내어 그를 동시대의 미적 진실이라고 이름붙이는 일은 이젠 언감생심이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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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꼽은 한국 다큐멘터리 10선



노동자뉴스제작단 – 노동자뉴스1호

1. 김동원, 상계동올림픽 (1988)
<상계동올림픽>은 (반)제도적 실천으로서 독립 다큐멘터리의 기원을 이룬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개입과 참여의 주체로서 감독이란 저자의 면모를 뒤잇는 작가들에게 생생히 각인했다. 김동원이라는 감독의 등장을 세상에 알린 것만으로 이 작품은 가치가 크다.

2. 노동자뉴스제작단, 노동자뉴스 1호, 1989
노동자뉴스제작단은 한국 다큐멘터리 운동의 역사적인 형식을 증언한다. 운동으로서의 다큐멘터리, 교육과 선전으로서의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이어가고 있고, <노뉴단>은 그 원점에 있음에 분명하다. 다큐멘터리의 저자가 사회적 저자임을 환기하고 작업이 항상 역사적 시간에 정박해 있음을 알리는 급진 다큐멘터리운동의 원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변영주, 낮은 목소리(1995), 낮은목소리2(1997), 숨결(1999)
변영주의 위안부 할머니 3부작은 전시 성폭력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치며 이것이 손쉽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도록 더할 나위 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피해자라는 창백한 이미지에 관해서도 역시 저항하며 할머니들에게 말문을 열어준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란 물음에 이 다큐 시리즈는 성실하게 대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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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하고 진부한 마이클, 그렇지만….



Crosby Stills Nash and Young Live at Fillmore East 1970

1.

다큐테인먼트(docutainment)의 기린아, 마이클 무어가 다시 방문했다. 팝콘을 우물거리면서, 가끔은 킬킬 웃다가 또 가끔은 어이없어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 그를 능가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따분하고 진지하다고 알려졌던 다큐멘터리를 매우 재미난 오락거리로 만들어 내는 비상한 재주로 다큐멘터리의 지형을 바꾼 지 오래이다. 그러나 그가 선사하는 재미는 그저 그런 심심풀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심드렁하게 화면을 보던 자세를 냉큼 고쳐 앉도록 만드는 무어의 정교하면서도 신랄한 도발과 적극적인 개입의 퍼포먼스를 통해 생산되는 특별한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다큐멘터리의 절대적 공준이었던 재현의 객관성을 위반하면서 진실(truth)을 생산하고자 했던 그의 값진 노력의 성과이기도 하다. 포스트-진실의 시대에 그는 집요하게 진실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 점이 무어를 둘러싼 숱한 시비의 쟁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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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속에 숨은 몇 개의 사회

Aphex Twin – T69 Collapse

언제부터인가 디자인을 규제하는 가치들을 지시하는 말들이 스멀스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장 생각나는 말들을 몇 개 꼽자면 이런 것들 아닐까. “참여적”, “경험적”, “상호작용적(interactive)”, “개방적”, “협력적” “사용자 중심적” 등. 이는 디자인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디자인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상상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최근 나타난 디자인 실천의 변화를 아우르는 말로 디자인의 ‘사회적 전환(social turn)’이란 개념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각예술에서 나타난 사회적 전환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숱한 시각예술 분야 작가들이 택한 접근은 디자인에서의 사회적 접근과 딱히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을 띠기도 한다. 이를테면 유명세가 대단한 영국의 터너상(Turner prize)을 2015년에 수상한 시각예술 콜렉티브인 어셈블(Assemble)은 오랜 동안 지역을 먹여 살렸던 제조업이 사라진 후 일자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이를테면 리버풀의 산업용 도자 노동자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고 노동자의 공동체를 되살려내면서 동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판매함은 물론 그 결과를 전시의 형태로 소개한 등의 활동이 그에 해당될 것이다. 건축적이면서 디자인적이기도 한 이들의 작업은, 그럼에도 엄연히 시각예술 분야의 최근의 추이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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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줌-인

Dj Koze – Pick Up

줄리앙 프레비유의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궁극의 핀치투줌)>은 타공판 위에 설치된 물리치료기계에 연결된 손을 보여준다. 타공판의 지지대에 장착된 고리와 끈은 ‘핀치-투-줌(pinch-to-zoom)’ 동작을 완강히 제약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또는 구속에 저항하며 그 동작을 실행하려는 안간힘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꼬집어 확대해 보기란 동작을 가리키는 ‘핀치투줌’은 태블릿이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이들에겐 익숙한 관습적 동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복잡한 지식을 터득하고 조작을 수행할 필요를 절약하며 그 모두를 우아한 동작 하나에 집적한다. 이미지를 확대하기 위해 해당 영역을 설정하고 확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의 복잡한 정보처리와 명령을 행하는 대신 우리는 단지 두 손가락을 모았다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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