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문학이라는 이 씨앗을 어떻게 수확하면 좋을까



Olivia Newton-John – Physical (1981)

< 바이 유어 네임> 개봉되었을 즈음이었다. 이상 퀴어 영화에 관심이 시들하던 나를 움직여 극장으로 걸음을 딛게 만들 일이 있었다. 세상 둘도 없이 같은 성정을 지녔다고 알려진 누군가가 영화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굉장하군, 울렸다니. 나는 역시 세상 둘도 없는 헤테로인 친구를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사랑이니 열정이니 하는 화제가 나오면 수석(壽石)처럼 멀뚱멀뚱 눈만 끔뻑이던 친구에게 무엇이 심금을 울렸을까 궁금했다. 짧은 여름 휴가 기간 동안의 불꽃같은 사랑, 그리고 이뤄지지 못한 사랑을 수락해야 하는 비통함과 비통함을 견디는 꿋꿋함.

그리고 영화를 나는 정작 시대착오적인 퀴어 드라마에 적잖이 놀랐다. 퀴어의 전사(前史) 쓸데없이 해박했던 미욱함 때문이다. 영화는 포스트게이 시대에 접어든지 오래인 지금, 게이 시대의 어떤 신화를 천연덕스럽게 참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고 능청스럽다.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 이전’, 그러니까 게이 이전(pre-gay) 시대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나 가까스로 식별할 있을 동성애 담론의 유산 가운데 하나를 영화는 끌어들인다. 그것은 흔히들그리스 () 사랑(greek-love)’이라고 부르곤 했던 심미적인 동성애이다. 아니 동성애라기보다는 심미적인 열정과 등가인 것이었다. 동성애는 추하고 부덕하며 사악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허용하는 방편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리스 사랑이라면 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리스 사랑이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동성의 육체도 사랑하는 심미적 감수성을 축복하는 이름이다. 그리스 조각들은 미의 정수이다. 그리고 위대한 서구 문명과 문화의 기원이다. 얄궂은 점은 그리스 조각의 다수가 남성의 나체란 점이다. 그렇기에 그리스 조각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과 남성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다를 없다. 동성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애호하는 마음일 뿐이다. 그리스 사랑은 심미적인 감수성이 대단한 자들끼리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리스 사랑을 나누는 이들은 대단한 미감을 지닌 특권적인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기괴한 생각은 예술사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고자 했던, 그리고 역시 동성애자였던, 요한 요하임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에게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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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불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계

Maximum Joy – Stretch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오랜 불화가 종결되었다는 징후는 그들이 모두 악이란 개념을 향해 줄달음쳤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의 지적 인플레이션은 조지 부시의 악명 높은 ‘악의 축’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물론 그것은 동어반복에 가까운 진부한 말장난이다. 테러지원국을 지칭하고자 창안된 개념인 악의 축은 이미 테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적을 악의 울타리 안에 놓기 때문이다. 테러는 폭력이란 비유를 통해 정치적 행위를 선제적으로 윤리화한다. 윤리적 악당으로서의 적이란 시점은, 지구화 이후 미국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국가들을 가리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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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빈더처럼 a la Fassbinder

Fox and His Friends (1975) – Rainer Werner Fassbinder

<폭스와 그의 친구들 Faustrecht Der Freiheit>은 파스빈더 스스로 우둔한 프롤레타리아 게이 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하고 또 감독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아하고 세련된 중간계급 게이가 복권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게이를 등쳐먹고 버리는, 어쩌면 신파적인 게이 멜로이다. 할리우드의 멜로 황제인 더글라스 서크를 사숙했던 파스빈더의 작품 가운데, 아마 이 영화는 가장 신랄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파스빈더 식으로 살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그래서 “파스빈더처럼 à la Fassbinder”이다. 그는 계급과 사랑, 섹스, 섹슈얼리티를 파고드는 갈등과 불화, 적대를 탐색한다. 단 정체성에 대한 지루한 농담은 거기엔 없다. 소수자로서의 자기동일성을 단언하기에 바쁜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를 쳐다보자면 비동일성을 만드는 대립에 골몰하는 파스빈더의 영화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냉정한 야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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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Daughters of the SoHo Riots – THE NATIONAL

최순실게이트를 둘러싼 청문회가 진행 중이다. 이 사태에 연루된 자들을 에워싼 괴담에 가까운 추문들은, 주의해 듣자면 민망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쓰레기더미에서 집어올린 작은 오물의 단편을 꺼내 이것이 당신의 것이 맞느냐 다그칠 때, 우리는 일제히 한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곳은 곧 입술을 달싹일 증인들의 낯이다. 그들은 초조한 죄책감과 부산한 수치심에 쫓겨 어떤 낯을 지을 것이다. 낯빛은 헤아릴 길 없는 그 혹은 그녀의 내면적인 도덕을 비춘다고 우리는 확신하는 탓이다. 그래서 자신의 낯빛을 제 마음대로 조작할 줄 아는 ‘포커페이스’는 악인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연민을 잃은 채 위악한 미소를 짓는 표정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멀리하였다. 그 만큼 우리는 얼굴이란 표면에 깊은 윤리적 믿음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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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투사를 찾아서


Beacon – Drive

언제부터인가 근절해야 할 악 가운데, 폭력이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고 말았다. 국가폭력에서부터 가정폭력과 학교폭력,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서나 폭력은 낱낱이 색출하고 징벌해야할 대상이 되었다. 폭력은 모든 곳에서 악 중의 악의 자리에 등극하였다. 그런 탓일까. 나는 신문이나 인터넷을 뒤질 때마다 폭력에 삼켜진 세계의 심연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폭력이 그만치 절대적으로 투명한 악으로서 규탄 받아야 할까. 나는 예상할 수 있는 저항과 거부를 무릅쓰고 이를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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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라는 낱말을 되살린다는 것


Cut Copy – Future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엘 다녀오는 길이다. 제법 부담스런 참가비를 내고 참여해야 하는 자리라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등록을 하려 찾은 로비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번 행사에서 발표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 망설였다. 기본소득이라면 무조건 손사래를 치고 보는 것은 임금인상이 개량적이라며 발끈하는 것이나 매일반이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이 많은 것을 약속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마냥 거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많은 경우 빵을 달라는 사소한 요구에서 출발해 세상을 뒤바꿀만한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기본소득을 마냥 지지하기도 어렵다. 나 역시 기본소득이 시장경제를 넘어서거나 제한하는 전략으로 제 구실을 하려면 현명하고 사려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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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 basic income break through money fetishism?


Songs: Ohia – Back On Top

Basic income is a fascinating strategy to go beyond the poverty and a wide range of terrible economic and social effects brought about by neo-liberal capitalism. But we could not but raise whether it would be helpful to break through the money and commodity fetishism. In principle, basic income is based on the payment of money for redistribution of social wealth. While aiming to resist the inequality, it does not grapple critically with capitalist characteristics of money form. Basic income is trying to overcome the labor(-addiction) and consumer society, that is, work-fetishism. However, is it likely to sublate the money fetishism, along with the restriction of capitalist exploitation? I mean by the fetishism that money, commodity and (abstract social) labor are necessary social form and appearance in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Without it, capitalism fails to ope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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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날가

 

한 발짝 떨어진 마로니에 공원에서 전국 농민 대회가 열리는 주말 오후, 난 도우미를 맡은 공연을 위해 부산스레 극장을 드나들며 가끔 극장 문간에서 집회장에서 들려오는 구호를 들었다. 지하 극장에서는 젊은 안무가들이 몇 달 간 자신이 곤구한 작업을 선보였다. 그래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듯이 그들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나는 끈질긴 세상의 관성을 보는 듯 했다. 어쩐지 아도르노의 어느 글에서 본 듯한 문구가 오늘의 기분을 말해주는 데 적격일 듯한데 그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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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의 다도해를 떠다니는 여객선의 승객들 – 퀴어 영화에 대한 어떤 생각


James Blake – Radio Silence

얼마 전 세상에 나온 소설가 임성순의 신작 자기 개발의 정석은 제법 허를 찌른다. 이 소설은 우연히 비뇨기과엘 들러 전립선치료를 받던 중 전립선 오르가즘의 신세계에 입문한 중년 남자 주인공의 삶을 비춘다. 주인공은 나이 마흔 여섯으로, “그곳이 대한민국 평균보다 조금 작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은, 중산층의 대체로 무난했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만성전립선염을 치료받으러 간 그는 인생 최고의 굴욕을 겪는다. 버젓이 엉덩이를 깐 채 항문을 남의 손에 내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가 전립선마사지를 위해 처방받은 아네로스라는 신기한 도구에 눈을 뜬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기러기아빠인 그는 이제 변태와 게이라는 욕설이 주렁주렁 달린 게시판을 눈으로 밟으면서 “드라이 오르가즘”을 즐기는 신세계의 공동체에서 살아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멀쩡한 아니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순종 이성애자 중년 남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자라는 페르소나를 압축하는 ‘아재’ 혹은 ‘개저씨’의 화신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그는 뜻밖의 인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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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꺼져다오, 좆같은 호모새끼들아


오해를 미연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한마디.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시쳇말로 ‘폴리티컬리 코렉트’하기는 커녕 그 말만 들어도 사지가 부르르 떨리는 세칭 동성연애자 혹은 호모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동성애혐오적인 증오도 아니며, 동성애혐오를 내면화한 어느 비뚤어진 게이의 자기혐오도 아니라, 친애하는 나의 재수 없는 벗들에게, 우리가 동성애자란 이유로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을 털어놓고자 하는, 의리 반 푼어치 없는 욕설일 뿐이다. 이제 모두들 노골적인 자기의 음험한 욕망을 자제하며 사회의 보편적인 선을 유지하기 위해 짐짓 위선적인 공중파 텔레비전을 보던 시대는 사라졌다. 이를테면 미국 텔레비전을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가 보는 것은 이제 <코스비가족>이나 <달라스>가 아니라 <섹스 앤 시티>와 <퀴어 애즈 포크>이다. 케이블 채널이 창궐한 이래 우리가 바라보는 텔레비전은 갖은 싸구려 욕망을 전시하며 우리는 얼마나 솔직한가 얼마나 반항적인가 자화자찬하는 저능아들의 세계이다. 나는 거의 모든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증오한다. (고백하자면 내가 제일 증오하는 채널은 “온스타일”이다. 이 유치찬란한 채널의 미덕이 있다면 인생은 스타일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허무주의적인 채널 이름에 있다) 그러나 진정 내가 증오하는 프로그램의 리스트에 올라있는 것들은 대개 미국산 “리얼리티 쇼”이다. 우리 시대의 윤리적인 추문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현장 고발 치터스>나 <제리 스프링거쇼>같은 저질 폭로 프로그램에서부터 <미운오리새끼>같은 이른바 변신 쇼를 거쳐 <백만장자와 결혼하기2>, <배철러>같은 사랑을 두고 장난치는 기괴한 변태 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리얼리티쇼이다. 그러나 그 중에 날 가장 돌게 만드는 쇼는 단연 <퀴어 아이>이다. 그것은 적어도 게이로서의 내 삶의 위엄을 무참히 짓밟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퀴어 아이> 이후에 게이는 더 이상 성정체성이 아니다. 퀴어란 무엇인가?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상식적인 답변은 그것은 21세기 초반에 극성을 부린 어떤 소비자 집단의 정체성이란 것이다. <퀴어 아이>가 볼 품 없고 미련한 이성애자 남자를 끌어내어 그들을 ‘쿨’한 존재로 탈바꿈시킬 때, 그 극성맞은 놈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하는 몸짓은 쇼핑객의 제스처이다. 하긴 그들만 그러한가. 자유란 이념조차 상품의 카탈로그로 만들 줄 아는 이 멋진 “소비의 신세계”, 어디 한 구석 안 그런 데가 있는가.
<피처>라는 잡지의 청탁을 받고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