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적인 기억의 초라함


Max Richter – Dream 13

 

제8기후대의 시간은 무엇인가
2016 광주비엔날레가 내건 제목은 <제8기후대(예술은 무엇을 하는가?)>였다. 제8기후대란 현실에 없는 기후이자 미래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어떤 기후를 위해 마련된 이름을 가리킨다고 한다. 어쩌면 점성술에서 비롯된 신비한 말 같기도 한 이 시적 서정이 물씬한 개념은, 전시감독의 말에 따르자면 “예술가들이 사회 변화를 예측하고 예술에 대한 잠재력과 미래에 대한 투시력을 끌어내 예술을 무대 중앙에 놓자”는 포부를 담고 있다고 한다. 하필 ‘역사적인’ 도시인 광주였던 탓일까. 전시를 아우르는 생각을 전하는 글 속엔, 역사와 시간을 의식하는, 동시대 미술에서는 적잖이 기피되거나 묵살당하는 개념들이 각인되어 있다. 사회변화, 미래, 예술 같은 낱말들이 한 자리에 놓이는 것은, 적어도 지난 얼마 동안의 시간을 되새겨보자면, 드문 일에 분명하다. 미래나 새로움 이라는 시간이 오늘날 예술에 얼마나 진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지는 ‘동시대 예술’이라는 이름 속에 끼어든 “동시대”란 낱말 자체가 잘 말해준다. 동시대란 대관절 어떤 시대일까. 그것은 어떤 시기 혹은 시간을 가리킬까. 동시대란 말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두 동시대라고 부르는 몸짓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동시대란 말은 시간을 반성하는 어떤 접근이라기보다는 시간 없는 시간, 또는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언제나 자신이 지금의 여기에 있다는 현기증 나는 망상 속에 비친 희한한 시간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지난날의 예술과 대조하면 매우 아찔한 차이를 나타낸다. 미래주의이던 모더니즘이든 고전주의이든 그 모든 이름들은 시간을 의식하고 자신의 미적 행위 속에 시간에 대한 반성 혹은 의식을 집어넣는다. 신고전주의란 것이 이상적인 과거를 모방하거나 그것을 쫓는 것이라면 모더니즘은 그것의 반대편에 서 있을 것이다. 곧잘 울궈먹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마르크스의 경구,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버린다’는 말이 웅변하는 것처럼, 모더니즘은 오늘의 새로움의 충격, 그리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압력에 대한 승인하거나 비판하는 몸짓으로 부산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끝으로 시간과 역사는 예술 속에서 이상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과거는 이제 자신의 입맛대로 수장고나 자료실에서 찾아내어 진열되고 각색되며 조정될 수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것은 과거라기보다는 오늘의 취미와 관심을 위해 발굴되고 수집된 것에 가깝다. 아카이빙(archiving)이라고 불리는 동시대 예술이 애호하는 방법론은 대개 이러한 과거 재현의 전략을 쫓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억하기의 역설이라 불러도 좋을 결과를 초래한다. 아카이빙은 무엇이라도 누락되어선 안 된다는 듯이 집요하게 자료들과 문서, 이미지, 흔적, 목소리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미처 말해지지 않은 언어와 이미지들을 발굴하고 또 표상하겠다는 다짐을 되뇌인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기억 상실에 깊이 가담한다.


기억하기의 형식들
이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형태는 기억이 시간을 역사화하지 못한 채 연대기 속의 어떤 한 시간대로 과거와 미래란 시간을 축소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 현대사를 기억하는 방식들이 그렇다. 지난 수십년간 출간된 역사 서적의 상당수가 “식민지 모더니즘의 풍경” 따위의 이름을 달고 있다. 1930년대라는 연대기적 시간은 ‘시기구분(periodization)’이라는 기억의 역사적 규범을 날렵하게 거부한다. 식민지 시대라거나 개발독재시기라거나 혹은 식민지자본주의단계라든가 하는 시대구분의 표장(標章)은, 민족주의적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서술에서 흔히 듣던 말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말들은 벌써 고릿적 말처럼 들리거나 ‘촌스럽게’ 들린다. 그러나 이는 비단 ‘이론’이나 ‘학술’이라 부를 수 있는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대중문화 속으로 발을 디디면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 경험과 재현이 압도하고 있음을 금방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하라>란 이름 뒤에 연대를 붙여 연속 방영되었던 어느 TV 드라마 시리즈는 오늘날 기억과 시간의 관계가 어떻게 조립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거기에서 우리는 놀라우리만치 세심하고 치밀한 역사의 고증을 만난다. 해당 시기의 일상적 생활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시청자들의 찬사와 지지를 받으며, 유행과 풍속을 상징하는 소품과 의상, 말투, 실내 인테리어 따위를 ‘깨알같이’ 동원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미술 전시에서 흔하게 보는 아카이빙과 전연 다름없는 솜씨와 재주로 1994, 1997년을 혹은 1988년을 ‘아카이빙’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드라마를 볼 때마다 마치 그 날의 시간을 완벽하고 투명하게 제시하려는 강박적인 충동이 운반한 인물들을 만난다. 어느 할리우드 영화의 제목이었던 ‘토탈 리콜(total recall)’ 즉 ‘완전 기억 능력’처럼, 대중문화 속의 기억하기는 과거를 하나도 빼놓지 않은 채 기억할 수 있는 듯 기염을 토한다. 이를 두고 어떤 학자가 짓궂게 고안한 개념을 빌자면 시간의 “박물현실화(musealization)”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간을 공간적으로 펼쳐 놓아 관람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실천적 전략을 말하는 것으로 시간 자체가 점차 심미화(aestheticization)되어가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마치 패션을 말할 때나 아니면 수집가들이 말할 때처럼 과거는 점차 ‘빈티지(vintage)’처럼 취급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말로도 번역된 사이먼 레이놀즈의 책 <레트로 마니아>를 들춰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는 영미 대중음악에서 성행하는 기억하기의 형태를 통렬하게 고발한다. ‘펑크 이후’ 세대인 그에게 즉 시간의 변화로서 음악을 경험하고 기억했던 그에게, 기억 상실증에 걸려있으면서도 기억비대증에 걸린 것처럼 시늉하는 ‘동시대’ 대중음악의 습속이 얼마나 역겨웠을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런 기억하기의 형식과 더불어 기억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성 역시 현저하게 바뀐다. 그들은 과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마주하던 인물이 더 이상 아니다. 즉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이 자신이 재현하는 시대를 알레고리화하는 ‘역사적인 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오늘날 주인공이나 배역들은 역사의 증언 혹은 증거 자체인 듯 나타난다. 그 결과 인물이 겪는 개인적 체험과 사건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고 대개 멜로드라마와 같은 상투적인 이야기 속에서 마치 화면에 등장하는 물질적인 사물이나 배경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서사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특성은 기억하기의 두 번째 형태를 통해 더욱 적나라해진다. 그것은 기억의 ‘자기-반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하기는 ‘전후(前/後)’의 의미체계와 떼어 놓을 수 없다. ‘프랑스 혁명 이전과 이후’라든가 ‘광주 항쟁 이전과 이후’ 같은 이전과 이후의 ‘가르기’ 혹은 ‘분할’은, 기억하기의 대상이 되는 대상인, 역사를 ‘변화’의 원근법 속에 자리하도록 한다. 그리고 기억하기는 그러한 이전과 이후의 차이를 기념, 축하, 애도 등을 위해 기념식이나 기념물을 마련함은 물론 다양한 의례, 행사, 관습적 행위 등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거의 모든 날들이 기념일(암의 날, 발렌타인데이, 저축의 날, 철도의 날, 발명의 날, 장애인의 날 등등)로 넘쳐난다. 무엇 무엇의 날이란 이름으로 마련된 기념일들은 어떤 역사적인 전/후의 격변을 기억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오늘 각각의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며 쏟는 관심과 소망을 두루 망라하고 전시한다. 그와 더불어 시간은 언제나 전/후의 차이 없이, 혹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의 연속으로서 나타난다. 시간의 고요하고 따분한 흐름 속에 점점이 박혀있는 기념일은 몇 주년이란 이름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선을 긋는다. 그리고 비록 아무리 진부하고 상투적인 말로 치장되어 있다 해도 시간의 원근법을 이야기로 직조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억되는 시간은 과거의 흔적이나 미래의 약속이나 징후와는 아무런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저 시간을 표지하는 증거들, 거의 ‘물신화’되었다 해도 좋을 시간을 증빙하는 대상들을 전시하고는 시간에 관해 모든 것을 말했다는 듯이 시치미를 뗀다. 그런 점에서 그 날의 시간은 그 날의 시간이고 오늘의 시간은 오늘의 시간일 뿐이다. 이러한 몸짓은 각각의 시간들이 자신을 지시하고 반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터무니없는 폐소공포증적인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좋았던 과거보다 나쁜 오늘로부터
그밖에도 우리는 아카이브적 기억하기로 불러도 좋을 기억의 형식에 딸린 한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를 쓰라리게 만드는 것은, 시간을 둘러싼 변화를 가리키는 이행이나 변화라는 관념이 아카이브적인 기억 속에서는 자리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카이브적 기억은 전례없이 기억의 정치를 강변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약속한 만큼의 선물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사적인 기억, 정체성의 기억을 기억의 바구니 속에 담음으로써 더없이 기억을 풍부하게 만들어내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기억하기의 즐거움에 탐닉한 채 비판적인 기억을 통해 상대하고자 했던 나쁜 기억의 형식에 도전하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잊어버리기 일쑤이다. 삭제되거나 추방되었던 기억을 복원하고 발굴하는 것은 기억의 폭력에 대한 싸움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자신에게도 과거가 있었다며 흐뭇한 자족감에 빠진 채 기억의 폭력을 잊는 짓이다. “좋았던 과거의 것들이 아니라 나쁜 오늘의 것들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는 벤야민과의 대화를 통해 알려진 브레히트의 유명한 경구이다. 이 말에서 영감을 얻어 할 포스터(Hal Foster)는 <나쁜 새로운 날들 Bad New Days>이란 책을 쓰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른바 동시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예술의 역사적 흔적을 기억하고자 한다. 이 때 “나쁜 새로운 날”이란 말은 이중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성이 차지 않는 오늘의 예술적 실천에 비해 장밋빛으로 보이기만 하는 지난 예술에 향수에 빠지려는 충동을 예방하려는 선제적인 몸짓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아방가르드의 죽음 이후 예술에서 사라져버린 시간을 상대하는 방식, 즉 ‘비판성(criticality)’을 만회하려는 몸짓이기도 하다. 설령 그것이 기대하지 않았던 나쁜 내일이라고 할지라도,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의 현실에 깃든 모순을 상대하는 예술은, 곧 비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비판을 뺀 채 시간을 상대하는 것은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는 슬로건에 넋을 잃은 채 시간의 진실을 스르르 손아귀에서 놓아버리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_국립현대미술관 웹진 아트뮤에 기고한 글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