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뭐길래

Crystal Tokyo

좀체 걸음을 않던 서점엘 다녀왔다. 마침 일이 있어 일본엘 다니러 간 길이었다. 돌아오기 전 날 짬을 내어 도쿄 시내의 서점엘 들렀다.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40년간의 오랜 침묵 끝에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고 주변에서 한결같이 입을 모으던 터였다. 그러한 변화에 부응하는 만큼의 세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였다. 서가를 둘러보다 역시 눈에 띄는 것은 요즈막 철학적 유행을 선도하는 새로운 유물론 관련 책들이었다. 그것은 대개 외국 유명 저자들의 대표작들을 번역한 책들이었다. 마치 마케터처럼 서구의 최신 철학의 흐름을 소개하기로 소문난 잡지에서 두어 해전 그에 관한 특집을 다룬 터라 더욱 그런 듯 했다.

그런데 이런 책들 못잖게 자리를 차지한 것이 눈에 띄었다. 이는 사회와 일상을 다룬 책들이었다. 예술이론이나 비평 관련 책들 가운데 큰 몫을 차지한 책들은 사회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었다. 사회?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친 세상에서 가장 큰 매력을 발휘하는 낱말이 사회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회 따위는 없다고 큰소리치려 신자유주의의 포문을 열었던 어느 정치가의 억지에 세상은 그렇게 반격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회학을 공부했고 또 가르치는 내게 오늘날 유행하는 사회란 말은 어쩐지 생뚱맞다. 어딜 가나 듣게 되는 사회적 경제, 사회참여 예술 등의 말 속에 실은 사회란 것은 사라진 채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회란 말은 대개 참여와 협력, 공동체적인 유대 같은 말과 짝을 이룬다. 이는 말하자면 사회란 나와 네가 함께 만들어내는 관계라는 것을 가리킨다. 어쩌면 나무랄 데 없는 말처럼 들리는 이러한 풀이 속엔, 사회를 너무나 만만히 보는 태도가 스며있다.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사회를 두고 보이지 않는 손이란 말을 제안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을 생각해도 좋을 듯싶다. 그의 말을 시장경제의 신비로운 조화를 찬미하는 것으로 새기는 것은 일면적이다. 적어도 그는 반쯤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탓이다. 그 진실이란 사회란 너와 네가 관계하는 너머의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몇 년 전 세상을 가격했던 금융위기를 떠올려 봐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패닉이니 광기니 하는 말로 헤아렸다. 요컨대 그것은 당신과 내가 커뮤니케이션하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음을 암시한다. 보이지 않는 손도 그런 것이다. 시장경제란 너와 내가 뜻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런 의도를 넘어서서 지배하는 구조적 폭력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무의식에 가깝게 작동하는 사회를, 바람대로 만들어갈 수 있는 공동체 따위로 상상하는 것은 소망일뿐이다. 서로가 힘들지 않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관계를 만들겠다는 선량한 꿈은 은행, 주식시장을 비롯한 투기적 금융 같은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오늘의 증시’나 ‘이 시각 환율’은 너와 내가 작정하고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끼어 들 수 없는 생생한 자연처럼 군림하는 사회의 힘이다. 사회를 살리고자 한다면 바로 이러한 힘을 길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는 따뜻한 나눔과 배려의 윤리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경제는 관둔 채 그 바깥에서 사회를 이룬다는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회를 생각한다는 것은 경제를 언제나 바싹 의식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는 필수적이다. 경제의 바깥에서 상상된 사회가 단지 윤리적인 소망에 그치고 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_한겨레신문 크리틱 칼럼에 기고한 글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