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라냐는 물음을 곱씹는 밤

Mono No Aware(もののあわれ) – Various Artists

 

결국 호기심을 못 누르고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괘씸한 마음에 껐다 켰다 하길 되풀이하였다. 결국 반도 넘기지 못한 채 관전을 단념하고 술을 꺼내들었다. 몸 속 깊이 어딘가에서 ‘끄응’ 하는 신음이 터져 나올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측은한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서글프고 비참했다. 다음 날이 되어 찾아본 뉴스에는 그런 것을 두고 안보프레임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북한을 주적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다그치는 물음에, 도대체 안보관은 무엇이냐고 따지는 물음에, 국가보안법을 어떻게 할 작정이냐는 트집에, 언론이 붙여준 냉소적인 이름이다.

마치 이념이란 게 정치적 계산에 따라 셈하고 동원할 수 있는 상술을 가리키는 이름인 듯이 말이다. 세상은 이념 따위는 먼지처럼 여기는 듯이 보이는데, 돌아온 정치의 계절은 다시 그 이념에 온갖 무게를 싣는다. 여기에서 이념은 어떤 세상에 살 것인가를 두고 목숨을 거는 가치나 목표가 아니라 누군가를 비토 해야 할 흉기가 된다. 종북 좌파란 말까지 동원되면 그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낙인이 된다. 세상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것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순간 씨를 말려야 할 악이 된다. 이처럼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을 향해 협박과 위협을 일삼는 나라에 산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갑자기 데라야마 슈지의 영화를 꺼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아방가르드 대표적 감독인 그의 영화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1971)이다. 잔뜩 선동적인 제목을 단 이 영화는 철부지마냥 허무주의에 빠진 어느 아나키스트의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볼 적마다 통렬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먼발치에서 세상에 대해 훈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살갗에 닿을 듯이 세상에 붙어 있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나는 이 영화가 끝나갈 즈음 주인공 소년이 성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듯이 카메라를 향해 쏟아대는 대목에서 쩌릿한 기분이 든다.

어느 어두운 골목길에서 소년은 역사는 대관절 무엇에 쓰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가족도, 국가도, 세계도 없는 건 아니냐고 따진다. 그런 뒤 그는 슬픔 가득한 목소리로 외친다. “중학생 때 공원에서 작은 도마뱀을 잡았다./코카콜라 병에 넣고 길렀는데, 자라자 빠져나오지 못했다./코카콜라 병에 갇힌 도마뱀!/코카콜라 병에 갇힌 도마뱀!/빠져나올 힘이 있느냐, 그러냐, 일본?/그러냐, 일본?/부끄럽다 조선해협의 고혼이!/이 나라는 죽을 가치가 있느냐!” 코카콜라 병에 갇힌 도마뱀 같은 나라에 산다는 부끄러움. 냉전 체제의 질서에 빌붙어 가치니 이념이니 하는 것 따위엔 콧방귀도 뀌지 않은 채 탐욕에 휘청대는 나라에 산다는 수치심. 제 나라에 가겠다고 인력비행기를 만들어 조선해협을 건너가려다 죽은 어느 재일교포 소년을 향한 부럼.

그리고 소년은 귀를 먹먹하게 만들 만큼 큰 소리로 외친다. “이 나라는 죽을 가치가 있느냐?” 사느라, 살아가느라, 잘 살려 발버둥 치느라 온 힘을 다하는 세계에, 죽을 가치가 있는 나라냐고 묻는 것은 배부른 소리일까. 아니다,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세계에 산다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기쁨이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희망도 꿈꾸지 말라는 세계에서 떼죽음을 당한 것이 분통해, 이런 것도 나라냐고 묻지 않았을까.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이념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이 더욱 각별히 떠오르는 건 아닐까. 자꾸 곱씹게 된다, 잠 못 이룬 채.

_한겨레신문 칼럼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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