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민주주의를 넘어 민주주의의 정치로

들어가며
필자가 청탁받은 글은 ‘한국의 민주화, 어디까지 왔나’란 물음에 답하는 다양한 글들 가운데 하나이다. 구체적으로 필자가 청탁받은 것은 문화적 민주주의 혹은 일상의 민주주의란 것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민주화 같은 다양한 ‘영역’ 혹은 사회의 ‘부분’에서의 민주화처럼 ‘일상’ 혹은 ‘문화’에서의 민주화의 정도를 가늠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이 필자가 맡은 몫일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런 청탁취지를 조금 거스르며 제시된 주제에 관하여 필자의 생각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필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부분 혹은 영역의 민주화란 생각 자체이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비록 그것이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에 대한 합의 혹은 상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한 가지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87년의 민주 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지배집단으로 등장한 ‘민주화 세력’이 강요하였던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일 뿐이다. 나아가 필자가 생각하기엔 그런 생각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제한하거나 위협하는 장애일수도 있다.
물론 필자는 문화 혹은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주의란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거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그것이 민주화를 위해 결정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삶에서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과 진전은 언제나 민주주의에 관한 특정한 규범을 통해 매개된다. 따라서 일상과 문화에서 민주주의를 다룬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고 평가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규범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일상의 민주주의란 주장이 범람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상의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며, 그에 더해 민주주의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강화하고 정당화할 따름이라면, 일상의 민주주의란 주장은 매우 위험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일상의 민주주의를 분석하기 위하여 그런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민주주의의 규범을 문제 삼고 분석하는 것이 불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일상생활과 문화에서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인가를 다루기에 앞서 그런 물음을 던질 수 있다고 믿는 전제에 대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편집자와 독자 여러분에게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시 구차한 핑계를 대자면 민주화의 정도를 가늠하기에 앞서 이미 무력한 시쳇말이 되어버린 민주주의란 개념을 재검토하는 것, 나아가 민주주의를 다시 민주화하는 것이야말로 민주화의 정도를 가늠하는 물음에 답하는 올바른 시도일 것이다. 이런 핑계가 빗나간 이 글의 내용에 대하여 용서가 될 수 있길 바란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987년의 민주 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의 전망을 둘러싸고 이뤄진 광범한 합의는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분단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였던 억압적인 권위주의 정치권력을 민주화하였으므로 이제는 이를 사회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고 정착시켜야 한다는 논리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그간 널리 확산되었고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적어도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시민사회’가 국가에 대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계를 지닌 것일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민주주의는 더욱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우려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억압적인 국가권력을 규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은 커졌지만, 거꾸로 불평등과 빈곤을 심화시키는 경제적 논리를 대표하고 강제하는 또 다른 시민사회의 권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것이 바로 지금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제 억압적 국가권력에 민주적인 시민사회가 대치하는 형태가 아니라, ‘보수적 시민사회’라 부를 수 있는 영역, 즉 독점 재벌과 기업가연합 그리고 언론 매체 및 보수적 시민운동 등과 ‘민주적 시민사회’라 할 수 있는 영역이 대립하는 모습으로 민주주의의 공간이 틀지어졌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에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의 지형이 바뀐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단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적어도 민주화 과정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와 그 논리라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곧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란 문제가 될 것이다. ‘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의 시대가 무엇인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보수세력이 ‘개발연대’라고 부르는 것이든 아니면 진보 학계나 사회운동이 ‘종속적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이든,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이었다. 이는 분단 이후 남한에서의 자본주의, 즉 미국에 종속된 채 국가의 주도와 지원을 통하여 이뤄진 자본주의 발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분단을 배경으로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동원하며 민주적 기본권을 상시적으로 제한할 수 있었던, 강력한 국가의 지배로 나타났고 따라서 이 시기에 민주주의가 곧 국가의 민주화로 여겨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즉 이 시기에 민주주의란 곧 국가의 억압적 통제로부터 벗어나 시민사회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합의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어 1990년대 후반 완결된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델을 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1970년대 후반부터 이미 한계에 직면해 있던 한국 자본주의는 1987년의 민주항쟁을 겪으며 더 이상 전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강력한 국가의 후견과 보호를 통해 성장할 수 있던 한국 경제는 이제 지구화라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직면해야 했다. 나아가 합법적인 권리를 획득하게 된 노동조합운동과 그것의 세력화는 기존의 축적 체제를 더욱 한계에 이르게 하였다. ‘병영적 노동통제’를 통해 노동자를 훈육, 동원함으로써 축적을 지속할 수 있었던 현실은 사라졌지만 그것은 새로운 권력에 의해 대체되어야 했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를 가리키는 표어라 할 수 있는 ‘구조조정’이나 ‘유연화’란 용어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경제 질서의 재편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구조조정과 유연화란 평생직장의 소멸, 실업율의 증가, 비정규직의 확대와 같은 고용 형태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활동을 조직하는 규칙과 질서가 전반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고용 형태의 변화는 그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 고용을 보장하고 노동을 통해 획득된 소득 그리고 그것의 분배를 통해 사회를 관리하던 체계가 무너질 때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기존의 경제 질서가 비민주적인 것이라는 것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서구 사회는 물론 한국 사회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행사했던 ‘산업민주주의’나 ‘일터의 민주화’같은 개념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런 개념들은 모두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란 개념을 내걸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경제 질서가 등장하게 된 것은 악착같이 이윤을 추구하려는 자본의 이해 때문인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새로운 경제질서가 등장하게 된 이유인 점은 맞지만 그것은 그것에 관련되어있는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의 요구를 통합함은 물론 그것을 새로운 경제 질서의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함으로써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등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개념이 바로 민주주의와 민주화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경제 질서가 등장하고 움직임일 때 그것 역시 언제나 민주주의, 민주화와 같은 개념을 사용한다. 따라서 민주주이란 개념은 정치현상이나 제도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또한 특정 사회 세력이 독점하여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주주의에 관한 생각을 좀 더 다듬을 필요가 있다. 먼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것에서 우리가 가정하는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국가의 통제와 억압에서 벗어난 (시민) 사회란 관념에 크게 기대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민주주의의 요구와 부합할 수도 있다.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는 관료적이고 비효율적인 국가의 개입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개인과 기업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이 이뤄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은 곧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일치하는 것이라는 의혹을 떨치기 어렵다. 그렇다면 에두르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주도하였던 입장, 즉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대란 논리가 혹시 민주주의에 반하는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새로운 자본주의의 질서와 부합하는 것임은 물론 나아가 그것이 유연하게 움직이기 위한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결국 민주주의를 기만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민주주의란 것이 현재의 사회적 상태와 단절하여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기 위하여 마련된 정치적 원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곧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변화를 가로막는 질서의 원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분의 민주주의란 없다
이런 점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입장에 대해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이들은 더 이상 국가와 시민사회의 대립이 아니라 시민사회 간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민주주의의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입장을 내놓음으로써 현재의 민주화 과정이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에 주목한다. 즉 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현재의 합의가 제시하는 민주주의란 것이 보수적 시민사회에 의해 주도될 때, 그것은 평등의 원칙을 위반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왜곡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국가 대 시민사회의 상태에서 벗어나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증대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현명 하게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옹호하지만 그것이 보수적 시민사회에 의해 독점적으로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인 시민사회 즉 노동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시민사회가 경쟁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렇지 않다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올 따름일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신랄한 충고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현재의 상식을 반성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그 역시 근본적인 한계에 갇혀있다. 그것은 이 역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전제에 있어서 자신이 비판하려고 하는 입장과 그다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것은 보수적 시민사회와 민주적 시민사회를 마치 이미 주어져있는 사회의 부분들로 간주하고 나아가 이 둘을 마치 대칭적인 관계에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국가 대 시민사회의 관계에서 시민사회 내부의 갈등으로 민주주의를 둘러싼 공간이 변형되었다는 주장을 통해 국가를 손쉽게 무시함은 물론 결과적으로 보수적 시민사회가 제시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적극 수용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이 글에서 다루려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첫 번째의 한계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보수적 시민사회와 민주적 시민사회가 서로 대칭적으로 관계한다는 논리는 적어도 겉보기엔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하면 알 수 있듯이 현재의 ‘보수적 시민사회’(자본)는 경제의 논리라는 보편적인 운명을 들먹이며 마음껏 ‘민주적 시민사회’(노동)를 규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이다. 보수적 시민사회는 전지구화라는 보편적인 운명을 따르고 경제의 성장과 회생이라는 보편적인 이해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반면, 민주적 시민사회는 그런 논리에 반해 자신의 부분적이고 특수한 이해를 보장하기 위해 다투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정리해고의 합법화를 필두로 비정규직의 도입과 확산이 이뤄진 저간의 과정을 생각해보자. 이것은 단순히 고용의 감소를 인정한다는 차원을 넘어 보수적 시민사회가 제시하는 사회에 대한 논리 자체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고용보장이란 단순히 노동자의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기술적인 조처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성원에게 고용을 보장하고 직업 활동을 통해 얻은 수익을 통해 사회적 부를 분배하고 조정한다는 뜻에서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 자체를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용 유연화란 단순히 해고와 실업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사회를 지탱하여 왔던 원리 자체를 폐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리해고는 수많은 사회적 쟁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곧 새로운 사회질서를 둘러싼 갈등 전체가 집약되는 근본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리해고’나 ‘비정규직’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회생하기 위하여 치러야 했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대가인 것이 아니라 곧 기업가적 위치에서 사회를 표현하고 설명하는 원리를 자명한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굳이 도식화시켜 말하자면 그것은 이해를 둘러싼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대립의 문제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보수적 시민사회와 민주적 시민사회의 갈등은 각기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 간의 갈등도 아니고 서로 대등한 위치에 선 부분들 사이의 대립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갈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시민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강조하는 이 입장 역시 민주주의를 ‘부분’의 민주주의로 본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적 상식, 즉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대란 관점과 일치한다.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대’란 관점은 국가의 민주화를 넘어 이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공고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민주주의가 사회의 각 부분에서의 민주주의로 절대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을 망각한다. 사회가 각 부분으로 나누어진 질서정연한 전체로 바라보는 관점은 항상 이미 비민주주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각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로서의 사회란 말보다 더 비민주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사회를 각 부분으로 구성된 전체로서 바라보는 관점은 언제나 지금의 사회를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사회로 바라보는 지배의 입장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기댈 경우 민주주의란 행정(government) 혹은 통치의 문제로 전락해 버린다. 이를테면 과거의 민주화 투쟁의 시기에 널리 사용되었던 민중이란 개념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주류 사회학자들은 무익하고 또 우스꽝스럽게도 그것을 다양한 사회집단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객관적인 실체로 정의하려 애썼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민중이란 개념을 사용했던 이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이 사회의 각 부분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사회학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민중이란 현재의 사회를 정상적인 유일한 사회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과 그들의 저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을 사회의 부분들의 집합으로 환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민주주의는 현재의 사회 그리고 그것과의 단절이라는 그 틈새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분들 사이의 관계의 조정이라거나 각 부분의 민주화란 생각보다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생각은 없을 것이다. 이는 사회의 다양한 부분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들 각각의 정체성에 근거하여 민주주의를 구체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일상의 민주화라는 역설
이에 비추어 일상의 민주주의란 것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교육 민주화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적어도 1990년대 이후 혹은 ‘서태지 붐’ 이후 획일적인 규율에 근거하여 학생들을 통제하는 학교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교육을 민주화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시하여 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입시위주의 제도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자율성에 기반한 교육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육의 민주화가 ‘지식기반사회, 정보화시회, 평생학습사회’에 부응하는 교육 개혁이라는 지배 집단의 청사진과 얼마나 다를 바 없는 것인지를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지배집단은 변화된 경제 질서의 논리에 부응하는 사회적 주체를 길러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혁은 교육 현장의 민주화 혹은 문화적 민주주의란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적 상식이란 관념과 함께 장단을 맞추며 등장한다. 교사의 비민주적인 권위에 맞서 학생들의 학습권을 존중하며 교사들의 능력을 평가하여 무능력한 교사들을 퇴출시키거나 자신을 계발하도록 자극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민주주의에 호소한다.
따라서 자발적인 참여와 자율성, 교육 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빌자면 자기주도적인 학습주체란 말은 곧 교육의 민주주의적 주체의 모습을 압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타율적, 훈육적인 교육의 모델이 강요하는 학생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기주도적인 학습자라는 모습은 현재에 통용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비추어보자면 곧 민주적 주체의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많은 청소년들은 이제 입시 교육의 굴레보다 더 가혹하고 숨 막히는 족쇄에 묶인 것 같다고 호소한다. 그들은 비민주적인 ‘학교 사회’가 요구하는 형식적인 규율보다 민주적인 ‘학습 사회’에서 더 잔인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음을 토로한다. 이제 학생들은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자기책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자신의 선택과 결과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음산한 협박뿐이다.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선물받은 민주적인 학생은 자신의 자유와 선택을 책임지고 인정받기 위해 더 많은 사교육 비용을 지출하고 더 많은 학습시간에 시달리며 공부에 더해 자신의 자율적인 개성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강박적으로 문화적인 소비에 집착한다. 따라서 학습 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교육자본의 세습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모든 일에 열성적인 몇 명의 팔방미인 아이들과 더 이상 입시교육을 핑계 삼아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대다수의 무능하고 무력한 아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례보다 더욱 우리를 아연케 하는 것은 ‘일터에서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들은 이른바 ‘자기계발서’들이다. 자기계발서는 공통적으로 ‘조직인간’ 시대의 직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사장이나 상사의 눈치에 따라 타율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직장,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해야 하는 경직된 시계형 직장, 자신의 능력과 열정에 관련없이 모두 획일적인 임금을 지불하던 회사를 규탄한다. 이들은 모두 삭막하고 개성 없으며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던 ‘비민주적인’ 사회를 고발한다. 이는 모두 능력과 열정에 따라 임금을 지급받는 획기적인 민주적인 임금제도로서의 ‘연봉제와 계약제’, 자신의 자유와 선택에 따라 일하는 민주적인 회사 문화로서의 ‘유연근로제’, 주어진 일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적극적으로 투입하는 ‘지식근로자’ 등과 같은 새로운 경영 관행과 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금만 살펴보면 새로운 경제 질서가 요구하는 새로운 노동 관리의 테크닉, 흔히 말해 새로운 경영 기법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개념이 단연 일터의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임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유연화와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에게 실업과 고용불안, 생존의 위기와 같은 음산한 모습으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터의 민주주의, 자유로운 노동자와 같은 매력적인 모습으로 도착한다. “직장은 인생을 즐기기 위한 옵션이다. 능력에 있어서는 차별받고 싶다. 회사 밖에선 내 방식대로 산다. BC Top Point로 특권을 누리세요”라는 어느 신용카드회사의 광고 문구처럼, 이제 노동자들은 직장을 가고 싶지 않지만 먹고 살기 위해 가야하는 삶의 굴레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실현하는 곳으로 여기도록 종용받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이제 회사와 공장에서 일을 하지만 이제 업무지시서를 통해 전달되는 일, 관료적인 공장의 시대에서나 있었던 ‘직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과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물론 그것은 분명 노동자로부터 노동력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방식의 변화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언제나 일터의 민주화란 개념을 통해, 직장 내 민주주의란 개념을 통해 이뤄진다. 이를테면 이제 기업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일은 생산성과 능률이란 개념을 통해 이뤄지지 않는다. ‘일하기 좋은 직장’이나 ‘학습공동체’, ‘기업문화’, ‘다면평가’ 등의 새로운 경영 기법은 한결같이 일상생활의 민주화, 일터의 민주주의란 개념에 기대고 있다. 따라서 일터에서의 노동자의 삶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새로운 규범은 언제나 민주주의이다. 따라서 자신을 실현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고용과 임금 체계는 계약제와 연봉제, 성과급제 등이다. 물론 이런 제도와 관행은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인 낡은 일터의 규칙인 연공서열제와 종신고용제를 대신한 민주적인 것이다.
일상의 민주화로부터 정치의 민주주의로
물론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들이 우리 시대의 일상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취하는 일반적인 모습이란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터에서의 민주화란 이름으로 직위를 막론하고 회장부터 말단사원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인 것인지에 관하여 생각해 보아야한다. 물론 직위의 차이에 따른 부당한 강압과 폭력, 교사와 학생 사이의 권위적 관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에 관한 상식, 즉 민주적이기는 커녕 새로운 기성 질서가 요구하는 이상적 주체의 모습을 민주적 주체라고 이름 짓고 그것에 복종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정작 민주화의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관점으로부터 벗어나는 조건에서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적 문화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에 대한 어떤 답변을 내놓을 것인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성차별, 연령차별, 신체 능력에 따른 차별, 지역차별 등의 다양한 차별은 분명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들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회의 각 부분의 문제도 아니고, 여성, 청소년, 장애인, 이주민 등의 특수한 사회집단의 이해관계의 문제도 아니다. 여성의 차별을 극복하는 것은 여성의 이해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 의존하여 작동하는 사회를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피해자란 창백한 얼굴에 가두고 그들을 자신의 이해의 대표자로 만드는 것보다 성의 민주화에 해가 되는 주장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사회의 부분들의 이해를 협상하고 대표하는 것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투쟁을 가리키는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을 정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치의 시대는 죽음을 고했으며, 우리에게 남아있는 민주주의의 문제는 사회의 다양한 각 부분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차이에 바탕하여 자신의 이해와 욕구를 실현하는 사회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자주 듣는다. 물론 그것은 곧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주장이기도 하다. 일터에서의 민주화에 관하여 마음껏 주장할 수 있지만 우리는 다른 경제 질서, 다른 분배의 원칙에 관하여 상상하는 것 자체를 거의 금지당하고 있다. 일터의 민주화란 주장 속에 담긴 민주주의가 일터에서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적 규칙을 바꾸는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민주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이겠는가.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기획은 언제나 바로 앞의 민주주의, 즉 정치를 제거한 민주주의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현재의 사회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행위로 환원된 민주주의이며, 정치가 더 이상 불필요한 세상의 민주주의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거듭하여 듣는 소리, 정쟁을 포기하고 이제는 민생에 나서야한다는 이야기에 대하여 우리는 즉각 반박하여야 한다. 문제는 정치이고, 정치는 민생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에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선택과 결정의 차원이라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1987년의 민주 항쟁은 정치의 민주화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에서의 삶을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민주 항쟁이 사회의 모든 문제에 관하여 민주주의적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선택을 내리는 행위였고 그것은 마법처럼 사회의 모든 문제를 새롭게 민주화하도록 이끌었다. 따라서 민주적 문화는 시민교육을 통해, 캠페인과 교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회에서의 삶을 선택하기위한 결정,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규칙 안에서 사회를 관리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선택을 하는 것, 즉 정치로서의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적 문화는 파생한다. 민주적 문화가 결핍하여 민주주의가 위기에 몰리는 경우란 없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함으로써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민주화가 질식당하는 경우만 있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현 단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의 비극이자 교훈일 것이다.

– <기억과 전망> 겨울호의 청탁을 받고 쓴 글. 일상의 민주화란 각론에 해당하는 글이었는데 청탁 취지와 겉돈 탓에 게재가 거부되었다. 편집진 측의 의견은 이미 다른 부분에서 서술된 부분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는 이유였다. 스스로 생각키에도 너무 모난 글인 듯 하여 받아들이기로 했다. 화해하기 어려운 관점을 비난하느라 진력한 글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요즈음 나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관심이 이 글에서도 예외없이 반복되었던 듯 하다. 보다 길게 쓴 글인데, 특히 현재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비판적 학계의 주장에 대한 나의 불만을 자세하게 서술한 부분을 뺐다. 특히 국가의 문제에 관한 서술 부분을 불필요한 듯 하여 덜어냈다. 주제 넘는 주장이기도 하고 아직은 여물지 않은 생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7 thoughts on “일상의 민주주의를 넘어 민주주의의 정치로”

  1. 요즘 < 한겨레21> 자기 광고에는 학교공부나 수능 안하고도 시사주간지를 열심히 읽고 수시모집으로 서울대 인문학부에 갔다는 학생이 등장합니다. ‘진보’적인 주간지가 진보적인 관점을 논술 대비시장에서 팔아먹고 있습니다. 현재 논술을 둘러싼 사회적인 불평등 맥락은 다 빼놓고, 이를 선점하려는 잡지가 과연 진보일수 있을지요? 글, 춤, 연애인 등등 이런 재주들로 대학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은 여전히 내신과 입시에 매여있는 학교에서 ‘자기 능력’을 아직 모르는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자 자괴감의 원인이 됩니다. 학교가 전면적으로 다각적으로 학생 능력계발 기관이 되지도 않으면서, 여전히 내신과 수능식 교과과정을 운영하면서, 학교를 벗어나 자기를 찾았다는 아이들에게 더 빌미만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를 벗어나 자기를 찾았다는 아이들이 쉽게 학교를 콧방귀끼면서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저능아 취급할 때, ‘진보적’이라는 관점을 선취해서 자기가 우월하다는 그런 아이들과 ,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사회 여건 속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자기의 조건 속에서 내신공부하고 수능 공부하면서 한 걸음도 땅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읽어나가는 아이들이 있죠. 우직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우직함으로 인해 그 애들이 더 돋보이는 학교사회를 만드는게 교사들의 몫이겠죠. 성실성을 아직도 놓치고 싶지 않은 미덕이라고 믿는 더딘 교사가 올립니다

  2. 일전 재창간이후의 한겨레를 두고, 그리고 집어들 때마다 문자 그대로 복창터지게 하는 우리 시대의 신자유주의 정론지를 두고 몇자 적었다가, 올리기를 단념한 적이 있었습니다. 군대 내 민주화라는 상식적인 아니 거의 감상적인 문제를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의 중요한 의제로 추켜올리고, 그것을 다름아닌 심리연구소의 리서치를 통해 제시하는 행태는 코미디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미친 짓이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말씀해주신 것,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우등생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의 세대로부터 자기실현하는 아이들의 세대로 이동하면서 학교 혹은 교욱의 정체성에 관하여 우리 모두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참교육”이 내세우는 교육민주화와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이 내세우는 교육개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헷갈리는 상황은 아직도 종료되지 않고 있습니다. 교원평가제도라는 흉측한 제도에 대하여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예상가능한 답변은 학습권의 방해라는 “민주적” 주장입니다. 이렇게 표류하는 공간에서 교육이란 제도에 관한 우리 모두의 근본적인 성찰이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 출발점은 교육현장의 주체이겠지요. 힘 내시기 바랍니다. 🙂

  3. 우직하게 내신공부, 수능공부를 하는것 자체,그러한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공부와 태도를 가진 대부분의 학생들이 왜 그안에서는 자신을 찾지 못하는 걸까요? 학교를 벗어나야지만 자신을 찾고 새로운 길을 갈수 있는건가요? 학교안에서, 교육계안에서 학생들의 세계관과 직업관을 고민하고 세울수는 없는건가요? 어쩌면 너무나 근본적인 질문들이겠지요? ^^님의 말씀은 무척 공감하지만, 교육계에 관한 어떤 보수적인 고정관념을 전제하고 있는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자기를 찾았다는 학생들을 어떤 구별되는 집단으로 여기는 사회적인 인식은 대부분의 학생들뿐 아니라 그 집단안에 든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치않음에도 그들만의 게토를 만들수 밖에 없게끔 하기도 하구요. 소통하지 못하는 양쪽 모두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 <학교를 벗어나 자기를 찾았다는 아이들이 쉽게 학교를 콧방귀끼면서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저능아 취급할 때,>>부분도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신거 아닌가요?
    전 진보가 어떤뜻인지 잘 모르지만, 다수든 소수든 자기를 찾았건 찾지 못했건 학교에서 학생은 오직 학생으로써 동등한 이해를 전제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18,19살들의 청소년들 아닙니까? ^-^)

  4. 대안학교나 학교밖 청소년공동체에서 어떤 토론이 벌어질 때, ^^님과 Claire님의 대립 혹은 충돌과 같은 모습을 자주 목격합니다(저도 청소년문화나 청소년 대안문화센터같은 곳을 배회하던 시절이 있었고, 아직도 그 곳에 많은 미련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언제나 기회주의적인 저는 두 가지 입장을 조정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이번 기회에 그런 회피적인 절충이 아니라 토론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적극 옆에서 고민하여 거들겠습니다. 더 많은 의견이나 주장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전 이것이 기존의 기성제도로서의 학교와 그것의 외부 공간을 대표하는 입장 사이의 토론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것은 이런 식의 구분이 90년대 이후 매우 허위적인 구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학교 밖으로의 탈출”이 결단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가 더 이상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떠나지 않을 만큼 학교 안에서의 고통이 절박했고 학교와 불화하였던 아이들을 위하여 탈학교 청소년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내고 그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분투했던 어른들과 아이들의 노력은 충분히 정당하고 유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학교 바깥으로의 선택은 학교제도를 거부하는 매우 비장하고 모험적인 결단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선택에 가깝다는 것, 심지어 부모들의 종용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학교를 더욱 상대화하라는 관점이 이제는 학교를 다시 특권화하라는 관점으로 손쉽게 대체될 수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의 코스가 될 수 없게 된 무력한 학교와 자유로운 삶의 선택의 기회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그 역시 무기력한 학교 바깥 사이에서 우리는 지금 몹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결국 사교육비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학교 안에서 학교 자율의 방과 후 교육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노무현 정권의 결단은 “공공적”인 관점이라는 허울을 쓰고 등장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이미 어긋나버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정책일 뿐이란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공교육 대 사교육의 대립, 학교 대 학교 바깥의 구분이 더 이상 무용해져 버린 상황에서 교육의 정체성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모색을 위한 치열한 성찰을 해야겠지요. 너무 맥빠진 주장인가요?

  5. 오늘 연락이 왔습니다. 게재가 어렵다는 군요. 게재가 거부되서 좀 허탈하네요..어디 달리 실을만한 곳이 없을까요? ㅋㅇ 그래도 며칠을 고심하며 쓴 글인데 아쉽네요..

  6. 그래도 끝까지 써주세요..^^
    잡지에 실리지는 못해도, 이 블로그를 통해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새로운 글이 업데이트될때마다 얼마나 신나는데요..힘 내세요..

  7. 학교는 시스템도 선생도 다 낡았고 역겨운 곳이어서 거부해 마땅하다면서, 서울대는 마치 중립적인 대학기관인 것처럼 거기에 합격한 것이 지금까지의 과정 모두를 인정해주는 사후 승인 기관처럼 제시되는 것이 < 한겨레21>광고를 보고 화가 난 이유이겠죠. 학교를 거부했다는 것이 학교를 지배하는 입시교육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서울대 몇 명 합격이냐는 것이 고등학교의 사활이 걸린 문제처럼 여기면서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입시교육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이 문제이겠죠. 학교를 거부했다는 것이 입시제도의 바깥에서 자기 길을 찾기 시작한 단초로서 자리매김 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거부하고도 서울대에 들어간 자신의 특이한 경력으로 자리잡는 것이 그 학생에 대한 저의 경계심인 것 같습니다. 한 달 의료보험 납입료가 34700원 미만이어서 학비보조를 받고, 한 달 이용료 4천원 학교 독서실에서 밤 10시까지 공부하는 제가 학교에서 만나는아이들은 어떤 거부를 선택할 여건도 아닌 것 같고 죽어라고 붙어 앉아 공부하지만 서울대에 들어갈 성적은 안 나오죠. 학교 안에 남아 있느냐 밖으로 나왔느냐가 입시 경로의 차이일 뿐이고, 입시라는 현실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문제 삼지 말고 수업 방법을 개선해서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하게 교수법을 개발하라는 요구만 허용하는 것, 그런 잣대로 교사를 평가하겠다고 들이대는 것이 답답하죠. 이제는 수능 기출 소설로 조세희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난도질해서 가르치면서, 이 첵을 읽고 대학 1학년 때 내가 겪었던 변화를 아이들에게 번역해줄 수없는 것이 더 자괴스럽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