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민중미술을 넘어 – 배영환의 <남자의 길>과 그 성취

“상식적인” 삶, 그리고 “상식적인” 미술가

배영환, 완전한 사랑

배영환은 자신의 미술가적 정체성을 고백하는 어느 글에서, “반은 예술가로 반은 무능력자로 살아갈 거룩한 결심”을, 농반진반(弄半眞半) 다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다시 작가의 말을 빌자면 “우리 착하게 정말 상식적으로 살면서 각자의 길을 가자”던 비상식적인 약속대로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의 상식이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에 관하여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을 따르는 짓은 손해일 뿐이라는 영악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냉소주의자의 상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배영환이 일컫는 상식적인 삶이란 비상식적인 삶을 기꺼이 살아가면서 동시에 상식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냉소주의를 향해 보내는 야유일지도 모른다. 이런 야유를 발설하는 자리에 선 인물과 자신의 미술가적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것은 고상한 엘리트적 예술가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런 몸짓을 간단히 비판의 몸짓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 미술의 흔한 유행 가운데 하나는 미술가의 권위와 정체성에 대한 공격과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식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지키면서도 동시에 그 어떤 죄의식이나 거북한 감정 없이 몰상식하게 살 수 있는 냉소주의자의 모습은 또한 미술가의 모습과 겹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현재의 미술가들 역시 자신의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극구 부인하면서, 아니 나아가 미술가 아닌 정체성과 동일시하면서, 미술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지 않는가. 이는 마치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취하는 논리와 흡사한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으레 ‘대량생산시대’ 혹은 ‘공급자중심 경제’의 상품 정체성을 비판하는 시늉을 취한다. 예컨대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언제나 건강을 걱정하고 환경을 보살피며 개성과 자유를 생각하는 상품 아닌 상품으로 자신을 내세운다. 따라서 상품은 더 이상 더 이상 경제적 대상이 아닌 듯이 자신을 뽐낸다. 따라서 상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특정한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한다거나 미적인 쾌감을 향유하는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상품은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하면서, 즉 맹목적인 이윤의 추구를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개성과 자유를 질식시키는 과거의 상품의 세계를 힐난하면서, 더욱 집요하게 자신의 상품 정체성을 관철한다.
포스트-민중미술과 작가의 정체성

(중략)
완전한 사랑에의 꿈
배영환은 <남자의 길>에서 금욕적일 만큼 매우 단순한 설치를 제시한다. 작가가 손작업을 통해 꼼꼼하게 혹은 처량하게 복원(?)한 기타들과 그 기타를 만들면서 사용한 재료의 출처이자 또한 매체로서의 기타의 서사적 유래를 가리키는 사진들이 전시의 전부이다. 그리고 전시 작품 가운데 표제를 가지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란 이름을 단 쌍기타 한 점과 역시 그 기타를 장식한 재료의 출처이자 서사적인 유래를 가리키는 자개 경대의 사진과 볕이 내리쬐는 덤불숲에서 기타를 찍은 사진이 전부이다. 그렇지만 이는 그의 직전의 작업인 <유행가> 작업보다 정서적인 감응이 훨씬 진하고 강하다. <유행가>는 흘러간 유행가의 가사를 다양한 오브제를 써서 직접 옮겨 적는 작업이었다. 알약이든 깨진 병조각이든 다양한 매체는 가사가 언급하는 현실(사랑, 죽음, 고독 등)을 재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런 재현의 과정에 연루된 자들의 삶을 환기시켜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독하게 멜랑콜리한 것이면서 또한 동시에 비루한 주변적인 존재의 삶을 단숨에 현상하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길>은 그런 주변적인 삶에 관한 서사적인 재현의 틀을 쫓으면서도 이전의 작업과 단절을 꾀한다. 얼핏 주변적인 삶의 세부를 관찰하며 그것을 유행가와 각기 짝짓는 형식을 취하던 작업이 허세와 위악에도 불구하고 순정하고 소박한 남자의 이야기로 단순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외면적인 축소의 형태는 그의 작업의 반성적인 확장으로 뒤집어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주변적인 삶을 향한 연민이나 감상적인 애착이라면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크게 감동할 부분이 없다. 그의 작업보다는 훨씬 정교한 아니 감상적인 연민의 공식에 통달한 “휴먼 다큐”가 훨씬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연민과 자선의 윤리로 분노와 저항의 윤리를 대체하고, 민중을 피해자나 희생자로 재현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윤리-정치적 좌표라면,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차이는 갤러리에 전시된 미술작품이라는 제도적 형식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의 길>은 그런 자리에 서지 않는다. 그가 제시하는 “남자의 길”은 알레고리나 패러디같은, 성행하는 편의적인 수사법과 거리를 취한다. 그가 선택한 “남자의 길”이란 제목이나 유일한 작품 표제인 “완전한 사랑”은 맥락, 특수성, 차이를 강조하는 유행 담론에 비추어보자면 매우 저속하거나 아니면 맹목적인 것이다. 그것은 “남자”라는 보편적인 인물을 내세우고 “완전한” 사랑이라는 수사학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어쩌면 전형을 향한 충동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물론 그 때의 “남자”의 “완전한 사랑”의 길이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루한 사랑에 대한 애상적인 향수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상실을 향하여 보내는 안타까운 그리고 추문에 가까운 물음일 것이다. 따라서 <남자의 길>을 어느 무명의 노동계급 남자의 사랑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불가능한 사회”를 향한 작가의 제유(提喩)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완전한 사랑”과 그것을 증언하는 특수한 이야기를 채집하고 전시하는 작가의 몸짓은, 단순히 풍속화적인 재현이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떠맡고 있는 보편적인 주체를 재현하려는 욕망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배영환의 작업을 민중미술의 계보에 속한 그러나 그것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작가로 보아야할 이유도 제법 분명해진다. 그는 한국의 진보적인 미술 속에서 정체성의 정치학과 타협하지 않고 보편적인 주체의 재현에 충실하려는 드문 작가라 할 수 있다. 포스트-민중미술에 속한 젊은 진보적 작가들이 결국 포스트-정치적인 정치학으로 전락하였다면, 그는 민중미술의 가장 중요한 미적 정치학을 고집한다. 물론 그것이 그의 작업을 각별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주는 힘임은 물론이다.
월간미술의 청탁과 친구 배영환의 압력으로 쓰게된 평론. 아직 출판되지 않은 글이라 민중미술과 전형의 관계를 논하면서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포스트민중미술의 경향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부분을 생략했다. 앞뒤가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나의 친구에 대한 충성심은 가끔 분별력을 잃고 그들의 작업을 지지할 이유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번 작업은 근사하고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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