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聖誕前夜



Wilhelm Sasnal, Arms Raised, 2001, Oil on Canvas, 33 x 36cm

聖誕前夜에
나름의 慣習이라 서점엘 들러 시집을 샀다.
믿거나 말거나, 성탄절에 나는 따뜻한 담요를 뒤집어쓰고,
거리를 쏘다니는 먼발치의 성가대 노래 소리를 들으며,
시집을 읽곤 했다. 딴에는 청승이고, 또 딴에는 즐겁기도 했다.
그래, 놀아라, 마셔라, 부서져라, 사람들아.
다들 즐거우면 덩달아 즐거워져
저한테 좋은 일이 있었던 것 하나 없는데도
저절로 즐거운 명절처럼, 성탄전야엔 기분이 좋다.
오늘 읽은 시집은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이다.
(참고로, 창비시선 28번이고, 지은이는 이기인이다)
지난 여름 이미 몇 줄 읽어본 적이 있는,
그렇지만 제목이 너무 시류를 바짝 좇는 것 같아,
읽을 게 없다고 훌훌 손 털며 되 꽂았던 책이다.
(그 때는 지나친 말재간이 눈에 특히 거슬렸다)
그러다 오늘 첫 번째 실린 시를 눈으로 후루룩 읽고
마음이 동했다.
짧으므로 모두 옮기면 이렇다.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오래된 삽
오늘은 피가 나서
하루 쉰다
자빠진 삽에게 일 안하냐고 묻지 마라

“오늘은 피가 나서 하루 쉰다”. 무슨 말일까.
생리휴가로 월차를 탄 어느 여공을 말하는 걸까
(제목을 보아선 그런 짐작이 절로 난다)
아픈, 그러나 보통 아픈 것이 아니라 오늘 필경 세상과 상대하지 말라고
제게 信號를 보내는 어떤 고통 때문에,
쉬게 된 그 날의 어떤 성급하고 절박한 마음의 사람일까
“자빠진 삽에게 일 안하냐고 묻지 마라”
이 느닷없는 말은 시비같기도 하고,
더 물러날 곳 없는 어떤 고통의 항의같기도 하고
조금은 웃음 띤 체념같기도 하다
오늘, 聖誕前夜에, 이런 시가 땡긴다.
이를테면, 멋대로 오늘을 위한 시처럼,
성탄절인 오늘, 오늘은 피가 나서 하루 쉽니다.
자빠진 삽에게, 일 안하냐고 묻지 마시길….
그렇게 읽어본다.
오늘은, 자빠져도 좋은 것이다.
조금 무리해서 즐거워지고,
조금 무리해서 관대해지고,
흐흐, 오늘은 그런 날일 것이다.
디자인하는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무관하지만 재밌는 시구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상처디자이너”편에 나오는
짜릿한 구절,
상처를 본……. 디자이너는 말한다.
(너의 상처는 세상에서 제일 이뻐, 조금만 더 벌려봐)

시문답을 주고받는 자리였다면,
나는 이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내 상처 속에 코 묻고 냄새 맡으며
피비린내 속에서 죽어줄래
새로 돋는 살갗으로 네 壽衣를 만들어 줄게

으음… 시쳇말로, “좋지 않다”
그리고 지금껏 읽은 것 중에
제일 맘에 드는 시,
알랭 기로디의 영화가 문득 생각난다.
저작권 위반하여, 전부 옮겨 보면
이렇다.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흰벽

공장과 공장 사이에 있는 화장실
흰 문짝은 오랫동안 페이트를 벗으면서, 깨알같은 글
씨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똥을 싸면서도 뭔가를 열심히 읽고 싶었던 이 못난 필
적은 필시
쾌활한 자지를 바나나처럼 그려놓고 슬펐을 것이다
작업복을 벗고 자리를 타고 올라가 그 바나나를 하나
따다, 미끄러졌다
위험한 기계를 움직이는 몸에서는 주기적으로 뭉친 피
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가려운 벽을 긁었던 소녀의 머리핀은 은밀한 필기구
잔업이 끝나고 처음 만난 기계와 잠을 잤다
기계의 몸은 수천개의 부품들로 이뤄진 성감대를 갖고
있었다
기계가 나를 핥아주었다. 나도 기계를 핥아먹었다, 쇳
가루가 혀에 묻어서 참지 못하고 뱉어냈다,
기계가 나아게 야만스럽게 사정을 한다고, 볼트와 너
트를 조여달라고 했다
공장 후문에 모인 소녀들
붉은 떡볶이를 자주 사먹는 것은 뜨거운 눈물이 흐를
까 싶어서이다
아니다, 새로 들어온 기계와 사귀면서부터이다

배고프다.
성탄전야엔 짜파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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