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여인>. 볼 수 없는 것을 위하여

샹탈 아커만의 <갇힌 여인>은 보는 이를 찍어누른다. 이 영화가 압도적인 이유는 뭘까. 아마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나를 숨죽이게 했던 것은 아마 가시성의 유혹에 반대하는 혹은 그것과 집요하게 싸우는 의지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알다시피 영화는 볼 수 없는 것을 가시화한다. 촌스럽게 말해 우리는 해를 볼 수 있지만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해가 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우리가 고전 허리우드 영화를 볼 때이다. 적어도 내게 그 영화들의 경이로운 업적은 바로 그것이 “사랑한다”, “두렵다”, “즐겁다”를 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정동(情動)에 속하는 피사체, 그에 속하는 본래적인 재현의 대상은 없다. 그러나 고전 허리우드 영화는 그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보여주려는 욕망에 항시 조정되어 왔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는 보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니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더 옳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그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할 때 그러하듯이, 보이는 것, 보았던 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유한, 어쩌면 대단한 계급 출신인 듯한 남자 주인공 시몬은 자신의 저택에서 할머니와 하녀,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아리안느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인 아리안느가 여자 친구인 앙드레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녀가 레즈비언임을 확신하는 그는 번민을 거듭하고 결국 그녀와 결별을 결심한다”, 운운. 물론 이것은 우리가 보았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볼 수 없는 것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일 뿐이다. 이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은 그런 점에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여전히 유일하게 사랑한다는 말에 마음을 바꾼 주인공은, 연인 아리안느와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호텔에 묵는다. 그리고 우리는 불길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수영을 하겠다고 떠나는 아리안느를 배웅한다. 그들을 위한 식사가 배달되고, 사납게 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을 닫고, 샴페인을 따서 마시는 롱테이크 속에서, 우리는 불길하게 고조되는 음악으로 인해 짓눌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보는 것은 사실 화면이 전달하는 정보가 아니라 볼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곧이어 우리는 갑자기 돌연 어떤 것에 생각이 미쳐 바다로 뛰어드는 시몬의 모습과 담요에 싸여 공포에 질린 낯으로 모터 보트에 실린 채 먼 바다로부터 화면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가해한 타인인 자신의 연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들어낸 ‘이론’이 있지만 그것은 결국 실패한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내는 모든 표상 바깥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우리에게 볼 수 없는 것과 끊임없이 대면하는 인물로, 자신이 보았다고 믿은 것에 의하여 파국을 초래한 자가 되고 만다.
히치코크의 어떤 영화에서 보았을 법한 이 장면에서, 그러나 우리는 히치코크와는 사뭇 다른 무엇을 본다. 히치코크가 어쨌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변용하는 능력을 보여준다면, 아커만은 정반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아커만의 이 영화가 매우 반시대적인 영화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영화가 반시대적인 영화란 점은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지금의 세계와 절대적으로 반목하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 영화는 낭만적인 사랑의 신화에 깃들어 있는 연인의 본래적인 모습, 즉 자신이 사랑한 그 혹은 그녀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적인 투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끊임없이 공들여 완성했던 자신의 연인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어긋난 연인의 정체와 직면하게 되었을 때의 충격, 자신의 연인의 절대적인 이타성과 해후하였을 때의 경악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영화일 뿐이라고 코웃음 치며 깎아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 혹은 그녀와 절대 다른 타인이었던 그 혹은 그녀에 관한, 시시하고 진부한 이야기. 그러나 나는 아커만의 영화가 그런 점에 머물지 않는다고 믿는다. 나의 상상적인 인상 속에 있는 그 혹은 그녀는 어쨌거나 보여진다. 그러나 <갇힌 여인>은 집요하게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으로 고집한다.
그 고집은 분명 반시대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동시대적인 영화로 꼽을 수 있는 것과 대조한다면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시대적인 영화의 범례로서 나는 단연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 역시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하여 저돌적인 비판과 공격을 퍼붓는다.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해진 시대, 금기의 대상이 되었던 모든 섹스를 마음껏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시대, 아시아적 가치를 자랑하는 유교적(!) 사회의 심야 케이블텔레비전에서 반신불수인 남편과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실물 크기의 딜도를 사용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여주는 사회.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피아니스트>는 근본적인 박탈을 이야기한다. 그 영화에서 우리는 견딜 수 없이 비루한 모습으로 심야 드라이브-인 극장에서 자신의 욕정을 발산하며 오줌을 싸는 여주인공을 본다. 우리는 그 영화에서 그 무엇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근본적인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의 허벅지를 칼로 베고 혈흔을 보고서야 안도하는 여주인공을 본다. 이 모두는 고통스럽다. 나아가 우리를 미칠 지경에 이를 만큼 우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는 우리가 누리는 쾌락의 진실, 그것이 허위에 불과하다는 체념적인 절망감을 던져주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녀가 보여주는 몸짓은 갖은 해괴한 성적 유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박탈당한 듯이 느껴지는 쾌락의 부재를 ‘보여준다’. 우리는 금지를 거부하며 수많은 오르가즘과 관계의 형태를 찾았지만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금지의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눈뜸이다. 물론 <피아니스트>는 그런 자각으로부터 현재의 파국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낸다. 그것은 포스트모던 궁정식 사랑이라 할 법한 트릭이다. 모든 쾌락의 너머, 모든 현실적인 이득 저편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가치로 추켜올려진 타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었던 반성, 그 뒤에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의 종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궁정식 사랑의 트릭에 빠져 타인을 접근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자신의 쾌락을 지연시키는 잔꾀를 쓰는 것 역시 선택의 한 가지이다. 우리는 그말고도 다른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엘벡의 소설인 <소립자>같은 것에서 이미 두루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선택을 가능케 했던 반성, 다시 말해 우리 시대의 성적 쾌락을 향한 반성에 있다. 분명히 역사적인 과거를 갖고 있는, 즉 성혁명 이후의 관용적인 섹스의 시대에 대한 반성이야말로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반성의 몸짓은 포르노그라피가 극대화하였던 “이것이 쾌락이다”(알다시피 포르노산업의 핵심적인 코드 가운데 하나는 사정이 반드시 질과 항문 외부에서 이뤄져야하며 그것을 포르노의 콘텍스트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를 “이것은 쾌락이 아니다”로 뒤집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에게서 본다. 절대적으로 흥분이 고조된 쾌감의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너무나 적나라하고 징그럽고 더러운 한 점의 행위이다. 따라서 그 장면들에서 보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거의 모든 것을 본 셈이 된다. 쾌락의 물질적인 표상으로서의 포르노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쾌락이 추구하였던 금지 뒤편의 공백, 그리고 그것의 표현으로서 더럽고 우울한 동물적인 행위까지. 따라서 <피아니스트>는 보여준다. “그래, 없는 것은 이것이다. 부재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보여지는 그것이다.”
그러나 본다는 것과 볼 수 없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 그리 대단한 것인가. 그러나 나는 그것이 대단하며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질식할 듯한 윤리, 당신은 왜 당신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마다하며, 그것을 금지하는 권위에 복종하는 쪼다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공갈협박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기에 자신을 무지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적나라한 섹스가 상연되는 모습을 볼 때 우리가 얻어내는 것은 고작 역겨움과 지루함 뿐이다.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줄 때 우리가 보는 것은 무언가 보여주는 것을 상실한 모습이다. 타인의 낯섬, 그의 근본적인 매력은 바로 그것의 위험스럽고 고통스러운 낯섬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낯선 타인과의 만남이 항상 자신에게 던지는 거북함과 불편함, 차라리 폭력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을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나쁜 악인은 어떤 모임과 친교의 자리에서 폭력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상상적인 타인이 아닐 때, 그가 낯설고 불편할 때, 우리는 그를 서슴없이 폭력적이라고 비난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이고 애매한 예는 무엇보다 성폭력일 것이다. 위험과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상상적 타자가 아니었던 이를 비난하기 위해 마련된 이름인 것인지 아니면 불균등한 권력관계에 무지한 채 무구한 본능과 욕구란 핑계 속에서 저질러졌던 착취를 고발하는 이름인 것이지, 자꾸만 헷갈려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그것은 이런 변화가 볼 수 없는 것을 가시화하려는 충동에 끈질기게 사로잡혀있다는 것이다. 타인은 내게 완전히 드러나야 한다는 믿음, 온전히 가시적이어야 한다는 믿음. 그런 믿음은 타인의 폭력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다시 말하자면 만남 자체를 불구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빚어낼 뿐이다. 모든 것이 드러나도록 종용받은 타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만남의 경이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의례와 상품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대신하여 보여주게 될 것이다. 발렌타인데이에서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우리는 자신을 대신하여 자신을 보여줄 수많은 이벤트를 찾는다. 그리하여 이제 만남은 언제나 둘 사이에 벌어지는 기적이 아니라 셋이서 만나는 일상적인 소비행위의 일종이 되어갈지 모른다. 이를테면 “커플매니저”라는 놀라운 직업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좋은 만남을 매개하는 우리 시대의 3자 아닌가. 그들은 좋은 만남의 비결을 알고 있고 우리는 그들의 조언과 지시대로 만남의 근본적인 폭력성을 완전히 제거한 채 만날 것이다. 그들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보여지기 위해 답해야할 항목이 몇 개나 되는지.
컬티즌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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