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 유감

Luc Tuymans, Ceiling
1993, Oil on Canvas
– 일전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았다. 개봉 당일에 영화를 본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그만큼 별렀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벼른 만큼 대단한 것이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안심했다. 나는 줄곧 기억 속에서 치근대며 떠오르는 어떤 외상적인 충격을 접할까봐 이 영화를 보기 전 조금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나쁜 버릇 때문에 불길한 예감이 드는 영화는 가능한 보지 않으려 한다. 그리곤 결국 그것을 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또 다른 끈질긴 욕망에 압도되어 결국 마지막 날 마지막 회를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렇게 보게된 영화들이 <박하사탕>이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등이다. 물론 그 영화들은 언제나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를 확인시켜주는 영화들이었다. 물론 나는 그 영화들의 외상을 조금씩 극복하며 그 영화들과 거리를 취한다.
– 내가 좋은 영화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것 주관적인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불편한 영화이다. 줄거리를 요약해놓고 보면 그저 그렇고 그런 영화인데, 어떤 영화는 지독하게 사람을 들볶는다. 이를테면 고집스럽게 지난 10년간 한국 영화의 유일한 걸작이라고 주저 없이 꼽는 <파이란>은 그 기준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 영화는 불편하다. 사랑이란 것이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개인들 사이의 치졸한 게임에 불과하다는 홍상수 식의 냉소주의는 재치있고 귀엽지만 그다지 대단한 것이 없다. 반면 <파이란>은 어떤 윤리적인 상처를 만들어낸다. “강재, 넌 이 새끼야, 네 발 달려 기어 다니는 짐승, 그것만도 못한 새끼야”라는 취급을 받던 한 버러지같은 삶, 비천한 삶을 살던 인물. 그런 그가 그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숭고한 윤리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그 사이에 끼어있는 것은 물론 사랑이다.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인정하여주었던 어느 여인의 사랑으로부터 강재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꾼다. 사랑이 서로에게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고 서로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일에 불과하다면, 물론 우리는 사랑스러운 서비스를 구매하면 끝이다. 따라서 사랑의 실패를 서로에게 제대로 대해주지 못한 이유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 싸움을 곧잘 이런 것으로 둘러댄다. 천치같은 짓이다)
– 사랑이 나르시시즘일 뿐이라는 것은 사랑 따위는 없으며, 그것은 허위적인 이기적 욕망을 가리기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외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강력하며 더욱 존재하여야할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파이란>의 강재가 그 예이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편의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외려 그는 병에 걸린 그녀를 어느 작은 바닷가 마을의 세탁소 일꾼으로 헐값에 팔아넘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랑이었다. 그 때의 사랑이란 자신의 직접적인 욕구를 해결해주는 어떤 서비스가 아니라 그에게 있는 그 이상의 어떤 것, 즉 자신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존귀함을 자각하도록 이끈다. 사실 나는 버러지같은 인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깡패 조직의 깡패들조차도 경멸하는 그 자신의 실제적인 삶의 처지를 넘어서 그에게 존재하는 삶의 존귀함 어쩌면 신성함이라고 불러 마땅한 그것을 그녀는 그에게 전해준다. 그는 바로 그녀의 부재하는 사랑에 “전이”되면서, 비록 그것이 나르시시즘에 다름아님에도 놀랍게 변신한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을 대신하여 빵에 들어가 살아달라는 보스이자 친구인 깡패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화를 입힐지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택한다. 물론 그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선택이다. 위험을 무릅쓴 선택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랑이다. 아직 그런 것이 있다는 것. <파이란>은 가르쳐 주었고, 잃어버리고 있던 사랑의 가치에 관하여 상기시켜 주었다.
– 다시 <브로크백 마운틴>. 나는 감독이 뜨거운 멜로를 비껴가며 가능한 심심하게 영화를 만들어 내는 재주에 조금은 기가 죽었다. 멜로는 무엇보다 어떤 인물과 절대적으로 동일시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장르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비극의 여주인공이든 아니면 뉘우침에 휩싸이는 남자 주인공이든 우리는 누군가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난는 델마와 잭 사이에서 선뜻 동일시하기 어려운 둘의 애정의 몸짓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나는 두 사내가 사랑의 인연에 이르는 숨가쁜 장면들에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두 인물의 사랑을 연대기화하려는 경제적인 서사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사적인 경제가 얼마나 미끈하게 갈 수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으므로 그것은 좋은 이유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물론 이것은 아마도 동성애 이전의 동성애에 관한 감독의 관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잭과 델마의 사랑은 동성애자로서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어떤 억제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이른 사랑일 뿐이다. 그것은 서서히 세상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에 의해 동성애적인 것으로 모습을 갖추고 내면화될 뿐이다. 그것은 그저 금지당한 사랑이지 동성애자의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이 전동성애적 시대의 사랑에 관한 감독의 선택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원작 소설을 읽지도 않았고 그 소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와 대화가 오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짐작은 그것이 감독에게 어떤 압력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이 영화에서 그렇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일 뿐이다.
– 물론 그것이 <브로크백 마운틴>의 감동과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델마와 재혼한 아내의 대화 장면으로 생각한다. 자신의 전처가 그의 외도(?)를 비난할 때, 그가 낚시를 핑계대며 잭과 즐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토로할 때, 델마는 놀랍게도 그녀를 비난한다. 상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그의 대답,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라든가, “당신에게 고통을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따위는 없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힐난하는 자신의 전처에게 정상적인 반성의 몸짓을 넘어서는 분노를 표현한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에서 어떤 예의와 상식을 벗어나 – 이성애적인 편견이 아니라 – 고집해야할 사랑, 그것의 힘을 증언한다고 믿고 싶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델마와 잭의 사랑은 몰상식한, 타인을 위하여 의당 배려되어야 마땅할 예의를 넘어서, 그것이 감당해야할 “진정한 비정상성”을 고집하는 것에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동성 간의 사랑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성애적 관계란 뜻에서의 정상적인 교제를 벗어났기에 비정상적인 교제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직 서로에게 전연 다른 의미로 내면화되고 처리되어야할 어떤 수수께끼일 뿐이다. 더욱이 그 시대를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벌어지는 장소를 염두에 둔다면 그들의 사랑이 동성애란 용어로 통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동성애자란 말을 알고 있을 시골의 농사꾼이 몇이나 되었을까. 델마와 잭은 영화 속에서 단 한마디 퀴어가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그들은 이성애와 다른 어떤 부정성에 속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뿐 그것을 어떤 정체성으로 확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인가 이상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또한 그 편에 있는 자신들을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동성애 정체성의 바깥에서의 동성애적인 욕망을 다룬다. 이런 점은 잭과 델마를 에워싼 모든 인물이 섣불리 그리고 간단히 이들을 호모라고 치부하고 단정하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잭의 아내, 그의 부모, 모두 그들의 관계에 대하여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듯이 보인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그들은 이성애자로서 비정상적인 변태인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고 관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낯선 그러나 존중해야할 어떤 것으로 감지한 사랑에 대하여 침묵으로 존중을 보낸다. 그것은 성정체성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허위적인 다문화주의적인 태도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또한 진지하다.
– 그러나 그럼에도 이 영화는 무언가 맥이 빠진다. 감동적이고 가끔 콧날이 시큰하고 엔딩 크레딧 위로 울려퍼지는 노래는 더욱 적막하고 서럽지만 무언가 잘못 들어선 길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래서 나쁜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카우보이 셔츠라는 오브제에 관하여 생각해보면 어떨까. 나는 아마 <브로크백 마운틴>의 반대편에 서있는 이야기를 꼽자면 단연 헨리 제임스의 <어느 헌 옷에 얽힌 로맨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 소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에서나 볼 듯한 섬뜩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살던 자매를 방문한 영국의 신사, 두 자매는 모두 그 남자에게 반하고 남자는 자매 가운데 동생에게 청혼을 하고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그의 누이는 질투심과 더불어 자신의 여동생의 남편에 대한 열정을 잠재우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누이의 오빠이자 자신의 친구인 사내의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떠나고 아내는 자신이 난산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남편이 자신의 누이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유언으로 자신이 입던 헌 옷을 간직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아내와 사별한 주인공은 누이의 유혹에 따라 그녀와 결혼하고 결국엔 그녀의 부탁에 못이겨 그녀가 집요하게 원하던 자신의 아내의 옷장의 열쇠를 건네준다. 그리고 어느 날 죽은 아내의 옷장이 있는 다락으로 올라간 아내가 돌아오지 앉자 남편은 섬뜩한 예감에 다락으로 가고, 그는 자신의 아내가 공포에 질린 낯을 한 채 누워있고 그녀의 얼굴 위로 무시무시한 손톱자국이 남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 나는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난 후 우연히 헨리 제임스의 단편집을 펼쳤다가 이 소설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셔츠와 무슨 인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순정한 사랑의 이야기와 엽기적이라고 까지 할 섬뜩한 복수와 증오의 이야기를 대조하는 것은, 조금 망측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엽기적인 환상의 이야기 속에 더 많은 관계의 진실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아마 <브로크백 마운틴>이 허약한 영화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서로를 잊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라면 그 둘이 간난을 무릅쓰고 이루어야 했을 사랑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무엇이 그 둘을 그렇게 이끌었을까.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과 그것을 지속하는 어느 연인의 결단을 보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이루어냈고 지속시키려는 사랑의 정체는 무엇일까. 감독은 그에 대하여 묵묵부답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감독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물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연인의 죽음과 절규로 이어지는 거의 모든 뮤직비디오의 상투적인 내러티브, 그것의 반복강박적인 이야기는 적잖이 징후적이지 않을까. 그것은 사랑이 불가해한 혹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어떻게든 눈속임하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문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므로 사랑을 잃고 전율하는 모습을 통해, 사랑을 지키려는 결단을 통해, 그 사랑의 부재를 어떻게든 은폐하려는 것. 아마 그것이 우리의 지금의 사랑의 모습아닐까. 나는 그런 칙칙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아니길 바라마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내게서 아닐지라도, 영화에서일지라도 다시 당도하길 바랄 뿐이다. 사랑, 그것을 조롱했던 젊은 날이 지나고 나서 나는 사랑에 관하여 투정을 부리고 있다.
– 앗, 광고 한마디, 일전에 블로그에 살짝 맛만 보였던 성적 소수자 인권과 관련한 꼭지가 실려있는 새 인권 교과서가 나왔습니다. 창비에서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많이 읽어주시길. 주변에 많이 추천해주시길.

13 thoughts on “<브로크백 마운틴> 유감”

  1. 지난 주 퇴근하고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선생님의 논문을 찾아 읽었습니다. 한 시간밖에 여유가 없어서 서문만 읽었는데, 끝까지 읽어볼 생각입니다. 다 읽을 때까지 퇴근 후 한시간 도서관에 갈볼까 생각하니 그것도 무슨 의식이 될 것 같아서 좋습니다. 책으로 나오기 전에 이런 식으로 한 번 해볼 생각입니다. 복사 안하고 손으로 베낄 것, 책상에 똑바로 앉아서 읽을 것. 무섭죠? 어제 < 브로크백아운튼>을 저도 봤습니다. 저는 잭의 죽음을 확인하는 전화 대화 장면이 생각납니다. 잭의 아내가 사고로 죽었고, 발견 당시 얼굴이 뭉개져 있었다는 말을 할 때, 델마는 잭이 린치를 당하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델마의 상상 혹은 사실일 그 장면이 델마가 품은, 그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겠죠. 그리고 저는 ‘파이란’의 원작인 아사다 지로의 < 러브 레터>를 먼저 읽고, 영화를 봤는데요,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그녀가 입술을 깨물어 피흘려 병든 척해서라도 호스테스말고 세탁부가 되게 설정을 바꾼 감독이 여성에 대한 순수성의 이미지를 잘못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 원작에서 주인공 건달이 변하게 되는 계기 중에는 여자가 그렇게 고마워 하면서 자기에게 살 기회를 준 거라고 편지에서 말할 때, 정작 자기가 그녀에게 준 삶이 안마위안부로서의 삶이고, 얼마나 그녀가 가족과 제대로 살아가고 싶어했는지 그 에너지를 느낀 것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는 바닷가에 서 있는 흰 옷 입은 여자를 보여주었다면, 소설에서는 몸이 지쳐 삵아서 죽은 병든 시신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델마의 마지막 대사 I swear 다음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2. 이런 그런 수고를 하신다니..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논문 원고를 보내드리죠. 아직 출판사도 정하지 않고 출판을 조금 미루고 있습니다. 조금 더 손을 보아 낸다는 것이 그만 제 늑장으로 늦어졌습니다. 저는 < 아사다 지로>의 글은 읽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한번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3. 저 위 포스트에 방문자는 기별해달라고 하시기에 여기에 기별합니다. 서동진님의 글 읽으면서 스스로 게이라고 정체성을 밝힌, 퀴어담론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에겐 브로크백이 이렇게 읽히는구나 – 라고 생각합니다. 저야 아직도 60년대 와이오밍주의 농부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어서 이성적으로 판단해야한다 하면서도 감성적이 되서 피식합니다. 그건 마치 퀴어애즈포크가 웃기는 판타지다 하면서도 마이클과 벤이 마냥 부러운 이유이기도 하겠죠. 이 억압된 정신세계를 언제나 탈출하려나. 하하.
    애니웨이~ 언제나 건강히 살아남으시길 기원합니다.

  4. 아, 그리고 저는 브로크백에서 구스 반 산트 아이다호의 반대편거울을 봤답니다.

  5. 전 이 영화가 게이들의 사랑이라기보다는 게이란 정체성 이전에 자신의 욕망 만으로 둘의 관계를 정의해야하는 두 실존적인 인물의 이야기로 보았습니다. 이안에게 주어진 도전도 그것이라고 봤구요. 안그랬다면 그렇고 그런 게이-멜로가 되었을 텐데 그것을 넘어서는 영화를 이안은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불가해하지만 어떻게든 서로의 관계를 납득하고 옹호해햐 하는 당사자들이 각자 스스로 무언가 이야기를 만들어했을때 그들은, 그리고 주변의 인물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이다호…저도 그것과 사뭇 다른 영화이구나..생각했습니다. 반대편의 거울이란 무엇인가요? 궁금하네요..

  6. 영화의 절반가량 잭과 에니스의 야영지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불을 피우고 이 둘의 사랑이 생겨나지요(또는 서로의 욕망을 파악하게 되는 거겠지요). 콩에 대해 투정도 부리고 사슴도 잡고 텐트안에서 정사도 나눕니다. 그 순간 십년 너머의 기억에 있던 아이다호가 떠올랐습니다. 영화에서 둘이 마이크의 엄마를 찾아다니다가 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마이크가 스콧에게 “난 돈을 받지 않고도 너에게 몸을 줄수가 있어”라고 했던가.. 하여간 그런 고백을 합니다. 그랬더니 스콧이 자기 곁으로 마이크를 부릅니다. 저는 이 장면이 아이다호에서 마이크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컷이 마이크가 대낮 길 한가운데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입니다. 마이크와 스콧의 야영이 비록 현실이었다고 해도 구스 반 산트는 그걸 깨뜨리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이크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구스 반 산트가 아프지만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당시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게 세상의 주변을 떠돌수 밖에 없는 자신의 현실의 투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이크는 버림받습니다.
    다시 브로크백으로 돌아와서 이들의 야영은 마치 행복을 이루지 못한 마이크의 욕망또는 환타지로 보였습니다. 물론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라 여기실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야영장소에 마이크가 꿈꾸던 모든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스 반 산트는 그것을 깨뜨렸지만 브로크백에서는 잭이 스스로 야영지의 텐트를 접습니다. 마이크가 실패했던 그 지점을 잭이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이크의 고백은 살아서 버림받지만 결과적으로 잭은 죽어서라도 맹세를 받아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아이다호의 반대편거울처럼 보였습니다. 한쪽은 현실이고 다른 한쪽은 그 비참한 현실을 살아내기위해 만들어낸 꿈처럼 말이지요.

  7. 이…. 뭔가가 많이 결핍된 느낌에 혼자 섭섭해하고, 혼자 감독욕도 좀 하고 그랬었습니다.
    좋은 글 읽게 되어서 기쁩니다.

  8. 안녕하세요선생님~수업듣는 학생입니다^^
    쓰신 글 보고 괜히 마지막부분에 맘이 허 해져버린거같습니다.
    수업중에 잠깐 말씀해주셨던 질식이라는 소설 읽었는데 그때 말씀해주셨던 그런 느낌하고 더불어서 아직 정리가 많이 안될정도의 이야기들이 쏟아져들어온듯해요.
    수업시간이기보다는 이야기듣는거같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재미있게 듣고있습니다~ 공부해보고 싶은게 참 많아지는 시간입니다(치과갔다오셔서 바로 수업하신거였군요 치료는 잘 되셨는지요~)
    내일 수업시간 교실 구석에서 뵙겠네요 그럼 안녕히계세요^^

  9. 아무래도 요즘엔 수업에서 거의 만담가가 되어간다는 자괴감이 듭니다. 공부할 의욕을 돋워준다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 몸살 치통 만병으로부터 놓여났습니다. 화요일에는 씩씩하게 만나지요!

  10. 정말 우연히 알게되어 가끔 들어오는데요.. 중심으로 집중하게 하는 글들이 좋네요..저는 영화보면서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잭과 애니스가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 흐릿해스리,, 무지 답답하고 그래서 아직도 답답하고 그랬는데..글을 쓰셨네요. 본래 용건.. 무슨 수업, 어디서 하세요?

  11. 그랬군요. 연대, 성공회대, 각각 학부 대학원 수업 그리고 서강대 학부 수업 합니다. 그리고 다음 학기부터 잠시 휴업합니다. ^^

  12. 우이쒸^^ 다음 학기에 스케쥴(?) 좀 잡아보려고 했는데.. 허망한 대답이 돌아왔네요.. 근데, 그저 본인의 의지 아닌가요?

  13. ‘…사실 잭과 델마의 사랑은 동성애자로서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어떤 억제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이른 사랑일 뿐이다. 그것은 서서히 세상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에 의해 동성애적인 것으로 모습을 갖추고 내면화될 뿐이다. 그것은 그저 금지당한 사랑이지 동성애자의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이 전동성애적 시대의 사랑에 관한 감독의 선택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델마와 재혼한 아내의 대화 장면으로 생각한다. 자신의 전처가 그의 외도(?)를 비난할 때, 그가 낚시를 핑계대며 잭과 즐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토로할 때, 델마는 놀랍게도 그녀를 비난한다. 상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그의 대답,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라든가, “당신에게 고통을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따위는 없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힐난하는 자신의 전처에게 정상적인 반성의 몸짓을 넘어서는 분노를 표현한다. 나는 그것이 이 영화에서 어떤 예의와 상식을 벗어나 – 이성애적인 편견이 아니라 – 고집해야할 사랑, 그것의 힘을 증언한다고 믿고 싶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델마와 잭의 사랑은 몰상식한, 타인을 위하여 의당 배려되어야 마땅할 예의를 넘어서, 그것이 감당해야할 “진정한 비정상성”을 고집하는 것에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용들은 님께서 브로크백 마운틴을 읽어내는 주요 골자들인데요,
    이 내용들은 결혼한 남녀가 자신의 배우자 이외의 다른 이성과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 즉 ‘바람 피우기’에 대해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뎌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끌림.. 그 아리송한 어떤 것의 정체에 대해서는 당사자 이외의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겠죠. 어쩌면 그 당사자들마저도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모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히 님께서 지적하신대로 ‘몰상식한, 타인을 위하여 의당 배려되어야 마땅할 예의를 넘어서, 그것이 감당해야할 “진정한 비정상성”을 고집하는 것’에 조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저는
    ‘사랑의 부재를 어떻게든 은폐하려는 것. 아마 그것이 우리의 지금의 사랑의 모습 아닐까.’ 라는 님의 언급에 정확하게 동의하면서,
    그 둘의 ‘외도’를 ‘바람 피우기’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손쉽게 비난하며 정형화시켜버리려는 모습은, 연인의 죽음과 절규로 이어지는 거의 모든 뮤직비디오의 상투적인 내러티브에 덧붙여, 사랑의 부재를 은폐하려는 또 하나의 움직임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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