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strongmen)의 척추해부학: 신자유주의와 남성성의 정치

    • Janelle Monáe – Q.U.E.E.N. feat. Erykah Badu

1. 여기,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여기에 세 명의 남자가 있다. 먼저 첫 번째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을 소설에서 부르는 대로 이부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는 임성순의 장편소설 자기개발의 정석의 주인공으로 중년의 기러기아빠이다. 그의 아내는 “당신도 알잖아. 이 나라엔 답이 없어”라며 아이와 함께 외국으로 떠난다. 이부장은 말문이 막힌 채 “답이 없는 곳에 자신은 왜 남겨두는지 궁금했지만 결국 아내 뜻에 따르기로”한 사내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아내와 아이를 보낸 후 만성 전립선염에 걸린 걸 알게 된 이부장이 뜻하지 않은 ‘자기개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발견한 자기개발이란 흔히들 ‘드라이 오르가슴’이라고 말하는 자가 성애적인(autoerotic) 쾌락이다. 이부장은 자신의 물건이 왜소하다고 느껴 언제나 주눅 들어 살던 그에게 처음 관계를 한 날 “내꺼 너무 작지 않아”라며 던진 물음에 “왜? 귀여운데. 난 좋아”란 답을 듣고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소심한 남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의 최대의 위기인 전립선염을 극복하는 여정에 진입한다.

“어떤 사정이 있다 해도 다 큰 어른이 다른 남자 앞에서 사정없이 사정하는 일은, 사정상 사정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해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용납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가 전립선염 진단을 듣고 “인생의 굴욕 1위에 빛나는 전립선 마사지”를 받은 뒤 스스로 되뇐 말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기생충, 혹은 에일리언의 알처럼” 보이는 ‘아네로스’라는 전립선 마사지 도구와 애증의 시간을 보낸 후 그것에 깊이 빠져든다. “그 동안 자신이 불행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아네로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리만치. 급기야 “아네로스를 사용하는 일은 그 누구를 위한 일도 아닌 완벽히 여러분 자신을 위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족적인 행복 추구이자 완전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고 기염을 토하는 드라이 오르가슴 인터넷 동호회의 오프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해 가능한 세계의 풍경이 넓어지며 이 부장은 멀미를 느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예정되지 않은 대로 움직이는 세상. 그것은 이 부장에게 두려움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원했던 것은 확실한 약속이나 분명한 보장, 혹은 거창한 미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보상은 오르가슴으로 충분했다. 다만 이 낯선 새로운 세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부장에겐 정석이 필요한 것이었다.” 소설의 제목처럼 이부장은 “자기개발의 정석”을 애타게 찾는다. 가족과 떨어진 채 가족에게 나는 무엇인지 모른 채 꼬박 송금을 하면서 그는 이제 혼자 남은 자기를 개발한다. 그것은 방향을 잃은 자기에 필요한 ‘정석’이고 그 정석은 드라이 오르가슴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남자가 있다. 여기에서 남자는 둘이다. 이 남자들은 박상영의 단편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단편 소설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에 등장한다. 주인공 나는 게이이고 그가 어정쩡하게 사랑하는 듯도 하고 돌보는 듯도 하는 짝인 제제 혹은 패리스 박도 게이이다. 그리고 주인공 나는 전립선염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개발의 정석에 등장하는 이부장과 닮았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곤 둘은 닮은 구석이 전연 없다. 소설 속의 ‘나’는 감염성 전립선염에 걸렸고 1주일에 두 번 전립선염 마사지를 받으러 가면서 의사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노콘’으로 애널섹스를 즐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군대에서 사랑했던 자신의 연인 그러나 결국 자살을 하고 세상을 떠난 Q를 잊지 못한 채 그가 섹스 번개를 했던 어느 예과 의대생의 말대로라면 바이폴라,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거나 섹스를 해야만 잠이 드는 불면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의 곁에 제제가 있다.

제제는 “같은 옷을 두 번 입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긴 패리스 힐튼”과 공통점이 많은 게이이다. 그는 패리스 힐튼과 공통점이 여럿인데 “술과 명품, 남자를 좋아한다는 점이 그러했고 나아가 남자에게 비싼 술을 즐겨 사준다는 것까지 비슷”하다. 제제는 불법대부업체를 운영하는 78년생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가 돌아와 술 번개에서 만나 애인도 친구도 아닌 자신의 짝이 된 나의 집에 기식한다. 그는 이제 마시지숍에서 일하며 자신을 찾는 남자들과 호텔에 가서 섹스를 한다. 그는 인기가 좋다. 연유인즉, “함께 있는 시간 동안만큼은 진심을 다 한다는 느낌을 주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제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 이 직업 너무 적성에 잘 맞는다? 매일 새로운 남자랑 호텔에서 데이트하고 돈까지 버는 기분이야. 나 호텔도 좋아하고 남자도 좋아하잖아.”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게이 가라오케에서 술을 마시다 잠이 든 제제를 찾아 간다. “고객과의 잦은 연애를 이유로 숍에서 제명”당한 제제는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길 위에서 울고 그를 지켜보다 뇨의를 느낀 나는 전봇대 뒤에서 어디에도 고이지 않는 오줌을 눈다. 그리고 그 사이 제제는 사라졌고 나는 또 혼자가 되었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선 붕가붕가 파티가 열리고 있고 Q는 죽었고 나는 살아서 오줌을 쌌다.”

세 번째 남자는 ‘홍럼프’이다. 트럼프를 한국에서 구현하는 우익 정치 포퓰리스트 홍준표는 자칭 스트롱맨이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스트롱맨으로 일컬었다가 그는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위피키디아(Wikipedia)에는 없지만 나무위키에는 있는 용어들이 있다. ‘스트롱맨’도 그 중에 하나이다. 종잡을 수 없는 뜻풀이를 보여주는 이 사전 항목에는 스포츠에서의 이 용어의 용례, 같은 제목의 영화 한편 그리고 오늘날 널리 성행하는 ‘스트롱맨’이라는 낱말의 쓰임새가 소개되어 있다. 그 항목의 작성자의 의중에는 마지막 오늘날의 대단히 힘 좋은 정치지도자를 꾸며주는 수사(修辭)인 스트롱맨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저널리즘의 지면 위에서도 현실정치의 풍경 속에서도 스트롱맨이란 낱말이 적잖이 출현한다.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홍준표는 내부 경선에서 승리하고 후보로 확정되었을 때 역시 그 말을 끄집어냈다. 그는 후보 수락연설에서 “5월 9일 대선에서 유약한 좌파 정부가 탄생하면 대한민국의 살아날 길이 막막하다. 이제는 강단과 결기를 가진 ‘스트롱맨’이 필요한 시대”라고 일갈 했던 바 있다.

나무위키의 항목은 이렇게 친절한 주석을 제공한다. “강경 극우 보수파 지도자 또는 제3세계의 군사정권의 지도자를 지칭할 때 흔히 사용되는 어휘다. 즉, 독재자의 유의어이지만, 이것이 의미가 확장되어 자국의 이익을 철저히 우선시하고, 외교적 절차와 예식에 구애받지 않으며, 직설적인 화법을 즐겨 구사하고, 강한 남성성을 드러내는 국가 지도자에게도 스트롱맨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국수주의적이고 절차와 예식 따위엔 아랑곳않고 직설적 화법을 즐겨 구사하며 강한 남성성을 과시하는 남성 지도자가 스트롱맨이라면 홍준표를 스트롱맨이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는 <홍준표의 뉴스 Coke>, 일명 <TV홍카콜라>를 진행하는 유튜버가 되어 자신의 정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첫 방송에서 “경제가 폭망할 것”이며 “안보 파탄이 현실화될 것”이고 “여론이 조작으로 점철”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현실정치로 귀환했다고, 이 센 사나이는 발광한다.

이렇게 우리에게 세 명의 남자가 있다. 이 세 명의 남자에겐 닮은 점이라고 전연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남자들은 모두 동시에 한국의 주요한 남자들의 형상을 요약한다. 그들은 각자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가 규정하는 삶의 풍경 어딘가에 자리 잡고 그 세계의 원리를 비춘다. 이부장은 포스트-오이디푸스적 세계의 초라한 가장의 모습을 구현한다. 그는 더 이상 전통적인 핵가족의 가장이라기보다는 느슨한 심리적인 유대를 제외하곤 외조와 내조라는 성별 노동분업에 따라 정의된 부양-즉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을 책임짐으로써 그에 따른 윤리적 책임과 자부심을 갖는 것과 같은-과는 거리가 먼 부양자일 뿐이다. 그는 가족이 있지만 혼자이고 그렇기에 엉뚱하고 기상천외한 ‘자기개발’에 탐닉한다. 도구적이거나 계산적 혹은 공리적인 이성의 주체가 아니어도 좋은 친밀성의 정동이 서식하는 것처럼 보이던 ‘우리 식구(食口)’의 세계는 없다. 거기에서 남성이란 그저 자신을 개발하라는 동시대의 윤리적 압력에 시달리는 한 명의 개인을 체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남성의 육체는 전처럼 더 이상 강건한 정력을 물질화하는 정신화된 신체가 아니다. 그것은 더없이 수치심을 안겨주기도 하고 지복의 쾌락을 발산하기도 하는 작은 호두만한 크기의 기관인 ‘전립선’으로 축소된 취약한 신체일 뿐이다.

제제와 ‘나’ 역시 공식적인 남성성의 재현 속에선 찾아볼 수 없던 형상들로서 문화의 지평을 기습한 것임에 분명하다. 역사학자 조지 모스가 확인해주듯 이상적 남성성의 모델에 관한 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남성은 서로를 공유한다. 동성애자 남성이 끌리는 남성의 이미지는 이성애자 남성이 상상하는 남자다움의 이미지와 같거나 가까운 거리에 있다. 남성성의 규범적 이상형은 성정체성을 불문하고 공유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숭배하는 남성성은 역설적이게도 증류된 규범적 이상형의 이성애자 남성의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나’와 ‘제제’에게서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세상의 모든 사회적 규정으로부터 초연한 듯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작자는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두 인물의 삶의 지위를 암시하는 상세한 사회학적인 배경을 들이댄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 배경이나 직업, 학력 같은 ‘사회학적인’ 프로필은 아무런 구실도 못한다. 그것은 인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배경이라기보다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을 가미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중요한 것은 매일 새롭게 갱신되는 듯이 보이는 지금의 사랑이나 애착이다. 상투적인 낭만적 사랑의 서사에서 흔히 여성의 위치로 가정되곤 하던 사랑에 열정적으로 애착하는 주체의 모습은, 오늘날 남성 주체에게 이전되어 있다. 게다가 그것은 이 소설의 주된 독자인 젊은 여성 독자들이 찾는 남성성의 이상형이기도 할 것이다. 이 소설(물론 소설집에 포함된 모든 소설들)은 적나라한 게이 로맨스 혹은 멜로물의 외관을 취하고 있다. 잊지 않고 돌연 등장하는 외설스러운 게이 남성 섹스 신은 사랑의 신산(辛酸)스러움과 절박함에 빛을 더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을 사회의 바깥에 놓는 남성의 형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트롱맨이 있다. 물론 스트롱맨은 오늘날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후보로서 부상하는 남성성의 모델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의 남성성의 준거로서 활약할지 여부는 미지수이다. 한국 남성성의 사회문화사라고 할만한 것을 요약하고 있는 최태섭의 한국, 남자는 신자유주의 이후 한국에서 남성성의 이질적인 형상들의 합종연횡이 펼쳐지는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신자유주의 도래 이후 이 남자들 안의 간극은 더 커졌다. 과거 제조업 정규직 노동자와 낮은 직급의 화이트칼라들로 구성되었던 중산층은 거대한 파열음을 내며 양쪽으로 찢기고 있다. 남자들에게 고강도 노동을 시키고 가족이 먹고살 만한 임금을 주는 것은 새로운 경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중산층 남성들이 집에서 제왕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해준 마지막 원천이었던 ‘남자-생계부양자-가장’은 끝장났다. 오늘날 마주하게 된 현실은, 아버지들이 누리던(사실은 누렸다고 상상되는) 가부장의 권력을 달라고 징징거리는 남성 청년들과, 바뀌어가는 세태에 적응해보려고 몸부림치는 소수의 남자들과, 이 시대의 권력과 권위와 명예가 하나로 통합된 돈을 움켜쥔 극소수의 부자 남자들이 어색하게 손을 맞잡고 있는 형국이다.”

“2000년대 한국 사회 남성성의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자기 피해자화’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말 외환 위기가 남성의 위기로 전치되면서 만들어졌던 ‘불쌍한 남자’의 수사들은 위기가 끝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성들이 스스로의 위치를 설명하는데 사용되었다.”

최태섭의 주장을 수긍한다면 한국에서 헤게모니적인 남성성은 ‘피해자 남성’의 이미지일 것이다. 분명 그것은 인터넷의 ‘남초 커뮤니티’를 주도하는 남성성의 모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넓은 계층, 연령, 지역 등의 사회학적인 변수들에 따라 균일하게 발견되는 모델일 것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는 것이 자신이 경험한 성별과 연루된 경험을 반성하는 의식과 태도에 주된 영향을 미치는 효과적인 재현이자 서사, 이미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에 반발하거나 부정하는 것 역시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자장 안에서 작용하는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트롱맨이라는 남성(성)은 가장 주변적인 모델일지도 모른다. “가부장의 권력을 달라고 징징거리는 남성 청년들”과 “불쌍한 남자”를 거쳐 “피해자”인 남자를 자신의 이미지로 채택하는 남성들에게 스트롱맨은 인기가 없거나 자신이 실행할 수 없는 모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2. 다시, 「권위주의적 인성」으로?

2016년 1월 중반 그러니까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 거의 1년전 미국의 온라인 잡지 <폴리티코 Politico>에 매우 이색적인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의 제목은 “당신이 트럼프 지지자인지 여부를 예측하는 한 가지 별난 특성”이었다. 이 기사는 트럼프 지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일지 질문을 받았을 때 흔히 짐작하곤 하는 대답, 백인이거나 빈곤층이거나 교육수준이 낮거나 하는 것과 같은 인종, 소득, 교육 수준 등의사회학적인 변수는 거의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변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트럼프 지지자의 공통점을 정의하는 변수일까. 저자가 제시한 답변은 바로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란 것이었다. 이 기사의 저자는 권위주의에 관한 정치학 박사 논문을 준비 중에 있던 매튜 맥밀리엄스(Matthew MacWillams)였다. 그는 등록 유권자 가운데 1800명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조사를 실행하였고, 그 결과 교육, 소득, 성별, 연령, 이데올로기, 종교 등의 변수가 미국 공화당 투표자들이 어떤 후보를 지지할지 결정하는데 큰 영향일 미치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복종하는 성향이 강하고 강한 지도자 주변에 결집해 그를 추종하며 외부인들에 대해 특히 그들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느끼면 매우 공격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 바로 권위주의자(authoritarians)의 진면목이다.

그리고 피터 고든은 이 흥미로운 보고서를 참조하며 1950년 망명지인 미국에서 버클리대학교의 동료 심리학자들과 함께 아도르노가 진행했던 조사연구 프로젝트의 성과인 권위주의적 인성 Authoritarian Personality을 재방문하도록 초대한다. 그것은 트럼프 현상으로 대표되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혹은 퇴행을 초래한 원인을 진단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상대적으로 무시되거나 오인되었던 비판이론의 주 저작인 그 텍스트의 이론적, 정치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다시 보는 권위주의적 인성: 트럼프 시대에 아도르노 읽기”란 글을 통해 트럼프의 시대를 읽자고 제안한다. 아마 이는 스트롱맨이란 이름으로 대표되는 강한 정치지도자(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Narendra Modi),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Messias Bolsonaro) 등)가 부상하는 오늘날의 정치적 풍경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좌표를 마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스트롱맨과 그에 대한 열광을 이해함에 있어 왜 우리는 개인의 인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목격하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지지자들이나 트럼프 열성 지지자들, 아니면 홍준표 같은 정치가들의 열성당원을 이루는 태극기부대 같은 이들을 적절히 분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히려 르봉 식의 ‘군중심리’같은 집합심리학이 아닐까. ‘권위주의적인 인성’이란 개념은 인성이란 용어에 도드라지게 각인되어 있듯 개인의 심리를 다룬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분석이 필요한 권위주의를 개인의 심리로 환원함으로써 그 현상을 초래한 사회경제적인 요인들의 규정과 영향을 무시하는 것 아닐까. 나아가 얼핏 보아 이런 방법론적인 개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항목이라 할 수 있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고립되고 자율적인 개인들만이 있을 뿐이라는 공리에 호응하는, 나쁜 이데올로기적인 선택이 아닐까. 우리는 이러한 마땅한 의문을 떨칠 수 없다.

물론 이는 권위주의적 인성을 되찾아가는 고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는 사회와 개인의 변증법적인 관계에 유의함으로써 실증주의적, 경험주의적 심리학이 암암리에 가장하는 자기동일적인 실체로서의 개인 그리고 심적 활동 전체를 실체화된 개인의 선택과 반응으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하여야 함을 역설한다. 이를테면 고든은 “전체 연구는 사회학과 정신분석학 간의 변증법적인 공간 속에서 행해졌고 이를 이끈 것은 환원주의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조건과 개인 인성의 주관적 특성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비판적인 포부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곧 이어 말하듯이 “심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간의 관계에 대한 진정한 변증법적인 이해를 준수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변증법적인 이해’의 곤란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 ‘개인과 사회의 변증법’은 개인의 인성에서 출발해 규범 혹은 문화(가치체계)라는 양극 사이의 기능적 상응을 통해 전후 현대 사회학의 주류가 되었던 탤콧 파슨스 류의 구조기능주의적 사회학을 통해 이미 해결된 것 아닐까.

여기에서 다시 앞서 본 세 명의 남자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변을 배회하는 이 세 명의 남성 이미지를 종합하거나 중재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셋은 모두 조정할 수 없으리만치 다르고 또 수렴하지 않는 특성을 띠고 있는 탓이다. 그런 점에서 세 명의 남자들은 오늘날 남성성의 이미지들의 공약불가능성이라 불러도 좋을 다양성의 군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세 명의 남자 모델들 사이에 놓인 좁힐 수 없는 차이는 차이가 아니라 남성성을 규정하는 동일한 무엇에 대한 반응의 세 가지 양태들이라 가정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 가지의 형상이 다른 것들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의 연속체를 이루는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를 위해 선결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남성성의 분석과 재현에 따르는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율배반이라고 일컫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와 개인의 이율배반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남성이란 사회학에서 흔히 말하듯 성별에 따라 분류된 실정적인(positive) 사회적 집단이며 다른 성별 즉 여성과 위계적, 지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의 부분인 것일까.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처럼 성의 위계에서 남성이란 계급과 여성이란 계급이 있는 것일까. 또는 인류학적인 분류를 참고하여 인류 종족은 남성 족과 여성 족이라는 두 개의 성의 종족으로 이뤄진 것일까. 아니면 기호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듯이 남성은 자신을 개인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논리를 가리키는 것일까.

라캉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자면 성구분(sexuation)이란 각각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의 분화의 길을 갖는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남성과 여성이란 사회적 성별이나 생물학적인 성과는 구분되는 어떤 위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자신을 주체화하는 데 따르게 될 두 개의 노선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기호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성은 남성이 아닌 것 혹은 남성에 미달하는 부정성으로서 즉 ‘표지된 동일성(marked identity)’의 관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생각을 좇을 때 여기에서의 남성은 앞의 성별의 사회이론에서 가정하는 남성과 다른 남성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표지된 동일성(정체성) 모델을 참고해 보자. 이때 백인과 유색인종(colored-people)은 비대칭적인 관계에 놓인다. 유색인종은 인종화된 주체로서 자신의 피부색에 따라 동일성을 규정받게 되지만 백인의 경우엔 다르다. 백인은 인종이 아니라 ‘인간 일반’이라는 정체성의 바깥에 놓인 보편성의 위치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인은 자신을 인종으로서 정체화하지도 자신을 경험하지도 않는다. 이는 이성애자와 성소수자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동성애자에게 부과된 자기전기쓰기의 고된 노고는 이성애자에겐 면제되어 있다. 동성애자가 자신이 동성애자인 이유를 이해하고자 집요하게 자기 삶의 궤적을 회상하고 서사화하여야 한다면(즉 나는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을까, 나는 언제 동성애자임을 깨닫게 되었을까 등등의 물음을 던지며 자신의 삶을 정박시킬 수 있는 안정된 전기(biography)를 확보하고자 애쓴다면), 이는 이성애자에겐 불필요한 일이다. 이성애자가 자신이 왜 이성의 인물에게 성적으로 매혹되는지 이유를 자문한다면 이는 별난 짓일 것이다. 자신이 이성애자인 것은 “인간은 본디 그렇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애자는 인간 일반이지 성정체성에 따른 특수한 종족이 아니다.

이는 남성과 여성에게서도 동일하다. 이를테면 이제는 오랜 일이 되었지만 여성부가 발족할 당시 남성부는 없이 여성부만 신설하는 것은 헌법상의 남녀평등에 위배된다며 여성부의 설립을 반대했던 일부 남성운동가(?)의 졸렬한 항의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오해했을까. 그것은 남성은 성별로서 자신을 정체화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행정부처는 남성부이다. 이러한 상상은 남성이면서 인간, 부분이면서 전체라는 관점을 수행한다. 따라서 여성학과는 있는데 남성학과는 없다는 푸념이나 투정이 희극적인 이유일 것이다. 모든 지식분과는 여성을 연구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성격, 정치활동, 건강 등 여성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 연구한다. 그러나 여성학은 혹은 여성주의 연구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집단에 대한 분석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다른 모든 지식이 가정하는 – 여전히 이런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면 – 가부장주의적 인식론과 환상을 비판하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성성이란 무엇일까. 남성성 연구에서 가정하는 남성이란 대개 규범적 이상형 즉 문화적인 모델에 가깝다. 이를테면 남성 연구의 고전이 된 코넬의 ‘헤게모니적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같은 개념은 남성의 역사의 고전이라 할 조지 모스 식의 분석에서 동원되는 ‘규범적인 이상형’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마련된 남성에 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또한 그와 관련된 다른 사회집단 즉 여성이나 성소수자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이는 강제나 타협, 유혹과 거부, 혐오와 숭배 등 사적/공적 공간에서 맺게 되는 다양한 심적, 사회적 상호작용을 규제한다.

그러나 이는 남성이 자신을 성별화된 주체로서 자신을 경험하고 있음을 암암리에 가정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 비판이론 식의 어법을 말하자면, 남성이란 범주는 물화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그에 저항하거나 종속된 다수의 남성성을 가정하는 것, 즉 다수의 남성성이 존재하고 각각의 남성성 사이에서 갈등적인 쟁투의 상황이 존재하며 남성성은 역사적 변화에 개방되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상식, 기껏해야 역사주의적 가정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 남성성 연구에서의 가장 큰 맹점은 바로 개인과 사회의 적대적 관계를 사회학주의적으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거꾸로 심리학주의적으로 환원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 개인은 남성성이라는 헤게모니적인 규범에 따라 설명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사회적 남성성은 가족이나 친밀관계를 통해 매개되는 것이기는 해도 남성 개인의 심적 역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개인 남성과 사회적 남성(헤게모니적 남성, 이상적 남성 등)은 동일하고 각자는 다른 것을 통해 해명된다. 이는 개인과 사회의 적대성 혹은 모순을 개인과 사회의 상동성(homology) 혹은 유비(analogy) 관계로 변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개인과 사회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제거한다. 그리고 사회를 실체화하면서 사회가 개인을 규정한다거나 개인을 실체화하면서 개인들로부터 사회를 연역한다. 이 때 개인과 사회는 이미 각각의 항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와 개인의 이율배반 혹은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사고하고자 비타협적으로 분투했던 비판이론의 작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사고하자는 목표에서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이론과 성욕설을 거부하고자 했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나 카렌 호나이(Karen Horney)의 수정주의심리학 혹은 자아심리학을 격렬히 거부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흔히 문화주의 논쟁이라 알려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어쩌면 역사유물론의 상식에 보다 가까이 선 것처럼 보이는 본능이론과 범성주의(pan-sexualism)의 거부에 대해 아도르노를 비롯해 비판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이 격렬하게 비난을 퍼부은 이유는 실은 개인과 사회 사이의 거짓된 화해에 대한, 즉 둘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다루는 것을 포기한 데 대한 것이었다. 아도르노는 개인과 사회의 분리를 주체와 객체의 분리처럼 허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주체와 그를 지배하는 객관성 사이의 분열이 심리학과 사회학 사이의 분열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개인과 사회의 통일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안에서 둘이 적대하는 한 이 둘을 이론적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그의 말을 빌자면 개인과 사회 사이의 “절대적 이원성은 곧 통일성일 것이다.” 아도르노는 그의 전설적인 논문인 “사회학과 심리학의 관계에 관하여”란 글에서 이를 보다 본격적으로 다룬다. 그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 나아가 정신분석학과 역사유물론의 관계를 사회학과 심리학의 관계란 암호 같은 용어를 빌어 검토한다. 여기에서 아도르노의 요지를 무리를 무릅쓰고 간략히 요약한다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적대성은 복잡한 매개 과정을 거쳐 개인의 삶 내부에서의 적대로 나타나며 이러한 개인 내부의 모순이 바로 무의식과 의식, 이드와 자아, 초자아의 투쟁과 타협형성(증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학과 심리학을 종합하거나 조화하려는 시도, 즉 사회심리학을 구성하거나 하는 등의 시도는 허위일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이 둘의 분리는 객관적 필연이므로) 잘못이다. 그것이 잘못인 이유는 이 둘 사이의 적대를 사고 속에서 종합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그것의 대립을 필연화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폐지 없이 그릇된 관념적 화해를 선언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의 대립 혹은 이율배반을 삭제하고 양자를 통합이나 동화에 관한 담론으로 구성하는 것에 관한 아도르노의 경계를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 바로 ‘이윤동기’와 ‘공포’라는 두 가지 개인 심리를 대조하는 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적 합리성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심리적 주관성을 이윤동기 혹은 타산적이거나 공리주의적인 이해(利害)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성에 따른 개인의 심리적 주관성의 정수를 ‘불안(fear)’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개인들의 합리적인 경제 행동은 분명 경제적 타산이나 이윤동기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설명(개인의 경제 행동을 타산이나 이윤동기에서 찾는 설명-인용자 주)은 소급적인 구성물일 텐데, 이는 밝혀주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평균적인 경제 행동의 합리성을 편의적으로 이해하고자 가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 합리성이란 것은 전연 자명하지도 않다. 불안이야말로 보다 결정적인 객관적 합리성의 주관적 동기를 이룬다. 불안은 매개되어 있다. 오늘날 경제적 규칙에 공모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당장 파산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몰락(déclassé)이라는 운명이 들이닥친다. 앞에는 비사회적이고 범죄적인 생존으로 향하는 길이 놓여있다. 게임에 참여하길 거부하는 짓은 의혹을 자아내고 굶거나 다리 안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까지는 아직 피폐해진 것은 아닐지라도 사회의 보복 거리가 되고 만다. 버림받음에 대한 불안, 경재행동 뒤편의 사회적 제재는 다른 터부들과 더불어 오랜 동안 내면화되고 개인에게 흔적을 남긴다. 역사적 과정에서 이런 불안은 제2의 자연이 된다.”

여기에서 아도르노는 개인의 비합리적인 심적 경제를 사회의 객관적인 경제의 합리성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개인이라는 심급의 자율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가 덧붙이는 것은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배치(divergence) 혹은 모순은 그 자체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개인과 사회는 오직 대립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를 즉자적인 실재로 실체화하여 양자를 서로 다른 분과학문이 취급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분열은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한 모순이다. 그러한 사회와 개인의 불화로부터 비롯된 개인의 심적 역동 안에서의 고통과 지배의 경험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와 개인의 모순을 주관적인 의식을 통해 중재하거나 종합할 수 있다고 믿으며 양자의 조화를 위해 ‘사회심리학’을 가공하는 것 또한 피해야 한다. 그런 연유로 개인과 사회에 관한 분석은 이율배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어느 자리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학의 기원적인 두 저자의 양립불가능성, 즉 뒤르켐의 집합적인 상징을 통한 즉 사회적 사실을 통한 개인의 인식과 베버의 개인의 이해와 의식을 통한 사회의 상상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는 바로 근대사회의 이율배반을 반영한다. 둘 사이의 이론적 차이를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두 가지의 양극적인 사회이론 사이를 왕복하며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메타사회이론(아도르노가 힐난하곤 했던 베버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뒤르켐의 사회학이론을 통합하고자 했던 파슨스의 기능주의 사회학)을 꿈꾼다면 이는 모두 허위가 될 수밖에 없다.

부정변증법에서 집요하게 추구되었던 아도르노 특유의 변증법적 사고는 ‘단자(monad)’라는 개별자를 위에 놓인 일반성의 사례 혹은 효과로서 손쉽게 환원하지 않고 그것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고집하면서 그것의 내적 모순과 매개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관점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도 연장된다. 그것은 “특수한 고립자(particular isolate)에 유의함으로써 단자적인 외피를 꿰뚫고 그 중핵에 놓인 보편적 매개를 드러내는 것에 실제로 해체되어 있는 것(real decomposition)을 개념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임시변통을 발휘하는 것보다 보다 큰 희망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며 “사회연구자들이 인식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 유일한 총체성은 적대적 전체이며 그리고 만약 그 총체성에 이를 수 있다면 이는 오직 모순 속에서 그리고 모순을 통해서일 뿐임을” 주지하는 것이다.

 

 

3. 상징화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남성(성)

그렇다면 우리는 아도르노의 사회와 개인의 적대를 남성/남성성이라는 범주와 대질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남성/남성성을 개인의 주체화의 논리로서 파악하는 편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남성에게서의 개인과 사회는 개별적인 남성과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남성 사이의 관계도 아니고 혹은 개인 남성과 사회 전체라는 추상적인 가상 사이의 관계도 아니다. 물론 더더욱 남성성이란 남성들의 자신의 경험과 인식, 감정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지식을 집적한 결과는 더더욱 아니다. 또한 남성성 연구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개별 남성이 동일시하고자 하는 문화적 이상이나 헤게모니적 규범으로 좁힐 수도 없다. 남성성 연구는 남성성을 매개하는 문화의 자율성을 옹호하고자 하지만 이는 남성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규정을 문화라는 영역으로 제한하고 만다. 경제적 차원에서의 결정을 밝힌답시고 노동자계급 남성과 중산층 남성의 차이를 운운한다고 해서 그것이 남성성에 있어 사회적 규정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의 사회적 규정을 밝힌다는 것은 사회를 외부에 놓인 타율적인 대상 혹은 심급으로 가정하고(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립된 가상이다) 그것의 효과를 설명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규정이란 외적인 두 개의 실재 사이에서의 관계가 아니라 어떤 개별자의 자기동일성을 규정하는 내적 모순을 분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남성성의 분석에 연장한다면 결국 남성성 분석은 개인의 개인화의 과정에 내재하는 갈등과 모순을 분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자면 이는 상징적 질서에 자신을 등록하고 자신의 자기동일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유주의와 남성성의 관계에 대한 효과적인 분석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어떤 개인으로서의 주체화의 길을 열어주는 것일까.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여하한 개입에도 반대하고 사회보장을 축소하거나 제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이자 레짐이고, 지난 단계의 역사적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자본가계급의 반격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자본주의의 단계(광범한 규제완화와 사유화, 생산과 유통의 세계화, 자본과 노동의 국제적 이동, 공유지의 탈취를 통한 축적, 금융화, 노동의 여성화 등)이며, 자기계발하는 주체 혹은 자기책임화(self-responsbilization)된 개인-주체를 통해 계급적 주체의 연대와 단결에 따른 저항과 투쟁을 무력화한 주체성의 지배(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governmentality)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이러한 다의적인 규정, 전지구적 경제와 국가에서부터 개인과 가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차원에 걸쳐 신자유주의의 증후를 검출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점은 신자유주의란 개념이 자의적인 것이기는커녕 반대로 오늘날 다양한 층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총체적으로 연관시켜 사고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효과적인 보조물이란 점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기꺼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란 개념을 남성성 분석의 배경이자 맥락으로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란 개념이 특정한 사실이나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전화하면서 형성된 다양한 차원들 간의 매개와 규정으로 구성된 총체화의 원리라고 한다면 남성성과 동시대의 사회적 배치(configuration) 간의 관계는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앞서 남성성의 분석을 상징적 주체로서 자신을 주체화하는 것, 즉 개인화의 논리로서 이해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자신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개인으로서 주체화하는 과정을 변용시켰는가를 분석하는 일이다. 아마 이에 호응하는 분석은 흔히 ‘오이디푸스의 위기 혹은 종말’이라는 담론일 것이다. 이를테면 슬라보예 지젝은 숱한 글에서 포스트-오이디푸스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상징적) 주체화의 과정이 교란되고 있는지 분석한 바 있다. 그의 글 가운데 상징적인 금지 혹은 법의 작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이름 혹은 금지의 몰락을 상세하게 분석한 글은 “오이디푸스 어디로?”일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이 수행적 효력을 잃고 그 아버지의 자리를 새로운 형태의 아버지, 즉 “더이상 자아이상으로서, 상징적 권위의 (다소간 실패한, 부적합한) 담지자로서 지각되지 않으며, 이상적 자아로서, 상상적 경쟁자로서 지각”되는 아머지가 대신하게 되는가를 보인다. 이는 흔히 말하는 어른이 되기를 단념한 웃자란 어린이로서의 어른, 이어지는 지젝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들의 아버지와 경쟁하는 ‘미숙한 청소년으로 남아있는 삼사십대의 개인들”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어른을 가리키는 말로 유행하는 말인 ‘아재’나 ‘틀딱충’같은 용어들은 상징적 법을 제정하는 어른의 형상과 더 이상 닮은 점이 없는 어른을 가리킬 것이다. 이런 용어들이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소속이나 지위, 학식, 외모 따위는 상관없이 그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부여되어 있었던 상징적 권위 즉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허구(물론 위엄을 지닌)가 파탄 났음을 가리킨다. 이는 실제로는 아무리 별 볼일 없는 평범한 개인이란 점을 알고 있더라도 그/그녀가 판사로서 나에게 논고하거나 교사로서 나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할 때 그/그녀가 법, 진리의 위엄과 권위를 체현하고 있다는 믿음을 거추장스러운 환상으로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교사나 정치가와 같은 상징적 권위를 점유하던 이들은 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친구처럼 취급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그녀가 나와 다를 바 없는 누추한 욕망에 쫓기고 시시한 생리활동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물신주의적으로 거부’하던 것과 달리 즉 ‘당신도 나와 같이 섹스를 하고 똥을 싼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처럼 부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나와 같은 변변찮은 모습을 ‘까보이도록’ 강요한다. 몰래카메라를 설치하여 유명인사나 연예인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관람하는 즐거움을 누리거나 소위 말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현해 자신의 속물스러움이나 천박함을 과장되게 과시하는 것을 즐기도록 하는 요즈막의 TV 프로그램들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지젝은 이러한 상징적 금지의 붕괴, 즉 오이디푸스적인 드라마를 통한 개인화 과정이 무너지고 난 뒤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부성적 권위의 이러한 붕괴는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상징적 금지적 규범들은 점차로 (사회적 성공이라든가 멋진 육체와 같은) 상상적 이상들에 의해 대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 금지의 결여는 사나운 초자아 형상들에 의해 보충된다. 따라서 우리는 극도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갖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불확실한 상상적 균형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서 지각한다(희생양 논리의 보편화를 예로 들어보자. 다른 인간과의 모든 접촉은 잠재적 위협으로서 경험된다. 타인이 담배를 피우면, 타인이 나를 탐욕스럽게 쳐다보면 그는 이미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르시시즘적 자기-폐쇄는 교란되지 않은 균형 속에서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게 해주기는커녕, 초자아의 즐기라는 명령의 부드러운 (것만은 아닌) 자비에 주체를 내맡긴다.”

여기에서 지젝이 말하는 부성적 권위란 자본주의적 핵가족에서의 가장 남성의 권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상 핵가족에서의 아버지는 금지의 작인으로서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자신이 떠맡은 상징적인 권위를 기꺼이 마다하거나 기피하고 아이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조력자의 모습으로 이행한지 오래일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물으면서 아이에게 자아이상을 부과하는 게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물으면서 아이의 이상적 자아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속삭이는 어른이 오늘날 아버지의 형상일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끝 간 데 없는 개인화를 낳았다고 역설하는 사회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자신을 개인화하는데 따르는 곤란이 더욱 증폭되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개인화란 정신분석학에서 아버지의 금지라는 상징적 권위를 수락하고 그러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의 모순(비일관성)을 추궁하는 신경증적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히스테리라는 부정은 비판이란 부정과 같은 것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자신을 개인으로 주체화한다는 것은 자신이 지닌 자유를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자신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 가능성을 예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안 돼!”라고 말하기보다는 “네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집요하게 묻는 질식할 듯한 아버지, 혹은 권위 없는 상징적 권위와 대면하고 있다. 물론 누구도 자명한 실체로서의, 즉자적인 사실로서의 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의에 헌신할 것인가를 묻는 것보다는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를 묻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우리는 개인으로서 점점 빈곤해지고 만다. 달리말하자면 자신을 개인화하는데 있어 더 없는 곤란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빈곤해진 자아이상의 자리를 이상적 자아라는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환상으로 대체한다. 물른 그 환상은 상품 세계를 통해 제공된다. 무엇이 매력적이고 호감을 살 수 있으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가를 처방하는 상품들이 융단폭격을 가할 때 우리는 아버지의 상징적 권위 혹은 남성성의 이상에 더 이상 따르지 않는, 오늘날 유행하는 표현을 빌자면 ‘성적 관심이 전연 없거나’ 즉 ‘에이섹슈얼(asexual)하거나’, ‘젠더리스(genderless)’하거나, ‘젠더퀴어(gender-queer)’하는 등의 정체성 수행의 유행을 목격하게 된다.

이 점에서 프랑스의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인 뒤프르가 신자유주의란 ‘탈상징화(desymbolization)’와 같은 것이라 분석하는 것을 참조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는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문화적 변동 특히 권위와 권력의 거부라는 주제 아래에서 이뤄진 지배의 비판이 상징화에 대한 거부로 오도된 것을 개탄한다. 그는 지배를 비판한다는 명목에서 상징화 자체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파국을 초래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뒤푸르는 사회-정치적 지배와 타자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의존성을 가리키는 상징적 지배가 뒤얽혀 있으며 이 두 가지 지배가 함께 맞물려 작동하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전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에서 후자 역시 제거하고자할 때 “모든 가능한 지배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형태의 승리”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탈제도화(de-insttitutionaization)이라고 부르는 변화를 가리킨다. 이는 상징적 지배와 사회정치적 지배가 합성된 숱한 제도와 장치들(이를테면 미셸 푸코가 ‘규율사회’라는 이름으로 규탄했던 것에 등장하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적 제도와 장치들)은 사라지고 강제도 거의 없고 비용도 들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지배 방식을 가리킨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복종하는 주체가 아니라 “시장의 양식들과 변화들에 유연하고, 불안정하며, 유동적이고 열려있는 개인들”을 생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탈제도화는 개인들의 탈상징화, 즉 “주체가 의미와 맺는 관계, 의미에 대한 추구를 지배하는 상징적 기능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서도록 보장하고 또 보증했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탈상징화의 절대적 한계”에 이르도록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자아-이상(ego-ideals)의 붕괴를 뜻하는 것만도 우상들에 대한 대중봉기를 뜻하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가 고통스럽지만 환영할만한 자각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 이들은 손쉽게 만족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세기의 위대한 이데올로기들(공산주의와 나치즘)만큼이나 공격적이면서 또 아마도 그보다 더 효율적일 이데올로기 덕택에 ‘새로운 인간(new man)’ 혹은 몰비판적이면서도 유사-정신병적(near-psychotic) 주체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실상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것은 죄의식이 묶인 것도 아니도 비판적인 자유의지에 의지하는 것도 아닌 탈상징화된 주체(a desymbolized subject)이다. 그것은 어떤 상징적 결속도 눌러대지 않는 자유롭게 부유하는 주체를 원한다. 이는 실재하는 유일한 세계에서의 ‘자신의’ 정박점들– 즉 성차와 세대차의 세계 -에서 풀려난 단성적(unisex)이고 비-성별화된 주체를 수립하고자 한다. 인간 교환을 정당화할 수 있는 전체 상징적 준거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일반화된 부정(venality)과 허무주의라는 배경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은 상품들의 교환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하도록 초대받고 있는 곳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오랜 꿈이 현실에서 이뤄지도록 한다. 그것은 상품 영역을 세계 사방으로 확대하여왔고(이는 세계화란 이름으로 진행된다), 여기에서 모든 것(물, 인간유전자, 공기, 생물종, 건강, 신체기관, 국립미술관, 아동들 등)이 사고 팔릴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한때 사적인 문제이자 개인 재량이었던 것들(주체화, 인격화, 성구분…)을 회수해 상품의 궤도 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 놓여있기도 하다.”

4. 음경과 남근 사이에서: 결론에 대신하여

신자유주의는 반사회적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의 절대적 위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반사회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칼 폴라니가 말하는 것처럼 경제가 사회에 ‘파묻혀있던(embedded)’ 역사적 시기와 달리 자율화되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뜻에서나, 사회국가(social state) 우리에게 더 익숙한 표현을 빌자면 복지국가(welfare state)나 그것의 변종인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처럼 계급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정치가 행사되는 대상이라고 상정함으로써 계급적인 양보와 타협을 통해 자본주의 축적을 지탱하던 것을 방기하게 되었다는 뜻에서나, 아니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서 고발되었던 극단적인 부의 편중 혹은 “점령하라(Occupy)” 시위를 통해 드러난 1%에 대한 분노가 알려주는 바처럼 더 이상 사회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기생하는 경제를 뜻하는 것이거나, 상관 없다. 이 모두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단계가 취하는 모습을 비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에 반하는 자본주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인 신자유주의가 어떠한 정치 형태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인구 대중의 동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정당성을 잃어왔다. 나는 이미 신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권위주의와 결속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지금 이는 네오-파시즘과의 결속을 향해 움직여가고 있다. 이유인즉슨 세계 전역의 전체 저항운동에서 보듯이 모든 이들이 신자유주의란 가난한 이들을 희생시켜 부자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렇게 명백하지는 않았다.” 반사회적인 신자유주의가 향해가는 정치 형태가 네오-파시즘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스트롱맨’이라는 정치적 지도자를 향한 애착과 동일시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면, 또 앞서 살펴보았던 상징적 주체로서 개인화에 따르는 위기를 겪는 주체가 결국 이르게 되는 주체의 형상이 ‘강박신경증자’(지젝)나 ‘유사-분열증자’(뒤프르), ‘파시스트’(바디우)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것이 남성성이 처한 좌표를 이해하는데 불가결한 지침이 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서 우리가 건넨 물음에 대한 답은 반쯤 해결된 것처럼 볼 수 있다. 우리는 스트롱맨이 널리 성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치학자의 말을 빌자면 적어도 한국 사회엔 적폐 정권을 무너뜨리는 촛불 민주 시민이 건재하는 ‘한국적 예외’라는 현실 속에 있다. 도리어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남자의 주된 형상은 자신을 피해자화하는 유약한 남성 주체일 뿐이라는 어느 사회학자의 분석처럼 스트롱맨을 지지하는 잠재적 파시스트와는 거리가 먼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탈상징화된 주체가 반사회적인 자본주의의 지배 속에서 자신의 정박점을 찾는 이상적 자아는 결국 스트롱맨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가장 주변적이고 또 계몽된 중산층으로부터 천시되는 스트롱맨과 그 ‘똘마니들’이야말로 오늘날 남성성의 우세종인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조롱거리가 되고 주변으로부터 배척받기 마련이기 때문에 짐짓 시치미를 떼며 거리를 유지하지만 그들의 헛소리에 집요한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이미 스트롱맨이 발휘하는 매혹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나아가 정치적 지도자로서 ‘홍럼프’는 그다지 인기가 없을지 모르지만 각각의 남성들이 이미 홍럼프를 선취하고 있거나 예고하고 있다면 어떨까. 어떤 헛소리를 지껄여도 자신은 옳기 때문에 절대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부정하는 모든 주장을 가짜뉴스라고 증오하는 강박신경증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홍럼프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이상적 자아에 몰두한 채 여러 가지 상품을 소비하면서 자신에게 만족하는 계몽된 힙스터 남성 청년의 모습과 그리 거리가 멀지 않다.

그 역시 전형적인 강박신경증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나”라는 주술같은 말에 홀린 채 백치같은 자기애적인 이미지를 수호하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충고나 조언을 다른 라이프스타일 상의 차이일 뿐이라며 코웃음 치거나 꼰대 같은 간섭과 참견이라고 짜증을 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네로스에 의지한 채 자기개발에 열중하는 이부장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그는 상징적 권위를 가리키는 기표인 남근과 성기관인 음경 사이에서 분열된 채 후자를 위해 전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이부장은 남근 없는 음경을 가진 남성을 가리킨다. 그는 상징적 권위를 취하는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고 자족적 오르가슴에 취한 실존적 쾌락주의가 되고 만다. 또한 이는 최근의 “버닝선” 사태에서 흘긋 목격하듯이 자신의 온전한 성적 만족을 위해 최음제나 마약에 의지하고, 여성과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 채 그들을 영상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소비할 뿐인 남근 없는 폭력적인 남성들을 보게 된다. 한편 그것은 제제와 나라는 인물처럼 어떤 사회적 규정으로부터 초연한 채 사랑에 몰두하는 인물의 음화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스트롱맨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퀴어한 주체이지만 또한 자신을 주체화하는 원리의 면에서는 상보적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더 할 나위 없이 풍요로운 사랑 없는 섹스를 즐기지만 그것에서 언제나 후회와 죄책감, 불만족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퀴어성은 이성애규범적인 지배에 저항하는 ‘아니오’라는 항의가 아니라 오늘날 남성성의 변주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진짜 형제들 간의 사랑을 위해 게이 남성에게 극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위장된 게이(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 나오는 인물처럼)를 예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성의 대차대조표를 결산하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개인화와 전체화의 변증법을 다시금 작동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비판적 사고를 추진해야할까. 이 글에서 우리는 그러한 물음을 던지기 위한 변죽을 올릴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물음들이야말로 우리가 답하고자 전력해야 할 물음일 것이다.

 

_영미문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원고. 인용은 이후 <안과밖>에 실릴 수정된 원고를 참조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