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유토피아 – 안은미의 안무에 관하여

Trisha Brown in “Watermotor”, by Babette Mangolte (1978)

1.

나만 그런 걸까. 안은미의 공연을 보고 난 직후면 나는 여지없이 어디 숨어있다 자신이 있음을 기별하는 듯한 발작적으로 움찔대는 몸의 느낌에 찔끔 놀라곤 한다. 그것은 늘 비자발적인 리듬 속에 온순하게 작동하며 자신과 함께 하던 몸속에 마치 이물스런 다른 몸이 매복하여 있다 신호를 보내는 듯한 기분이다. 걷거나 하품하거나 의자를 당겨 앉거나 하는 외엔 가급적 몸을 의식하지도 자극한 적도 없는 게을러터진 내게 안은미의 공연은 그런 매복하고 있던 몸과 대면하게 한다. 그것은 현란한 브레이크 댄스를 보거나 힙합 무용을 보았을 때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무용은 시시각각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화려하고 매끈한 이미지들의 계열 속의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잘 난 이미지 한 조각에 그친다. 또한 이는 완벽한 포즈로 점프를 하며 우아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동작을 수시로 선보이는 <댄싱 나인>같은 케이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보곤 하던 일급 무용수의 춤을 보아선 좀체 상상할 수 없던 것이기도 하다. 섬세하거나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 탁월했다고 안무가나 일급 무용수들이 촌평을 늘어놓는 동작을 보아도 나는 그것이 어쩐지 신파 같아 보이기만 하고 감정적 경험의 화석 같은 표본을 따분하게 전시하는 듯 보이기만 하다. 그것은 도식적인 감정의 구조를 나열하는 멜로드라마의 단편에 가깝다. 이는 몸의 탄성(彈性)과 완력을 명징하게 전시하는 스포츠 중계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축구 경기나 체조 경기를 보여주는 TV의 중계 프로그램은 이곳저곳에 빽빽이 보이지 않게 놓인 카메라의 눈을 통해 클로즈업되고 잊지 않고 곧 저속으로 출력되는 완벽한 동작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슬아슬하리만치 우아하게 진동하고 경련하는 몸의 이미지들을 전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익히 보아온 미적인 신체의 이미지들의 앨범 속으로 곧 처분되고 만다. 문득 무용이든 스포츠이든 거기에서의 몸이란 전시되는 몸, 이미지가 되어버린 몸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렇게 신통찮은 몸의 시각적 행렬 속에 안은미의 무용이 지닌 비범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그런데 따져보면 타인의 몸이 이미지 이상이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타인의 눈에 나의 몸은 이미지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다들 ‘셀카’ 혹은 ‘셀피(selfie)’에 열중하고 인스타그램(instagram)이나 페이스북(facebook) 따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부지런히 게시한다. ‘좋아요’의 숫자는 나의 삶의 목표이자 명분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나의 자아는 나의 몸-이미지로 신속하게 추상화된다. 사회학자들이나 인류학자, 페미니스트, 운동학 연구자들은 우리를 융단폭격 하는 몸을 지배하는 권력과 그 장치들에 대해 고발하고 비평하고 경악한다. 휴대전화를 비롯한 디지털 기기는 우리의 몸을 측정하고 관리하는데 더 없는 기회를 보장한다.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은 호흡, 혈압, 혈당, 수면습관, 스트레스 상태, 감정 기복, 비만 따위의 세부적인 상태를 추적, 감시, 평정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기염을 토한다. 신체 상태의 추적과 감시, 평가, 등급화를 돕는다는 기기묘묘한 ‘디지털 신체측정학(biometrics)’ 장난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소비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자기감시(self-surveillance)의 테크놀로지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자격 자아(QS; a Qualified Self)’ 어쩌면 한국에서 흔히 쓰는 말을 자조적인 용어를 빌자면 ‘능력자’라고 부르는 자아-만들기를 성행하게 하고 있다. Lee Humphreys, The Qualified Self: Social Media and the Accounting of Everyday Life,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8.
어떤 이는 이를 일러 ‘알고리즘적 자아’라고 혹은 ‘데이터 자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한 새로운 몸의 풍경은 몸의 규범이 상연되는 무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런 변화의 추진력은 여성들에겐 더욱 집요하게 파고든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신자유주의적인 자아의 관념과 공명한다. Ana Sofia Elias and Rosalind Gill, Beauty surveillance: The digital self-monitoring cultures of neoliberalism, European Journal of Cultural Studies, volume 21 issue 1, 2018. David Beer, Productive measures: Culture and measurement in the context of everyday neoliberalism, Big Data & Society, volume 2 issue 1, 2015.

남녀평등이나 여성해방은 여성 각자의 개인적 자기관리와 자존감, 자기결정에 따른 변모의 프로젝트로 바뀌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악착스레 홍보해 온 삶의 모델과 일치한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구조와 질서 따위란 없다는 듯이 자신의 능력과 열정, 자질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삶을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이 좌우된다고 다그쳐 왔다. 개인의 일생은 사업(enterprise)처럼 기회와 모험 그리고 위험(risk)로 가득한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삶의 기업가(entrepreneur)가 되어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그렇게 관리해야할 것 가운데 으뜸은 단연코 몸이다. 그 몸은 건강의 담지자로서의 몸일 수도 있고 외모라는 이미지의 몸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흔히 ‘스펙’이라고 부르는 인적 자본(human capital)의 주요 자산 가운데 몸이 필수적 몫을 차지한다. 여성들은 더욱 이에 열중한다. 상품의 소비는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고 소비하는 일로 대체되었다. TV 아침 프로그램에선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위해 필요한 습관, 노하우, 식이요법, 식재료 등을 하루도 빠짐없이 나열한다. 그 옆의 홈쇼핑 채널은 그렇게 소개된 새로운 ‘수퍼푸드’로 만든 유기농 주스와 파우더가, 복잡하기만 해 대체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는 어떤 과학적 인증을 통과한 최고의 물건이라고 으스댄다. 자신의 신체와 관련한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추적, 분석, 모니터링하며 평가하는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은 그를 보조하는 숱한 기술적 장치들을 통해 강화된다.
오늘날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획득한 몸의 규율과 관습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묘책은 없을까. 아마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격투기에서의 몸일 것이다. 추하고 역겨운 못 배운 남성 노동 계급의 저급한 오락 즈음으로 여겨졌던 격투는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대중적 스포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것을 디지털 게임으로 전환한 무수한 사례들은 제외하더라도 서로에게 육탄 돌격하여 치고받는 생생한 광경은 많은 이들을 매료시킨다. 이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기도 했던 척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이란 소설의 흥행 비밀이기도 하다. 척 팔라닉, 파이트 클럽, 최필원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수년간의 인류학적인 조사를 거쳐 만들어진 이 소설은 오늘날 몸이 처한 지하 세계의 풍경을 신랄하게 묘사한다.

한편 이는 타인의 시선을 위해 온전히 복종하기만 하던 정숙한 여성의 신체가 도발되었을 때 어떻게 파국을 맞이하는가를 보여주는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치는 여자의 영화 버전인 미카엘 하네게의 영화 <피아니스트>(2001)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는 격렬한 몸의 경험은 매우 도착적인 방식으로 추구된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정숙한 여성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 통제되었던 몸을 엄습한 저항할 수 없는 욕정에 의해 무너진 신체이다. 그것은 주인공인 ‘에리카 코후트’(이자벨 위페르)로 하여금 섹스 숍에서 게걸스레 포르노를 탐닉하도록, 혹은 자동차극장에서 카섹스를 벌이는 커플들을 훔쳐보도록, 그리고 급기야 자신의 샅을 면도칼로 긋는 쾌락에 탐닉하도록 이끈다. 그것은 모두 이미지로 환원할 수 없는 몸의 반발, 억압당한 체험의 세계가 뻔뻔스럽고 또 수치스럽게 귀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이미지 너머에 있는 몸의 저항할 수 없는 귀환을 증언하는 듯이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구속하던 부르주아적 가부장제의 폭력으로부터 탈출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파괴적인 반-폭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체험(lived-experience)’의 급진성을 고수할 수 있었던, 좋았던 과거를 회상할 뿐이다. 그것이 노스탤지어가 아니라면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상(相)-이미지로서의 몸에 대적하는 물(物, Thingness)로서의 몸의 대결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진단도 식상하긴 매일반이다. 우리는 ‘진정한(authentic)’ 몸의 체험조차 상품으로 제공하겠다고 너스레떠는 숱한 유혹적인 상품들에 포위당해 있는 탓이다. 자신의 몸을 느끼도록 촉구하는 요가, 필라테스, 피트니스, 익스트림 스포츠, 발레, 주지수 등의 체험 프로그램은 차고 넘친다. 과도한 신체적 감각을 누그러뜨리는 데 이바지하던 마약조차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극대화하는 마약으로 전환하였다고 한다. ‘엑스터시’같은 마약은 ‘마리화나’와 같은 마약과 정반대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마약은 찰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매초마다 당신의 살갗과 신경이 어떤 느낌을 감지하는지 느끼고 감각하도록 돕는다.
그렇게 우리는 안은미의 무용에 이른다. 안은미 안무의 각별함은 이러한 몸의 문화(body culture)의 역사적인 문맥을 배경으로 이해될 때 보다 흥미로워지기 때문이다. 안은미는 연극적 성질을 배제하고 그것을 서사적인 드라마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동작 혹은 움직임의 탐색을 추구한다는 현대무용의 공리(公理)에 가까운 작업을 줄곧 보여 왔다. 그러나 그녀의 무용은 이본느 레이너(Yvonne Rainer)의 춤도 아니고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의 춤도 아니다. 물론 그녀 역시 현대 무용의 표준 어법에 가까운 절분되고 자기완결적인 그리하여 어쩌면 수학적 추상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동작들을 종횡무진으로 합성하고 연결하곤 한다. 특히 안은미의 무용의 특장이라고 할 군무 씬의 동작들에서 그런 동작들은 예시적이다. 무용수들은 기거나 질질 끌거나 구르거나 꿈틀거리며 나아가거나 꼼지락대며 나아가거나 아니면 점프하거나 원을 만들며 뛰고 튄다. 이는 동작의 담지자(bearer)이거나 움직임-장치의 앙상블을 구성하는 탈-인격화된 운동기계로서의 무용수를 보여주려는 제스처인 듯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안무의 이러한 요소들이 그저 속임수일 뿐 그녀의 무용은 현대 무용의 동작들을 키치화하고 무용의 모더니티가 끔찍하게 여기며 결별하려고 했던 멜로 드라마적인 서사를 은밀하게 위장 전입시키고 있다고 짐작하기도 한다.
어느 의견이나 모두 얼마간 안은미 무용의 특색을 포착한다. 그러나 나는 현대 무용의 적절하고 합법적인 계승자이든 아니면 은근슬쩍 너스레를 떨며 값싼 감상(感傷)을 흩뿌리는 무용 드라마이든 어느 쪽도 썩 맞춤한 의견을 내놓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주지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등의 분할선이 새겨진 그물로 안은미가 주조한 동작을 포획하는 것은 어쩐지 잘못된 처분처럼 보인다. 짐작컨대 그런 논변은 안은미 무용의 역사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충분히 가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몸이 처한 정황을 배경으로 발휘되는 안은미 무용의 효력을 너무나 제(除)하기 때문이다.

2.

지크프리드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영화이론가로 더 잘 알려진 프랑크푸르트학파 혹은 비판이론의 대표적인 저술가이다. 아도르노 그 다음엔 벤야민을 둘러싼 끈덕진 관심과 흠모와 달리 아도르노의 멘토였던 이 비평가에 쏠린 관심은 호젓하다 못해 거의 무관심에 가깝다. 그러나 무용의 역사적인 무의식을 떠올려 보고자 애쓰는 이들에게 크라카우어는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비평가일 것이다. 그가 말년에 편찬하여 발간한 대형장식 The Mass Ornament은 부제(副題)인 “바이마르 에세이(Weimar Essays)”가 암시하는 바처럼 그가 바이마르시대에 쓴 에세이들을 모으고 있다. Siegfried Kracauer, “Travel and dance”, The mass ornament: Weimar essays, Thomas Y. Levin. tran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일종의 신문 문예란이라 할 수 있는 지면에 기고했던 글이다. 크라카우어는 바이마르 시대 독일의 진보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일간지이자 독일의 일급 신문이었던 「프랑크푸르터 자이퉁 Frankfurter Zeitung」의 문예란 편집자였다. 그는 이 지면에 실린 그의 글들은 역사유물론적인 문화 비평의 모범이라 여겨 마땅할 글들을 썼다. 그리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연후 말년에 이르러서야 출간된 선집에 실린 몇 편의 글은 ‘무용’을 역사의 단편이자 상형문자로 분별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나침반이 될 만한 분석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같은 책에 실린 “여행과 춤 Travel and dance”이란 글에서 크라카우어는 이렇게 단언한다. “여행이 그저 순수한 공간의 경험으로 축소되고만 것처럼, 춤은 단지 시간을 표지하는 것으로 변형되고 말았다. … 시간 속에서 특정한 관념을 표현하는게 아니라 오늘날 춤의 실제 내용은 시간 그 자체이다. 머나먼 초기 시대에 춤이 숭배 의례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그것은 운동의 숭배가 되었다. 이전에 리듬이 관능과 영혼의 표현이었다면 오늘날 그것은 자신에게서 의미를 제거하고자 하는 자족적인 현상이 된다. … (그리하여) 여행과 춤은 형식화되기 위하여 수상쩍은 경향을 취하게 된다. 여행과 춤은 더 이상 공간과 시간 속에 펼쳐지는 사건들이 아니다. 그도 아니라면 그의 내용들은 점차 ‘유행’에 의해 규정되도록 되고 만다.” 앞의 책, pp. 66-68.(강조는 원저자)
크라카우어는 여행과 춤 여기에서 크라카우어가 말하는 춤이란 20세기 초반 유럽의 중산계층과 노동자계급을 휩쓸었던 대중적 오락으로서의 사교 춤을 가리킨다. 그러나 춤을 굳이 그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곧 보듯이 그것은 극장에서 상연/상영되는 춤을 비롯한 역사적 시대의 춤을 망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형식적인 이벤트(formal events)’가 되고 말았다고 꼬집는다. 크라카우어가 보기에 괴테의 이태리 여행에서 이태리가 눈부신 영혼의 흔적들이 깃든 목적지(destination)였다면 지금 오늘날의 여행에서 우리가 찾는 곳은 그저 ‘새 장소(a new place)’에 불과하다. 여행지 사이의 차이는 그것이 서로 다른 장소라는 점을 빼고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여행이란 순수한 공간의 경험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때 장소와 이동에서 그 어떤 고유하고 특수한 내용을 찾는다는 건 난감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런데 크라카우는 이런 일이 춤에서도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내용’을 박탈당한 ‘형식적 이벤트’로서의 춤을 보다 집요하게 해부하는 일은 그가 ‘대형장식’이라는 책 제목과 같은 이름의 글에서 분석하고 있는 “틸러 걸즈 the Tiller Girls”를 분석할 때이다. 이 글이 지닌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소개 글을 참조하라. Karsten Witte, Introduction to Siegfried Kracauer’s “The Mass Ornament”, New German Critique, No. 5, 1975.
‘틸러 걸즈’를 분석하면서, 과거와 오늘의 형식적 차이를 통해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의 차이를 통해 문화적인 현상을 역사적 시대와 대응시키는 크라카우어의 사색은, 보다 분명하고 날카로워진다. ‘틸러 걸즈’는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영국의 라인댄스 무용단이다. ‘틸러 걸즈’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Kara Reilly, The Tiller Girls: Mass Ornament and Modern Girl, Theatre, Performance and Analogue Technology,
그들은 정확하고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연속적으로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스펙터클한 춤으로 유럽과 미국 관객을 사로잡았다. 또한 이는 표면 현상을 통해 역사적 시대를 읽고자 하는 크라카우어의 비평에 시금석이 되는 대상이 되었다.

“어느 한 시대가 역사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 시대가 자신에 대해 내리는 판단보다 하찮은 표면 차원의 표현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훨씬 더 생생하게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판단들은 특정 시기의 경향들을 표현할 뿐이기에 그러한 판단들로는 전체 구성을 확정적으로 증빙할 수 없다. 그렇지만 표면 차원의 표현들은 그것들의 무의식적인 본성으로 인해 사태(the state of things)의 근본적 실체에 무매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역으로 이러한 사태에 대한 지식은 이러한 표면 차원의 표현들에 대한 해석에 달려있다. 여느 시대의 근본적 실체 그리고 간과되고만 그것들의 충격은 서로를 비춘다.” Siegfried Kracauer, “The Mass Ornament”, 앞의 책, p. 75.

끊임없이 회자되는 크라카우어의 ‘대형장식’ 에세이의 첫 번째 단락은 역사의 현상학이라 불러도 좋을 크라카우어의 비평적 원리를 요약한다. 그러나 이는 처음에 대했을 때의 인상만큼 명료하고 단순하지도 않은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피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는 시대자 자신을 의식하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신뢰를 주지 말라는 것, 오히려 그러한 의식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채 표출되는 무의식적 본성의 표현들에 유의하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무의식적 본성을 파헤치기 위해 ‘해석’이라는 노고가 필요하다는 것 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덧없고 비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면 현상에서 어떻게 역사적 무의식을 탐지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크라카우어가 들춰보는 표면 현상은 ‘틸러 걸즈’의 댄스이다. 틸러 걸즈가 낯선 이름이라면 아마 언젠가 지나가며 보았을 버스비 버클리(Busby Berkeley)의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에 등장하는 화려한 무용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워너브라더스나 MGM과 같은 대형 스튜디오가 활약하던 시기, 초대형 세트에서 마치 항공사진처럼 촬영된 무희들의 일사불란하면서 기하학적인 조형을 숨 가쁘게 구축하는 동작들은 탄성을 자아내도록 하지 않을 수 없다.
틸러 걸즈에 대한 크라카우어의 분석은 간략하다. 그것은 테일러주의적 자본주의의 문화적 등가물이라는 것이다. 틸러 걸즈가 무대 위의 무용수 집단과 스타디움에 운집한 관객들의 무리는 대중(mass)이지 민중(people, Volk)은 아니다. 직접적인 욕구를 충족하거나 심미적인 충동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닌 가치 자체의 자기 증식을 위한, 즉 가치 자체를 위한 생산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성인 것처럼 틸러 걸즈 무용의 목적은 바로 장식 그 자체이다. 그것은 과거의 무용에 담겼던 의례적인 의미(ritual meaning) 따위는 아랑곳 않는다. 틸러 걸즈가 음악에 맞춰 만들어내는 휘황한 형태들은 군대의 제식이나 집단 체조가 만들어내는 것과는 전연 다르다. 제식이나 체조에서 동작들과 그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이상적인 윤리적 규범의 단위와도 같은 것이다. 거기에서 각 동작은 절제, 의무, 헌신 같은 윤리적인 이상을 상징화하는 시늉을 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일지언정 나름 자신의 도덕적 실체를 포함한다. 그러나 틸러 걸즈의 무용은 “그것은 내용 속에 있는 모든 실질적 구성요소들을 비워낸다.” 앞의 글, p. 77.
그것이 빚어내는 형태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도 실어 나르지 않는다. 풍경이나 도시의 모습을 찍은 항공사진처럼 그것은 단지 형태 자체에 몰두한다. 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포착하는 상징적인 이미지 같은 것과는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각각의 동작이 그를 행하는 무용수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른 것이 아닌 허위적인 총체에 의해 배당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합리성’을 추구한다. 이것은 총체성에 대한 어떤 이해도 없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주어진 자신의 직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도록 강제하는 테일러 시스템과 닮아 있다. 그리고 테일러 시스템은 틸러 걸즈라는 의외의 표면현상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인 합리성 혹은 경제적 이성과 문화라는 영역에서 발견되는 미적인 이성 사이에 조응 관계가 있다거나 상동성(homology)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에 그친다면 이는 충분히 변증법적인 비평이라 여기기 어려울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아도르노와 다르지 않게 그의 변증법적 비평의 솜씨를 발휘한다. 크라카우어는 ‘틸러 걸즈’의 무용, 즉 ‘대형장식’이 그저 자본주의적인 문화산업의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낯을 찌푸리고 규탄하는 데 동조하지 않는다. 고매한 이들이 이 하찮고 천박한 대중문화에 대한 어떤 심판을 내리더라도 그가 보건대 “장식적인 대중들의 움직임에서 얻는 미적인 쾌락은 정당하다(legitimate).” 앞의 글, p. 79.
“철지난 형태 속에 시대착오적인 고상한 감정들을 탐닉하는” 예술보다 이러한 대형장식이야말로 현실을 규정하는 원리를 미적인 영역 속에 담아냄으로써 현실의 규정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형장식으로서의 틸러 걸즈의 무용은 역사적인 무의식이 드러나는 징후일 것이다.

3.

크라카우어가 예민한 주의를 기울여 포착한 ‘테일러주의의 미적 표현’으로서의 대형 장식이라는 아이디어는 오늘날에도 연장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포스트포드주의(post-Fordism)’라고 말하는 유연생산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다. 이는 주어진 과업지시표에 따라 일한다기보다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업무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성과에 따른 보상을 받는 그리고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고용이 일반적이고 하청과 외주 등에 따라 생산과정이 더욱더 시야 속에서 사라져 버린 세계를 일컫는다. 비평가 마크 그리프는 생각을 달리 한다. 포드즈의적인 공장의 안무는 보다 주술적이고 보다 마법화된 형태로 오늘날 우리에게 지속된다고, 그는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체력 단련은 당신 안에 작동하는 기계를 인정하게 한다. 현대 헬스장만큼 우리가 공장 노동에 향수를 품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장소는 없다. 다이 프레스(가압기계-옮긴이)의 레버는 더 이상 우리에게 일하라 명령하지 않는다. 그러나 헬스장에 남겨진 산업장비는 우리의 여가 속으로 침투한다. 우리는 퇴근해서 컨베이어 벨트에 오르고, 악귀에 쫓기듯 달린다. 우리는 자진해서 달리를 압착 롤러에 끼우고, 굳어가는 팔을 프레스에 갖다 댄다.” 마크 그리프, 운동에 반대한다, 모든 것에 반대한다, 은행나무, 2019, 17쪽.

아이러니 가득한 어투로 그는 포드주의적인 공장의 풍경 한 복판을 차지하던 ‘기계’가 이제 매끈한 사유화된 영역 속으로 전치(傳置)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우리 주변에서 공장의 기계들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기계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골조는 이제 심미적인 피트니스 기계가 되어 우리 주변에 재등장한다. 그리고 생산 기계는 운동 기계가 된다. 신장개업한 피트니스센터는 자신들이 새로운 기계들을 갖췄음을 과시한다. 그러나 이 기계는 포스트포드주의적 주체의 모습을 복제한다. 기업가적 주체(entrepreneurial subject)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상은 자신의 생물학적인 신체를 규율하고 향상하려는 나르시시즘적이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주체로 나타난다. 자신의 삶을 둘러싼 사회적 규정을 잊거나 간파할 수 없는 새로운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관리함으로써 목표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체력단련장은 “사적인 자아를 해체해 다시 만들려고 곡예 행위를 시도”하는 아레나가 된다. 앞의 글, 21쪽.
자신의 역량을 측정하고 평가하며 삶의 성과를 점검함으로써 자신을 자유롭게 가공할 수 있다는 뜻에서 ‘자유 아닌 자유’의 합리성을 보증하는 일군의 장치들 역시 그에 부착되어 있다. 그것은 능력치를 확인하는 숱한 숫자의 행렬이다. 체중, 체지방, 혈압, 콜레스테롤 지수, 면역력 등 신체의 생물학적 조성을 알리는 숫자들은 곧 자아의 거울이자 증거가 되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라는 구호는 이제 노출과 전시를 위해 자신의 몸을 구경거리로서 조작하는 숱한 고역스러운 운동의 부담이 된다. 자신의 몸을 감추고 사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몸과 해후하는 은밀한 시도 등은 지탄을 받는다. 다시 마크 그리프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생물학적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는 의무에 구속된다. 그러나 사례는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탈리 북친이라는 작가는 크라카우어의 “대형장식”의 동시대 버전에 해당하는 것을 제시한다. 그는 크라카우어의 에세이 제목인 “대형장식”을 자신의 설치 작업의 제목으로 선택한다. 그는 비디오 공유 플랫폼인 유튜브(Youtube)에서 찾은 수많은 댄스 클립들을 활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파운드 비디오 풋티지로 구성된 몽타주를 버스비 버클리의 영화 <1935년의 황금광들 Gold Diggers Of 1935> 그리고 악명 높은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의 뉘른베르크 집회를 기록한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를 병치한다. 나탈리 북친이 찾은 유튜브의 비디오 클립들은 모순적인 공간이다. 디지털 아트 비평 매체인 「리좀 Rhizome」과의 인터뷰에서 나탈리는 이렇게 말한다. “유튜브의 댄서는 극히 사적이면서도 또한 극히 공적인 자기 방에서 외로이 정해진 춤동작(dance routine)을 수행합니다. 이는 그 나름 우리 시대의 완벽한 표현이겠죠. 1290-30년대에 관객들이 극장이나 스타디움에 앉아 형태를 이루며 움직이는 신체 행렬을 지켜보았듯이, 오늘날의 개별 관람자들은 컴퓨터 화면 앞에 혼자 앉아 유튜브 비디오를 통해 각자의 방에서 혼자 자발적으로 형태를 이루며 움직이는 개별적인 춤꾼들을 지켜봅니다.” Dancing Machines, An Interview with Natalie Bookchin, Rhizome, https://rhizome.org/editorial/2009/may/27/dancing-machines/ (2019. 3 24. 접속).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포개진 공간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비디오에 접속한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공연장으로의 공적인 공간이다. 개인의 삶의 단편을 담은 비디오 클립이면서도 그것은 동시에 수많은 이들이 관람하는 공적인 미디어가 된다. 그리고 이는 ‘포스트포드주의’의 논리를 반영한다. 마치 포스트포드주의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해치우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이 생산과정의 사슬 속에 통합된 것이듯이 말이다. 여기에서 대중은 ‘틸러 걸즈’의 무용수들처럼 집합적인 신체로 표상되지 않는다. 나탈리의 영상 설치에서 보듯 그것은 거의 동일한 춤동작을 하는 무한히 동일한 비디오 클립들의 연쇄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개별적인 신체의 동작을 통해 표상된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적인 특이성을 지닌 신체라기보다는 포스트포드주의적 ‘대형장식’이 만들어내는 신체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의 몸이다. 그리고 ‘이용자 생산 콘텐츠(user-generated contents)’라는 미심쩍은 용어가 말해주듯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간도 흐릿하다. 개인들의 자기 생산 과정은 또한 포스트포드주의적 대중을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동시대무용과 포스트포드주의의 관계에 대한 비평적인 논의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Ramsay Burt, Ungoverning dance: contemporary European theatre dance and the common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그렇다면 이제 안은미의 ‘막춤’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안은미는 인류학적 무용 프로젝트(어떤 이는 이를 무용인류학이라 부르기도 한다)라거나 커뮤니티 댄스(community dance)라고 알려진 그의 연속적인 작업,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사심 없는 땐쓰>, <무책임한 땐쓰>, <안심댄스> 등을 통해 노인들의 몸, 청소년들의 몸, 신체장애자들의 몸과 그 몸에 깃든 무용적 정동(affect)을 찾아내고 이를 유토피아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재료로 삼고자 시도하였다. 사회참여예술(socally engaged art) 혹은 클레어 비숍의 말을 빌자면 ‘사회적 전환(social turn)’ 이후의 예술에서 공동체 혹은 사회적 관계가 부쩍 중요한 의제가 되었고, 퍼포먼스와 동시대무용에서 이러한 의제를 실현하고자하는 이루 열거하기 어려운 작업들이 등장했다. Claire Bishop, Artificial hells: participatory art and the politics of spectatorship, London & New York: Verso Books, 2012.
안은미의 인류학적인 연작 역시 그러한 흐름에 속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렇게 동시대 예술의 어떤 흐름에 소속되거나 편승하는 작업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이 연속 프로젝트의 함량을 짐짓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안은미의 안무는 앞서 보았던 대중오락 혹은 강박에 가까운 자기 전시로서의 춤이 운반하고 타전하는 역사적 무의식을 길어올린다. 안은미는 지금 여기의 몸짓 속에 퇴적된 역사적인 흔적을 주시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그것을 재단하였다간 세월의 흐름에 아랑곳 않고 보전된 몸의 신명 운운의 미학주의적인 서사에 포획될 위험이 다분하다. 나는 그런 자리에 그치지 않은 채 그런 역사적 무의식의 회상을 거스르는 비판적인 몸짓이 안은미의 안무 속에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헤게모니적인 현실의 원리가 어떻게 먼 시공간에 있던 춤추는 몸과 동작의 원리 속을 파고들거나 혹은 (루이 알튀세르의 변증법적 분석의 용어법을 빌자면) 과잉결정하는지 헤아리는 것은 오늘날 문화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해석’의 방법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안은미의 연속 작업은 그러한 해석과는 다른 자리에서 해석의 방법을 도입한다. 우리는 그것을 ‘메타-안무(meta choreography)’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여러 시골 지역을 돌아다니며 마주한 할머니들과의 대화, 즉석에서 벌어지는 춤마당, 그리고 수줍게 혹은 흥에 겨워 카메라 앞에서 춤사위를 보여주는 모습 등을 기록한 영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이 무대 무용은 무용극의 형식에서 탈출하지 않는다. 다만 출연자들이 전문 무용수에 그치지 않고 인생에서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는 할머니들도 포함한다는 점에서 무용극의 형식을 크게 손 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유사 민족지적인 인터뷰를 이용한다는 점을 제외하곤 이 작품에서 사실 인류학적인 접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인터뷰에서 안은미가 자신은 할머니들의 춤에서 빌어먹을 한국의 현대 무용이 무용이라는 이름 아래 거들떠보지 않은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춤바람이라는 부도덕한 풍속이란 이름으로 제거되거나 억압되어야 했던 대중들의 삶 속에 숨은 채 상속되었던 우리 춤의 역사적 고고학을 시도했던 것 같다는 취지의 발언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 인터뷰 역시 아마추어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우 서툴고 산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터뷰가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노년의 할머니들의 개인적인 생애나 사적인 일상이 아니다. 혹은 어떤 집합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사례로서의 인물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의식적인 생활 속에서는 감추어져 있거나 억압된 몸짓을 튀어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짓 혹은 움직임은 인류학적인 사례나 기록이라기보다는 분류되거나 규정되기 어려운 춤으로서의 몸짓이다. 그 몸짓은 물론 본격 예술로서 무용의 동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교댄스에서 볼 수 있는 정서적인 호응을 유발하는 의례적인 동작과는 한 치도 비슷한 구석이 없다. 혹은 걸그룹의 공연장에서 볼 수 있는 정밀하게 규격화된 동작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할머니들의 몸짓을 춤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고 그것에 춤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할 때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춤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얻을까. 가장 손쉬운 대답은 춤의 동작을 미학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춤이 근본적으로 신바람이거나 흥이라면 이런 심미적인 쾌락을 운반하는 동작들은 모두 춤으로서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무용이라는 것은 내파되고 고급 예술로서의 무용과 대중적인 여흥으로서의 춤 사이에 놓인 간격은 순식간에 증발된다. 안은미의 안무에는 이러한 미학주의적인 일반화에 기울도록 만드는 요소가 다분하다. 안무가인 안은미 스스로가 이런 이야기를 즐겨하고, 다양한 서사적 장치가 이를 증빙한다. 이를테면 거의 모든 작품의 전형적인 피날레의 장면들은 신명과 즐거움의 분출을 상연한다. 꽃가루가 날리고 술병이 돌아다니고 미러볼이 번쩍이며 돌아가며 관객들은 무대로 올라와 함께 덩실거린다.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서 댄스 파티장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도구적이고 공리적인 삶의 동작들로부터 분리되거나 벗어난 동작들을 미적인 동작으로 즉 춤의 동작으로 한데 모은 뒤 그것에 신바람이나 흥이라는 미학적 정서를 부과하는 것은 거칠고 유치한 추상화이다.

4.

이 때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이 안은미의 안무법으로서의 ‘막춤’이다. 막춤은 춤의 장르가 아니다. 막춤은 춤은 춤이되 무용이나 댄스라고 불리는 춤에는 미달하는 즉 미적 카테고리로서의 춤에는 한참 못 미치는 춤이다. 한편 그것이 춤으로서 승인받지 못할 때에는 춤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불안과 공포가 끼어들어 있다. 이를테면 ‘춤바람’이 그러한 춤을 둘러싼 역사적인 무의식을 증언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춤바람이란 “춤에 온통 정신이 팔림을 이르는 말”이다. 춤이란 정신을 팔게 하는 위험한 힘이 숨겨져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춤이 삶의 정상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무섭고 두려운 힘이라는 불안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에 널리 읽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나치에 저항한 백장미단은 밤마다 몰래 스윙 재즈를 추는 무도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박종서 옮김, 청사, 1987.
토마스 카터(Thomas Carter)의 영화 <스윙 재즈 Swing Kids>(1993)는 그 무도회를 그린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 백장미단이 지닌 진정한 위험이 바로 춤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백장미단에게 스윙 재즈란 자유의 상징이었을 것이고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겐 퇴폐(decadence)의 화신이었을 것이다.
춤을 향한 불안과 공포를 짚어보기 위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Rattenfänger von Hameln)’라는 동화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춤의 광기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도 있다. 마을의 쥐를 잡아준 대가를 주지 않자 쥐들을 강물에 빠트려 죽인 그 피리로 마을의 모든 어린 아이들을 끌고 간 피리부는 사나이는 춤에 대한 공포를 극화한다. 춤바람 혹은 무도병(dancing mania)이란 춤에 깃든 불길한 힘에 대한 윤리적인 공포를 드러내는 병리적 삽화들이다. 즉 춤바람에서의 춤 혹은 막춤은 합리적․효율적․공리적인 동작의 안무로 이뤄진 생산적인 운동과 이를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적절한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안무된 스포츠와 무용 등의 역시 생산적인 운동이 서로를 돕고 지지하는 상호보완적 순환 체계를 파열시키는 잡종이다. 그러나 춤바람이란 말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당연히 정비석의 신문 연재 소설 자유부인과 이를 각색한 같은 제목의 영화 그리고 1955년에 터져 나온 ‘박인수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은 박인수라는 사내가 해군 장교를 사칭하고 댄스홀을 돌며 여대생을 포함한 70여명의 여인을 농락한 것을 일컫는다. 이 사건에서 춤바람이 났다는 것은 향락에 빠지는 것이고 정조 관념을 잃은 것이라는 생각의 연쇄가 이어진다. 박인수가 법정에서 “내가 만난 여성 중 처녀는 미용사 이 모 씨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진술이 대서특필되었고 여성의 정조 관념을 둘러싼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1심 재판에서 박인수는 공무원사칭 부분만 유죄가 인정되었고 이른바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담당 판사는 기자들에게 “정조라고 하여 다 법이 보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에 비추어 가치가 있고 보호할 사회적 이익이 있을 때 한하여 법은 그 정조를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줄곧 사람들의 입에 오를 ‘향락적 사회 풍조’로서의 춤바람이라는 춤의 이미지는 춤을 향한 끈덕진 두려움을 반복한다.
정신분석학의 어법을 빌어 말해보자면 억압적인 ‘승화’(혹은 마르크제의 용어법을 빌자면 ‘억압적 탈승화(repressive desublimation)’)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1차원적 인간: 선진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 논고, 차인석 옮김, 집영사, 1976.
를 거쳐 예술로 승인받게 된 무용으로서의 춤과 달리 춤바람에서 전제하는 춤이란 승화에 저항한다. 그런 점에서 안은미의 안무에 특색을 부여하는 다양하게 인용된 춤들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생긴다. 안은미의 막춤 안무에서 참조되는 춤들은 기원이 없는 춤들이다. 물론 그 춤들에 역사적인 기원이 없을 리 없다. 이를테면 지루박이라는 춤은 지터버그라는 춤이다. 촬스톤이란 춤도 있다. 스윙도 있다. 그렇지만 그 춤들은 자신들의 기원과 아무런 상관 없이 또 자신이 유래한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채 여기에 등장한다. 그 춤들은 자신이 기원한 시대와 장소로부터 아무런 의미도 얻지 못한다. 그러기엔 그 춤들은 역병(疫病)처럼 전승되어 왔다. 그 춤들은 어떤 공식적인 무보(舞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무보적인 표기법을 통해 기록되거나 고정될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춤들은 막춤이 된다.
안은미가 막춤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도병에 가까운 춤이다. <1분 29초>는 참여를 자원한 이들이 1분29초 동안 동작을 하는 동작의 시리즈를 보여준다. 어떤 이는 벌거벗은 채 몸을 비틀고 어떤 이는 귀여운 점프를 하며 어떤 이는 폴 댄스를 시늉한다. 그 모든 동작들이 도미노처럼 연속될 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무도병에 가까운 끝없는 동작들이다. 그런 탓에 안은미의 안무에서 참조, 인용되는 몸짓들은 그리고 극화되는 동작들은 승화되지 못한 채 배회하는 몸짓들의 목록에 가깝다. 그것은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잇는 후속 작업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안은미컴퍼니 창단 30주년 기념공연인 <슈퍼바이러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안은미컴퍼니에서 활동했던 멤버들이 안은미컴퍼니의 무용 레퍼토리 가운데 자신의 몸속에 기억된 동작들을 전시하는 이 작품에서 무용수들은 자신들 앞에 배열된 바구니 속에 든 의상들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마치 그 유사(類似)-신체로서의 의상들은 몸의 허물이거나 겉껍질이었다는 듯이 무용수의 몸에 장착되자마자 자신에 깃든 동작들을 쏟아낸다. 그것은 전체 서사를 구성하고자 배치된 의미의 요소로서의 몸짓이 아니라 자족적인 동작, 흥분과 기쁨을 운반하는 정동적 단위처럼 작용하는 동작들로 연속된 무용을 만들어낸다. 슈퍼바이러스가 박멸할수도 면역될 수도 없는 가공할 바이러스를 가리키는 것처럼 <슈퍼바이러스>는 제거할 수 없는 완강한 정동의 몸짓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동은 역사적인 무의식처럼 기능한다. 그것은 몸속에 저장되었다 깨어난 ‘춤바람’의 잔해이고, 생산적이고 기능적인 몸을 안무했던 사회적 기율에 굽히지 않고 버텨온 동작이다. 현재의 몸 안에 퇴적된 역사적 힘들의 길항을 안은미는 안무한다. 그것은 단순히 지배 문화에 의해 가려지거나 억압되었던 통속적이고 비천한 몸짓들을 인류학적으로 수집, 탐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의 몸을 뚫고 들어가 그 안에서 역사적 힘의 작용을 밝혀내는 고고학적인 작업에 가깝다. 탄츠테아타((Tanztheater)의 정수를 보는 듯한 <심포카 바리>에서도 그러한 몸짓들은 샅샅이 수집되어 전시된다. 그것은 바리공주 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통속 사극을 통해서이든 아니면 무당들의 굿을 통해서든 전시되어온 역사적 몸짓들을 참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참조란 시대착오적이며 연대기적인 어떤 참조와 지시에 저항한다. 그것은 전통이란 이름으로 두루뭉술하게 요약되곤 하는 과거의 시간에 의지하는 시늉을 거부한다. 이를테면 환관들의 종종걸음이나 시종들이 어르신들을 보필하는 몸짓들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픈 동작들로 안무된다. 그렇게 끊임없이 확장되는 몸짓들은 그녀에 의해 안무된다. 그것은 춤바람이라는 검열을 통해 억압되거나 제거되어야 했던 몸짓들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안은미의 기억술이다. 이런 기억의 안무를 그녀가 지칭하는 이름은 물론 ‘막춤’이다.

5.

안은미는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와 관련한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대한민국에 춤바람이라도 나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 말인가”란 대담자의 질문에 “정답”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춤을 출 수 있는 세상, 즉 자신의 기쁨을 마음껏 토해낼 수 있다면 좋은 세상 아닌가. 요즘 집회가 많은데 구호를 외치다가도 마지막엔 다 노래하고 춤춘다. 분명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덧붙인다. “춤은 이렇게 추는 거다”, 문화일보, 2017년 3월 21일.
춤바람은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동작, 그 동작들을 반영하는 승화된 몸짓들로서의 무용에 반하는 춤이다. 그것은 무용 안으로 운반된 반-무용이다. 반-무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안무된 합리화된 동작들 그리고 그것을 반영하는 미학화된 동작들로서의 무용(‘틸러 걸즈’의 라인댄스(precision dance)이든 아니면 오늘날 유튜브에서 마주하는 연쇄반응과도 같은 댄스 비디오의 댄스이든)에 대적한다. 그런 점에서 안은미의 안무가 표현주의 무용과 그것을 계승하는 탄츠테아타와 접속되어 있다는 평가는 수긍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마리 비그만(Mary Wigman)이나 루돌프 라반(Rudolf von Laban), 피나 바우쉬(Pina Bausch) 같은 독일의 안무가들의 안무와 안은미의 안무가 유사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산책, 소풍, 요가, 나체되기, 일광욕, 볼륨 댄스 등의 신체 의례를 끊임없이 고안하고 숭배하던 시대에 표현주의 무용은 속한다. Karl Toepfer, Empire of Ecstasy: Nudity and Movement in German Body Culture, 1910-1935,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반하는 낭만주의적인 반합리성을 예술적 실천의 정수라고 생각했던 것이 ‘표현주의무용(Ausdruckstanz)’이라면 그리고 탄츠테아타가 복원하고 상속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안은미 역시 그것을 겨냥한다. 그러나 그것은 흥미롭게도 독일의 안무가들처럼 창조적인 안무가의 서사적 연출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창조적인 작품을 구성하는 행위로서의 안무를 ‘막춤’의 역사적인 고고학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것은 유토피아를 향한다. 그가 춤을 출 수 있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라고 말할 때 그 유토피아적인 충동은 단지 안무가의 개인적인 소망사고를 투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 역사적인 지지물을 찾는다. 그것이 또한 막춤이다.
그러나 안은미의 코레오그래피로서의 막춤은 무용에 반하는 무용으로서 얼마간 큰 지지를 받아온 농당스(Non-danse, Non-dance)와 대조해볼 만한 가치를 지닌다. 물론 안은미는 제롬 벨(Jérôme Bel)이 아니다. 제롬 벨이 개척한 반-무용적인 안무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를 둘러싼 논의는 분분하다. 그 가운데 안드레 레페키의 분석이 가장 치밀하다고 할 것이다. 그는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제롬 벨의 재현 비판”이란 부제가 달린 “코레오그래피의 ‘느린 존재론’”을 수록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제롬 벨이 시도하는 현대 무용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이 무엇일지 요약하고자 시도한다. 그런데 현대 무용의 존재론이란 무엇일까. 안드레 레페키는 현대 무용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보증하는 몇 가지 요소를 적시한다. 그것은 “닫힌 방에 평평하고 부드러운 바닥, 제대로 훈련받은 하나 이상의 육체, 움직이라는 명령에 기꺼이 따르는 자발성, 연극적인 상황(시점, 거리, 환상)에서 가시화하기, 그리고 몸의 가시성과 현전, 주체성 간의 안정된 통합에 대한 믿음”으로 이뤄져 있다. 안드레 레페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문지윤 옮김, 현실문화, 2014, 109쪽(번역은 부분적으로 수정).
아마 이를 풀이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먼저 마치 화이트 큐브(white cube)나 다크 큐브(dark cube)가 미술이나 영화라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대상이 있다는 환영을 생산하듯이 무용 극장은 이러한 환영을 생산한다. 그것은 무용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재현 기계의 일부이다.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몸이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그것은 무용하는 몸이라는 독립적인 신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가상을 만들어낸다. 이 역시 무용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재현 기계의 일부이다. 다음으로 몸들 사이의 배치, 그것은 시점, 거리, 환상을 활용함으로써 전개되는데, 이는 극적인 서사를 만들어내는데 역할을 한다. 그것은 연극적이며 나아가 자기완결적인 서사로서 무용 작품이라는 독립적인 단위, 즉 하나의 무용작품이라는 것이 있다는 착각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다. 다시 이 역시 무용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재현 기계의 일부이다. 다음으로 지금 여기 무대 위에 보이는 몸은 아무개의 몸이 아니라 무용수라는 예술적 저자의 몸이다. 그리고 그가 수행하는 동작들은 무용적인 동작들이며 무용수의 미적인 의지에 의해 풀려나온 동작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 역시 무용이라는 재현 기계의 일부로서 이바지한다.
그렇다면 무용을 무용으로서 존립하게 만드는 이러한 재현 기계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무용에 대한 거부일까. 아마 그것은 농담에 가까운 말일 것이다. 제롬 벨로 대표되는 ‘농당스’는, 적어도 레페키의 말을 빌자면, 현대 무용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재현의 원리’를 비판하고 이를 통해 무용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흔히 무용이라고 상상하던 음악에 맞춰 동기화된 아름다운 동작을 전연 동원하지 않은 제롬 벨의 퍼포먼스는 무용에 관한 무용이라는 점에서 메타-안무에 가까운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와 달리 어쩌면 처량하리만치 무용의 지속에 관한 꿈을 꾼다. 어제의 무용을 규정했던 원리(무용의 자기 재현적 원리)를 고발하고 힐난하는 것은 무용을 폐지하고 싶다는 의지가 아니라 역사적인 담론으로서 현대 무용과 작별하고 전혀 새로운 무용을 발견하겠다는 의지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안무가로서의 제롬 벨, 무용수로서의 제롬 벨, 자작품의 저자로서의 제롬 벨, 무대의 현존을 고발하는 무대를 연출하는 제롬 벨로 되먹임 된다. 이 점에서 안은미의 안티-댄스는 유별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제롬 벨이 현대 무용의 재현적 원리의 바깥으로 퇴장하여 현대 무용의 얼개를 들추고 비판한다면, 안은미는 막춤의 고고학을 경유하여 현대무용을 내재적으로 비판한다. 만약 무용이 신체 표현(physical manifestations)이라면 무용적인 동작과 비무용적인 동작은 모두 동등하다는 “동작의 민주주의”를 강변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내 작업은 무용수들에게 춤을 추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마음을 춤추게 하는 것”이라는 제롬 벨의 유명한 표현처럼 아무런 춤도 추지 않으면서 그것을 무용으로서 만들어내는 개념적인 실천은 여전히 무용 안에 갇혀있다. 그것은 무용의 역사를 자율적인 실체처럼 가정하고 그것에 대해 추궁하지만 무용을 규정하는 무용 바깥의 역사적인 규정, 즉 무용에 가해진 타율적인 규정을 도외시한다. 안은미의 반-무용적인 무용은 무용의 내부와 외부를 모두 포착하고자 시도한다. 막춤은 그런 점에서 무용으로부터 배척된 춤이면서 동시에 무용처럼 안전하지 않은 춤으로서 경원시된 춤이다. 그리고 그런 춤들의 동작을 망라하는 안은미의 코레오그래피는 여느 메타-안무보다 더 메타적인 것으로서 작용한다.
한편 안은미의 코레오그래피가 농당스가 추구하는 자기지시적 무용이 품고 있는 ‘재현 장치 비판’을 넘어 무용을 구속하는 무용 안팎의 힘들에 대한 비판을 행하는 메타-안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는 또한 탈식민적인(de-colonial) 충동을 상연한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요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탈-식민적 충동이란 무용의 제국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서구 대중문화의 레퍼토리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춤들이 토착적인 몸짓과 춤들을 뒷전으로 밀어내거나 소멸시키고 말았다는 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부정당한 춤의 몸짓을 추적하고 무용으로서 재조립하는 일에 머문다면 안은미의 안무는 단지 잊히고만 춤과 몸짓의 기록자로서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안은미의 코레오그래피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것은 무용과 비무용의 대조법을 작동시켜 무용이 자신을 근대 예술의 장르로 존립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강요했던 자기 감시와 규율의 폭력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유기되거나 억압되었던 몸짓과 춤을 안무하여 무용으로 구성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반-무용이지만 또한 동시에 무용이다. 무용은 죽었다는 소문이 무성한 동시대 무용의 현장에서 안은미는 “누가 감히 그딴 소리를 해”라고 응수하며 무용이 건재함을 알린다. 이는 무용이 건재하기 위해 부정당한 몸짓들을 다시 무용화하면서 동시에 그 몸짓들이 소속된 역사-말하자면 서글픈 한국사-를 상기시킨다. 이러한 한국사에서 부정당한 몸짓은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에 통합되면서 강요된 몸짓의 체제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바로 부끄럽고 민망하게 각자의 몸에 침전물처럼 남아있는 몸짓의 흔적들을 서로에게 비추고 바라보는 목격(witnessing)의 과정과 함께 한다. 레페키는 동시대 퍼포먼스의 탈-경험적인(dis-experiencing) 특성과 대조해 목격과 증언이라는 체화된 경험을 생산하는 것이 무용임을 역설한다. 그것이 동시대 무용의 특성으로서 정의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것은 안무의 생산과 전유라는 전체 과정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논점을 던진다. André Lepecki, Afterthought-Four notes on witnessing performance in the age of neoliberal dis-experience, Singularities: dance in the age of performance, New York, NY: Routledge, 2016.
할머니와 중년 사내들이, 그리고 십내의 아이들이 자신의 몸과 움직임을 서로에게 보고 보이는 일에 참여할 때 그 순간 발생하는 서로의 목격은 전례 없는 ‘비판적 교육(critical pedagogy)’이 된다. 그것은 나르시시즘적인 자아 존중감을 위해 마련된 치유적 퍼포먼스의 신자유주의적인 에토스와는 무관하다. 안은미는 자신의 ‘인적 자본’의 자랑스럽고 가치있는 몫을 자랑하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억눌린 몸짓으로서의 엉성하면서 아름다운 몸짓을 평등하게 표출하며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유토피아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그런 점에서 안은미의 안무는 ‘작품’이라는 자율적인 대상을 제작하는 저자의 행위가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실천을 매개한다. 그녀는 세련되기엔 너무나 촌스럽고, 예술적인 것으로 쳐주기엔 너무나 천하고, 자랑스럽게 내보이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몸짓들을 그는 집요하게 모은다. 그 몸짓들은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의 도착성이 반향 하는 흘레붙듯이 돌출하는 몸짓이다.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은 터무니없으리만치 예스럽지만 동시에 기괴하게 첨단을 흉내 낸다. 그런 점에서 이박사 테크노 뽕짝은 과거와 오늘이 흘레붙는 세계이다. 그리고 안은미의 안무는 그곳에 착륙한다. ■

_현실문화에서 간행될 안은미 무용 30년을 기념하기 위한 비평서에 기고한 글. 수정 중인 원고이므로 인용은 출판된 글을 참조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