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미술관을 위한 페다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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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비숍은 래디컬 뮤지엄이란 짧지만 도발적인 보고서에서 오늘날 번성하는 미술관이라는 제도를 품평한 바 있었다. 그녀는 그 책에서 미술관이 “엘리트 문화의 귀족 기관이었던 19세기 박물관 모델이 오늘날 여가와 오락을 위한 포퓰리즘 사원으로 바뀌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예술작품과의 심도 있는 만남이 새로운 경험 목록을 만드는 것보다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감상이나 반성과 같은 관람 방식은 소멸하거나 희박해졌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 좋은 전시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전시이고, 전시 중인 작품보다는 미술관이라는 건축적 대상을 경험하는 게 더 흔하고 재미난 일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인정하는 공공연한 진실이다. 영원한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당분간의 역사적인 시대의 범위만큼이나 아우를 수 있는 미적 지각과 경험의 형태를 찾아내어 그를 동시대의 미적 진실이라고 이름붙이는 일은 이젠 언감생심이랄 수밖에 없다.

가장 극화된 형태이자 가장 물신화된 형태인 상품일 경험-상품이 동시대 상품 형태임을 가리키는 경제학의 약어가 경험경제라면 동시대 미술 역시 경험으로서의 예술을 제공하는 듯 싶다. 전시는 점점 더 이벤트화 되어가고 있고, 미술관은 그런 이벤트를 상연하는 무대가 되어 왔다. 어느 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현재주의 presentism’만이 유효한 시간으로서 군림할 때, “지금 여기”에서의 (현상학적인) 경험을 강변하는 퍼포먼스와 설치 등이 미술관을 점거하는 건 피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미적 진실의 역사를 전시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미술관은 아차 하던 사이에 그 때 그 때의 지금을 상연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들이 배회하는 장소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근년 어느 글에서 후기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는 시간성의 종말과 함께 하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역사라는 시간성의 좌표에서 탈락된 순간의 지금일 뿐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결과 현 자본주의에 상응하는 미학은 ‘단독성(singularity)의 미학이 된다고 꼬집었다. 그의 말은 오늘날의 미술관의 용태(容態)를 서술하는 진단서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 중인 안톤 비도클의 <모두를 위한 불멸>이 각별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 코스미즘(Russian cosmism)이라는 터무니없기 짝이 없는 생기론적 유토피아주의를 발굴하고 예찬하는 이 영상 시리즈에서, 정작 뭉클한 것은 그들의 우주론적 존재론보다는 미술관의 쓰임새에 관한 판타지였을지도 모른다. 한 세기 전 러시아의 급진주의자들은 지나간 것과 죽은 것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사자들의 전당인 미술관을 끝없는 갱신과 확장을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논리의 부정적 장소로서 간주하였다. 새로움을 향한 무한한 돌파를 통해서만 자신을 재생산하고 확장할 수 있는 세계에서 미술관은 고립된 섬처럼 낡은 것, 죽은 것, 옛 것으로 처분된 것을 보전하는 비상한 장소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에 그리고 그렇게 죽은 것들을 모두 부활시킴으로써 유토피아는 완수된다는 그들의 다짐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그러다 우리는 어쩌면 미술관이야말로 오늘날 ‘문화적 상부구조’가 처한 상태와 그 모순을 집약하는 증상적인 장소이지 않을까 하는 착잡한 물음에 이르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직한 국제 심포지엄인 <미술관은 무엇을 움직이는가-미술과 민주주의>가 새삼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획자는 심포지엄이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되었다고 쓰고 있다. “첫 번째는 박물관•미술관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미술관과 민주주의 실천의 관계, 두 번째는 미술사 담론의 주요 의제인 현대미술의 현실 재현 및 개입 방식, 그리고 그 변화양상”이라는 것이 그 두 축이다. 미술관은 민주주의를 위한 장소인가 혹은 민주적인 장소인가라는 물음을 내건 첫 번째 축의 주제를 위해 초청된 발표자는 기조발제자인 류블라냐 현대미술관장인 즈덴카 바도비나츠(「탈사회주의 맥락에서 본 민주적 미술관」), 최태만(「<민중미술15년:1980-1994> 전시는 과연 미술관의 민주화에 기여했는가」), 박소현(「미술관의 민주화를 위한 질문들」), 울프 에릭슨(「열린 미술관:스톡홀름 현대미술관 교육 프로그램의 사례로 본 시민의식 양성」), 비브 골딩(「사회 정의와 포용을 촉진하는 민주적 공간으로서의 미술관과 그 역할」), 알레한드로 메이틴(「네크로폴리틱스 시대의 새로운 전략: 남미 남단의 사회환경적 미술 실천」) 등이다. 발표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술관을 재편 혹은 변형을 위한 프로그램은 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이는 또한 민주주의라는 기표를 동원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즈덴카 바도비나츠의 ‘민주적 미술관’과 울프 에릭슨의 ‘열린 미술관’, 비브 골딩의 ‘포용의 미술관’ 등은 급진적 미술관, 비판적 미술관, 민주적 미술관 등 미술관의 향방을 둘러싼 다양한 프로그램에 반응한다. 그리고 미술관의 전시, 운영, 관리, 연구 등 다양한 영역의 실천을 조직하고 규제하는 프로그램을 수립할 때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일까를 따지는 것은 그 기표를 둘러싼 해석의 다양성만큼이나 다를 수 있음을 가리킨다. 또한 민주주의가 재현/대표라는 쟁점과 깊이 관련이 있는 만큼이나 대표되어야 한다고 가정되는 주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 역시 미술관이 취할 모델을 다르게 이끈다. ‘포용의 미술관’은 장애자나 어린이, 노인 등 사회적 약자나 주변화된 집단 역시 관객으로 포함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겨냥하는 목표는 “미술이 개인과 직접적으로 결부됨을 자각하고 있는 관객과 만날 때에만 미술은 진정한 중요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열린 미술관에서 대표되어야 할 관객-주체는 충실한 미적 경험을 누릴 권리를 지닌 개인이다. 한편 ‘열린 미술관’은 미술관의 민주주의를 과소재현되었던 주체들, 예를 들어 “BAEM(흑인, 아시아인, 소수 민족)와 LGBTQI(레즈비언, 게이, 성전환자, 퀴어, 간성)”가 자신의 목소리를 발언하고 스스로를 가시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관의 민주주의는 우리와 ‘타자’ 사이의 대화를 마련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우정의 윤리가 실천되는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

이 때 미술관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미술관이 대표할 관객-주체는 누구인가를 묻는 일로 귀결된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담론이 민주주의를 누구를 대의, 대표, 재현할 것인가로 간주한다면 민주적 미술관의 프로그램 역시 대표되어야 할 다양한 주체들을 식별하고 배제, 누락된 주체를 포용하고 그들에게 문을 여는 일이 된다. 따라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깊게 의지하는 미술관의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즈덴카의 민주적 미술관의 모델은 새삼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관장으로 재직하는 류블라냐 현대미술관은 클레어 비숍이 급진적 미술관의 대표 사례로서 꼽은 세 곳의 미술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비숍이 완곡하게 언급하고 얼버무리고자 했던 것을 그녀는 단호하게 언급한다. 그녀는 민주주의란 기표 자체가 언제나 적대가 작용하는 장(場) 속에서 움직인다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또한 비판적 미술관이 겨냥하는 민주주의(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효과에 대적하는)와 주류 미술관이 도모하는 민주주의(더 많은 소비자를 유치하기 위한 취향의 민주주의)가 다른 것임을 구별한다. 즈덴카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미술관의 민주주의를 요약하는 7개의 테제를 제시하면서 먼저 “민주적 미술관은 포스트모던한 다원성 아래에 적대를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며 기염을 토하고 “민주적 미술관은 다양한 입장을 대표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들과의 관계하기에 민주적인 것”라고 역설한다. 사실 그녀와 동료들이 제안했던 미술관의 모델을 가리키는 이름인 ‘주권자 미술관(the constituent museum)’이란 모델은 강렬한 공화주의적 관념을 뿜어낸다. 이는 미술관이 주어진 주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의 질서가 있기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적대를 드러내고 그를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주체-주권자? 인민?-를 구축해야 한다는 관념을 운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관이 합의(consensus)의 공간이 아니라 개입(interference)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발언은 민주적 미술관에 관한 자신의 지혜를 뽐내는 다른 발표자들의 입장을 단숨에 조롱한다.

따라서 노골적인 인신공격이 없었달 뿐, 심포지엄은 양립하기 어려운 ‘미술관의 정치학’을 둘러싼 ‘입장들’이 갈등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흥미롭고 뜨거운 입장의 혼전(混戰)은 얄궂게도 모든 입장을 존중하는 듯한 맥 빠진 중계방식 탓에 그 열기가 반감되고 말았다. 이는 한국의 미술관이 경유해야 했던 아슬아슬한 과거사(불온한 이념 미술로 간주되던 민중미술을 국립 미술관에 입성시킨 ‘민중미술 15년’ 전의 성사와 비평)와 현재(박근혜 정권의 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미술관의 민주주의란 관념 자체를 사치스러운 의제처럼 보이도록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이 싱거운 핑계일 뿐이라면 미술(나아가 예술)에 내재적이면서도 자율적인 민주주의를 사고하지 못한 채 정치제도라는 타율적인 힘이 미술에 미치는 효과를 생각하는 데 급급한 (그러나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무시할 수 없는 관성의 효과일) 우리의 처량한 처지가 그러한 논쟁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을 막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포지엄의 야심적인 주제 제안과 그것을 둘러싼 숱한 주장들을 감당할 능력 사이에 놓인 격차는 더욱 서글프고 뼈아픈 것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한편 둘째 날의 심포지엄을 관통했던 주제는 더없이 산만했지만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발표는 또 그만큼 교육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작품, 작업, 전시, 관람 등의 지점에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각각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정치생태학의 관점에서 기후변화의 시대에 미술이 인간이 자연과 환경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를 묻는 T. J. 디모스와 T. 와이스맨의 발표는, ‘인류세(anthropocene)’를 내세운 한국의 주요 미술관에서 진행 중이거나 기획 중인 전시를 되짚어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인류세란 관념은 인간이 불가역적으로 변형시킨 자연이란 생각에 근거해, 왜곡된 자연적 질서가 인간에게 되갚음 하는 효과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두 명의 발표자는 이러한 관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은 인류세란 관념에 깃든 인식론적 이데올로기를 추궁하면서 인류세에서 말하는 인류란 누구인가를 따지고, 인간에게 외적인 자연이란 것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생산한 자연임을 들춘다. 그리고 아마 이틀간의 심포지엄 기간 동안 가장 격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던 샤레네의 발표는 남아공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의 반달리즘을 미술의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제시하였다. 케이프타운 대학교 교정에 자리한 남아공 식민주의를 이끈 세실 로즈의 동상에 똥을 투척하고 그것을 끌어내리려는 대학생들의 몸짓, 그리고 유색인 대학생들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주거비에 항의하기 위한 실천들을 병치시키면서, 그녀는 미술이 품어 왔던 모더니즘적인 환상의 정수인 개성적인 예술가란 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이는 ‘우리가 있기에 나도 있다’는 남아공 흑인들의 우분투 철학이 미술의 민주주의를 사색하기 위한 준거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제안에 이르게 한다. 이는 림 파다의 발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녀는 공식적인 미술사의 연대기 안에 포함시키기에는 낯선 이물(異物)인 탈식민지역의 예술적 실천의 두 가지 사례(‘카사블랑카 학파’와 ‘뉴 비전 아트 그룹’)를 제시하며 미술에서의 민주주의가 미술사를 기억하는 방식에서의 민주주의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한다.

<미술관은 무엇을 움직이는가-미술과 민주주의>는 성황리에(!) 끝났다. 반세기를 맞은 미술관이 자신이 처한 자리를 반성하기 위해 마련한 이벤트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기념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내일의 미술관을 위한 미학적 정치적 토론을 주선하고자 하였다. 자신의 좌표를 고민하며 스스로 취할 입장들을 초대한다기보다는 관조적인 위치에서 어떤 주장들이 거론되고 있는지를 열거하는데 그쳤다는 점에서 이를 방만하다고 탓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숨 가쁘게 변신하는 미술관이란 제도 혹은 기관이 어떤 생각을 하며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을 수습하려던 이들에에게 이 토론은 흥미 있는 학습 기회였을 것이다. 내일의 미술관을 위한 페다고지가 언제 우리에게 제대로 마련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스스로 던진 물음에 어떻게 답할 것인지 지켜보는 것 또한 이 심포지엄이 마련한 숙제임을 잊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