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약속 – 사진이 사라진 세계에서 사진을 되찾는다는 것

 

안옥현,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따라서 나는 사진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 때문에 드러난 이런 무질서와 딜레마가 내가 항상 시달렸던 다음과 같은 일종의 불편함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즉 나는 표현적 언어와 비판적 언어라는 두 언어 사이에서 흔들리는 주체라는 것이다. … 결국 나는 그 어떤 담론에도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자신 안에 있는 확실한 유일한 것(설령 이것이 순진하다 할지라도 말이다)을 나타냈다. 그것은 모든 환원적 체계에 대한 결사적 저항이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응권 옮김, 동문선, 20-21쪽.

1.

이제 사진은 기록이라는 생각보다 사교성 혹은 사회성을 이루려는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처럼 보인다. 창틈으로 고개를 내민 고양이 사진이거나 종려나무 앞에서의 ‘셀피’ 사진이나 석양 아래에서 노랗고 붉은 빛으로 반사되는 교각 사진이나 모두 겨냥하는 바는, 이른바 소셜 미디어에서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을 향해 건네는 가벼운 인사말이다. 난 사진을 통해 말을 건네고 친구들은 나에게 응답을 한다. ‘좋아요’와 ♡, 그리고 ‘댓글’은 사진을 ‘읽거나’ ‘보는’ 일을 교감하기 혹은 소통하기로 대신한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사진은 ‘말-이미지(speak-image)’가 되어버렸다고 꼬집는다. 어떤 이는 사진은 이제 이미지가 되었다거나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으로 대체되었다거나 하는 등 사진이 겪고 있는 변모를 분주히 정의하려 한다.

그런 비평가들의 발언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진은 커뮤니케이션이 되었다. 오늘날 가장 많은 사진이 진열되고 소비되는 것은 인터넷이고 그 가운데도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 혹은 ‘소셜 미디어’이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사진은 또 그만큼 ‘소셜’하다. 근년 사진 이론가들이나 비평가들은 이러한 사진들을 ‘소셜 포토(social photo)’나 ‘공동체 사진(communal photography)’ 등 나름대로 지칭하며 그것이 오늘날 사진을 어떻게 바꾸어내고 있는지 묻고 답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셜’ 혹은 ‘사회적/사교적’ 커뮤니케이션 속에 놓인 사진은, 고독한 개인이 소설을 읽을 때처럼 앨범 속에 놓인 사진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은 관계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보고 읽는 이란 그 어떤 사회성으로부터 빠져 나온 개인적 주체임을 찬미했던 마지막 위대한 사진의 관람자일지 모른다. 사진이란 객체/대상을 대하는 인물은 결국 개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기에, 그는 “이렇게 하여 나 자신이 사진에 관한 ‘앎’의 척도가 되었다”고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앞의 책, 22쪽.

인화된 사진을 모으고 배열하는 일은 이제 ‘포스팅(posting)’이나 ‘공유하기(share)’로 대체되었다. 포스팅은 사진을 앨범에 부착하거나 액자에 넣어 벽이나 테이블에 두거나 혹은 책갈피 속에 끼워두거나 하는 일과는 전연 다른 행위이다. 나의 기억을 위해 보관해두고 ‘그 때 거기’를 ‘지금 여기’에서 되찾는 몸짓, 말하는 이에 따라 사라지거나 부재한 것 혹은 죽음과 대면하는 것으로 ‘사진을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새기던 과거의 비평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 되었을지 모른다. 데이터에서 이미지를 뽑아내는 것, 무작위하게 촬영(찍은 사진이라기보다는 데이터를 연산처리(computation)하는 것이지만)된 이미지를 이미지 스트림(stream) 속에 운반하는 일은 사진을 더욱 더 주관화한다. 사진은 자신의 현실을 품고 있는 객체 혹은 오브젝트(object)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의 흐름 속에서 나의 순간적인 감정이나 아니면 자신이 있음을 기별하는 제스처가 된다. 기적처럼 특별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인화지의 표면에 가두고 봉인한 것이 사진이라고 믿었던, 그리하여 사진을 객체라는 것으로 경험하던 때와 스트림 혹은 흐름으로 사진 아닌 사진에 반응하는 때 사이에 놓인 거리는 너무나 어질할 만큼 멀어 보인다.

2.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전시가 흥미롭고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이 전시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물론 (아직도 자신의 물리적 성질을 강변하는) 사진이다. 그것은 스트림 되는 이미지 파일이 되길 거부하고 자신이 오브젝트임을 주장한다. 그것은 미리 마련된 반응을 전달할 이모티콘을 마련해 놓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이모티콘 자체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사진과 달리 정착할 수 없는 ‘뉘앙스’의 차이를 찾고자 대담하게 기도(企圖)한다. 이모티콘은 감정을 외부화하고 도식화한다는 점에서 유독하고 뻔뻔하다. 그것은 나의 내면적인 감정을 이모티콘 몇 가지로 단출하게 요약하고 분류해 ‘좋아요’나 ‘화나요’, ‘슬퍼요’ 따위의 거푸집 속에 몰아넣는다. 오늘날 사진이 점차 종속되어 간다고 고발하는 감정 경제나 몰입 경제(immersive economy)는,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는 일을 소비로 둔갑시켜 왔다. 미국의 명민한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란 책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으뜸가는 특성을 ‘정서의 쇠퇴(waning of affect)’라고 지적한 바 있다.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1, pp. 10-16. 제임슨은 이 책에서 정서의 쇠퇴를 대신하여 강렬도(intensity)(들뢰즈에게서 참조한 용어)가 들어서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최근에는 과거의 정서의 자리에는 감정을 그리고 강렬도의 자리엔 정서를 넣고 감정에서 정서로의 전환이 이뤄져 왔다고 표현을 고친다.
말인즉슨 내면과 바깥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 뒤 더 이상 우리는 내면을 ‘표현’한 것으로서의 이미지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서는 외부에 이미 제조된 채 제공되고 그것에 내가 접속함에 따라 전달되고 증폭되고 중단되는 것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가 예상하고 있듯이 정서의 몰락은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감정적 반응을 유도하는 이미지와 사운드, 공간에 에워싸이는 일이 된다. 정동은 쇠퇴하지만 판매용 감정은 폭증하고 그렇게 규격화된 감정들은 알고리즘을 통해 보다 정밀하게 디자인되고 쏟아져 나온다. 내가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감정은 내게 들이닥치곤 한다.

그러나 안옥현은 이런 현실에 눈감거나 또 이에 거스른다. 그의 사진과 영상은 힘겹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사진의 (소멸한) 역능을 증언하고자 애쓴다. <이 뉘앙스에서 저 뉘앙스 사이를 찾아 해멘다> 연작에서 우리가 유의하게 되는 것이 사진의 능력을 찾고자 진력하는 작가의 노고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진 연작의 제목은 사진에 찍힌 대상보다 애타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의 능력을 증언하고자 하는 사진가란 주체를 더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작가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 사이에 찾아 헤맨다. 그렇기에 전시 속의 사진들은 한 때 사진에서 구했고 또 그만큼 보상되었던 주관적인 표현으로서의 사진을 오늘에도 생존시키고자 노력한다. 심지어 그것이 인물이 아니라 사물일지라도 그 사물들은 감정을 지닌 것으로서 기꺼이 주체화된다. 따라서 부서진 과거의 단편에서 유토피아적인 잠재성을 발견하고자 애썼던 발터 벤야민처럼 그는 부서진 사진 속에서 감정의 잔해를 찾고자 한다. 이는 사진이 가진 고유한 효능을 객관적 기록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진실을 포착하는 것에서 찾는 끈질긴 사진의 모더니즘적인 관점을 엄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뉘앙스와 저 뉘앙스 사이를 찾아 헤맨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뉘앙스’라는 어쩌면 진부하게도 들리기까지 하는 낱말이 강하게 등을 돌리고 있는 낱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은 태그(tag) 혹은 태깅(tagging)일 것이다. 태그는 스트리밍 되는 이미지들을 분류하고 그것들을 몇 개의 낱말 속에 소집하고 정렬한다. 태그는 그런 점에서 사진 텍스트의 일부로 통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때 사진으로부터 뉘앙스는 완전히 박탈된다. 그런 점에서 뉘앙스란 각각의 사진이 지닌 특별한 개별적인 진실을 보전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태그에 반하는 것으로서 사진의 ‘제목’이 차지하던 자리를 탈취한다. “이 뉘앙스에서 저 뉘앙스 사이를 찾아 헤맨다”는 ‘제목’은 태그가 저지르는 행위에 저항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태그와 통합된 이미지가 제목을 단 사진과 불화하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사진들이 전달하는 주관적 표현의 가능성은 ‘사랑’이라는 공약불가능한 절대적으로 개별적 행위에 닻을 내린다. 우리는 특정한 사회적 배경과 특성을 지닌 즉 특정한 프로필을 소지한 인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그녀를 사랑한다. 내가 그/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를 어느 누구도 나눠가질 수 없다. 그/그녀가 갖지 않은 것을 그/그녀에게 내가 투사하는 것이든 아니면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그/그녀에게 주기위해 스스로 알고 있던 자신과 다른 자신이 되길 각오하는 것이든, 사랑은 사랑하는 두 주체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겐 알려질 수 없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을 증언하는 일을 사진 역시 떠맡은 적이 있었다.(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과거 시제로 적는다) 그 때 사진의 진실은 감정의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정의 진실은 역사적으로 변모한 사진(디지털 사진이든 포스트-사진이든 무엇이든)이 상실하고만 사진의 유산일 것이다. 그러한 사진의 유산을 떠나보내지 않고 쓰다듬는 사진을 보는 것은 뭉클하다. 사진의 독립적인 현존을 애써 떠맡으려는 작가에게 손을 뻗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안옥현 작가의 개인전,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를 위해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