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자본주의! 절대 물신주의!: 물신주의를 역사화하기

Hama – Terroir

“사물의 현상 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쓸데없게 될 것이다.”

“감각을 통해 우리가 접하게 되는 사실은 이미 이중으로 사회적 특성을 지니는 셈이다. 즉 지각되는 대상이 지니는 사회적 성격으로 인해서, 그리고 지각하는 기관(器官)의 역사적 성격을 통해 그러하다. … 개인이 스스로를 종속적이고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데 반해, 같은 개인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사회는 무의식적이고 그래서 비본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활동적인 주체인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존재에 있어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점은 이제까지 사회생활의 역사적인 형식을 특징지어 온 우월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 시민사회의 경제양식 속에서는 사회의 능동성은 맹목적이고 구체적이며, 개인의 능동성은 추상적이고 의식적이다.”

  1. 절대 자본주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날씨보다 인간의 의지대로 조작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길들이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은 장마철을 지날 때이다. 다가오는 태풍의 피해를 걱정하며 그에 대한 대비를 다그치는 기상예보관의 목소리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맹목적 힘을 알린다. 그런 점에서 끈질긴 외적인 힘으로서의 자연을 표상하는 것 가운데 날씨보다 더 강력한 것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이나 기상학자들 나아가 철학자나 사회이론가, 비평가들은 자연 가운데 가장 인간에 의해 크게 변형되고 조작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날씨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후 변화의 정치는 기후가 인간에게 외적으로 자율적인 대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변형된 것으로 표상된다. 기후 변화는 이제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두가 강박적이리만치 유의하는 주제가 되어왔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을 둘러싼 지난 수십 년간의 근심어린 토론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를 출범케 했고, 이를 통해 대기 중에 탄소를 비롯한 기온 상승을 유발하는 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한 다양한 권고와 대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를 제안했던 크뤼천(Paul Crutzen)이 그러한 것처럼, 지구공학자들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자연 조건의 변화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해결책으로 돈벌이에 나선다. 인류세는 재앙이지만 또한 새로운 사업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연을 재수탈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를 위해 자연은 그 어느 때보다 물신화된다. 그것은 인간화된 자연을 역설하는 인류세 주창자들의 견해와 달리 보다 추상화되고 또 그만큼 더 객체화/대상화된 자연이다.

자연의 금융화(financialization), 금융사업화(banking) 화폐화(monetizing), 또는 혹자에 따라서는 자연의 신자유주의화라고 부르기도 하는 추이는 오늘날 자연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생산’되는지를 증언한다. 그렇게 ‘가공(架空) 자연’을 생산하여 만들어진 가공 상품의 정수라고 할 금융상품 가운데 하나가 날씨파생상품(weather derivative)일 것이다. 이는 기상학이라는 근대 과학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이변일 뿐만 아니라 금융상품이라는 면에서도 흥미로운 것이다. 도쿄의 날씨를 프랑크푸르트나 아부다비에서 사고파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첫눈에 너무나 터무니없어 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씨파생상품이란 것이 만들어져 사고 팔린다. 그것은 2007년 후반 미국을 급습한 금융위기의 주범이자, 오마하의 현인으로 칭송받는 세계적 투자자인 워렌 버핏이 금융 대량살상무기라고 불렀던, 파생상품의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일지 모른다. 파생상품거래를 주도했던 신용부도스왑이니 자산유동화증권이니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니 하는 것들에 견주하면 거의 존재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날씨파생상품은, 그래도 언젠가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거래될 날이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뒤지다보면 날씨파생상품이 국내에서도 거래될 기대한다는 글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탄소배출권 거래와 같은 자연에 기반한 허구적 금융 상품을 만들고 이를 거래하도록 하는 ‘녹색 금융’은 보다 많은 수익을 기대하는 기업과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있고, 정부 역시 적극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친화적인 사업을 하는 기업을 지원하거나 환경 영향에 따라 기업에 대한 대출 등에 대한 차별적인 권리를 부과하는 것도 녹색금융이겠지만 대개 녹색금융이라 하면 탄소배출권 거래와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습지보존권 거래 같은 의제적 상품을 사고파는 거래가 왕성한 북미나 유럽과 달리 우리에게 자연은 금융화의 폭력과 거리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큰 파생상품금융시장의 규모를 갖고 있다고 알려진 한국에서 다만 그러한 “쪼잔한” 금융상품에 눈독을 들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을 둘러싼 금융적 수탈이 저조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탈취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이라고 부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른 결과라고 여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탈취에 의한 축적은 착취(exploitation)에 의한 축적과는 구별되는 수탈(expropriation)에 따른 축적을 가리킨다. 착취는 노동이 만들어내는 잉여가치를 통해 자신의 축적을 확대하는 것이다. 반면 수탈은 과잉생산에 직면한 자본과 그 자본의 흡수되지 못한 잉여가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가공자본의 형태로 변형되고 이를 지렛대 삼아 이자, 지대 등의 형태로 노동자와 농민, 여성 그리고 신식민지 민중 등이 생존을 위해 소비되어야 할 가치를 빼앗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융화를 통해 ‘이자 낳는 낳는 자본’은 엄청난 이자 수익을 얻는다. 그것은 대개 노동자의 개별 임금과 가계 소득을 수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얻게 될 임금 소득을 떼어낸 몫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라파비차스는 데이비드 하비의 말을 비틀어 이를 ‘수탈 혹은 소외를 통한 이윤(profit upon expropriation/alien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금융화를 통한 수탈 못지않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상부구조’라고 할 수 있다. 금융화의 과정이 의제 자본 혹은 가공 자본인 이자 낳는 자본이 생산과 유통, 분배의 과정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비단 경제 영역에 자신의 영향을 한정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른바 금융화의 문화라고 부를 만한 것에 관한 분석이 다수 제시되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선구적인 ‘금융자본과 문화’를 위시해 마르크스주의 문화연구 학자인 랜디 마틴(Radny Martin)의 일상생활의 금융화나 푸코주의적 통치성 분석에 기대거나 과학기술연구(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접근에서 비롯된 다양한 금융화 연구의 경향 등 역시 일상생활의 풍경이 어떻게 금융화를 통해 재편되는지 파헤쳐 왔다. 언제부터인가 개인들은 자신의 경제적 삶을 이해하고 경함하는 방식을 화폐적 계산에 의지하여 왔다. 이를테면 개인과 가족의 재생산은 모두 재무적인 흐름으로 파악된다. 자녀를 길러 대학까지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가에 대한 계산, 자신의 기대 수명이 몇 살일 때 노후 준비를 위해 얼마만큼의 자산이 필요한가에 대한 계산, 결혼을 하고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어떤 자산 관리가 필요한가에 대한 계산 등 수많은 계산의 수식(數式)이 동원된다.

이처럼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예측하는데 화폐적 계산 혹은 재무적인 표상이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금융적 상상(financial imaginary)’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금융적 상상이란 개인이 자신의 생애를 상상하고 인식하는데 화폐의 흐름이 서사적인 씨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때의 화폐란 더 이상 임금이 아니라 저축과 투자, 연금 가입, 보험 활용 등을 통해 자신의 자산을 조직하고 증대하며 효율화하는 수단이다. 한편 화폐 수입은 자신의 노동과 절약, 증여와 같은 사회적인 행위를 통해 출현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화폐 세계라는 자폐적인 세계 내부에서 화폐가 자기 운동을 통해 단성생식을 하듯이 팽창-수축하는 것처럼 등장한다. 이 때 화폐와 연루된 ‘인물(character)’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율적이고 고립된 개인은 화폐 소유자로서의 개인이 된다. 그리고 이 인물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표본적인 주체로 간주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더욱 공명하고 또 서로를 강화한다.

그러나 이 개인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역사적 시대보다 무력하고 또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개인으로서 우리는 강력하다. 보편적인 구매 능력의 화신, 즉 그것으로 어떤 대상과도 교환할 수 있는 화폐가 지닌 전능한 힘은, 화폐 소유자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품는 환상을 극대화시킨다. 더욱이 정보통신기술을 통해 전자적으로 연결된 화폐의 흐름은 이러한 화폐 소유자가 자신이 가진 화폐의 힘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나의 신용을 보증하는 신용카드에 의지해 세계 어떤 상점에서도 물건을 구입할 수 있고, 휴대전화의 앱을 통해 세계 어디에나 투자할 수 있다. 설령 그럴 능력이 못 되는 가난한 이라도 그러한 환상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반면 동시에 화폐 소유자는 그 어느 때보다 무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인 부, “부의 물질적 대표자”, “부의 일반적 개체”로서의 화폐가 군림하면 군림할수록 부는 더욱 추상화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루려는 물질적 욕망은 점차 부로부터 멀어지고 그것은 대신 삭막하고 수척한 치부에의 욕망으로 전환된다.

화폐가 상대하는 것은 오직 상품이란 형태로 전환된 것으로서의 생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상품으로서의 사물은 그것이 추상화된 것인 만큼이나 또한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한 생산물에 깃든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특성이 완벽히 제거되었을 때 상품은 점차 이미지가 되고 광고나 홍보, 그리고 매개된 가짜 경험을 통해 자신의 구체성을 보충한다는 것은 20세기 급진적 문화 이론의 가장 중요한 비평적 주제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사회’이든 아니면 그것을 미적 경험에 대한 비판으로 가다듬은 기 드보르의 ‘스텍터클’이든 아니면 나아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든, 그들 모두는 ‘사물(Thing)’, ‘실재(Real)’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추상화된(논자에 따라 코드화된, 상징화된 등으로 서술되는) ‘객체’를 규탄하였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화폐물신주의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무기력한 주체를 상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는 완벽히 추상화됨으로써 하이데거 식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그것의 사물성(thingness)을 완전히 상실한 혹은 자신의 세계성(worldness)을 비워낸 세계 아닌 세계와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추상적인 객체로 변형된 세계, 즉 온전한 의미에서 가상화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화폐 소유자는 세계를 잃은 무력한 주체일 것이다. 그는 화폐물신주의의 마법이 불러낸 환영 같은 세계에서 표류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물신주의이다. 자본주의의 총체성을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이자 주체화/객체화의 규범으로서의 상품-화폐-자본 물신주의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숱한 오해와 의심을 불러일으킨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화폐의 초월적 권력을 역설하는 상품-화폐 물신주의는 착취보다는 추상의 지배를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철학화하고 만다는 끈덕진 의심을 받아왔다.(이를테면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이 루카치 이래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인간학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비난하였을 때 그들은 계급투쟁을 주체와 객체의 분열/화해라는 우아하고 섬약한 철학적 서사로 각색한다고 의심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아니면 토대에 의한 혹은 물질적 실천에 따른 현실의 규정을 외면하고 화폐와 상품이라는 추상의 기능에 모든 역사적 시간을 환원시킴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을 초래했다고 비난받기도 하였다. 물론 물신주의를 자본주의의 역사적 적대(모순)의 분석과 결합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유물론을 화석화시키고 말 것임에 분명하다. 물신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생산 활동과 그 결과가 왜 가치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고 그것이 추상적 노동, 상품, 화폐, 자본, 금융과 같은 보다 ‘발전된’ 혹은 ‘전개된’ 형태를 통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초월적인 만큼이나 동시에 역사적이고 내재적인 것이다. 더 많은 돈을 낳는 돈으로서의 자본은 맹목적인 가치증식을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이는 그 과정에서 독특한 역사적 형태와 단계, 분포를 만들어 낸다. 원시적 축적이든 형식적 포섭/실질적 포섭이든, 노동과정의 역사적 변화이든(테일러주의-포드주의, 유연화-불안정 노동), 제국주의와 종속, 식민지와 신식민주의이든 이 모든 자본주의의 역사적 현실이 변천하면서 나타나는 숱한 형태들은, 물신주의와 분리시킬 수 없음에 분명하다.

얼마 전 존 벨라미 포스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등장을 뒷받침한 자유주의적 사고의 부침을 추적하고 케인즈주의의 몰락 이후 등장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절대자본주의(absolute capitalism)”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것은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전조를 분석한 푸코의 선구적 분석을 참조하면서 시장의 원리가 더 이상 경제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교육, 연금과 보험, 보건, 커뮤니케이션, 환경 등 모든 곳을 장악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이처럼 모든 것을 시장화하라는 정언명령은 또한 시장이라는 영역이 사회로부터 ‘탈배태되었음(disembedded)’을 역설한 칼 폴라니의 주장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 안에 파묻혀있던 시장이 자신을 자율화하는 것이 탈배태였다면, 이제 거꾸로 시장은 사회 속에 전무후무한 힘으로 재배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의 일반적인 의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주권적인 국가가 단일 시장 논리를 집행하는 자본의 어릿광대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능한 정치적인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포스터는 이미 많은 이들이 주장했듯이 네오파시즘의 등장을 예견한다. 자본이 휘두르는 착취와 수탈, 지배의 힘을 조정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국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소원한 것(alien entity)’이 되어버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반국가주의는 민족주의나 인종주의, 여성과 성소수자 혐오를 동원해 하층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일부를 매수하고 새로운 파시즘을 향해 나갈 길을 닦을 것이다.

절대 자본주의? 우리는 절대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란 한편으로는 절대물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정당한 혐의에 근거해 다음에서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물신주의가 어떻게 맹위를 떨치며 특수한 역사적 형태를 통해 실현하는지 밝혀 보고자 한다. 그리고 매우 간략하게 물신주의의 절대적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정반대로 인격주의와 물성(Thingness)을 강변하는 문화(나아가 철학적 사변) 등이 커다란 지지를 받는 역설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상품-화폐-자본물신주의라는 철학(비판)의 주제를 짧은 글에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러한 토론과 분석을 위해 필요한 전제들을 스스로 정돈해 보는 시도에 불과하다.

  1. 금융화된 자본주의와 물신주의

 

브로델의 유명한 역사의 가을을 본 따 아리기는 장기20세기를 지난 21세기 초반의 자본주의를 역시 가을에 접어든 시기로 규정한 바 있다. 그것은 금융적 팽창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하나의 역사적 주기를 완료하고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준비하는 황혼기임을 말해준다. 그것을 자본 축적의 논리 속에서 해명한다면 이럴 것이다. 과잉 생산/과잉 축적의 상태에서 더 이상 흡수될 수 없는 잉여는 자신이 취하는 가치형태인 화폐 자본이라는 모습으로 인해 ‘이자 낳는 자본(interest bearing capital)’으로 변신한다. 그것은 돈에서 더 많은 돈을 낳는 물신숭배의 완성된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는 화폐가 그 어느 때보다 초월적 권력으로서 군림하도록 만든다.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성장하는 만큼 화폐의 권력도 성장한다. 즉 교환관계가 생산들에 대하여 외적인, 이들로부터 독립적인 권력으로 정착된다. 즉, 교환관계가 생산자들에 대하여 외적인, 이들로부터 독립적인 권력으로 정착된다. 당초 생산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타났던 것이 생산자들에게 낯선 관계가 되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교환에 의존하는 데 비례하여 교환은 그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되고, 생산물로서의 생산과 교환 가치로서의 생산물 사이의 간극이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화폐가 이러한 대립과 모순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이러한 모순과 대립의 발전이 화폐의 초월적 권력을 초래하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복잡한 많은 쟁점들을 단숨에 요약한다. 자유주의적인 고전파 경제학은 물물교환처럼 개별 생산자 간에 교환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른 생산물을 교환할 수밖에 없는 시장 사회에서 화폐는 매우 쓸모있고 요긴한 교환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주류 경제학의 생각에 화폐는 경제의 외부에서 도입된 외적인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화폐는 경제 현상 자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를 보다 윤활하게 움직이도록 하고자 바깥에서 도입된 기술적 수단이거나, 베버주의 경제학자들이 역설하는 것처럼 국가에 의해 도입된 사회적인 약속일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화폐를 둘러싼 생각에서 (정치)경제학과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최근에 큰 관심을 받고 있는 ‘화폐적 가치론’의 입장을 굳이 편들지 않더라도 마르크스는 부의 분석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왜 가치라는 ‘형태’를 취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경제학과 구별된다.

그는 무한히 다른 인간의 활동 혹은 일이 왜 ‘노동’이란 형태를 취하는지, 생산물은 왜 선물(膳物)이나 만족을 주는 사물이 아니라 상품이란 형태를 취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교환가치라는 가치를 담지하는 것으로서만 다른 상품과 보편적인 관계를 맺는데 이를 수 있는지를 가치형태라는 것에 주목함으로써 폭로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상품이 먼저 있고 그를 교환하기 위해 화폐라는 이차적인 도구가 상품의 세계에 상품들 사이의 통역사로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들이 현존하기 위해 항상 이미 화폐가 전제되어야 함을 밝힌다. 따라서 훗날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을 경유하여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일종의 상징적 질서를 규제하는 유사-초월적 심급(화폐-아버지라는 쌍(雙)을 도입하는 장-조제프 구(J-J. Goux)의 주장이 대표적일 것이다)으로 이해하는 논의에서 그런 것처럼, 상품은 현존(presence)이고 화폐는 재현(re-presentation)이라거나 아니면 데리다 식의 접근에서처럼 화폐라는 재현에 의해 소급적으로 정립되는 기원 혹은 토대로서의 상품, 즉 대리보충(supplement)으로서 상품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할 것이다. 상품이 그를 생산하는 모든 사회적 활동을 노동으로 등가화하는 것처럼, 화폐는 모든 종류의 상품을 가치라는 형태를 통해 등가화한다.

그런 까닭에 화폐는 상품이 등장하자마자 역시 함께 등장해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둘은 동시 발생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가 화폐란 ‘초월적 권력’이라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화폐 없는 상품은 불가능하고 상품 없는 화폐 역시 불가능하다. 전자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가치증식, 즉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한 돈의 자기운동이라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차별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를 부정한 대가는 역사적 현실이 되어 앙갚음한다. 아리기가 말했던 자본주의의 역사적 주기의 한 단계인 ‘금융적 팽창기’는 상품 없는 화폐라는 광란적 믿음으로 인해 위기(금융공황)이 초래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후자를 부정할 때 이는 자본주의를 추상이 지배하는 세계로 환원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만다. 그리고 이를테면 얼마전 우리가 목격했던 2008년의 금융위기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보드리야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생산이나 노동 같은 따분하고 고역스러운 물질적 활동이나 실천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기호(sign)’의 논리에 의해 지배받는 세계처럼 보이게 된다. 자본주의가 추상 혹은 상징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취를 통한 지배를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전자만을 강조한다. 사회적 노동 혹은 추상적 노동이란 생존을 위해 단순히 고역스러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노예주를 위한 일이든 봉건 영주를 위한 일이든 계급적 지배하에 있는 세계에서 노동은 고역스럽고 비참하며 소외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은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에서의 노동과 다르다. 그것은 추상적, 사회적 노동으로서 그 자신 상품(노동력상품)으로서 상품을 생산하는 특별한 역사적 ‘형태’를 취한 노동이다. 노동자는 가치라는 추상의 지배를 받지만 또한 바로 그 때문에 그로부터 비롯되는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의 지배를 받는다. 형식적/실질적 포섭이나 경쟁과 독점 등이 바로 이러한 가치생산으로서의 노동 때문에 비롯된 노동의 변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따라서 추상적 노동이기에 그것이 역사적으로 부과하는 노동조건(이를테면 테일러주의나 오늘날 일반화된 유연생산을 생각해보라)을 견디며 특수하게 체화된 규율과 지배에 시달린다. 더불어 노동자는 이전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실업이라는 저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요약하자면 추상화가 증대되면 증대될수록 그와 짝을 이룬 물질적 현실 역시 배가된다. 다만 이 때 마르크스가 말하는 추상이 ‘사고-내-추상(abstraction-in-thought)’ 혹은 ‘관념적 추상(mental abstraction)’이 아니라 ‘현실 추상(real abstraction)’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에겐 미안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생산중심주의적 세계에서 벗어나 차이의 논리가 가치를 만들어내는 세계에 살고 잇는 것은 아니다. 보드리야르 식의 주장은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라 채무자일 뿐이라는 주장에 매혹당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처럼 보인다. 자신의 주변에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점차 지워지고 신용을 통해 소비재를 구매하고 대출을 통해 대학을 다니고 집을 장만하며 보험을 통해 노후를 준비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채워지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백번 맞는 말이라 해도 그것이 노동의 소멸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노동은 구체적인 개인의 ‘활동(work)’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화폐라는 초월적 권력에 의해 규정되는 활동, 즉 ‘노동(labor)’이다.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개별적인 노동으로서의 구체적인 노동과 가치를 생산하는 사회적 노동으로서의 추상적 노동 사이의 모순은 마르크스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한 ‘위대한 발견’이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그러한 자화자찬은 오늘날 더 이상 무색하지 않다. 저 어딘가에서 추상적인 노동이 폭발적으로 증대할 때 여기에서의 구체적인 노동의 소멸은 노동 자체의 소멸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에서 상당한 공을 들여 상품(화폐) 물신주의를 분석한 바 있었다. 이때 마르크스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형태’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인간의 노동생산물이 하필이면 왜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는지, 나아가 구체적으로 유용한 대상인 상품(사용가치)이 동시에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대상으로서 가치라는 대립적 ‘형태’를 띠게 되는지(가치-대상성), 나아가 그 결과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왜 상품들 사이의 물신적 연관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지 폭로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가치형태의 완성되고 보편적인 형태로서 화폐라는 보편적 등가 형태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결국 화폐가 더 많은 화폐가치를 낳는 것으로서 자본에 관한 최초의 단순한 규정인 M-M’, 즉 더 많은 화폐를 낳는 화폐라는 규정을 낳게 되는지 제시한다. 그러나 상품, 화폐라는 추상적인 규정 속에 스며있는 물신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다양한 사회적 실천과 매개된 연후 나타나는 자본물신주의를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그리고 일상적 의식 속에서 상품, 화폐 물신주의는 자본물신주의라는 형태를 통해 지각되고 경험된다. 그런 점에서 상품(화폐)물신주의에 대한 이해는 자본물신주의에 대한 이해를 통해 보완되고 또 재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무한히 다양한 물질적 생산행위가 추상적 노동으로 규정되며, 인간의 노동생산물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형태인 상품, 화폐라는 가치형태를 취하게 됨으로써만 작동한다. 그러나 그것이 직접적으로 현상하는 것, 즉 우리의 자생적인 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방식은 바로 수입(이윤, 지대, 임금 등)의 원천에 대한 사고를 통해서이다. 금융화를 가능케 한 그 객관적인 환상은 바로 이 자본물신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소득과 부채, 임금과 빚은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동일한 물신주의에서 비롯된 환상을 이루는 구성부분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이윤(기업가수익+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 이것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모든 비밀을 포괄하는 삼위일체적 형태”를 말하며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사회적 생산과정 일반의 역사적으로 규정된 형태이다. 이 사회적 생산과정은, 인간생활의 물질적 존재조건의 생산과정이면서, 또한 특수한 역사적․경제적 생산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하나의 과정[다시 말해서 이 생산관계 그 자체와 이 과정의 담지자, 그리고 이들 담지자들의 물적 존재조건과 그들 담지자 상호 간의 관계(요컨대 이들 담지자의 일정한 경제적 사회적 형태) 등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이 생산의 담지자들이 자연에 대해서나 그들 상호 간에 맺는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이 생산을 수행하는 관계, 바로 이런 관계 전체야말로 경제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본 사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그것에 선행하는 모든 생산과정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물질적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들 조건은 또한 동시에 개인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맺는 일정한 사회적 관계의 담지자이기도 하다. 이들 관계와 마찬가지로 그들 조건도,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전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과물이자 소산이다. 그것들은 이 생산과정에 의해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자본, 토지, 노동! 그런데 자본은 물적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사회구성체에 속하는 특정의 사회적 생산관계이며, 이 생산관계는 어떤 물적 존재를 통해서 표현되고 이 물적 존재에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적 성격을 부여한다. 자본은 생산된 물적 생산수단의 합계가 아니다. 자본이란, 자본으로 전화된 생산수단을 말하는 것으로서, 생산수단 그 자체가 자본이 아닌 것은, 금과 은 그 자체가 화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자본은 사회의 일정 부류에 의해 독점된 생산수단이고, 살아있는 노동력에 대해 독립적인 것으로서, 바로 이 노동력의 생산물이자 활동조건이며, 이것들이 이러한 대립을 통해서 자본으로 인격화된 것이다. …… 그러므로 이것(-자본)은 역사적으로 창출된 하나의 사회적 생산과정의 요인들 가운데 한 가지가 갖고 있는 일정한(언뜻 보면 매우 신비스러운) 사회적 형태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려는 바는 명쾌하다. 자본을 물적 존재, 즉 생산요소(생산수단이나 원료, 혹은 그에 해당하는 투입된 금액으로서의 화폐)로 바라보는 순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더 이상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물질적 생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라는 영원한 자연필연성의 세계가 왜 하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바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은 오직 가치증식을 위하여 자본이라는 가상적, 물신적 형태로 자신을 나타낸다. 이 때 자본이 자신이 투입한 자본을 통해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고, 토지를 제공한 자본가는 그의 대가로 지대를 얻는다는 환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바로 수입, 분배, 소득의 원천이 노동이라는 독특한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을 비롯한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항시 지지받아왔던 그 물신주의이다. 마르크스가 비아냥거리며 말하듯이 “노란색의 대수(對數)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표현”이 바로 ‘노동의 가격’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에게 임금이란 그의 노동의 대가라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한 표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의 직관적으로 노동자가 자신의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 노동자가 자신의 일한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 오직 가치를 만드는 것은 노동임에도 노동은 빈곤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그것을 물신주의로서 격렬하게 비난한다.

자본 1권에서 마르크스가 밝히듯이 노동력과 노동은 다른 것이다. 자본주의는 노동력의 가치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불하고 노동력 상품의 가치와 모순되는 그의 사용가치, 즉 자신의 가치 이상으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상품의 ‘사용가치’를 착취한다. 노동력(상품)은 노동과 다른 것이다. 그런 탓에 “임금(또는 노동의 가격)이라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또는 가격]의 불합리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임금을 노동에 대한 대가로 바라보는 생각에 지극히 익숙하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사회형태를 분별하지 못한 채 부와 그것의 분배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영원한 현실로서 생각하게 된다. 이 때 자본주의는 자연적 삶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잉여가치란 노동자의 몫에서 빼앗아간 부분으로 정의될 뿐이다. 이런 생각을 따를 때 가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노예제이든 봉건제이든 모두 동일하게 수탈자가 피수탈자에게서 탈취한 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둔갑해 버린다. 그 결과 자본주의적 착취는 초역사적인 도덕의 문제가 되어 버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비판은 윤리적 비판으로 치환되고 말아버린다. 이는 노동자운동의 역사는 물론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끈질기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혹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 역시 자신이 살아있을 즈음 이러한 ‘윤리적 사회주의’, 혹은 ‘진정 사회주의’란 이름의 사회주의에 대하여 끊임없이 비판한 바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부와 분배의 사회주의의 영향력은 21세기의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에서 나타나는 분배와 소득의 조합주의적 환상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수입의 원천’은 어떤 연유로 물신주의의 가장 완성된, 현실적(actual)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여 보자.

 

“우리는 이미 앞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상품생산의 가장 단순한 범주들[즉 상품과 화폐]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적 관계[즉 부의 소재적 요소들이 생산담당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적 관계]를 이들 물적 존재 그 자체의 속성으로 전화시키고(상품), 또 더욱 분명하게는 생산관계 그 자체를 하나의 물적 존재로 전화시켜버리는(화폐) 바로 그 신비화하는 성격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 모든 사회형태는, 그것이 상품생산과 화폐유통을 가져오는 것인 한, 이런 전도에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그리고 그것의 지배적 범주이자 규정적 생산관계인 자본 아래서는 이 마법에 걸린 전도된 세계가 더한층 발전한다.”(강조는 인용자)

 

“더욱이 자본은 연간 노동가치[따라서 노동생산물] 가운데 일부분을 이윤이라는 형태로 고정시키고, 토지소유는 다른 일부분을 지대라는 형태로 고정시키고, 임노동은 셋째 일부분을 임금이라는 형태로 고정시키고, 바로 이런 전화를 통해서 그것들을 자본가, 토지소유주, 노동자의 수입으로의 변환-그러나 이들 각각의 범주로 전환되는 실체(Substanz) 그 자체를 창출하지는 않으면서-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분배는 오히려 이 실체를 현존하는(Vorhanden) 것으로 전제한다. …… 자본, 토지소유, 노동은 생산담당자에게 세 개의 서로 다른 독립된 원천으로 나타나고, 바로 이들 독립된 원천으로부터 매년 생산되는 가치[따라서 이 가치가 그 속에 존재하는 생산물]의 서로 다른 세 개의 성분이 발생하며 이들 원천으로부터 이 가치의 여러 형태[즉 사회적 생산과정의 각 요소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수입]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이 가치 그 자체[즉 이들 수입형태의 실체]도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용한 두 개의 문단은 상품(화폐)물신주의와 자본물신주의(혹은 이 글에서의 분석을 위하여 변경하자면 소득물신주의, 신용물신주의)가 동일한 것임을 밝혀준다. 이 두 가지가 공통적인 이유는 “가치 대상성(value objectivity)”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치는 사회적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물, 어떤 대상 자체의 속성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시기에 접어들면 더욱 왕성한 형태로 되돌아온다. 노동자의 빈곤이 점차 완화되고 개선된 듯이 보이는 역사적 시대가 저물고 실업과 빈곤이 확대되는 것이 누구의 눈에나 뚜렷해지는 시기에 접어들면 물신주의는 더욱 극성스럽게 그리고 보다 화려한 형태로 자신을 확장하며 나타나게 된다. 그렇지만 앞서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물신주의는, “착시 또는 미신처럼 – 하나의 주관적 현상, 현실에 대한 잘못된 지각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특정한 사회적 형태 또는 구조)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방식을 구성한다. 이러한 적극적인 나타남(착각(Schein))인 동시에 현상(Erscheinung)은 그것 없이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사회생활이 전연 불가능한 매개 또는 필연적 기능을 구성한다. 외양을 제거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은 이를 끊임없이 부인한다. 우리에게 있어 그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기만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유일한 실재,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의 실체는 노동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동은 환상의 적수이고 해독제이며 유혹의 사이렌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주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우리의 체험과 의식의 돛대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노동은 “단지 하나의 유령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추상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 그것만으로 보면 결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을 통해 온전히 삶을 살아가고, 충분한 임금소득을 통해 보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를테면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 성장’이 자본 없는 자본주의를 꿈꾸는 것처럼)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둘러싼 환상을 더욱 굳히는 데 기여할 뿐이다.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부의 사회적 요소들 간의 독립화와 화석화, 물적 존재의 인격화와 생산관계의 물화, 일상생활의 종교”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의 대가가 임금이라는 것이 자본물신주의의 편린이라면, 이러한 물신주의는 금융화와 더불어 더욱 강화되고 화려한 재주를 넘게 된다. 신용물신주의가 바로 이것이다. 말하자면 부채가 소득의 대립물이기는커녕 소득의 또 다른 원천으로 변신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노동자가 임금을 받을 때 그는 현물이 아니라 화폐를 지급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화폐는 신용이라는 경제적 실천을 통해 소득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노동자는 주식을 비롯한 금융 상품에 대한 투자를 통해, 부동산을 구입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늘려갈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든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전례 없는 자기착취(자신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업가로서의 노동자란 환상을 통해 열정적으로 노동하는 것처럼)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내부에서의 상호착취를 강화하는 것(부동산 시세 차익을 통해 부를 얻는 것은 결국 다른 노동자의 부를 이전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도 이 때문일 것이다.

 

“화폐는 그 자체 이미 잠재적으로 스스로를 증식하는 가치이며, 그것이 그런 가치로서 대부되는 것이 곧 이 고유한 상품의 판매형태이다. 배나무가 배를 열매 맺는 것이 그의 속성이듯 화폐가 가치를 창출하고, 이자를 낳는 것도 바로 화폐의 속성이 된다. 그리고 화폐대부자는 자신의 화폐를 바로 그런 이자 낳는 물적 존재로서 판매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즉 이미 본 바와 같이 실제로 기능하는 자본까지도 그것이 기능하는 자본으로서가 아니라 자본 그 자체[즉 화폐자본]로서의 이자를 낳는 것처럼 스스로 나타난다.”(강조는 인용자)

“G-G′에서 우리는 자본의 무개념적 형태, 그리고 생산관계가 극도로 전도된 형태와 물화된 형태를 보는데 그것은 곧 이자 낳는 형태로서, 자신의 고유한 재생산과정을 전제로 하는 자본의 단순한 형태이며, 또한 재생산과정과 무관하게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킬 수 있는 화폐[혹은 상품]의 능력이다. 그것은 극히 휘황한 형태로 신비화된 자본의 형태이다.”(강조는 인용자)

마르크스는 이자 낳는 자본의 형태에서 출연하는 화폐의 마법에 대하여 폭로한다. “배나무가 배를 열매 맺는 것이 그의 속성이듯 화폐가 가치를 창출하고, 이자를 낳는 것도 바로 화폐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화폐의 환상은 이제 더 이상 대부자본가의 환상에 그치지 않는다. 노동자의 임금 소득은 바로 화폐라는 형태로 인해, 이자 낳는 자본의 환상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예컨대 부동산담보대출은 주거수단을 마련하기 위한 즉 사용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유일하게 자신의 생존을 지켜줄 수 있는 자산이 된다. 그것은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얼마든지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지속적인 부동산 가격의 상승은 그것이 화폐를 낳을 수 있는 화폐로서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고부동하게 믿도록 한다. 화폐물신주의의 환상은 ‘부동산불패’라는 미신과 함께 즐겁게 춤을 추는 것이다. 한편 이 환상은 이자 낳는 자본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동자에게로 전염된다. 노동자 역시 임금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소득을 획득하는 한, 그것의 화폐 형태로 인해 그 환상에 얼마든지 전염될 수 있다. 어느 투자상품 광고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듯이 스스로 일하지 말고 ‘돈이 스스로 일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자 낳는 자본에서는 자본물신성의 개념(표상)이 완성되어 있다”는 마르크스의 지적은 이제 임금 소득을 통해 부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노동자에게 확장된다.

  1. 주인의 귀환: 물신주의의 간지

“미발전된 교환, 교환가치, 화폐의 미발전된 체제를 낳거나 발전도가 낮은 이 체제들에 조응하는 사회적 관계들을 고찰하면, 개인들은 비록 그들의 관계가 보다 인격적으로 현상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규정에 구속된 개인들로서만, 즉 봉건 영주와 가신(家臣), 지주와 농노 등으로, 또는 카스트 구성원으로, 또는 신분 구성원 등으로만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하다. 화폐 관계, 발전된 교환 체제에서는 (그리고 이 겉모습이 민주주의를 오도(誤導)한다) 사실 혈통 차이, 교육 차이 등 인격적 예속의 끈이 끊어지고 찢어졌다(인격적인 유대들은 모두 적어도 인간적인 관계들로 현상한다). 그리고 개인들은 독립적이고 (이 독립성은 단순히 하나의 환상일 뿐이고,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 무차별성이란 의미의 – 무관심이라 불릴 수 있다) 자유롭게 서로 접촉하며 이 자유 속에서 교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개인들은 그들이 접촉하게 되는 조건들, 실존 조건들(그리고 이것들은 다시 개인들로부터 독립적이며, 비록 사회에 의해 산출되지만, 말하자면 자연조건들로, 즉 개인들에 의해서는 통제될 수 없는 조건들로 나타난다)을 사상(捨象)하는 자에게만 그렇게 보인다.”(강조는 인용자)

인용한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마치 오늘날 부상하는 ‘새로운 유물론’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미리 예비한 듯한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한다. 인용한 부분은 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격-물신주의와 자본주의에서 상품(화폐) 물신주의의 역사적 차이를 꼬집는다. 이를테면 우리가 왕과 귀족을 섬기는 것은 단지 우리가 상호주관적인 인정을 통해 그/그녀에게 상징적인 역할을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기 내부 어딘가에 왕과 귀족으로 만들어주는 무엇이 있어 왕과 귀족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 역시 그렇게 생각할 때, 그 때 사회적 관계는 인격을 통해 물화되어 있다. 이것이 인격 물신주의일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모습은 달라진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서술처럼 사람들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뒤집어져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마르크스의 서술은 충분히 모든 것을 말한 것일까. 알다시피 오늘날 새로운 유물론, 객체지향철학, 생기론적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철학적 사조는 물신주의(혹은 그들이 자주 들먹이는 표현을 빌자면 신비화(mystification)) 대 비판(critique)이라는 대립 항을 거부하며 물신주의 담론이 온전한 유물론으로 나아가는 데 강력한 장애물을 만들었다고 간주하여 왔다. 새로운 유물론을 이끄는 이들이 자신들이 철학적 무대에 출장하기 위한 신호탄처럼 받아들였던 퀭텡 메이야수의 ‘상관주의(correlationism)’ 비판은, 물자체와 객체를 구분하면서 객체에게만 물질적 실재로서의 지위를 부여한 것에 대해 격렬히 비판한 바 있다. 새로운 유물론의 잡다한 판본들이 객체(object), 사물(thingness), 실재(the real), 물(物, Thing) 등을 뒤섞으며 각자 입맛에 따라 그 가운데 하나를 특권화하거나 모두에게 물질적 실재로서 가치를 부여하며 복잡한 순열을 만들어 낼 때 그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물신주의를 경계하거나 거부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이 주관적 의식에 의해 파악된 대상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관주의적 인식론의 결정체로 물신주의를 오해한다거나, 주체 역시 객체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객체들 사이에서의 예외(즉 주체)로 스스로를 정립하려 만들어 낸 철학적 발명품으로 물신주의를 왜곡한다거나 하는 주장들은 잠시 미뤄두도록 하자. 우리는 오히려 여기서 ‘물신주의의 간지(奸智)’라고 불러도 좋을 효과로서 신(新) 유물론을 읽어보고자 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물신주의가 더 극대화되면 될수록 역설적으로 그것이 인격주의와 ‘전도된 물화(reification)’를 강화되고 있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물화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치를 지닌 동등한 대상으로 전환하고 또 그런 대상으로 지각하고 경험, 의식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에 그 객체를 추상적 동일성으로부터 구제하여 물질적 구체성이 충일한 것으로 경험, 지각하는 것을 물화에 대한 비판으로 여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전에 없이 사물과 객체 사이에 놓인 거리(혹은 하이데거 식 어법을 빌자면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어, 그를 객체가 아닌 사물로 경험하여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한다. 신 유물론의 주장을 요약한다면 바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겉보기와는 반대로 이는 물화를 극복하는 몸짓이 아니라 극단적인 물신주의의의 결과일 뿐이다. 진열대에 놓인 상품은 신기하고 복잡한 역사와 흔적을 갖는 ‘사물’로서 나타나며 엄청난 매력을 뿜어낸다. 상품을 판매한다기보다는 미적 대상처럼 큐레이팅을 하고, 상품이 아무런 쓸모도 없지만 수집과 구입의 쾌감을 위한 굿즈(goods)처럼 다가올 때, 우리는 추상적인 객체가 아니라 풍부한 감각적 자질을 지닌 사물을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렇기 때문에 생기론적 철학자의 난해한 사변은 스스로 이야기를 건네고 정서적 매력을 뿜어내며 마치 인격적 주체를 뺨칠 만큼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상품들의 주장을 철학적으로 번역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누가 재배한 커피인가 그 커피 품종의 기원은 무엇이며 어떤 지역에서 경작되었나, 어떤 방식으로 커피가 추출되었나 하는 등등의 애틋하고 풍부한 서사를 우리는 소비한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에서 유럽 풍 카페의 경험을 구매하는 것이라는 마케터의 말은 어느 현상학 철학자의 말보다 더 진실일 것이다. 그렇기에 물질, 사물, 객체 등에 대한 맹렬한 관심은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 번성하는 모순의 불가피한 효과일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객체는 상품화되어 있다(상품화에 저항하는 마지노선처럼 여겨졌던 자연과 육체조차 가격이 붙은 (허구적) 상품으로 둔갑하고 있다). 특히나 정보통신혁명과 컨테이너 혁명으로 대표되는 물류 혁명 이후 우리는 더없이 신비한 상품의 세계 속으로 입장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떻게 만들어지고 운반되는지 경험하지 못하는 그 객체-상품들은 경험 불가능한 상품으로서의 자신의 공백을 조작된 경험으로 채운다. 굳이 ‘체험 경제’를 말하지 않더라도 이제 상품은 재생산을 위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점차 더 경험 그 자체를 겪는 일로 되어 간다. 그리하여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불길하게 단언했던 말, “개인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경험도 또 어떠한 경험 자료라는 것도, 보편이 미리 소화하여 제공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은,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에 더욱 적절한 규정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앞서 보았던 자본주의에서 인격 물신주의의 상품 물신주의로의 대체로 돌아가 보자. 상품물신주의가 더 극단화될수록 상품이 점점 더 사물로서 현상하는 것처럼,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나는 물신주의 역시 인격 물신주의 역시 증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대한 집요한 심리학적 관심이 부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계급 관계를 인격적 상호관계로 변환하는 것(저 유명한 갑과을, 혹은 가부장제나 자본주의적 재생산을 대신한 성폭력), 폭증하는 집단따돌림이나 묻지마 살인, 나아가 ‘스트롱맨’으로 대표되는 네오-파시즘적인 정치 현상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더없이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직접적인 종속 관계, 적나라한 폭력적 관계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탓에 어떤 이들은 신분사회나 새로운 중세사회로의 우리가 회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진단까지 내놓곤 한다.

그러나 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우리가 입장하게 된 세계가 만들어낸 모순의 한 극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모순의 다른 한 극(비인격적 추상의 지배)을 주체화하지 못하는 연유로 맹렬하게 집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변증법은 적나라한 인격적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펼쳐지는 지상(地上)의 가시적 세계와 “무차별적인 개인들의 상호적이고 전면적인 의존”이 전개되지만 마치 무의식처럼 철저히 의식에서 억압되고 마는 지하(地下)의 비가시적 세계 간의 분열로 전환된다. 인용한 글에서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처럼,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환상은 자신을 만들어내는 물질적 조건을 자연처럼 의식에서 배제하고 그 자연조건이 가리키는 주체성인 계급을 무의식 속으로 억압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이 계급을 비(非)-주체라고 역설한 것이 옳은 생각이었다고 지지할 수 있다. 오직 실존하는 인간은 개인일 뿐이며 자신을 계급으로서 경험하고 인식하는 일은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억압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증상’이라는 형태로, 억압을 통해 가둘 수만은 없는 그러나 절대 제거될 수는 없는 그 모순(여기에서는 개인과 계급의 모순)을 드러낸다.

‘객체로서의 주체(즉 계급)’는 우리의 시야에서 제거된다. 무매개적인 주관적 의지와 의도, 정념에 따라 살아가는 개인들 사이의 연옥같은 세계로서의 인격주의의 세계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환상은 그와 대립한 극의 효과일 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착취적 사회관계의 주체로서 자본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당연시한다. 그것은 늘 하던 일을 하는 것(business as usaul)이다. 그러나 그가 성희롱을 일삼거나 부하 직원을 인격적으로 모욕했거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마치 감전된 것처럼 흥분한다. 이 때 우리는 특별한 성격과 인품을 지는 인격적인 개인으로서의 ‘주인’과 상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계급 지배의 탈주체화(즉 무차별적인 동등한 개인들 사이의 네트워크로서의 사회관계의 물신화) 대 계급 지배의 (인격적) 주체화(우리가 겪는 비참과 박탈, 부정의는 주인이라는 인물의 악덕과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환상) 사이의 변증법은 스트롱맨(Strongmen)과 마초, 테러리스트, 사이코패스, 악질적인 주인, 맹목적인 권위 등에 대한 열광과 거부로 나타날 것이다.

오늘날 인격주의(그것의 철학적 버전은 정동론일 것이다)와 상품 없는 유물론이 부상하게 된 것은 물신주의라는 미망에서 우리가 점차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신주의가 전에 없이 강력하게 우리를 사로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따라서 금융화 이후의 자본주의가 절대 물신주의를 가동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극단적인 힘을 자의적인 서사, 환상, 경험 등이 투영된 사물과 인격을 생산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유한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을 식별할 수 있는 힘은 점차 야위어가고, 그것은 사람(person)과 사물(thing) 사이의 우연적인 마주침으로 치환된다. 자본주의적 추상화와 물화의 힘이 경험과 지각의 바닥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

_<문화과학> 99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