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읽기

Bon Iver – Naeem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출간되었을 때, 거의 문화 현상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만치 뜨거운 관심과 토론이 쏟아졌다. 문화비평 관련 책으로서는 드물게, 책이 미친 반향을 반영한 2차 서적이 출간될 정도였다(한국어판의 부록으로 추가된 조디 딘과의 대화는 <Reading Capitalist Realism>에 수록된 바 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이라는 서구 자본주의 중심지의 두 나라에서의 사정을 배경으로 작성된 글이라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겐 낯설고 무리한 주장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크게 의지하는 지젝 같은 철학자나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인 제임슨, 프랑스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바디우 같은 이론가들의 주장을 자주 참조하는 탓에 이들의 생각에 익숙치 않은 이들에겐 매우 어려운 책처럼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들을 한쪽으로 밀어둔다면 이 책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숨막히는 변화의 풍경들을 조감하며 그것이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자극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세대적 차이로 나타나는 1990년대 이후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그 이전 세대 간의 대립과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클 것이다. 여기에서는 마크 피셔의 생각을 동시대 자본주의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서 간주하고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 그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비판’을 새겨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불모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계일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11-12)이라고 전한다. 대안? 즉 새로운 세계가 있을 수 있으며 우리의 집단적인 정치적 조직화를 통해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은, 바디우의 말을 빈 피셔의 표현을 빌자면, “긍정적 상태나 희망은 위험한 환영일 뿐이라고 믿는 우울증자의 암울한 관점”으로 대체된다. 새로운 문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고한 선구적인 이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닌 주된 특징을 ‘패스티시와 복고주의’가 지배하게 된 것이라고 꼽은 바 있다. 여기에서 모더니즘이란 말자체가 가리키듯 새로운 것을 향한 충동은 제거되고 과거의 모든 역사적 스타일과 형식들이 동등한 것인양 취급되며 참조, 결합, 인용, 모방된다. 그리고 이제 기억이나 노스탤지어가 역사(적 반성)을 대신하게 된다. 아마 이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란 개념이 파악하고 포함하고 싶었던 주장의 윤곽일 것이다.
–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개념을 굳이 놔두고 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란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먼저 이 개념에 깃들어 있던 어떤 분위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때만해도 대안들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며 지금은 “만연한 고갈의 느낌,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불모의 느낌”이 지배한다.(21) 지금은 ‘대안은 없다’는 슬로건이 완성되었고 그것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간명한 슬로건’이 아닐 수 없다.(22) 두 번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대결을 문제삼았다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모더니즘을 통합시키는 과정은 종료된 듯 보이고 ‘얼어붙은 미학적 스타일’로서만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22) 세 번째 자본주의 이후가 있는가란 생각은 완벽히 소멸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적 상품화가 초래한 문화적 산물들을 전용하거나 만회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통합과 전복 사이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우리는 이제 사전구성(precorporation), 즉 “자본주의 문화가 욕망과 갈등, 희망 등을 선제적으로 구성하고 형성하는 사태”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서도 역시 반항과 논쟁의 시늉이 벌어지고 대안적, 독립적인 등의 표현이 난무하지만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무엇에 대한 반항과 대안이 아니라 반항과 대안이라는 레테르가 붙은 상품이 공급되는 것이다.(예컨대 커트 코베인과 너바나)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작동 방식

–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의식이나 생각이 아니다. 왜냐면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고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에 앞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무언가를 명시적으로 옹호하지 안흐며, 자본의 작동이 어떤 주관적인 믿음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선전 없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를 떠올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누군가가 그것을 옹호하지 않더라도 완벽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야 더 잘 굴러갈 수 있다.”(30-1) 지젝의 말을 빌자면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사물들의 실상을 은폐하는 환영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 수준에 있다. … 냉소주의적 거리두기는 단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지니고 있는 구조화하는 힘에 눈을 감아버리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리 아이러니한 거리를 유지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31)
– 주관적인 의식이 아니라 객관적인(대상적인) 의식에 가까운 것의 전형적인 사례는 화폐일 것이다. 우리는 화폐가 그저 한 장의 인쇄된 종이조각이거나 금속조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교환에 기꺼이 참여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으로부터 ‘기업적인 반자본주의’가 성행하게 된다. 그것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일종의 카니발적인 배경 잡음”을 형성하는데, 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된 대규모의 빈곤을 추방하자면서 기업들은 거대 이벤트를 벌인다. 그리고 많은 자본주의 비판을 시도하는 항의는 말 그대로 항의에 자족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숭고한 대의와 질서를 창립하는 힘을 가진 아버지 형상에 의지한다. 정작 현실은 아버지의 형상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했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는 과도하게 추상적인 비인격적인 구조”이며 “모종의 추상적인 기생체, 만족을 모르는 뱀파이어와 좀비-제조자다.”(34)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리얼리즘은 얼마나 리얼한가

–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에 눈을 뜨고 현실주의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길 요구한다. 여기에서 “현실주의적realistic이라고 간주되는 것, 사회적 장의 어떤 지점에서나 가능해 보이는 것은 당연히 일련의 정치적 규정에 의해 정의된다.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자연화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서공할 수 없고 사실이 아니라 가치로 생각되는 동안에는 결코 자연화될 수 없다.”(37) 예컨대 지난 수십년간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비지니스 존재론’을 확립해 왔다. 이는 거의 모든 사회 영역을 비즈니스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이 민영화, 사유화를 추동한 근본적인 근거였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그러나 자신이 리얼해지기 위해, 그러한 일관된 질서를 갖춘 대상처럼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리얼을 감춘다. 그를 분석하기 위해 마크 피셔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실재(the Real)과 현실(reality)의 차이를 끌어들이며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스스로 리얼리스트가 되기 위해 억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궁하려 한다. 특히 그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정신건강과 관료주의이다. 대학 강사로 재직하는 동안 그가 톡톡히 경험했던 분야이기도 하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어떻게 내밀하고 깊숙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우울, 양극성 장애, 주의력결핍과잉행동 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의 폭증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에서나 겪는 일이다. 무엇보다 청년 세대 안에서는 반성적 무기력이 전형적이다. 심지어 피셔의 말을 빌자면 “오늘날 영국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10대가 되는 것은 어떤 질병으로 재분류되는 것에 가깝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45) 많은 10대들은 우울증적 쾌락에 빠져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으로 이뤄져 있는 세계에서 그들은 살아간다. 그들은 “‘너무 자극받아 집중할 수 없는’ 문자 문화 이후의 ‘새로운 육체’”를 지고 있고 이는 학교라는 곳에서 요구되는 ‘훈육체계의 제한과 집중 논리’와 부조화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언제나 따분하다고 불평하는 데, 그것은 “문자메시지, 유튜브, 패스트푸드 등으로 이뤄진 소통의 감각-자극 매트릭스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것, 언제든 달콤한 만족감을 주는 부단한 흐름에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48-9)
– 한편 이들은 “시간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종합하지 못하며” 제임슨이 말한대로 “순수한 물질적 기표들에 대한 경험, 달리 말하면 순수하고 서로 무관한 일련의 현재들에 대한 경험으로 환원된다”(50). 지금의 학생들은 “무역사적이고 반기억적인 블립 문화(blip culture)”에서 태어난 세대이다. 그런데 이런 세대, 즉 후기자본주의적 소비자라는 문자 이후의 주체성과 훈육 체계의 요구(시험을 통과하기)를 매개해야 한다는 압력에 교사들은 마주한다. 즉 교사들은 “조력자-엔터테이너 역할과 훈육자-권위주의자 역할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셈이다.(52) 그러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주듯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시간성/역사성을 둘러싼 오늘의 마비 상태를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한다. ‘유연성’ ‘노마디즘’, 자발성‘과 같은 포스트포드주의적 통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경영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움을 향한 돌파가 아니라 복고일 뿐이다.
– 자본주의의 새로운 통제가 초래한 정신질환의 폭증은 자본 자체에겐 그리 나쁜 일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인과관계에서 비롯된 일을 개인의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하면서 자본이 이득을 챙길 구실을 마려해주면서 원자적 개인화를 강화시킨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도전하고자 하는 좌파들에게는 정신질환을 재정치화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시공간 경험

– 피셔는 제임슨이 말한 바의 오늘날의 시간 경험, 즉 ‘공간이나 심리 모두가 자유자재로 처리되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전적으로 대체가능한 현재’라 부른 것에 우리가 직면하게 되었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현재적인 것과 즉각적인 것만을 특권화하는 문화”(101)에 살고 있을 때 우리는 어느 학자의 말을 좇자면 현재주의(presentism)라고 부를 만한 시대에 갇혀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현재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시간 경험의 방식에 있어 과거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먼저 피셔는 <메멘토>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겪는 증상인 ‘선행성 건망증’(이전의 과거는 온전히 기억할 수 있지만 새로운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증상)에 빗대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능이 자본주의 리얼리즘 시대의 특징임을 강조한다.
–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특징은 공간에 대한 지각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저 위에 있는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으로서의 국가라는 것에 대한 거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중심 없음”을 근본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점을 감춘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중심 없음을 둘러싼 이미지를 콜센터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고객센터에 전화해 본 이라면 알고 있듯이 콜센터 뒤에는 어떤 권력의 중심이 없다. 그리고 끝없는 동어반복, 최종적인 책임자가 없다는 데 대한 체념적 분노. 이런 것들은 결국 “허공을 향해 가해지는 공격, 자신과 마찬가지로 체계의 희생자이지만 그에 대한 연대의 가능성은 없는 누군가를 향한 공격으로 표출된다”.(109)(한국에서 곧잘 논란이 되는 분노조절장애, 사이코패스, 묻지마 살인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결국 “무반응적이고 비인격적이고 중심이 없고 추상적이며 단편적인 체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자본의 인위적인 우둔함을 한껏 가까이에서 맞닥뜨린다.” 그리고 이는 프란츠 카프카가 자신의 소설 성에서 주인공이 처한 처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우리를 상기시켜 준다.
– 그렇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 책임화일 것이다. 건강, 고용, 교육을 비롯한 모든 개인의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들은 이제 개인의 책임이 되어왔다. 그것은 자신의 삶은 자신의 주인이라는 달콤한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것은 사회란 것은 부재한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책임화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권력의 중심에 누군가가 있어 이 모든 사태를 조장했다는 강박적인 믿음은 음모론의 특징이다. 그러나 음모를 주동하는 이들을 마침내 밝혀낼 수 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윤리적인 비판(개인의 탐욕과 부패, 부정 따위)이 계속되도록 윤활유를 제공할 뿐 바로 그 음모라는 것이 개인의 의지나 결정이 아니라 구조적 원인이라는 점을 은폐한다. 스타 경영자나 영웅적인 CEO(오늘날 거의 명사와 다를 바 없는 정치지도자처럼)를 둘러싼 신화들은 그들이 탈인격화된 인물들로서 이는 기업가나 기업들 자체가 “주체-가-아닌-궁극적인 원인, 즉 자본에 의해 제약되어 있는 것이자 자본의 표현”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잊도록 이끈다.(119)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주체-만들기

– 포스트-오이디푸스적 사회, 즉 부권적 권위의 위기 이후에 우리가 맞이한 세계의 풍경은 “욕망과 이해관계의 동등성을 주장하고 이 동등성에 의존”하며 “의무라는 부성적 개념이 즐기라는 모성적 명령에 포섭되어온 문화에서는 부모가 향락을 누릴 아이의 절대적 권리를 조금이라도 방해하면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데 있다.(121) 그러나 부성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없는 부성주의”(122)란 형태로 활약한다. 지젝이 말했듯이 스피노자주의와 후기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공명하는지 살피면, 이러한 실태를 보다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한 신의 명령이 타락과 법의 창설이라는 신화에 따라 읽을 것이 아니라 독이 든 사과여서 건강에 해로울 것이기에 먹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읽는다. 이는 지젝이 보기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자기반복적인 자기 쾌락에 빠진 전주체적인 상태로부터 우리를 떼어내어 법과 언어의 주체로서 우리를 자리 잡게 하는 조작을 가로막는다. 물론 그것은 아니오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실행하는 주체를 제거하기도 한다. 윤리적 금지와 성취를 건강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오늘날의 여러 현상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모두 ‘환원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건강 모델’의 모습을 띤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해관심을 대신하여 판단한다거나 요구한다거나 하는 일은 용인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이를 피셔는 ‘합의적 감성(consentimental) 체제’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두 유아론적 세계에 갇힌 나르시시즘적인 개인일 뿐이다.(125)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을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페이스북이나 마이스페이스같은 곳은 “네트워크 나르시시즘”을 낳고 반복적이고 기생적이며 순응적인 내용을 쏟아내는데 열중한다. 그리고 이는 “다양성을 가득한 상향식 문화가 아니라 점점 더 유아화된 문화를 낳았다.”(127)
– 그렇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돌파할 새로운 주체의 모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은밀한 결론이자 또한 도발의 지점이라고 할 만한 부분에서, 피셔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불모성의 문화”에 대항할 전략을 제안한다. 그것은 흥미롭게도 “마르크스주의 슈퍼-보모”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강력한 형태의 욕망은 정확히 낯선 것, 예상하지 못한 것, 기이한 것 등에 대한 갈망이다. 사람들에게 이미 그들을 만족시켜주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예술가와 미디어 전문가, 말하자면 모종의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만이 이런 욕망을 제공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슈퍼보모는 제한을 부여하는 자, 우리가 우리의 이해관계를 스스로 인식할 수 없을 때 우리를 위해 행위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이런 종류의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낯선 것과 그에 대한 우리의 욕망에 내기를 걸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128)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출발할 수 있을까. 그는 “신자유주의가 1968년 이후 노동계급의 욕망을 병합함으로써 승리했다면, 새로운 좌파의 실천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었으나 만족시킬 수는 없었던 욕망들에 기반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33) 이를테면 그는 보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안하기도 한다. “의학적 질환으로 간주되는 광범위한 정신 건강 문제를 유효한 적대로 전환해야 한다. 정서적 장애들은 불만이 내면에 갇혀 있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불만은 외부로 방향을 돌려 실제 원인인 자본을 겨냥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

_탈북여성인들의 민주주의 공부 모임인 <민주주의 칼리지>에서의 뜻하지 않은 강연 청탁을 받고 준비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요약본. 현재적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종의 마르크스주의+현상학적 비판인 이 책의 공과를 더듬어보는 일은 긴급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의 번역 출간을 독려한 이로서 그 일을 내내 미루고 있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그의 acid communism에 대한 비평을 겸한 글을 조만간 쓰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