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기원: 9X0X를 시대구분하기

Bill Callahan — So Long Marianne

1.

모르긴 몰라도 비평가라면 자신이 어떤 막다른 길에 봉착했다고 느낄 때 되풀이해서 찾아가는 텍스트가 두엇 남짓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렇게 이따금 의탁하는 텍스트가 있다. ‘변증법적 비평’이라는 비평적 실천의 모델로, 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 한 편을 가끔 방문한다. 글제는 간단히 “1960년대를 시대구분하기(Periodizing 60s)”이다. Fredric Jameson, Periodizing the 60s, Social Text, No. 9/10, 1984, pp. 178-209. 이 글은 후일 제임슨의 비평모음집에 재수록되었다. The ideologies of theory, London & New York: Verso, 2009.
여느 다른 글의 제목이 그렇듯이 그가 택한 글의 제목은 무뚝뚝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글은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 Fredric Jameson, Cognitive Mapping,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Cary Nelson & Lawrence Grossberg eds.,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0.
라는 그의 비평 방법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제임슨은 열광과 환멸이라는 성마른 감정적 반응에 휩싸였던, 그리고 그런 까닭에 더없이 불투명해 보이기만 하던 역사적 연대인 1960년대를 분석하고자 시도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 글은 이중적인 목적을 겨냥한다. 먼저 이제 반세기에 접어든 저 휘황한 ‘1960년대’를 둘러싼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평을 하자는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바로 그 시간대를 특수한 역사적 시대로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인지적 지도그리기의 방법론적 하위 종목 가운데 하나일 ‘시기구분(periodization)’이다.


시대구분? 시대구분이라는 방법은 이젠 아무도 더 이상 원치 않고 또 흥미를 잃고만 비평적 실천의 전략일 것이다. 시대구분은 비규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흐름을 잘라내고 정돈하여 필연성, 그것이 지나치다면 일반적인 법칙이나 규칙의 서사적 좌표 속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구분은 시간을 처리하고 조작하는 서사적인 행위 가운데 가장 의심스럽고 불명예한 일처럼 여겨진다. 근대성 비판이란 이름 아래 횡행한 신경질적인 주장들은 선형적 시간, 목적론적인 역사 인식, 초월적 기의(the signified), 토대주의(foundationalism) 등의 누명을 씌우며 종래의 역사주의를 청산하고자 진력하였다. 그리고 결과는 그들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이는 이론적인 승리를 통해 얻어낸 전과(戰果)는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을 둘러싼 의식과 반성은 외부의 간섭과 개입이 없이도 스스로 괴사(壞死)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대 미술이란 용어가 알려주듯이 말이다. 그것은 시간을 역사화하려는 충동과 시기구분의 기획을 무효화한다.
그런 점에서 제임슨의 1960년대를 시대구분하려는 시도는, 아마 시대구분이라는 접근이 그나마 허용되었던 마지막 시대의 글이었으리라 쓸쓸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고와 상상력이 필수인 마르크스주의에 있어 시대구분과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탓에 제임슨은 끊임없이 그러한 시대구분에 투입된 자신의 비평적 탐색의 결과를 끊임없이 제출한다. 아마 이런 류의 글 가운데 가장 최근의 글은 다음일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단독성의 미학, 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2017, pp. 286-317.
그러나 역사적 시간을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봉쇄된 것처럼 보이는 조건에서 그러한 작업을 고수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뿐더러 또한 큰 환대를 얻을 일도 아닐 것이다. 인지적 지도그리기란 주어진 사실의 단편들을 총체화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총체화를 가능케 하는 매개의 복잡한 과정을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규정으로서 식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제임슨의 악명 높은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단계에 조응하는 문화적 상부구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과 시각예술, 건축의 어떤 사례들이나 그것의 형식적 유사성, 스타일의 동형성(isomorphism) 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후기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시대의 규정 혹은 각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제임슨 역시 루이 알튀세르의 유명한 말처럼 “최종심급의 고독한 시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즉 경제적 규정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을 우리의 두 눈으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작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은 하잘 데 없는 정치적 사건이거나 우연한 사고, 어처구니없는 추문 등에 의해 세상이 바뀌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시적인 사태들의 요란한 소동 속에서 무관한 듯 보이는 사태들 사이의 관계를 분별하고 그것을 인과관계의 사슬 속에 자리하도록 하는 것은 역사적 사고를 위해 불가결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큐레이터 토크: 9X0X”는 흥미롭다. 그것은 연대기적인 암호인 “9X0X”라는 부호로 20여년의 시간을 호명한다. 그러나 그 호명은 그 시간대의 한국 미술의 양상을 인식하고자 시도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데 따르는 곤란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9X0X라는 간단히 무시하기 어려운 이 이름은 그 시간대를 규정하는데 따르는 무력함을 호소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시간대가 하나의 전기(轉機)였음을 기별한다. 우리는 그 때가 우리의 사회적 삶에 있어서나 문화적 영역에 있어서나 중대한 전환이 발생한 시간대였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직감이 비평적인 인식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연유로 “9X0X”는 적어도 내게는 인지적 지도그리기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도 그를 딛고 이 연대를 역사적 시간으로 식별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제한하는 힘을 제거하고 이를 명료한 역사적 인식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일이 호락호락할 리 만무하다. 이는 “9X0X”라는 시간대가 품고 있는 자체의 아포리아에서 비롯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미술적 실천을 개관하는 어느 책에서 윤난지는 책에 수록된 글들을 이끄는 서문 격인 글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1990년을 전후한 몇 년간 한국은 사회 각 부문에서 결정적인 변화를 겪게 되며, 시대의 거울인 미술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미술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한국의 동시대 미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주로 이 시기 이후 현재에 이르는 대략 30년간의 미술이다.” 윤난지, 1990년 이후, 한국의 미술, 한국 동시대 미술 1990년 이후, 윤난지 외, 사회평론, 2017, p. 9.
물론 이는 윤난지 만의 독특한 주장은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주장에 동의해 왔고 그런 점에서 1990년대를 변곡점의 시간대로 추억하는 전시와 이벤트가 제법 성황을 이루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16년 말에 열린 <X: 1990년대 한국 미술> 전시일 것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여경환 외, X : 1990년대 한국미술, 현실문화, 2016.
여기에서 우리는 “9X0X”라는 시간대를 역사화하고자 하는, 다시 말해 90년대 이후의 미술을 미술사 속에 등록하는 이름과 만나게 된다. 그 이름은 동시대이다. 그런 점에서 “9X0X”라는 규정되지 않은 연대기적인 이름은 어딘지 그간의 합의된 이름인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란 이름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몸짓처럼 보이게 된다.
그런데 동시대 미술이라는 개념은 역사적 시기구분에 완강히 저항하는 개념이다. 동시대라는 개념은 현재의 영원한 반복 혹은 지속이라는 시간 인식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시기구분’이라는 인식에 등을 돌린다. 그러므로 동시대 미술이란 개념이 특정한 ‘시기’의 예술적 실천을 망라하는 개념이라 여기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동시대는 현재의 지속이거나 반복이라는 점에서 과감하게 말하자면 시간이 현재로 수축되었거나 시간성 자체가 상실되었음을 가리킨다. 또 시대라는 문맥을 포기한 탓에 시대의 대표적인 형식, 지배적인 스타일, 저자성과 관객의 개념 등을 반성할 수 있는 여지도 사라진다. 이 때문에 우리는 시대라는 역사적 시간에 의한 규정을 단념하고 연대기적인 열거, 즉 몇 년에 어떤 이벤트와 인물 등이 있었는지를 끊임없이 짚는데 골몰하기 일쑤이다. 따라서 동시대미술이 그나마 가까스로 시간을 회수하는 방식은 끝없는 연대기적인 서술이다. 결국 동시대 미술이란 개념은 시대구분의 외관을 취하지만 동시에 시대구분이 불가능한 시간 경험을 가리킨다. 따라서 동시대 미술이란 개념은 한 시대를 지칭하고자 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한 시간 경험을 동시에 가리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해결 불가능한 아포리아가 된다. “9X0X”란 시간대는 지금 혹은 현재의 지속이라는 시간 경험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자신을 다른 시대와 단절된 하나의 시대로서 정립한다. 시대이면서 반시대로서의 동시대라는 아포리아.
한편 이러한 시간 경험은 인지적 지도그리기가 동원하는 읽기의 책략 가운데 하나일 ‘징후적 독해(symptomatic reading)’ 또한 배제한다. 징후적 독해란 어떤 체계나 질서의 모순을 재현하는 것이 억압되거나 저지되어 이를 전치(傳置)나 응축(凝縮)을 통해 나타낼 때 그를 읽어내는 것이다. 또한 징후적 독해란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을 가동시키면서 부분을 고립되고 절연된 사태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련 속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징후적 독해란 어떤 순간을 알레고리로서 제안하며 그것을 전체로서의 시간, 즉 특정한 역사적 시대라는 시간과 결부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읽기의 전략은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라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개별 작품이든 전시이든 어떤 대상들의 비교가능성을 제안하고 그것을 전체와 상관시키는 읽기의 전략일 징후적 독해는 과거의 것일 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에겐 이제 (징후나 알레고리와는 분리된) 각각의 사례들과 (시대의 자식이란 뜻에서의 사고나 개념은 제거된) 각각의 여론들(opinions) 만이 주어지는 셈이다. “9X0X”라는 프로젝트는 그러한 아포리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를 위한 가능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각각의 전시들을 동시대미술의 표현이나 사례로 간단히 처분하지 않고 이들을 연관시키는 역사적 서사를 발명하는 것, 줄여 말해 인지적으로 지도그림을 통해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1990년대 이후를 어떻게 시대구분할 것인가.

2.

싱가포르 작가 호추니엔(Ho Tzu Nyen, 何子彥)의 <동남아시아 비평사전 The Critical Dictionary of Southeast Asia>은, 그에서 뻗어 나온 많은 후속 작들 예컨대, <두세 호랑이 2 or 3 Tigers>이나 <의문의 라이텍 The Mysterious Lai Teck, 神秘莱特>같은 작품들을 위한 매트릭스로 구실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오늘날 거의 가사(假死) 상태에 이른 역사를 복구하려 시도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여기에서 제안하는 역사적 반성이란 게 종래 우리가 생각하던 역사와 같은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호추니엔의 계속 진행 중에 있는 이 기획은 여전히 역사를 거론하고 그것이 과거와 오늘을 잇는 시간의 원근법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더욱이 작품의 제목에 포함된 ‘비평적(critical)’이라는 낱말이 시사하듯 동시대미술의 ‘후-비판적(post-critical)’ 특성과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비판이라는 두 좌표를 회복하고자 하는 호추니엔의 모색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가치를 지닌다. 나는 여기에서 ‘후-비판적(post-critical)’이라고 언급할 때 이는 1990년대 이후 미국과 일부 서유럽의 소위 ‘동시대 미술’의 면모를 요약하는 말로 삼는 핼 포스터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Hal Foster, Bad New Days, London & New York : Verso, 2015.

그런데 우리는 <동남아시아 비평사전>이 역사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려주기보다는 역사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을 저지하는 힘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패배를 보여주는 작업처럼 보인다. 이 작업은 역사적 시간의 한없는 불투명함에 대한 고백과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역사적 시간은 마법이나 주술처럼 시간을 지배하여온 여러 가지 신화들로 인해 독해할 수 없는 그러나 동시에 독해를 유혹하는 환영들의 연속으로 나타나는 듯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치 초현실주의적인 연상법을 좇는 듯이 알레고리 아닌 알레고리를 쫓아 유영한다. 호랑이와 라이텍 같은 대상이 바로 그러한 알레고리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호랑이는 식민주의와 피식민 민중 사이의 관계와 그 권력의 전략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다음 단계에서의 기억을 촉발하기 위한 운동인자로서 기능한다.
호추니엔은 <싱가포르의 중단된 도로 측량 Interrupted Road Surveying in Singapore>(1853)이란 그림에 주목한다. 그 그림은 아일랜드인 토지측량사인 조지 드럼굴 콜먼(George Drumgoole Coleman)이 싱가포르에서 토지를 측량하다 호랑이를 만나게 되고 그 호랑이는 놀랍게도 사람이 아닌 도구, 즉 경위의(經緯儀, theodolite)를 공격한다는 서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제 호랑이는 벤야민이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역사적 시간으로의 도약을 꾀하지 않는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호랑이의 발톱은 역사라는 서사적 직물 위에 흩어진 올들을 헤집으며 계속 뒹군다. 호랑이는 이제 호랑이라는 상징의 사슬 속으로 계속 분기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알레고리가 아니다. 호랑이는 자기반영적인 기억 속의 대상들 사이로 이동하면서 기억의 몸짓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역사를 겨냥하고 있지만 그것은 마치 기약 없는 노고처럼 다음의 기억에 자리를 양보한 채 역사에 닿지 못한다.
이는 <동남아시아 비평사전>의 형식이 지닌 비밀이기도 할 것이다. 사전적 말하기란 서사화의 중력을 회피하거나 우회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방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선별된 몇 개의 낱말은 다음 단계에 도착할 이야기와 접합될 부담을 질 필요 없이 혹은 플롯에 따라 전체의 단편이나 일화(逸話)로서 스스로를 조직할 구속에 시달릴 필요 없이 계속 기억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패러독스를 만난다. 그것은 이러한 투시될 수 없는 역사적 시간의 표면 위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억들이 하나의 장소 위에서 순환한다는 점이다. 그 장소는 바로 동남아시아이다. 놀라우리만치 자유롭고 유연한 기억의 시간적 범위와 속도에 비해 그 기억이 움직이는 장소는 폐소공포증적으로 한 장소의 주변을 배회한다. 선형적 시간에 대한 끈덕진 회의와 조롱을 쏟아내는 작가의 서사적 충동은 한 장소에 고착된 관념은 손끝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점은 특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이는 모든 시간적 경험이 공간화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의 ‘동시대’ 문화의 추세를 빼닮은 듯이 보인다.
호추니엔이란 작가의 작업에 잠시 한눈을 파는 것은 “9X0X”를 살피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9X0X”에서 초대되어 회상하는 개별 전시 그리고 큐레이터의 전시기획의 관점과 방법 등은 그 자체로 지난 수십 년의 ‘미술사(!)’의 역사적 시간을 구성하는 눈금이나 좌표 점으로서 기능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들은 당장은 서로 분리된 채 개별적인 사태로서 작용하면서 시간의 표면 위에 분산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종합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 듯 보일지라도 그것들을 연관시키는 어떤 역사적 맥락을 증언하는 희미한 단서들로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도모하고자 한다면 호추니엔의 역사 없는 기억의 반복 운동이 역사적 반성을 무한히 지연시키는 것과 멀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이를 때 우리는 1990년대 이후라는 시간을 서사적 재현에 저항하는 이름으로서의 “9X0X”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9X0X”라는 이름이 어떤 시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시대적 명칭을 탈환하는 모습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3.

그렇다면 “9X0X”에서의 전시를 해석할 수 있도록 이끄는 문맥으로서의 역사적 시간은 무엇일까. 나는 당연하게도 이것을 한국에서의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환과 분리시킨 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선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자본주의의 역사란 생산관계나 그것의 연장으로서의 경제적 사회관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그것, 즉 도식적이고 고풍스러운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법을 동원하자면 상부구조(정치, 법, 문화, 예술 등)라 불리는 것들의 역사를 망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부구조는 나름의 자율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때의 자율성이란 흔한 짐작처럼 경제적인 규정으로부터 면역되어 있거나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의 자율성이 아닐 것이다. ‘규정(determination)’을 외재적인 충격이나 효과로서 받아들인다면 자율성이란 그냥 외재적인 실체로서 경제와 문화 혹은 예술이 각기 분리된 채 있음을 가리키는 것에 머문다. B가 A로부터 자율적이라는 것은 A와 B가 외적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A가 B를 결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B가 자율적이라는 말은, 그러한 결정의 영향이 내재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A가 B를 결정하지만 그럼에도 B가 자율적이라는 말은, B는 A의 결정을 내부화하고 그럼으로써 B 자신의 자기 변형의 논리를 통해 운동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1990년대 이후를 자본주의의 결정과 자율성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이 역사적 시대를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구조조정’과 ‘세계화’를 통한 자본가계급의 반격의 과정(그 결과는 비정규직의 일반화와 실업의 고조, 그에 따른 노동운동의 심각한 약화와 탈정치화된 대의민주주의 등일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경유한 새로운 자본주의의 역사적 단계로의 이행의 과정으로서 설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대 미술이라는 것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을 밝히는 것으로서는 그다지 말해 주는 바가 크지 않다. 우리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역사의 현상학이라 불러도 좋을 접근을 기꺼이 동원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문자 그대로 변화된 세계가 어떻게 우리에게 경험되고 또 나타나는지, 그리하여 어떤 특정한 재현과 묘사의 시도가 대두하고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굳이 대응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말하는 “세계는 세계화한다(Die Welt weltet, World worlds)”는 언명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란, 눈앞에 있는 셀 수 있거나 혹은 셀 수 없는 것, 친숙하거나 낯선 것 모두를 단순히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또한 세계는, 사물적 존재자 전체를 위해 상상적으로 고안되어 거기에 첨가된 관념상의 테두리인 것도 아니다. 세계는 세계화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오병남•민형원 옮김, 예전사, 1996, p. 53.
하이데거는 세계란 주어진 사실들이 아니라 그 세계와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사회적 실천에 의해 자신을 역사적인 실재로서 객체화/주체화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동시대 미술의 또 다른 이름인 ‘글로벌 아트(global art)’를 비판적으로 사색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장-뤽 낭시의 현상학적인 비평 역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낭시는 하이데거적인 현상학을 세계화(globalization)란 개념에 조준한다. 그는 이 개념의 불어 낱말인 ‘mondialisation’과 대조하며 호환가능한 말처럼 보이는 두 낱말처럼 보이지만 이 둘 사이에 어떤 종차(種差)가 존재하는지 역설한다. 그리고 이는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을 오늘의 세계화 이후의 세계에 대한 사색으로 연장하는 것이다. Jean-Luc Nancy, The creation of the world, or, Globalization, translated by François Raffoul and David Pettigrew,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7.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시간성과 공간성이라는 쟁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지각과 경험의 질서의 일부로서 시간성과 공간성은 무엇보다 세계가 어떻게 세계화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더 이상 배후지 혹은 외부가 없는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제1세계와 3세계(중심과 주변)의 관계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세계와 아직도 전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이 주종을 이루는 세계 사이의 공간적 분할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국민국가 간의 세계적 배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 내부에서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1990년대 이후란 한국 사회에서 마침내 ‘시골과 도시’의 변증법이 소멸한 시기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즈, 시골과 도시, 이현석 옮김, 나남, 2013.
시골이란 구체적인 장소라기보다는 도시 바깥의 삶, 즉 거의 대다수가 임금노동자로 살아가는 세계인 도시의 외부를 가리킨다. 이 때 시골은 하나의 은유로서 자본주의적 생활 형태의 외부이자 동시에 다른 형태의 지각과 경험의 방식들이 잔존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시골이 사라지거나 설령 농업이 이뤄지는 지역으로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 때의 시골이란 이미 특정한 이미지나 상상력에 의해 사물화된 뒤의 시골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골은 농촌 마을 체험 프로그램 같은 것이 예시하듯이 특정한 체험을 맛볼 수 있는 무대로서 각색된 시골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접하는 자연 역시 본래적인 자연이라기보다는 도시에 사는 이들의 심상 속에 투영된 이상화된 자연으로서 박제화된 자연일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는 이러한 감수성이 소진되었던 시대였을 것이다. “9X0X”의 전시 가운데 초기의 전시를 이루는 일련의 전시가 ‘도시’라는 토픽을 에워싸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영철의 <98 도시와 영상: 의식주>나 백지숙의 <럭키서울>, 나아가 보다 넓게 아우르자면 김선정의 <주차장 프로젝트>, <플랫폼 인 기무사>, 안소연의 <마인드 스페이스>나 <스페이스 스터디>까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한국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게 될 일련의 전시들은 모두 도시라는 기표 주변을 순회한다. 그리고 이는 도시에 대한 시각적 재현을 다루는 전시라기보다는 도시가 유일한 공간적 경험의 장소로 완성되는 순간을 표지한다. 즉 도시란 기표는 자본주의 바깥에서의 삶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되는 긴장이 제거되고 상품화되거나 스펙터클화된 경험이 삶의 경험을 완벽하게 지배하게 된 세계를 암시한다. 그리고 이는 ‘제3영화’나 ‘제3세계문학’(한국에서라면 민족문학이나 민중미술이 그에 해당될)처럼, 공간적 비유를 통해 자본주의의 내적인 모순을 표상하고자 했던 시도가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도시란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서는 모든 경험이 도시 내부에서 매개되고 증류되어 생산되고 소비된다. 도시는 이국적인 것을 생산하고 진열하기도 하며 목가적인 것 역시 전시하고 소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공간이 시간적인 것을 흡수하거나 압도하게 됨을 가리킨다. 그리고 시간은 공간화되고 시간의 표지이자 증거일 텍스트와 이미지는 갑자기 시간이 적재된 공간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공간으로 변용된 시간이 된다. 한편 시간은 육체라는 것을 통해 공간화되기도 한다. 제임슨의 말을 빌자면 “시간적 현재를 빼곤 주어진 것이 없을 때 이는 한편으로는 신체를 빼면 주어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뒤를 잇지 않을 수 없다. Fredric Jameson, The End of Temporality, Critical Inquiry, Vol. 29, No. 4, 2003, p. 712.
물론 이는 미술관을 비롯한 전시공간이 거의 보이지 않는 배경으로 물러 서 있던 것과 달리 전시 공간을 경험하는 행위가 곧 전시 관람에 다름 아니라는, 즉 탈신체화된 추상적인 지각으로서의 관람을 점차 물리치며 공간적 경험이라는 것이 그 자리를 메우에 된다는, 전반적인 변화와도 잇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9X0X”의 전시들은 지금은 일반화된 ‘플랫폼’이라는 개념처럼 일시적이고 현재적인 장소로서의 전시공간을 도입하는 과정들을 구성한다. 이를테면 개인전의 프로덕션을 아뜰리에 에르메스라는 공간의 특색과 결합시킨 전시나 김선정의 <주차장 프로젝트>, <플랫폼 인 기무사>같은 전시나 김홍희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쌈지스페이스>는 이러한 신체적인 현재로서의 시간성, 즉 동시대 미술이 본격적으로 진입한 현재성의 경험에 주의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안소연의 <사춘기 징후>같은 전시는 역사적 시간을 개인의 성장 경험 속으로 전치시킨다. 그리고 사춘기의 불안과 흥분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미심쩍은 역사적 시간에 대한 감각이 서사화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한편 이는 아카이브적인 실천이 큐레토리얼 작업에서 중요한 일환이 된 이유 역시 짐작케 한다. 아카이브는 역사적 시간을 구성하고 반성하기 위한 재료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시간의 자족적인 동시성이자 물질화된 시간의 흔적으로서 시간을 공간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아카이브가 전시의 대상이자 그 자체 주제로 부상하는데 기여한 백지숙의 일련의 전시는 “9X0X”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에워싼 무의식의 또다른 증거라고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9X0X”가 정박해 있던 시간대가 어떤 역사적 시대였는지 온전히 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단지 그 시대의 전시들이 취한 전략과 전망들에서 그리고 그것이 동원한 언어와 서사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요소인 시간과 공간의 지각과 경험을 검출해 이야기했을 뿐이다. (탈)역사의 현상학이라는 접근과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역사 분석을 결합시키는 것, 후자를 단지 전자의 외적인 배경으로 축소시키지 않고 이를 내적으로 매개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더 많은 분석을 요한다. 그러나 보다 많은 것을 고려한 역사적 서사화 혹은 역사적 시기구분을 위해 “9X0X”가 은연중 던지는 제안을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9X0X”는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전시의 사례들과 그에 개입한 큐레이터의 실천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미술사 쓰기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서 이들을 그러한 역사적 서사화를 가능케 하는 대상으로 부각시킨다. 작품과 저자, 그리고 공통적인 형식과 스타일을 찾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듯이 보일 때 종래의 미술사 쓰기는 좌절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술 더 떠 휘황한 국제적 전시 제도(비엔날레, 도쿠멘타, 마니페스타, 페어 등)가 성행하며 스펙터클한 전시 이벤트를 연중무휴로 전개하고 ‘글로벌 아트(global art)’라는 것을 생산할 때, 미술사 쓰기는 자신의 역사적 서사가 정박할 곳을 잃은 채 더욱더 방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적 실천을 역사화하는 데 따르는 곤란을 우회하며 역사적인 징후를 발견할 수 있는 후보가 전시이자 큐레토리얼 실천이라는 가정은 신뢰할만 하다. 그러나 이를 보다 밀고나가기 위해 우리는 또 하나의 변증법이 요구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다시 제임슨의 말을 인용하자. “변증법적 사고란 두제곱된 사고, 즉 사유 자체에 대한 사고로서, 정신은 대상이 되는 자료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고과정도 다뤄야 하며, 관련된 특정 내용과 그에 부합하는 사유양식 모두가 동시에 정신 속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T. W. 아도르노, 혹은 역사적 비유들, 맑스주의와 형식, 여홍상․김영희 옮김, 창비, 2014, p. 68.
여기에서 제임슨의 말을 비틀자면 이런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전시와 큐레이션은 사고의 사고, 두 제곱된 사고로서, 스스로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우리 시대의 정신이자 사고라는 것, 그런 점에서 전시와 큐레이션이 실천이자 객체이지만 동시에 물질적 의식이자 이데올로기로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9X0X”에서 수집되고 중계된 것들은 동시대미술의 역사의 단층들을 시야에 드러나는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불명(不明)한 이름의 “9X0X”은 자신의 역사적 시대를 지명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대체될 것이다.

_아트선재센터의 <9X0X:큐레이터 토크>의 출판을 위해 기고한 글. 인용은 출판될 텍스트를참조하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