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반구의 비엔날레는 새로운 삼 대륙 예술 인터내셔널을 만들 수 있을까?

Victor Jara – Manifiesto

태풍이 온다

지난 해 그러니까 2018년 늦여름, 나는 소설가 최인훈의 부음을 듣고 잠시 망설였다. 그를 조문하러 간다는 것이, 터무니없지만은 않지만 너무 어색한 일이란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 탓에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겠다는 의지를 접어 버렸다. 하물며 그의 장례를 문인장으로 치른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문학과는 먼 자리에서 사는 처지에 불쑥 그의 마지막을 찾는다는 것이 뜬금없는 일이리란 망설임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를 찾고 싶었다. 한국에 사는 여느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최인훈의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가끔 다른 이유로 그의 소설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나는 또다시 그의 소설들로 회귀하였다. 그의 소설에서 나의 온 몸을 불붙게 하는 듯한 또 다른 충격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로 ‘비동맹운동’이었다. 그의 소설 속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낱말, 그러나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비동맹운동이었으리라고 확신했다. 마침 나는 비동맹운동이라는 프로젝트를 몇년간 추적하고 있었다.

1960년의 한국 4․19혁명이 창출한 유토피아적인 순간 동안 그는 냉전의 족쇄를 폭파하면서 발생했던 희망을 선취하고 있었다. 물론 청맥을 비롯한 많은 잡지들이 등장하여 비동맹운동에 근접한 숱한 주장들을 세상에 쏟아냈지만 그것은 훗날의 통일혁명당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탄압과 검열로 인해 모두 침묵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몇몇의 작가들은 그러한 희망의 순간에 훗날 반공주의적인 친미 국가를 통해 질식당할 “비동맹운동의 상상(imaginary of Non-alignment movement)”을 제출하였다. 최인훈은 그러한 소설가 가운데 가장 독보적일 것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인 광장 그리고 과거의 역사의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구권 몰락 이후의 세계에 대한 집요한 반성을 시도한 후기의 대작 화두 등과 달리 그다지 이목을 끌지 못한 기이한 소설 한편이 있다. 그것은 최인훈이 1973년 발표한 장편 소설 태풍일 것이다.

이 소설은 일종의 대체 역사소설과 비슷한 형식을 취한다. 이 소설은 어떻게 보면 광장의 속편처럼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1961년에 세상에 나온 소설 광장은 ‘타고르 호’라는 함선을 타고 제3세계로 떠나는 주인공의 여정과 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소설의 주인공의 충격적인 선택, 제3국을 향해 떠난다는 설정은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에겐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운명을 향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실존적 결정을 다그치는 무대를 마련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떠나온 북과 자신이 정착한 남, 그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음을 깨달은 주인공의 동요는 타율적인 이념이나 사상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내면적인 반성을 고집하는 비판적인 개인의 초상으로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항변도 큰 목소리로 들렸다. 어쨌든 자족적인 개인적 번민과 주관적 자유에 탐닉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초과하는 집단적인 저항에 기꺼이 투신하지 못하는 소시민적인 주인공을 힐문하는 이들은 여기저기에서 웅성댔다.

그러나 태풍은 예기치 않은 플롯을 통해 전개된다. 이 소설에서 최인훈은 식민주의와 탈식민화의 과정이 전개되는 가상의 지도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는 마치 암호처럼 모든 지명을 거꾸로 발음하여 가상의 국가들을 만든다. 이를테면 일본을 암시하는 나파유(Japan→Napaj), 영국을 가리키는 듯한 그러나 실은 네덜란드를 가리키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을 니브리타(Britain→Nibrita), 그리고 니브리타 식민주의자를 쫓아내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는 나파유에 맞서 저항하는 나라로서의 아이세노딘(Indonesia→Aisenodin).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 오토메나크(창씨개명한 일본 식 성명 가네모토 金本 Kanemoto→Otomenak)가 태어난 그러나 오랜 식민 지배를 통해 동화되어버린 슬픈 식민지 모국인 에로크(Korea→Aerok), 즉 식민지 조선도 덧붙여야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제 예상할 수 있듯이 에로크 출신이다. 그는 나파유의 장교로서 나파유의 충실한 신민으로서 살아가다 나파유가 점령한 식민지 아이세노딘에서 카르노스(그는 비동맹운동을 이끈 정치지도자 수카르노를 암시한다)란 민족주의 지도자를 만난다. 아이세노딘에서 나브리타의 지배에 맞서 저항하다 구금된 카르노스를 만나면서 주인공은 자신이 충성했던 또 다른 조국이었던 나파유와 자신이 출생한 조국인 에로크 사이의 식민주의적 지배를 자각한다. 그리고 그는 카르노스의 부하가 되어 그가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30년이 지난 통일된 조국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소설에서 최인훈은 환상적인 대체 역사 서사를 가공한다. 그를 위해 그는 기꺼이 가상의 지도를 그린다. 그것은 검열을 피하기 위한 가상의 세계이지만 또한 제국주의-식민주의란 투시법을 통해 조감된 세계를 제시하려 그가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대체 역사 소설은 도래하지 않은 그리고 기원하지 않은 시간들을 조합하는 ‘시대착오(anachronism)’나 ‘때 맞지 않음(untimeliness)’의 기법에 더해 제 장소에 있지 않은 어떤 다른 장소를 고안하는 놀라운 비약을 실행하며 읽는 이를 살짝 흥분케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립국인 제3국인 인도를 향해 떠나는 주인공의 선택으로 종결되던 광장을 다시 쓰고자 작가가 취한 서사 전략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분단 이전의 식민주의적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선택을 예상해보고 실험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서사적인 상상을 위해 그가 다른 장소에 대한 기억을 경유한다는 것은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장소 그리고 그 장소를 에워싼 기억을 비동맹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철의 장막 이편, 비-비동맹의 자리

철의 장막(iron curtain) 혹은 색의 장막(color curtain)의 이편, 그러니까 냉전 체제의 수호자여야만 했던 분단된 남쪽에서 살았던 이에게 비동맹운동은 금지된 지식이었다. 1980년대에 급진적인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금지된 지식과 실천에 대한 갈망 속에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이 지하에서 유통되고 또 이따금 출판되기도 했을 때, 비동맹운동 역시 구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큰 주목을 끈 관심사는 아니었다. 광주에서의 학살 그리고 고문과 구금의 기억은 많은 이들을 군사독재 비판이라는 프로젝트에 몰두하도록 했다. 그리고 군사독재 정권을 지원하고 비호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분노가 있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에서 미국의 정치적 지원과 군사적 동맹이 무엇이었는지를 따져 묻는 즈음 이미 우리는 다른 시대로 운반되었다는 충고에 퍼뜩 놀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 급습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삽시간에 잊도록 하였다. 1980년대의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 위기 동안 일시적인 호황을 겪은 한국은 곧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와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에 가입하는 것(1995년)은 물론 마침내 부자 나라들의 서클인 G20(Group of 20)에 참여하기(1999년)에 이른다. 물론 그 사이 한국은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 나라들처럼 지역을 휩쓴 외환위기를 겪었다. 국가부채와 누적된 외채로 인해 벌어졌던 경제 위기는 이제 시장자유화를 통해 진입한 투기적 금융자본의 수탈과 도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 및 자본 자유화가 초래한 결과는 그를 초래한 권력에 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수습되어야 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주도하고 규율한 국제금융기구들은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구조조정을 강요했다. 이러는 사이 비동맹운동은 영원히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아니면 통속적인 티비 쇼나 인터넷 블로그, 유튜브에 등장해 순식간에 소비되고 처분되곤 하는, ‘오늘의 역사’나 ‘그 해엔 무슨 일이 있었나’ 따위에 나올 법한 소일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비동맹운동은 더 이상 다른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 듯한 그리하여 하나뿐인 세계에 갇힌 듯한 갑갑증과 우울함을 겪는 나에게 어떤 뒤집혀진 미래의 전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과 서유럽의 나라들이 선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도래한 하나의 세계는 적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갈등의 정치를 통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국제 뉴스에서, 소셜 미디어의 뉴스피드에서 먼지처럼 산발적으로 흩어진 채 쏟아지는 분쟁과 분규, 파업과 시위들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총체화될 수 없는 국지적인 소동처럼 간주된다. 시리아의 난민과 시리아의 전쟁고아와 아프리카의 전염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구호하자고 호소하는 국제기구의 광고가 보여주듯이 인도주의적인 원조라는 덕의 손길을 통해서만 하나로 모일 수 있는 참상의 풍경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의 전경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폭력과 착취, 수탈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무력한 피해자나 희생자가 아니라 합당한 역사적, 정치적인 공간 속에 위치한 주체로서 사고할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만들어낸 세계의 자기전개의 방식, 하이데거 식의 어법으로 말해, ‘세계가 세계화하는 방식(particular mode of world’s worlding)’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가 자신을 전개하는 방식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바디우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만들어낸 삭막하고 무조적인(atonal) 현실을 ‘세계 없음(worldlessness)’이란 용어로 묘사한다. 그의 철학적 사변을 빌자면 존재가 출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논리(logic)가 정립되고 또 지각될 때, 우리는 다시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세계 있음(worldness)’의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지 않다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그의 삼엄한 냉소적 현실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따라서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선언하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존재 자체로부터 그 존재가 출현하는 특수한 양식으로의 이행을 규제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세계가 세계화하는 방식에 대하여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당장 그것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계가 다르게 출현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세계가 출현하는 논리가 어떻게 접합되고 구성되었는가를 기억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기억이란 역사를 대신하며 그 자리를 차지한 기억학(memory studies)이 말하는 기억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적 상상과 의식이 패배하고 동요하게 될 때 자의적이고 단속적인 기억이 그 자리를 꿰차게 되는 건 불가피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기억은 역사를 소생시키기 위해 복무할 수도 있다. 우리가 구제하고자 하는 기억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한 기억술은 ‘동시대 미술’이 동시대성(contemporaneity)란 모호한 개념 속에 숨어 웅변하는 ‘현재주의(presentism)’에 맞서면서 시간성의 종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간의 문턱을 넘기 위해 시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고안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에 의해 규정되는 문화적 상부구조의 원리로서의 ‘단독성의 미학(aesthetics of singularity)’(프레드릭 제임슨)에 대적하도록 할 것이다. 우연성, 단독성, 혼종성, 사이성(in-betweenness) 등의 휘황한 개념들은 언제나 몰래 미래 없음의 어두운 절망을 은닉한다. 그러나 비판적 기억은 회환 없이 보편사나 세계사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역사적인 의식과 시대적인 감각을 조율하고 연루시키는 것보다는 지금 여기의 지각의 충격과 흥분 등의 경험을 제시하는 데 골몰하며 미적 경험을 생산하는 것을 미술적 실천의 일차적 과제로 내세우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 ‘포스트-비판성(post-criticality)(할 포스터 Hal Foster)의 격류에 조난당한 동시대 미술은 비판적인 기억을 통해 다시 자신을 역사화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판적 기억을 위한 특권적인 장소로서 비동맹운동을 방문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적어도 전지구적 남반구에서의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삶을 그 어떤 제국주의, 식민주의적 지배의 효과로부터 분리시킨 채 불가역적인 운명으로 환원하는 오늘의 정세에서 비동맹운동은 다른 세계를 세계화하는 개시이며 그것이 전개된 시간은 “후식민적 외교의 시기일 뿐만 아니라 탈식민 세계를 가로지르는 농밀한 사회적, 문화적 상호작용이 펼쳐진 시대”였다. 이 시대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성,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운동가, 지식인들, 운동가들, 혁명가들이 민족적, 언어적,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넘나들며 대화를 나누고, 미술가들과 시인들, 그리고 공연자들이 국가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창조하고자 지적이면서 문화적인 표현을 위한 새로운 생각과 테크닉들을 품고 이동하며 실험을 꾀했다.” 그리고 먼지를 털고 모습을 드러낸, 집요한 추적을 통해 수집되고 작성된, ‘연대의 아카이브’가 잇달아 우리에게 도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연대의 아카이브들

2014년 인도네시아의 미술비평가이며 전시기획자인 에닌 수프리얀토(Enin Supriyanto)는 구겐하임미술관이 주재한 아시아미술위원회의 정기모임에서 족자카르트 비엔날레가 ‘적도 비엔날레’로 변신하게 된 계기를 설명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1965-6년 수카르노 정권을 붕괴시키고 수하르토가 이끄는 친-서방, 친-발전 국가로서 인도네시아가 변신하는 과정에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정당이자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다수의 의석을 확보하기 직전이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다른 좌파 정치세력들이 끔찍한 학살과 탄압을 통해 붕괴되었음을 회고한다. 남한에서 사는 이라면 너무나 쉽사리 짐작할 수 있듯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역시 공산당이나 좌익과 연루된 이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1988년 시작된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트 비엔날레는 그 이름으로 개최된 마지막 비엔날레가 있었던 2007년까지 숱한 부침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비엔날레에 관련되었던 작가들과 전시기획자들은 그들이 이끌어온 비엔날레의 성격과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그들은 지역 정부와 협상을 통해 족자카르타 비엔날레를 대신할 새로운 비엔날레는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하며 족자카르트 지역의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이 운영하는 재단과 기구가 그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개시할 새로운 비엔날레의 유의미한 출발점이 ‘반둥 회의’가 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에닌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피해야 할 그리고 갇혀서는 안 될 특별한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반둥 회의가 다시 중요해진 지점이다. 우리는 어떤 회고적인 참조물로서가 아니라 왜 반둥회의가 제기했던 생각과 이상들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며 그리고 그것은 실현되어야만 하는지를 들여다보고 추구하며 또 질문, 비판할 수 있는 틀로서, 반둥회의로부터 우리의 국제관계를 족자카르타 비엔날레의 미래가 취할 맥락 속으로 끌어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새로운 비엔날레의 이름은 적도 비엔날레였을까. 에닌은 반둥회의에 참여했던 나라들의 지리적인 위치를 상기시킨다. 그들은 모두 적도 지대(the equatorial belt)에 인접한 나라들이었다. 에닌의 말을 빌자면 “우연찮게도(coincidentally)” 국제적인 우애의 정신과 함께 하고 싶었던 예술가들의 나라들은 바로 그 지대에 속해 있었다. 그는 오늘날 변방의 나라에서 비엔날레를 개최한다는 것이 갖는 미학적-정치적인 의의를 재규정한다. 그리고 오늘날 비엔날레가 취할 방향의 선례를 반둥회의에서 찾는다. 그 때의 반둥회의란 무엇일까. 전지구적 세계화 이후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화처럼 보이는 이 때, 전지구적 남반구(global south)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망라된 빈곤과 전쟁에 시달리는 측은한 자들의 세계, 오직 그곳으로부터의 탈출과 이주만이 삶을 전환할 기회인 것처럼 보이는 명계(冥界)와도 같은 세계가 왜 다시 미래의 좌표가 될 수 있는 것일까.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이란 작은 도시에서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를 비롯한 29개 나라의 정치지도자가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모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들이 개최한 행사의 이름은 “아시아-아프리카 회의(Asia Africa Conference)”로 불리게 될 것이었다. 이들은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두 열강이 만들어낸 국제질서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이 두 나라와 자주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선언했다. 그 점에서 그들은 ‘비동맹’을 택했다. 그러나 그 회의는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비동맹운동을 이끈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독립과 국민국가의 건설이 어떤 전략을 취하여야 할지 역시 제안했다. 그들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다. 그것은 문화적, 인종적인 공통점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공동의 희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독립과 해방을 향한 포부이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제3세계라는 프로젝트를 세상으로 밀어내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제3세계란 개념을 고안했던 프랑스 경제사가 겸 인류학자인 소비가 염두에 두었듯 이 개념은 프랑스 공화주의 혁명이 산출한 정치적 상상인 ‘제3신분(Tiers Monde)’, 즉 새로운 역사적인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3세계가 대두한다는 것은 자유의 역사로 나아가는 –그러나 포스트-계몽의 이론적 세례를 받은 이라면 누구나 눈살을 찌푸리는 관념일 – “보편사(universal history)”의 한 계기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혼돈 속에서 제3신분은 국민의회를 결성해 전체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았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제3세계도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하고 연대의 발판을 만들고 국제정세의 역학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것이 제3세계라는 계몽의 약속이다.” 비자이 프라샤드의 위와 같은 말은 또한 반둥회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신체를 과시한 제3세계에도 역시 해당됨은 물론 일 것이다.

그러나 비동맹운동이 닻을 올렸을 때 그것은 단지 정치경제적 변화를 꿈꾼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비동맹 예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반식민주의적 예술운동의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역사적 풍경을 이끈 정치적이면서도 미학적인 기획으로서의 ‘제3세계주의(third worldism)’가 많은 이들의 희망의 탐조등이 되었다. 1945년 유네스코 창립총회가 열렸을 때 참가자들은 “더 이상 우리 어린이들이 조국의 영광만을 생각하도록 교육받아선 안 된다. 어린이들은 조국을 하나의 단위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계국가라는 더 넓은 전체에 복무해야 한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세계국가라는 이상은 배타적인 혹은 국수주의적인 문화 민족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의 문화적 공존을 인정하면서도 국민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경유하여 자신의 역사와 미학을 창안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학적 지평을 만들어냄에 있어 반둥회의는 ‘문화협력’이라는 공간을 생산했다.

그러므로 ‘반둥 정신(Bandung spirit)’이라는 개념을 좇아 ‘반둥 미학(aesthetics of Bandung)’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탈식민화를 둘러싼 개입의 프로젝트로서의 비동맹운동을 통해 대표되는 반둥 정신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정세에서 비롯된 후식민적인(post-colonial) 프로그램과 계승 혹은 단절의 관계에 있는 것인지 묻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제 전설이 된 오쿠위 엔위저가 감독한 “도큐멘타11”(2002)은 “다문화적 도큐멘타” 혹은 “후식민적 도큐멘타”란 얼마간 칭찬과 얼마간 비꼼이 섞인 평가를 받았다. 또 누군가는 이제 전설이 된 이 초대형 전시를 두고 “카셀에 착륙한 진실과 화해위원회 미술 세계 버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도큐멘타11을 위시한 일련의 구 제3세계 즉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의 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들과 관련된 예술 이벤트들이 반둥 미학의 연장으로 간주하기에는 어떤 깊은 간극이 가로지르고 있음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글로벌 아트’가 암시하는 예술적 실천의 공간적 상상으로서의 ‘지구(the globe)’와 그에 연계된 이데올로기로서의 글로벌리즘(globalism) 그리고 반둥 정신/반둥 미학이 상상했던 삼분된 세계 그리고 갈등과 적대로 구성된 세계에 반응하고 개입하는 방식이자 이념으로서의 국제주의 사이에는 깊은 거리가 자리한다. 그 간격 속에서 예술가와 예술제도, 기관, 그룹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어떻게 상상했으며 그 상상의 원리들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반둥 정신의 미술적 실천과 도큐멘타11이라는 맘모스 전시가 촉발한 다문화적, 후식민적인 전시가 집약하는 미술적 실천 사이에 놓인 어떤 단절이 존재하고 어떤 연속성이 있는지를 묻는 것은 긴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물음에 답하기엔 우리에겐 반둥 미학이라는 비동맹운동에서 비롯된 복잡하고 풍요로운 예술적 실천들에 무지할 뿐이다. 그리고 지난 몇 년 전부터 가까스로 우린 그러한 비동맹운동의 희귀한 사례들에 대한 소문과 흔적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국민국가의 연대기 위에서 식민주의를 소거 한 채 모더니즘의 기원과 흥망성쇠를 애타게 찾던 기약 없고 처량하기까지한 탈식민화된 나라의 ‘미술사 쓰기’로부터 벗어나 탈식민화된 세계에서의 새로운 미술적 성좌를 엿보도록 이끌어준다.

젱 솅티안(鄭勝天, Zheng Shengtian)은 앞서 언급했던 구겐하임 미술관 아시아미술위원회의 정기모임 자리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한 중국은 반둥회의가 열리기 전인 1952년 베이징에서 아시아 환태평양 평화 회의(Asia and Pacific Rim Peace Conference)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는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인도의 사이파딘 키츨루(Saifuddin Kitchlew), 터키의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 같은 예술계 명사들과 더불어 남미에서 온 여러 미술가들이 있었다. 이 회의 이후 중국 예술가 협회는 남미에서 온 미술가들을 초대한다. 그 중엔 칠레 벽화작가인 호세 벤추렐리(Jose Venturelli)가 있었다. 앞서의 회의 이후 그는 회의의 서기장으로 임명되었고 10년이 넘는 시기 동안 베이징에 거주했다. 그리고 그는 독특한 중국 지역 내의 남미 벽화 운동을 소개하고 중국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호세는 체 게바라의 초청으로 쿠바를 방문해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Camilo Cienfuegos> 벽화를 완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는 <전쟁의 악몽 그리고 평화의 꿈>을 그리지만 스탈린과 마오쩌뚱을 묘사했단 이유로 전시를 거부당하자 격분하여 이 그림을 중국의 마오쩌뚱에게 기부하였다. 또한 1956년에는 멕시코 전국조형예술전선(the Mexican National Plastic Art Front)이 조직한 전시가 베이징에서 열린다. 그리고 많은 젊은 중국 예술가들은 구 소련을 제외하곤 알지 못했던 외부의 예술을 접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혁명적인 내용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구 동구권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중국의 미술가들과 또 그 곳에서 온 미술가들이 미친 영향에 대하여 언급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그의 유일한 대립항으로 간주되었던 아방가르드나 동시대 미술과는 구별되는 제3의 흐름. 어쩌면 사회주의 모더니즘이라 부를 수 있을 그러한 숨겨진 흐름의 실천들. 그의 이야기는 천일야화처럼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중국에 한정된 일은 아닐 것이다. 비동맹운동을 실질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했던 자와할랄 네루의 인도 역시 연대의 미술이 번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네루 자신이 비동맹운동의 문화 외교의 일환으로 숱한 예술가들을 초대한다. 아마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네루의 요청으로 브라질리아에 앞서 찬디그라(Chandigarh)를 건설한 것이나 로베르트 로셀리니가 인도를 방문해 그의 숨겨진 걸작 <인도, 조국 India, Matri Bhumi(India, Motherland)>(1959)을 제작한 사례들일 것이다. 1972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개최된 유네스코UNESCO 세미나에서 미술관 노동자들은 문화적 재생과 정치적 해방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미술관(social museum)’ 혹은 ‘통합 미술관(integrated museum)에 관해 토론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떤 정치적 재현에 의해 제약되지 않고도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일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1979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는 1979년 쿠바 아바나에서의 제6차 비동맹회의에서 “문화적 장에서의 탈식민화를 위한 결연한 투쟁”을 언급했다. 그것은 지적 시민주의와 문화적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탈식민의 중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임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제3세계를 이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발언하는 장소로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아마 이러한 접근을 요약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기타 카푸르의 발언일 것이다. “멕시코, 브라질, 인도, 이집트, 나이제리아, 세네갈, 인도네시아, 일본 그리고 숱한 많은 나라들에서의 모더니즘들을 설명하여야만 한다면, 그것의 기원, 연대기, 전례와 일탈에 관한 관례적인 예술사적 서술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하한 보편적인 권한을 향한 요구란 게 있었다면, 서구 메트로폴리스 너머의 예술가들 그리고 실로 모든 곳(억압받고, 저항하며, 해방된 코스모폴리탄)으로부터의 예술가들이 ‘모던의 정치적 무의식’에 진입하여 그를 형성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전시는 모더니스트 미술사가들이 선호했던, 형상과 기호의 비대칭성을 통해 그것을 복잡하게 만들어내면서 격자 형태로 주제화된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곳이다. 20세기 중반까지 모더니스트 언어에 전권(全權)이 주어져 있었다면, 이는 다른 곳으로부터의 수많은 급진적인 파생물들(radical derivatives)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1971년 이미 칠레에서는 <연대미술관 Museo de la Solidaridad>이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훗날 <칠레와의 예술적 연대 국제 위원회 he International Committee of Artistic Solidarity with Chile>란 이름을 갖게 될 모임이 1971년 결성되었다. 칠레에 망명 중이었던 브라질 미술평론가 마리오 페드로사(Mario Pedrosa)가 위원장을 맡았던 이 모임에는 해럴드 제만(Harald Szeemann)을 비롯한 숱한 전시기획자, 비평가,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칠레 대통령 아옌데(Allende)는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평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칠레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며 전 세계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기증하도록 부탁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6백여 작품들은 남미 사회적 리얼리즘을 비롯해 엥포르멜, 추상표현주의, 개념주의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을 망라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도큐멘타5를 감독하고 있던 해럴드 제만은 참여 작가들에게 작품을 기증하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악스럽게도 신자유주의적 반혁명을 실험하기 위한 무대로서 칠레를 선택한 미국의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조정한 피노체트 군부의 쿠데타로 새로운 연대의 미술관을 창립하기 위한 시도가 무산되었을 때, 베니스 비엔날레는 칠레의 자유와 그 나라에 대한 연대를 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아르디니와 이태리 파빌리온에서는 포스터가 전시되었고 살바도르 아옌데 국제 여단(the Salvador Allende International Brigade)은 62점의 벽화를 제작했다.

그런데 몇 해 전 우리는 마치 어떤 미지에서 당도한 듯한 예술적 연대의 실천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비동맹운동의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비동맹운동의 윤리적 규범이던 연대의 가치를 선도했다. 이번에 무대는 아랍이었다. 2015년 바르셀로나 동시대미술 미술관(MACBA: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in Barcelona)에서 <지난 날의 격랑: 국제 미술의 서사들과 유령들 Past Disquiet: Narratives and Ghosts from The International Art>이란 전시가 열렸다. 작품은 한 점도 없는 도큐멘트와 아카이브만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1978년 봄 레바논의 베이루트 아랍대학교(the Beirut Arab University)에서 열린 <팔레스타인을 위한 국제미술전 the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for Palestine>을 추적하는 전시였다. 이 전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the Palestinian Liberation Organization)가 조직한 것이었다. 이 전시에서 소개된 200여점에 달하는 작품들은 다수의 유명 작가들 – 후안 미로(Joan Miró)(스페인), 레나토 구스토(Renato Guttuso)(이태리),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Ernest Pignon-Ernest)(프랑스), 로베르토 마타(Roberto Matta)(칠레) 등 – 의 작업이었다. 망명지의 미술관(museum in exile)을 위한 작품들로서 후일 독립된 나라가 되었을 때 설립될 미래 미술관의 씨앗이 될 이 작품들은 전 세계를 순회하게 된다. 그러나 전시가 개최될 즈음 레바논은 내전의 절정기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으로 컬렉션 대부분을 보관하고 있던 건물이 포격을 맞는다. 게다가 테헤란에서 전시되던 일부 작품들은 당시의 공항 폐쇄로 인해 돌아오지 못한다. 물론 전시 동안 새로운 작품들이 추가되면서 컬렉션은 늘어났다. 그러나 그 작품들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전무하다. 결국 전시와 관련된 카탈로그가 그 전시를 짐작할 수 있기 위해 남겨진 유일한 자료이다.

비동맹운동에서 비롯된 연대의 미술은 더욱 확장되었다. 니카라과에서의 산디니스타 혁명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기 위해 결집된 <마나구아 동시대 라틴아메리카 미술관 the Museo de Arte Latinoamericano Contemporáneo de Managua>이나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라지기까지 몇 년 간 국제적으로 순회했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예술가 the Artists Against Apartheid> 전시가 그러한 사례들일 것이다. 프랑스의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와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스페인 미술가 안토니오 사우라(Antonio Saura)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세계 예술가 위원회 The Artists of the World Against Apartheid Committee>를 조직한다. 그리고 세계 96개 국가의 예술가들이 기증한 100여 작품들을 가지고 전시를 조직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이 전시는 덴마크, 독일, 핀란드, 그리스, 아이티,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 튀니지, 영국, 미국 등을 순회한다. 그리고 1987년 일본의 대학생이던 레이 마에다(前田励, Rei Maeda)와 미술 도록 출판업자이던 프람 기타가와(北川, Fram Kitagawa)는 일본 전역에서 2년간 이 전시를 개최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낸다. 그리고 이들은 “율리아 펨펠(Julia Pempel)”이란 이동 저장고 형태의 개조 트럭을 이용해 일본 전역을 순회한다. 하루 혹은 일주일 간 열릴 수 있는 전시를 위해 맞춤 제작된 트럭을 이용하면서 이들은 오키나와에서 출발해 일본 전역을 순회한다. 어떤 때에는 체육관에서 또 어떤 때에는 마을회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5백여일 동안 194개의 장소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쿄의 국회미술관에서 마지막 전시를 개최했다. 이는 살바도르 아옌데 연대 미술관이 민중문화열차(tren popular de la cultura)나 문화의 집(casas de la cultura)와 같은 형태를 통해 미술관을 넘어선 전시를 조직하는데 진력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미술관을 넘어선 미술관의 모델은 “실험적 미술관학 그리고 통합 미술관(the integrated museum), 사회적 미술관(the social museum), 살아있는 미술관(the living museum), 노동자 미술관(the museum of the workers) 같은 개념들이, 이른바 전지구적 남반구에서 널리 논의되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는 보냐르 피스쿠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대의 아카이브 가운데 가장 눈부신 순간 가운데 하나는 1967-77년 사이 이란의 도시 쉬라즈-페르세폴리스에서 열린 <쉬라즈-페르세폴리스 예술제 Festival of Arts, Shiraz-Persepolis>일 것이다. 이란 이슬람혁명으로 인해 중단되고 또 그에 관련된 아카이브 역시 수십 년간 접근이 금지되었고, 국제적인 모더니즘 예술의 희귀한 교류 사례였을 이 축제는 완벽한 어둠 속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발리 마흐루지(Vali Mahlouji)와 그가 이끄는 그룹인 <마지막 10년의 고고학 AOTFD: Archaeology of the Final Decade>은 폐허 속에 망각되었던 후기 모더니즘의 믿기지 않는 이례적인 현장을 발굴하고 소개하였다. 2018년 방글라데시 다카 아트서밋(Dhaka Art Summit)에서 공개된 쉬라즈-페르세폴리스 예술제의 아카이브는 발리의 말처럼 “가장 독특한 변혁적인 상호문화적 교류 경험 가운데 하나이자 모르긴 몰라도 역사상 예술축제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다학제적 용광로”였던 그 축제를 드러낸다. 발리가 조직한 아카이브 전시의 제목인 <유토피아 무대 An Utopian Stage>는 국제적 아방가르드와 종족적 아방가르드 사이의 만남을 촉발하고 상호연관된 세계라는 전망을 북돋웠던 희귀한 역사적인 연대, 비동맹운동의 역사적 지층 속에 파묻힌 또 다른 단층을 시야 속에 드러낸다. 그리고 1960-70년대라는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문화교차적인 예술사와 반식민투쟁의 역사가 함께 서로를 독려하며 전개된 이 축제의 아카이브는 전시의 이름처럼 부활을 기다리며 잠재하고 있던 유토피아적 충동의 매립지인지도 모른다.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인도의 카타칼리 무용(kathakali dance), 인도네시아 발리의 가믈란 연주단과 존 케이지(John Cage), 테라야마 슈지와 우스만 셈벤(Ousmane Sembène), 사티야지트 레이(Satyajit Ray), 마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세르게이 파라자노프(Sergei Parajanov)가 모두 한 자리에서 모이는 무대가 어떻게 유토피아적 무대가 아닐 수 있을까. 쉬라즈-페르세폴리스 예술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종족적인 예술을 서구의 모더니즘적 예술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교류할 수 있는 문화적인 항으로서 구성하면서 식민주의의 비호 속에서 서구의 메트로폴리스에 은거하던 모더니즘 예술을 타자와 조우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이는 자유주의적인 다문화주의가 상상하는 본원적인 정체성들 사이의 다정한 공존과도 다르고 근본주의가 위협을 겪고 있다고 강박적으로 상상하는 그 정체성-문화와도 다른 것이었다. 이는 모더니즘이 꿈꾸던 보편문화라는 환상이 단지 환상에 그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던 기회가 실존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식민적 투쟁을 통해 문화교류의 궤도에 진입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예술은 서구의 모더니즘 예술과 만나며 자신의 예술적 의식을 보호하고 있던 서구 모더니즘을 탈식민화하도록 함은 물론 그를 통해 모더니즘을 재모던화하도록 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요모순!

비동맹운동의 권역 속에 있던 숱한 예술적 실천의 유산은 망실, 실종, 파괴되어 더 이상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유산들은 문서와 사진으로 혹은 흐릿한 기억으로 누군가의 의식 속에 잠겨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활동들은 연대의 실천들이었기에 언제나 순회하고 이동하며 먼 곳의 어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국민국가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 서사 속에 기입되기 어렵다. 해방과 변혁을 가능케 하는 정치적 상상이었던 민족이라는 상징이 빛을 잃고 그 자리를 종족 정체성과 종교적 미망이 차지하게 될 때 연대와 단결(unity)의 실천은, 범아프리카주의, 범아시아주의, 범남미주의와 같은 이상을 헛된 꿈으로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용케도 글로벌 아트는 기쁘게 움직인다. 그것은 연대와 단결의 꿈을 찬탈한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총체성의 논리에 편승한다. 총체성이란 개념을 대하면 손사래를 치는 이들을 향해 어느 대담 자리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렇게 대꾸한다. “후기 자본주의의 바로 그 논리가 절대적으로 총체화하는 논리로서 모든 것을 관통해 들어가 모든 것과 연관을 짓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총체성을 향해 가도록 추동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사고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아니라 대상과 체제 자체의 성격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총체성이란 개념에 대해 우리가 특별히 호의를 품거나 적의를 쏟을 이유가 없다. 그것은 객관적인 폭력이고 자신을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생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적인 적대와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분리된 채 보이기만 한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오는 이들을 난민과 불법이주자로 경계하는 분할된 세계란 실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모순이 펼쳐지는 세계이다. 해묵은 마오쩌뚱의 변증법적 사고를 빌자면 오늘날 전지구적 남반구에 속한 나라들에서의 주요 모순은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간의 모순이다. 그러나 그 모순과 대결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실천은 관두고라도 지적이고 예술적인 실천 역시 이 모순과 대면하기를 꺼린다. 스타 건축가들이 설계한 압도적인 위용의 미술관들이 ‘글로벌 컨템포러리’를 진열하는 동안에도 동시대 미술의 어느 곳에선 두더지처럼 그러한 모순의 기원을 탐사하는 실천이 계속된다. 비동맹운동에 호응하여 이뤄졌던 숨 가쁜 예술적 실천들의 파편들을 찾아다니며 연대의 아카이브를 탐사하는 작가와 연구자, 기획자들의 작업들이 이러한 실천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누락된 기억을 복원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더 이상 재미있고 흥분될 것을 찾기 어려운 지루한 오늘의 세계로부터 잠시 외출하고자 건져 올린 타임캡슐도 아니다. 그것은 기타 카푸르의 말처럼 어쩌면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재서술 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자신의 용법을 쇄신하여 온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은 담론적 ‘방법’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이 때 회고적, 주해적, 투영적인 미술사는 그저 빈틈을 메울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떤 이미 확립된 미술사 속의 틈새를 메우고 있는 게 아니다. 대안들은 감히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의 예술적 실천과 함께 시작해야만 한다. 예컨대, 제3세계 혹은 지금 우리가 ‘전지구적 남반구’라고 지칭하는 곳으로부터의 예술적 실천.” 실은 그것은 누락된 기억을 회수하는 일만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방가르드란 개념을 통해 회전하고 요동치던 미술사를 다시 구축하도록 촉구하는 천둥 번개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도시재생사업을 위한 들러리가 된 채 소셜미디어에서의 해시태그 숫자를 헤아리며 자신의 성패를 가늠하는 미술관이 언제부터인가 포기하고 양보했던 급진적 전시와 관람의 유령들과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동맹운동의 미술은 그런 점에서 글로벌 컨템포러리의 숱한 병리를 진단하도록 과거로부터 도착한 구급대원이라 할 수 있다.

_국립현대미술관 새로 출간되는 저널을 위해 기고한 글. 수정 중인 글입니다. 인용은 출판된 글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