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변증법의 시금석이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 신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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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의연한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또는 연합적 인류 die vergesellschafttete Menschheit이다.”(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10)

  1. ‘인류세’ 이후의 유물론: 다시 엥겔스를 읽는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를 이해하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면 어떨까. 뉴런과 원자에서 행성과 인공지능에 이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합당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 기준을 충족할 때 온전한 마르크스주의가 될 수 있다면? 만일 이러한 요구가 터무니없고 지나친 것이라고 반발하며 마르크스주의란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사회관계의 비판에 불과한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여야 하는 것일까.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만물의 유물론’을 구성한다고 강변한다면 이는 독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배격해야 마땅할까. 이러한 잇단 질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이론적 논쟁에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는 그다지 생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의 뒤꼍에서 마치 배음(背音)처럼 윙윙거렸던 어떤 질문(마르크스주의는 역사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한 것인가 아니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공식 ‘철학’과 무관한 역사유물론일 뿐인가)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이른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구(舊)소련의 공식마르크주의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로서 간주되어 왔다. 또한 이는 나아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를 비롯해 엥겔스의 저 악명 높은 ‘자연변증법’에 대한 고발과 거부를 둘러싼 오랜 쟁점과 관련되어 있다. 비록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친밀한 지적인 협력자로서 활동하였고, 엥겔스 자신의 지적 업적을 인정한다하더라고 마르크스의 사고와 엥겔스의 사고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널리 퍼져왔다. 물론 엥겔스의 지적 이력에서 가장 마르크스와 먼 것으로 지목된 것은 그의 자연변증법일 것이다. 그것은 나쁜 자연주의(naturalism)로 채색되어 있고 마르크스를 ‘만물의 유물론’을 고안한 인물로 오인되도록 한 모든 오해의 원천이었다.

모든 정신, 사고, 표상, 의식 등을 신경뉴런의 신경생물학적인 메커니즘의 작용 효과로 환원하는 인지주의(오늘날 성행하는 기계적 유물론의 주된 형태)나 인간의 사유 활동에 고유한 것을 자연에 투사하면서 자연에 어떤 일반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보편적 자연이라는 대상을 상정하는 자연주의(naturalism)을 선뜻 받아들이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외적 세계나 자연의 독자성을 손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은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것(푸코나 라클라우와 같은 담화적 유물론을 포함하여)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도 결국엔 뇌라는 물질의 활동에 불과하다는 식의 극단적인 인지주의나 생물학주의적 입장을 유물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이 이러한 유물론과 구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유물론인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본성을 명확히 해명하고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이 항상 지니게 되는 [철학적] 목표이다. 즉 물질의 법칙에 기초해 유물론을 정초해야 하는가(엥겔스, 플레하노프, 레닌) 아니면 이와 정반대로 행위와 표상의 사회․역사적 조건들에 대한 고려 위에서만 유물론을 정초해야 하는가(안토니오 라브리올라, 게오르그 루카치, 안토니오 그람시), [다른 방식으로 이 양자택일을 표현한다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하나의 과학과 하나의 철학 원리로 개념화해야 하는가(루이 알튀세르) 아니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이데올로기와 이 이데올로기가 생산하는 허상에 대한 비판의 원리로서만 개념화해야 하는가(테오도어 아도르노) 하는 양자택일이 그것이다.”(뢰비 외, 2019: 136-137)

 

위에서 인용한 짧은 글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화해할 수 없는 분기(分岐)를 잘 요약한다. 물질의 법칙에 기초한 유물론인가 아니면 행위와 표상의 사회․역사적 조건들에 대한 고려 위에 정초된 유물론인가. 또는 과학과 철학의 원리로서의 유물론인가 아니면 이데올로기 비판의 원리로서의 유물론인가. 우리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를 분할하는 유물론적 사고의 전통 가운데 전자에 해당되는 것, 즉 엥겔스 이후의 유물론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년 대두하는 신유물론을 해석하고 비판함에 있어 매우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신유물론의 부상은 다시 한 번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은 다른 유물론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다양한 목소리를 내며 출현하고 있는 신유물론과 어떻게 다른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자신의 유물론 안에 남아있는 인간중심주의, 인간예외주의, 비판주의 등을 말끔히 소제하기 위하여 신유물론으로부터 배움을 얻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신유물론이 유물론적이기는커녕 실은 오늘날 새롭게 부상하는 관념론이자 전-비판적인 독단적 형이상학과 크게 다른 바 없는 궤변이라고 치부해야 할까. 아니면 신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처분한 “자연변증법”이라는 엥겔스의 유물론적 사변이 또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직접 답하고자 한다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지만 동시에 꺼림칙한 대상으로 취급되어온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방문한다. 알다시피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을 통해 개진한 유물론은 과학주의나 물리주의, 관조주의 등의 숱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저 유명한 루카치의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비판을 필두로 많은 이들이 엥겔스를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애써왔다. 이를 통해 자연은 생산과 노동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즉 실천과 노동 혹은 매개라는 개념을 통해 주어지는 대상으로서 간주되어 왔다. 나아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사고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변증법을 자연 자체에 투사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는 마치 모순과 적대라는 사회적 실재에 고유한 변증법을 자연과 세계에 적용하는 부조리한 이론적 과대망상과 다름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우리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대한 그와 같은 독해를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거부하도록 이끈 결정적인 논거로서의 그의 ‘헤겔주의’와 그를 둘러싸고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을 간략히 검토한다. 엥겔스가 답습한 것으로 알려진 헤겔주의란, 헤겔의 자연철학이자 그의 범논리주의를 가리킨다. 특히 ‘자연철학’은 칸트의 초월적 전환 이후 당연시 되었던 ‘반(反) 존재론’을 거스르는 추문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헤겔 철학을 이해하는 이들 사이에서 헤겔의 자연철학은 당연히 제거되거나 추방되어야 할 헤겔 철학 내부의 오류로 간주되고 헤겔 철학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주체의 해석학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헤겔에서 제거되어야 했던 그 자연철학에 씌워진 혐의는 또한 엥겔스의 자연철학에 씌워진 혐의와 동일한 것이다. 물론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바로 그 헤겔의 자연철학에 연루되었다는 것으로 인해 객관주의, 실증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비난받았을 뿐 아니라 또 역으로 관념론으로 비난받았다. 우리는 이 글에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둘러싼 논쟁을 이끈 저 유명한 루카치의 평결, “헤겔의 잘못된 예에 따라” 주관적 변증법, 사회․역사의 변증법을 객관적 변증법, 자연의 변증법에 부여했다는 비판(그러나 많은 이들에 의해 오류라고 기각 당했던)을 멀리하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수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신유물론과 대립하며 변증법적 유물론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하는 이론적 시도들을 선취한 사례로서 읽고자 한다.

2. “자연변증법 논쟁”: 루카치 이후

엥겔스 없는 마르크스? 만약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많은 이들은 엥겔스라는 얼룩이 지워진 마르크스를 얻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처럼 엥겔스를 마르크스로부터 분리시키고 사회-역사이론으로의 마르크스주의 혹은 물신주의와 소외, 이데올로기와 표상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구축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헤게모니 하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후견자이자 그가 남긴 원고를 편집한 지원자로서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 있도록 종용받았다. 물론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나 가족, 사유재산, 국가와 같은 저작들을 치하하기는 해도 그것은 사상가로서의 엥겔스라기보다는 당대의 사회 현실에 대한 평범한 비평가로서의 엥겔스라는 초상을 그려낸다. 물론 이는 최근 새로운 주장들에 직면하여 도전을 받고 있다.

엥겔스가 돌아오고 있다. 이를테면 “위기로 가득 한 그리고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시대를 정의하는 투쟁들을 밝혀주고 희망을 고취시켜줄 (마르크스와 더불어) 엥겔스의 귀환을 목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존 벨라미 포스터는 단언한다.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 포스터는 고대 그리스의 유물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초기 연구에서부터 자본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사회의 물질대사 균열(metabolic rift)’이라는 결정적 주장을 정식화할 수 있도록 했던 독일 농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의 연구에 이르는 광범한 마르크스의 과학 연구를 추적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당대의 자연과학 연구 성과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둘 사이에 긴밀한 협력 관계가 있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마르크스-인용자) 유물론을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하려고 하거나 자연-물리과학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를 처음부터 일체 거부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영역에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독특하고 실천적 성격을 띠었다. 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존재하는 자유(와 소외)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인문과학의 사상가들은 사회다윈주의의 변종인 기계론적 생물학주의와 같은 기계론을 거부하는 와중에, 점차 실재론과 유물론을 거부했고, 사회세계와 관계들이 전부 인간의 실천으로 구성된다는 견해를 채택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 세계를 침범하는 자연의 여러 측면들을 포함한 – 지식의 대상들(인류의 사회적 구조물들과는 별개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지식의 대상들)을 쉽사리 부정했다.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이러한 상황은 관념론으로 방향전환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것은 엥겔스에 반대하여 마르크스주의 안에 존재하는 유물론적 자연관에 대한 책임이 마르크스가 아닌 엥겔스 혼자에게만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변증법은 오직 실천과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오직 사회인간 세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으로 등장했다.”(포스터, 2016: 37-38. 강조는 인용자).

위에서 벨라미 포스터는 이른바 ‘서구마르크스주의’의 편향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한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으로터의 일탈로서, 이는 “사회세계와 관계들이 전부 인간의 실천으로 구성된다”는 견해를 취하는 과정에서 실재론과 유물론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점차 엥겔스로부터 마르크스 사이의 거리를 벌여놓는 과정이기도 했음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그는 추문에 가깝던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명예 회복시킨다. 변증법은 오직 인간적 주체의 세계 그리고 그 내에서의 실천에 국한시킬 수 없다. 당연히 그는 자연에서의 변증법을 단언했던 엥겔스를 방어한다. 그러나 포스터의 주장에서 만회된 자연변증법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그는 자연의 유물론을 위해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할뿐 아니라 그러한 마르크스에의 접근을 가로막았던 주문(呪文) 가운데 하나였던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의 금지 혹은 거부에서 벗어나야 함을 요청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연에 대한 유물론으로의 전환을 위해 재발견된 엥겔스는 엥겔스 스스로가 자신이 떠맡겠다고 말한 것 –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발견과 더불어, 유물론은 자신의 형태를 바꾸어야만 한다.”(엥겔스, 2010: 369) – 을 또한 우리 스스로 떠맡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똑같이 제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최근 지젝과 같은 이들이 자신의 글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인류세라는 생태적 위기와 더불어 자연 혹은 물질적 세계에 관한 인식과 표상이 철저히 변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유물론에 이르러야 할까.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앞서 지적했듯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물론 철학자들이나 사회이론가들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분리시킬 필요가 있음을 끈질기게 강변하여 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차이에 대한 논쟁(자본의 편집과 해석에서 엥겔스가 범한 오류와 착각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려니와 역사유물론에 대한 엥겔스의 이해 방식과 마르크스의 것 사이의 차이에 대한 토론 등)은 두 저자들 사이에 놓인 차이를 거듭 확인한다. 그러나 숱한 엥겔스의 폐해, 이것이 지나친 표현이라면 오류 가운데, 가장 나쁜 부분은 무엇보다 “자연변증법”일 것이다. 칸갈스가 “학술적 논쟁이 싸움터가 되어버리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20세기에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의 수용사가 바로 그런 예이다. 사실 나는 마르크스주의 연구 내에서 그만큼 갈등과 혼돈에 사로잡혔던 저작을 알지 못한다”고 술회하리만치,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차이를 분별하도록 이끄는 결정적 시금석으로 구실했다.(Kangal, 2019: 215). 그리고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의 노선을 획정하는 좌표와 같은 역할까지 하였다. 포스터의 말처럼 “자연변증법이란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적 사유 내부에서 주요한 모순을 이루며 그 전통을 분할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Foster, 2008: 50)

마르크스를 엥겔스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기도는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조야한 존재론화된 마르크스주의를 산출한 주범이 엥겔스라는 혐의에서 비롯된다. 이런 생각에 따를 때,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기괴한 철학적 사변은 마르크스주의를 그러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역사적인 사회관계를 넘어 자신의 이론을 확장하고자 한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허울을 쓴 기초존재론 어쩌면 만유(萬有)존재론이라 불러도 좋을 이론적인 기획을 가능케 한 과오는 바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이라는 프로젝트에 돌려진다. 엥겔스는 통합 과학이라는 실증주의적 관념에 부응하는 천박한 형태의 다윈주의에 기반한 세계관(Weltanschaung)을 제출한 반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 소외에 관한 사회역사적인 분석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지적인 유대를 신화로서 치부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이른바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되는 이른바 구 소련으로 대표되는 동구권의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 게오르그 리히트하임의 말을 따르자면 서구에서 실증주의가 저지른 일을 동구에서는 엥겔스에 의해 해석된 마르크스주의가 저질렀다는 것이다.(Lichtheim, 1971: 73)

그러나 엥겔스라는 짐에서 벗어난 마르크스, 존재론적인 유물론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관계의 변증법에 한정된, 그리고 물신주의로 집약되는 표상과 이데올로기에 물질적 실천이 미치는 효과를 제시함으로써 유물론을 ‘비판’의 유물론으로 한정하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물론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 철학의 역사를 추적한 쉬한의 표현을 빌자면 친-엥겔스파(Pro-Engels)와 반-엥겔스파(Anti-Engels)의 논전은 또 하나의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논쟁의 무대일 것이다.(Sheehan, 1985: 53-64)).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팀파나로는 강력한 엥겔스 옹호자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엥겔스 없는 마르크스주의’을 찾아 나선 이들이, 이는 응당 당연한 일일 진대, ‘마르크스 없는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고야 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역설한다.(Timpanaro, 1975: 132). 나아가 그는 엥겔스를 기소하는 이들을 이렇게 빈정거리기도 한다.

“그 특별한 순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거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떠넘길 수 있을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바로 그 누군가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이다. 조야한 유물론? 결정론? 자연주의적 형이상학? 구태의연하며 도식적인 헤겔주의? 우리가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알고 있다면 그는 이 모든 악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 드러난다.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화하고 통속화하려 집착하며 그를 오염시킨 것은 바로 엥겔스이다. 그렇기에 엥겔스는 유물론적인 바닥짐으로 인해 찌부러져 버리고 만 반면, 마르크스는 우리 문화계에서 없어선 안 될(de rigueur) 심오하면서도 미묘한(그리고 역시 아직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대 지식인의 풍모를 띠고 있다.”(Timpanaro, 1975: 74)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에 미달한 엥겔스라는 혐의에 저항하며 팀파나로는 엥겔스가 당시 자연과학에서 비롯된 다양한 성취들이 역사이론과 사회이론으로 전용될 수 있는 잠재성을 상당히 내장하고 있음을 민감하게 자각하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이를테면 편협한 스펜서적인 진화주의나 분별없는 경험주의(엥겔스가 마르크스와 더불어 곧잘 기계적, 관조적 유물론이라고 비난했던)라는 외양을 띠고 등장한 당대의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가 제기한 역사적 사회관계에 대한 분석과 상통하거나 심지어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질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팀파나로가 보기에 엥겔스가 다윈의 진화론이 제기한 자연의 역사성에 대한 분석을 적극적으로 영유하면서 자연의 유물론을 심화시키고자 한 것은 당연하고 또 옳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하는 기계적 유물론의 유혹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역사유물론과 자연과학에서 비롯된 새로운 유물론적 성취를 결합함으로서 역사유물론을 보다 심화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팀파나로가 보기에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이 처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엥겔스가 자신의 자연에 관한 유물론을 구축하고자 했던 기획의 이름일 ‘자연변증법’에서 지나치게 헤겔주의적인 접근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루치오 콜레티가 엥겔스의 유물론에 대해 내세운, 즉 루카치 이래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엥겔스를 기소하며 전가했던 죄목(실증주의, 객관주의 등)과 반대로, 그가 (루카치의 표현을 빌자면 “헤겔의 잘못된 예에 따라 following Hegel’s mistaken lead”) 유사 자연철학에 가까운 입장에 기운 채 자연을 파악하고자 했다는 비판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다. 즉 엥겔스는 너무나 유물론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변적인 자연철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유물론을 전도함으로써 관념론에 빠져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기각한 최초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엥겔스의 유물론 기획에 관한 팀파나로와 반대의 입장에 서있지만 동시에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의 과오를 헤겔의 사변철학 혹은 자연철학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지점에 서있는 루카치이다. 콜레티와 팀파나로는 장대한 자연의 원리로서 헤겔 식 자연철학적 관점에 의지한 채 엥겔스는 자연변증법을 구성했다고 비난하는 반면(관념론자로서의 엥겔스) 루카치는 사회와 역사에만 적용될 수 있을 변증법을 자연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이유로 엥겔스를 힐난한다.(자연주의자로서의 엥겔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 수록된 “정통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란 글에서 저 유명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는 간단히 ‘각주 6번’으로 회자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방법(변증법을 가리킨다 – 인용자)을 사회․역사적 현실에 한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변증법에 관한 엥겔스의 서술에서 생겨나는 오해는 본질적으로 엥겔스가 헤겔의 잘못된 예에 따라 변증법적 방법을 자연인식에까지도 확장했다는데 기인한다. 변증법의 결정적인 규정들, 즉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 이론과 실천의 통일, 사고에서의 범주들의 변화의 기반인, 범주들의 기체(基體)의 역사적 변화들의 규정들이 자연인식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루카치, 1999: 68).

각주에서의 고작 짧은 언급만으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대한 일종의 이론적 파산 선고가 내려진 것처럼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루카치의 이 짧은 서술은 곧 엄청난 논쟁을 파란을 불러일으켰고 제5차 코민테른에서의 루카치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위한 중요한 논거로서 참조되었으며, 나아가 구 소련의 데보린 학파들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철학자들에게서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둘러싼 ‘엥겔스 논쟁(Engels debate)’(Kagaal, 2019: 216, 2020: 43)에서 루카치의 짤막한 – 그리고 훗날 스스로 철회했던 – 소견을,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재구성하는 이론적 좌표로서 부연하고 또 공고히 한 것은 마르크스의 자연 개념을 쓴 알프레드 슈미트일 것이다.(Schmidt, 2014).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요한 논저 가운데 이상하리만치 간과되었던 이 저작은 소수의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들 사이에서만 관심을 얻고 토론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는 지리학자들이 도시와 농촌의 분화와 적대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지리 정치와 정치생태학을 통일적으로 사고하고자 할 때 마르크스주의의 자연 인식이 중요한 쟁점이었을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이다.(최병두, 2009. 스미스, 2017. Buckett, 1997. Foster & Clark, 2016.)

슈미트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독창적인 인식을 ‘세계관(Weltanschaung)’으로 문제적으로 확장해 버림으로써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변증법을 다루는 방식 즉 유물론적 변증법을 정치경제학의 내용으로부터 떼어놓지 않았던 것에 비해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그 주제(정치경제학-인용자)에 외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으며”(Schmidt, op. cit.:52), 이는 엥겔스가 “통합 과학(unified science)”(ibid. 185)라는 실증주의적 이상에 따라 구축된 체계를 겨냥함으로써 비롯된 오류라는 것이다. 슈미트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자연 개념은 사회역사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자연은 오직 사회적 노동의 형식을 통해서만 고려되었으며 그것은 인간적․사회적 목적들의 망 속으로 끌어들여지는 한에서 합당한 것이었다.(“자연에 관한 모든 다른 언명들은, 그것이 사변적이든, 인식론적이든, 아니면 과학적인 것이든, 이미 사회적 실천, 인간의 기술적-경제적 영유의 양식들의 앙상블을 전제한다.”(Schmidt, ibid.: 15)) 그렇기 때문에 자연은 전(前)변증법적이며 자연을 변형하며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생산함으로써만 변증법적이게 된다. “변증법적일 수 있는 것은 자연을 인식하는 과정뿐이며 자연 그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 그 자체는 부정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성은 오직 노동하는 주체와 함께 하는 자연 속에서만 출현하다. 변증법적 관계는 오직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만 가능하다.”(ibid. 195, 강조는 인용자).

나아가 슈미트는 자연변증법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는 바, 순수하게 객관적인 변증법은 변증법과 유물론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방금 인용했듯 변증법적 관계라는 단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객관주의란 어쩔 수 없이 비변증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연에 관한 그 어떤 언술도 이미 사회적 실천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비존재론적 유물론’에 해당된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단지 어떤 존재론적 기체 즉 정신을 다른 것 즉 물질로 대체하는 ‘자연화된 헤겔주의’로 간주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에서 전개된 자연 개념과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이 제시하는 자연 개념 사이의 차이를 조회한 슈미트의 탐색은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적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연에 대한 관점을 대조하면서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가공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슈미트는 엥겔스가 스스로 자신의 유물론을 언급하면서 말하는 “새로운 유물론”이나 “현대적 유물론”과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이 같은 것이 아님을 규명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의 특정한 노선을 확정하고자 한다.

“정신의 변증법은 실재 세계, 즉 자연과 역사의 운동 형태의 반영일 뿐이다.”(엥겔스, 1987b: 485). 혹은 “변증법은 자연, 인간 사회와 사고의 운동과 발전에 관한 일반 법칙에 관한 과학에 다름 아니다.”(엥겔스, op. cit.: 131). 아마 이 두 문장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요약하는 가장 악명 높은 명제들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이를 듣자마자 헛소리라고 타박하며 엥겔스의 주장을 극히 당혹스러운 것으로 치부할 것이다. 엥겔스는 여기에서 정신의 변증법이 정신에 외적인 세계의 ‘반영’이라는 주장을 제시할 뿐 아니라 자연과 역사를 그 외적 세계의 두 가지 부분으로 규정하면서 변증법이 자연과 역사 모두를 망라한다고 단언한다. 자연과 역사. 이 두 가지 항은 외적 세계로서 동일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유물론자는 역사적 사회뿐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자연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고유한 이론적 대상으로서 자격을 갖는 것일까. 그렇다면 엥겔스는 ‘자연학(physics)’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혹은 ‘자연유물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가능하다는, 너무나 도발적인 과제를 제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엥겔스는 자신의 이같은 주장이 마르크스와 전연 무관한 것이 아님을 누차 역설한 바 있다. 엥겔스를 마르크스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소망과는 달리 엥겔스는 여러 곳에서 자신의 자연변증법이 마르크스로부터 승인받은 것이며 또한 공동의 협력을 통해 산출된 것임을 역설한다. 엥겔스는 동시대의 자연과학의 성과에 의지해 자신의 자연변증법을 가공했다. 따라서 그의 자연변증법은 자연과학에 관한 최종적인 메타 ‘이론’도 아니고, 자연법칙에 대한 완결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었음에 분명하다. 앞서 인용했듯이 그는 당대의 자연과학의 성과에 의지해 유물론을 갱신하고 현대화하고자 했을 것이다(이를테면 그는 자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종종 ‘현대적 유물론(modern materialism)’이라 부른다).(엥겔스, 1987a: 25-26, 228. 1987b: 6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둘러싼 해석은 특히 소련의 공식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인 자연과학의 성배처럼 간주되었다. 반면 엥겔스를 거부한 이들은 그것의 과학주의, 자연주의, 독단주의 등을 들먹이며 그의 자연변증법을 통째로 기각하였다.

“이러한 현대 유물론(modern materialism), 즉 부정의 부정(고대의 자생적 유물론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근대적 관념론, 그리고 그의 부정으로서의 근대적 유물론 – 인용자 주)은 단지 옛 유물론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2천년에 이르는 역사뿐 아니라 이천년에 이르는 철학 및 자연과학의 사유-내용을 이 옛 유물론의 영속적인 기초에 더하는 것이다. 이는 철학이 아니라 세계관(world outlook)으로서 그것은 외따로 떨어진 과학들 중의 과학 안에서가 아니라 실제 과학들 속에서 자신의 타당성을 수립하고 또 응용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철학은 여기에서 ‘지양된다’, 즉 극복됨과 동시에 보전된다. [D. K. G. 503]: 형태란 점에서는 극복되고 내용이라면 면에서는 보전되는 것.”(엥겔스, 1987a: 128-129).

  “이런 적대와 차별 – 그것들이 비록 자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더라도 – 단지 상대적 타당성만 지닌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 그렇게 상상된 경직성과 절대적 타당성은 오직 우리의 반성적인 사고에 의해 자연 속으로 도입되어 왔다는 것,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변증법적인 이해의 핵심이다. 자연과학으로부터 누적된 사실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에 이르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고의 법칙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이러한 사실들의 변증법적 성격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보다 손쉽게 이에 이를 수 있다. 아무튼 자연과학은 지금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고 따라서 더 이상 변증법적 일반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엥겔스, 1987a: 14).

방금 인용한 글에서 엥겔스는 많은 이들이 거부했던 그 쟁점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다시 루카치의 표현을 빌자면 ‘헤겔의 잘못된 예에 따라’ 사변적 자연철학의 노선에 참여하면서 ‘자연의 변증법’을 역설한다. 이 때 변증법이란 자연적 대상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는 루카치와 슈미트 등의 편에 선다면, 자연변증법은 즉각 부조리한 주장으로 배척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예로 간주되었던 헤겔의 자연철학이 실은 오늘날 최신의 과학적 주장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헤겔의 자연철학 혹은 사변철학이 짐작처럼 터무니없는 궤변이 아니라 오늘날 신유물론을 비롯한 다기한 유사 유물론적 사고들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도록 한다면 어떨까. 따라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이 헤겔의 사변철학에 준거하고자 한 것은 잘못된 예를 따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따라야 할 예를 올바르게 선택한 것이라면? 변증법을 주체성의 변증법으로 환원하는 것이야말로 일면적이며 자연 혹은 존재를 사유, 정식, 의식에 외적인 대상으로 제한해 버림으로써 자연의 내적 적대와 모순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주체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조차 제약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도발이 거칠고 성급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시도해 볼만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인식론과 비판의 공정으로 제한하지 않고 대담하게 존재론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도록 하는 것이다.

3. 자연변증법을 만회하기

“‘유물론자 마르크스에게 … 자연과 자연법칙은 모든 인간 의식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이러한 법칙은 ‘사회적 범주의 도움이 있어야만 정형화된다. 자연법칙의 개념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노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지식의 대상이 일차적 자연과 이차적 자연의 분할이듯이, 과학(지식을 전유하는 과정) 또한 통합된 노력이다. 마르크스의 방법론적 핵심은 변증법이지만 대상을 사회과학으로 한정했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의 변증법에 관한 의문을 즉각 제기한다. 변증법적 자연과학은 가능한가? 엥겔스는 자연적 과정 자체를 변증법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의문에 답하려 했다. 그 결과로 도출된 자연의 변증법을 슈미트는 정확하고 통찰력 있게 비판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자연의 변증법은 공식적인 소비에트 교리로 명문화되어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격상되었다. 슈미트는 이를 엥겔스 개념이 가지는 독창적인 이론적 지위의 징후라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은 주체의 문제가 외부에 반드시 남기’ 때문이다. 자연에 변증법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어떤 객체를 그 주체에서 분리하는 것과 같이, 자연을 인간 사회의 외적인 것으로 이미 전제해 변증법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 자체를 부정한다. ‘인간과 무관한 외적 자연의 변증법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변증법의 모든 본질적 계기(객체와의 관계에서 주체)가 이 경우 부재하기 때문이다.’ 대신 ‘자연의 변증법’은 인간 사회와 자연의 신진대사적 상호작용에서 등장한다.”(스미스, 2017: 64-65).

닐 스미스는 불균등발전에서 슈미트의 관점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구제하는 아슬아슬한 생각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변증법은 오직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란 전제는 고수된다. 단지 변경되거나 추가되는 것은 인간 사회와 자연의 신진대사적 상호작용에서 식별할 수 있는 자연의 변증법이다. 즉 자연은 사회와의 물질대사적 상호작용과 더불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자연이자 ‘사회적’ 자연으로서 남는다. 닐 스미스의 전매특허에 가까운 표현을 빌자면 이는 사회에 의해 ‘생산된’ 자연이다. 이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보전하지만 보편적인 존재론으로서의 자연변증법은 아니다. 사회적 실천을 통해 구성된 ‘역사적 자연’이라는 관점을 견지하되 이때의 자연은 사회적 실천(물론 여기에서 규정적인 사회적 실천은 생산양식을 통해 조직된 노동과 생산이다)에 의해 규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정도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자연으로서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스스로 발버둥치는 외적 자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변증법을 온전히 탈환하는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는 자연과 사회의 변증법이라는 원리를 여전히 고수한다. 노동, 생산, 매개, 그리고 감각적 실천 등의 개념은 여전히 자연과 사회가 매개되어야 할 자율적인 외적 대립항으로 정립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 규정에 의해 자신의 동일성이 변형된 자연이란 점에서 여전히 사회화된 자연에 머물러 있다. 이는 여러 다양한 과학들에 의해 파악된 즉 과학적 지식에 의해 상징화된 자연들을 지시하지 그 너머에 있는 자연, 자연과학으로 대표되는 지식들에 의해 상징화되기 이전의 자연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부정된다. 이는 역시 자연변증법을 재소환하고자 애쓰는 포스터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사회과학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생태학 사유가 부활하고 있고, 이것은 주로 생태학적 관계의 정치경제학에 집중되어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은 과학계의 급진적 유물론자들이 왕왕 견지하고 있는 더 깊이 있는(과학적 입장에서뿐 아니라 철학적 입장에서 더 깊이 있는) 유물론과 보다 발전된 생태학적 유물론에 대해 거의 알고 있지 못하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내에서 이룬 생태학적 사유의 거대한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마르크스의 주장 중 상당수를 재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적 자연관과 유물론적 역사관 사이의 관계(다시 말해 노동 소외와 자연 소외 사이의 관계)라는 주제는 거의 논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연변증법’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만든 장벽이 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 자체 내에서 여전히 건재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방향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 탐구는 모두 처음부터 방해받지 않을 수 없다. … 또한 환경사회주의자들의 경우, 단순히 자본주의 경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너무나 빈번했다. 그들은 생태학적 문제들을 볼 때, 지구에서 사는 종과 ‘지구의 운명’이라는 더 큰 문제를 중심에 놓기 보다는, 자본주의 경제가 이 문제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일면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분석은 과학과 연결되는 접점으로 종종 열역학 분야, 즉 에너지학과 그것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들었다. 반면 신기하게 진화생물학의 모든 주제는 생태학적 주제들과 별개인 것으로 비춰졌다. 그리고 다윈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포스터, 2016: 525).

여기에서 포스터 역시 인간에 대하여 외재적인 자연이라는 소박한 유물론을 여전히 버리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가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따지는 데 골몰하면서 지구에 사는 종과 지구의 운명이라는 문제를 따져보지 않았다고 질타한다. 그러나 그 때에도 역시 그는 스미스와 유사한 관점을 견지한다. 자연은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대상으로서 생성된 것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한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문자로서의 자연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앞의 생태마르크스주의 관점들은 자연을 사회적, 역사적 자연에 한정한다. 칸트적인 어법을 빌자면 여전히 현상(appearance)으로서의 자연, 그리고 현상에 대한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머문다. 그러나 포스터나 스미스가 제안하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자연변증법에 기댈 때 상관주의(correlationism)나 인간예외주의(human exceptionalism),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라는 이름으로 퍼부어대는 신유물론의 비판에서 마르크스의 자연관은 관념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엥겔스에 대한 예외적인 비판을 제기한 루치오 콜레티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쉬한은 콜레티의 엥겔스 비판을 이렇게 요약한다. “콜레티는 마르크스주의와 헤겔에서 엥겔스는 사실 과학을 잔존하는 사변적인 유대들로부터 해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것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낡은 형이상학을 과학에 이식하면서 철학적 마르크스주의를 우주론적 로맨스로 변조했던 것이다. 완고한 헤겔주의자로서의 엥겔스와 무의식적 칸트주의자로서의 마르크스라는 입장을 제안하면서, 콜레티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방법론을 왜곡하여 이를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했다고 주장한다. 콜레티는 헤겔 변증법은 내재적으로 관념론적 성격을 지니며 유물론적으로 변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Sheehan, op. cit.:57, 강조는 인용자). 예컨대 콜레티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동일성과 비-모순의 원리에 정초되어 있기에 형이상학의 한 형태이다. 동일성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차례에서 형이상학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한자 외부에 있는 유한자, ‘총체성’ 외부에 있는 개별적 대상, 그것이 아닌 만물(everything)을 배제하면서 ‘이 지금 여기’를 우리에게 부과하기 때문에 추상적이다. 형이상학적인 추상은 자신의 대상으로서 초감각적인 보편자들(신, 영혼 등) 혹은 칸트가 말하듯이 ‘감각적 세계를 초월하는 지식”, 그리고 거기에서는 경험이 우리를 이끌거나 바로잡을 (correct)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콜레티, op. cit.:45)

여기에서 콜레티는 매우 표준적인 칸트적 추론을 취한다. 다시 말해 콜레티는 (자연에 대한) 직관과 지식, 물자체와 현상을 구분한다. 즉 예지체와 물자체로서의 자연 대(對) 현상으로서의 자연, 그리고 예지체 혹은 본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사변(speculation) 대(對) 자연에 관한 과학(동일성과 비모순의 원리에 근거한 자연과학), 콜레티의 말을 빌자면 형이상학적 추상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을 만들어낸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거슬러 칸트의 초월론적 비판 이전의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퇴각하는 몸짓으로서 헤겔주의(자연철학을 설파하는 헤겔)를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엥겔스의 모든 잘못은 바로 이러한 칸트에 의해 성취된 독단적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무위로 돌리고, 칸트 이전의 유물론, 말하자면 물자체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통해 표상된 자연 이전의 자연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던 헤겔의 유물론(몽매에 가까운 ‘자연철학’)으로 돌아갔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변증법의 시금석”이라는 엥겔스의 수수께끼 같은 주장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엥겔스, 1987a: 23).

“물론 내가 수학과 자연과학의 성과를 개괄하면서 문제로 한 것은 일반적으로 나로서는 아무런 의문도 없었던 진리, 즉 역사에서 사건들의 뚜렷한 우발성(fortuitousness)을 지배하는 변증법적 운동법칙만큼이나 자연에서도 무수한 변화의 와중에서 변증법적 운동 법칙이 자신을 관철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도 역시 상세히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법칙은 인간 사유의 발전사에서도 시종일관 관통하면서 사유하는 인간들에게 점차로 의식되는 것이다. 이 법칙은 헤겔이 처음 전체 포괄적으로 그리고 신비화된 형태로 전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법칙의 신비로운 형태를 벗겨내어 그것을 극히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목적의 하나였다.”(엥겔스, 1987a: 10-11)

“독일 관념론 내의 근본적 모순을 깨닫게 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유물론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지만 (주의 요 nota bene) 이는 18세기의 형이상학적이며 순전히 기계적인 유물론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지난 역사를 순진하게 혁명적인 척 배척하기만 하는 것과는 달리, 현대 유물론은 그 지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진화 과정을 찾아내는데, 그 역사 속의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유물론의 과제이다. … 각 특수 과학이 자신의 사물들과 그에 대한 우리 지식의 총체성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순간, 이러한 총체성을 다루는 특수 과학은 불필요하게 된다. 모든 지난 철학들 가운데 독립적으로 생존하게 되는 것은 사유와 그 법칙에 대한 과학-형식논리학과 변증법-이다. 이와 다른 모든 것은 자연과 역사에 대한 실증과학(positive science) 속에 포섭된다.”(엥겔스, 1987a: 25-26).

엥겔스는 철학과 자연과학의 관계에서 자연과학이 추상 즉 특정한 개념과 표상에 의지한 만큼 불가피하게 항상 철학에의 의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자연과학들에 의해 각기 분절되는 자연들이 있을 뿐이라는 – 바스카를 비롯한 비판적 실재론자들(critical realists)이 언급하는 ‘층화된’ 실재처럼 – 다시 말해, 사회로서의 자연을 포함하여 각각의 자연의 층위들은 전일적인 실체의 부분들이 아니라 각기 다른 층위로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곧 자연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현상으로서의 자연에 관해 말하는 것일 뿐이다. 반면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서 가장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킨 것도 바로 이러한 ‘너무 나아간’ 유물론, 콜레티의 표현을 빌자면 우주론적 로맨스에 가까운 사변적 자연철학의 입장이었다. 자연변증법에서의 자연이란 곧 주체의 인식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채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전-비판적 자연, 전-주관적인 자연, 즉 자연 자체로서의 자연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콜레티는 상식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이 헤겔의 계승이 아니라 칸트의 계승이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칸트의 초월적 전회 이후에 도입된 현상으로서의 자연은 인간의 주관적 매개를 통해 분별되고 파악된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다. 셰링과 헤겔의 자연철학에서의 자연은 개별 과학들(역학이나 물리학, 생물학, 지질학처럼 자신의 독특한 층위의 자연을 상대하는 과학들)에서의 자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자연철학(엥겔스에게서라면 자연변증법)은 총체적인 자연에 대한 인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것은 과학적 재현과 인식에 앞서 존재하는 자연, 즉 현상으로서의 자연을 넘어선 물자체에 가까운 자연이자 지식을 넘어선 인식, 어쩌면 예지적 직관이라 불러도 좋을 인식을 통해 접근하게 되는 자연이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그친다면 그것은 칸트에 의해 돌파된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즉 자연과 인식의 직접적인 일치, 주체와 객체의 무매개적 동일성이라는 사고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초월적 전회를 청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칸트에 의해 접근 금지된 현상계 너머의 자연을 인식하는데 이를 수 있을까.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경계 지워진 그 대상의 실재성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최근의 철학적 논의들이 역설하듯이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의 주요한 시도들(특히 셸링과 헤겔의 자연철학)은 이러한 실체적 자연과 현상으로서의 자연 사이에 놓인 간극을 횡단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 관념론의 칸트적 자연관에 대한 비판 – 물론 여기에 우리는 거의 간과되거나 무시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역시 추가하여야 한다. – 은 근년의 신유물론이 인간중심주의와 상관주의에 대한 거부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다기한 유물론적 전환과 거의 동등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칸트에 의한 초월적 전회를 송두리째 거부하지 않으면서 또 존재와 의식의 분할과 매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주체의 실체로부터의 발생이라는 관점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신유물론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주체와 의식, 정신, 사고, 표상 등을 모두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연역하거나 그것의 효과로서 간주하고, 주체라는 환상을 해부하며 그것이 물질적 운동과 흐름의 효과라는 점을 주장해야할까.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근년의 신유물론과의 대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있고,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언어․담론․표상․텍스트․이데올로기 등을 통해서일 뿐이기에, 우리는 세계에 관한 경험과 지식을 매개하는 바로 그것들을 비판하여야 한다는 요구가 압도했던 시대를, 우리는 얼마 전 지나왔다. 그 때 사람들은 그러한 움직임을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그리고 다시 얼마 전부터 우리는 이를 완벽히 뒤집은 철학적 선언들의 행렬과 마주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스펙터클․시뮬라크르․담론 등을 거론하던 이들은 모두 퇴위하고 이제 그 자리를 신유물론자들(new materialists), 즉 생기론적 유물론자, (사변적) 실재론자, 객체지향존재론(OOO: Object Oriented Ontology)자, 행위자네트워크(ANT: Actor-Network Theory) 이론가들이 점거하는 추세이다. 사람들은 이를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사변적 전환(speculative turn)․동물적 전환(animal turn)․포스트 휴먼 혹은 비-인간적 전환(post-huaman/non human turn)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각기 자신들들의 입장을 제출하여 왔다. 이는 크게 생기(生氣)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베넷, 2010), 존재자론(Onticology)(브라이언트, 2011), 존재학ontography(I. Bogost),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메이야수, 2010), 객체지향적 존재론OOO: Object-Oriented Ontology(하먼, 2018, 2019), 사물 이론Thing theory(브라운, 2004), 다형적인 유물론적 존재론 plastic materialist ontology(말라부, 2008) 등과 같은 다양한 이름을 내건다. 이런 폭발적이라 불러도 좋으리만치 분출하고 있는 새로운 사변적 유물론들은, 몇 가지 점에서 수렴한다.

이론적 추세의 핵심은 주체-객체의 근대적 형이상학의 이분법-메이야수의 표현을 빌자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효과-을 폐지하고, 인식․이성․무의식 등의 개념을 통해 규정된 주체 개념을 거부하며, 인간-주체란 다양한 물질적 대상과 힘, 관계 등의 행위자(agency/actant)와 다르지 않은 행위자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체는 객체의 일부일 뿐이며 소여성(givenness)과 객체 자체는 다른 것이 된다. 그 결과 주체와 객체는 횡단불가능한 거대한 간극을 통해 분리된 항이 아니라 이제 동일한 평면에 속한 것들로 여겨진다.(이를 두고 브라이언트는 ‘평탄한 존재론flat ontology’이란 이름을 마련해준다) 이는 주체/객체의 대립 혹은 구분을 거부하거나 철회하면서 주체의 대립 항으로서의 객체(object) 또는 대상을 대신해 사물(thing), 실체(substance), 내재적 힘의 평면, 아상블라주(assemblage), 혹은 주체 없는 객체(subjectless object) 등을 강조한다.

그들은 언어, 담론, 지식, 문화, 그 무엇이든 주체성의 자장 안에 갇혀있던 대상․객체를 해방시키고 대상(객체) 자체, 즉 물(thing)의 자율성과 그것의 능동적 작인으로서 역능/생기론적인 힘 등을 강변한다. 그들은 그것을 근대성의 죄과, 즉 칸트주의적 비판 철학(메이야수의 기소장에는 그것이 ‘상관주의(correlationism)’란 죄명으로 기재되고 또 어떤 이는 이에 ‘인간 예외주의’라는 별명을 부착한)을 폐지할 것을 강변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주체라는 개념을 고발하고 이를 청산하는 것이다. 주체는 객체의 다른 이름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하며, 주체/객체의 위계는 타도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둘 사이의 수직적 관계는 평탄화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인식을 통해 알려진 객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 없는 객체, 주체가 없어도 존재하는 객체, 의식과 언어를 통해 알려지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 있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이들은 주체-객체의 분할을 폐지함으로써 경험, 체험, 변용(affection) 등의 개념을 통해 파악되는 전-주체적인 차원을 강변하며 주체 없는 주관성의 모델을 생산하는데 진력한다.(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의 주체도 객체도 아닌 것으로서의 분위기를 위시해 들뢰즈의 생기론적 관점에서 비롯된 정동(affect)론 등이 이에 해당된다.)

따라서 신유물론은 이중적인 전선에서 공격을 펼친다. 먼저 그것은 (주체의 맞짝으로서만 실재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대상, 현상 혹은 객체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주체란 개념을 기각한다. 물론 이것은 정치적인 효과를 가진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분할로부터 비롯된 실천의 모델일 비판에서 벗어나길 요구한다. 허위의식이든 이데올로기이든 아니면 물신주의이든, 그 모든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이란 관점을 신유물론은 조롱한다. 특정한 방식에 따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현실-대상(reality-object)(예컨대 자본주의)은 그에 상응하는 인식-주체(knowing-subject)와 지각, 경험, 사고의 방식을 수반한다는 생각, 그렇기에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그와 함께 하는 인식,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모두 유물론적이지 못한 것으로 거부된다. 신유물론의 잡다한 경향, 실용주의적, 비합리적 경험론에서부터 전-비판적인 사변철학으로의 퇴행에 이르는 일련의 철학적 현상은 얼핏 보았을 때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과 이성의 파괴적인 만용을 격렬히 비난한다. (주체에 대응하는) 객체이란 관점에 의지해 존재와 물질을 객체로 변환하며 인간에 ‘대한’ 것으로서만 존재와 물질을 축소하는 것, 그리하여 존재와 물질이 얼마나 능동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을 형성하는 데 발휘하는 능력을 무시하는 것, 이러한 사고는 (특히 심층생태론적인) 주장 등을 통해 강한 반향을 획득하여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체-객체의 이분법으로부터 겸손하게 물러나 존재와 물질 그리고 정동 사이의 내재성의 우주 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신유물론이 직접 마르크스주의를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직접적인 적수는 칸트와 그 이후의 상관주의(correlationism) 혹은 초월적인 관념론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칸트-헤겔-마르크스(혹은 나아가 프로이트)를 잇는 비판-철학 전체를 기각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변적 유물론은 철학의 역사에서 그리 새삼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새삼스러운 것은 이른바 칸트 이래의 비판 철학을 통해 도입된 결정적인 단절, 즉 주체와 존재의 직접적인 동일성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장 이후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칸트에 의한 초월적 비판이라는 결정적인 전환 이후, 현상을 넘어 사물들의 세계로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칸트 이후에 마련된 주체라는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무엇보다 주체가 물질이자 자연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즉 인간, 주체, 정신, 의식 역시 존재나 세계의 일부라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주체의 객체성, 물질성이 어떻게 주체의 초월성, 예외성이라는 양립불가능한 주장과 중재될 수 있는지 밝혀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그러한 존재론적 유물론은 다시 전(前)-비판적 존재론으로 전락하여 자신이 세계를 직접적으로 직관할 수 있다고 되풀이하여 강변하는 데 머물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존재-시학이라 불러도 좋을 시학적인 비유를 통해 사물의 언어를 직접 듣지는 못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을 기꺼이 의인화하는 조처를 통해서라도 사물에 접근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게 아니라면 인지주의적 뇌과학의 주장을 빌려 사고와 의식, 정신을 연역하는 기계적 유물론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칸트에 의해 사고를 통해 인식된 대상 세계만이 허용되고 그를 넘어선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금지되었다는 데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존재론을 복원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분명 가치있는 유물론적인 충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유물론처럼 전-비판적인 단계로 물러나지 않으면서도, 다시 말해 즉 대상은 우리에게 비매개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대상의 실재성을 규명할 수 있는 – 엥겔스의 표현을 빌자면 – ‘현대적’ 유물론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이 초래한 일종의 철학적 추문이라 할 수 있는 “헤겔의 잘못된 예”, 즉 헤겔의 자연철학 혹은 존재론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자체라기보다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의 사고 공정을 연상시키는 유사한 철학적 기획, 즉 칸트 이후의 초월적 비판을 무효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억압하고자 했던 존재론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시도들을 헤겔의 자연철학과 존재론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론적 논의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대표하는 사례들로서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초월적 존재론(transcendental ontology)’과 지젝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꼽을 수 있다.(가브리엘, 2013, 지젝: 2005, 2006, 2013a, 2013b, 2016, 2019). 이들의 논의를 자세하게 언급하는 것은 이 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선언적인 언표에 가까운 두 학자의 입장을 인용하며 간략히 이들의 유물론적 접근을 요약해 보도록 하겠다.

“새로운 포스트-칸트적 유물론을 창설하는 것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으로의 소박한 퇴행과는 다른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이다. 피히테, 셸링, 그리고 헤겔은 모두 칸트로부터 배운 결정적인 가르침, 말하자면 철학의 고유한 방법은 보다 높은 차원의 반성, 필연적으로 사유는 아닌 그 대상들과 사유가 맺는 관계의 구성에 관한 사유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준용하자면 답변해야할 물음들은 여전히 칸트적인 것이다. 어떻게 판단이 아닌 것에 대하여 판단은 언급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사고가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과 동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사고를 얻는 것이 가능할까. 초월적 존재론이 이런 물음에 추가하는 사고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사고는 곧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칸트의 근본적인 인식론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 초월적 구성의 구성,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리판별가능 지시대상(truth-apt reference)의 가능성 조건의 존재론적 조건들을 언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세계와 그 세계 내의 사태(state of affairs)를 언급한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언급을 통해 세계가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세계는 어떻게 반성 속에서 자기-지시적이고자 노력하는 것일까. 우리가 (그러하듯이 오늘날까지도 인식론의 기반에 놓여있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이 행하는 것처럼) 더 이상 세계로부터 주체를 배제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마침내 우리의 인식 역량 속에서 세계 그 자체가 자신을 인식가능하게 되는 역량을 지닌 것으로 신뢰받을 수 있을 것이다.”(가브리엘, 2013: xii)

여기에서 가브리엘은 자신의 초월적 존재론의 윤곽을 압축적으로 서술한다. 그것은 초월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의 이율배반을 – 칸트에게서 이 둘은 분명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 해결할 수 있으며, 기꺼이 새로운 존재론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브리엘이 도입하는 논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칸트에게서 초월적 사고를 수행하는 주체의 능력, 즉 의식, 판단들이 있지만 그러한 판단을 수행하는 주체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즉 주체의 객체성, 주체의 세계 내적 위치는 설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포스트-칸트적인 독일관념론(피히테, 셸링, 헤겔의 철학적 사유들)의 노력이 바쳐졌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사고는 곧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사고는 주체 ‘없는(즉 존재하지 않는)’ 사고가 아니라 ‘존재하는(exist)’ 주체의 사고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판단과 의식은 주체와 동일하지 않다. 주체는 발생하여야 하고 또 존재하여야 한다. 그것은 인식론이 참조하는 주체가 아니라 존재론에서 말하는 객체로서의 주체, 헤겔 자신의 말을 빌자면 실체로서의 주체이다. 이러한 가브리엘의 주장과 거의 평행한 주장은 지젝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실체는 주체다’라는 헤겔의 명제를 동일성에 대한 직접적 단언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은 뼈다’ 같은 ‘무한판단’의 예(아마도, 전형적인 예)로서 읽어내는 것이다. 요점은 실체(모든 존재들의 궁극적 기반, 절대자)가 선주체적인 근거인 것이 아니라 주체이며, 자신의 타자성을 정립하고 그러고 나서 그것을 재전유하는 등의 자기차이화(self-differentiation)의 작인이라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현상화, 외양, ‘환영’, 분열, 유한성, 지성 등의 비실체적 작인을 나타내며, 실체를 주체로서 개념 파악한다는 것은 분열, 현상화 등이 절대자 그 자체의 생에 내속되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의미한다. 어떠한 ‘절대적’ 주체도 없다. ‘그 자체로서의’ 주체는 상대적이며 자기-분열에 사로잡혀 있다.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주체는 실체에 내속되어 있다.”(지젝, 2005: 150-151).

“우리는 신유물론을 규정하는 조처를 마땅히 초월적 차원 혹은 주체를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을 극복하는 고유하게 헤겔적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대립시켜야 한다. 신유물론은 이러한 간극을 덮어버리며 주관적인 매개를 자연에 내재하는 행위자의 원리로서의 자연의 현실 안에 다시 기입한다. 반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주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주체성을 객관적 현실로부터 분리하는 바로 그 간극을 자연 안에 되돌려 놓는다.”(지젝, : 27, 강조는 인용자)

앞의 인용문에서 지젝은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의’ 주체, 앞서 가브리엘의 표현을 빌자면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주체와 동등한 주체, 즉 실체이자 존재로서의 주체를 앞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와 실체의 동일성은 신유물론자들에 의해 도입되는 주체는 실체다, 주체는 물질적 세계의 효과라는 주장들과는 전연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지젝은 새로운 유물론이 주체와 세계 사이의 간극을 덮어버리면서 주체를 세계의 일부로서 환원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동등성을 주장하며 초월적 전환 이전으로 회귀하는 신유물론을 조롱한다. 그리고 신유물론이 덮어버리거나 추방하고자 하는 간극을 유지하면서도 유물론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앞서 가브리엘이 제안한 것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주관적인 매개, 즉 칸트에 따른다면 초월적 주체의 의식과 정신을 고수하면서도 그것이 자연과 일치하는 것으로, 지젝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자연 안에 놓인 간극, 보다 쉽게 말하자면 자연의 비-동일성, 모순 속에서 찾는다. 따라서 자연의 비-동일성, 적대 혹은 모순은 곧 주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헤겔이 자신의 자연철학에서 언급했던 것, “자연은 타재의 형식에 있어서의 이념으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이념은 자기 자신의 부정으로서 또는 외적으로 존재하므로, 자연은 이 이념에 대해서만 그리고 이 이념의 주관적 실존인 정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외면성이 그 안에서 자연으로 존재하는 그 규정을 이룬다”는 서술을 현대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라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리히터, 1998: 117).

맥고완은 근년 지젝이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성하며 출판한 일련의 저작들, 국내에서는 헤겔 레스토랑과 라캉 카페로 분권되어 출판된 그의 획기적인 저작을 비롯해 그 후속작인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를 위시한 일련의 저작을 이끌어가는 저변의 입장을 언급한다.(맥고완, 2014, 2019). 그것은 바로 헤겔의 자연철학과 존재론이라는 것이다. 이는 헤겔을 주체성의 이론가로 환원함으로써 – 이는 20세기의 철학적 담론에서 해석된 헤겔로 이는 코제브의 헤겔 해석에 의해 대표된다. – 칸트주의에 의해 저지당한 헤겔을 구출하고자 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부상하는 신유물론에 맞서기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유물론을 구축하기 위하여 불가결하게 참조해야 할 것이 헤겔의 자연철학과 존재론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헤겔은 더 이상 “헤겔의 잘못된 예”에서의 헤겔이 아니다. 물론 이 때 헤겔의 사변철학의 독자이자 그것을 변증법적 유물론을 가공하기 위한 재료로 삼았던 엥겔스를 떠올려야 함은 물론이다.

4. 결론에 대신하여: 다시, 자연변증법으로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얼핏 상식을 거스르는 듯이 보이는 서술을 제시한다.

“(…)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며,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성, 개체와 유(類) 사이의 싸움의 진정한 해결이다. 이 공산주의는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이며, 자신을 이러한 해결로서 알고 있다.”(마르크스, 2006: 127-128).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의 공산주의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는 오늘날의 파국에 가까운 생태적 위기를 앞둔 우리에게 과거로부터 급전(急電)된 급진적 정치생태학의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서술에서 우리가 잠시 머무를 필요가 있는 곳은 자연주의와 인간주의라는 개념일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자연주의와 인간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규정할 때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과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자연 사이의 불화가 극복된 유토피아적인 상태에 대한 언급일까. 그러나 바로 이어 등장하는 서술,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성, 개체와 유(類) 사이의 싸움”은 이러한 이해가 성급한 것임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그가 열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칸트적인 이율배반에 해당하는 것들의 목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율배반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마르크스의 것이었을 뿐 아니라 칸트 이후의 철학적, 사회적 사고 속에서 언제나 집요하게 추구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피히테와 셸링,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칸트적 이율배반을 해결하는데 참여한다. 이 때 마르크스는 인간주의와 자연주의라는 이율배반으로 그 이율배반을 정식화하면서 공산주의를 그러한 이율배반을 해결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인 사고로서 정위한다. 앞의 인용한 글에 이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서술을 추가한다. “우리는 일관된 자연주의 혹은 인간주의가 어떻게 하여 관념론 및 유물론과 구별되며, 동시에 양자의 통일적인 진리를 구성하는지 알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오직 자연주의만이 세계의 행위를 파악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마르크스, 앞의 책: 198, 번역은 수정). 이 역시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여기에서 그는 마치 아도르노의 ‘객체의 우위(preponderance)’를 연상시키는 어투로 자연주의와 인간주의라는 모순적인 입장의 상동성을 역설하면서도 자연주의의 우위를 강조한다. 이 말은 앞서 보았듯이 헤겔적인 의미에서 주체는 실체라는 관념을 잇는다. 그리고 이것은 그간의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지양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아무튼 위의 노트 속의 메모가 훗날 엥겔스가 착수했던 그러나 그 역시 미완으로 끝난 자연변증법과 유사한 탐색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리 그릇된 억측은 아닐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남긴 수학과 자연과학에 관한 광범위한 노트들이 존재하고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역사적,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머문 곳이 또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난센스로 가득 찬, 깊은 철학적 반성이 결여된 난삽한 자연과학적 지식들을 열거한 것이 아니라 독일 관념론의 존재론적, 자연철학적 유물론의 충동을 계승하면서 유물론보다 더한 유물론, 부정성과 모순을 아우르는 유물론으로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재발견할 시점에 이르른 것이 아닐까. 엥겔스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 때마침 도래한 신유물론의 유물론적 전환과 진지한 이론적 대결을 하고자 한다면, 엥겔스가 도입했던 유물론적 전환, 그가 구축하고자 했던 ‘새로운 유물론’을 다시 찾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의 종차(種差)를 탐색하는 데 있어 불가결한 일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가브리엘, 마르쿠스. 2017.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김희상 옮김, 열린책들.

가브리엘, 마르쿠스. 2018. 나는 뇌가 아니다, 전대호 옮김, 열린책들.

굴드, 스티븐 제이. 1988. 다윈 이후, 홍동선, 홍욱희 옮김, 범양사출판부.

포스터, 존 벨라미. 2016. 마르크스의 생태학, 김민정, 황정규 옮김, 인간사랑.

스미스, 닐. 2017. 불균등 발전: 자연, 자본, 공간의 생산, 최병두 외 옮김,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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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마르크스주의연구> 엥겔스 탄생 200주년 기념호를 위해 쓴 글. 수정 중에 있는 글입니다. 인용은 저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