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밀카르 카브랄 Amílcar Cabral (1924-1973)

Super Mama Djombo – Sol Maior Para Comanda

아밀카르 로페스 카브랄은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 해방 투쟁을 이끈 혁명가이다. 그러나 제3세계 프로젝트를 이끌고 비동맹운동에 헌신한 혁명가들은 어쩌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카브랄이 특별한 인물인 점은 그가 제3세계 유토피아주의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나타내는 전사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는 기니비사우 민중들 사이에서 순교자이지만 역시 영원히 자신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물로 기억된다. “카브랄은 죽지 않았다(Cabral ka muri)”는 말은 언제나 카브랄을 따라다닌다. 그리고 많은 뮤지션들은 이 문구를 노래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수퍼 마마 좀보 Super Mama Djombo의 노래 (1979)가 그 대표적인 노래일 것이다. 이 아름다운 노래는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물라토 출신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카브랄은 리스본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공부를 하는 동안, 역시 같은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앙골라나 모잠비크 출신 청년들을 만나며 제3세계 민족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훗날 앙골라민중해방운동(Popular Movement of the Liberation of Angola)를 창설하게 될 아고스티뉴 네투(Agostinho Neto)와 마리우 데 안드라데(Mario de Andrade) 같은 청년들이 그가 교류한 친구들이었다. 학위를 마친 후 아프리카로 돌아온 카브랄은 곧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이끄는 우상이 된다. 대학 졸업 후 식민 정부의 ‘지방 농업 및 임업부’에서 일하게 된 카브랄은 기니비사우 전역을 순회하면서 대중들과 긴밀히 접촉하고 또 그들을 살펴볼 기회를 얻게 된다. 이로 인해 카브랄은 식민지배 아래에서 아프리카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삶에 대해 더욱 생생한 이해를 얻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카브랄의 행적은 포르투갈 식민정부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이에 카브랄은 곧 앙골라민중해방운동에 가당하고 이를 통해 기나비사우와 카보베르데(Cape Verde)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을 이끌어간다. 결국 이로 인해 다시 한 번 식민당국의 미움을 산 카브랄은 포르투갈로 망명한다. 그 사이 카브랄은 적어도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아프리카의 경우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평화적인 길이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카브랄은 1956년 기니아를 방문하면서 ‘기니 및 카보베르데 독립 아프리카당(PAIGC: Partido Africano para a Independência da Guiné e Cabo Verde, African Party for the Independence of Guinea and Cape Verde)’을 결성한다. 바야흐로 무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훗날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기억될 카브랄의 여정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는 프란츠 파농이 역설했던 탈식민투쟁에서 폭력의 필연성을 직접적인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브랄과 체 게바라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둘 사이에 놓인 결정적인 차이를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민중들이 우리의 산악이다.” 카브랄은 1971년 영국 런던을 방문하면서 행한 강연에서 기니비사우에서의 민족해방 무장투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왜 민중들이 카브랄이 이끈 게릴라들에겐 산악이었을까. 게바라의 게릴라투쟁은 산악에서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기니비사우는 모두 평지로 이뤄진 곳이었다. 그것은 게릴라전 교과서에 언급하는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행할 수 있는 곳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게릴라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곳은 산악지대였다. 체 게바라가 전투를 시작한 곳 역시 쿠바의 산악지대였다. 그렇다면 기니비사우에서는 어떻게 게릴라전을 행할 수 있을까. 카브랄에겐 그러한 산악지대가 굳이 필요치 않았다. 바로 민중들이 바로 산악지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엿보이는 카브랄의 민중에 기반한 혁명 전략은 카브랄이 얼마나 특별한 가치를 갖는지 말해준다.

기니에서 ‘기니 및 카보베르데 독립 아프리카당’은 교육과 겸양을 앞세운 수평적으로 조직된 반식민 투쟁을 통해 민중들을 단결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때 농사일과 지적 노동은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 “식민주의자들은 걸핏하면 우리에게 역사를 가져다 준 것은 자기네들이라고 말하곤 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전연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역사로부터, 우리의 역사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고는 그들을 따르도록 했다. 오늘날 자신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던 타 민중들의 뒤를 이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우리가 무기를 들 때, 우리는 스스로의 수단과 희생을 통해 자신들의 발로 선 역사로 귀환하고자 한다.”(아밀카르 카브랄, 기니아에서의 혁명 Revolution in Guinea 중에서) 카브랄은 아프리카인들은 역사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유럽인들의 관념에 도전했다. 콰메 은쿠루마의 도움으로 가나에 군사기지를 마련한 카브랄은 새로운 게릴라 장교들을 양성하는 일에 나섰다. 그리고 곧 모잠비크해방전선 및 앙골라해방전선 등과 함께 포르투갈식민지민족주의자기구회의(CONCP: Conference of Nationalist Organizations of the Portuguese Colonies)를 조직하는 데 갖은 애를 썼다. 그리고 이후에는 기니아공화국, 프랑스에서 해방된 세네갈에 새로운 훈련캠프를 만들어 게릴라들을 훈련시켰다. NATO와 미국, 스페인, 남아공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 군대와 맞서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서 카브랄의 지도력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반식민투쟁에서 카브랄이 가장 돋보였던 점 가운데 하나는 그가 식민화된 민중들에게 미친 식민주의자들의 사회, 심리적 지배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인격을 박탈당하고만 주변적 존재들인 식민지민중들에게 민족해방투쟁은 아프리카인으로서 자신들의 인격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게 카브랄의 믿음이었다. 그는 식민주의가 남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를 쓰고 말하는 데 있어 아프리카인들의 권리를 되찾는 것이 바로 민족해방투쟁이라고 역설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들의 동지들에게 교육과 문화적 훈련을 항상 강조했다. 그는 파울루 프레이리에 의한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교육’과 같은 제3세계 민중을 위한 교육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그를 초청하여 기니비사우의 새로운 교육 모델을 실험하기도 하였고, 민족해방투쟁에서 영화가 차지하는 의의를 강조하면서 프랑스의 크리스 마커와 같은 급진적 영화감독을 초청해 기니비사우 민중들과 함께 하는 영화 교육을 시도하기도 하고 또 청년들을 쿠바로 보내 남미에서 만개하기 시작한 새로운 영화운동을 배우고 오도록 하기도 했다. 크리스 마커의 걸작 영화인 <태양 없이 Sans Soleil>(1982)에 등장하는 기니비사우의 풍경은 바로 그러한 카브랄의 반식민주의 문화투쟁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단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는 더없이 명석한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하였다. 그 점은 그가 얼마나 식민주의의 문제를 계급의 문제로서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었는가를 통해 잘 보여준다. 그는 민족해방을 향한 실천에서의 결정적인 걸음은 식민화된 엘리트와 식민주의자들이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깨닫는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매판 세력을 대표하는 프티부르주아지에 대한 카브랄의 비판은 가차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프티부르주아지에게 “계급적인 자살”을 마다하지 않고 노동자계급들과 연대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민족해방투쟁을 반식민이 아니라 계급적 불평등을 없애는 것에 있다는 그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민족해방투쟁은 또한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교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많은 이들이 알튀세르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참조했다고 말할 정도로 독창적인 방식으로 아프리카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전에는 역사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과 달리 바로 유럽의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해 아프리카가 있어야만 했었음을 폭로하면서 아프리카를 세계사의 무대 위에서 사고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카브랄은 1974년 기니비사우와 카페보르데의 독립 선언이 이뤄지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그는 PAIGC에 속했던 전직 당원이던 인물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73년 세계평화위원회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그의 삶을 기리기 위해 아밀카르 카브랄 상을 제정했다. 카포베르데국제공항은 반둥회의를 이끈 수카르노의 이름을 딴 자카르타국제공항이 그렇듯이 아밀카르 카브랄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심지어 서아프리카 축구대회 역사 아밀카르 카브랄 컵 대회로 개명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최고의 헌사는 무엇보다 “카브랄은 죽지 않았다”일 것이다. 그는 아프리카 민중들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들을 덮쳐누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악몽에서 깨어나도록 이끌 것이다.

“민족해방을 자신의 손 안에 두기 위해, 프티부르주아지에게는 단 하나의 길만이 있다. 부르주아지가 되어 무역 체제 안에서 관료들과 거간꾼들의 부르주아로 발전하여 가거나, 자신을 사이비 민족-부르주아지로 바꾸어가거나 하는 것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혁명을 거부하고 필연적으로 자신을 제국주의 자본에 종속시키는 것. 현재 이는 신식민적 상황, 즉 민족해방의 목표를 배신하는 것과 진배없다. 민족해방이란 목표를 배신하지 않으려면 프티부르주아지에게는 오직 한 가지의 길만이 있다. 자신의 혁명적 의식을 벼리는 것, 부르주아지가 되려는 자신의 유혹과 자신의 계급적 사고방식의 어쩔 수 없는 가식을 벗어던지는 것. 노동자 계급과 동일시하면 혁명의 온당한 발전 과정에 저항하지 않는 것. 이는 민족해방과정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몫을 완전히 수행하기 위하여, 자신이 속한 민중의 가장 깊은 소망들과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조건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되살려내기 위하여, 혁명적인 프티부르주아지는 스스로 계급적인 자살을 행할 수 있어야만 한다.”(아밀카르 카브랄, 사회구조와의 관계에서 민족해방의 전제와 목표들, 단결과 투쟁: 아밀카르의 연설과 논문,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