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트 위원회 보고서 Brandt Commission Report

Scorpions – Wind Of Change

제3세계 나라들은 신국제경제질서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과거 식민지 국가들이 남기고 간 경제 구조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민족국가를 수립하기위해, 이는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뻔뻔하게도 과거의 식민 모국들은 이러한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제3세계 나라들의 신국제경제질서를 위한 압력은 두 가지 회의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국제경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동시에 그것을 기대했던 역사적 시대, 즉 제3세계의 시대, 비동맹운동의 시대를 마감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만간 제3세계는 남부(South)란 이름으로 대체될 것이고, 신국제경질서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체될 것이었다.


신국제경제질서를 향한 요구를 반영한 첫 번째 회의는 197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경제협력회의(CIEC: Conference on International Economic Cooperation)였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지스카르 데스탱(Giscard d’Estaing)이 주도했던 이 회의에는 개발도상국 19개 나라를 포함해 모두 27개 나라가 참여했다. 회의 결과는 처참하리만치 제3세계 나라들의 요구를 무시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 내린 결의안은 석유나 천연자원의 고갈가능성을 고려해 이를 유통하고 분배하는 데 있어 국제적으로 협력하도록 한다거나 국제 무역을 촉진시키기 위해 공동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유엔 무역개발회의에 맡긴다는 것 등이 골자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 제3세계 나라들의 긴급한 빈곤 해결을 위해 고작 1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제3세계 나라들이 브레턴우즈 기관들이나 미국과 영국의 민간 은행들로부터 진 빚만 해도 1800억 달러가 넘었다. 과거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남긴 뿌리 깊은 유산에 더해 독립 후에 펼쳐진 불평등한 국제 경제 질서로 인해 대다수의 제3세계 나라들은 빈곤과 저발전, 그리고 빚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압력을 전적으로 무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동맹운동이 드리운 그림자가 아직 지평선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탓에 더욱 그러하였다.

결국 당시 세계은행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라마의 제안으로 ‘국제개발문제에 관한 독립위원회(Independent Commission on International Development Issues)’(흔히 브란트위원회 Brandt Commission라고 줄여 부른다)가 만들어졌다. 맥나라마는 세계은행 총재를 맡기 전에는 포드자동차의 경영자로 재직하였고,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자 펜타곤에 몸을 담고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시장을 우선시 하는 자본가였고 또한 북부의 이해를 위해 제3세계를 파괴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제3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중재자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배운 그의 교훈대로 빈곤과 불평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지 않는다면 제3세계는 반란이라는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개혁이라는 정치적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혁명과 소요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는 위기에 봉착한 북부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맥나라마는 최빈국의 빈곤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남부와 북부 사이의 차이가 깊어가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비동맹운동이 제안한 신국제경제질서를 선뜻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세계은행이라는 브레턴우즈 기관의 수장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시장경제를 수호하고 선진국들의 자본가들을 지킬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남부와 북부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초대해 위원회를 만들었다. 의장은 전 서독 수상이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맡았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UN 사무총장에게 이 위원회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브란트 위원회 보고서라고 알려진 문서는 통일된 의견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부와 북부의 공동 번영을 위한 마지막 원대한 꿈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주적인서도 평등한 발전 모델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지구라는 행성의 차원에서 복지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꿈이었다. 이는 유럽의 발전된 나라들에서 전개된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실행하려는 것에 주안점이 있었다. 브란트 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의 제목은 “남과 북-생존을 위한 프로그램(North-South: A Programme for Survival)”이다. 이 보고서는 남북관계가 바뀌고 신국제경제질서를 향한 남부의 요구가 거세지고 게다가 장기적인 불황에 이르는 선진국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며 남북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남북의 대표가 회의를 가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브란트위원회 보고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성장만을 강조하던 기존의 발전 모델과 선을 긋고 성장과 재분배를 함께 도모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브란트위원회 보고서는 저 유명한 본질적인 인간 욕구(human needs)란 개념을 내세웠다. 이 인간 욕구에는 영양, 주거, 교육, 문해력, 고용 등이 포함되었다. 지금까지 성장이란 오직 댐과 저수지를 건설하고 녹색혁명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문제였을 뿐이다. 그러나 맥나라마는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브란트위원회 보고서도 이런 생각을 계승했다.

브란트위원회 보고서는 북부는 남부의 빈곤과 저발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금(일명 세계발전기금 World Development Fund)을 조성해야 하고 그에 대응해 남부는 안정적인 석유 공급과 가격을 유지한다는 것을 골격으로 삼고 있었다. 이는 보고서가 새롭게 내놓은 상호 존중(mutual regard)이나 상호 이해(mutual interests)란 노선에서 잘 드러났다. 제3세계 프로젝트를 이끈 반둥정신은 도덕적인 이상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신국제경제질서 역시 그런 이상을 반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선진국의 정부와 초국적기업들은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러나 북부가 고집한 자기이해(self-interest)라고 해서 도움이 될 것은 없었다. 그것은 남부와 북부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동등한 위험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플레이션과 결합된 채 지속되는 세계 경제의 침체, 화폐질서의 혼란, 부채와 적자의 증대, 에너지, 식량, 원료를 둘러싼 경쟁의 고조, 세계인구의 증가와 남부와 북부 모두에서의 실업난, 그리고 무엇보다 환경에 대한 위협의 심각화(삼림파괴, 사막화, 남획 및 과도한 방목, 대기 및 수질 오염 등). 이 모두는 남부의 문제만도 북부의 문제만도 아닌 서로의 공동 이해가 걸린 문제였다.

브란트위원회 보고서는 세 개의 세계로 이뤄진 지구행성이란 이미지를 제시하고, 남과 북이라는 세계로 구성된 인류란 이미지를 세상에 심어주었다. 그러나 브란트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할 즈음 역사는 이미 다른 궤도를 달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브란트위원회는 미국과 북유럽에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가 위기에 봉착하고 신자유주의로 넘어가고자 하던 시기에 출현했다. 결국 브란트위원회는 과거의 식민주의국가들이 제3세계가 처한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고자 진지하게 시도했던 마지막 몸짓이었다. 브란트위원회 보고서의 운명은 얄궂게도 이 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1981년 10월에 개최된 남북서밋(칸쿤서밋)에서 결정되었다. 멕시코 칸쿤에서 회의가 열리기 전 브란트를 포함한 브란트위원회의 주요 위원들은 이 회의에 참여할 정부 대표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전했다. 이 회의가 남북 간에 발전을 둘러싼 오랜 대화들의 실패들 이후 최후의 수단이 될 것이며 지구의 운명은 바로 이 대회를 통해 남북간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것이 그들의 요청이었다. 그러나 대회를 이끈 이들은 레이건과 새처였다. 새롭게 정치무대에 오른 이 두 명의 정치가는 대서양 양쪽의 초국적기업과 은행가들의 이해와 관련없는 모든 것은 헛소리이자 몽상이라 치부했다. 브란트위원회는 이 회의가 남과 북 사이의 위대한 대화의 서곡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대화의 끝이었다. 칸쿤회의가 끝나고 나서 브란트는 침통한 어조로 이 회의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그 회의는 바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향하는 궤도 위로 남부의 민중들을 이동시키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