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캄바라게 니에레레 Julius Kamparage Nyerere (1922-1999)

ليب) | Samira Said – Mazal

므왈리무(Mwalimu)! 스와힐리어로 선생님이란 뜻을 지닌 이 낱말은 탄자니아 민중들은 물론 아프리카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했던 한 인물의 별명이다. 그는 위대한 제3세계 정치 지도자인 줄리어스 니에레레이다. 니에레레는 제3세계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 인물로서 숱한 논란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우자마(Ujamaa)라는 독특한 아프리카식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실험했다. 그것은 때로는 후진적인 러시아 사회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채 바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을 상기시켜준다. 이 논쟁에서 마르크스는 농촌의 공동체가 사회주의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자본주의를 거친 상태에서만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했던 바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던 많은 제3세계 급진주의자들은 니에레레의 생각을 비웃곤 했다. 한편 니에레레는 제3세계 민중들이 식민주의와 그 유산에 맞서 싸운데 있어 민족과 아프리카라는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범아프리카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보급하고자 평생 헌신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영문학의 고전을 스와힐리어로 옮기기도 했다. 또한 그는 제3세계 프로젝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기사회생시키고자 ‘남부위원회(Southern Commission)’를 조직해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미 비동맹운동은 붕괴되고 있었고 제3세계의 많은 나라의 지배계층들은 새로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위기의 시대였다. 제3세계 나라들의 자본가계급은 식민주의자가 남기고 간 자산을 불하받거나 원조나 차관을 독점하여 축적했던 자신들의 부 위에서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갈 채비를 했다. 이를테면 외국의 투자자들과 손을 잡고 수출가공공단이나 경제특구 같은 곳에서 값싼 임금을 이용한 수출 상품을 제조하는 식이었다. 남부위원회를 통해 제3세계 프로젝트가 내세웠던 꿈을 되살리고자 했던 니에레레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1999년 폐렴으로 입원한 영국 런던의 어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7년 2월 5일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은 1만여 명이 넘는 군중들 앞에서 탄자니아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전체 아프리카에 있어 더 없이 중요한 하나의 문서를 발표하였다. 그것이 ‘아루샤 선언(Arusha Declaration)’이다. 그것은 경제적 진보를 꾀함에 있어 대중적인 사회적 토대와 그리고 이러한 발전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 첨예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루샤 선언에 대한 과거 식민주의 나라들이 보인 비웃음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미국 주간지는 아루샤 선언을 두고 “부족 사회주의(tribal socialism)”라며 조롱했다. 아루샤 선언에서 니에레레가 제안한 아프리카 사회주의는 우자마라는 사회주의적 발전을 향한 운동에 근거한 것이다. 1962년 “우자마-아프리카사회주의의 토대”라는 팸플릿을 발표하면서, 니에레레는 아프리카에서의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놀라운 생각을 알린다.

우자마는 스와힐리어로 ‘가족다움(familyhood)’을 뜻한다. 이 말이 암시하듯 우자마는 전통적 가족 공동체를 민족이란 공동체를 건설하는 과정과 결합시키는 것을 대로 삼았다. 그런데 우자마는 단지 국가 내부의 공동체 만들기와 관련이 있을 뿐이라고 오해하여선 안 된다. 우자마는 가나의 은크루마나 세네갈의 레오폴드, 기니아의 세쿠 투레 같은 범아프리카주의를 주창한 인물들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 대륙 전체와 탄자니아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즉 우마자는 탄자니아에서 보다 공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담고 있지만 그에 더해 범아프리카주의에 이바지하면서 아프리카 민중들의 국제주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니에레레는 다르에스살람대학교(University of Dar es Salaam)에 아프리카 전역의 학생과 운동가들을 초대했고 이 대학은 훗날 아프리카 급진적인 지식인들이나 학생들의 요람이 되었다.

니에레레의 우자마는 아루샤 선언을 통해 탄자니아 정치의 좌표가 되었다. 영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협동조합적인 사회주의자들인 페비언 사회주의자들(Fabian Socialists)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에게 감화를 받은 바 있던 터라, 사람들은 아루샤 선언에서 그러한 로버트 오웬(Robert Owen) 식의 사회주의의 색채를 감지하기도 한다. 아니면 월터 로드니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프리카에 널리 퍼져있던 민중들의 자생적인 공동체에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세포 형태를 찾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강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반세기전의 탄자니아에서 쏘아올린 그 선언에서 중요한 것은 어두운 빛깔로 채색된 형체 없는 빈곤한 대륙이라는 뿌리 깊은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과 상상력으로 유토피아적 비전을 만들어내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초토화된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만을 알고 있는 이들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자마는 그리 행복한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경우 제3세계에서 추진되었던 개발/발전이 그랬던 것처럼 우자마라는 사회주의적 촌락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숱한 실수를 저질렀다. 흩어진 채 농사를 짓고 살아가던 농민들을 강제로 집산화된 협동농장으로 조직하는 일은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는 일은 아니었다. 협동농장을 통해 생산과 교환, 분배를 사회화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가 아니라 국가의 강제 이주를 통해 이뤄진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또 자신들이 생산과정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재배하고 어떻게 경작할지 일일이 간섭다면 대중들의 지지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농촌 생활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무시한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결국 언제나 과거의 식민주의에 의존하거나 종속되지 않은 자립을 요구했던 탄자니아 역시 1989년대에 접어들며 어쩔 수 없이 브레턴우즈 기관들에 달려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밀물에 탄자니아 역시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서 제3세계 프로젝트를 부활하고자 했던 니에레레의 좌절일 것이다. 그는 남부위원회의 의장 자리를 맡고 1990년 역사적인 보고서인 <남부에의 도전 The Challenge to the South>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남부라는 이름의 세계는 니에레레가 선봉에 섰던 제3세계나 비동맹운동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미 많은 남부의 지도자들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발전의 모델로서 부상한다고 해서 니에레레가 꿈꾸었던 발전을 향한 원칙이 빛바랜 것은 아니다. 니에레레는 그 어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고 위엄 있고 충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발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대화 프로젝트로서의 발전은 파산한 이데올로기라는 포스트식민주의자들의 냉소나 오직 신자유주의적 발전만이 가능하다는 사이비 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 니에레레의 꿈을 이어가는 투사들이 어딘가에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탄자니아에는 자신들의 자유를 잃은 수백 개가 넘는 부족들이 있다. 그 자유를 되찾은 것은 하나의 민족으로서였다.”(니에레레, 1969년 2월, 토론토대학교에서의 ‘아프리카의 안정과 변화’ 연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