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 Third World 第三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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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는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프로젝트였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그들은 무엇보다 인간적 존엄성을 그리고 삶의 필수재인 토지, 평화, 자유를 염원했다. 그들은 불만과 열망을 다양한 형태의 조직으로 모아냈고, 민족 지도자들은 이 조직들을 통해 요구사항을 수렴할 발판을 마련했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가나의 크와메 은크루마,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같은 지도자들은 20세기 중반의 10여년간 여러 회의에서 만났다. 반둥(1955), 아바나(1966) 등 여러 곳에서 만난 민족지도자들은 인민의 희망을 담아낼 사상과 일련의 기구를 만들어갔다. ‘제3세계’란 이러한 희망과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들을 아우르는 프로젝트였다.”

비자이 프라샤드는 제3세계 인민의 세계사라 할 수 있을 그의 특출한 저작인 갈색의 세계사 서론에서 제3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없이 간결하고 명료한 정의를 제시한다. 제3세계란 말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남미 같은 곳을 아우르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반박하며 비자이는 제3세계란 장소가 아니라 프로젝트임을 역설한다. 그것은 반둥회의에서 비롯된 비동맹운동과 함께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던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운동이자 정치이며 문화적, 예술적 상상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을 창설하기 위한 기획이자 의지, 프로그램이었다. 그 안에는 신국제경제질서를 비롯한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청사진이 담겨있었고, 범아프리카주의나 범남미주의와 같은 새로운 국제주의적 민족주의이상이 스며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자유와 평화, 평등에 관한 눈부신 상상과 문화, 예술적 실천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네그리튀드 문학과 ‘제3영화’,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은 제3세계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제3세계란 프로젝트는 여러 차례 부침을 겪으며 수용되었다. 첫 번째는 1960년대의 4.19혁명의 여파로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이 움터 오른 것을 꼽을 수 있다. 당시의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반둥회의와 비동맹운동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냉전 질서에 꼼짝없이 갇힌 상태로부터 벗어나 분단 체제를 벗어난 세계의 모습을 이러한 제3의 길에서 찾으려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에 청년층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던 잡지인 청맥이나 한양같은 잡지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에서 벌어지는 민족해방투쟁에 대하여 소개하기 시작했다. 서구 모더니즘에 경도되었던 문학과 예술의 상태를 비판하며 새로운 미학적인 방향을 찾기 위하여 민족이란 개념을 재탐색하려는 시도들도 고개를 들고 나타났다. 4.19 혁명의 문학이라 할 최인훈의 소설들은 제3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본 제3세계란 남도 북도 아닌 이념적 회색지대로서 소시민적 지식인이 꿈꾼 현실 도피적 제3의 장소일 뿐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보다 폭넓게 그의 문학을 바라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의 문학 속에는 보다 많은 제3세계의 모습들이 어른거린다. 그러나 4.19혁명 세대가 제3세계라는 프로젝트에 품었던 기대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함께 어둠 속에 파묻혀버린다. 미국과의 혈맹 관계는 비동맹운동을 역병처럼 멀리해야 할 것처럼 만들었다. 자립과 해방, 통일 그리고 평화를 향한 꿈은 근대화와 성장이라는 환상에 의해 짓밟혔다. 박정희 정권의 반공주의는 민족주의의 허울을 걸쳤지만 피억압민족과의 연대와 단결을 향해 나아갔던 제3세계 민족주의의 국제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보수적 민족주의였다. 탈식민국가 대다수가 반대하고 양심적인 서구의 시민들이 거부했던 추악한 전쟁인 베트남전쟁에 한국은 파병을 하기도 했다.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되살아났다.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지식인과 청년층, 노동자, 농민들은 제3세계란 말에서 자신이 처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좌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민족경제론, 민족문학론이나 민족예술론과 같은 것이 폭넓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제3세계를 소개하는 다양한 책들이 출판되기 시작했고 전문 잡지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는 이미 때늦은 시점이었다.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된 바로 그 때는 제3세계란 프로젝트가 더없이 휘청 이던 때였다. 대서양 연안의 부유한 나라들은 케인즈주의적인 복지국가를 포기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정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들 나라들은 보다 평등한 세계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제3세계 프로젝트와 비동맹운동을 세계화의 급류에 휩쓸어버릴 태세를 하고 있었다. 잇단 외채위기로 인해 제3세계 많은 나라들은 파산을 하였다. 수출지향의 산업화를 통해 세계시장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이 제3세계 나라들을 엄습했다. 그러한 시점에 되살아난 제3세계 프로젝트를 향한 뒤 늦은 꿈은 다시 한 번 제3세계를 삽시간에 뇌리에서 사라지도록 이끌었다. 그 탓에 제3세계 프로젝트가 패배하도록 이끈 원인을 세심하게 분석하고 그 어느 시대보다 강력한 제국주의적 지배에 맞설 전략을 생각할 가능성은 마련되지 못하고 말았다.
제3세계 프로젝트를 망각한 대가는 오늘날 우리는 시장의 논리라는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허무주의의 늪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하나의 세계는 그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불평등, 억압과 갈등을 부인한다. 설령 그것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들의 잘못과 무지, 내부적인 실패 탓으로 돌려진다. 제3세계는 서로 다른 세계들이 있으며 이 세 개의 세계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원리에 의해 얽혀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1951년 어느 브라질 잡지에서 나는 ‘제3세계’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세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내가 제3세계라는 표현을 만들어 처음 사용한 것은 1952년 8월 14일 프랑스 주간지 옵세르바퇴르에서였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끝난다. ‘왜냐하면 과거의 제3계급처럼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며 경시되는 제3세계 역시 스스로 무엇인가가 되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같이 프랑스대혁명 때 씨에예스가 쓴 제3계급에 대한 유명한 문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제3세계란 말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인구학자였던 알프레드 소비의 말은 제3세계란 말에 담긴 함축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그것은 숙명과도 같은 자신의 신분적 지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시민들의 신분인 제3계급처럼, 제3세계는 새로운 세계의 시민들이 되길 원하는 자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금은 빈곤과 내전, 전염병에 시달리는 불쌍한 운명의 세계를 가리키는 전지구적 남반구(Global South) 혹은 남부(South)라는 이름은 더 이상 자신의 지위를 변화시키려는 자들의 열망과 의지를 담지 못한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여 탈식민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던 알제리 감독 모하메드 라크다르-하미나(Mohammed Lakhdar-Hamina)는 걸작 <불타는 해의 연대기, Wagai sanawat al-djmr, Chronique des annees de braise>로 1975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예언적인 말을 건넨다. “예전에 당신들은 가난하면서 자유로웠다. 이제 당신들은 그저 가난할 뿐이다.” 그의 말은 제3세계 프로젝트와 비동맹운동이 실패하면서 겪게 될 미래를 불과 몇 년을 앞두고 예견 했던 듯하다. 제3세계라는 낱말이 어떻게 남부라는 말로 대체되고 말았는지, 그리고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아마 모하메드는 예언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위협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남-남’ 협력을 통한 연대가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연대로부터 제3세계를 뒤잇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출현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것의 어머니였던 제3세계를 다시 환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