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제국주의 nuclear imperialism 核帝國主義

Gil Scott-Heron – New York Is Killing Me

1954년 3월 1일, 서태평양 비키니 환초 동쪽 167km 지점에 일본 참치잡이 어선 ‘제5 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가 떠 있었다. 고기잡이가 시작되기 전인 이른 아침이었다. 갑판에 나와 있던 서남은 명의 선원은 서편 멀리에서 작은 섬광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한참 뒤 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검은 재가 갑판에 쌓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선원들은 조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아이즈(燒津)로 향했다. 선원들은 구토와 두통을 호소하며 다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신도 카네토(新藤 兼人) 감독의 영화는 이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얼마 뒤 일본 수산청은 “미국이 비키니 환초에서 행한 수소폭탄 실험의 낙진이 이 배를 덮쳤다”고 발표했다. 미국도 책임을 인정했다. 실험현장에서 103km까지의 해역을 통제했지만, 풍속과 풍향이 돌연 바뀔 가능성까지는 내다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9월, 선원 한 명이 사망했다.

이들을 덮친 방사능 낙진은 비키니 환초에서 실행된 ‘캐슬 작전’의 일환으로서 15메가톤 급의 수소폭탄 폭발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핵폭탄의 끔찍한 위력에 고통을 겪은 바 있던 일본인들은 제5후쿠류마루 사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도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시민들의 청원이 모여졌다. 전국적으로 3천2백만 명이 서명에 참여했고 외국에서도 6억 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때마침 등장하고 있던 정치적 좌파와 노동운동 주도의 반핵운동이 가세하면서 이 움직임은 1955년 히로시마에서 국제 원자 및 수소 폭탄 반대 회의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대중들의 분노와는 상관없이 이미 일본은 ‘플로토늄 경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른바 1955년 체제라고 불리는 시대에 일본은 접어들고 있었다. 그해 자민당(自民党)이 창당된다. 그리고 같은 해 요미우리신문은 ‘평화를 위한 원자’라는 전시를 공동개최하고, 그해 12월에는 원자력 기본법이 통과되어 다음 해 1월 일본원력위원회(JAEC)가 설립된다. 위원회의 의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원자력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는 마츠모토 쇼리키(正力 松太郎)였다.

마츠모토 쇼리키는 전범용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구소련의 영향을 억제하기 위한 트루먼 행정부의 ‘진리를 위한 캠페인’을 위한 적역의 인물로 선택되었다. 미국 대사관과 중앙정보부 및 미공보국은 전시 체제에 활동했던 고위 관료들을 등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비밀경찰이나 생물학 및 핵무기 개발자들, 마피아 두목들이 미국이 관심이 둔 인물들이었다. 미국은 이들이 구소련의 영향을 차단하는 데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가운데 가장 적역은 쇼리키였다. 그는 전범으로 감옥에 있다 나온 후 요미우리 신문을 창간하고 일본텔레비전을 개국하는 것은 물론 프로 야구를 도입했다. 그는 일본 국민이 핵무기에 대해 품고 있던 반감과 원망을 잠재우고 평화적인 원자력 개발을 향한 길을 닦는 나팔수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에게 제5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 사태는 눈하나 꿈쩍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만주국을 이끌었던 역시 전범 출신의 정치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함께 자민당을 이끌어갔다. 자민당의 입장은 분명했다. 친핵, 친미였다. 그들은 ‘자유 아시아를 수호함으로써 공산주의를 억제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을 든든히 떠받쳐주었다. 기시는 중국의 인해전술에 맞서 국민을 지키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전술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은 이미 여러차례 중국에게 핵폭탄을 투하하겠다는 위협을 가한 바 있었고, 그럴 작정으로 이미 일본의 오키나와 기지에 TM-76 핵미사일을 비축해두었다. 이리하여 미국의 가장 큰 핵 의존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핵폭탄에 의해 초토화되며 패전을 경험한 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역전이었다.

1945년 이후 지구 행성의 대기, 땅, 해양 전체에서 자연방사선 수치가 급격히 증대했다. 급기야 소련과 미국은 1963년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무기 경쟁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내내 가속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핵우산 아래 놓인 나라들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핵 체제를 보완하는 무기급연료, 항공 수송 체계, 위성시스템을 위한 연료 등을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미국은 핵 억제를 위해 유엔이 주도했던 비핵지대 형성을 위한 다자간, 지역간 협약을 무시한 채 자신들에게 유용한 양자간 협약을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미국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핵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을 핑계로 핵무기를 향상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1955년 4월 24일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는 반둥회의를 결산하는 최종 성명(Final Communiqué)이 발표되었다. 모두 7개의 항목으로 이뤄진 성명의 주된 내용 가운데 두 개의 항목은 세계 평화와 협력의 진작 그리고 세계평화와 협력의 진작에 관한 선언으로 이뤄져 있었다. “핵무기 및 열핵무기의 생산, 실험 및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인류와 문명을 절멸의 공포와 염려로부터 구제하는 데 있어 절대적임”을 밝히고 이를 이룩하기 위한 “신속하고 단호한 노력들”이 행해져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열강들에게 핵무기와 관련된 일체의 실험을 중단하고 핵무기의 생산과 사용을 최종적으로 근절하는 목표로 나아가도록 촉구했다. 그리고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생산, 실험, 사용 금지를 비롯해 일체의 군사력과 무기를 신속히 규제, 제한, 통제, 축소하도록 모든 당사국들에게 호소”했다. 이러한 반둥회의의 호소는 곧 결실을 맺었다.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가 창립된 것이다. 그러나 비동맹운동이 제안한 이러한 호소는 강대국들을 움직이는 데 실패했다. 반둥회의 참가국 가운데 하나였던 일본은 이미 보았듯이 은밀하게 평화적 핵 이용이라는 선전과 더불어 핵폭탄에 대해 품고 있던 자신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었다. ‘우주소년 아톰(鉄腕アトム)’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의 버섯구름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영국은 호주 남부 사막지대에서 잇단 핵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 때문에 마랄링가와 피짠짜짜라 지역의 원주민들은 영원히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러나 핵무기의 원료인 우라늄을 채굴하던 광산도 역시 위험하긴 매일반이었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우라늄 분열 과정에서 배출된 물질을 흡수했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이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될지 알고 있었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는 이러한 우라늄에 의한 방사능 물질의 위험도를 측정하는 일을 수행했다. 그들이 마련한 연간피폭선량(mSv/year)의 기준은 100에서 다시 50으로, 이후엔 다시 20으로 수정되었다. 그 사이에 이러한 안전 기준에 따라 숱한 우라늄 채굴과 핵 실험이 이뤄진 뒤였다. 그럼에도 장기간의 잠복기를 틈탄 채굴과 실험은 지속되어 왔다. 콩고와 나미비아와 같은 지역에서 농민들은 부유한 나라들의 핵에너지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우라늄 채굴을 위해 삶의 기반이 되는 농업을 포기해야 했다. 이들 나라의 광산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이끌어가는 자본과 직접 연결되고 또한 이로부터 이권을 얻으려는 군사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내전의 인질이 되어왔다. 비동맹운동도 제3세계프로젝트도 힘을 잃은 지금 우라늄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을 저주와도 같은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구해낼 길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된 미국의 군사기지와 시설들은 핵제국주의를 지켜주는 보루의 역할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