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으로서의 정치: 미술이 정치와 상관하는 법

Bow Wow Wow – I Want Candy

1.
동시대 미술은 무정부주의적 직접민주주의와 오랜 동안 밀월 관계를 맺어왔다. 스스로 자신을 말해야 한다는 명령은, 참여, 협업, 대화, 소통, 공감 같은 윤리적 구호를 미술이 취해야 할 마땅한 정치적 좌표로 내세웠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아는 투명한, 자기중심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더불어 그것은 시간을 공간에 종속시킨다. 그 때 정치란 특정한 장소에 현전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 맺기로 축소된다. 그렇기에 자신이 경험하지 못할 미래를 바꾸는 일이자 자신이 겪어본 바가 없는 과거의 역사적 효과를 전복하는 것이 정치라는 관념은 맥을 못 춘다. 동시대미술이 짐작하는 정치란 현전적인 경험으로서의 공감과 동일시, 그리고 그러한 신체적 움직임을 서로 응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전시장이 자신의 의지와 의견을 투명하게 대표하고 반영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흩뿌린다. 미술관은 끊임없이 유사 무대 장치나 세트장 같은 장소로 자신을 변형하며 미술관이 민주주의적 경험의 장소라는 것을 과시하려 애쓰고 있다. 그 때문에 부쩍 자주 듣는 미술관은 민주적인가라는 물음은 실은 미술관의 정치를 은폐하려는 질문이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미술관은 자신을 가리는 숱한 가면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이벤트 공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미술관의 임시변통의 일시적 가장(假葬)은 정작 미술관이란 무엇인지 묻지 못하게 하는 눈속임이 된다.


‘대표’와 ‘재현’을 의심하는 철학적, 미학적 사변이 세상을 휩쓸고 간 뒤, 이러한 언어와 표현, 신체의 직접성에 쏠린 열망은 뜻밖의 것처럼 보인다. 동시대미술은 대의민주주의라는 전형적인 대표/재현의 체계가 초래한 자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능동적인 참여와 행위를 실현하는 것을 권장한다. ‘스펙터클’에 맞서 참여와 직접적인 자기표현의 ‘상황’을 만들자는 요구는, 현실적 사건들을 통해 뒷받침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촛불혁명(?)’이라는 수많은 시민의 직접행동이야말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증거라고 모두 믿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촛불혁명이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부패한 현실정치를 심판한 것이라는 발상은 정치를 정상화한다는 이데올로기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촛불 시민은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의 주술에 홀린 채 자신이 지닌 정치적 능력과 주권을 부인하였던 이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결정을 내리는 자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양도하였다. 그렇기에 그것은 현실정치(Realpolitik)라고 부르는 실제 정치 제도를 정상화하는데 기여할 뿐이었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정치의 지평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해 주는 의례를 상연했을 것이다.
한편 직접적 참여라는 가면을 쓴 현실정치 거부는 정치란 아무짝에나 쓸모없다는 냉소와 평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야말로, 정치에 대한 오늘의 정치적 사고를 요약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반정치(anti-politics)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정치란 정치에 충실해지는 방법은 정치를 거부하는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 틀린 생각처럼 보이지 않는다. 몇 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선거는 고작 해야 어떤 정당과 정치지도자가 인기 있는지 고르는 이벤트로 둔갑했다. 어떤 세계에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로서 구실하던 선거는 더 이상 불가능한 듯 보인다. 대통령 선거이든 국회의원 선거이든, 모든 실제 정치 안에서 이뤄지는 정치적 선택이란 변화에 실패한 구(舊) 정치세력에 반대하는 당파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니면 반대 자체를 구현하는 어떤 괴짜 같은 인물이 자신이 속한 당파를 능가하기도 한다. 우익 포퓰리즘의 득세는 이를 증거한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로장발롱은 이런 반정치적 현상을 두고 ‘포스트민주주의’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바 있다.
포스트민주주의가 득세하는 세계에서 정치란 현 상태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복잡한 장치처럼 보이게 된다. 정치가들은 점차 스타처럼 되어가고 선거와 대의가 암시하는 정치적인 시민은 소비자처럼 되어왔다. 어떤 세계에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는 소멸하고, 기성 정치권력에 대한 청원, 감사, 청문, 고소 등과 같은 전문가 집단들의 너무나 복잡하고 이해하기 까다로운 행위들이 민주주의를 위한 최선의 정치적 실천처럼 여겨진다. 대표가 사라진 세계에서 대표란 것이 그나마 가능하다면 그것은 법률가들이나 환경전문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시민운동가 같은 이들을 통해 대리되는 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참여로서의 정치와 극도로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매개 행위로서의 정치라는 양극 사이에서, 우리의 정치에 대한 생각은 휘청댄다.

2.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상상력의 마비는 동시대 미술의 실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무정부주의적인 직접민주주의의 환상과 짝을 이루는 미술적 실천의 사례는 역시 ‘사회참여예술(socially engaged art)’일 것이다. 대화의 미술이든 공공미술이든 아니면 이를 이끈 미학적 주장을 좇아 관계미학적 작업이라 부르든, 1990년대에 발흥해 오늘까지도 역시 숱한 전시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다양한 흐름들은 이러한 직접적인 자기 표현을 권장하고 실행한다는 점에서 수렴한다. ‘함께-여기에-있음’이나 ‘함께-함’을 촉구하는 다양한 건축적 구성과 무대 장치, 투표와 의견제시, 게시판, 서베이와 같은 소소한 기술적 수단들은 많은 작업들이 애용하는 재료가 되었다. 그것은 탈중심화된 주체를 내세우며 자기의식적인 주체를 배격하던 숱한 철학적인 주장을 순식간에 부인한다. 현전성에 대한 공격을 내세우며 차연, 대리보충, 사후성, 상징적 봉합 등 온갖 철학적 소동을 반복하던 일들 역시 찰나에 망각된다. 그 자리엔 ‘지금-여기에-있음’이라는 모조(模造) 현전성을 상연하는 퍼포먼스가 들어선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주관적인 만남 혹은 공동체 되기의 환상을 거짓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클레어 비숍은 인공지옥 Artificial Hells에서 관계미학과 시비하며 화해의 공동체라는 그릇된 환영이 아닌 적대적 사회관계를 폭로하고 반성하는 비동일시가 동시대 미술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많은 양보를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여의 주체가 되기에 앞서 오늘날 서로의 자기되기를 제약하는 적대를 드러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미술에서의 정치를 여전히 ‘주체의 정치학’에 가둔다.
적대란 따뜻한 호혜적, 대칭적인 관계가 아닌 불화, 갈등적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비숍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적대란 서로가 다투고 증오하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불가능성 자체를 뜻한다. 그리고 관계 맺기의 불가능성은 그를 도모하는 주체의 의식과 의지 탓이 아니라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객관성의 규정에 주체가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나은 급진적인 주체의 정치학을 제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도르노의 말을 빌자면) 객체의 우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객체가 주체에 앞선다거나 현실이 의식에 앞선다는 식의 주장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것은 객체가 자신의 자기로서의, 주체로서의 불가능성을 억압하기 위해, 불가능성과 모순을 제거한 상징적 세계에 통합된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객체는 자신에 동조된 주체의 지각, 경험, 의식을 생산하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추상 회화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당신은 당신이 공산주의자, 그러니까 더 이상 살기엔 알맞지 않은 세계를 바꾸려고 하는 이라고 지껄인다.…하지만 당신이 실제로는 지배 계급의 문화적 시종이었으며, 물질적 사물에 주의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야말로 당신의 엉큼한 속셈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투쟁은 바로 그 사물들에 관련된 것이고, 당신의 주인들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은 바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사물들의 문제라면, 미술에서 정치의 문제가 객체의 규정에 대한 문제라면, 계속 주체의 정치학 내부에서 공회전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객체에 의한 주체의 규정을 가리키는 말은 이데올로기이거나 무의식이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일은 비판이라 불렸다. 미술의 정치가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의 예술적 실천이라는 것을 지난 시절의 잠꼬대라고 하려면, 지난 시절이라 생각했던 자본주의적폭력의 대대적인 귀환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어야 할 것이다.

_<월간 미술>을 위해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