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아옌데 Salvador Allende (1908-1973)

Santiago Alvarez – Now! (1965)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일 파블로 네루다.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를 이렇게 기억한다. “방금 우리 민중은 사막의 초석 광산에서, 해저 석탄 광산에서, 험준한 고산 지대의 구리 광산에서 장엄한 해방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의 결과 아옌데라는 인물은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는 즉시 개혁을 단행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외국인의 손아귀에 들어간 국민의 자원을 환수하라는 뜻이었다. 먼 외국에서도 아옌데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경의를 표했고, 우리 정부의 특출한 다원성을 칭송했다. 뉴욕의 국제연합 본부가 창설된 이래, 세계 각국의 대표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은 사람도 없었다. 여기 칠레에서는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희생정신과 국민적 자부심과 주권이라는 기초 위 진정으로 올바른 사회를 건설하고 있었다. 헌법과 법률, 민주주의와 희망이, 우리 편 즉 칠레혁명의 편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불과 3년을 버티지 못했다. 미국의 CIA가 주동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는 칠레 혁명을 짓밟았다. 무엇보다 아옌데가 구리를 국유화한 것이 문제였다. 만약 이것이 다른 나라들이 따를 모범이 된다면 이는 미국은 물론 모든 발전된 국 식민국가에겐 악몽이 될 것이었다. 막대한 수입의 원천인 구리를 소유하고 있던 미국 기업들은 군부를 은밀히 지원했다. 칠레의 또 한 명의 대통령이었던 1백 년 전 발마세다 대통령이 영국이 차지한 질산염 광산을 국유화하려다 역시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던 일이 다시금 반복되었다. 네루다는 다시 이어 말한다. “불멸의 국민적 가치를 지니는 아옌데 정부의 정책과 업적은 칠레 해방을 원치 않는 적들의 분노를 샀으며, 그 비극적인 상징이 바로 대통령 궁 폭격으로 나타났다. … 칠레의 공군 조종사들은 180년 동안 민선 정부의 보금자리였던 대통령 궁에 급강하 공격을 퍼부었다.” 모두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에 실린 글이다. 이 겸손한 시인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향한 뜨거운 탄식을 토하며 자신의 자서전을 맺는다. 그의 자서전의 말미는 간략한 아옌데의 전기인 셈이다. 네루다는 아옌데가 숨을 거둔 후 얼마 뒤 같은 해에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

네루다는 칠레 공산당의 당원이었고 한 번도 그 당의 당원임을 후회한 적이 없다. 끔찍한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남미에서 공산당이 집권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조직된 노동자와 농민, 청년층의 지지를 받아도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언제나 다른 세력과의 연합이 불가피했다. 네루다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기꺼이 아옌데를 지지했다.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은 승리했고 네루다는 얼마 뒤 파리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이 위대한 시인은 아옌데의 사람이기도 하였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진처럼 찬란하면서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혁명적인 정치 지도자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최후만을 기억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배신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아옌데의 삶은 칠레는 물론 남미에서 전개된 대중들의 투쟁의 기나긴 역사를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옌데는 1908년 칠레 항구도시이자 그가 자주 정치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생 변함없이 견결한 사회주의자였지만 그의 배경은 제법 화려한 중산층 출신이었다. 그의 선조들은 급진적인 정치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아옌데에게도 전승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장 배경을 지닌 많은 이들이 아옌데와 맞선 정적이었음을 생각하면 아옌데의 성장과 변모는 남다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옌데는 자신의 할아버지처럼 가장 가난하고 곤궁한 이들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품고 의학을 전공으로 택한다. 그는 마치 프란츠 파농을 연상케 하는 졸업 논문을 쓰고 대학을 졸업한다. 논문 제목은 ‘정신위생과 범죄’였다. 그가 산티아고 정신병원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논문이었다. 그는 칠레의 노동자계급과 빈민층의 가족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가 훗날 모자보건을 비롯한 공중보건에 평생 큰 관심을 기울인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아옌데는 사회주의자로서 정치활동에 참여한다. 이합집산 하는 다양한 정치 조직과 정파 사이에서 그가 가장 오랜 동안 적을 두고 활동한 곳은 사회당이었다. 그는 이 정당의 후보로서 상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하고, 여러 차례 좌파들의 연합정치세력의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인민행동전선에서 인민연합으로 바뀌는 다양한 좌파연대체를 대표하는 후보로서 그가 반복해 선택되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대중들로부터 두터운 지지를 받았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체 게바라인가 살바도르 아옌데인가. 아마 이것은 남미에서의 제3세계 프로젝트를 지켜보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좀체 떠나지 않는, 그러나 잘못된 물음일 것이다. 아옌데는 선거제도를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던 인물로서 많은 이들로부터 기회주의자, 의회주의자, 개량주의자라는 조롱과 비판을 받아야 했다. 반면 체 게바라는 혁명적인 투쟁의 순교자로서 어떤 현실 정치 제도와도 타협하지 않고자 했던 순결한 사회주의자로서 추앙된다. 그러나 이는 매우 그릇된 이미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커다란 정변이 드물었고 나름대로 의회제도가 구실하고 있었던 칠레에서 군사적인 게릴라투쟁을 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쓸데없는 일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불균형한 자원과 수단으로 선거에 임하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실패, 그리고 승리의 코앞에서 잇달아 좌절하면서 비롯된 깊은 실망과 회의, 그리고 쿠바 혁명으로 대표되는 군사적인 혁명과 게릴라 투쟁의 전과(戰果)를 둘러싼 다수의 열광과 흥분. 이 모든 것은 역시 아옌데를 압박하고 또 위기에 처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옌데는 눈먼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헌법이 부정하지 않는 한 헌법이 마련해주는 제도적 공간 안에서 자신의 사회주의를 실천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아옌데는 무자비한 독재정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시민의 권리마저 침해하는 곳에서만 게릴라운동이 발생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그에게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반제국주의자로서 평등과 정의를 위한 평화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정치가로서 그가 무엇을 행하고 실천했는가 일 것이다.
아마 게바라인가 아옌데인가를 따지는 물음을 보잘 것 없게 만드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일 것이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목숨을 잃고 그와 함께 하던 게릴라 부대 생존자들이 칠레로 탈출했을 때 이들의 구출을 위해 아옌데는 팔을 걷어붙였다. 혁명좌파운동을 지지하는 급진주의자들이 게릴라 부대를 지원하고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남미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을 강화하기 위한 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자신들의 이해에 반하는 정권이 들어서면 군사쿠데타를 조종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경제적인 종속을 위해 달러 외교를 펼치는 방식으로 남미를 옥죄고 있었다. 게바라의 게릴라 부대가 칠레에 입성하고 그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빨갱이 공포 선동에 나서려는 칠레 지배집단에겐 아주 좋은 빌미가 될 수 있을 때였다. 아옌데는 상원 연설에서 게바라를 추모하며 그를 애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연설도중 게바라가 그에게 선물로 준 게릴라전 교법을 꺼내 보이기도 했다. 게바라는 그 책에 이런 글귀를 남겨두었다. “똑같은 목적을, 나와 다른 수단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이에 더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추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59년 쿠바 혁명이 성공한 직후 아옌데는 쿠바를 방문하여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그 때 카스트로는 자신의 동지에게 “라틴아메리카에서 다음번 혁명을 쟁취해낼 인물을 알고 있다”며 아옌데를 소개했다. 그들은 제국주의 없는 사회주의 라틴아메리카를 염원하는 형제들이었던 것이다.
이제 아옌데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하여 다시 주목할 때가 왔을 것이다. 분홍색 물결이 휩쓸며 신자유주의적 라틴아메리카를 새로운 평등의 대륙으로 재건하기 위한 시도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와 농민의 빈곤과 착취를 해결하는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결국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아옌데가 이끈 인민연합이 집권하며 내놓았던 40개 항의 프로그램은 다시금 귀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자의 경영참가를 보장하는 민주적으로 계획된 경제, 주민소환제도를 포함한 정치개혁, 남녀 동일임금제와 국민 생활임금제, 사회보장제도 확대, 전국민 대상 예방치료 의료보장 등의 사회개혁 프로그램 등. 이는 오늘날 권장되는 원칙과는 전연 다른 것임에 분명하다. 지난 수십년 간 어디에서나 이런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모든 것은 시장에 의해 결정될 뿐이며 국가가 나서는 일은 가급적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 더 좋은 것은 각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자기 개선의 의지가 모여 만들어지는 공동체나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협치 만이 관료주의적인 비효율과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것, 운운. 그러나 이는 마치 각자 자신의 삶은 스스로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좋고 어렵게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주술과도 같은 말들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옌데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칠레 민중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옌데, 그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에 딱 맞는 인물이다. 그는 “하루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좋은 사람이다./ 1년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더 좋은 사람이다./ 여러 해 동안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더욱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평생을 두고 투쟁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아옌데는 영원히 칠레와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남반구의 푸에블로(pueblo) 즉 민중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이 마지막 순간에,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연설을 통해 저는 여러분이 이 교훈을 얻길 바랍니다. 국내의 반동 세력과 결탁한 외국 자본과 제국주의가, 군대가 자신의 전통을-군 출신이면서도 그 희생양이 된 분들, 즉 슈나이더 장군이 가르쳐 줬고 아라야 사령관이 다시 확인을 한 그 전통을-깨버리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 말입니다.
이제 오늘 저들 반동 세력은 자신들의 이윤과 특권을 끈질기게 지키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려 권력을 탈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누구보다도 먼저 이 땅의 겸손한 여성들, 우리를 믿어 준 여성 농민들, 어린이들에게 쏟은 우리의 관심을 알아준 어머니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또한 이 나라의 참된 전문가들에게 자본주주의 사회를 옹호하는 전문가 단체, 기득권 단체가 저지르는 방해 선동에 맞서 줄기차게 활동한 애국적 전문가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함께 노래하고 이 투쟁에 자신들의 행복과 영혼을 바친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제 몇 시간 만에 이 나라를 장악한 파시즘에게 박해받을 칠레인,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암살 테러 속에서도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의 침묵에 맞서, 다리를 폭발하고 철로를 절단하며 석유 파이프와 가스 파이프를 파괴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들은 위태로운 상황에 있습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겁니다.
라디오 마가야네스는 곧 끊어질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제 차분한 목소리도 더 이상 여러분에게 닿지 않겠지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듣게 될 테니까요. 저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겁니다. 적어도 당당한 애국자의 기억 속에 함께 할 겁니다. 민중은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만, 스스로를 희생하지는 마십시오. 민중은 굴종과 박해를 허용해선 안 되는 법이지만, 스스로를 자학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그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이 암울하고 가혹한 순간을 딛고 일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할 겁니다. 이걸 잊지 마십시오. 자유로운 인간이 활보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크나큰 길을 열어젖힐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게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저는 제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합니다. 결국에는 제가 대역죄인과 비겁자 그리고 반역자를 심판할 도덕적 교훈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궁에서의 마지막 라디오 연설 중에서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