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미술관 Museo de la Solidaridad, Museum of Solidarity (1971-1973)

Agnes Baltsa – To Treno Fevgi Stis Okto(The Train Leaves At Eigh)

칠레 산티아고 공화국 거리 475번지에는 귀환한 ‘살바도르 아옌데 연대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1991년, 세상을 떠돌던 ‘살바도르 아옌데 국제 저항 미술관’(1975-1990)이 드디어 칠레로 돌아온 것이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죽음 이후, 이 미술관은 칠레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표류하였다. 아옌데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20년째 되는 해, 이 미술관은 과거의 모든 기억을 되찾으며 부활하였다. 그것은 비엔날레나 마니페스타와 같은 전지구적인 미술 이벤트가 흥청대며 새로운 미술관들이 다투어 건설되던 하던 오늘의 풍경과 대조할 때 너무나 거리가 먼 미술관이었다. 이 미술관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가 만들어낸 ‘글로벌 컨템포러리(global contemporary)’ 미술이 상상하는 미술과는 전연 다른 미술을 상상하였다. 무엇보다 그 미술관은 미술관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국제주의적인 유토피아 미술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끌었던 인민연합은 자신들이 민중들의 연합을 이끌고 있음을 선거운동을 통해서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아옌데는 1971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 전 이미 여러 차례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경력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옌데는 칠레 민중들을 만날 수 있다면 모든 곳을 누볐다. 산간벽지의 광산노동자이든 인적이라고는 없었던 저 먼 곳의 농장의 농민들도 그는 멀리 하지 않았다. 1958년 선거운동 시절 아옌데는 자신이 후보였던 인민행동전선을 위한 선거유세에서 ‘승리의 열차’를 활용했다. 그 열차는 인민행동전선을 지지하는 음악가와 예술가, 지식인과 정치인 등을 가득 태우고 있었다. 물론 파블로 네루다도 그 열차의 탑승자였다. 빅터 피케로아 클라크가 쓴 혁명적 민주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는 승리의 열차의 모습을 이렇게 감격적으로 전한다. “아옌데를 태운 ‘승리의 열차’가 마을에 도착한다는 건 대단한 행사였다. 대중가요를 들을 수도 있고, 시인이 직접 낭송하는 시도 듣고, 당대의 인기 스타를 만날 수도 있었다. ‘승리의 열차’는 모두 136곳을 방문했다. 최대 하루 10곳에서 유세를 펼쳤다. 유세가 열리는 곳마다 수천 명이 운집해 아옌데의 연설을 들었다.” 그 다음의 선거운동에서도 역시 아옌데는 같은 전략을 펼쳤다. 이번에는 ‘승리 버스’였다. 아옌데는 낡은 대형 버스에 소형 발전기와 천막 스크린, 영사기와 음향기기를 장착했다. 그리고 버스의 지붕은 간이 무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차체 내부에는 각종 그림 및 인쇄용 물품을 완비했다. 그리고 유세장에 도착하면 버스는 마을을 돌며 유세를 알리고 영화를 상영했다. 지지자들에겐 신문을 가져오게 해 아옌데의 모습을 붙이고 이를 다시 공공장소에 부착하도록 했다. 예술가들은 바위나 거리 벽면에 아옌데의 모습과 지지구호를 그렸다.

그러나 1971년 인민전선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임했을 때, 아옌데는 선거운동에 그치지 않는,제3세계 예술운동, 그 가운데서도 미술관의 모습과 전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실험을 동원했다. 그것은 단순히 선거 캠페인에 예술을 활용함으로써 예술과 정치의 만남을 중재하는 일이 아니었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아옌데는 ‘인민연합시각예술가위원회’와 함께 하고 있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이 위원회는 “민중의 승리에 바치는 경의” 전시를 이끌었다 전시를 조직한 곳은 라틴아메리카예술연구소였다. 이 전시에는 칠레는 물론 남미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전시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참여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향한 전폭적인 지지와 기여”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했다. 전시를 이끈 위원회는 선거운동 기간에도 아옌데의 지지를 위한 전시를 개최한 바 있었다. 이들은 30여개의 실크스크린을 제작해 칠레 전역에서 전시하였다. 원하는 이는 매우 값싼 가격에 작품을 구입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남미 여러 나라에서 순회 전시되기도 하였다. 위원회는 이 전시가 “예술이 부유한 자들, 소수의 배타적인 특권층만이 살 수 있는 대상이 되길 거부하는 우리들의 뜨거운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칠레의 헌법 상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대통령직에 취임할 수 있었던 아옌데는, 미국의 노골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지배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던 의회로부터 한참의 망설임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정당한 선거에서 압승한 그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1970년 10월 26일 마침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추인된 뒤, 위원회는 ‘민중문화열차’를 이용해 다시 순회 전시를 시작했다. 이 벽 없는 미술관은 순회 문화 플랫폼로서 톡톡한 구실을 했다. 민중문화열차에는 미술 작품 뿐 아니라 라이브 공연, 영화 등이 함께 했다. 한 번도 영화를 보거나 미술작품을 보지 못했던 이들은 나들이옷을 입고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참여한 예술가들 역시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을 맛보았다. 민중문화열차는 고급예술은 대중적일 수 없다는 흔한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연대미술관”이 윤곽을 드러낸 것도 이즈음이었다. 선거에 당선되었지만 자신들의 권력을 포기하지 않고 되찾으려 했던 구 지배계급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집요하고 잔혹한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남미 전역으로 확산되었던 반공주의 프로파간다는 칠레에서 가장 극성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외국의 주요 언론사들은 물론 칠레 전체의 주류 언론들이 곧 전체주의적인 공포의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는 흑색선전에 여념 없었다. 예술가들은 이렇게 궁지에 몰려가는 정권을 방어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진실 작전”이라는 캠페인을 조직했다. 그들은 지배 언론과 정당들이 퍼뜨리던 더러운 루머에 맞서기 위해 칠레 곳곳을 누비며 활동했다. 이를 위해 50명이 넘는 예술가, 영화감독, 음악가, 시인, 성직자, 저널리스트 등이 해외에서 초청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직접 대중들과 대화를 나누며 얻은 지혜를 자신들의 세계에 알리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이 과정에서 새로운 미술관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튀어나왔다. 칠레의 혁명적인 투쟁을 지지하는 예술가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전에 없던 미술관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마침 비동맹운동의 사무국이자 제3세계운동의 요새로 간주되던 유엔 무역개발회의가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아옌데는 이 아이디어에 즉각 지지를 보내고 유엔 무역개발회의를 위해 신축되고 있던 건물을 새로운 미술관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곧장 ‘국제예술연대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를 이끈 이는 칠레에 망명 중이던 브라질 미술평론가 마리오 페드로사(Mario Pedrosa)였다. 아옌데는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평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칠레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며 전 세계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기증하도록 부탁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7백여 작품들은 남미 사회적 리얼리즘을 비롯해 엥포르멜, 추상표현주의, 개념주의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콜렉션을 구축하기 위한 절충적인 수집의 결과는 아니었다. 위원회는 ‘필수 선언’이란 것을 발표하며 자신들이 어떤 작품을 선택하며 어떤 미술관의 원칙을 견지하고자 하는지를 명료하게 주장했다. 새로운 미술관은 기존의 미술 체계 그리고 나아가 저 멀리 외딴 곳에 자리잡은 채 부를 집중하면서 예술 및 예술가를 능멸했던 미술 제도를 거부했다. 연대미술관은 ‘미술관에 맞서는 미술관’, ‘안티-미술관’이 될 터였다. 그러나 이 벽 없는 미술관은 자신들이 수집한 작품들로 전시를 조직하며 마침내 새로운 미술관에 정착하기 전, 군사쿠데타가 발발하였다. 새로운 미술관을 창설하려던 실험은 무산되고 말았다. 인민연합과 관련한 무엇이든 없애고자 했던 군사독재정권은 큐비즘에 관한 책도 공산주의 쿠바를 연상시킨다며 불태워버렸다. 기증된 7백여 작품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망명 길에 오른 칠레의 예술가들과 그들과 기꺼이 연대한 예술가들 및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이 미술관의 이상을 지속하는데 혼신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불발로 그친 채 사라진 ‘연대미술관’을 대신해, ‘살바도르 아옌데 국제저항미술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새롭게 수집한 작품들로 세계 전역에서 칠레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예술 운동을 이어갔다.

1972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개최된 유네스코UNESCO 세미나에서는 오늘날 새롭게 부활한 미술관을 둘러싼 토론이 열띠게 펼쳐졌다. 미술관 노동자들은 문화적 재생과 정치적 해방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미술관’ 혹은 ‘통합 미술관’에 관한 제안을 쏟아냈다. 그로부터 얼마 뒤 1979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는 1979년 쿠바 아바나에서의 제6차 비동맹회의에서 “문화적 장에서의 탈식민화를 위한 결연한 투쟁”을 언급했다. 그것은 지적 시민주의와 문화적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탈식민의 중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임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제3세계를 이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발언하는 장소로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미술관의 미래를 향한 모든 토론과 대화의 뒤꼍에는 ‘연대미술관’이 메아리처럼 주변을 맴돌고 있었음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미술관은 오늘날의 타락한 미술관을 부정하며 ‘래디컬 뮤지엄’을 찾기를 요청하는 발언들이, 귀 기울여야 하는 곳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물론 연대미술관은 제3세계 프로젝트와 비동맹운동이 정치적 이상을 넘어 자신의 미학적 이상을 제출한 역사적 투쟁이었음을 상징한다는 것, 역시 잊지 않고 밝혀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