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닦으며 – 서문을 대신하여

Bon Iver – Naeem

반란자 내 아들이 눈 뜨면
다른 태양을 보게 할 거예요
– 에메 세제르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2015)은 반세기 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의 기억을 쫓는다. 그 기억을 쫓는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에 비친 슬픈 눈길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공산당이 있었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는 1965년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대학살이 있었다. 학살당하고 유배당한 이들은 공산당원들뿐 아니라 노조 활동가, 농민운동가, 비판적 지식인, 청년학생들이었다. 공산당 학살은 반둥회의에서 전환점을 맞이했던 인도네시아의 제3세계 프로젝트가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이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검안사(檢眼士) 아디 룩쿤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잔인하게 살해당한 형의 살해자들을 찾는다. 자신의 형, 람리의 살해 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웃음과 연극적인 몸짓으로 당시의 학살을 증언한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왜 이미 지나간 일들을 들추려고 하느냐고, 지나간 역사를 다시 말해 무엇 하냐고 아디에게 다그쳐 묻는다. 급기야 그들은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고 역정을 낸다. 이 책은 바로 그를 하고자 한다. 문제를 일으키고 가능하다면 말썽을 일으키는 것.

이 영화가 개봉된 후 아디는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학살자들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를 상황에서 목숨을 무릅쓴 자신의 참여에 관해, 이렇게 밝혔다. “검안사로서 나는 사람들이 보다 잘 볼 수 있도록 도우며 인생을 살아왔다. 이 영화를 통해 나는 똑같은 일을 하고 싶었다. 거짓 치장되고 침묵에 묻혔던 1965년의 학살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은 이들이 보다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아디의 용기에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그리고 그의 쓰라린 고통에 비견한다는 것이 사치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우리의 눈을 닦는 일을 하고자 했다. 이 책은 우리의 눈길 바깥에 있던, 적어도 잘게 쪼개진 지역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나 알려져 있던 수많은 일들을 가능한 큰 그림 속에 담고자 애썼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세계사 쓰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시시콜콜한 개인의 역정과 짧은 한 해의 숨 가쁜 역정을 다루는, 역사 이후의 역사를 상징하는 글들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지금, 세계사를 엿보겠다는 야심을 품은 책을 만드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지 모른다. 이 책은 20세기의 후반부에 등장했다 소멸했던,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지하에서 잠복하고 있다고 여기고 싶은, 역사적 전환을 다룬다. 그리고 그 전환이 추구했던 이상과 실천을 발굴하고자 한다.

이 책은 제3세계와 비동맹운동이라는 프로젝트의 흥망성쇠를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었던 다양한 인물, 사건, 배경, 열정, 이상, 사고, 상상, 정치, 투쟁, 실천, 배반, 좌절, 교훈을 (지극히 선별하여) 증언한다. 그것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라는 지리적 장소에서 펼쳐진 역사가 아니라 냉전의 시대이자 실패한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시대로 알려진 20세기의 후반부가 탈식민의 시대이자 민족(해방)의 시대이며 또 다른 근대성의 실험이 이뤄진 시대임을 상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무엇보다 현재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침울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저 멀리서 반짝이고 있는 유토피아적인 섬광을 확인하고 식별하는 몸짓을 시도한다.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초래한 숱한 참화와 고통, 착취와 수탈, 불평등과 부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바로 그 유토피아적인 프로젝트의 실패와 배반이 있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여긴다.

이 책은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2020년 개최되는 전시 <연대의 홀씨>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이 전시는 동시대 예술이 상대하는 시간성과 역사는 무엇인가를 따지게 될 것이다. 제3세계 프로젝트와 비동맹운동의 역사는 그를 위해 가장 귀중한 참조 대상이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이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하며 책임편집자는 두 명의 편집자를 위촉하여 이 책에서 수록될 표제어들을 선별하고 책에서 다룰 역사적 시대를 조감할 수 있는 타임라인을 구성함은 물론 사전 조사와 연구를 실행하였다. 사전의 표제어들은 제3세계 프로젝트와 비동맹운동을 구성하는 주요한 인물, 사건, 투쟁, 운동, 텍스트 등을 자유롭게 망라한다. 그리고 각각의 표제어는 제3세계 프로젝트와 비동맹운동이 전개된 역사적 시대의 ‘총체성’을 구축하는 하나의 단편이자 알레고리에 다름 아닌 것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항들이 맺고 있는 연관과 반향은 국제주의적 민족주의에 의해 추동된 이 역사적 흐름의 특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각의 표제어를 서술할 때 우리는 통상적인 사전식 서술에서 비껴나 다양한 삽화와 사건, 인물들을 출현시키며 각각의 주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상연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조금 건방을 떨어도 좋다면 우리는 ‘제3세계의 해석학’이라 불러도 좋을 아니면 누군가의 말을 빌자면 ‘남부의 인식론(epistemologies of the South)’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서툴게 나마 넘보고자 했다. 이 책이 마땅한 깊이와 폭을 아우르려 한다면 상당한 조사, 연구, 수집, 토론들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책은 여러 사정의 제약으로 인해 그러한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은 숱한 누추함과 허술함을 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이 다시 누군가에 의해 개정되고 증보될 기회에 열려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책이 세계사 쓰기에 참여하는 새로운 저자들에 의해 확장되고 변주되어 마땅히 풍성하고 긴요한 역사의 지도책이 되길 바라 마지않는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 책은 처음 비동맹운동(NAM: Non-Aligned Movement)의 약어인 NAM이란 이름으로 기획된 일련의 이벤트, 그러니까 NAM학교, NAM극장, NAM토론회 등과 같은 다양한 이벤트와 하나의 묶음을 이루고 있었다. NAM(이 말은 또한 ‘글로벌 사우스’를 가리키는 ‘남(南)’이라는 우리말을 떠올리게 한다)이란 낱말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터에, 그럼에도 우리는 비동맹이란 말을 간직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동맹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려니와 역사를 경험하고 조망하는 오늘날의 추이와도 동맹하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거짓된 신념이나 지식과 동맹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책으로 제목을 읽어주길 부탁드린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지원을 제공한 광주 아시아문화전당과 <연대의 홀씨> 전시에 감사를 전한다.

  1. 4. 6.

편집자들을 대표하여

_ <비동맹독본> 서문을 위해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