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변증법: 한국전쟁을 아시아화하기

Power To The People – John Lennon/Plastic Ono Band

1.

나는 한국전쟁이 벌어진지 15년도 훌쩍 지난해에 태어났다. 전흔은 거의 모두 사라지고 없었을 무렵이었으리라. 그런데도 어린 소년이었던 내게 또렷이 기억에 남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의수나 의족을 팔던 상점들의 정경이었다. 그 상점들은 시청 근처 관상대를 오르는 언덕 옆에 자리했던 원호처 옆에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그 상점의 진열창 안에는 먼지를 뒤집어 쓴 목발이나 기괴한 분홍빛이 감도는 살색의 의족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오랜 동안 닦지도 손을 보지 않아 거무튀튀한 갈색으로 변해버린 의수(義手)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나는 가지런히 정렬된 다른 길이의 그 플라스틱 손가락들을 오랜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다. 비명과 포연, 고통으로 일그러진 무시무시한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나는 그 손가락들이 언젠가 벌어졌던 불길한 재앙을 가리키는 손짓처럼 보였던 싶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강원도 북쪽의 작은 소도시였다. 그곳에서 한국전쟁은 언제나 음산한 안개처럼 머물고 있었다. 시내의 유명한 내과병원의 원장이 대한항공 납치사건으로 북으로 갔다거나, 남대천 건너 개량주택 마을에 살던 누군가가 이불 아래에서 단파라디오를 듣다 간첩으로 끌려갔다거나, 동네 끝 시장 어귀에 늘 얼씬대던 미친 거지는 실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너무 똑똑해 빨갱이가 되었다가 곤욕을 치르곤 저렇게 실성하곤 말았다거나 하는 소문 또는 괴담이 늘 먼지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정작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 속에는 없었다. 경포대 옆에 있던 충혼탑으로 이끌려가 억지춘향으로 묵념을 할 때에나 한국전쟁은 공식적으로 세상 속으로 등장했다. 반공웅변대회나 무장공비 사건 같은 것이 터지면 곧잘 공설운동장에서 열리곤 했던 궐기대회 같은 곳에서, 6.25는 미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다. ‘잊지 말자 6.25’라고 외치곤 했지만, 잊지 않아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는 요령부득이었다. 그 즈음 인기 있던 TV 드라마인 <전우>에서 보던 그 전쟁의 풍경을 통해서는, 도무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그저 악(惡)이거나 적(敵)이기라는 추상적인 호명을 통해 집요하게 상기될 뿐, 구체적인 원망과 적의를 동원하기가 난감하기만 것이었던 ‘북’이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2.

김동춘은 전쟁과 사회의 ‘책머리에서’ 자신이 한국전쟁에 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품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필자는 재개발․철거 현장에서의 폭력이나 노사분규 현장에서의 구사대 폭력, 사용자들의 ‘빨갱이 시비’ 등을 연구자의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그것이 사회학 교과서에 나타난 단순한 사회갈등 social conflict이 아니라 전쟁 war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각종 공안사건과 고문 등의 인권 침해 사례, 조선일보나 한국논단에서 제기한 색깔시비 등을 보면서 국가 혹은 극우세력의 폭력적 성격과 그에 대한 민중들의 지금까지의 적응행동을 새롭게 이해하지 않으면 오늘의 한국 사회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결국 필자는 폭력을 단순한 방법이나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냉전자본주의적 성격을 갖는 한국의 사회관계와 재산소유관계, 즉 경제질서와 그것을 보장하는 정치적 역학관계와 서로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회에 만연한 폭력, 그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바로 현재진행형이며 한국 사회의 지배질서 그 자체라는 생각이 자꾸 구체화되면서, 필자가 연구자가 되기 이전에 듣고 보았던 일들이 하나의 틀로서 정리되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6, 53쪽.

여기에서 김동춘은 한국전쟁을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사태가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 전체를 투시할 수 잇도록 하는 불변항으로 자리매김한다. 한국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표현은 걸핏하면 등장하지만, 그것은 정전(停戰) 상태에 있기에 전쟁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라는 상식을 전달하는데 머무른다. 그러나 김동춘은 한국 현대사의 구비마다 자리한 사회 갈등이 취하는 모습을, ‘전쟁’과 진배없는 것으로 떠올린다. 이해다툼을 둘러싼 갈등이든 정치적 변화를 둘러싼 제도적이고 비제도적인 갈등이든 이 모든 것에는 언제나 전쟁의 낌새가 감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사회학자로서 ‘단순한 사회 갈등이 아니라 전쟁과 같다는 느낌’을 실마리로 삼아 한국전쟁은 지속되었다고 짐작한다. 그의 뇌리 속에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끊임없이 복제된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학살은 바로 한국전쟁의 재연”이었으며, “1970년대 정치범에 대한 살인적 전향공작 역시 ‘전쟁의 지속’으로 다시 해석되었으며 1980년대 초의 ‘녹화사업’과 고문, 살해 모두가 오직 전쟁 중에 있는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다시 정리”되었다고 단언한다. 앞의 글, 54쪽.

이런 생각에 이를 때, 그가 한국 전쟁을 어떻게 다시 쓸 수 있었을 것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미․소 강대국의 입김 속에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지 못했던 코리언에게는 한국전쟁을 코리언화하는 작업이 가장 시급”한 것이라고 자신의 연구를 정의할 때, 앞의 글, 87쪽.
그의 생각 속에는 그간의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 (북한의 공산화 전략과 그를 지지한 소련과 중국의 지지로 인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전통주의와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수정주의를 넘어서야 할 필요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통주의/수정주의 대립구도는 전쟁 당사자이자 최대 피해자인 코리언의 주체적 인식의 산물”이 아닌 탓이다. 앞의 글, 85쪽.
그리고 우리는 한국전쟁을 역사적으로 살필 새로운 궤도로 진입할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이는 냉전의 격전지이자 모범적인 현장처럼 생각되었던 한반도에서의 현대사를 ‘폭력’을 동원한 끝없는 지배의 연속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냉전이 각인했던 전쟁의 억지와 강요된 평화와 달리 참화와 재난에 다름 아닌 경험의 세계야말로 한국에서의 냉전이었음을 재발견하게 된다.

3.

이른바 ‘국가폭력’은 지난 수십 년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사로잡은 담론적인 의제였다. 이는 역사적 과거를 응시하는 시선의 얼개로서 어느새 완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것은 역사를 둘러싼 총체적인 서사로부터 미끄러져 나와 고통을 겪은 개인과 집단의 기억에 귀 기울이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겪은 고통의 정신적인 트라우마와 육체적인 상처를 둘러싼 보고와 증언, 의례를 국가의 역사와 같은 것을 대신할 만한 것으로서 재평가하고자 했다. 역사적 과거에 대한 상상을 사로잡게 된 이 같은 ‘윤리적인 전환’에는 저항하기 어려운 무거운 압력이 있다. 이는 무엇보다 고통과 상처를 호소하는 목소리 앞에서 마땅히 취해야 할 윤리적인 의무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울먹임과 비명을 앞에 두고 보다 많은 것을 고려하고 상상해야 할 필요를 들먹이는 일은 제지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 내가 마주한 음성의 증언과 고백에 과연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초조한 불안을 피할 수 없도록 한다.
그러나 폭력, 재난과 참화, 그리고 고통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너무나 적은 것을 말할지도 모른다. 하나하나의 고통과 재난마다, 그리고 그에 연루되었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관계에는 불의와 굴욕, 폭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반복된 것이며 대량의 것이었을 때 그것을 고통이나 재난으로 환원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저장된 목소리, 신체, 풍경, 눈길의 무한한 깊이 앞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악하며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것은 그 고통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의 절반도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고통을 겪은 그/그녀의 자리에 일시적으로 나를 자리 잡도록 해 보는 경험이 아닐 것이다. 책임을 지는 일이란 공감의 무대에 잠시 자신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원인의 자리를 찾고 그것을 제거하는 집요한 반성과 실천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난과 참화, 특히 폭력이란 낱말은 역사적 과거를 내내 불투명한 것으로서 내버려두며 그를 해결할 수 없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숨기는 서정적인 말장난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나아가 이는 인격적인 폭력이 아닌 낯을 가지지 않은 그리고 고통이나 상처란 이름으로 이야기할 겨를조차 없는 메마르고 지루한 구조적 폭력을 묵살할 위험도 크다.
한국전쟁에 관한 공식적인 서사를 돌파하고 얻어낸 ‘국가폭력’ 나아가 ‘사회폭력’의 연속으로서의 한국전쟁이란 담론은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보듯이 우리는 거의 반세기를 지나고 난 연후에야 마침내 한국전쟁에 대한 반성을 위한 자료들을 가까스로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는 더욱 급진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냉전의 지구사 속에서 그것을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헤아려보는 것이다. 오드 아르네 베스타, 냉전의 지구사, 옥창준 옮김, 에코리브르, 2020.
냉전이라는 서구 발 담론이 ‘북조선’과 ‘남한’의 민중의 경험을 삭제하고 억압했음을 비판하며 ‘한국전쟁을 코리언화’하는 것에 더해, 우리는 바로 그러한 관점의 획득이 새롭게 한국전쟁을 세계사 속에 위치시키는 관점과 결합하여야 한다. 경악할 만한 폭력의 경험에 제대로 응대하는 윤리적인 관점이 온전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 폭력의 사슬을 추적하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은 전쟁에 가까운 폭력의 경험을 겪어야 했던 아시아에서의 역사적인 과거를 ‘탈식민 열전(熱戰)’의 관점으로 파악하며, 한국전쟁을 아시아화 하는 것, 나아가 남부화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지속된 폭력과 외상은 코리언이 독점한 것도 아니었으려니와 고립되고 분리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4.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아시아 거의 모든 곳은 탈식민주의적 투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독립’이라는 낱말은 거의 모든 아시아인들의 입술 위를 맴돌았다. 이는 영국령 말라야와 네덜란드 지배의 동인도 식민지이자 일본 제국주의에 지배당했던 인도네시아에서도,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도 나아가 중국에서도 외쳐졌던 말이었다. 그리고 이는 반둥회의를 거친 비동맹운동을 통해 더욱 가속되고 격렬해졌다. 그 과정에서 숱한 폭력이 함께 하였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라는 탈식민 열전을 상징하는 두 차례의 참혹한 전쟁이 있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주의자에 맞서 다시 한 번은 미국에 맞서 두 차례의 인도차이나 전쟁을 겪은 후였다.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투쟁을 이끌었던 말라야 공산당은 지속적으로 영국에 종속된 말라야를 원했던 말레이시아 지배세력과 영국에 의해 잔인하게 제압되었다. 친펑(Chin Peng)이 이끌던 말라야 공산당이 화인(華人)이 중심이었다는 연유로 화교들을 향한 ‘반화배화(反華排華)’의 무자비한 폭력이 말라야에서 자행되었다. 인도네시아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반식민투쟁을 이끌던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는 반둥회의를 주도하고 곧 ‘비동맹운동’을 개척하면서 탈식민적 투쟁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 공산당 계열의 장교들이 주도한 쿠데타 음모(물론 이에 대해 자세히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즉 ‘9. 30 운동’을 계기로 수하르토가 이끌던 군부는 공산당원을 비롯한 노동조합 활동가, 학생, 여성운동가, 지식인, 언론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CIA가 넘겨준 명단을 쥐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상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중국이 지원했다는 연유로 인도네시아 화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역시 자행되었다. 서동진, 박소현 편, 비동맹동본, 현실문화, 2020.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타이완에서 자행된 국민당 정권에 의한 학살을 비롯해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에 의한 소름끼치는 폭력과 학살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20세기 후반의 아시아는 통곡의 계곡을 건너는 장소였다.
다시 말하자면 1950년의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아시아 전역은 탈식민 투쟁의 과정을 거치며 폭력의 역사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단지 눈먼 폭력의 연쇄로만 말하는 것은, 그 폭력에 연루된 이들의 꿈과 열망을 흐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의 꿈과 열망을 추스르는 이름을 찾자면 그것은 당연히 민족주의이다. 김동춘의 말을 다시 빌자면 한국전쟁을 이끌었던 것은 공식적인 냉전의 역사가 말하는 것과 달리 민족주의였다.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서로를 끌어당겨 한 몸이 되려는 강력한 힘을 가진 두 개의 지남철과 같은 존재”였다. 앞의 글, 46쪽.
그러나 그러한 탈식민을 향한 열정이 유토피아적인 꿈이란 점을 떠올린다면, 그것이 단순히 제국주의 지배자를 쫓아내는 것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그러한 수동적인 부정을 넘어 평등과 자유가 깃든 세계를 향한 능동적인 희망을 탑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탈식민 냉전(열전)이라는 불과 얼마 전까지의 역사적 정황은, 그것이 내전이든 아니면 대리전이라는 형태를 취했던 아니면 인종적 박해란 형태를 띠었든, 아시아에서의 근대성을 규정하는 불변항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의 탈식민 열전의 전경(前景)을 가득 채우고 있는 폭력의 참상은 그를 물러난 자리에 위치한 탈식민 유토피아적 투쟁의 배경과 함께 응시되어야 한다.
국가폭력이나 사회폭력의 담론은 폭력을 명백한 악으로 규탄하고 저주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선 자신의 삶을 소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탈식민 유토피아의 멍에를 토로했던 프란츠 파농의 주장을 여전히 소홀히 할 수 없다. 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남경태 옮김, 그린비, 2010.
투명한 악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시점 속에 모든 역사적인 사태를 수습하려 할 때, 전쟁과 폭력, 학살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재난의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 세계라는 배경을 시야에서 삭제할 것이다. 지난 세월, 우리는 끝없는 재난을 헤쳐 왔다. 그리고 재난을 초래했다는 누명을 쓸 각오를 무릅쓰고 저항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의 저항이란 위선이다. 견디기 어려운 질서가 부과한 한계 안에서의 저항이란 저항을 하고 있다는 주관적인 긍지에 취한 채 저항을 조롱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폭력의 재난의 기원으로서 한국전쟁을 박제화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아시아에서의 탈식민 열전의 역사 속에 그것을 등록시킬 필요가 있다. 아시아의 민중들이 겪은 공동의 재난이라는 좌표 속에 한국전쟁을 위치시킬 때, 한국전쟁은 탈식민 유토피아의 꿈을 배경으로 다시금 반성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세계사적 총체성 속에서 인식하고자 한다면, 고통을 겪은 자의 무고함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 역사의 구경꾼이 아니라 역사의 주역이었음을 스스로 사고하고자 한다면, 폭력의 스펙터클 앞에서는 입을 닥치라는 위협을 뛰어 넘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래한 글로벌 공급 사슬의 붕괴와 더불어 초래된 빈궁과 불안은 역시 먼 배경처럼 보이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의 세계의 윤곽을 흐릿하게 드러낸다. 저항은 폭력과 재난을 초래할 뿐이라는 협박을 넘어서는 한 가지 방편은 바로 그 고통을 겪은 이들과 공통의 기억을 구축하는 것이다. 기억의 연대를 꾀할 때 즉 한국전쟁을 아시아화 할 때, 우리는 한국전쟁을 지역사적 냉전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폭력과 재난을 주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_국립현대미술관 전시 기획을 위해 쓴 글.(수정하기 전의 초고입니다. 인용하고자 할 때에는 출판된 최종 원고를 참조하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