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경험

아다치 마사오 – 약칭 연속사살마

풍경과 진실

지난 수년간 마주하는 이미지마다 풍경이 도드라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심이 싹을 틔웠다. 그리고 그 의구는 나날이 곰팡이처럼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먼저 사진이 가장 두드러졌다. 버젓한 시사 잡지의 화보 면에서도 시위, 파업 장면을 담은 사진이나 정치가의 초상 사진만큼이나 같은 비중으로 풍경 이미지가 빽빽이 도열해 있었다. 왜 그럴까. 주변에 물어봤자 난감하다는 기색의 표정만 돌아왔다. 나는 풍경 사진의 난데없는 회귀가 어쩌면 사진이 그 자체 느낌을 만들어내는 질료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스스로 내려 보기도 했다. 비판적 사실주의의 사진으로부터 독특한 감각적 유물론으로 사진적 실천이 귀환하는 현상은 ‘사진-물질’ 혹은 ‘사진-객체(object)’에 주의하도록 촉구하는 작가들과 비평적 추세를 모르지 않던 터라 더욱 신경이 거슬렸을 것이다.

영상 작업을 하는 시각 예술 분야 작가들에게서 역사적인 시간을 재현하는 작법으로서 풍경에 의지하는 경향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놓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박찬경의 <시민의 숲>은 아예 풍경 이미지 자체를 역사적 시간의 도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제안한다. 그는 역사화가 불가능한 시대에 역사적 재현의 가능성을 풍경화에서 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풍경화의 형식을 빌었다고만 말할 뿐 그것이 왜 요구되는지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좋은 것인지 그렇게 하여 얻을 수 있는 미학적 정치적 득실은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듣기 어려웠다. 그리고 임흥순의 풍경에 의지한 애도와 기억의 연작 작업들이 쏟아져 나왔다(이 글에서 우리는 <비념>과 <위로공단>이라는 두 장편 작업을 상대할 것이다.) 정윤석의 <논픽션 다이어리> 역시 그렇다. 지존파라는 엽기적이고 잔인한 살인범들을 추적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이른바 1990년대라는 모호한 시대 주변을 배회한다. 90년대라는 시간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이미 악명 높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정면 대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논픽션다큐멘터리>는 씩씩하다.

그러나 그 대담함은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잇단 외상적인 사고, 한국 사회에서는 ‘참사’라고 불리는 사고들의 연쇄 사이에서 표류한다. 그리고 그러한 표류 자체가 아마 이 다큐멘터리가 갖는 장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속적으로 혹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잇단 재앙과도 같은 사고를 바라보며 확률적인 사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작용의 논리를 찾으려는 것이, 오늘날 얼마나 지지받지 못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몇몇 작가는 그를 시도하고자 무릅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대개 역사적 시간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의 실패를 상기하는 어떤 단편처럼 무의미한 대상을 화면 속에 포함시킨다. 그 무의미한 대상이란 풍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상 작업의 사례들이 혼란스럽게 하는 점은, 영화적 이미지들이 자신이 재현하는 이미지들을 더 이상 현실의 지표(index)라기보다는 현실(reality)이 부재하거나 그것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도록 하는 일종의 부호로서 사용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풍경 이미지는 매우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풍경 이미지에 기원적으로 내재하는 양의성 때문일 것이다. 이를 간략히 줄여 말하자면 이럴 것이다. 풍경은 우리의 바깥에 놓인 세계의 이미지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적인 외적 자연이나 외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주관적인 관여를 통해 매개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거기에 주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적 대상을 제시하는 풍경화나 풍경 사진은 그 대상을 ‘풍경처럼’ 보도록 만드는 시각 체제가 관여하고 있다. 철학적인 어법을 빌어 말하자면 그것은 주관적으로 매개되어 있음을 감추고 있는 객체인 것이다. 그런 객체로서 풍경보다 더 마땅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는 풍경화의 역사를 다루는 많은 비평들이 주장하는 요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적이고 실정적인 대상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어떤 지향과 의미에 의해 채색된 주관화된 풍경의 특징은 다른 방식으로 구실하는 듯이 보인다. 과거의 경우 풍경이란 외적 세계를 어떤 의미의 정박점으로서 바라보도록 이끌며 풍경이라는 외적 세계에 포함된 주관적인 인식과 지각의 세계를 반성하도록 요구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풍경은 그것의 무뚝뚝한 객관적인 외재성을 가장하지만 그 속에는 어떤 주관성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풍경을 제작하는 이나 바라보는 이나 그것에서 의미의 해석을 촉구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눈 앞에 펼쳐진 세계가 있다. 당신은 그것을 보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더욱 경악스러운 점은 그것이 당신이 어떻게든 관여하고 초래한 세계라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손을 댔고 또 지금도 손이 뻗어 있는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렇다면 근년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이 멜랑콜리 자체로 현신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인지 모른다. 아마 압도적으로 풍경 이미지가 쇄도하였던 사태 가운데 하나였을 세월호 참사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2년 뒤인 2016년 경기도 미술관은 “세월호 희생자 추념전”으로 <4월의 동행>이란 전시를 진행하였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인 4월 16일부터 시작된 이 전시에서 우리는 세월호 사태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을 기억하고 제시하려는 여러 시각예술 작업의 사례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풍경 이미지였다. 그 가운데 하나인 전수현의 단채널 비디오 <대화>는 팽목항 건너편의 바다를 긴 시간에 걸쳐 제시한다. 그것은 고요하고 심지어 목가적이라 해도 좋을 바다의 풍경이다. 물론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관객은 이러한 한가롭고 평화로운 바다 풍경의 잔인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비디오에서 등장하는 풍경은 더 이상 사실이나 외적 세계에 대한 기록이나 지표적인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그 대상을 어떤 의미의 사슬 속에 자리하도록 하려는 노력의 좌절을 가리킬 뿐이다. 그것은 재현할 수 없는 대상과 사건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일러준다.(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를 비명처럼 중얼거리거나 “안 돼!”라고 들리지 않는 외침을 토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세월호와 그것에 인접한 혹은 연계된 풍경 이미지의 연쇄는 바로 그런 총체화할 수 없는 세계의 상징으로서 효과를 발휘한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인 반성의 대상으로서 구실하지 못하는 사건, 즉 외상적 사건의 화신이 된다. 우리는 해석할 수 없는 사건과 마주하는 무력함과 죄책감을 “목격”이라는, 어쩌면 자학적일 수도 있을 수 있고 또 어쩌면 나르시시즘적인 윤리적 자기 방어일 수도 있을, 그 행위를 통해 보상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풍경 이미지의 하나의 장르가 번성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풍경 이미지 장르의 이름은 불투명한 세계에의 고백, 재현불가능한 세계의 증언으로서의 풍경 이미지이다.

풍경 이미지의 장르들

지난 봄 나는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다 풍경이라는 토픽으로 목덜미를 잡아끄는 영화들과 부득불 다시 조우해야 했다. 풍경에 집착하게 된 탓일까. 나는 숫제 한 섹션의 영화 전체가 풍경이라는 주제 둘레를 순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풍경을 이미지의 대상으로 구축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다큐멘터리적 영화의 원리로서 재선언하는 에릭 보들레르 Eric Baudelaire의 <지하디로 알려진 Also Known As Jihadi>(2017)은, 그런 의구를 확증시켜주는 영화처럼 보였다. 그렇다, 풍경은 카메라가 주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영화적 지각을 반성하는 원리 그 자체라고 그는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풍경을 다큐멘터리 혹은 그 이후의 영화의 원리로서 재선언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전사(前史)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안하는 것은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의 흐름에 제법 귀가 밝았던 이라면, 이 작업이 아다치 마사오(足立正生)의 <약칭 연쇄살인마, 略稱 連続射殺魔 A.K.A. Serial Killer>(1969)를 반복하고 또 급진화하고자 하는 시도임을 단박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지하디는 파리에서의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한 살인적 폭력의 용의자로 몰려 수감된 알제리계 프랑스인이다. 그리고 그는 아다치 마사오의 영화에 등장하는 십대 소년 연쇄살인마 나가야마 노리오(永山則夫)의 동시대적인 현신일 것이다.

나가야마는 자본주의적 도시화와 더불어 유년 시절에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는 삶을 잇기 위해 끝없이 이주해야 했던 가족과 더불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 도쿄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미군 기지에서 훔친 권총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른다. 경악스러운 속도로 쇄도한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에 으깨지고만 삶의 ‘패러다임’으로서 십대 소년의 삶은 아다치와 그의 동료들의 놀라운 반성의 대상이 되었다. 아다치 마사오는 뜻을 함께 했던 감독, 비평가들과 더불어 풍경론(風景論, Fûkeiron)을 제창하고 그에 준거한 영화로서 <약칭, 연쇄살인마>를 제작한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나아갸마가 태어난 홋카이도의 어느 변방의 마을에서 출발해 일본을 주유한다. 그가 일했던 도쿄 신주쿠의 과일가게, 요코하마의 항구, 오사카의 뒷골목 등.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소년이 마주했을 세계를 풍경으로 구축한다. 정확히 동일한 사진엽서 크기의 롱테이크 이미지들은 그 소년이 상대했던 적, 그를 지배한 권력(power)이었다고 이들은 결론을 내렸다.

전주영화제의 <익스팬디드 시네마> 섹션의 영화들은 모두 풍경이라는 주제를 선회하는 영화들로 구성된 듯이 보였다.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벤 러셀 Ben Russell의 <굿 럭 Good Luck>(2017)이나 이가라시 코헤이 五十嵐耕平와 다미앙 매니블 Damien Manivel)의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 Takara, The Night I Swam>(2017), 디스토피아적인 재난의 역사적 기억을 3D 풍경이지미로 제시한 블레이크 윌리엄스 Blake Williams의 <프로토타입 Prototype>(2017)마저 풍경을 향한 맹렬한 애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미지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 역시 앞의 풍경에 기댄 영화들과 전연 다르지 않은, 미리 말하자면 이미지 자체를 정동적인 대상으로 구성하고 이미지를 ‘읽기’보다는 경험할 대상으로 제시하는 제임스 베닝 James Benning의 <책 읽는 사람들 Readers>(2017) 역시 풍경의 이미지들 속에 합류하는 듯이 보였다.

사정이 이렇다면, 잠시 머문 영화제 기간 나는 꼼짝없이 풍경의 이미지를 운반하는 영화들 속에 억류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왜 풍경은 이토록 쇄도하는 것일까. 풍경-이미지가 번성한다고 해서 그 모든 풍경-이미지가 동류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풍경에 거는 미학적, 정치적인 기대는 무엇이며 그것은 또 어떻게 분기하는 것일까. 아마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구를 가진 듯한 어느 영화평론가는 이렇게 말하며 풍경에 이끌린 오늘날의 영상 작업의 추이를 헤아리며 이렇게 말한다. “자연 과정의 경이, 인간과 비인간적인 생명 사이의 교차, 인간, 국가, 그리고 대지라는 근심어린 삼각측량법, 무엇으로 이어지든, 풍경은 개인을 초과하는 범위에 놓인 이미지를 사유하고 제작하는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그런 몰두의 뿌리를 풍경화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영상 이미지는 현실에 속박되어 있어 회화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흔적들을 등록한다. 왜 풍경일까. 이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세계이며 그 속에서 혼자이지 않기 때문이다.”

발섬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벤 러셀의 <굿 럭>과 에릭 보들레르의 <지하디로 알려진>을 비롯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제임스 베닝의 신작 <엘. 코헨 L. Cohen>과 같은 풍경 영상 작업들을 두루 망라하며 풍경의 폭발이라도 불러도 좋을 현상에 마땅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녀의 비평은 질문을 던지며 답을 줄 듯 변죽만 올릴 뿐 신통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가짜 뉴스(fake news), 포스트-진실(post-truth)의 시대에 이미지가 처한 현실성의 위기를 근심하며 제출했던 빼어난 비평적 선언인 <현실 기반 공동체 The Reality-Based Community>의 논지에 미치지 못한다. 이 글에서 그녀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the imagined community)”를 패러디하면서 이미지의 객관적 현실성을 부정하는 오늘날의 비평적 추세를 맹렬히 비판한 바 있었다. 특히 그녀는 다큐멘터리 실천에서 엿보이는 지배적인 유행, 즉 관찰적 다큐멘터리를 죽은 개 취급하며 사실주의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것을 세련된 몸짓으로 여기는 동시대의 미학적인 유행에 대해 역공을 퍼붓는다. 원본 없는 이미지, 이미지가 생산하는 현실이 있을 뿐이라는 보드리야르 이후의 이미지 인식론을 무모하리만치 힐난하는 그녀의 전투적 자세는 풍경 이미지 앞에서 어쩐지 주춤거린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다시 아다치 마사오와 그의 주변 동료들(영화평론가인 마사오 마츠다(松田政男)나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의 공동 시나리오를 쓴 마모루 마사키(佐々木守) 등)이 몰두했던 풍경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에서 풍경은 재현의 결핍 혹은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재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아다치 마사오가 제시한 풍경론에 근거한 영화의 명확한 명칭은 “실경 영화(實景 映畫(じっけい えいが), acutal-landscape film)”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비평가 유리코 후루하타Yuriko Furuhata가 말하는 바에 따르자면 “포토-리얼리즘적인 도큐멘트이자 비-모방적인 다이어그램”을 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기호학적인 어휘를 빌어 말하자면, 지표적인 사실 재현이라는 상징적 재현 이전의 영화 이미지, 즉 본격적인 서사 영화가 등장하기 전의 영화들을 가리키는 “현실성 영화(actuality films)”나 “원시 영화(primitive cinema)”-1890년대에서 1900년대 초반까지, 영화가 등장하기 이전에 제작된 뤼미에르의 영상이나 에디슨사(Edison Company)에서 제작된 동영상들-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적인 퇴행이 지닌 미적-정치적인 의의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영화 이전의 영화로 돌아가고자 할까. 억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오늘날의 서사 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가 현실의 이미지를 조작하고 제시하는 방식이 더 이상 현실을 드러내는데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다치 마사오는 이를 날카롭게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이 비평가 유리코의 가정이다. 그는 현실성 영화로 돌아가면서 오늘날의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창조적으로 처리하면서 드러내고자 했던 사실성의 마비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극단적인 사실성의 영화인 전 영화적 영화로 돌아가면서 그는 오늘날 현실을 드러내는데 보다 효과적일 수 있을 이미지화의 경로, 즉 비모방적인 다이어그램을 취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모방적 다이어그램이란 푸코의 기율 권력에 관한 유명한 감시와 처벌에 관한 들뢰즈의 주석이라 할 “권력의 다이어그램”을 인용하는 것이다. 권력의 다이어그램이란 권력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직접적인 사실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암시함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는 풍경 이미지를 통해 질식할 듯한 국가 권력의 작동, 실은 국가 권력이라기보다는 엄밀히 말해 국가를 통해 촉성된 자본주의화의 폭력을 폭로한다.

아다치 마사오는 동료들과 함께 연쇄 살인마 소년의 행적을 쫓는 여행을 하면서 그들이 마주한 모든 풍경이 동일한 모습을 한다는 것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그는 범죄자, 나가야마가 마주한 현실은 억압적인 국가권력 자체로서의 풍경에 침전되어 있었다고 강변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풍경은 그즈음 오가와 신스케(小川紳介)나 쓰치모토 노리아키(土本典昭) 대표되는 급진적인 다큐멘터리가 재현하고자 했던 현실이 지닌 사실성의 부진함과 대조될 만한 사실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일본 자본주의 사회를 둘러싼 비판적 재현의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발견된 풍경의 이미지가 발굴된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재현의 불가능성을 토로하는 풍경 이미지와 재현의 위기를 돌파하는 충만한 재현으로서의 풍경 이미지라는, 대조적인 풍경의 장르와 대면한다.

기억-이미지

임흥순의 많은 작품들은 여행이나 이동, 방문(<위로공단>, <려행>, <비념> 등)의 이미지들로 구축된다. 그리고 그러한 장소들은 모두 풍경을 제공한다. 임흥순의 다큐멘터리에서 장소들은 거의 모두 동일한 서사적 가치를 갖는다. 그 장소들은 시간의 정치적, 경제적 역사들로부터 탈구되어있지만 고통이 발생하고 경험되었던 주관적인 장소로서 등가화(等價化)된다. 우리는 이를 기억의 공간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장소들은 기억을 저장하고 전시하는 기억-대상(memory-object)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 등치(等値)의 장소들은 멀리 떨어진 장소들을 동일한 장소의 연속체, 다시 말해 기억의 장소-계열체(series)로 모인다. <위로공단>에서 시작과 더불어 제시되는 베트남의 유적과 폐허 그리고 뒤를 잇는 노동자들의 숙소는 다시 그것과 대구(對句)를 이루는 구로공단의 쪽방으로, 가산디지털단지의 현재의 풍경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수출의 여신상’ 제막식 장면, ‘수출의 다리’의 인서트 장면, 밤하늘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벚나무, 접근금지 푯말이 붙은 가로등 아래의 골목 등의 장소-이미지들은 <위로공단>에서 두 명의 화자가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두 화자란 풍경 그리고 증언하는 자의 목소리이다.

물론 풍경은 말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연쇄 옆에서 그것은 ‘반(反)-이야기’로서, 즉 말해질 수 없음을 가리키는 표지로서 구실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올 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의 전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에서 투 채널로 상영된 <환생>은 남한 군인들의 손에 학살과 폭력을 겪은 베트남과 이란-이라크 전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재연하면서 이란이라는 장소를 서로 비춘다. 이러한 머나먼 장소들이 상응(相應)하는 장소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말인지만 고통을 담은 기억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억은 지구를 횡단하며 서로 다른 장소들을 기억의 지도 속에 배정한다.

그러나 장소와 기억이 동행하는 것, 아니 거의 분할할 수 없는 동일성으로 융해되는 것은 또 하나의 쟁점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경험/체험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의식은 경험에 대한 반성을 통해 획득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가늠하고 그것이 반복이든 연장이든 발전이든 시간의 추이를 가리키는 개념들을 그에 덧붙인다. 그를 통해 우리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해결된 것과 해결되지 않은 것, 동일한 것과 변화된 것 등을 측량한다. 그리고 역사적 시간을 해석하는 개념으로서 발전, 성장, 반복, 변화, 이행, 단절 같은, 시간에 관련된 역사적 관념들을 추스른다.

이와 달리 고통과 상처의 기억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상대한다. 그것은 반복/변화로서의 시간을 잊는다. 그것은 모든 시간이 지나가는 길을 고통이라는 경험으로 물들이며 동일한 시간으로 구성한다. 그 동일한 시간들 내부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외상적 충격의 시간과 잠복, 분출, 억압된 것의 귀환처럼, 고통의 경험에 의해 규정된 자전적이면서 개인적인 시간이 있을 뿐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이 시간의 바깥에 있음을 가리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관념인 트라우마(trauma)를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트라우마 즉 정신적 외상이란 개념이 아우르는 여러 가지 면모 가운데 하나는 그것의 시간성의 위축 또는 중단이라 할 수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이들에 관해 임상적인 자료들이 말해주는 것이나 아니면 트라우마를 겪는 피해자들의 증언이나 주변 인물들이 겪는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들은, 모두 ‘시간 없는 시간’을 보여준다. 이는 외상적인 사태를 겪은 그 시간을 전연 기억하지 못한다든가 아니면 그 시간에 고착된다든가 아니면 그 시간을 다른 시간과 반복하여 중첩시킨다든가 하는 모순적이면서도 이질적인 형태를 통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고 나타나든 여기에서 시간은 정지된 시간 혹은 뒤죽박죽된 고장 난 시간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시간을 오려낸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우리가 자주 마주하게 될 풍경-이미지의 시간성을 드러낸다.

 

트라우마적 지각과 오늘의 경험

 

 

토마스 엘세서(Thomas Elsasser)는 최근 들어 동시대 영화적 이미지가 처한 조건을 탐색하는데 부쩍 진력하고 있다. 그 가운데 그가 집어든 주제 가운데 하나는 경험의 위기이다. 그는 어느 글에서 오늘날 영화가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숫제 트라우마적 충격을 만드는 것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이 때 그가 의지하는 것은 유명한 벤야민의 경험에 관한 산발적인 아포리즘적인 서술이다. “경험을 기만당한 근대인”이라는 벤야민의 유명한 언급은 낭만적인 생철학적인 충동과 현상학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동요한다. 아무튼 그가 개인적인 지각-경험을 매개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충격을 이론화하고자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엘세서는 역시 벤야민의 유명한 경험에 관한 두 가지의 (독특한 독일적인) 분류, 즉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의 차이를 강조하며 전자가 점차 사멸해 가는 것으로서 근대적 지각-경험의 운명을 논했던 바를 오늘 영화적 지각을 분별하는데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는 경험 없는 체험과 체험 없는 경험의 변증법이 활약하는, 동시대의 경험이 처한 조건을 분석한다.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경륜, 관록 혹은 속된 말로 ‘짬밥’ 쯤에 해당될 경험은 사회적 삶이 침전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의식적인 반성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반응해야 할지를 배우고 익힌다. 그렇게 삶의 활동이 침전되고 농축될 때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예기(豫期)하기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자연스레 마음을 가다듬기도 한다. 그러나 체험은 자신의 순간적이고 직접적인 지각을 가리킨다. 그것을 순전히 생리적인 자극-반응으로 환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오랜 역사적인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조작되고 변형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당신에게 잊을 수 없는 새로운 체험을 제공할 것”이라는 여행사의 여행 상품 안내나 전적으로 감각적인 지각의 충격을 전달하는 데 전력하는 요즈막의 영화(점점 더 강렬한 영화적 지각의 충격을 제공하기 위한 관람 장치의 변화, 예컨대 iMax 영화관을 비롯한 3D, 4D영화관의 유행이나 가상현실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VR관람 오락의 폭발적인 증대 등)는 외부에서 제공된 경험이라는 점에서 체험을 박탈한다. 그것은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나 체험 경제(experience economy) 등을 들먹이는 경영 담론이 얼마나 경험과 체험의 조작과 통제에 진력하는지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우리는 앞서 아다치 마사오를 비롯한 일군의 인물들이 풍경이란 바깥에 놓인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이자 동시에 바깥 세계를 재현하는 질서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러한 위기를 경고하는 이미지로서 반성하고자 했을지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역시 같은 방식으로 외적 세계에 대한 재현의 위기를 들추지만 앞서의 경우처럼 그것을 돌파하고자 하기보다는 그러한 위기에 나르시시즘적으로 탐닉하며 서사화될 수 없는 세계를 지시하는데 만족하는 풍경 이미지들을 대조하였다. 물론 후자의 사례는 퇴행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풍경 이미지의 저자들의 책임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영화는 물론이려니와 외식, 여행, 음악 등을 비롯한 문화산업이 퍼부어대는 제조된 경험, 상품화된 체험이 빚어내는 경험의 위기(이를테면 우리는 휴대전화로 음악을 감상할 때 알고리즘적으로 구성된 플레이리스트를 제공받는다. 그 때 그것은 천연덕스럽게 ‘비오는 날의 우울함을 위한 음악’이라는 경험의 제공을 약속한다.)에 비추어 볼 때, 풍경의 수사학은 경험을 비판적으로 서사화함에 있어 우리가 처한 불능과 마비를 토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를 지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아다치 마사오처럼 풍경이 어떤 비판적 서사화의 능력을 가질 것이라고 주문(呪文)을 외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라면, 풍경의 불투명함을 파열하기 위하여 ‘풍경의 정치경제학’을 서사적으로 외삽하는, 재커리 폼왈트(Zachary Formwalt)와 같은 작가들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 1년전 <오큘로>의 청탁을 받고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