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기호증 Traumatophilia : 무빙-이미지의 (비)서사적 경로들에 관한 메모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I’ll Be Your Mirror”

묘사(description)의 지배란 결과일 뿐만 아니라 원인이며,
서사시의 의미성에서 그 후의 문학이 결별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산문이 내적인 인간 경험의 시를 지배하는 것, 사회적 삶의 계속적인 비인간화,
인간성의 일반적 타락,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객관적 사실들이다.
묘사의 방법은 이러한 발전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일단 확립된 이 방법은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찾기에 골몰하는 지도적인 작가들에게 선택되고, 다음에는 그 방법이 현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삶의 시적인 차원은 쇠퇴하게 되고, 문학은 그 쇠퇴를 격렬하게 만든다.”
루카치, 서사냐 묘사냐, <리얼리즘과 문학>, 최유찬 외 옮김, 지문사, 1985, 196쪽.

 

서사라는 것

그러니까 가짜 뉴스의 시대에 산다는 것은 온갖 이야기가 포화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사 과잉이라면, 한편 그것은 세계를 온전히 재현하는 서사가 희박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서사의 과잉과 과소 사이에서 요동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무엇이든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는 전에 없는 속도와 양으로 우리를 덮쳐누른다. 이른바 넷플릭스 Netflix나 왓차 Watcha같은 영화 플랫폼에 접속했을 때 순간적으로 아연함을 느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유튜브 Youtube에 접속했을 때 검색창에 무슨 단어를 쳐야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던 적도 숱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우리가 그것을 지금껏 알아오던 서사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미처 가늠할 겨를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어떤 장르인지조차 눈여겨볼 틈도 없이 오늘의 추천작과 같은 알고리즘적인 판단이 내게 투여하는, 이를 서사라 말할 수 없다면 그냥 흔히 하는 말대로 ‘콘텐츠’를, 게으르게 덥석 문다. 그렇지만 이를 미술관과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무빙이미지를 두고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말과 이미지와 사운드로 채워진 무빙이미지를 접한다. 그 많은 이미지와 사운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에 직접 답하기보다는 하나의 단서에서 출발해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이 글에서 서사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성의 아포리아 혹은 이율배반을 해결함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좌초하고 있는지 묻고자 한다. 그리고 순간 혹은 지금이라는 시간 없는 시간이 지배하게 될 때 어떻게 충격 혹은 외상의 경험만이 득세하게 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지의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어떻게 위기에 처하게 되는지, 짧게나마 사색해보고자 한다.


찰나와 순간 그리고 지금

‘리얼-타임’에서의 리얼은 얼마나 리얼할까. 아니 그것은 리얼하기는 한 걸까. 과거엔 리얼-타임은 디제시스적 시간이 처리하여야 할 질료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이다. 그 때의 리얼 타임에서의 리얼은 서사적인 것이 상대하여야 하는 시간, 벤야민의 표현을 빌자면 ‘공허한 시간’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두 번째의 리얼, 리얼하게 재현된 시간(역사적 시간이든 개인사적인 시간이든)로 전환되어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재현이란 개념이 여기에 부적절할 것 같다면 서사화된 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리얼-타임은 그저 매 순간, 지금, 찰나를 가리킨다. 그것은 시간적 지속으로부터 풀려나온 혹은 고립된 어떤 단편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지금의 리얼-타임은 더 이상의 시간의 리얼함을 향한 짐을 떠맡을 필요가 없는, 순간과 생애, 시대, 역사 등의 사회적, 역사적 시간성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변증법적인 노고가 요청되지 않는, 거의 직접적으로 들이닥치는 현실 경험이 의지하는 시간이다. 예를 들자면 ‘실시간 검색어’는 실시간으로 현실을 중계한다. 실시간 검색어의 순위는 곧 지금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어떤 관심이 지배하는지 (통계적으로) 고지한다. 그것은 서사화와 해석의 필요가 제거된 바로 지금 목격하는 현실 자체이다. ‘인스타그램’에 포스팅된 이미지에 추가된 하트 개수는, 실시간으로 그 이미지에 대한 호응과 평가를 중계한다. 그 때의 이미지는 상징도 알레고리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타인에게 어떤 감정적 반응을 촉발하고 그에 대한 반동을 유인하는 어떤 객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타임피드 속에 보이지 않게 기재된 그리고 jpeg 파일 어딘가에 등록된 지표성(indexicality)의 시간 속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이미지와 서사

폴 리쾨르 Paul Ricoeur는 서사론의 고전일 시간과 이야기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시간은 서사적 양태로 엮임으로써 인간의 시간이 되며, 이야기는 그것이 시간적 실존의 조건이 될 때 그 충만한 의미에 이른다.” 폴 리쾨르, 시간과 이야기1, 김한식․이경래 옮김, 문학과지성사, 125쪽.
그는 저 유명한 시간의 초월적인 이율배반 즉 우주론적 시간과 현상학적 시간의 모순을 강변한다. 물론 그 이율배반은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것은 서사를 통해 일시적으로 중재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변은 시간의 초월적 존재론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현기증이 나리만치 고고하다. 아마 그의 주장을 보다 적절히 전유하기 위해 그가 뱉은 주장을 조금 비틀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도식을 조금 수정해 사회역사적인 시간 이를테면 생산양식의 시간 혹은 역사적 단계의 시간과 개인이 경험하는 시간 사이의 분열과 대립을 가정해 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문화적 상부구조이든 예술적 실천이든 그 모두는 일종의 서사로서 각각의 역사적 단계에 처한 우리의 시간적 경험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리쾨르는 서사 즉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것이든(역사 이야기). 상상 속에서 일어난 것이든(허구 이야기), 그 모든 것은 인간의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시간 속에서 시간과 더불어 전개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이야기를 통해 매개되지 않고서는, 결코 시간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서사가 너무나 문학에 치우친 것이라면 그것을 이미지에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적 시간의 발생: 근대성, 우연성, 아카이브 The Emergence of Cinematic Time: Modernity, Contingency, the Archive>에서 매리 앤 도앤 Mary Ann Doane 은 영화적 시간, 즉 영화가 축조하는 시간의 경험을 추적한다. 그리고 산업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발전과 개인의 시간 지각, 경험의 분열과 모순을 해결하려는 과정의 한 계기로서, 영화적 시간이 발생했음을 분석한다. Mary Ann Doane, The Emergence of Cinematic Time: Modernity, Contingency, the Archive,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그러나 그의 분석이 리쾨르와 차이나는 점은 영화라는 대상을 다룬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산업자본주의에 따른 시간의 합리화와 표준화가 어떻게 시간을 둘러싼 경험을 잠식하고 이를 읽고 계산하는 시간으로 즉 그것이 극히 기이하고 소외된 시간 경험으로 대체하는지를 밝힌다. 그리하여 그는 리쾨르가 말한 시간의 이율배반을 근대성의 시간의 이율배반으로 역사화한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 추상화된 시간과 우연성(contingency)의 시간 사이의 이율배반으로 정식화한다. 그의 말에 따른다면 사회체계가 강제하는 시간인 불연속적으로 분절된 자본의 시간은 한편 우연과 운(運)의 시간과 짝을 이룬다. 자본주의적 근대성 속에서 시간은 추상화되고 합리화되지만 그와 더불어 그것은 우연성으로 대표되는 비연속적인, 흐름의, 충격과 전율의 시간과 같은 시간을 육성한다. 그런 점에서 이 두 개의 시간은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지만 동시에 상보적이고 동맹적인 관계에 있다.

경험과 정동

이러한 영화적 시간의 발생을 둘러싼 논의에서 우리가 눈여겨보고자 하는 것은, 의미와 서사이다. 루카치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혹은 자연주의)이 전개하는 서사 전략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전자를 서사화(narration)로 후자를 묘사(description)으로 대립시킨 것이나, 발터 벤야민의 근대적 도시에서의 삶은 물론 모더니즘 예술을 장악하게 된 충격과 트라우마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나, 그것들은 모두 의미와 무의미, 서사와 묘사 사이의 분열을 보고한다. 이러한 분열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의식적 반성 없이도 조정하고 표현할 줄 아는 것으로서의 경험(Erfahrung)과 일시적인 지각 경험으로서의 경험(Erlebnis)의 분열을 통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이 개념들을 통해 문화적 근대성의 모순을 탐색하는 벤야민의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발터 벤야민, 경험과 빈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한편 벤야민의 논의를 참조하며 현대 영화의 ‘경험’의 문제에 대한 분석으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Thomas Elsaesser, Between Erlebnis and Erfahrung: Cinema Experience with Benjamin, Paragraph, Vol. 32, No. 3, 2009.)
경륜, 관록 혹은 ’겪어 봄’ 쯤에 해당될 경험은 사회적 삶이 침전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의식적인 반성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반응해야 할지를 배우고 익힌다. 그렇게 삶의 활동이 침전되고 농축될 때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예기(豫期)하기도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자연스레 마음을 가다듬기도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험은 순간적이고 직접적인 지각을 가리킨다. 그것을 순전히 생리적인 자극-반응으로 환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오랜 역사적인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임의적으로 조작되고 변형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자신의 포스트모더니즘론에서 ‘정동의 쇠잔(the waning of affect)’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을 수정하고자 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논의를 떠올려보아도 좋을 것이다. 근년의 정동론의 부상을 의식하면서 그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도입하고자 할 때, 제임슨은 자신이 ‘정동의 쇠잔’이란 말을 통해 실로 언급하고자 했던 것은 감정의 쇠잔일 텐데, 그만 그 감정이란 낱말을 우연히 정동으로 대신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Fredric Jameson, The antinomies of realism, London & New York: Verso, 2013. 물론 여기에 브레히트의 ‘게스투스 Gestus’에 대한 생각을 추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감정이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름 붙여진(named) 정동’, 예를 들자면 기쁨, 즐거움, 슬픔과 같은 것이다. 반면 정동이란 그가 들뢰즈의 철학을 일종의 후기자본주의의 주관성의 징후로서 읽으면서 참고하는(물론 그는 리오타르의 ‘숭고’의 재평가 역시 그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강도(强度, intensities)’와 같은 것이다. 이는 종잡을 수 없는 모종의 충격과 흥분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실천을 거치며 반추되고 정제되며 응결된, 그리하여 그것이 드라마이든 소설이든 문화적 생산물 속에서 복제될 수 있는 것이 감정이라면, 무엇인지 규정될 수 없는 감각적 충격이 정동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임슨 스스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언급하는 문학에서의 정동과 감정 사이의 관계는 이미지에서 현실성과 실재성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티라고 여전히 부르기를 고수하는 현 단계의 자본주의의 미적 경험의 요체를 두고 ‘단독성의 미학’이라 말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단독성의 미학, 박진철 옮김, 문학과 사회 117호, 2017.)

순간과 찰나라는 시간 없는 시간 경험 속에 익사하여 그 어떤 접합도 어려운 불연속적인 충격만을 접촉하게 된다면, 이는 또 그에 상응하는 문화적․예술적 형식을 불러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늘 참조하길 마다하지 않는 루카치의 발언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한다.

“묘사는 모든 것을 현재화한다. 서사는 과거를 이야기한다. 전자는 사람이 본 것을 묘사하고 그 공간적 ‘현재’는 사람과 대상에 대해 시간적 ‘현재’를 수여한다. 그러나 그것은 드라마의 직접적 행동의 현재가 아니라 환상적인 현재이다. 최선의 상태에 있는 현대 서사체는 사건을 과거로 옮김으로써 소설에 극적인 요소를 주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묘사를 하는 관찰자의 현재성(contemporaneity)은 드라마의 현재성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정적인 상황이 묘사되지만 인간들의 마음의 상태나 태도 또는 사물들의 상황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죄르지 루카치, 앞의 글, 1985, 200쪽.

여기에서 루카치는 마치 오늘의 찰나, 현재, 동시대성과 관련한 담론들을 예견했다는 듯이 서사가 과거에 속해 있다면 묘사는 현재에 속하는 것으로서 분할한다. 그리고 후자에서 서사로서의 자격을 박탈한다. 또 그의 말을 참조한다면, 오직 순간과 찰나만이 시간을 대체한 지금, 서사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지극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에서 시간의 이율배반은 서사에서의 두 가지 유형, 즉 본연의 서사와 묘사로 분열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구성적이면서도 본원적인 쟁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울배반을 해결하고자 현재는 즉 개인의 경험적 시간은 역사적 시간을 흡수하여 그것을 플롯과 성격화, 스타일 같은 것으로 나타내며 서사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성의 이율배반을 중재하는 서사는 오늘날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 알다시피 제임슨은 모더니티가 시간의 시대였다면 포스트모더니티는 공간의 시대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티의 시대,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정점에 이른 현 단계의 역사적 시대엔 시간성이 종말을 고했다고 단언한다. 시간성이 서사의 근본조건이라는 점을 승인할 때 시간성이 끝났다면 서사 역시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서사가 끝장났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은 일일까. 아무튼 제임슨이 모더니즘 예술의 서사에서 집요하게 관철되는 시간성의 이율배반의 반영, 즉 지속과 순간, 분절된 공허한 시간과 흐름으로서의 시간 등의 경험이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서 나타나게 된 배경을 정의하고자 했음을 기억해두기로 하자.

시간성의 이율배반을 해결하고자 했던 노력이 가장 극성을 이루었던 시대, 즉 모더니즘의 시대는 곧 모든 문화․예술인 시간에 골몰했던 시대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름의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불완전한 근대화, 2차 대전까지 유럽 대부분에 잔존했던 근대적 자본주의 도시와 그로부터 자율적인 시골에서의 삶 사이의 분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통해 메트로폴리스와 식민지 사이의 분열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Fredric Jameson, The End of Temporality, The ideologies of theory, London & New York: Verso, 2009.
모더니즘의 시기는 대도시에서의 일상적인 지각의 충격과 트라우마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충격이 지배할 때, 자신의 삶의 경험을 사회, 역사적인 경험과 이야기의 직물 속에 짜 넣는 것이 불가능했다. 시골은 도시에서는 보이지 않는 외부였고 더욱이 식민지는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전연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초래한 조건을 총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럴 때 시간을 둘러싼 이율배반, 즉 표준화되고 합리화된 시간과 지속 및 흐름으로서의 시간의 차이/모순은 모더니즘 시대의 보편적 환유가 된다. 시간의 이율배반은 모든 경험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결정적인 대상으로 격상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도래하면서 이는 완전히 바뀌고 만다. 제임슨이 1960년대라는 역사적 시기를 특정하면서 그것이 무의식과 타자성, 식민지의 소멸을 초래했다고 말할 때, 그리고 이를 통해 모더니즘의 최종적인 소멸을 위한 조건을 마련했다고 말할 때, 주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곳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그 모든 곳은 동시간대에 위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말했듯, 서사가 불임(不姙)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단지 세계에 대한 묘사, 보고, 증언, 목격담 등에 갇힌 채 준-서사 혹은 현실성의 이미지의 끝없는 행렬 속에서 표류할 뿐이라는 식의 평결에 동의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루차키가 서사에 실패한 패자들로 규탄했던 상징주의이든 자연주의이든 혹은 본격적인 모더니즘이든 그 모두는 또 다른 서사의 형식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사에 미달한 그 서사들도 결국 서사이긴 하다는 것이 제임슨의 결론이다. 그는 반서사나 준서사 속에서도 서사성의 발자국이 남아있음을 역설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치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루카치가 서사라는 개념을 통해 주문하는 것은, 자신이 서사라고 우기는 것만을 서사로서의 자격을 부여했다는 그의 독단이 아니다. 그는 추상성과 구체성, 개별성과 보편성의 모순과 같은 근대성의 모순을 조정하고자 하며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가 한때 서사시가 이룩하였던 총체성에 이르는 근대적 서사시로서의 소설의 가능성을 염원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는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라는 프로그램을 제안한 제임슨에게서도 다르지 않다. 루카치에게서나 제임슨에게서나 서사(화)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묘사에 그친다는 것이자, 순간적 지각의 경험을 토로하고 보고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다. 그리고 보들레르가 말한 ‘세부(details)의 혼돈’ 속에서 표류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시각예술에서의 (비)서사를 조망하는 어떤 입지점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현실성과 실재성

미술관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영상들은 대개 현실성(actuality)을 쫓는다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지금 이미지를 보는 지각적 경험에 집중하며, 그 경험에 대한 자기반영적인 사고를 속도와 편집, 사운드에 쏟아 붓는다. 그것은 멀티채널로 상영될 수 있으며 각 영상이 반사되도록 ‘설치’될 수 있으며 어느 위치에서 보아야할지 관람객이 결정을 내려야 하도록, 함께 볼 수 없는 위치에 설치될 수도 있다. 보이스는 없거나 있어도 이미지와 결부될 수 없으며, 이미지는 오직 지표성의 흔적으로서만 장황하게 연속되며, 보이스와 자막은 이미지에 실재성(reality)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보고하거나 묘사하는 듯 시늉한다. 그러나 현실성은 상징화된 현실로서의 실재와 다른 것이다. 실재성은 이미지가 객체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연속적인 이미지가 시간적으로는 지속이면서 또한 순간들의 집적이라면, 그 순간들에게 연속적인 것 속의 한 계기로서 지위를 부여하면서 필연화하는 것이 실재성을 생산하는 일이라면, 이미지는 개입을 통해 형성된다. 그 주관적인 개입을 서사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성과 실재성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 초기영화나 원시영화의 또 다른 이름인 현실성 영화(actuality cinema)와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차이를 논하는 영화사에서의 표준적인 독해를 참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렌즈-기반-포착-이미지’는 초기의 현실성 영화와는 다른 것이리라. 에리카 발솜은 근년 부상하고 있는 관찰자적 다큐멘터리를 극력 옹호하며 이렇게 말한다.

“진실과 객관성에 대한 구성주의의 압박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느껴진다―사실 그 관념들은 폐허에 있다―그러나 이러한 비판의 접합(articulation)에 최초로 수반된 해방적 잠재력은 소멸했다. 우리는 ‘대안적 사실들’의 시대에 산다. 현실과 픽션의 혼합은 1990년대 이후로 특정한 종류의 다큐멘터리 실천 속에서는 그토록 소중했지만 이 시대에는 여기저기서 혐오스럽게 보인다.”

그녀의 주장은 매력적이다. 그리고 뒤이어 “다큐멘터리의 모든 시대가 자신의 이전 시대에 반응하는 동시에 이를 거부한다면, 아마도 지금은 관찰의 폄하에 대해 격하게 논쟁할 시기일 것이다”는 주장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대신 현실의 사실성을 조심스레 긍정하고 이를 통해 오늘날의 인식론적 불안을 재생산하는 대신 길들이는 것은 어떤가?”란 조심스러운 제안을 던질 때, 우리는 갑자기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현실성의 이미지를 옹호하는 발솜은 이렇게 말한다. “다큐멘터리의 관심사는 지배적 형성물에 도전하는 자신의 능력에 있지 그 형성물에 순응하거나 이를 모방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데 불확정성과 의혹은 특히 다큐멘터리가 미술의 맥락에서 접합될 때 다큐멘터리의 동시대적 표어로 남아 있다. 그 대신 현실의 사실성을 조심스레 긍정하고 이를 통해 오늘날의 인식론적 불안을 재생산하는 대신 길들이는 것은 어떤가? 어떻게 한 편의 영화가 공세에 시달리는 현실과 회복적인(reparative) 관계를 취할 수 있는가?” 현실과의 회복적인 관계? 이 때, 그녀는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과 현실은 이미지의 재현적 코드에 생산되는 것이라는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해서는 거부하지만 이미지의 윤리학 앞에서는 주저 없이 손을 잡는다.
그러나 회복적 관계라는 말은 인간중심주의에 빠진 인간의 오만을 넘어 함께-존재함이라는 것에 눈을 뜨길 촉구하며 객체로서의 세계가 아닌 존재로서의 세계와의 화해를 노래한 어떤 철학적 사변을 참조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하이데거적인 어조는 그녀가 글에서 거푸 사용하는 ‘조율(attunement)’이라는 낱말에서 더욱 크게 반향된다. 조율은 존재론적인 사변을 참조하자면, 존재와의 관계 방식이다. 조율이란 개념은 현실이란 객체가 아니라 존재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외적 세계를 전유하기 위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실천의 방식, 즉 노동이나 생산과 같은 재현적, 도구적 관계와는 무관한 세계와의 관계를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조율은 재현 및 노동, 실천과 대립한다. 나아가 재현의 역사적 필연성 혹은 타당성을 관념적으로 초극할 수 있다고 태연자약하게 믿는다.
하이데거는 집요하리만치, 존재를 상(相, Bild, image)으로서 환원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근대적 표상행위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표상 행위의 의미는 레프래젠타치오(representatio, 재현)라는 낱말 속에서 가장 일찍이 표현되었다. 여기서 ‘앞에-세운다’(표상한다)는 것은, “‘눈 앞에 현존하는 것’(das Vorhandene)을 [바라보는 자기와] 마주해-서-있는 것(ein Entggenstehendes)으로서 자기 앞으로 가져온다, 즉 표상하는 자로서의 그러한 자기에게로 이끌어와 그것을 자기와 관련시키며, 또 이렇게 ‘척도를 부여하는 영역’으로서의 ‘자기와의 관련’ 속으로 그것을 강제로 끌고 들어온다.” (M. 하이데거, 세계상의 시대, 숲길, 신상희 옮김, 나남출판, 158쪽.)

이때 재현 혹은 표상은 조율이라는 존재와의 조우와 대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현으로서의 이미지와 조율로서의 이미지는 어떤 점에서 다를까. 표상/재현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것은 시나 미학적인 어떤 제스처를 통해 존재와의 우연한 조우를 기약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외나 물화 같은 개념은 하이데거와 동등하게 표상/재현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그런 개념들은 표상/재현이 특정한 역사적 사회관계, 즉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필연화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나은 개념들이라 할 수 있다. 세계상의 시대를 넘어 존재와의 화해 혹은 탈은폐를 꾀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필연화하는 역사적 사회관계를 파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표상을 초월하기로서의 조율 대신 우리는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을 요청받는다. 노동, 대상화, 전유, 소유 나아가 실천(praxis)라는 사회적 실천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존재론적 사변에 의탁하여 세계와의 조우, 조율을 운위하는 것은 윤리적인 허무주의에 가깝다.

렌즈-기반-포착 이미지

그러나 이러한 주장보다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렌즈-기반-포착’ 이미지라는 개념에 숨은 비평적인 전제들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이미지가 CGI(Computer-Generated-Imagery)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시뮬레이션화되어가는 이미지에 대한 거부의 의지를 담고 있다. 조작되거나 구성된 이미지를 멀리하려는 의지는 더 없이 좋은 것이다. 또한 이는 문화산업에 의해 자극과 쾌락을 위해 대량생산되는 이미지들에 대한 환멸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그것은 이른바 ‘시점(perspective)’에 대한 완고한 거부를 시사한한다. 시점이란 히토 슈타이얼이 「자유낙하」란 에세이에서 말한 수평원근법의 소멸 즉 이미지의 생산을 매개하고 그런 이미지에 대한 경험을 조작화하는 ‘근거’의 사라짐을 말할 때의 그 원근법(perspective)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시점의 거부가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가능하다. “주체 없이 객체를 향하고, 힘과 물질의 세계를 포용하며, 그 어떤 근원적 안정도 없이, 개방의 갑작스런 충격으로 번뜩이는 낙하, 고통스러운 자유, 지극히 탈영토적이며, 따라서 언제나 이미 미지의 대상인 것, 낙하는 폐허와 종말, 사랑과 방치, 열정과 굴복, 쇠퇴와 파국을 뜻한다.” 히토 슈타이얼, 자유낙하: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 2016, 37쪽.(강조는 인용자)
주체 없는 객체, 그것은 바로 이미지를 통해 서사화를 꾀하고자 하는 주체의 자리를 폐위시킨다. 그러면서 그것은 은밀하게 오늘날의 새로운 유물론적 전환을 포용한다. 당연히 ‘렌즈-기반-포착’ 역시 이미지를 둘러싼 유물론적 실천을 옹호하는 이들이라면 반색하고 환영할 개념이다. 그것은 탈주체화된 이미지의 가능성으로서, 발솜의 말을 쫓자면,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을 상상하고자 했던 디렉트시네마의 관찰자적 다큐멘터리에 스민 주관성의 오염과 순진한 실재론으로부터 탈출한다. 특히 그가 하바드대 감각민족지랩(Sensory ethnography lab)의 작업들과 에릭 보들레르나 케빈 제롬 에번스같은 작가들의 작품, 그리고 보다 거슬러 올라가면 왕빙을 위시한 일련의 작가들에 대한 비평은, 이러한 렌즈-기반-포착 이미지가 어떤 윤리적, 미학적 함축을 갖고 있는지 흘깃 눈치 챌 수 있도록 한다. 그는 앞서 본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새롭게 구상된 관찰적 양식에의 헌신이 일군의 중요한 작가와 감독들의 작업에서 눈에 띈다. 이들의 작품은 의혹의 교육법(pedagogy)을 뒤에 놓고, 대신 세계와 조우하는 수단으로서의 카메라의 비인간적 자동기법(automatism)이 갖는 중요성을 단언한다. … 이 작품은 현상적 현실의 사실성을 향하면서 이에 대한 믿음을 요청한다. 여기서 나는 반대 의견을 듣는다. 이는 실증주의로의 회귀, 재현의 투명성에 대한 순진하고 정직한 신뢰로의 회귀, 우리가 배웠던 모든 교훈을 잊는 것이라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디렉트 시네마의 입장과 단순히 비슷한 것이란 없고, 그 입장의 특성은 어떤 경우건 부당하게 일컬어져 왔다. 보이스오버 논평을 포함하여 현실과 재현 간의 간격을 비집어 여는 기법을 삼가는 이런 영화는 관찰자적 양식의 주요 요소를 부활시키면서도 동시에 이 양식에 역사적으로 수반되었던 인식론적 주장에 부분성, 장애물, 불투명성의 전략을 통해 도전한다. 그 영화는 세계를 지배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에 충실한 채 남아있기를 추구하면서, 관객을 위해 조율의 시공간을 창조한다. 이 시공간에서 타자성과 우발성과의 지속하는 접촉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떤 안전한 의미도 보장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그는 현실성의 이미지와 그를 가능케 하는 이미지의 테크놀로지이자 광학적 원리로서의 렌즈-기반-포착에 ‘부분성, 장애물, 불투명성의 전략’, ‘조율의 시공간 창조’, ‘타자성과 우발성과의 접촉’ 같은, 조금은 맥 빠진 그리고 익히 들어왔던 미적-윤리적 수사들을 덧붙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미적-윤리적인 웅얼거림이 실재성의 이미지에 이르지 못하는 곤경을 부인하는 변명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발솜이 말하는 그 현실성의 이미지들에 대한 솔직한 감상은 차라리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개별 작품을 그리고 그것들의 형식과 내적 주직을 더 이상 숙고하지 않기 때문에, 미술관 순례는 우발적인 지각들을 불러일으키는 바, 이 속에서는 색채의 반짝임들, 이런저런 표면으로부터 벤야민이 산만함이라고 말한 것에서와 같은 형태의 파편들이, 그리고 당신을 둘러싸고 스스로를 결합시켰다 흐트러뜨렸다 하는 공간과 더불어 도무지 지도를 그릴 수 없도록 항해되는 운명들이 또 비록 기우뚱하기는 하지만 눈의 가장자리를 통해 인지되는 텍스트들이 끌어 모아진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 미적인 주의는 그 지각적인 삶 자체로 전이되었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을 구성했던 과거의 객체는 거부되고 주체성으로 되돌아 가버린다. 이 때 그것은 감각활동의 무작위적인 그러나 폭넓은 추출(sampling), 감각 데이터의 정동성(affectabilities)과 흥분(irritations) 그리고 온갖 종류의 자극들을 제공하는 것과 진배없다. 이는 어떤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신체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것을 수동적이면서도 유동적인 ‘기재(enregistrement)’의 장으로 변형시키는 것일 텐데. 이 장 속에서 세계의 지각할 수 있는 부분들은 취해져서는 매혹적인 감각중추(sensorium)의 영속적인 지리멸렬함 속으로 내동댕이쳐진다. Fredric Jameson, The cultural turn : selected writings on the postmodern, 1983-1998, London & New York : Verso, 1998, 111-2.

그러므로 갑자기 문득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에세이영화의 성행에서부터 새로운 관찰자적 다큐멘터리의 쇄도에 이르는 일련의 시각예술 영역에서의 무빙 이미지들의 흐름은 어쩌면 이미지와 시간, 서사를 둘러싼 자신들이 겪고 있는 서사화에의 곤란을 고백하는 ‘다른 장(another scene)’(프로이트)으로부터의 목소리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서사의 불능,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따른 실패를 부인하며, 이미지가 걸어가야 할 어떤 경로를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애석한 시도들이 아니었을까.

_<내러티브/픽션/아카이브: 시체이거나 영광이거나> 포럼을 위해 쓴 메모입니다. 준비 중인 글을 위한 짧은 비망록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인용은 추후의 텍스트를 참조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