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지구>의 헤테로토피아적인 꿈의 안스러움


Bruce Springsteen – State Trooper

1.
<문래지구>는 장소특정성이란 개념과 공동체적 실천으로서의 미술이란 개념을 결합한 근년의 미술적 실천의 경향에 온전히 충실하고자 하는 전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문래동’이라는 쇠락한 혹은 소멸 중인 공장지대가 예술가들의 거주로 인해 재조명되고 또 관심을 끈 것도 제법 오랜 일이 되었다. 따라서 ‘문래’라는 ‘장소 명’은 장소특정적인 공동체 미술을 위한 소재이자 현장 자체로서 남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장소 – 이미 많은 이들이 비장소(non-place), 무장소, 장소상실(placeless-ness)에 대해 말하며 오늘날에는 장소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했음을 상기하자 – 가 여전히 실재한다고 역설하는 것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은 무언가를 놓치는 성급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사라진 세계에 대한 반발이자 장소를 회복하려는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깃든 의지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전면적인 자본주의적 도시화가 완성된 이후, 특히 한국처럼 탈산업화 이후 도시 자체가 자기반영적인 관광지로 되어가는 추세는, 순식간에 교대하는 ‘핫플레이스(hot place)’의 목록들과 ‘경리단길’, ‘연트럴파크’, ‘망리단길’, ‘가로수길’ 등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장소-스토리(텔링)의 개발 속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그렇다면 문래를 소멸 중인 공동체적 장소로 재현하려는 것은 아슬아슬한 곡예가 될 수 위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래지구>는 장소 기반 미술적 실천의 경향의 양의성을 기꺼이 승인하면서도 그러한 작업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상투어구들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2.
장소성과 공동체성을 말하는 방식에서 그 공동체의 이방인이자 관찰자인 작가가 장소의 화자가 된다는 것, 혹은 그 장소에서의 경험의 중계자가 된다는 것은 의심을 살만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문래지구>는 그 장소를 경험하는 작가의 외부자적인 정체성과 그 속에서 오랜 동안 머문 정주자 사이를 오가면서 그러한 두 서사적 인물들을 매개하는 ‘오동나무’에 주의한다. 그것은 화자 혹은 작가의 주관적 투영에 사로잡힐 위험을 저지한다. 오동나무의 식생(植生)과 그것에 연루된 주민, 그리고 이를 자신이 마주한 소멸 중의 공동체의 서사적 환유로서 바라보는 기획자와 초대된 작가들 사이의 ‘겸손하고 정직한’ 대화는, 순진한 주관적 상상의 투사를 미연에 막는다. 오동나무는 객체이다. 그것은 사라져 가는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기대와 환상이 섞인 주관적인 소망의 반대편에 서서, 마치 문래동이라는 공간의 알레고리가 되어 해독되기를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문래지구>는 ‘오동나무가 있는 풍경’으로서의 문래동이란 단서에서 출발한 다양한 서사적인 작업들을 생산한다.

그것은 오동나무와 그것을 에워싼 다양한 사물의 풍경이 촉발하는 감각적인 느낌을 디지털 이미지로 프로젝션하는 임지연 작가의 작업이나 김용선, 최요한 작가의 ‘오동이’의 사진적 기록과 그를 통한 문래지구의 또 하나의 풍경의 구성이나, 기획자가 발견한 오동나무와의 각별한 기억을 지닌 “최 사장님”의 구술 기록에 바탕한 김세희, 박은미 작가의 일러스트 작업 등 모든 작업들은, <문래지구>에 대한 애틋한 동화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문래지구>는 리서치와 대화, 경험의 공유를 나누면서, ‘문래동’을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 전유된 장소로서 만들어내는 서사적 작업이다. 그것은 관찰이라는 외양을 취하고 다큐멘터리적인 기록이라는 몸짓을 쫓지만, 실은 이 전시가 참여하는 이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문래동을 우리가 상실한 장소 경험의 무대로서 환생시키자는 윤리적인 소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문래동을 ‘문래지구’라는 정든 공동체로, 즉 섣부르게 또 다른 동화적인 장소로, 억지스레 각색해 버릴 위험이 있다. 장소 속에 머물고 거주한다기보다는 공간적 좌표를 방문하거나 여행하고 ‘내비게이션’하며 장소를 오직 디지털 맵 속의 지점으로만 경험하는 이들에게, 작가들이 말하는 장소적 경험은 낯선 것이거나 사치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잘 구성된 인공 마을을 만들어두고 그 장소를 경험하라고 선동하는 테마파크 개발업자의 말을 서투르게 흉내 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철두철미 소외된 장소 경험을 가진 이들에겐 감상적인 가설무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그런 위험을 경고하는 것은 지나친 조심성일 수도 있다.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된 장소 경험의 ‘진정성(authenticity)’을 스스로 연출하고 만끽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 큰 잘못이 될까. 그것은 어쩌면 사소하리만치 사소하지만 그렇다고 너무나 저항하기 어려운 유토피아적인 충동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문래지구>라는 어쩌면 방만하다 싶으리만치 넉넉한 서로 다른 화자들의 초대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신도 한 마디 보태고 또 당신도 한 마디 보태면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합창을 이루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은 문래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 지도 모른다. 그것은 문래동이라는 이름을 방패삼아 내가 걷는 길, 내가 본 하늘, 내가 만난 이가 나의 풍요로운 경험으로 침전되길 기대하는 우리 모두의 소망을 얘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래지구>는 주소명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그 곳’의 생태 공간을 재현한다. 그것은 오동나무가 기우뚱하게 자라나는 담벽이나, 염치없이 뿌리내린 오동나무의 거친 투지나, 애꿎은 나무 한 그루쯤으로 여기다 그만 정을 붙이게 된 최 사장님을 전시장에 모은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어느 나무의 분포와 그것이 만들어낸 풍경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인 풍경화가 사라진 이후, 풍경화가 말하고자 했던 우리가 세계 혹은 공간과 상관하는 방식에 대한 방식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이러한 서사적인 충동은 끔찍하리만치 우리를 압도하는 공간적 추상에 대한 노스탤지어적인 반격일지 모른다. 그것이 아무리 쇠약한 것이라 해도 그것을 함부로 무시하는 것은 무례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례를 무릅쓰고 장소를 탈환하자고 발언하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공허한 웅얼거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술이라는 장에 머물 수는 없다. 부동산 투기가 공간을 둘러싼 유일무이한 논리인 듯 보이는 세상에서 장소성의 회복은 사회적 실천을 통해 좌우된다. 그것이 해야 할 일을 미술에게 짐 지우는 것은 오만한 일 것이다. ■

_<문래지구> 전시에 관한 전시리뷰를 부탁받고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