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은 금융시장인가?


Ana Roxanne ‎– ~​~​~ (2019)

#1

주름 장식을 달고 검은 모자를 쓴 자신을 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2020년 18,722,168 미국 달러에 판매되었다. 1970년 경매에 그것이 나왔을 때의 가격은 1,560 미국 달러였다. 약 1,2000배로 성장한 가격이자 매년 20.4% 가격이 인상된 것이다. 브라보!

그러니까 이 그림은 자산(asset)이 될 수 있다. 가격변동성이 있다면 자산이 될 수 있다. 또 가격 변동을 예측할 수 있으므로 그것은 자산이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미술은 자산 카테고리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포트폴리오에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서이든 자신의 자산 수익을 늘리기 위해서이든 예술 자산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자산 미술은 금융기관의 금고에 아니면 면세 창고에 보관된다. 그것은 투자자를 위한 미술이자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알리바이가 된 미술이며 탐욕의 추한 낯에 영원한 아름다움의 가면을 이식하는 성형요법이다.

#2
자산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은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석유, 금, 밀, 돈육, 면화, 특제 와인. 이 모든 것은 자산이 될 수 있다. 그것이 가격표를 달 수 있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볼 수 있다면 말이다. 자산으로서의 가시성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을 셈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가격을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가격은 가치와는 다르다. 예술 작품이 지닌 미적인 가치와 자산으로서의 가격은 마르크스가 말한 가치와 가격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상품 가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크기와 같다. 그러나 예술가의 활동 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되는 그런 노동과 전연 다른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죄책감을 떨치려 예술가의 일도 노동이라고 우기는 것은 예술가에게나 노동자계급에게나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동 노동, 미적 노동, 비물질적 노동 운운으로 노동에 관한 숱한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 봤자, 그것이 노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노동을 다루지 자본주의에서의 추상적인 노동을 가리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추상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내가 느끼고 경험하며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나의 노동은 전적으로 소외된 것,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것이란 점을 잊지 말자.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재단 노동과 방직 노동이 웃옷과 아마포 가치의 실체가 되는 것은 오로지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의 특수한 질이 배제되어 양자가 동일한 질, 곧 인간노동이라는 질을 지니고 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K. 마르크스, 자본 I-(1), 강신준 옮김, 100쪽.)
그러니까 구체적인 노동은 지워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예술가의 활동은 그러한 추상으로부터 자유롭다. 아니 그런 척 한다. 그것을 우리는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예술의 자율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올라퍼 엘리아슨 Olafur Eliasson의 작업과 한스 하케 Hans Haacke의 작업은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란 점에서 같은 것이므로 그들의 노동생산물인 작품 역시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정부주의적인 구호로서는 그럴싸하게 들릴 수 있다. 예술도 결국 경제란 말은 예술이 잘난 체 하는 것을 고깝게 여기는 사람들에겐 제법 듣기 좋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의 예술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치로서의 상품과 미적 대상으로서의 작품을 아무리 비슷한 것으로 만들려고 애써봤자 쓸모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시 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가치로서의 상품에는 단 한 조각의 자연 소재도 들어있지 않다.” 앞의 책, 103쪽.
그러나 예술로서의 작품에는 모든 소재(matter)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예술 작품과 상품은 전연 다른 객체(object)이자 객체성(objectivity)를 갖는다. 그런데 특별한 예술의 객체성이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더 빛나게 된다는 것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예술작품과 상품은 더 이상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오늘 예술 작품은 상품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이제 감각적인 경험을 소비하지 물리적인 어떤 객체를 소비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 한 상품과 다른 상품과의 차이를 즐기지 그 상품 자체의 쓸모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상품은 점차 기호(sign)가 되고, 언어적인 기표가 된다. 보드리야르는 교환가치 대신에 기호가치가 상품의 정체성이 되었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요컨대 상품은 점차 심미화된다. 상품은 미적인 대상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연기한다. 상품은 라이프-스타일의 징표이고, 개성의 화신이다. 에르메스 핸드백과 나이키 에어조단 시리즈 운동화를 수집하는 이들에게 상품은 컬렉션의 대상이자 뿌리칠 수 없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상품은 상점에 쌓여있지 않고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우아한 건축물 속에 작품처럼 디스플레이된다. 상품은 섬세한 상품기획자에 의해 큐레이션되고, 그것은 숱한 블로그와 잡지 기사들 속에서 황홀하게 스토리텔링된다. 그러니까 상품은 점차 예술작품과 같은 것으로 자신을 변모시켜왔다. 그러나 이는 마케팅과 광고 때문에 나타나게 된 상품의 변신술 덕만은 아니다. 상품에서 노동의 흔적이 삭제되고 상품이 점차 브랜드이자 로고가 되어갈 때, 사실인즉슨, 이는 상품이 극단적으로 추상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상품보다 화폐가, 나아가 화폐보다 신용이 맹위를 떨칠 때, 삼라만상은 가격표를 이마에 붙인 유령처럼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 작품은 허구적(의제적) 상품이라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수량화하고 그것에 가격을 붙이는 데 강박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투시법은, 모든 것에서 자산이 될 수 있는 상서로운 조짐을 발견한다. 뉴욕과 두바이 그리고 도쿄의 날씨 같은 것도 얼마든지 기후파생상품으로 증권화될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어느 곳에서도 듣고 보지 못한 둔갑술을 발휘한다. (cf. 둔갑술을 하는 요괴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삽입?) 그러나 모든 것을 수량화한다는 것은 곧 모든 것에 새로운 가시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자본은 이제 새로운 디스플레이의 테크닉을 연마한다.

수량화된 삼라만상의 이미지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자면, 축장수단이며 지불수단이라는 화폐의 특성에서 비롯한다. 기계와 설비, 새로운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지출되어야 하는 화폐 즉 자본화되어야 하는 화폐로서 기능하기를 멈추고 그 돈이 은행이나 투자기관의 손에 머물 때 그 돈은 축장수단이 된다. 또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돈은 자본가의 손에 머물 수도 있다. 이 때 돈은 지불수단이 된다. 지불수단과 축장수단으로서의 화폐는 곧 신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일하는 자들의 저축통장과 연금이나 의료보험도 금융이자 신용이지만 그것은 금융화된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이윤 획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나타나는 금융의 팽창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실업에 처할 위험에 언제나 불안을 겪는 노동자들은 워렌 버핏 Warren Buffett도 아니고 기관투자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저축과 연금이 안전하길 바라고 자신이 투자한 펀드가 모쪼록 반 토막 나지 않길 전전긍긍할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슬프게도 월급 통장만으로 살 수 없으므로 또 하나의 월급 통장을 만들라고 꾀어내는 속삭임에 굴복하고 만다. 그렇게 노동자는 자신을 수탈한다. 그가 투자한 주식의 주주는 그에게 비용절감을 위한 정리해고를 윽박지르고 더 많은 수익을 위해 고강도의 노동을 하도록 완력을 행사한다.

#3
조반니 아리기는 <장기 20세기>라는 책에서 페르디낭 브로델의 유명한 표현을 좇아 우리가 진입한 새로운 역사적 단계의 자본주의를 ‘자본의 가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997-8년의 아시아의 금융위기 이후 그리고 2008년의 월가와 시티의 금융위기를 거쳐온 지금 여전히 우리는 가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기나긴 겨울의 한 복판에 이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어두운 겨울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그것은 추위를 녹일 따뜻한 온기를 뿜어내고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맹렬한 독성을 품은 한파의 눈보라와 같은 것일까. 자본의 최초의 공식, 마르크스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일반적 정식은 M-C-M’이다. 그것은 화폐에서 시작해 상품을 거친 뒤 다시 더 많은 화폐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화폐에서 출발해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며 또한 구매에서 시작해 판매로 끝나는 과정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그것은 한 번의 회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을 이루며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개별 자본은 경쟁에서 질 것이며 자본의 세계에서 퇴출당할 것이다. 이런 시시포스의 노동에 가까운 자본의 자기채찍질을 가리키는 이름이 축적이다.

그러나 축적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을 응축하는 이윤율의 저하는 그것을 가리킨다. 축적을 하면 할수록 자본은 더 이상 축적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 역시 축적한다. 자본은 이러한 축적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감행하고 전쟁을 불사하며 대량실업과 해고를 밥 먹듯이 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자본의 위기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본은 자신의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 거꾸로 자신을 소생시키는 비책을 찾아낸다. 자본은 죽었으면서도 살아있는 좀비가 되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길을 찾아낸다. 이를테면 설비와 노동력, 원료를 구매하여 생산을 하지 않아도 돈이 스스로 더 많은 돈으로 증식하는 비결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시 마르크스의 공식을 빌자면 그것은 M-M’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동차를 판매하는 회사가 금융기관이 되고 건설업자가 금융기관이 되고, 통신서비스 회사가 증권회사가 될 수 있다. 2년 약정 기간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하고 할인된 가격에 신형 휴대전화를 가입할 때, 졸업 후 취업하는 순간부터 이자와 더불어 원금을 상환하기로 계약을 맺고 학자금 대출을 받을 때, 우리가 서명한 서류는 증권이 된다. 그것은 미래에 어떤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보증하는, 그러나 위험 즉 리스크가 없지만은 않은, 증권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금융 시장에서 수많은 다른 증권들과 함께 묶여, 즉 업계 용어를 빌자면 구조화되어 판매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자본의 시학적인 가시성이 등장하는 것을 본다. ‘희망 펀드’이거나 ‘행복 펀드’와 같은 것들은 유토피아적 충동이 질식당한 세계를 위로할 만한 누추한 임시변통 유토피아적 소망을 주입한다.

#4
자본주의가 금융화 되었다는 것. 더 이상 투자와 생산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지를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고 그것에서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하여 지대(rent)를 쥐어짜내는 것. 막대한 잉여 그러니까 시쳇말로 유보 이윤으로 구조조정을 겪은 후 활짝 열린 자본시장을 통해 글로벌 사우스의 기업들에 투자하고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 그리고 이자와 배당금을 빨아먹는 것. 또 이에 더해 신용카드와 대출을 듬뿍 나눠주고 노동자들의 미래 소득을 청구할 권리로 미래의 시간을 현재에 탕진하는 것, 그러므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토론하고 투쟁하기보다는 이미 팔아넘긴 미래를 상환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영원한 현재의 카르마에 갇혀버리는 것. 이러한 금융화된 세계에서 미술은 단지 자산미술이 되어버렸다고 요약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단계에서 미술은 어떤 방향으로 달려 나갈까.

#5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추상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통해 수많은 노동과 원료, 상품, 자본이 연결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글로벌 상품 사슬을 샅샅이 추적하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이를테면 우리는 청바지가 어떻게 상품 사슬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꿔나가는지 추적하기 위해, 면화농장으로부터 출발해, 도쿄의 긴자 거리에 있는 H&M에 이르는 먼 길을 추적해 볼 수도 있다. 거기에는 인도의 면화 농장과 중국의 방직 공장, 방글라데시의 의류제조 공장,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컨테이너선, 상품의 하적과 재포장, 진열을 담당하는 수많은 기업들과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추적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본을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청바지라는 사물의 생애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그친다. 청바지라는 사용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노동, 노동과정, 기계,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지 아는 것으로는 청바지 상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마르크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잉여가치 생산의 비밀을 알기위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있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괴짜 사회주의자 감독 마이클 무어는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가 덮쳤을 때,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러브스토리 Capitalism: A Love Story>(2009)를 제작했다. 이제 그는 독점자본주의를 이끈 세계의 자본이었던 제네럴 모터스의 공장이 있던 고향을 떠나 월가(Wall Street)로 향한다. 그는 사기와 협잡, 절도로 시민의 세금을 자신들을 구제하는 데 써버린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을 체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그곳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 그러나 과연 그가 삼엄한 경비를 뚫고 그 곳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그가 과연 자본주의의 중앙통제장치를 볼 수 있었을까. 이미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그런 일은 가능치 않을 것이란 점을 쉽게 짐작했을 것이다. 무어는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인 ‘파생상품(derivatives)’의 원리를 알아보겠다고 길을 나선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전직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의 애널리스트였던 이는 전력을 다해 파생상품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러나 설명하는 이나 그것을 듣는 마이클 무어에게나 그것은 오리무중이다. 선물 시장에서의 선물(futures)은 최소한 그것이 기반을 두는 물질적 상품이 있다. 그러나 파생상품은 더 이상 그러한 구속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바로 가격, 환율, 미래의 리스크와 같은 추상 자체에 내기를 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파생상품은 추상의 추상이다. 그리고 이 2차 추상은 더 이상 원본이 필요치 않는 모사의 모사라는 점에서 시뮬라크르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광란적인 추상이 없었다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도 불가능했을 것이며 오늘날의 금융화된 자본주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분산되어 이뤄지는 노동 과정과 테크놀로지, 로지스틱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상품 추상, 화폐 추상의 파편들은, 파생상품을 통해 묶이고 위험에 대비되며(hedge) 우아한 금융상품으로 구조화된다. 그런데 이러한 파생상품이 상징하는 추상은 오늘날 미술의 추상과 흡사한 것은 아닐까. 금융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추상은 곧 미학적인 장에서의 추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모더니즘 추상이 종말을 고한 뒤 미술은 추상과 작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미술이 추상의 극치를 구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주장이다. 추상에서 구상(figuration)으로의 회귀야말로 수십 년 전부터 익히 들어온 사실 아닌가. 그러나 되돌아온 구상이 추상의 추상이라는 것을 생각하자면, 사정은 달라진다.

#6
먼저 이미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더 이상 리얼리티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이미지는 시뮬라크르가 되어버린다는 것은 지금 누구나 따분하게 여기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에서의 추상에 해당하는 문학과 예술에서 추상적 등가물은 시뮬라크르일 것이다. 시뮬라크르가 지닌 특징은 현실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매우 추상인 것이다. 시뮬라크르적인 재현은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사실주의이다. 그러나 그 리얼리즘은 동시에 전연 리얼하지 않은 것이다. 특수효과와 CGI로 가득한 할리우드 영화의 리얼리즘을 생각해보자. 이 영화들은 실사 영화가 갖는 리얼리즘과 전연 관계 없다. 그것은 코드화된 이미지로 현실을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더 없이 리얼하며 리얼함에 관한 자부심에 더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일 뿐이다. 파생상품을 만들어내는 것, 다양한 증권을 구조화하는 것과 전시를 구성하는 것 사이엔 어딘지 닮은 구석이 있다. 금융전문가가 다양한 부채, 옵션, 선물 등을 뒤섞어 금융상품을 구조화하는 것처럼, 큐레이터는 다양한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를 구조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시는 잠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직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작품은 전시라는 일시적인 이벤트를 위해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전시 이후에 남는 일은 기억과 보존, 비평이라기보다는 신속한 망각과 철거 그리고 ‘소셜 미디어’에서의 평판에 근거한 전시평가서의 작성이다.

그러므로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을 두고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이 예술적 객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을 구현하는 오브젝트라는 것에 귀속시킬 수 있을까. 예술가의 영혼과 상상력이 물질화되어 있는 객체, 즉 작품이라는 관념은 모더니즘 예술의 알파이자 오메가에 해당하는 관념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관에 놓여있는 것은 마치 금융자본주의의 투자상품이 허구적인 상품이듯 허구적인 객체일지 모른다. 작품이란 것은 현실을 재현하는 추상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일시적인 전시 이벤트를 위해 마련된 어떤 관념의 추상에 가까운 것이리라.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을 추상한다기보다는 전시라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는 관념을 위해 봉사하는 추상에 가깝다. 따라서 그 작품이 다른 전시 이벤트에서 호출되는 행운을 누린다면 그것은 다시 그 전시를 위해 전시가 열리는 곳에서 제작되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눈앞에 특정한 부피와 형태, 색채를 지닌 오브젝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오브젝트 즉 객체가 아니라고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여전히 미술관은 그것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새로운 미술관 신축을 위해 그리고 신속하게 새로운 소장품으로 교체하기 위해 경매에 내놓을 수도 있다. 미술관의 수장고는 이벤트를 위한 새로운 아이템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이라는 육중한 현실적인 객체는 사라지고 없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어느 글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왜 (…) 최근의 ‘작품들’이—우리가 이것들을 여전히 그렇게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무엇이 되건 어쨌든 더 이상 (예술적인-인용자) 객체들이 아닌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실제로 무엇인지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령 그것들이 객체들이 아닌 이유는, 그것들이 사실 이벤트들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설치작품이나 그와 유사한 생산물들은 후대를 위해서나 영구적인 소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이라는, 옛 모더니즘의 시간성과는 다소 다른 어떤 시간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것이 바로 그것을 어떤 작품이나 스타일 또는 더 심오한 어떤 것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 (혹은 방안recipe)으로, 즉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략이나 이벤트를 위한 방안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해진 이유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단독성의 미학, 박진철 옮김, 문학과 사회 117호, 2017, 296쪽.)

작품이란 관념은 전체 작품(oeuvre) 속의 하나라는 가정에 의지한다. 그러한 작품들은 개성이든 스타일이든 자본주의적 상품 세계가 만들어내는 문화에 맞서 대결하는 외로운 자아(self)로서의 작가의 응답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모더니즘 시대의 유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 탓에 작품이 있기 위한 조건이라 할 저자로서의 작가 역시 사라지는 중에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제 ‘셀럽’이거나 차라리 브랜드에 가깝다. 동시대미술의 예술가는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가라는 관념에 기생하며 그것을 추상화한다. 오늘날 우리가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로고를 사는 것처럼 우리는 전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로서의 예술가를 본다. 고흐는 고흐이고 칸딘스키는 칸딘스키이고 워홀은 워홀이다. 그들은 백치와도 같은 동어반복을 웅얼거리며 미술가 인명사전 속의 순위만큼, 혹은 구글(Google) 검색순위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시 정곡을 찌르는 제임슨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록 스타의 매력과도 같은 것을 지닌 건축가가 지은 새로운 건물에서 줄을 서서 티켓을 끊게 되었으며, 그곳의 전시나 문화적 이벤트들은 뮤지컬이나 간절히 기다리는 영화와 같은 것이 되었다. 이 새로운 지형에서는 반 고흐나 피카소 등의 고전회화조차 전에 없던 후광을 얻게 된다. 이러한 후광은 그 기원에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널리 홍보되는 브랜드 이름의 새로움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앞의 글, 294-5쪽.

 

#7
하이데거는 상품의 세계를 규탄한 가장 아름다운 시적 철학자일 것이다. 그가 말하는 재현과 세계상이라는 것이 모든 사물,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생산물에 상품이라는 마법을 거는 근대성의 논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를 반-상품의 철학자라 칭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가능한 것을 소망했다. 그는 상품을 뛰어넘지 않은 채 그가 염원하던 소외되지 않은 존재로 귀환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하던 본래성(Eigentlichkeit) 혹은 진정성(authenticity)은 상품과 이미지가 선물해주었기 때문이다. 표준화, 수량화, 객체화된 상품의 세계에 등을 돌리고 사물에 눈을 뜨도록 꾸짖었을 때, 우리는 그 요청을 신속히 흡수한 사물-상품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존재자가 아닌 존재, 객체가 아닌 사물은, 사이비-구체성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당신이 상품화된 세계에서 소외된 경험으로 인해 병들었다면 진짜 경험을 제공하는 상품을 소비해 치유될 수 있다. 당신이 유독한 표준적인 욕망의 세계로 인해 깊은 멍이 들었다면 당신의 섬세한 미적 취미에 따라 큐레이션된 상품을 통해 그 독성을 ‘디톡스’할 수 있다. 상품은 자신의 문제를 동종요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한 메타 사물이다. 나아가 모든 감각에 침투할 수 있는 메타 감각이며 어떤 개성도 만들어줄 수 있는 전능한 수퍼-캐릭터, 수퍼-가면이다.

상품은 자신이 물질성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추상화한다는 비난에 감쪽같이 그리고 재빠르게 대처한다. 그것은 매력적인 아우라를 내뿜는 객체로서 더 없이 그럴싸한 물질성의 무대를 상연하며 자신의 독특한 감각적 존재를 뽐낼 수 있다. 이진법 코드가 무한히 다양한 감각적인 이미지와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듯이 상품의 코드는 자신의 코드를 통해 무한히 다양한 감각적 사물과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자본주의가 금융화됨과 더불어 전 세계의 모든 구체적인 노동자의 활동이 추상적 노동으로 환원되듯이, 또 세상의 모든 생산물이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환원되듯이, 모든 인간적 삶의 평지풍파, 당신의 병듦, 당신의 사고(事故), 당신의 노화와 죽음까지 모든 것이 리스크라는 계산적 논리에 따라 현금의 흐름으로 보험화되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추상화되지 않은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에 사이비-구체성은 창궐한다.

그러므로 금융화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삶의 모든 곳에 스며들게 하고 식민화시키는데 이른 자본주의, 누군가의 말을 빌면 절대자본주의(absolute capitalism)는 그 어느 시대보다 절대구체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20세기였다면 감히 상상도 못한 수준의 감각적 구체성을 시뮬레이션한다. 영화는 점점 더 CGI로 채워지고 나는 더 이상 장소를 경험하지 못하고 디지털 맵 속에서 헤매며, 더 이상 세상을 보지 못하고 시뮬레이션된 이미지의 극장 속에서 길을 잃는다. 나는 더 이상 현실이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몰입형 극장의 가상현실 헤드셋 속에서 상연되는 세계를 쳐다보고 그 속에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사이비구체성이 가져다주는 직접성, 비매개성(immediacy)과 즉물성은 현재라는 시간과 짝을 이룬다.

#8
금융자본주의는 오직 현재의 시간만을 선호한다. 초고속 광섬유를 통해 이뤄지는 초단타매매는 나노초의 단위로 사자(call)와 팔자(put)의 매매를 성사시킨다. 그것은 그리니치 천문대가 만들어놓은 모던한 표준 시간을 가뿐히 뛰어넘으며 뉴욕의 금융시장과 런던, 도쿄, 상하이의 금융시장의 시간을 순간적으로 주파한다. 지금 이 순간 환율의 차이는 수조 달러의 이익과 손실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는 어디에 있고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누군가는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의 차이를 시간성의 지배와 공간성의 지배의 차이로 구분한다. 모더니티는, 이름 자체가 말해주듯이 모더니티는 모던해지려는, 즉 새로워지려는 열망에 불탄다. 그것은 과거를 뚫어보고 미래를 창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만이 있는 세계에서 과거와 미래는 시간으로서는 소멸하지만 공간으로서는 남아있다. 아니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번성한다. 온갖 곳이 과거라는 시간을 기념하기 위한 기억의 장소로 세례를 받고 탈바꿈한다. 어지간한 낡은 건축물들은 모두 역사 유적으로서 보존되고 그것에서 혹시나 과거의 흔적을 누락할까 싶어 과거 풍으로 개조되고 리모델링된다. 그러나 과거의 복원이 바로 오늘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란 점을 은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거라는 것이 연대기적인 양식과 재료, 무드 따위를 복제한 것이란 점에서만 가까스로 과거로 지명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역시 완전히 감출 수는 없다. 그것은 역사적인 시간으로서의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연대표가 부착된 죽은 박제처럼 과거를 오늘의 소비를 위해 추상화한다. 과거는 이제 시각적인 상품으로 패키지 되어 우리에게 배달된다. 이때의 과거는 현재를 위해 마련된 미적인 소비재일 뿐이다. 과거는 ‘레트로’라는 패션을 위한 제물이 된다.

동시대 미술이 좋아하는 시간은 현재이다. 금융화된 오늘의 자본주의가 지금이라는 시간, 실시간(real time)이란 시간을 좋아하듯이 말이다. 풍요롭기 짝이 없는 시간의 물결들이 현재라는 시간으로 수축되고 말 때, 현실은 사라진다. 현재라는 시간은 미술관에서의 관람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미술관에서 배회할 때 우리는 우리 눈앞에 들이닥치는 우발적인 지각들을 결합하고 구성한다. 산만한 지각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는 몇 초도 한 작품 앞에 머물지 않지만 그렇게 스쳐지나가면서 본 것들을 자신의 상상 속에 모아낸다. 그 때 미적인 주목(attention)은 작품을 대체한다. 작품을 관람한다기보다는 그러한 작품들 사이를 쏘다니며 만들어진 나의 지각 자체가 관람이 된다. 이 때 그간 존재했던 작품이라는 오브젝트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그것을 지각하는 나 자신의 주관성뿐이다. 작품이란 나의 지각을 위한 자극이자 흥분이 된다. 그리고 관람자는 이러한 자극과 흥분을 수용하기 위한 용기가 된다. 나의 감각 중추(sensorium)는 아무런 내용 없는 흥분 속에서 부르르 떤다.

# 9

주목 경제, 체험 경제의 시대는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추상적인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시대이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상징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상징이란 어쨌듯 저 편에 상징화되어야 할 현실이 있음을 전제한다. 금본위제 하에서 지폐든 동전이든 그것의 상징적 가치는 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는 금을 상징화한다는 묵계를 따르는 척 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저물고 말았다. 자본주의는 서구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세계의 산업화된 도시 세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모든 곳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에 포섭되었을 때, 더 이상 자본주의적 추상은 자신을 상징으로서 나타낼 이유가 없어졌다. 현실사회주의(really existing socialism)가 무너지고 과거의 식민지들이 제3세계란 이름으로 더 이상 인간 이하의 세상으로 남아있길 거부했을 때, 자본주의는 잠시 휘청대는 듯 했다. 그러나 자본은 결국 자신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자본이 이제는 머나먼 과거의 일처럼 여겨지는 세계화를 통해, 모든 곳의 대상과 인간들을 상품과 화폐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동등한 것으로 등가화하였다. 누군가의 말처럼 세계는 평평해졌다. 그러할 때 상징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자본이 미처 손대지 않은 곳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을 때, 그곳은 또한 추상이 지배하는 세계와는 달리 구체적 현실이 있음을 암시하고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때문에 의미는 상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상징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 더 이상 금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화폐는 무엇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보증하고 고정시킬 수 있는가. 변동환율제도가 도입되면서 모든 가치의 근거와 토대가 붕괴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누워 떡먹기이다. 모든 것이 오직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규정한다는 언어학의 지식과 원화의 가치는 한국은행에 보관된 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오직 각 화폐의 교환비율을 통해서만 일시적으로 그리고 잠정적으로 규정된다는 화폐경제의 상식은 절묘하게 대응한다. 보편적인 정체성은 없다, 오직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우연한 것, 일시적인 것, 잠정적인 것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요란한 철학적 구호들은 또한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철학적 자기고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착시일 뿐이다. 각각의 것들이 서로 다른 것이 되기 위해, 모든 것들이 서로가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되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은 등가화, 추상화되어야 한다. 수천수만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재배되고 채굴되고 생산된 옥수수와 천연가스, 휴대전화가 모두 이마에 가격표를 달고 광케이블을 통해 매매되고, 컨테이너선을 통해 운송되며, 광고회사를 통해 마케팅될 때, 들뢰즈의 철학적 트레이드마크 가운데 하나를 빌어 말하자면, 모든 것은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각각의 고유한 개별성을 잃고 가치로서 등가화된다. 다시 들뢰즈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자본의 공리계(the axiomatic)를 통해 모든 것은 영토화(territorialization)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리얼리즘이 붕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름의 ‘신경학적(neurological) 리얼리즘’을 완성한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현실이 있어 그를 재현할 수 있었던 과거의 리얼리즘과는 전연 다른 리얼리즘일 것이다. 또 그러한 리얼리즘의 위기에 반응하며 리얼리즘이 만들어놓은 형식들을 분해하고 분화시키며 그 형식들을 자율화하던 모더니즘의 리얼리즘 없는 리얼리즘과도 다른 리얼리즘일 것이다. 시뮬라크르가 지배하고, 이미지로서의 현실을 또 다른 이미지가 재현할 때, 이미지는 자신의 리얼리즘을 감각적인 충격과 자극 속에서 찾아낸다. 극도의 몰입과 주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강렬한 체험을 제공할 수 있다면 이미지는 리얼한 것이 된다. 그리고 개별 작품이 이런 리얼함을 만들어주는 데 부족하다면 미술관 공간 전체가 이런 경험을 위해 동원될 수도 있다.

#10
금융의 팽창은 추상적인 것의 팽창이지만 또한 구체적인 것의 팽창이기도 하다. 그를 깨닫기 위해 미술관을 한 번 방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로절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가 「후기 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적 논리」에서 예술작품과의 깊이 있는 만남이 새로운 경험 목록을 만드는 것보다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고 개탄했던 적이 있다. (로절린드 크라우스, 후기 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적 논리, <전시의 담론>, 윤난지 엮음, 눈빛, 2002.)
클레어 비숍 Claire Bishop은 “엘리트 문화의 귀족 기관이었던 19세기 박물관 모델이 오늘날 여가와 오락을 위한 포퓰리즘 사원으로 바뀌었다” (클레어 비숍, <래디컬 뮤지엄>, 현실문화, 구정연 외 옮김, 현실문화, 2016, 8-9쪽.)
고 푸념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술관이 타락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예술의 자율성이 사라졌다면 미술관이 쇼핑몰이나 백화점, 테마파크와 비슷한 곳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것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학적인 문제이다. 모든 내용이 형식의 빌미가 되고 말 때, 즉 운동화라는 내용이 스타일과 유행이라는 형식의 들러리가 될 뿐 일 때, 상품은 더없이 미적인 것이 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추상화의 원리를 통해 그렇게 자신을 탈바꿈시켜왔다. 사정이 그렇다면, 문화와 예술은 경제를 향해 속되고 천박하다고 할 자격도 권리도 의무도 없다. 예술작품과 다를 게 없는 상품을 사는 대신, 미술관에서 굳이 작품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미술관은 자신을 변신시켜 왔다. 그것은 극도의 추상화된 세계가 그를 보충하기 위해 끝없이 감각적인 구체성에 유령처럼 사로잡히는 것과 같다. 추상적인 상품은 자신이 결여한 구체성을 광고와 이벤트를 통해 만들어낸 모조 구체성을 통해 보충한다.

미술관에서 과거와 같은 의미에서의 작품은 사라지고, 예술가도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감각적인 경험의 찰나와 이를 공급해주는 이벤트로서의 전시이다. 추상이 범람하던 미술관은 이제 자본의 추상의 뒷면인 가짜 구체성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작가는 전시라는 관념을 현실화시키는 이벤트를 위한 출연자이며, 작가는 그를 통해 포트폴리오를 추가한다. 관람객은 짜릿하거나 색다른 경험을 위해 미술관을 찾고, 미술관은 그런 경험을 제공하는 무대가 되어준다. 그러나 굳이 전시가 없어도 미술관은 무사한 편이다. 미술관은 태그와 해시태그를 통해 수많은 가상공간에 스스로를 복제한다. 미술관은 점차 공간적 경험을 위한 곳이 되고, 미술관은 전시 때마다 새 가벽을 쌓고 해체한다. 관객들은 매 전시마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 신선한 동선(動線)을 따르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위한 최신의 배경을 제공받는다. 그러니까 미술관은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해야만 한다. 아마 이것이 미술관의 ‘뉴 노멀’일 것이다.

#11
경매인이 옥션하우스에서 뉴욕, 런던, 홍콩의 라이브스트림 피드를 보며 경매를 한다. 그는 케이블텔레비전 홈쇼핑의 진행자처럼 실시간으로 미술작품을 판매한다. 그것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미술 작품의 가치는 경매에 참여하는 이들의 호가를 통해 일시적으로 고정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거품을 만들어낸다. 금융시장은 언제나 거품을 사랑한다. 거품은 커질수록 좋다. 그것이 터지는 순간이 도래하겠지만 거품을 만드는 이들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희열을 통해 상쇄된다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다. 옥션하우스가 예술애호가의 작품 수집을 위한 매매의 장소가 아니라 투자를 위한 금융 시장처럼 되어갈 때, 미술관 역시 그와 비슷한 곳으로 바뀌어 간다. 언젠가 팡파르를 울리며 주식시장에 상장될 벤처기업을 찾아다니는 투자자처럼 미술관은 미래의 블루칩이 될 예비 스타들을 발굴하고 투자한다. 그들은 금융시장의 분석가들이 찌라시와 가십, 괴담, 가짜뉴스에 더없이 촉각을 곤두세우듯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피드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히토 슈타이얼 Hito Steyerl은 오늘날의 미술관은 오늘날의 사회적인 공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술관이란 “공간은 열성껏 무급 노동하는 인턴들을 직원으로 둔, 문화산업의 공식대리점이다. 말하자면 또 다른 방식의 공장이 된 것이다. 그곳은 여전히 생산의 공간이며, 무려 정치 영화가 상영되는, 여전한 착취의 공간이다. 그곳은 물리적 만남의 공간이자 가끔은 공동 토론의 공간이다. 동시에 그곳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환골탈태했다.” 이는 조너선 벨러 Jonathan Beller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화와 그를 뒤이어 만들어진 것들, 특히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와 인터넷은 관객들이 일을 하는, 우리가 가치생산 노동을 하는 탈영토화된 공장들이다. 우리가 삶을 꾸려가는 것은 영화 이미지, 그리고 그것의 유산, 사회-심리-물질적 관계들의 매트릭스로부터 생겨나는 섬세한 이미지들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이다.” Jonathan Beller, The cinematic mode of production: attention economy and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Hanover, N.H.: Dartmouth College Press, 2006.
미술관 속의 관람자나 극장 속의 관객이나 모두 같은 일을 한다. 그들은 여흥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일을 한다. 그들은 일에서 빠져나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가치를 뽑아내려는 자본을 위해 무엇이 돈이 되는 감각이자 경험인지 알려주는 정보를 투입한다.

미술관은 또 다른 금융시장인가. 미술관은 추상이 지배하는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알레고리인가. 추상화된 현실을 다시 추상하는 이미지들은, 화폐를 추상한 선물과 옵션, 채권과 같은 것이라면, 미술관 속의 이미지들은 금융시장 속의 숱한 금융상품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가 미술관은 금융시장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_ 부산현대미술관 전시를 위해 쓴 강연 영상 스크립트(인용은 추후 출판될 텍스트를 이용하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