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적 정동과 신자유주의 그리고 가족 

Perfume Genius – Describe

1. ‘빚투’ 가족: 신자유주의의 가족 프로젝트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돌림병이 창궐하는, 거의 초현실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간의 현실 속에 잠긴 채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질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압도하는 또 다른 시름에 맞닥뜨린 것처럼 보인다. 한 해 내내 거의 언론의 전면을 차지하는 주택난과 전세난은 단지 ‘주택 문제’를 넘어 지난 수십 년간 전면화 되었던 신자유주의적 병리를 압축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확진자 수’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하는 ‘오늘의 부동산 시세’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현재의 원근법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거 위기’라는 것을 지난 시대에 흔히 사회과학에서 지칭하던 것과 같이 ‘사회문제(social problem)’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동산 관련 대출을 규제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더 이상 재정 정책이 아니라 금융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는 이자율의 규제를 통해 흔히 말하는 마이너스에 가까운 저금리를 통해 시장에 통화를 푸는 통화정책과도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개인과 가족이 살아갈 집을 마련하는 종래의 ‘복지’ 문제는 ‘금융’ 정책의 문제이자 ‘통화’ 정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족생활을 조정하고 규제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언급한 문제들이 단지 ‘정책’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라면 이는 단지 국가의 기능과 관련한 사안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국가의 기능 양식과 관련한 문제로 좁히기는 어렵다. 이는 무엇보다 국가의 기능을 강제하고 조장하는 자본 축적의 위기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자신의 이윤 획득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생산을 이전하고 축소하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자본은 금융화를 통해 자신의 이윤을 불리는 전략을 통해 자신이 처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상품이나 통화의 요동치는 불안정성을 해결하고자 만들어졌던 다양한 파생상품들이 천문학적인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금융시장은 2008년 미국과 유럽의 금융위기가 말해주듯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극대화되었다. 자본은 자신이 직면한 위기를 생산의 세계화를 통해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를 통해 일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나 한국에서의 ‘신용카드 대란’처럼 결국 이는 대다수 민중의 주거와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 생존을 위한 다양한 조건들, 주거, 교육, 건강, 노후 등의 문제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총체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통해 멀리 떨어진 추상적인 자본의 운동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저간의 변화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초래한 문제라고 환원할 수 있을까. 고통스럽고 용납하기 어려운 사회 문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 귀착시키는 비판적 지식인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주장은 아주 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엔 신자유주의란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의 역사적인 기원은 언제일까. 먼저 칠레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키고 제3세계 프로젝트의 마지막 위대한 실험이 되었을지 모를 칠레의 사회주의적 개혁을 파괴하면서 실행된 ‘쇼크 독트린’의 폭력이 신자유주의의 신기원일까. (cf. 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 김소희 옮김, 살림Biz, 2008.)

미국 제국주의의 은밀한 개입과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으로부터 측면 지원을 받으며 피노체트 정권은 전무후무한 신자유주의적 실험을 진행했다. 아니면 관례적으로 언급하듯이 마가렛 새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신보수주의적인 이행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 단계라고 불러도 좋을 역사적 시기를 열었을까. 아니면 이것이 소수의 국민국가에서 실행되는 특정한 정치적 당파의 프로젝트를 넘어 모종의 일반화된 규범으로 전 세계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에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초래한 1990년대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역사적인 분기점일까.(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최병두 옮김, 한울, 2007.)

‘시기구분(periodization)’은, 지금은 더 이상 많은 이들을 사로잡지 못하는, ‘역사적 상상력’의 요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시점을 확정하기 위한 다양한 주장들은 단지 시기구분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정치적 통치 형태 푸코와 푸코주의자들이 역설했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neo-liberal governmentality)’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시장을 통해 모든 사회적 문제들의 조정과 해결을 도모하는 경제와 정치 간의 새로운 관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축적 위기에 봉착한 포드주의적 자본주의 혹은 독점자본주의의 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전을 가리키는 것인지 묻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국가형태의 문제인지 자본주의의 문제인지 우리에게 답변하도록 촉구한다.
시기구분은 연대기적인 서사와는 다른 것이다. 연대기적인 서사는 흔히 통속적인 ‘세대 서사’로 변환되어 나타난다. 한국전쟁 세대나 4. 19 세대 혹은 386 세대, 민주화 세대, IMF 세대는 특정한 연대를 좇는다. 이 때 그 년도는 희미하게나마 공통된 기억과 경험을 통해 자신들이 시간과 맺는 관계를 서사화할 수 있도록 하는 나침반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 의식과 반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시간적 장(場)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세대적 시간’은 저널리즘적인 소비에 머물기 십상이다. 또한 비록 흐릿하게나마 구조적 규정을 드러내긴 해도, 그것은 대개 그를 사상(捨象)한 채 개인의 경험을 통해 발언한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서사적 재현의 역설이 드러난다. 신자유주의의 주된 특성 가운데 하나가 역사적 규정을 부인하고 자기책임을 지닌 개인을 전면화하는 것이라면,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적이면서도 구조적인 규정을 개인의 기억, 경험, 반성을 통해 재현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주술에 갇힌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경제학이 미시경제학의 완성이자 절대화이듯이 신자유주의 사회학이 미시적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 의지하는 것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효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역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에서 가족의 문제가 차지하는 의의는 바로 이러한 역설의 심장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가족의 해체를 조장한 복지국가 혹은 발전국가를 힐난하며, 가족의 중요성과 책임을 역설하여 왔다. 공적 복지를 통해 부분적으로 감당되었던 사회적 재생산의 책임은,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전적으로 가족과 개인에게 전가되었다. 복지(welfare)를 대체한 근로연계복지(workfare)가 자신의 책임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안녕을 책임지도록 했던 것과 평행하게, 신자유주의적 가족정책은 또 한 편으로는 가족을 붕괴시키는 데 더 없이 일조했다. 생계부양자 남성의 가족 임금에 의존하던 재생산 방식은 허물어지거나 약화되었다. 한국에서 IMF 위기 이후의 세대들의 무력하고 볼품없는 아버지에 대한 자각은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외환 위기 이후의 변화는 여성에겐 더없이 가혹한 일이었다. 경제적인 자립과 공적인 생활에 참여할 기회가 확대되었다고 하지만 성별화된 노동분업은 여전히 여성들의 절대적 착취를 위해 보전되었다. 아니 여성의 빈곤화는 더욱 심화되었지만, 여성들의 사회적 자립에 대한 압력은 더욱 증대하였다.
구조조정 이후 여성들에겐 대개 저임금에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서비스 노동이 주어졌다. 부부의 이중소득으로도 사회적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에 더해 전통적인 여성들의 가사노동에 해당되는 영역은 점차 상품화되었다. 더불어 가족을 돌보고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해야 할 숱한 많은 기준들이 들이닥쳤다. 미세먼지로부터 아이를 구하고 완벽히 정수된 물을 가족들에게 마련하며 유해한 성분이 들지 않은 식재료로 음식을 마련하는 등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과업들은 단지 소비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가사노동의 부담은 줄어들기는커녕 보다 집요하고 세밀한 목표치를 제시하며 더욱 가중되고 복잡해졌다. 빈곤 계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의 유지조차 허덕이는 사이에 사회적 안전과 공공복지의 영역이어야 할 것들은 스멀스멀 시장에 잠식되어 왔다. 신자유주의적 전략이 ‘가족 가치(family value)’를 내세우며 국가에 의한 복지를 공격하였다면 그것은 또한 가족을 내부적으로 잠식하고 파괴하는 힘이기도 하였다. 친밀성과 애정이라는 유대에 의해 서로가 돌봄을 책임져야한다고 역설되었던 가족 가치는 가족을 더욱 더 타산적인 생존의 단위로 만들면서 더 없이 미래의 생존을 위한 투기의 영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가족의 문제일 뿐이다. 이른바 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숱한 유사 매뉴얼과 상담 프로그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가족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전문적인 기예를 통해 학습되고 훈련되어야 한다고 귀따갑게 듣는 사이, 그러한 가족의 문제가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통해 초래된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은 간과되기 일쑤였다.
신자유주의적 가족이란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미래의 빈곤과 불안정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점점 더 자산이라는 프리즘을 통하여 가계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 가치라는 윤리적인 규범은 실상 가계의 자산 가치(asset value)라는 경제적인 폭력을 통해 가까스로 유지되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런 점에 유의하며 가족이라는 미시적인 사회적 요소에 내재화된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규정을 들춰내면서, 가족적 삶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의 작동 방식과 결착되어 있는가를 밝혀보고자 할 것이다. 2020년 한 해 동안 가장 유행한 신조어 가운데 하나일 ‘영끌’과 ‘빚투’는 금융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의 자기반영적인 소용돌이가 펼쳐지는 풍경을 적나라하게 응축한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아파트를 사는 것은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로소득으로는 더 이상 생존하거나 소득을 늘리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을 암시한다. 오직 투기만이 유일한 소득 증대의 방편이고, 결국 우리는 영혼까지 끌어 모아 모든 곳에서 대출을 얻고 집을 산다. 그리고 그 집은 언젠가 더 많은 소득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아슬아슬한 신화에 기댄 채 투기적 자산으로 변신한다. ‘빚투’는 금융화의 원리를 더욱 노골적으로 참조한다. 빚을 얻어 투자를 하는 것 역시 자신이 투자한 주식이나 금융상품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미신을 통해 유지된다.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라는 확고한 사실적 평가는 어느 누구의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떨어진 주식 가격은 반드시 오르게 되어 있다는 믿음을 통해 코로나 위기가 극복된 이후의 장밋빛 성장의 환상을 공고히 한다. 이는 자본의 위기가 사회적 생존의 위기로 전가되는 악몽과도 같은 사슬을 만들어낸다.

2. 가계의 금융화, 소득의 수탈

금융화(financialization)란 낯선 용어는 이제 경제학을 넘어 철학이나 문화연구, 사회학을 비롯한 숱한 영역에서 회자되는 낱말이 되었다. 또한 금융화란 개념은 더 이상 경제 현실(economic reality)의 변화를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인화의 윤리에서부터 심적 과정에 대한 해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서사로서 구실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러한 논의들을 참조하면서 한국 사회에서의 금융화가 가족생활을 어떻게 변조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금융화, 그 가운데서도 ‘가족 생활의 금융화’란 가족의 경제적 삶이 금융이라는 격자를 통해 표상되고 규율되고 관리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족 문제는 실은 돈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족에게서의 돈이란 살림 혹은 생활비란 말이 떠올려주듯이 오직 삶에 가용할 수단을 마련하기 위한, 마르크스 식의 표현을 빌자면 사용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돈일뿐이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 소비에 가용되는 돈의 차원과 화폐의 자기증식으로서의 자본이라고 할 때의 돈의 차원은 다른 것이다. 이를 라파비차스는 ‘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로 구분하기도 한다. C. Lapavitsas, Social foundations of markets, money and credit,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3. Money as Money and Money as Capital in a Capitalist Economy, A. Saad-Filho, ed. Anti-Capitalism: A Marxist Introduction, London & Virginia, Pluto Press, 2012.
그렇지만 그것이 돈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한, 다시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상품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형태로서의 화폐라는 가치형태를 취하는 한, 돈은 요술을 부릴 수 있다. 그것이 돈인 한 돈을 통한 돈의 가치 증식의 가능성, 즉 소비를 위한 돈이 아니라 미래에 보다 많은 가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가치로서의 돈으로서 둔갑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에서의 화폐의 결정적인 특성, 자본으로서의 화폐가 지닌 특성이다. 그러나 이는 ‘자본’에게는 해당될 수 있어도 노동자의 임금으로서의 화폐와는 크게 무관한 일이었다. 임금 소독은 단지 소비를 위한 재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화는 이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낸다. 그리고 이는 시간과 정동의 관계를 새롭게 엮고 짜면서 가족생활을 새로운 금융적 배치(constellation) 속으로 운반한다. 신자유주의적 가족은 금융화된 가족으로 바뀌고 그 가족은 불안하기만 하다.
금융화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리고 이는 단지 경제적 현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윤리적, 문화적, 철학적 사변의 쟁점으로서 나아가 정신분석을 비롯한 심리를 둘러싼 토론과 쟁점에서도 금융화를 둘러싼 논의는 무성하고 또한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모두 소개하고 요약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에서 금융화에 관한 논의는 희박하다. 한국자본주의가 금융화되었는가를 둘러싼 비판적 경제학자들 내부의 논쟁을 제외한다면 비경제학 분야에서 금융화와 문화의 관계를 둘러싼 주제에 관한 성과로는 강내희의 저작이 유일하다 할 수 있다. (강내희,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문화과학사, 2014.)
그럼에도 요약하자면 금융화는 현실에 대한 술어적인 규정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현재의 역사적 시대에서 조직되고 전개되는 모습을 규정하기 위한 정치적인 원근법이라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화란 경험적 대상 세계(은행, 투자은행, 국가, 도소매업자, 개인 소비자, 부채와 선물, 옵션, 파생상품, 월스트리트와 시티, 여의도 등)와 주체(정부, 기업, 금융업자, 노동자, 여성, 대중매체 등), 제도(국제금융기구, 중앙은행, 역외금융, 그림자금융, 미소금융, 금융 관련 시민운동, 여성주의 운동조직 등) 등을 어떻게 규정하고 그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밝히고 분석하는 일로 환원하기 어렵다. 금융은 자본주의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경제 내적 영역은 물론 경제-외적인 영역들에 속한 다양한 요인들을 어떻게 연관시키고 또 그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배치하는가와 관련된 쟁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나아가 가계, 지역사회, 공동체, 국가는 물론 국제관계에 이르는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현실이 조직되고 변형되는 계기를 파악하도록 한다.( 아래에서의 금융화에 관련한 서술은 상당 부분 필자의 다른 글을 참조한 것이다. 서동진, “착취의 회계학: 금융화와 일상생활 속의 신용물신주의”, <다른 삶은 가능한가: 마르크스주의와 일상의 변혁>,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회 엮음, 한울아카데미, 2015. )
그런 점에서 금융화는 경제 현상에 머물지 않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고 조직하는지를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끄는 탐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금융화를 둘러싼 경제적 맥락을 정의하고자 할 때 마르크스주의자인 라파비차스와 도스 산토스의 분석을 참조할 것이다. (C. Lapavitsas, Profiting Without Producing: How Finance Exploits Us All, London & New York, Verso, 2014. Financialised capitalism: crisis and financial expropriation, Historical Materialism, 17 (2), 2009, P. L. dos Santos, On the content of banking in contemporary capitalism, Historical Materialism, 17 (2), 2009. ) 그들은 금융화를 계급적 사회관계의 역학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을 좇을 때 금융화란 지난 수십 년간 선진 자본주의국가와 발전국가에서 나타난 자본과 노동 간의 착취적 사회관계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규정하는 원인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금융화를 자본주의 축적과 순환의 체계나 자본주의의 위기의 경향(특히 이윤율의 추이) 등에서 금융화를 이해하려는 입장과 구분된다. 그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악하자면, 은행을 비롯한 금융자본이 산업자본가로부터 노동자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이윤)의 일부를 이자의 형태로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노동자의 삶을 위해 소비되어야 할 임금을 이윤의 원천으로 수탈한다는 것, 그것이 금융화의 요체라는 것이다. 라파비차스가 쓴 저작의 제목처럼 “생산 없는 이윤 취득”이 금융화의 핵심 논리인 셈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수입을 화폐적 소득, 임금이란 형태로 취한다. 그리고 그 화폐 형태를 취하는 소득은 노동자 자신의 재생산은 물론 피부양자의 생활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를 가치론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노동자의 소득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소비를 통해 사용가치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노동자가 얻는 수입이 임금, 다시 말해 화폐 형태이기에 노동자와 그의 가족 성원들은 이로부터 비롯된 물신적 환상에 언제든지 연루될 수 있다. 직접 일하는 대신 돈이 일하게 하라는 금융 상품 광고가 노골적으로 말하듯이 돈이란 스스로 가치를 불려가는 듯한 환상을 언제나 불러내기 때문이다.

스스로 가치를 증식하는 가치로서의 화폐(M-C-M’(M+⊿M))란, 마르크스에 따르자면, 자본에 대한 가장 단순한 초보적인 규정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사용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더 많은 가치를 얻는 한에서 오직 생산이 이뤄지고 그에 관련된 모든 경제 활동이 조직되고 실행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런데 노동자 수중에 있는 돈 역시 화폐이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스스로 가치를 증식하는 화폐가 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자가 받는 돈, 즉 소득으로서의 임금은 생활비 혹은 개인이나 가족의 소비를 위한 구매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자본으로서의 화폐처럼 스스로 가치를 늘려갈 수 없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일이 마치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는 어떻게 가능하게 될까. 라파비차스와 도스 산토스가 금융화를 두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또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변화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라파비차스와 산토스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19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의 금융적 이윤의 추이(라파비차스), 은행업의 성격 변화(도스 산토스)를 분석한다. (C. Lapavitsas, Profiting Without Producing: How Finance Exploits Us All, London & New York, Verso, 2014. Financialised capitalism: crisis and financial expropriation, Historical Materialism, 17 (2), 2009, P. L. dos Santos, On the content of banking in contemporary capitalism, Historical Materialism, 17, 2009. ) 그러나 이는 금융화의 추세가 서구의 발전된 자본주의국가에만 해당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워싱턴-컨센서스 이후 발전국가에 강요된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특히 금융시장의 개방을 중심으로 미국 헤게모니의 자본주의체제로의 편입을 강요하였고, 특히 유사 세계화폐(world money)로 기능하는 달러의 영향 하에서 해외 자본의 금융업 진출은 발전국가에서도 금융화를 폭발적으로 진척시켰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노동자 개인 소득과 가계의 수탈을 통한 금융 자본의 이윤 취득이란 관점을 중심으로 볼 것이기에 둘 사이의 역사적 지배 관계는 뒤로 미뤄두기로 한다.( ‘종속적 금융화(subordinate financialization)’이란 용어를 통해 발전국가에서의 금융화 경향의 특성(특히 종래의 제국주의와 구분되는 자본의 역 흐름 혹은 역수출 경향)에 대해서는 라파비차스의 다음 글을 참조하라. C. Lapavitsas, 2014, pp. 245-55.)

그리고 이로부터 거대 산업 및 상업 기업들이 신용의 원천으로서 은행을 이용하는 것을 피하고 대신 공개시장에서 금융 자원을 얻거나 유보 이득에 점점 의지하는 자기금융(self-finance)을 통하는 경향을 확인한다. 사정이 그렇게 되면 은행은 엄청난 곤란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간 금융업이란 여러 가지 이유로 돈을 필요로 하는 자본가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를 통해 수익을 얻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행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길을 찾아낸다. 은행은 주거, 교육, 연금을 비롯하여 과거에 사회적으로 제공되던 다양한 형태의 혜택을 잃게 된 이들을 노리게 된 것이다. 더욱이 실업은 물론이려니와 일시적이거나 비정규적인 고용 형태 때문에 빈곤에 몰린 이들은 더욱 돈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자 은행을 비롯한 다양한 금융기관들은 개인 대출로 사업 방향을 전환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개별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수익 원천을 찾으려 한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이러한 추세는 더욱 두드러진다. 매년마다 역대 최대의 크기를 갱신하는 ‘가계부채’의 규모는 가족의 생존에 금융업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잘 말해준다.

한편 라파비차스와 도스 산토스는 상업은행들이 공개금융시장에서 채권, 증권, 파생상품 등의 거래에 집중하게 된 경향 역시 주목한다. 물론 이는 증권화(securitization)을 통해 소비자 대출을 비롯한 ‘서브프라임모기지(subprime mortgage)’로 대표되는 악성 채권을 수익성 높은 증권으로 탈바꿈하는 등 자신이 가진 대출 채권의 위험을 회피하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금융화의 핵심적인 기제로서 증권화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은 상당히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데이비드 맥넬리, <글로벌 슬럼프>, 강수돌, 김낙중 옮김, 그린비, 2011. M. B. Aalbers, The Financialization of Home and the Mortgage Market Crisis, Competition & Change, Vol. 12 No. 2, 2008. D. Bryan, R, Martin & M. Rafferty, Financialization and Marx: Giving Labor and Capital a Financial Makeover,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Vol. 41, No. 4, 2009. J. Montgomerie, The Financialization of the American Credit Card Industry, Competition & Change, Vol. 10 No. 3, 2006. D. Müggea, Tales of tails and dogs: Derivatives and financialization in contemporary capitalism,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Vol. 16, No. 3, 2009. C. Lapavitsas, op. cit., 2009.)

따라서 라파비차스와 산토스의 논의를 요약하면 금융화의 진행과정은 개인의 사적 소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금융적 이윤을 수탈하는 것과 보다 확대된 금융 시장 영업을 결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윤의 일부 즉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 가운데 일부를 이자란 형태를 통해 수취하는 전통적인 형태의 이자를 넘어 이제는 노동자의 임금을 직접적으로 빼앗아가는 수탈이 금융자본이 이윤을 뽑아내는 새로운 원천으로 자리 잡았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라파비차스는 이를 ‘소외(alienations)’ 혹은 ‘수용(expropriation)’에 따른 이윤이라고 칭하면서 그것을 잉여가치의 분배를 통해 획득한 이윤과 구분한다. 앞의 글, pp. 138-68. 이는 공유지의 수탈을 통한 자본의 축적을 설명하며 이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특징이라고 설명하는 데이비드 하비의 분석과 대조적이다. D. 하비, 신자유주의, 최병두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7.
결국 그들은 금융화를 착취적 사회관계의 재구조화로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금융자본과 생산자본의 관계를 넘어 이제 금융자본은 노동자의 소비를 위한 임금, 사용가치로 전환되어야 할 그 화폐 소득을 수탈한다. 그것은 착취에 더한 비생산적인 수탈이 더해진 것이다.

그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을 통해 본 2002년-2020년 가계신용의 추이(단위 10억원)

그러나 두 학자들은 발전된 자본주의국가에서 진행된 추이를 관찰하며 판단을 내리는 것이지만, 이는 ‘종속적 금융화’를 경유한 한국에서도 전연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은행업의 성격의 변화라는 면을 살펴봐도 그렇다. 도스 산토스는 “은행활동에서 최근의 변화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측면은 은행 이윤의 원천으로서 개별 임금 소득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은행 대부는 기업 대부로부터 가계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소비 및 모기지 대출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투자 은행 영업 역시 소매 투자 펀드 서비스들에 의해 상당하게 추동되는 전체 은행 형태들에 있어 증가하여왔다”고 말한다. P. L. Dos Santos, At the Heart of the Matter: Household Debt in Contemporary Banking and the International Crisis, Research on Money and Finance, Discussion Paper No. 11, SOAS, 2009, p. 6.
이는 한국에서도 거의 일치한다.( 한국에서 은행업을 비롯한 금융자본의 활동 추이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양두용 외,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금융국제화 진전과 향후 과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4. 한국금융연구원, <한국금융산업발전사>, 한국금융연구원, 2014. )
한국은행이 2012년 가계부채의 원인을 진단하기 위해 행한 조사보고서를 살펴보면 방금 언급한 산토스의 서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행, <부채경제학과 한국의 가계 및 정부부채>, 2012.)
「가계부채 상황에 대한 분석 및 평가」라는 해당 보고서에 실린 연구는 가계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요인 가운데 공급 측 요인, 즉 금융기관의 측면에서의 요인으로서 금융기관이 운용되는 방식에서의 변화를 일차적으로 꼽는다. 특히 이는 크게 두 가지로 이뤄져 있다. 먼저 은행이 자신이 대출할 수 있는 능력을 확대시킴으로써 금융기관들의 대출가용성이 신장된 것이다.(특히 CD, 은행채 발행의 증대), 다음은 대기업의 내부 보유가 증대하고 직접금융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에 따라 은행 경영 전략이 가계대출 우선으로 선회한 것 물론 이에는 신바젤협약으로도 알려진 ‘바젤II 협약’과 같은 국제금융기관의 규율 역시 작용한다. 이는 은행 자기자본비율을 산정하는데 있어 위험도에 따른 보다 정교한 비율을 적용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 가계 주택담보대출은 BIS비율 산정시 위험가중치가 기업대출에 비해 절반이 된다. 결국 가계부채가 촉진될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한 것이다.
이다. 앞의 글, p. 50-1.
이는 국내의 은행업의 발전과 그 추이를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국내 일반은행의 이자 수익에서의 변동을 통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자수익의 경우 1992년의 10.3조원에서 2009년 57.3조로 급격하게 성장하는데, 이 때 이자수익의 압도적인 부분은 49.1조원을 차지하는 대출채권이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한국금융산업발전사>, 2014, pp. 96-9. )
대출채권은 다양한 종류로 구성될 수 있다. 그러나 대출채권의 종목이 무엇인지 따로 찾아보지 않더라도 그것이 주택담보대출채권이라는 것은 이제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한국 경제가 터잡고 있는 지반의 상태를 알려주는 지진계인양 끊임없이 가계부채의 증가와 부담을 우려하고 그것이 한국 경제에 미칠 효과를 논하는 보도, 칼럼, 토론, 학술 행사 등은 거의 연중무휴로 진행되고 있다. 이럴 때엔 가계부채란 폭발 시점을 알 수 없는 시한폭탄인 것처럼, 임박한 재앙의 최종 원인인 것처럼 언제나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해야 하는 대상인 듯 보이기까지 하다. 이는 가계부채란 것을 제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적 재앙과 같이 응시한다는 점에서 기만일 뿐 아니라 가계부채를 증대시키고 그것을 초래한 조건들을 시야에서 지운다는 점에서 허위이다. 그렇지만 가계부채는 미처 도래하지 않은 파국을 초래할 원인으로 지목되어 언제나 관찰된다.

그림 가계신용의 구성(국가통계포탈 KOSIS)(2020. 11. 26. 최종 접속)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301&tblId=DT_008Y001&conn_path=I2

위의 표는 국내의 은행 및 비은행예금취급기관 등에 의한 가계신용 대출의 변동 추이를 보여준다. 2020년 하반기에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누적된 가계부채 총액은 1,682조 120억여 원에 이른다. 그리고 OECD가 역시 같은 즈음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연간 가계부채 증가율은 금융위기 이후 매년 8.7%에 이른다. 이는 가계부채가 전반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는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이다. 물론 이로부터 얻어 들이는 은행들의 이자 수익, 즉 노동자의 가계소득으로부터 얻어 들이는 수익은 상당할 것이다. 물론 은행들은 저금리기조의 정부 통화정책 때문에 낮은 예대마진율로 낮은 이자 수익을 얻었다고 불만을 터뜨리지만 바로 그런 조건 탓에 대출을 공격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주탬담보대출로 벌어들인 은행들의 이자 수익을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료로는 지난 2011년의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것으로 이에 따르면 대출채권 가운데 5년(2006년~2010년)간 7대 시중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로 벌이들인 이자수익이 51조 627억 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간 가계부채, 특히 주택담보대출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전체 가계부채 가운데 절반 이상을 이루었음을 감안하면 이 역시 상당하게 증가했을 것임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자수익은 개별 임금과 가계의 소득을 수탈한 것임은 물론 미래에 얻게 될 임금소득을 떼어낸 몫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은행을 비롯한 금융자본이 판매신용 등을 비롯한 소비 신용을 제공하면서 행하는 수탈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일반 가계에서 빌린 돈과 외상으로 물품을 구입하고 진 빚의 합인 가계신용 즉 가계부채는 2020년 3/4분기에 1,682조 120억여원다. 그리고 이 가운데 주택담보대출은 890조 3854억원, 이를 제외한 일반대출금 및 신용카드회사를 통한 현금 서비스, 카드론 등의 대출은 695조 1555억원, 나머지 신용카드를 통한 구매 및 할부로 상품을 구입한 금액을 합한 판매신용은 96조 5786억원이다. 2002년의 ‘카드대란’ 이후 상당량 축소되었다고 말하지만 판매신용을 통한 금융자본의 이윤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또 여전히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판매신용보다는 현금서비스와 카드론의 높은 이자와 수수료를 통한 대출을 통해 신용카드회사들은 상당한 이윤을 취득한다.
특히 소득이 낮은 계층을 중심으로 생계비 마련을 위한 대출, 혹은 대출 상환을 위한 대출 역시 꾸준히 증가하여 왔다. 그러나 이를 지적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할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소비의 하방경직성이라고 부르는 소비수준의 상승과 재생산의 경향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계층에 속했느냐와 관계없이 스마트폰의 사용은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고, 대학교 진학 역시 당연한 일인 듯이 여겨지게 되었을 때, 정보통신 서비스, 교육, 의료 등에서 노동자들은 소비를 줄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실질임금은 영원히 정체한 듯 하고 더욱이 그것이 감소하거나 불안정하게 될 때, 그들은 소비자 금융의 “민주화”와 더불어 그들이 훨씬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금융기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제2금융권이라고 불리는 금융기관들의 공격적인 비즈니스 특히 TV 광고는 걸핏하면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아랑곳없이 거의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마주하게 된다. “러시앤캐시”, “산와머니”, “미즈사랑” 등의 브랜드명은 약탈적 금융기관의 특성을 말끔히 제거하고 친근한 서비스 기관으로 자신을 분장한다.
그리고 이는 거의 상식이다시피 되었다. 아니 이는 이제 소비생활에서 일상적인 관습이자 의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용카드, 체크카드를 비롯하여 광범하게 발달한 신용구매 수단을 이용하지 않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알뜰한 소비를 위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무해한 수단처럼 보이는 결제수단들은 모두 금융 수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휴대전화로 결제를 할 때 매력적인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는 “카카오페이”나 “네이버페이”, “삼성페이”같은 신종 결제수단들은 순식간에 일상생활 속으로 펴져간다. 이는 편의점이나 수퍼마켓, 대형할인점을 이용할 때 할인을 비롯한 부가적인 혜택을 제공한다고 약속하는 ‘티머니’나 ‘팝카드’ 같은 다양한 지불수단을 망라한다. 이는 인터넷 쇼핑몰이나 백화점을 비롯한 소매상점들과 연관된 다양한 지불수단의 후속편일 뿐이다. 이 모두를 열거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결제수단은 다시 언젠가 다른 이를 수탈하게 될 돈을 끌어 모으는 수단일 뿐이다. 주변의 자식들과 친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위엄 있게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있음을 설득하는 상조 광고는 최근 몇 년의 TV 광고에서 가장 자주 마주하게 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악화되어가는 노인 빈곤율과 노년층의 고독사를 둘러싼 세상의 불안을 비아냥거리기나 하듯이 효심을 쏟는 혹은 예의를 다한 장례를 약속한다. 물론 간헐적으로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듯 상조 역시 거대한 펀드를 운용하는 금융기관일 뿐이라는 점은 무시된다.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사기 범죄의 폭증 역시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어느 언론 매체 보도에 의하면 “예순 살 이상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사기 범죄는 경찰청이 파악한 것만 2만 2천 건이” 넘었다고 한다. MBC 이브닝뉴스, 2015년 6월 30일.(http://imnews.imbc.com/replay/2015/nw1800/article/3725954_14761.html) 보험 사기이든 다단계 판매 사기이든 이러한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사기는 노년층이 자신의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투자에 참여하고 그를 통해 안전을 구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곧 살펴보게 되겠지만 안정된 노후를 위한 “생애주기별 금융생활”이라는 표어가 제시하는 건전한 금융생활을 사기에 속아 넘어가는 불건전한 금융생활과 구분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폰지 사기와 다단계 판매 사기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투자자에게 수익을 가져다주는 한 그것은 자신의 윤리적 약속을 다한다는 점에서 선(善)일 수밖에 없다. 반면 변액연금보험에 가입하거나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며 권유받아 확정기여형연금으로 갈아타는 이들이라고 해서 건전한 금융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지나 원금 이하의 돈 만 남거나 아니면 숫제 마이너스가 되어버린 잔고 계좌를 마주하고 경악하는 노동자에게 그것을 건정한 금융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마의 농담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투자에 따른 이득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고 증대시켜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시민(citizenship)”의 에토스는 모든 연령대에 스며든다. 우리는 이를 다음 절에서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라파비차스와 산토스의 분석에서 유의할 점이 있다. 그들은 임금 소득을 수취하고 자신의 생존과 재생산을 위한 즉 사용가치로서 실현되어야 할 화폐 소득을 얻는 노동자가, 자신의 수입이 화폐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수탈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소비자 금융이라는 형태를 통해 거대한 이윤을 획득하고자 하는 금융 자본의 전략과 이를 실행하는 숱한 기술, 제도, 교육, 법률, 정치적 수단들이 관여되어 있다. 나아가 여기에는 자신의 부족한 소득을 벌충하기 위해 마침 스스로에게 제공된 숱한 금융 수단에 연루된 노동자들이 있다. 이를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카드 돌려막기’를 통해 당장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빈곤한 노동자에서부터 지속적인 임금 상승을 통해 미래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차입을 통해 아파트, 펀드, 보험 등에 투자하여 더 많은 부를 얻고자 하는 중산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결국 금융화가 진행되는 과정의 한 복판에는 개인과 그들의 가족이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금융화란 개인과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을 금융화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융화를 통한 수탈로 이윤을 획득하려는 자본의 전략에 ‘비대칭적으로’ 대응하고 또 공모하는 주체의 전략 역시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것은 레버리지(leverage)를 통해 자신의 자산을 키우려는 노동자계급 가계의 전략이다. 피오나 알론은 숫제 이를 일상생활의 “차입투자화(leveraging)”라고 규정하기조차 한다. F. Allon, Everyday Leverage, or Leveraging the Everyday, Cultural Studies, Vol. 29, No. 5-6, 2015.
레버리지란 빚을 내어 투자를 하고 그로부터 수입을 얻으려는 것을 망라하는 용어이다. 대출을 비롯한 차입을 통해 마련한 돈으로 부동산, 주식, 펀드를 비롯한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고 이로부터 기대되는 수익을 통해 생존을 유지하고 나아가 미래에 들이닥칠 위험에 대처하려는 노동자와 그 피부양자들이 가용하는 전략이 레버리지인 것이다. 그런데 금융기관이나 투자자들에게 국한되었던 레버리지는 이제 거의 모든 이들이 선택하는 재무적인 전략이 된다. 그 용어를 모르더라도 지금 쌀 때 신용카드로 사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은 이미 일종의 레버리지이다.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투자를 하거나 자영업을 할 때도 역시 우리는 레버리지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 전략은 단순히 공리적이고 타산적인 합리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누군가 ‘금전지성’ 이즈미 마사토, <금전지성: 돈과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지적 능력>, 서승철 옮김, 씨앤톡, 2007.
이라고 고약한 이름으로 정의한 신종지성, 즉 인지적인 계산의 합리성이 아닌 두려움, 불안, 기대, 희망 등이 뒤범벅된, 벌란트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정동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표현을 빌자면 ‘잔인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 혹은 한국사회에서 유행하는 흔한 표현을 따르자면 ‘희망고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동적 지향으로 충전되어 있다. L. Berlant, Cruel Optimism, Duke University Press, 2011.
그런 점에서 금융화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항존하는 정동을 근본적으로 전면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가족의 돈: 화폐의 새로운 이미지

2015년 6월 금융감독원은, 마침내 마지막 권을 발감함으로써, 수년간에 걸친 <생애주기별 금융생활 가이드 북> 출간을 완료하였다. 가이드북은 2013년 7월 <생애주기별 금융생활 가이드 북 1: 미혼기 편>을 발간하기 시작해 2015년 6월 마지막 권을 발간함으로써 모두 완간되었다.
이 실용적인 책자를 간행하게 된 목적은, 발간사에서 언급하듯이, “성인 대상 금융교육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국내 금융현실에 적합한 한국형 생애주기별(미혼기, 신혼기, 자녀출산기 및 양육기, 자녀학령기, 자녀성년기, 자녀독립기 및 은퇴기) 라이프이벤트·재무목표·금융교육 성취기준 등으로 구성된 <생애주기별 금융교육 가이드라인>을 개발” “발간사”, <생애주기별 금융생활 가이드 북 5: 은퇴기 편>, 금융감독원, 2015.
하고 이를 통해 성인층의 금융 교육을 체계화하고 또한 이의 질적인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여기에서 국민이라는 주체를 ‘금융소비자’라는 범주의 주체와 등치하고 이제 새로운 이름을 걸친 그 주체에게 말을 건넨다. 국민적 주체란 이제 금융 소비자란 경제적이면서 문화적인 주체의 다르지 않은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 생활의 지침서는 다양한 재무적(financial), 윤리적, 정서적 규범을 내놓는다.
그렇지만 국민-주체와 금융-소비자 주체 사이에 놓인 거리는 상당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거리를 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의 전환 이후 형성된 통치 대상으로의 주체와 이전의 종속적인 발전 국가의 국민 주체 사이에 놓인 역사적, 정치적 차이로 식별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민=금융소비자라는 정체성의 등식은 금융화된 자본주의적 경제에서의 삶과 그것을 규율하는 정치적, 문화적 원리를 응축한다. <가이드북>은 추상적인 정치적인 주체(이를 테면 주권적인 정치적 주체이든 아니면 연대의 원리에 따라 결속된 ‘사회(Society)’의 성원으로서의 사회국가(social state) 국민-(사회-국가의 특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E.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재발명>,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꾸리에, 2015. )의 일원(‘인구(population)’란 이름으로 지칭되기도 하고 혹은 푸코의 표현을 빌자면 생명정치적(bio-political) 주체 (M. 푸코, <안전, 영토, 인구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로 불러도 좋을)가 아닌, 금융소비자라는 새로운 주체에게 말을 건넨다. 이때 금융소비자란 단순히 금융상품을 구매하고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인물이 아니다. 이를테면 앞서 인용한 <가이드북>은 이렇게 말을 건넨다.

“많은 사람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이후 노년기를 맞이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금융의사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전 생애에 걸쳐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직면할 수 있는 여러 금융문제에 대비해 미리 계획을 세우고, 현명한 의사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국민의 금융역량 향상을 위한 금융교육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 아무쪼록 이 책자가 널리 활용됨으로써 각 생애단계별 맞춤형 금융교육 기회가 보다 폭넓게 제공되고, 모든 국민이 평생에 걸쳐 안정된 금융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강조는 인용자) 앞의 글.

여기에서 국민이라는 주체에게 말을 건네지만 이때의 국민이란 일생동안 숱한 “금융 의사결정”을 내리는 개별화된 인격적 주체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세금을 납부하고 징집에 따르고 국가대표팀의 승부에 열광하는 민족 혹은 국민 주체와는 다른 주체임에 분명하다. 금융소비자로서의 국민은 ‘상상의 공동체’에 소속된 주체도 아니고 연대의 원리에 따라 공동의 생존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성원으로서의 성원 주체도 아니다. 이 주체는 자신의 생존과 재생산을 금융 혹은 금융적 실천이 제공하는 표상(생애주기, 신용, 금융이해력(financial literacy) 등)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금융적 수단과 상품들(세금우대, 연말정산, 연금, 신용카드, 저축, 펀드, 보험, 휴대전화 등)을 효과적으로 소비하고 활용함으로써 안녕과 안전을 도모해야하는 주체이다. 나아가 금융소비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라면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인생의 흐름에 따라 밀려오는 여러 가지 재무적 과업들”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라이프이벤트”를 관리하여야 하는 기업가적 주체(entrepreneurial subject)이다. 신자유주의의 지배적인 주체성의 유형으로서 기업가적 주체의 형성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
그렇지만 여기에서의 기업가적 주체란 자신의 금융 실천을 ‘사업(enterprise)’으로서 간주하고 그것을 모험이자 도전이라 생각하며 나아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위험(risk)을 적극 감수하며 살아가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기업가적 주체가 ‘자기(self)’를 윤리적으로 형성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금융소비자 역시 나름의 윤리적 정체성을 형성하여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했던 <가이드북>을 금융화된 현실에 대처하면서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인 교본으로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재무주치의, 재무전문가, 재무컨설턴트 등 숱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은 금융이해력과 관련한 지식, 노하우를 비롯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실용적인 기술적 지식을 제공하는데 머물지 않고 재무적 문제에 직면한 이들의 삶을 윤리적으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적극 담당한다. 이는 개인과 가족의 재무설계에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를 통해 금융소비자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나아가 이는 ‘금융이해력’을 높임으로써 똑똑한 금융주체가 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적극 지키는 똑똑한 시민을 길러 내고자 한다. 이는 시민운동으로서의 금융이해력 기르기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을 보라. 김주원, <금융복지상담과 사회적인 것의 (재)형성 : 사회적 기업 E의 금융복지상담사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4. 오승민, <가치투자의 수행성과 대중투자문화의 형성>,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5. 김주희, <한국 성매매 산업의 금융화와 여성 몸의 ‘담보화’ 과정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5.
수다한 시민운동단체는 ‘돈 문제’로 고민하는 시민들이 처한 상태를 ‘돈맹’, ‘금융맹’이라는 “맹(盲)(illiteracy)”으로 부르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또한 다양한 윤리적 결함을 교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재무주치의 분야의 스타이자 시민운동가로서 명성이 높은 제윤경의 대표적인 저작 가운데 하나인 <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가계부>에서 잘 드러난다. 제윤경, <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가계부>, 티비, 2007. 그렇지만 이는 제윤경이 독점하는 독특한 서사 전략은 아니다. 이는 정부기관이든 아니면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나 시민운동이든 모두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금융에 의해 매개된 삶의 전기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돈맹, 금융맹에 해당되는 이의 인격적 정체성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그녀가 제시하는 “돈맹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돈맹에 해당되는 이들은 크게 6가지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그 6가지 유형의 돈맹은 돈에 대한 지식 혹은 이해력(literacy)로 환원할 수 없는 심리적 기질을 통해 정의된다.
이를테면 “대박형 돈맹”은 “대박에 대한 환상 속에 살고” 있어 “가계에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데도 상황판단은 미룬 채, 특히 부동산에 무모하게 투자하는” 이이다. 한편 “귀찮이형 돈맹”은 “매사에 돈돈하며 연연해하는 것이 싫고 돈관리에까지 부지런해야 하는 것은 너무 피곤하다고” 여기는 이이다. 그리고 “미래에 막연하게 낙관하면서 준비를 소홀히 하는” “낙관형 돈맹”도 있고, “돈에 연연해하는 최근의 세태를 속물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가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소외감을 느끼”는 “초연형 돈맹”도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돈맹의 유형을 규정할 때 우리는 그녀가 서사화하는 각 인물의 유형은 타산적인 공리적 주체이기는커녕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반성하는 윤리적 주체의 모습뿐 아니라 그 안에 독특한 감정적 투자를 행하는 정동적 주체의 모습 역시 바라보게 된다. 각각의 돈맹은 ‘무모’하고, ‘피곤해하며’ ‘낙관적’이며, ‘소외감을 느끼는’ 등의 감정적인 처지에 놓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앞의 글, 24-7쪽.(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그녀가 돈맹이라는 인물형(character)으로 제시하는 주체는 곧 감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림 한국재무설계센터의 “나의 재테크 진단과 분석”
(http://jemuplan.com/fn_test/test.asp)

그렇기 때문에 위의 그림이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듯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독특한 나의 “성향”, 정동적인 기질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재현된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인생의 재무적 과업들은 자신의 삶에 들이닥치는 ‘리스크’이기에 이를 제압하고 조정하기 위한 위험감수적인 모험적 태도는 언제나 그에 대처하는 다양한 정동과 짝을 이룬다. 그것은 이미 보았듯 초연함, 무모함, 피곤함, 소외감 등의 다양한 감정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금융화란 자신의 물질적 생존을 조직하도록 이끄는 데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경제적 (비)합리성((ir)rationality)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데올로기적 담화에서 가장 약삭빠른 점은 실재의 대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데 알고 보면 우리를 가차 없이 ‘감정(the emotive)’으로 돌려보낸다는 데에 있다. 이데올로기적 명제는 사태를 지칭하고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사태를 지칭하고 묘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사이비’ 명제 또는 ‘가상’ 명제를 보다 근본적인 ‘감정적’ 발언으로 해독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이데올로기적 언어는 소망하는 언어, 저주하는 언어, 두려워하는 언어, 욕하는 언어, 찬양하는 언어다. ‘진술적(constative)’ 발언처럼 보이는 것, 이를테면 ‘아일랜드인은 영국인들보다 열등하다’라는 발언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로 갔으면 좋겠다’와 같은 ‘수행적(performative)’ 발언을 고려해야 한다.” 테리 이글턴,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김정아 옮김, 이앤비플러스, 2012, p. 221.

이글턴은 이데올로기적 담화의 특성을 진술적(constantive) 발화인 척하는 감정적, 수행적 발화임을 꼬집는다. 그러나 이런 면모는 가족생활의 재무적 관리를 책임진다고 자처하는 (과학적, 윤리적) 지식에서도 여지없이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동이라는 개념이 적극적으로 강조하듯이 금융화에 연루된 다양한 감정을 심리적 개인의 주관성으로 환원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P. T. Clough, The Affective Turn: Political Economy, Biomedia, and Bodies, The affect theory reader, ed. M. Gregg & G. J. Seigworth,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0.) 심리적 개인의 주관성으로서의 감정(emotion)과 구분되는 정동의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서동진, “금융화된 주체의 증오와 환멸 그리고 분노”, <감성사회>, 서동진 외, 글항아리, 2014.

이를테면 적금을 가입하러 은행에 들렸을 때 수익률이 높다고 권유하는 펀드에 가입할 때 따라야할 지침을 권유하는 재무주치의의 언표를 살펴보자. 펀드에 가입할 때 챙겨야 할 사항을 이야기하면서 제윤경은 펀드를 굴리는 자산운용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운용사의 투자철학’을 알아볼 것을 권한다.

“운용사마다 저마다의 투자철학이 있다. 그러므로 운용사를 선택할 때는 운용철학과 운용방침이 명확한 운용사를 골라야 하며, 일관성 있게 상품을 운용하는 회사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홈페이지에 실린 운용철학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국내M자산운용. 투자 의사결정 전 과정에서 ‘기본에 충실한 투자’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가치투자, 철저한 위험관리, 소수게임이라는 투자원칙을 설정하여 수익률의 안정성 및 지속성을 추구 … 가입하는 고객의 투자성향 또는 투자 기간에 따라 적절한 유형의 펀드를 선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놓은 수익을 위해서 위험(원금손실)을 감수할 수 있는 성향의 투자자라면 주식형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일정 시점 이후에 필요한 돈을 투자하는 경우 또는 안전한 투자를 원하는 투자라면 채권형 펀드가 바람직하다. … 옷의 소재와 색상이 다양하듯 펀드 스타일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 투자자는 옷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각자 자신의 성향에 맞는 스타일을 다양하게 선택해서 투자자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윤경, 앞의 책, 138-144쪽.

인용한 글에서 제윤경은 재무 설계와 관련한 조언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에서 그녀는 투자자와 금융기관(여기에서는 자산운용사)의 관계를 스타일의 매치로서 표상한다. 이 때 금융기관은 독특한 심리적인 개인인 양 표상된다. 운용사는 스스로의 ‘운용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가치투자를 우선하는 안정형이나 위험을 적극 감수하는 모험형과 같은 심리적인 유형으로 분류된다. 이는 투자자에게서도 동일하다. 펀드에 투자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패션에 비유된다. 패션에 비유되는 것은 펀드를 고르고 구성하는 것은 곧 스타일의 문제이다. 자신의 스타일을 반성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투자를 행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스타일이라는 용어로 치장된 개별적 심리적 성향과 마주한다. 수많은 금융적 실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펀드 투자에서 투자자를 특정한 심리적 성향으로 환원된 자기의 정체성과 짝을 맺는 것은 어쩌면 타산적이고 공리적인 합리성의 세계로서의 금융이라는 것과 어딘지 어긋나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금융적 실천을 직접적으로 심리적인 현상으로 환원하면서 그것의 ‘비합리성의 합리성’을 금융 분석의 제일원리로 채택하는 ‘행동금융학’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담화적 재현은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닐 것이다. 행동금융학은 경제가 억압하고 감금한 것으로서의 감정에서 벗어나 숫제 감정을 경제의 일차적인 동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행동금융학자로서 마침내 노벨상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실러의 저작들을 일단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R. 쉴러, 비이성적 과열, 이강국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4. 행동금융학을 비롯한 오늘날 금융학 분야에서 과학적 표상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보라. L. 피오라몬티, 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박지훈 옮김, 더좋은책, 2015. 이에 대한 간략한 논평으로는 서동진의 앞의 글을 참조하라.

그런데 여기에서 금융활동의 주체와 감정적 주체 사이에 상동성은 아닐 것이다. 앞 장에서 우리는 금융화가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임금 수탈인지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수탈은 방금 보았듯 가족생활의 금융화를 통해, 여성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의 개념을 빌자면 ‘사회적 재생산의 금융화’를 통해 전개되는 것이다. 금융적 실천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재무적인 지식, 기술, 수단, 의례 등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바로 가족임금이라는 이름으로 지급된 임금 소득을 통해 생명을 재생산하던 가족의 삶을 금융화하는 매개항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가족은 다양한 라이프이벤트와 화폐흐름을 교차하면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군집으로 표상된다. 그 결과 성인-남성-노동자-가장의 가족임금과 전업주부의 재생산노동(가사노동과 양육, 공양 등의 돌봄)을 통해 표상되던 발전국가 혹은 사회국가의 가족은 금융화된 가족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모습으로 표상되도록 강요당한다. 여성의 사회적 재생산의 금융화에 대한 논의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A. Roberts, Financing Social Reproduction, New Political Economy, No. 18, No. 1, 2013. )
그리고 이제 모두 개인화된 화폐흐름을 통해 자기신의 화폐 소득을 자산으로서의 화폐로 상상한다. 또 이를 통해 미래의 화폐 흐름을 예상하고 자신의 생애를 상상하고 그로부터 비롯될 위험에 대처하여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이로부터 금융적 실천에 참여하는 주체는 독특한 정동적 주체의 모습으로 캐릭터화된다. 금융적 실천에 의해 생애주기로 분절된 삶의 궤적은 그에 상응하는 돈의 관리와 투자로 가시화된다. 이 모든 계기를 관통하는 것은 방금 보았듯이 삶의 위험을 적극적으로 감수하는 모험적인 기쁨과 유희를 즐기라는 요구와 그 주변을 집요하게 배회하는 근본적인 삶의 불안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장려되는 주체성의 모델과 결합된다. 기업가적인(entrepreneurial) 자아, 자기계발적인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돌보고 책임지라는 요구는 또한 제어할 수 없는 삶의 불안과 짝을 이룬다. 따라서 가족생활의 금융적인 배치(configuration)는 그에 조응하는 정동적 배치이기도 하다. 벌란트는 이를 신자유주의 시대의 공적인 감정(public feelings)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지만 벌란트를 비롯한 정동적 사회성의 분석은 인지적 지식의 세계에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범위를 제한한 하버마스와 달리 ‘체험’을 공공영역 나아가 대항공공영역의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하고 분석했던 네크트와 클루게의 선구적인 작업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O. Negt & A. Kluge, Public sphere and experience: toward an analysis of the bourgeois and proletarian public sphere, P. Labanyi et al., tran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오늘날 가족의 돈은 더 이상 소비를 위한 돈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미래의 소비를 위해 떼어내어 저축되어야 할 돈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소비를 위한 돈 역시 돈의 자기지시적인 규범, 돈을 통해 식별된 돈,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은 돈을 위한 돈이라는 규범에 종속된다. 우리는 긴요한 욕구의 만족보다는 그것이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기에 소비한다. 물론 소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돈이 아니라 저축을 통해 비축되는 돈 역시 주요한 몫을 차지하였던 것은 맞는 일이다. 그러나 그 때의 돈을 스스로 가치 증식하는 돈, 자본으로서의 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얼마간의 이자를 받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저축을 했다고 해도 그 때의 이자, 즉 불어난 돈이 저축 자체의 동기라 간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저축된 돈은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가족에서의 돈, 금융화된 가족생활에서의 돈, 투자(기)로서의 돈과는 사뭇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문화평론가인 러시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돈을 시간을 멈추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여기곤 한다. 심리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고전이 된 그의 책 죽음의 부정에서 은행잔고란 생존을 위한 정서적 대리물이라고 주장했다. 시간을 저축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돈을 저축한다는 것이다. 모아둔 시간은 그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모아둔 돈은 그 실체가 뚜렷하다. 소유가 누구였건, 날씨가 어떠했건, 어느 쪽이 전쟁에서 이겼건 황금은 변함없는 가치를 유지한다. 돈이 가치를 지녔던 것은 견고하고 지속이 가능해서였다.” D. 러시코프, <현재의 충격>, 박종성 외 옮김, 청림출판, 237쪽.

여기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두 가지 관념을 식별하게 된다. 먼저 시간과 돈의 관계이고 다음은 돈과 정동의 관계이다. 그는 견고하고 지속가능한 대상으로서의 돈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은행잔고를 생존을 위한 정서적 대리물이라고 말할 때 암시되는 저축된 돈과 정동의 관계를 가리킨다. 돈과 시간, 정동 사이의 관계란 점에서 오늘날 금융화된 가족의 돈은 전연 다른 역할을수행한다. 그리고 시간과 정동 그리고 돈 사이의 3항관계는 금융화된 세계, 그 가운데서도 중추적인 구실을 하게 될 가족생활을 지배하게 된다. 오늘날 발전된 나라들의 가계 대부분은 돈을 투자하고 관리하여야 할 대상으로 여기도록 종용받는다. 신용카드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고, 할부로 자동차와 휴대전화를 구매하며, 대출을 통해 주택을 마련하고, 확정기여형 연금 플랜이나 변액연금보험에 가입하거나 그리고 주식에 투자하고 실비보험에 가입하며 가족의 경제생활을 관리할 때, 가계는 이제 이전 시대의 자본주의에서의 “가정경제”처럼 더 이상 소비의 단위가 아니다. 알다시피 가정학(home economics)은 가정경제학이기도 하지만 또한 가족에 관한 특수한 역사적 시대의 사회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화된 가족생활은 이제 가정학 이후의 재무적 실천의 지식을 통해 표상되고 조절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가계의 특성을 살펴보며 이를 가족경제의 역사적 계보학적 분석과 연결하는 글로 다음을 참조하라. F. Allon, Home Economics: The Management of the Household as an Enterprise, Journal of Australian Political Economy, No. 68, 2011.
그것은 오늘날 전례 없는 금융적 실천이 실행되는 단위로 간주된다. 가계를 관리한다는 것은 수입과 소비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적절하게 소비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부에서의 화폐의 흐름을 예측하고 관리하는 일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가정경제는 이제 재무 설계와 관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식과 실천이 동원되고 실행되는 장(場)으로 전환된다. 더불어 개인과 가족 성원들이 겪게 될 인생사는 “생애주기”에서 비롯되는 숱한 “라이프이벤트”를 예측하고 이를 돈의 문제로 번역하는 일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가계의 재무적인 삶을 가시화하고 표상하며 나아가 관리하는 데 적합한 지식들이 끼어든다. 이는 흔히 돈맹(盲)이나 금융맹과 구분되는 금융 리터러시(financial literacy)이다. 그리고 보험, 연금, 펀드, 신용카드, 부동산 등의 것 즉 금융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단순히 경제적 생존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인권과 시민권의 문제로 여겨져 사회운동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성의 신용카드 발급을 여성평등 시민권 운동으로 조직했던 과거 미국 여성운동부터 오늘날 한국에서의 금융소비자 주권찾기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금융적 실천은 시민권을 내건다. 이를테면 어느 금융업자가 “월스트리트는 월마트처럼 되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면서 알려진 ‘금융의 민주화’란 표어는 가난한 노동자가계도 문턱 높은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알다시피 그 결과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인한 위기와 천문학적인 가계부채로 인한 빈곤이다. 그리고 이는 주택시장을 부양한다는 이름으로 LTV(주택담대출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를 완화하고 빚을 얻어 집을 사도록 요구받는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돈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야기한다. 시간의 부정(否定)이었던 돈은 이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축하고 요동치는 돈으로 대체된다. 이자라는 것이 미래를 할인함으로써 현재의 만족을 미루고 미래의 이윤을 위한 인내를 택한 데 대한 윤리적 대가를 지불했다고 한다면 따라서 그것은 청교도적인 윤리가 스며든 시간관에 의지했다면, 오늘날 다양한 금융 상품이 재현하는 시간은 그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어느 학자가 짓궂게 자신의 책 제목을 택한 제목인 “The Future of Futures”에서 “future”는 말 그대로 오늘날 화폐의 모델로 기능하는 선물(先物, future)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E. Esposito, The Future of Futures: The Time of Money in Financing and Society, Cheltenham: Edward Elgar, 2011.
따라서 그 책의 제목은 “미래들의 미래”이기도 하지만 “선물들의 선물”로도 읽을 수 있다. 우연과 변덕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미래를 위한 안정을 제공하던 은행잔고는 이자의 형태를 통해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든든한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물은 그런 미래를 모른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가격의 지수들을 비교하고 차익을 실현하기 위해 순식간에 사고파는 정신병적인 찰나의 시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 시점에 계산된 미래, 결국 현재의 시점에 가격 설정된(pricing) 미래를 사고 팔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물은 미래를 완벽히 현재에 통합한다. 그리고 선물은 이제 환율거래나 폭발적으로 성장한 파생상품을 통해 여실히 나타나듯이 오늘날 화폐의 모델이 되어가고 있는 듯 보일 지경이다. 새로운 화폐 모델로서의 파생상품이라는 주장은 화폐의 다양한 기능(보편적 등가, 유통 및 지불 수단, 축장 수단 등) 가운데 세계화폐로서의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지만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후 화폐의 정체성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기한다. D. Bryan & M. Rafferty, Capitalism with derivatives: a political economy of financial derivatives, capital and class, Hampshire &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6. 한편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수정하면서 시간성의 붕괴 및 현재주의(presentism)와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관계를 통해 후기근대성(post-modernity)의 문화를 분석하고자 하는 제임슨의 글 역시 참조하라. F. Jameson, The Aesthetics of Singularity, New Left Review 92, March-April 2015.
그렇다면 이자가 아닌 선물을 통해 미래를 전유하고 관리하는 일은 놀랍게도 오직 현재의 순간으로 통합된 미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미래를 둘러싼 불안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든다. 앳킨스는 이런 점에서 가족생활의 금융화를 화폐의 ‘물질성’의 변화와 결합시킨다.

“금융화의 조건 하에서 은행과 여타 금융기관들은 인간노동력의 착취로부터 얻은 잉여가치가 아니라 개인 임금과 노동자들의 소득으로부터 특히나 신용부채의 다양한 형태로부터 얻어내는 이자 형태를 통해, ‘직접적으로’ 이윤을 얻어낼 수 있었다. 나아가 우리는 임금의 금융화는 개인 임금으로부터 이윤 추출의 새로운 형태뿐 아니라 임금의 물질성 자체의 변형과 연관되어 있음을 덧붙일 수 있다. 포디즘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력의 사용, 착취, (일부에서는) 재생산을 위해 화폐형태로 지불된 임금을 통해 보상을 받았다. 금융화된 포스트-포드주의에서 화폐 형태의 그런 속성들은 전환되었다. … 그리하여 금융화된 포스트-포드주의에서 화폐는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 매체나 수단으로서 작동하지 않고 대신 그 자체 교환가능해지며, 여느 상품이나 생산물처럼 작동한다.” L. Adkins & M. Dever, Housework, Wages and Money: The Category of the Female Principal Breadwinner in Financial Capitalism, Australian Feminist Studies, Vol. 29, No. 79, 2014, pp. 61.
(강조는 인용자)

앞서 언급했듯 노동자의 가계 소득인 임금은 사용가치를 얻기 위한 교환 수단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돈이 점점 더 거래가능한 자산(tradable asset)으로 간주되면서 가계는 차입을 통해 미래의 안전을 획득함은 물론 자신의 소득을 통제하고자 한다. 대출을 통해 집을 사고 자동차를 구매하며 주택을 저당잡고 그로부터 연금을 받으려 할 때, 돈은 신비한 대상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영원한 불안의 나락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미래를 합리적인 계산으로 지배하고자 하지만 곧 그것은 화폐의 운(fortune)으로 환원되는 세계에서 그리고 미래를 오늘의 선택을 통해 미리 규정해야 하는 세계에서, 불안은 핵심적인 정동이 될 수밖에 없다.

화폐 유토피아를 넘어서

“노동력이 가족재생산에서가 아니라 자본제적 생산의 조건 하에서 생산되어 진정한 상품(a true commodity)이 된다는 전망에 설 때, 국가와 자본주의적 기업가는 가정생활의 가장 친밀한 구석들까지 이미 침투하게 된다. 그들은 출생, 질병, 사망, 정동(affections)까지도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위협받게 된 가족은, 그것이 보존하는 몇몇 정동적 관계들 때문에, 개인적 자유의 마지막 보루 가운데 하나로서 여겨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허약한 요새인 바, 화폐 관계가 침식하는 영향을 버텨내도록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C. 메이야수, 자본주의와 가족제공동체: 여성, 곡창, 자본, 김봉률 옮김, 까치, 1989, 156쪽.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이상적인 시민이란 것이 자신의 사회적 의무를 사적인 방식으로 임파워하는(empower) 개인이 되어버릴 때, 프라이버시란 탈출의 공간도 자본주의 바깥의 자율적인 공간도 아니다. 결국 자율성, 자유, 안전은 개인들이 자신의 경제적 삶을 통제하고 유연하며 탈규제된 경제에서 비롯되는 강화된 개인 경쟁과 시장 압력에 대처하려면 개발하도록 요구받는 기업가적인 능력들일 뿐이다. 한 때 옹호되었던 ‘가족의 안온함(safety of houses)’과 같은 주장은 오늘날 과다채무라는 구조적 필연성과 떼어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점점 더 채무적 수단과 그것의 규율에 종속되고 있다.”(강조는 인용자) F. Allon, The Feminisation of Finance, Australian Feminist Studies, Vol. 29, No. 79, 2014, p. 25.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속에 숨어있는 또 한 가지 생산양식인 가족제 생산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자본제적 생산양식은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하나의 제도에 생명재생산을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제도를 생명재생산의 임무에 가장 적합한 제도로서, 그리고 현재까지 그랬듯이 노동 특히 여성노동을 무보수로 동원할 수 있으며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애정을 착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제도로서 가족제도를 오늘까지 유지하고 있다.”, C. 메이야수, 앞의 글, 214쪽.
그는 제국주의와 종속국 사이에서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연관, 흔히 접합이라고 불렀던 것을 설명하면서 뜻하지 않게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도 역시 예외 없이 발견할 수 있는 숨겨진 생산양식을 발견했던 셈이다. 가족제 생산은 자본주의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일, 즉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을 위해 자율적인 경제 제도로서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빈법의 제정에서부터 사회보장 나아가 경제적 장 바깥에서의 자선, 박애 기구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시민사회로부터의 다양한 개입의 도움은 있었어도, 가족을 통한 사회적 재생산은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메이야수가 자신의 글에서 단언했던 가족제 생산의 자율성은 이제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인용한 알론의 글은 이 점을 역력히 말해준다. 메이야수가 가족이란 생명과 친밀성의 정동이 지배하는 곳이고 화폐관계로부터 침해받지 않은 곳이기에 자본제적 생산양식의 주변에서 그것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족제 생산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면, 알론은 더 이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녀는 화폐관계의 침해로부터 벗어난 가족이 아니라 과다채무를 통해 돈의 순환 속에 완벽히 통합된 가족을 고발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우리는 거의 재생산 노동의 대부분이 상품으로 매매되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를 둘러싸고 여성의 가사노동에 의해 제공되던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들이 상품이 되었을 때 이것이 가부장적 사회관계를 어떻게 재조직하는지 또 여성의 정체성과 관련해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이야기하는 여성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런데 가사노동의 탈가족화 혹은 상품화는 물론 육아에서부터 상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돈의 문제로 계산되고 표상되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재무적 행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적 재생산의 금융화, 가족생활의 금융화는 여성의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남편이나 자녀들과 다르지 않은 적극적인 재무관리자가 되고 자신의 화폐 소득을 통해 가족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여성은 분명 ‘살림꾼’ 혹은 ‘알뜰한 주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성과 가족의 정체성에 대하여 지금 가까스로 윤곽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여성들이 이러한 가족-여성이라는 동일성의 자장에서 겪게 되는 정동의 혼란과 동요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이를테면 라캉 정신분석학자 뒤푸르는 신자유주의 인간학이라 할 만한 것을 분석하며 상징적 질서의 붕괴 이후의 세계, 포스트-오이디푸스의 세계에서의 주체성을 분석하는 흥미로운 책을 쓴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의 글에서 여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갱단이나 폭력조직에 가입하거나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데 전력하는 불량한 청년들에게 관한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뒤프르엑 제한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와 유사한 분석을 시도하는 많은 글들 역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D-R. Dufour, The Art of Shrinking Heads: The New Servitude of the Liberated in the Era of Total Capitalism, Cambridge & Malden: Polity Press, 2007.

오늘날 금융화된 가족생활은 전처럼 가족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안온함’을 제거한다. 미래가 더욱더 깊이 현재의 선택과 결정에 통합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현기증 나는 금융적 실천에 의해 매개되었을 때 개인과 가족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이면서도 사악한 나선형을 그리며 악화된다. 미래의 불안정을 제거하려는 몸짓은 현재와 미래 사이에 놓인 거리를 측정하고 그 사이에 안전한 디딤돌을 놓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현재의 자기반영적 몸짓, 현재라는 시점에서 표시된 미래의 다양한 가치들을 비교하고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 불안은 더욱 증폭되고 심화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과 원망을 금융화된 가족 생활의 핵심적인 정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심리적으로 실체화하지 않으면서 나아가 그것을 우리가 겪는 사회적 조건으로 간단히 환원하고 둘 사이에 상동성을 확인하는데 그치는 사이비 문화비평의 유혹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경제적 생존의 금융적 배치가 어떻게 가족생활을 규정하며 이것이 우리의 삶을 주관화하고 또 정동을 생산하며 제어하는지를 밝히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 이 글은 저자의 「우울한 가족 : 금융화된 세계에서의 가족과 정동」(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제31권, 2015)을 크게 수정하고 보완한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