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行…

– 전주엘 다녀왔다. 유쾌하지 못한 이유로 전주영화제를 떠난 후 내내 그곳을 가기가 어려웠다. 이젠 시간도 흘렀고 다른 낯의 사람들로 채워져 쉽게 걸음할 수 있다 여겼다. 그 전 내가 차지했던 지위에 가늠할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비를 붙을만큼의 기력도 없으니, 이젠 그저 영화나 보고 식당이나 기웃대는 가벼운 여행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내게 그곳과 어떤 인연을 상기시키는 이들을 피하자는 작정대로 낮은 포복으로 움직여 다녔고, 사람이 모일 만한 곳이면 피하려 애썼다. 덕분에 맘 주름질 일 없이 3박4일, 전주행을 했다.
– 이렇다 할 좋은 영화를 건지지 못해 아쉬웠다. 장유웬의 신작 <녹차>는 아주 실망이었고, 개방개혁 시대에 문혁의 그늘을 규탄하고 처치하려던 한 명의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그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괴물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어떻게 전락하는지 보는 듯 했다. 그에게서는 더이상 중국도 없고, 자유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도 없었다. 아르노 데스플레셍의 <파수꾼>이 그나마 건진 수작이라면 수작일까.
– 카롤린느 샹페띠에라는 촬영감독의 작품이란 이유로 선정된 그의 작품은 고전적인 카프카적인 세계였고, 드물게 인물에 관한 영화였다(모든 영화는 인물을 다루지만 그것은 캐릭터이지 인물은 아니다. 스토리를 상연하는 배역과 불가사의하리만치 충일한 한 인물을 재현하는 영화는 다르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인물을 다룬 영화는 많이 희귀해졌다. 이를테면 나는 데칼로그는 인물에 관한 영화라고 본다. 아니 키에슬로프스키의 모든 영화는 그저 인물에 관한 영화라고 본다). 한시도 한 인물의 낯을 떠나지 않는 영화를 만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데스플레셍은 냉전의 종식과 평화라는 세계의 표면 뒤에서 어떤 공식적인 제도와 권위로부터 그의 자유가 면제된 한 인물 – 역설적으로 그는 자유를 선택한 인물이다 – 과 그의 죽음을 쫓는 한 법의학도의 병적인 집착을 쫓는다. 영화는 아버지가 외교관이었으며 독일에서 성장한 프랑스 청년인 법의학도 마티아스의 파리행을 쫓는다. 마티아스는 프랑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 외교부의 관리라는 자로부터 불법입국자란 혐의를 받고 곤욕을 치른 후 파리에 도착한다. 끔찍하고 영문모를 사건에 시달렸던 그가 파리에 도착한 후 열어본 가방에는 괴이한 사람의 머리 하나가 들어있다. 마티아스는 이 영문모를 머리의 신원을 추적하려 발버둥치고, 그는 그가 구 소련에서 살았던 인물이며 수마트라에서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 프랑스의 외교부 안에는 구 소련에서 자유를 택한 과학자를 몰래 서방세계로 빼내 그가 가진 첨단의 과학적 지식을 얻어내는, 일종의 인신매매 비즈니스 팀이 있다. 그들은 소련의 한 인물을 프랑스로 빼내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자유의 영지로 배당된 수마트라에서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자유에 저항을 했고 살해를 당한다. 그리고 그의 친형이었던 프랑스인은 그의 동생의 죽음을 규명하기 위해 외교부에 안에서 투쟁을 벌이다 지금은 미치광이이자 반역자로 몰려 추방을 당하게 된다는 신세가 된다. 마티아스에게 머리를 넘긴 인물은 바로 그였다.
– 그러나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마티아스의 윤리적인 얼굴이다. 음모적인 비밀경찰과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인물이란 설정은 흔한 것이고, 그렇게 보자면 이야기의 얼개는 매우 진부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시시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그런 이야기에 실린 서스펜스를 쫓는 것이 아니라 거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듯 보이는 한 미지의 인물을 향한 그의 집착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국가권력의 뒤안에서 희생당한 한 인물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려는 자의 도덕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자신을 뒤쫓는 저항할 수 없는 윤리적인 요구이다. 그는 마치 그것이 없다면 그의 삶이 무너질 것처럼 그것에 매달린다. 그러나 그의 안티고네적인 모습이 숭고하기는커녕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하게 보이기만 한다.

– 알랭 기로디의 신작 장편인 <용자에겐 쉴 곳이 없다 No Rest for the Brave>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오래된 꿈 That Old Dream That Moves>(일전 나는 이 작품을 “쿨 타임”이란 영어 제목으로 봤던 듯 하다. 로테르담이었던가..)을 다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특히 내가 보지 못했던 다른 단편들 역시 만났다. 그러나 아마 그는 매우 난삽한 이력을 가진 감독인 듯 하다. 그의 단편들 가운데 <그것들의 힘>은 적잖이 실망스런 치졸한 작품이었다. 다른 단편 둘은 재치가 있었고, 특히 그가 미장센을 조직하는 능력에 있어 매우 탁월하며, 특히 사운드에 관한 한 금욕적이고 또한 이미지와 대사 사이에 소박하지만 그러나 사려깊은 연관을 부여하는 재주를 지녔음을 알려주었다. 다시 본 <오래된 꿈>은 파스빈더의 <팍스와 그의 친구들>을 연상시키는 그러면서도 그와 동년배일 울리히 사이들이나 미하엘 하네케 혹은 로베르 귀에드기엥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정묘한 사회적 사실주의나 노동계급 출신 게이의 삶에 관한 치밀한 재현은 무조건적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 <영화보다 낯선>이란 프로그램을 섭렵하지 못한 것은 후회할 일이다. 조나스 메카스나 론 라이스의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나지 못한 것은 분명 후회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화를 보기 위해 생계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 아이작 줄리앙의 근작을 보지 못한 것 역시 안타깝고 분하다. 그렇지만 마침 상영일정에 포함된 패트릭 킬러의 작품들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는 탈근대적인 도시인 영국에 관한 일종의 “도시의 교향곡” 풍의 영화를 만들려는 듯 했다. 그는 어느 산보객을 내세우며 런던이란 도시를 주유하고 도시의 풍경과 산보객의 파노라마적인 시선을 제시하려 애쓰지만 그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능가하지 못한다. 그저 그 영화는 수다스럽게 기억과 체취가 사라진 도시에 대한 한탄만을 늘어놓고 새로운 도시에서 배양되는 지각의 세계를 근거 없이 혹은 막연하게 축복한다. 그는 너무 책을 많이 읽었거나 아니면 남에게 지루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듯 하다.
– 끌로딘 에이지크만과 기 피만의 실험영화는 볼 만 했지만 흥미로울 것이 없었다. 그들은 영화와 사진의 연관을 대신하여 영화와 회화의 관계에 주목하는 실험영화 감독들 같았다. 그들은 이미지의 환영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진으로서의 영화와 이미지의 정동적(affective) 능력을 강조하는 회화로서의 영화 가운데 후자의 편에 서있음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시도했던 영화의 이미지의 회화적 성격 – 이 말은 이제 우스운 말이 될 것이다 -을 향한 집요한 관심은 디지털 영화 이후의 시대엔 매우 진부한 물음이다. 아마 많은 이들은 그들이 카메라를 통해 시도했던 수많은 이미지의 회화적 변조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중인화와 빛과 색채의 다양한 변용을 통해 보여준 이미지들은 디지털 소프트웨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미지들 사이에서는 이미 식상한 것이거나 흔한 것이다.
– 전주에서 체재하는 어제, 내겐 귀빠진 날이었다. 후배 녀석이 케익과 선물을 준비해 날 감격케 하였다. 동석했던 전주의 토박이 게이들도 내게 후한 축하를 베풀어주었다. 산란해진 마음을 빗질하기 위해 갔던 여행이기도 했던 터라, 그들의 우연한 호의가 날 가격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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