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는 무효다


패러디는 법 앞의 몸짓이다. 법이 없다면 패러디도 없다. 패러디는 의미작용을 규제하고 조직하는 상징적 질서로서의 법을 항상 전제한다. 그렇지만 탈근대자본주의의 표준적인 에토스는 법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삭제하는 데 있다. 법은 없거나 무력한 공식적인 규칙과 협약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부재하는 초월적인 기의로서 법은 없다. 우리에겐 자의적이며 맥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소소한 규칙이 있을 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패러디는 무효다. 법이 없다는 데 패러디가 서 있을 자리 역시 없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패러디는, 필경 다음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먼저 없는 법, 사라지고 있는 법을 환상 속에 설립하고 존속시킴으로써, 법의 부재가 초래하는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상상된 법. 다른 하나는 탈중심화된 세계임을 선선히 인정하며 약한 법, 혹은 실용적인 협약과 법령으로 탈신화화된 법.
패러디의 ‘명가’ “딴지일보”를 생각해보자. 딴지일보의 패러디가 주는 쾌락은 무엇보다 법을 ‘구제’함으로써 얻게 되는 쾌락 아닐까. 딴지일보에서 우리가 느끼는 쾌감은 법의 허위성, 편파성을 감지한 탓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없는 법의 존재를 허구적으로 상연함으로써 얻는 “자유로운 주체”라는 환상의 쾌감 아닐까. 딴지일보를 읽으면서 흘리는 웃음과 흥분은 권위적이고, 관료적이며, 가부장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상징 체계를 비판하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연유한다. “딴지일보”의 패러디는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으로서, 우리의 심리적인 사고를 규정하는 법의 허구를 폭로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번 총선과정에서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인터뷰 기사는 그런 패러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예컨대 그는 고상하고 위엄있는 공적인 장면의 주체를 세속적이고 실제적인 이해에 오염된 인물로 격하시키고, 예의 딴지체로 그들을 묘사한다. 따라서 “DJ보다 이쁜 한화갑”이거나 “선수들과 잔 적이 없는 홍준표” 식의 표현은 공적인 정치적 주체(직업적인 정치가란 뜻에서가 아니라 “정치”라는 상징적 장을 규정하고 집행하는 상징적 주체라는 점에서의 정치가)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속물스런 이기적인 개인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렇지만 패러디의 풍자성 그리고 그것에 결부된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효력은 이젠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이는 패러디의 풍자와 정반대되는 태도, 즉 맹목적인 신화적 이데올로기와 패러디 사이의 거리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한나라당의 총선 반전은 당대표인 박근혜가 국모의 딸이자 박애주의자 영부인의 딸로서 신화적인 이미지를 획득한데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박근혜를 “반공규율자본주의”를 이끈 파시스트의 딸이 아니라 신비한 모성적 여성으로 신화화한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무지가 아니다. 박근혜의 이데올로기적 위장과 딴지일보의 탈이데올로기적인 풍자라는 구분은 옳지 않다. 공적인 법의 세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정치를 규정하고 좌우하는 것은 여론조사와 토크쇼, 정치인의 이력과 소소한 사생활, 그의 인간적 자질과 매력 따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딴지일보의 패러디와 박근혜의 이데올로기적인 신화화는 모두 동일한 형식적 절차에 의존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공적인 정치적 주체를 세속적인 이해에 오염된 개인으로 풍자함으로써 허구적으로 이미 법이 있었던 것처럼 상상하는 것과 자의적인 상상으로 선택한 정치적 주체를 숭고한 법의 화신으로 신화화함으로써 법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소소한 형식적인 차이에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정치 그 자체이다. 이 때의 정치란 자유주의적 정치학에서 말하는 선거와 투표, 법치, 언론의 자유라는 외적인 정치적 장치와 그것이 재현(대변)한다고 가정하는 현실 사이의 관계가 모호해져 버린 정치이다. 아마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적인 특성을 지적하자면 바로 이러한 정치의 재현적인 특성이 사라져버리고 정치적 행위 자체가 정치를 구조화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최근 인플레를 이루고 있는, 포스트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거버넌스” 개념이 유행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거버넌스란 국가의 통치가 아닌 지역사회와 개인의 선택과 참여에 의한 통치로의 변화를 가리킨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따위는 곧 정치를 규제하는 일반적인 이상이 없는 정치의 세계, 곧 정치가 사라지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개인들과 지역사회만이 있을 뿐임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법은 국가인권위원회, 노사정위원회, 청소년보호위원회 등등의 다양한 위원회와 시민단체와 여성단체의 수많은 입법 투쟁을 통해 공급되는 다양한 사회적 협약과 공식적인 규제 따위로 축소된다. 물론 법은 없고 선택을 하는 개인과 지역사회, 비정부기구 등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러디란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자율적인 주체의 환상을 공급하고, 상징적인 질서를 풍자함으로써 법을 극복하며 자유를 실천한다는, 순응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로 전락하여 버린다. 재차 말하지만 패러디는 무효다. 적어도 탈근대자본주의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비판은 법의 비판이란 형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는 환상을 비판하는 형식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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