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 일로서의 미디어노동?


M83-Midnight City

창의적 일로서의 미디어노동?: 미디어 노동의 주체성 분석을 위한 시론

노동이 돌아왔다
경제의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이라 부를 만한 변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점 하나를 꼽자면, ‘일’을 둘러싼 담론이 폭발적으로 증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새로운 경제적 실재(economic reality)가 무엇인지 분절하려는 기획들은 일을 전면에 내세운다. 일의 담론을 이런 관심은 정치적 차이를 떠나 고르게 나타난다. 변화된 경제는 어떻게 노동의 정체성을 변화시켰는가를 이야기하면서, 한 쪽에서 지식근로자(knowledge worker), 기업가적 노동자란 담론을 퍼뜨리고 상징분석가(라이시, 1994), 창의적 계급(플로리다, 2002), 새로운 에이전트(핑크, 2001), 보보스(브룩스, 2001)같은 새로운 노동주체의 정체성을 예찬할 때, 다른 쪽에서는 비물질적, 정서적 노동과 같은 담론을 통해 새로운 자본주의가 어떻게 노동의 구성(composition)을 바꾸는지 역설한다.(네그리 외, 2005; 네그리와 하트, 2001) 노동의 사회성(sociality)과 관련한 이야기에서도 다르지 않다. 일터에서 노동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조직하고 있는가를 두고 한쪽에서 네트워크와 팀워크의 가치를 강조하면 다른 쪽에서는 사회적 협력 혹은 네트워크적인 사회성이 어떻게 가치를 만들어내는 원천이 되었는지 열렬히 주장한다(Wittel, 2001; Terranova, 2004; McRobbie, 1992, 2002, 2003).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대구(對句) 관계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또 되풀이 된다. 이런 담론의 경제는 서로의 주장을 반박하고 수정하려 시도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다. 각자의 편에서 새로운 경제적 실재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이로부터 어떤 정치적, 문화적 전략을 제안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제 노동을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의 문제를 통해 제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 되었다.
요 얼마간 비정규직이나 노동의 불안정성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착취나 불평등을 둘러싼 관심이 커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관심은 대부분 국가의 경제정책, 특히 고용정책에 불만을 늘어놓고 해결책을 내놓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원리를 생각할 때, 이런 접근은 정작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력하다고 말해야 옳을 듯 보인다. 발전국가 혹은 사회국가(the social state)가 몰락하거나 쇠퇴한 이후 국가가 현재의 경제 질서를 재조직하여 완전고용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나아가 실업과 고용불안에 따른 사회적 생존의 위기를 해결하기위해 국가가 획기적인 사회적 보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무망한 일이다. 그럼에도 노동이란 문제는 결국 고용이라는 쟁점 주위에 머물러 있다. 물론 임금 소득을 통해 경제적 생존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고용의 여부가 생존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실업은 울리히 벡이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 세계”라고 불렀던 신자유주의적 노동의 초상의 반쪽만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벡, 1999) 실업은 노동의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복합체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업이 만연하고 불완전하고 단속적이면서 보장이 축소된 다양한 형태의 고용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은, 분명 충격적인 일이라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실업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두고 오가는 말을 유심히 듣다보면 실업이란 ‘노동의 외부’이기는커녕 노동 정체성의 변화와 동일한 연장(延長)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업을 해결하겠다고 등장하는 해법을 들어보면 대개 이런 수사학을 전개한다. “평생직장은 없다, 평생직업만이 있을 뿐”이라거나 “실업(unemployment)은 없다, 오직 자신의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을 둘러싼 끊임없는 모험만이 있을 뿐” 운운. 이런 기업가적 윤리(entrepreneurial ethics)에서 삐져나온 다양한 캐치프레이즈 그리고 그와 연계된 다양한 정책, 전략, 제도를 통해 또한 현실화된다. 이 때 실업이란 당장 일자리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업은 그저 일자리가 없는 실정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역사를 조금만 주의해서 본다면 우리는 실업이 전연 다른 삶의 상태로 규정되고 관리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Castel, 1998; Walters, 2000)
실업이란 특정한 경제적 상태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상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대하는 방식을 달리 구성할 수 있는 정치적이면서도 문화적인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실업은 고용주와의 관계를 넘어, 학교, 취업교육시설, 복지기관을 비롯한 행정기관, 언론을 비롯한 대중매체 등 다양한 작인들을 끌어들인다. 그 모두는 실업이란 대상을 정의하고 관리하는 데 연루된 다양한 사회적 힘들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인 실업의 규율이 신용회복이나 창업지원을 비롯한 금융적인 수단을 특권화하고 자활이나 창업, 자기고용(self-employment)을 장려하며 자신의 취업능력을 증대시키도록 자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을 지원하려 할 때, ‘자선(charity)’이나 ‘보장(security)’이라는 수단이 아닌 새로운 수단을 통하여 실업을 관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실업을 해결한다는 것은 실업이라는 상태를 제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해결해야 할 ‘문제(problem)’로 구성하고 또 해결할 수 있을 능력을 가진 주체를 선별하고 동원하는 실천들을 망라하는 집합체(assemblage)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에서 실업이란 실은 노동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제시하며 또 이를 관리하는 전체적인 변화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업과 불안정 고용이란 쟁점을 해결한다는 것은 곧 ‘노동’이란 대상의 정체성을 재규정하고 그와 연계된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재조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는 노동에 필요한 능력, 그 능력을 둘러싼 평가와 보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와 같은 다양한 관리의 테크놀로지들은 물론 노동하는 주체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체험하며 스스로를 대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주체화의 윤리 등 다양한 차원을 망라한다. 이는 대중문화적인 현상 속에서도 손쉽게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진보적’ 인사로 알려진 ‘시골의사 박경철’은 “혁명은 초월입니다. 시장자본주의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그 한계의 포로가 되어 스펙경쟁을 하기보다 그 경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자기 한계 초월이 혁명… 스펙경쟁 하지 마라”, ‘경향신문’, 2011년 10월 4일
라고 말하며 “자기혁명”이라는 그 나름의 판본으로 각색된 신자유주의적인 자아의 윤리를 전한다. 그는 공병호나 구본형을 뒤잇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윤리 혹은 볼탕스키와 시아펠로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의 전도사들이라 할 안철수 같은 이와 더불어 청년 창업을 위한 모임에서 스스로의 삶에 주도적이 되라며 강연을 하고 ‘청춘 콘서트’에서 자신을 혁명하라고 강변한다.
알다시피 노동의 새로운 정체성을 표상하는데 영향을 미쳐온 다양한 담론들, 특히 경영담론을 위시한 주요 과학적 지식들(경영학, 교육학, 사회학 등)이 생산한 담론들은 일의 정체성의 변화를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고지하는 역사적 서사 혹은 ‘시대 이야기’로 변형시켜왔다. 한편 이는 그저 지식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기업 안에서 노동을 규율하고 조직하는 방식이나 훈련과 보상을 둘러싼 다양한 체계에 적용된다(능력주의, 일의 능력과 관련하여 역량(competence) 담론의 부상, 연봉제로 대표되는 보상형태의 확산, 핵심인재 등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의 위계화 등). 그리고 나아가 교육과 고용, 복지 등의 다양한 사회적 실천 속으로 확산되기도 한다(평생교육 중심의 교육체계의 재편, 수월성, 자기주도성, 문제해결 중심의 새로운 교육과정의 도입, 실업의 구제와 해결로부터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의 증대에 초점을 맞춘 자기책임의 능동적인 기업가적 주체 등).(서동진, 2009)
당연한 말이겠지만, 일을 둘러싼 새로운 표상은 단순히 그를 에워싼 관념과 지식의 확산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를 인격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특별한 개인에 관한 영웅적 서사(빌 게이츠에서 스티브 잡스, 주커버그로 이어지는 신경제의 기업가적 주체, 이의 한국적 버전이라 할 안철수, 이재웅 등)를 통해서나, 아니면 특정한 일의 분야(경영담론에서 미적, 체험경제의 분야로 일컬어지는 미디어, 디자인, 금융 등)를 새로운 경제 질서를 대표하는 일의 모델로 삼음으로써 나타난다. 새로운 일의 정체성은 곧 그 일에 관한 표상을 문화적으로 생산하고 매개하는 담론적 실천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곳이 미디어 노동일 것이다. 먼저 미디어 노동은 상징과 정보, 심미적 가치를 생산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노동과 관련한 새로운 담론에서 언제나 집요한 관심의 대상이어 왔다. “지식기반경제”같은 거시적 경제정책의 담론을 통해서든 아니면 노동을 조직하는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장치에 관한 담론을 통해서든 미디어노동은 새로운 경제를 대표하는 노동 가운데 노동으로 군림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으로 미디어노동은 노동하는 주체를 인격화할 때 역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개성, 창의성, 자기주도성, 자기책임 등의 자아의 윤리는 미디어 노동에 종사하는 주체들의 인격성을 통해 손쉽게 묘사되었다. 마치 새로운 노동 서사의 주인공은 미디어 노동의 종사자들을 통해 가장 잘 표상될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점들을 감안 할 때, 미디어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은 노동을 둘러싼 변모를 압축적으로 표상하는 “모범적인 기업가적 노동자(model entrepreneurial labor)”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점들을 고려하며 미디어 노동의 정체성의 변화, 특히 그 가운데서도 미디어 노동의 주체성의 젼환을 이해하는 것이 현재 미디어 노동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주장하려 한다. 특히 최근 광범한 비정규직 고용의 형태로 나타나는 미디어 노동의 불안정성에 대한 비판과 개입이 효과적이기 위해 무엇보다 미디어 노동의 주체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다. 미디어 노동에 참여하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연관되어 있는 이질적이고 복잡한 실천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미디어 노동을 이해하는 한, 미디어 노동은 단순히 법률적이고 경제적인 이해의 대상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 노동을 둘러싼 문화정치의 문제는 비판적 관심에서 벗어난 채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물음을 보다 가다듬고 정의하기 위하여, 이 글은 기존의 비판적 미디어 연구와 문화연구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 담론 안에서의 미디어 노동에 대한 논의를 참고하면서 한국에서의 미디어 노동 특히 미디어 노동의 주체의 정체성을 둘러싼 주요한 논의를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미디어 노동을 생산하는 헤게모니적인 권력에 대항하고자 한다면 어떤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과제가 요구되는지 제안해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미디어 노동의 현실에 대한 경험적인 분석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분석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질문을 다듬어 보려는 시론적인 글에 불과하다.
미디어 노동과 노동하는 주체의 윤리
정보와 상징적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야말로 새로운 경제의 핵심적인 노동이 될 것이라는 “지식기반경제” 담론은 이제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게 되었다. 창의노동(creative work), 문화노동(cultural labor), 미디어 노동(media work) 등의 용어들도 흔하게 듣는 말이 되었다. 문화산업을 ‘정치적으로 새롭게 브랜드화한’ 창의산업 담론은 벌써 옛 이야기처럼 들리게 되었다.(Gill and Pratt, 2008: 2) 이러한 용어들이 가리키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막연하고 불확실하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전화상담원이나 택배원도 역시 다양한 상징적 정보를 처리한다는 점에서 문화노동이나 지식노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맥잡(McJob)이니 체인워커(chainworker)니 불리는 노동자들과 브레인워커(brainworker), 창의계급(creative class)니 하는 노동자들이 동렬에 놓일리 만무하다. 이런 용어들은 대개 드라마제작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잡지편집인, 패션디자이너, 사진가, 뮤직비디오 감독, 인디 뮤지션 등을 가리키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노동 정체성 담론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가 등장하면서 발생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 할 수 있다. 실은 이는 노동과 자본 사이에 노동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한 갈등과 협상의 효과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197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하여 지속되었던 노동의 사회적 조직을 재편하려는 저항과 협상은 근로생활의 질(QWL: quality of work life) 담론이나 산업민주주의(industrial democracy) 담론 그리고 급진적인 프로그램으로는 “노동거부(the refusal to work)”로 나타났다.(Miller and Rose, 1995; Ross, 2008; Gill and Pratt, 2008) 이런 경향들은 흔히 “조직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널리 알려졌던 테일러주의 노동과정의 기율적이고 획일적인 특성을 거부하거나 재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들이었다. 또한 경제적 현실로서의 일터를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조망하려는 시도들 역시 확장되면서 훗날 기업 내부의 반관료주의, 권한강화(empowerment), 팀제, 프로젝트 기반 노동과정 조직 등 다양한 ‘민주화’의 시도들로 이어졌다. 물론 이는 균등하게 동일한 궤적을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쓰리프트가 ‘자본의 문화회로(cultural circuit of capital)’라고 부르고 제솝이 자본의 ‘경제적 가상(the economic imaginary)’라고 부르는 것이 알려주는 것처럼, 경제적 현실을 규정하고 구성하는 다양한 지식들이 서로 다른 출처(MBA 등의 다양한 경영교육기관, 대중 스타와 다름없는 경영구루나 최고경영자의 언설, 대중매체는 물론 OECD, World Bank 등의 국제기관 등)를 통해 순환하고 영향을 미친다. 이는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80년대 후반 이후 노동의 민주화는 노동자의 경제적 생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민주화(자유화)’ 기획의 다양한 요소를 원용하며 노동의 민주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거의 모든 부분들(이직, 산업재해, 태업, 권태, 비능률 등)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재인식되었고 이는 훗날 흔히 신경영담론(new management discourse)란 것 안에서 심리학적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대하게끔 하였다.
(Thrift, 2001; Jessop, 2004)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하는 주체의 창의성, 자발성, 자율성, 주도성, 개방성, 창의성 등과 같은 능력을 특권화하고 이를 동원, 관리한다고 간주되는 다양한 관리의 테크놀로지들이 실행된다. 이는 특히 인적자원관리(Human Resources Management)라고 알려진, 인사노무를 대체한 새로운 경영 담론 및 테크닉을 통해 일반화되어 왔다.
노동과정의 재조직(테일러주의적 조직형태에서 팀제를 중심으로 한 예외적인 노동조직형태(내부분사, 다사업부제 등 유연화된 조직형태의 유행), 노동의 능력 담론의 재구성(직무능력(ability)에서 역량(competence) 담론으로의 전환),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능력의 서사’는 거의 상식적인 것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고용정보원 권태희 부연구위원과 노현국 책임연구원이 지난 5∼6월 2094개 기업을 표본 조사한 결과 최종합격자 결정 단계에서 지원자가 탈락하는 이유로 전체(복수응답)의 51.8%가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과 맞지 않아서’라고 답했다.……최종합격자 결정 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인재상(5점 만점)은 100대 기업의 경우 리더십(3.56점)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글로벌 인재·커뮤니케이션 능력(3.44점), 윤리·도덕성(3.31점) 순으로 나타났다. 300인 미만 기업체는 윤리·도덕성(3.39점)을 우선시했고 리더십, 도전정신, 협력성(각 3.38점)이 뒤를 이었다.” ‘경향신문’, 2011년 11월 1일. 진취성과 열정이라는 심리적인 소질이 무엇인지는 언제나 불분명하지만 이를 측정, 평가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테크닉이 지속적으로 생산됨으로써 이런 능력 서사는 더욱 공고화된다.
평가 방식에서의 전환(다면평가제, 책무성 평가를 포함한 다양한 평가방식의 도입), 그리고 보상방식의 재편(성과급과 연봉 계약 형태의 일반화) 등이 실행된다. 한국에서 이런 변화는 짐작할 수 있듯이 다양한 경로와 계기를 통해 전개되었다. 이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영향을 받는다. 개별 기업이나 산업 부문에서 노동자의 조직화가 이뤄진 정도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혹은 외환위기를 전후한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마치 경영 개선을 위한 필수적인 조처처럼 전격적으로 도입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또한 특정한 노동을 다른 모든 노동 형태의 대표 종(種)으로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새로운 노동 정체성을 둘러싼 신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미국이라면 어떤 이들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Californian ideology)’라고 조롱하기도 했던 실리콘벨리의 하이-테크 산업의 노동이 이러한 대표 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보헤미안주의와 실리콘밸리의 통신 산업을 기괴하게 합성하며 히피들의 자유분방한 정신에 여피들의 기업가적인 열망을 뒤섞어놓은 새로운 문화적 서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아마 그것은 최근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통해 더욱 극적인 서사로 부활하기도 하였다. 이런 노동의 서사는 삽시간에 미국 사회 전체로 확산되며 유행을 쫓는 학자, 미래를 선도한다고 자처하는 관료들이나 정치가들, 사회운동가들, 혁신적인 기업가들 사이에서 채택되고 번역되었다. 아마, 이는 영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나 디제이들의 노동을 둘러싼 서사를 분석한 맥로비의 분석에서라면 런던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이에 대응할 만한 것은 전통적으로 문화산업이라 불렀던 분야, 특히 미디어 분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런 서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능프로그램의 PD일지도 모른다. “예능이 대세다”라는 말처럼 텔레비전 방송의 주요 방송시간대를 장악하고 있는 예능프로그램은 미디어 노동이 어떻게 새로운 노동의 정체성을 선구하는지 잘 보여줄 것이다. “민간기업에서는 삼성, 공기업에서는 한전, 문화 분야에서는 공중파 방송국의 PD”라고 할 만큼 선호도가 높은 직업이 PD일 것이다.(우석훈, 2011: 108) 그렇지만 삼성의 사원이나 한전의 직원이 새로운 노동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물(figure)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방송 PD를 생각하면 사정은 다를 것이다. 방송 분야의 노동자들은 앞서 말한 대로라면 변화된 노동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종으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근자에 미디어로부터 큰 주목을 받는 어느 예능프로그램 PD를 생각해 보자. 얼마 전 예기치 않은 사태로 <나는 가수다>란 프로그램에서 중도하차한 김영희 PD를 둘러싼 말들은 미디어 노동이란 현실이 어떻게 분절되고 표상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래는 최근 주요 매체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게 된 김영희 PD에 관한 기사들의 일부이다.
“31. 김영희 방송 프로듀서
처음엔 누구도 믿지 않았다. 굵직한 프로 가수 일곱 명이 한 무대에서 경쟁을 하다니! 감히 누가 이런 기획을 했을까 궁금했다.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MBC, 이하 <나는 가수다>)를 기획한 김영희 PD는 “피카소의 작품을 두고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림이 마음에 드는지는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3월 6일 첫 방송한 <나는 가수다>는 엄청난 신드롬을 몰고 왔다. 출연 가수들의 노래는 음원 차트를 도배했고, 방송 2회 만에 18퍼센트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1위를 기록했다. 특히 임재범 박정현 이소라 김범수 등 방송에서 좀처럼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가수들의 라이브는 시청자들을 전율시켰다. “<나는 가수다>가 한국 대중음악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라는 김영희 PD의 말처럼 아이돌 가수의 노래가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던 가요계가 한껏 풍성해졌다. 그는 김건모 탈락 논란으로 중도 하차했지만 그가 창조한 새로운 서바이벌은 예능의 전설이 되고 있다. 장선 기자”(강조는 인용자) “[창조적 엔터테이너 50 ④] 새로운 한류 스타 등장”, ‘무비위크’,
(http://www.movieweek.co.kr/article/article.html?aid=27757&contcode=020301, 2011년 10월 31일 마지막 접속)
“김영희(51) MBC PD를 만났다. … 스스로를 “영향력이 엄청나면서 제어장치가 없는 방송 권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방송 프로그램 만들 때도 그래요. 새로운 것을 하지 않으면 흥이 안 나요. 기존 프로그램을 조금 변형해 하면 가슴이 안 뛰어요. 이 나이에도 ‘나가수’같이 새로운 것을 만들 생각을 하면 막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심장이 쿵쿵 뛰어요. 첫 방송 하기 전에는 잠이 안 와요. ‘이것 대박인데, 시청자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거야’ 막 이래요. …  주위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아, 저 사람 얘기를 따르면 대부분 성공하는구나. 싫어도 따라주자’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게 중요해요. 저도 ‘나가수’ 할 때 사실은 ‘이게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모르잖아요. 그런데 첫 녹화하기 두 달 전부터 저하고 같이 일하는 스태프, 가수들, 매니저들에게 ‘이건 반드시 성공한다. 내가 성공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라. 너희 도전이 헛되지 않게 반드시 해줄 거야. 걱정하지 마’ 이랬어요. 두 달 동안 세뇌를 다 시켜놨어요. … 정확히 그렇습니다. 녹화를 마치고 나면 다들 지쳐 있죠. 그럼 제가 일부러 들으란 듯 ‘오늘 녹화, 아주 기가 막혔다. 대박 났다. 너 정말 아까 노래 잘하더라’ 이렇게 칭찬하죠. 그럼 다들 기분이 좋아져 밤새도록 술을 마셔요. 그러다 보면 완전히 한 팀이 돼요. 새벽 날 밝을 때까지 술 마시고 일어나는 순간에는 결속력이 어마어마하게 커져 있죠.”(강조는 인용자) “‘나가수’만든 김영희PD”, ‘중앙일보’, 2011년 9월 10일

“재미있고 웃음 끝에 한 조각 의미도 남는 예능은 어떻게 가능할까. 김영희 PD에게 그 성공 공식을 들어봤다. 그는 일단 “새로운 걸 하라”고 말했다. “실패도 물론 많이 하겠지만 새로운 걸 하는 사람만이 성공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 거지.” 노래 잘하는 가수 몇몇 끌어내 지난 노래 듣는 건 이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텐션(tension·긴장감)을 넣는 방법이 경연이었다. 가수들은 물론 시청자들도 ‘그 노래 좋지, 그 가수 노래 잘하지’ 하는 게 아니라 바짝 긴장하고 듣는다. 그는 어떤 프로그램을 해야 시청률이 오를까가 아니라, ‘뭘 하면 사람들이 행복해 할까’를 고민하라고 주문했다. 보면서 즐겁고 감동을 느끼면 시청률도 자연히 따라온다는 것. 거기에 하나 더. ‘보통은 없다’는 각오로 노력하는 지독한 근성이다. 그는 일단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스태프와 출연자들에게도 집중을 요구한다. 요즘엔 방송 끝나면 각자 스케줄 때문에 쌩 하고 흩어지기 마련인데, 그는 출연자와 스태프 모두 뒤풀이에 참석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다음 일정이 있어도 꼭 들러서 사이다 한잔이라도 하게 한다는 것. ‘그동안 (방송하면서) 회식자리에 한번인가밖에 참석 안했다는 그 이소라도 매번 나왔다니깐.’” “김영희 PD ‘입사 때부터 예능이 방송 석권할 거라 확신’”, ‘한국일보’, 2011년 9월 1일
인용한 인터뷰와 기사에서 우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창조적 엔터테이너” 가운데 33번째의 순위를 차지한 방송 PD와 마주치게 된다. 또한 그가 ‘창조’한 새로운 서바이벌은 예능의 전설이 되었다고 상찬을 받는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미디어 생산물은 “과연 누구의 기획”이었을까란 질문을 통해 탁월한 기획자의 생산물이 되어버린다.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텔레비전 방송 생산은 “이건 반드시 성공한다. 내가 성공시킬 수 있다”는 선언을 통해 깨끗이 지워져 버린다. 덧붙여 ‘뭘 하면 사람들이 행복해 할까’를 고뇌한 끝에 나온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미디어 노동을 표상하는 핵심적인 실천이 될 때, 우리는 거기에서 새로운 노동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을 끌어들인다. 자기실현으로서의 일, 창의성의 표현으로 일, 사회적 협력의 역량의 발현으로서의 일, 자기 프로젝트로서의 일 등, 위의 이야기 속에는 최근 노동의 정체성을 에워싸고 생산되었던 담론의 요소들이 고루 출몰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어느 방송사 PD의 ‘노동’에 관한 표상은 또한 미디어 노동을 에워싼 표상을 생산하기도 하고 또한 전체 노동에 대한 표상을 생산하는 과정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 때 우리는 전체 방송산업 인력 가운데 절반에 가깝다고 추정되는 비정규직은 이런 노동의 서사 속에서는 표상되지 않는다고 비판을 할 수 있다. 공중파를 제외한 유선 및 위성 방송업은 물론 다른 유관 분야의 인력들이 외주, 하청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생산 관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노동과정을 조직하도록 요구받고 있는지 눈감고 있다고 힐난할 수도 있다. “개고생”을 한다고 자조하는, 막내작가로서 일하는 어느 구성작가의 푸념은 실은 아주 희귀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여성영상집단 ‘반이다’가 제작한 방송작가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개청춘>에서, 주인공인 승희의 대사 가운데 일부.
여의도 근처에 모여있는 드라마작가 지망생만 3천명 아니 1만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는 소문이 침묵 속에 떠돌아다난다. 그러나 그 위로 특1급 작가들이 받는 회당 원고료 3천만 원은 새로운 노동 서사 가운데 일부인 명사(celebrity) 혹은 스타로서의 작가라는 서사와 짝을 이루어 더욱 친숙한 이야가 되어 버린다. 출연료상한제를 도입하여야 한다고 법석일 만큼 인기 배우는 드라마나 영화제작비의 상당 비중을 차지할 만큼의 출연료와 개런티를 받지만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거의 생존이 불가능한 몸값을 지급받는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도 않다.
그럼에도 방송 산업의 노동자가 되려는 이들은 여전히 늘어난다.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 ‘막내’작가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구성작가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 관하여 그녀가 전연 모른 채 그 일에 뛰어들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기가 일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가난하며 눈물겨운 것인지를 되풀이하여 들려주는 주변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많은 이들이 미디어 노동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산업 혹은 창의 산업이라는 분야의 노동 시장으로 뛰어든다. “각 방송사의 자가협회 홈페이지에는 임금을 받지 못해도 괜찮으니 일만 시켜달라는 지원자의 글이 늘어서고 방송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소개하는 책들도 범람하고 있다. 심지어 드라마 작가의 양성이 중심인 방송작가교육원(한국방송작가협회 운영)의 학생들 중에는 펀드 매지저에 한의사 출신까지 있다고 한다.”(김순영, 176)

지상파방송의 연간 프로그램 제작 유통 현황을 보여주는 최근 자료에 따르면 2009년의 경우 자체제작은 4435억 원, 공동제작은 106억 원, 순수외주는 2,726억 원, 특수관계사 외주는 284억 원, 국내외 제작물 구매는 183억 원이라고 한다.(정용찬 외, 2011: 39) 방송 산업의 유연화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네트워크 중심 제작체제’라 불리기도 하는 외주제작 구조의 정착은 이제 외주, 하청, 공동제작을 방송 산업의 일반적인 생산공정으로 정착시켜 왔다.(앞의 글: 39) 그러나 이러한 산업 구조의 변화는 동시에 미디어 노동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함수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전체 방송 산업 노동자들 가운데 비정규직이 차지하게 될 비중을 알려주기도 할 것이다. 최근 자료에 따라면 지상파를 위시한 전체 방송산업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각기 26,226명대 3,74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비정규직인 전체 방송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가운데 12.5% 남짓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앞의 글: 60) 이는 2007년의 어느 보고서가 제시하였던 “최소 약 41.7%”라는 비율에 견준다면 현저히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이재호, 2007: 2) 2007년부터 비정규직 보호법을 실행하면서 비정규직 고용을 축소하려는 정부의 개입과 더불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을까. 이를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비정규직의 감소가 실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비정규직을 외주, 하청 관계에 있는 독립제작자나 프로그램 공급자에게 외부화한 데 따른 효과로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노동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비에 계상된 비용으로 임시, 단기 고용된 노동자에게 보상을 지급하는 방식에서 볼 수 있듯이 방송 산업 안에서 노동과정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들이 비정규적 고용 형태를 은폐하고 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정이 어떻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비율을 관찰하는, 즉 고용형태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는 실제 방송 산업에서 나타나는 생산(production)의 전반적인 구성을 판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디어 노동 혹은 문화노동이란 측면에서 방송 산업에서의 ‘노동’을 분석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새로운 접근이 대두되어 왔다. 이들은 그간의 미디어 (문화)연구 안에서 나타난 노동의 부재를 비판하면서 ‘노동’ 혹은 ‘생산’을 미디어 분석의 핵심적인 범주이자 정치적인 쟁점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이라는 입장에 선 미디어 연구자들 및 그와 유사한 문화연구자들이 이런 관점을 쫓는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주요 공동작업으로는 다음을 참조하라.(Beck, 2002; Cottel, 2003; Mayer, V. et al. 2009; Wasko, Murdock & Sousa, 2011)

알다시피 방송 산업의 유연화, 미디어 노동의 재조직화가 이뤄졌을 때 이를 경영을 재무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시장에서의 기업과 같은 형태로 방송 산업 역시 관리되어야 한다는 규준이 도입되었을 때 그것은 재무적인 경영의 규범을 도입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비정규직이라는 법률적인 형태로 인식되는 다종다양한 고용 관계가 성행하게 되었을 때, 이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영향을 받는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방송 및 미디어 산업의 구조 전환을 쫓아 ‘구조조정’이나 ‘선진화’를 해야 한다는 경영 담론의 유행의 산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따라 전과 같은 노동의 조직과 관리를 재편해야 한다는 기술적 규범이 미친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방송 산업이 생산하는 생산물의 가치를 인식하는 새로운 규준이 도입된 데 따른 효과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 외주제작이라 알려진 방송 산업의 생산 및 유통 과정의 변화를 살펴보면 이를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타 산업 분야나 공공 정책 분야보다 이른 1991년에 시작된 유연화의 기획으로서 외주제작은 외환위기나 ‘통합방송법’ 제정(2001년)과 같은 계기를 거치며 변형되어 왔다.(최영묵, 2010; 이종구․송용한, 2010)
이런 과정에서 프리랜서는 지금은 방송 산업 내부의 비정규직의 대명사이자 ‘불안정프롤레타리아트(precariat)’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지만, 불안정한(precarious)이란 낱말과 프롤레타리아트란 낱말을 합성한 프리캐리아트란 용어는 이태리의 자율주의자 그룹을 통해 유로메이데이 캠페인 과정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이는 지식근로자 혹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인지프롤레타리아트(cognitariat) 같은 유행 용어들과 대구를 이룸과 동시에 창의노동과 같은 새롭게 제안되는 노동 담론의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거부하려고 한다. 이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는 다음을 참조하라.(Lovink and Rossiter, 2007; Raunig, Ray, and Wuggenig, 2011). 한편 이들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로는 길과 프랫의 논의를 참조하라.(Gill and Pratt, 2008)
한 때 그것은 자기의 경력(career)을 스스로 개발하고 유연하게 삶과 근로생활을 조율하며 살아가는 독립적인 노동자로 간주되고 또 선망의 대상이었다. ‘자유로움’과 ‘불안정함(precariousness)’이란 윤리적 주체성 사이에는 엄청나게 먼 거리가 존재한다. 지금은 불안정한 삶으로 인지되고 체험되는 노동은 또한 기업가적인 윤리에 의해 침윤된 아름다운 노동의 세계의 모델이기도 하였다. 프리랜서의 법률적인 명칭은 ‘독립도급업자’이다. 이를 어떤 이들은 ‘자기고용(self-employment)’ 혹은 비판적으로 ‘자기착취(self-exploit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Hesmondalgh & Baker, 2008; McRobbie, 2003) 특히 2007년의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법률이 실행되면서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방송 산업은 독립도급업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으로 자신의 노동 생산물에 대한 권리, 노동과정에 대한 참여와 통제, 그리고 무엇보다 고용과 보상의 안정을 위해 자신을 노동자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요구 역시 증대하고 있다. 방송작가들이 프리랜서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방송작가 역시 근로자성을 갖고 있음을 요구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산 MBC 구성작가들은 ‘전국여성노조 방송사 지부’의 단체교섭을 요구하였고 경인방송 작가는 퇴직금 요구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은 방송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라 프리랜서이기에 그런 요구는 자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이진관, 2004; 김순영, 2007; 최현주․이강형, 2011)
그렇지만 프리랜서와 근로자성이란 것을 독립도급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법률적인 범주를 통해 파악하는 것은 충분치 못할 것이다. 미디어 노동자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게 된 프리랜서 방송작가들(혹은 그와 유사한 조건에 처한 미디어 노동자)이 노동자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고 또 이를 보장받으려 노력함으로써 고용안정성을 증대시키고 아울러 그들에 대한 사회적 보장을 확대하여야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다. 그러나 프리랜서란 이름이 고용 및 계약의 법률적 형태를 나타내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미디어 노동자들의 윤리적 주체성을 나타내는 개념일 수도 있음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낮은 제작 단가와 촉박한 납기일에 맞춰 일해야 하는 독립제작업체의 미디어 노동자들은 “최소한 내 이름 걸고 가기가 이제 체면상 쪽팔리지는 않게 하겠다.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자존심 같은 거”라고 말하곤 한다.(이종구․송용한, 2010: 264) 그것은 ‘직업의식’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넓게 보자면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이나 노동생산물과 어떤 윤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젝트형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몸값과 평판을 관리하기 위하여 인맥에 의존하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활동할 때, 역시 이들은 ‘연대로서의 노동’이라는 노동자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자리에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랜서 미디어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법률적인 지위를 보장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노동자성을 획득한다고 보기 어렵다. 의무적인 서면 계약, 미디어 노동의 비정규직을 위한 사회적 보장의 확대 같은 것이 중요한 법률적인 권리이지만 그 법률적인 주체로서의 노동자가 기업가주의(entrepreneurialism)적 윤리에 침윤된 노동자와 공존하기도 한다. 법률적 권리의 주체로서는 노동자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윤리적 주체성이란 측면에서 상당부분이 기업가일 때, 우리는 미디어 노동자들이 연대와 단결을 위한 노동자로서의 집합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물론 이려니와 노동과정을 조직하는 방식에 대해 효과적으로 투쟁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기업가적 노동(Entrepreneurial labor)이란 노동윤리는 문화산업 내에서는 전연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프 등이 지적하듯이 미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영화 산업 안에서의 협업 프로젝트가 발전하면서 직무에 기반을 둔 숙련보다는 개인적인 숙련을 더욱 중식하고 이런 숙련에 대한 인정 역시 임금에 더해 ‘낱낱의 활동(a piece of the action)’이나 개발된 생산물의 소유권이란 형태로 주어지는 변화를 겪었다. 여기에 더해 금융적인 관심이나 대중적인 취향을 가진 생산물을 생산하는데 있어 투자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보다 시장에서 검증된 평가방식들을 쫓는 관심들이 문화산업을 더욱 추동하게 되었다.(Neff, et al. 2005: 309) 그리고 이런 노동과정의 조직은 창의노동 등이란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미디어 노동의 이상적 규범이 된 채, 널리 확산되어 왔다. 그러므로 불안정한 미디어 노동의 현실은 비정규직이란 고용형태를 통해 비판함으로써 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정규직화라는 안정된 고용 형태만으로는 미디어 노동을 지배하는 권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나 실업 상태에 놓여있든 아니면 정규직으로 고용되어 있든, 노동의 시간적 조직이나 노동 강도를 좌우하는 노동과정의 편제, 노동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이나 노동 생산물에 대한 평가 등의 문제는 고용 자체를 넘어선다. 그것은 미디어 노동의 정체성, 특히 미디어 노동자의 주체성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아우른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커피제조노동자란 말보다는 바리스타를, 제빵노동자란 말보다는 파티쉐, 식당종업원이란 말보다는 쉐프란 말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자신을 파리 목숨과 같은 처지라고 자조하며 ‘파리랜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무슨무슨 작가님이 새로 시작한 작품을 둘러싼 비평과 논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기웃거릴 수도 있다. 재미와 자기실현, 자기표현이자 자기사업(self-enterprise)로서의 노동이란 심미적인 노동 윤리는 비단 미디어 노동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문화노동에 스며들어 있다. 영국과 미국의 방송 및 미디어 산업에서의 미디어 노동을 둘러싼 다음의 분석은 이런 점들을 잘 보여준다.(Ursell, 2000; Grindstaff, 2002; Ross, 2003; Hesmondalgh and Baker. 2008, 2011; Christopherson, 2008)
나아가 거의 모든 분야의 노동을 인식하고 체험하는 표준적인 시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Story and Platman, 2005) 그렇다면 이처럼 노동을 심미적 윤리에 따라 재구성하는 권력과 대항하는 노동의 전략, 특히 미디어 노동의 전략 역시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맺음말: 세끼 밥 그리고 꿈
문화연구 안에서 노동에 대한 관심은 그리 희박한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 영국의 비판적 문화연구의 중요한 흐름이었던 뒤 게이를 비롯한 영국 개방대의 문화연구자들은 그들이 발간한 문화연구의 입문적인 텍스트들에서 ‘문화 회로(a circuit of culture)’란 개념을 제안하며 문화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려면 정체성, 표상 등과 더불어 생산과 소비, 조절(regulation)이라는 계기들이 상호연결되어 있는 과정을 파악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du Gay et al. 1997: 3–4; 한편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Mosco, 1996) 그렇지만 토대/상부구조 관계라는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도식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발의 결과 경제적 관계로서의 노동을 억압하는 것이든 아니면 상품으로서의 문화생산물보다는 표상과 텍스트로서의 문화생산물을 강조하는 문화연구 내부의 경향에 따른 효과이었든, 노동은 문화연구의 핵심적 관심사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앞서 지적하였듯이 영미권의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 내에서 ‘노동의 귀환’이라 자처할 만큼 미디어 노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왔고, 역시 문화연구 안에서도 창의산업 담론의 대두를 전후하여 이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위한 문화 노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한국에서 미디어 노동에 대한 비판적 관심은 적지 않다. 앞서 지나가며 언급하였던 미디어 노동에 종사하는 다양한 노동자들(방송사 PD, 구성작가, VJ 등)의 고용을 둘러싼 지위와 불평등에 대한 관심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관심이 미디어 노동자의 고용 관계에서의 법률적 지위와 권리나 아니면 외주제작의 도입, 확산에 따른 착취적 노동과정 등에 제한되어 있는 듯 보인다. 이는 1990년대를 결정적인 전기로 하여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노동의 정체성의 변화와 미디어 노동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요소였던 노동 주체의 주체성의 변화라는 측면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다양한 노무를 제공하고 보상을 제공받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실은 자신의 노동과 노동생산물을 어떻게 체험하고 인식하는가, 그리고 노동과정에서 생산된 노동생산물을 어떻게 평가하고 보상하며, 노동에 필요한 능력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 등과 떼어놓은 채 인식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창의성과 주도성, 영감과 끼를 발휘하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거나 거래하며 자신의 명성과 역량에 따라 몸값이 매겨진다”고 생각할 때, 이 안에는 실은 노동과 노동주체의 정체성을 분절하는 다양한 지식과 테크닉들이 투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미디어 노동의 주체성(의 생산)에 대한 분석 없이 미디어 노동을 둘러싼 변화를 기약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출간된 저작에서 ’88만원 세대’로 유명한 경제학자 우석훈은 ‘문화로 먹고 살기’란 책에서 “우리가 신경 쓸 것은, 우리 문화를 성공적으로 산업화하여 얼마나 수출할 것이냐가 아니라, 생산자든 기획자든 문화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끼 밥을 제대로 챙겨먹는가, 그리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 앉아 자살을 고민하지는 않는가……그런 것들이 아닐까?”(우석훈, 2011: 34)라고 침울하게 되묻는다. 그러나 세끼 밥을 위한 고민은 단순히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 돈을 달라는 요구가 아닐 것이다.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 노동으로 자신의 노동을 바라본다는 것은 경제적 요구와 권리를 자각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일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힘들겠지만 괜찮아”란 각오로 미디어 노동의 눈부신 매력과 보상을 꿈꾸며 그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이들이 있는 한, 그리고 그러한 노동 주체의 윤리를 동원한 노동과정이 끊임없이 조직되는 한, 그 ‘세끼 밥’은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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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언론정보학회 가을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 언론정보학회지에 게재 예정. 그 이전에 인용은 자제해 주십쇼. 인용은 수정된 학회지의 글을 이용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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