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조(灰色調)의..


서동욱의 회화에 관하여
서동욱의 근작 전시인 의 카탈로그는 그의 그림이 “댄디즘과 멜로와 신파, 센티멘털리즘과 퇴행/퇴폐주의가 사이좋게 몸을 섞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이기도 했다면서. 이런 말만 들어서는, 정작 그의 작업을 눈에 익히지 않은 이들은, 그의 그림들이 ‘손가락이 오그라들리만치’ 키치할 것이란 인상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작품해설은 “느릿하고 기품 있는 서동욱의 퇴행주의”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그의 아름다운 그림들에 덧붙여진 이런 지적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보다 그것은 그림이었으므로”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하필이면 그림을 그리고 있고, 문제는 회화라는 매체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그림이라는, 노고로 가득 찬 그리고 그다지 대접을 받기에 어려운 매체를 고수할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림을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하필 그림일까”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꽤 괜찮다는 전시에서 그림을 보는 일은 흔치 않다. 그림은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조금 궁상맞고 처량해 보일 뿐 아니라 은근 미술시장에 추파를 던지는 교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것은 여러 가치를 넘나든다. 공공미술관에 소장될 가치가 있는 교육적 대상일 수도 있고 당대의 미학적 정체성을 표상하는 문화적 유산일 수도 있고 투자를 위한 여러 가지 금융적 수단 가운데 한 가지 항목을 이루는 자산(asset)일 수도 있다. 미술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어디에 해당될지 민감하게 눈치를 살핀다. 실은 그런 것이 미술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탓에 그림을 계속 그리겠다고 고집하는 자세를 마주할 때 우리는 그래야 할 만한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냉소적인 의혹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역시, 그림이야. 왜냐면…” 운운. 아니면 회화가 과연 다른 이미지와 힘을 겨룰 만큼의 어떤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듣고 싶을 수도 있다. “오, 회화에게 그가 가진 힘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을 알려주시기를.” 말인즉슨 회화가 이미지의 고고학에서나 관심을 기울일 만한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미술사에 해박한 미술이론가들은 유럽 미술 기행 같은 관광 상품의 가이드가 되어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누비고 다니는 형편이다. 우리는 회화를 죽어있는 저 오랜 옛날의 의고적인 이미지의 한 형태로 즐기는 데 익숙하다. 그렇지만 내가 매혹되는 이미지는 실은 마침 미술관 견학을 마치고 돌아온 호텔 방에서 침대에 누워 본 텔레비전 광고의 이미지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영면(永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회화를, 우리는 관람한다. 이제 회화라는 이미지는 고요한 관 속에 누워 우리가 찾아주기를 대기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때 회화는 지성적이고 혹은 호사스런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로서 소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회화를 고수한다는 것은 무슨 객기인가.
한 때 회화는 이미지의 본보기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회화는 많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의 본보기이자 거의 유일한 이미지였던 시절의 회화를 지금의 회화와 견주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명민한 미술이론가들은 그래서 회화를 이미지 일반으로 간주하길 포기하고, 회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특수성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어왔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주장에 밝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림을 바라 볼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이든 영상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 되었든, 수많은 이미지가 있다.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매체들 가운데 회화가 존속해야 할 이유란 무엇인가.” 아마 이런 물음을 떠올리지 않은 채, 진지하게 그림을 바로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제 그림은 이제 그림 자체를 그린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림은 그림 바깥에 있는 무엇을 이미지로 만들어낸다고 너스레를 떨기에는 다른 이미지들의 능력에 뒤쳐진다. “절 그려주세요”라고 말하는 당신과 “절 사진 찍어주세요”라고 말하고 당신은, 이미 각각의 이미지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이미지 가운데 하나로 전락한 회화를, 여전히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어야 할 이미지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실은 서동욱의 그림을 보았을 때, 많은 이들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 빌헬름 사스날(Wilhelm Sasnal) 같은 ‘화가’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들은 회화의 존속을 아니 회화적 이미지의 예외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미술가들로 꼽히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의 작업을 ‘회화적인 것의 증언’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서동욱도 그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인물을 그린다. 실은 그가 이번 전시에서 그의 최근 작업의 성과인 스산하고 멜랑콜리한 도시의 밤 풍경을 그릴 때에도, 실은 그것은 ‘낯’과 같다. 초상화와 풍경화의 구분은 회화가 융성하던 시절의 구분이다. 사진이 등장한 이후 그리고 다른 형태의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지금 그런 구분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물 혹은 낯은 무엇을 그린 것일까. 아마 작가는 사진을 들고 그 사진적인 이미지를 회화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바로 그 사진적인 이미지와 회화적인 이미지 사이에 놓여있다. 그리고 두 이미지 사이에 놓인 ‘거리’야말로 회화적인 것을 존속시켜야할 이유 아니 욕망이라 불러야 할 것이 놓인 자리일 것이다. 서동욱은 자신이 작업하는 공정 자체를 전시의 제목으로 삼았다. “Day for Night”이란 느와르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밤 장면을 낮에 촬영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밤 장면을 효과적으로 촬영할 수 있는 조명 장비가 없던 시절에 써먹던 촬영 방식은 이제는 기술적인 제약을 보완하려 동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독특한 심미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형식으로 독립한다. 그리고 공정은 곧 서동욱의 그림이 제작되는 공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가 자신의 회화가 만들어지는 공정을 가리키기 위해 나아가 그가 회화적인 것이 놓여있는 자리를 가리키기 위해 채택한 이름이 “Day for Night”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한 대상이 이미지로 존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식을 의식한다. 그가 부암동이든 성북동이든 아니면 여의도의 공원이든 그 장소를 그렸을 때 우리는 그가 그 장소를 그렸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 그는 화면으로 옮겨질 그 이미지의 대상(referent), 즉 그 장소 자체에는 없는 것, “댄디즘과 멜로와 신파, 센티멘털리즘과 퇴행/퇴폐주의”를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 이미지는 이미지가 된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은 그가 회화적 이미지로 화면에 현상시키는 것은 벌거벗은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미지로서만 체험할 수 있던 대상일 것이다. 어떤 대상을 이미지처럼 생각하지 않은 채 볼 수 있을 가능성은, 적어도 20세기 이후에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관광객이 자신이 찾은 낯선 장소를 이미 사진에서 보았던 그 풍경으로서만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되기를 기대하며 묵묵히 대기하고 있는 이미지 이전의 순수한 대상이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서동욱은 바로 이미 이미지로서 있던 대상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만든다.
그의 그림은 이미 펄프픽션이냐 아니면 통속적인 느와르 영화에서 보았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가지고 온다. 그렇다면 그는 대중문화를 통해 성행하게 된 한 가지 장르적인 이미지를 그리는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멜랑콜리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정조를 그가 그리게 될 대상에 덧씌운 후 이를 화면 안에 가두는 화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회색 물감을 두툼하게 섞어 화면을 채울 때 그는 그 이상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 회색조의 화면이 회화가 놓여있는 자리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이미지의 보편적인 언어였던 회화가 몰락하고, 다양한 이미지들의 가짓수 가운데 하나가 된 회화적 이미지를 고집할 때, 그것은 회화가 증언하는 어떤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회화가 아니면 사라지고 마는 이미지의 어떤 요소? 즉 회화적 이미지를 그것으로서 존속시키는 어떤 최소한의 요소? 나는 엉뚱하게도 그것이 회색 물감이란 생각이 든다. 그 물감은 단지 어떤 색채를 변형시키고 채도를 증감시키는 안료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회화 속에서만 현상할 수 있는 이미지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지도 않을까. 회색 물감을 짜 넣고 어떤 이미지를 그리도록 하자. 그럼 그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데카당트한 세계의 정조 속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 때 회화는 이미지의 한 종류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가 어떤 힘을 가지도록 만드는 요소를 증언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향수의 한 부분은 바로 그런 회화적 이미지의 능력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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