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침의 정치>를 위한 해제


Jim O’Rourke – Friends With Benefits

정치를 에워싼 상상력은 언제나 장소의 주변을 배회한다. 이곳이 아닌 그곳, 그리고 그곳의 발견, 그곳으로의 떠남, 그곳으로의 도착, 그곳에서의 머묾 등은 언제나 장소에서 흘러나오는 개념 혹은 상상들과 짝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장소의 상상은 정치적 상상과 교차하고 해후한다. 도시, 특히 보들레르, 짐멜이나 벤야민 같은 20세기 초반의 유럽 지식인들이 마주했던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알레고리에 다름 아니었다. 훗날 하이데거가 숲길Holzwege이란 이름으로 근대성의 원리에 반하는 삶의 조건과 사유를 상상했을 때, 그 역시 장소를 참조한다. 그러나 장소를 경유하는 정치적 상상은 언제나 분기하기 마련이다. 나는 먼저 유토피아의 노선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먼저 유토피아의 노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내전과 봉기가 발발하고 그것이 어떤 장소를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로 전환할 때, 우리는 그곳에서 무언가 나타났음을 감지한다. 영원히 유토피아의 별로 남아있을 파리 코뮌이 그런 것이다. 거기에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미래의 정치적 공동체의 전조를 보았다. 나는 이를 유토피아의 노선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어제와 같지 않은 세계를 현시한다. 그것은 단절과 변혁의 현실을 장소의 모든 모습과 운동 속에 기입한다. 그렇지만 거대서사, 근본적 단절, 총체적인 변혁이라는 꿈이 조롱거리가 된 연후, 우리는 목적론, 종말론, 보편주의, 초월적 토대의 형이상학이라는 구구한 죄목을 뒤집어 쓴 유토피아라는 불길한 꿈에서 벗어나도록 종용 받아 왔다.
한편 다음의 노선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헤테로토피아의 노선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을 널리 알린 글에서 푸코는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 “일종의 반反공간contre-espaces”을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다. 그는 유토피아가 완벽한 사회이거나 사회에 반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비현실적인 공간인 반면 “사회제도 그 자체 안에 디자인되어 있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로 헤테로토피아를 발견한다. 초월적인 대의(이를테면 공산주의)란 것은 파산하였다는 선고를 접하고 끝없는 우울한 슬픔에 빠진 자들에게 그런 발언은 큰 위안이 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의 내재적인 흐름으로서의 저항, 그리고 이를 물질화하는 장소.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를 대신할 장소가 우리에게 있음을 증언하며 우리에게 결코 실망할 일은 아니라고 위안한다. 아니 유토피아를 버렸다는 것은 아주 기쁜 소식이며,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그 대항 공간을 기꺼이 발견하고 그에 깃든 잠재성을 실현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메리필드는 헤테로토피아의 노선에 참여한다.
이를테면 저자는 곧 간략히 살펴볼 르페브르의 추상 공간에 대한 개념을 부정하는 공간을 규정하기 위해 차이 공간differential space이란 개념을 다듬어낸다.(260)[ 그 공간은 “살아진 차이를 우선시하는 공간, 신체적인 차이와 이종성을 강조하며, 사유하고 인지하는 만큼 느끼고 감지하는 공간”, “상호 연관된 영역 사이의 절대적인 데카르트적 격리를 만들기 원하지 않는 공간”, “정동적이고 정동을 느끼게 하는 공간, 느껴지고 들려지며 보여지고 감각을 통해 직접 체험된 공간, 자신의 신체와 친밀한 관계를 함축하는 공간” 등으로 서술된다. 한편 이 차이 공간은 또한 마이너 공간이란 이름으로 변신한다. 쉬이 짐작하겠지만, 이 개념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에서 차용한 개념이다. 이 공간은 어떤 별개의 공간을 가리키는 술어가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이면서 뭔가 규범적이기도 한 어떤 것, 여기 있어야 하고 곧 여기 있게 될 어떤 것”으로서 “전복적이고 틈입적이고 개입주의적이고 말썽 많은 공간이며 지배적 질서에 주류적인 추상적 공간에 말썽을 초래하는” 공간이며, 앞서 보았던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라는 공간에 상응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마이너 공간의 면모를 ‘점령하라 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갈한다.
헤테로토피아의 노선이 푸코가 제안한 헤테로토폴로지hétérotopologies라는 과학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르페브르와 카스텔을 참조하고 또 중재하며, 나아가 이를 대체할 상상적 화용론imaginary pragmatics이란 나름의 과학을 제안한다. 이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이 접근이 적극적 긍정과 능동적 실험의 에토스를 살리기 위한 것으로 “유토피아적이지도 실용주의적이지도 않은 어떤 것을 개발할 필요”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272) 그러나 언제나 유토피아적 노선에 가까운 이러한 이론적, 정치적 흐름을 헤테로토피아의 노선으로 개조하는 일이 쉬운 일일 리 만무하다. 그러나 메리필드는 자신의 박식함과 유려한 수사로 그러한 전환이 가능함을 설득하려 애쓴다. 그는 이 책에서 크게 두 가지의 과제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해결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행성 도시화라는 개념을 통해 새로운 도시적 삶과 그를 에워싼 사회관계의 윤곽을 그려내고 이를 통해 르페브르와 카스텔로 대표되는 급진적 도시 이론의 역사적 제약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더욱 야심적인 것은 “도시의(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유명한 도시적 삶의 정치적 전략의 한계를 돌파하고(전략이 이제 한계에 직면했을 간파하고 이를 만회하기위해) 권리와 중심성 등의 개념을 혁신하는 것이다. 그 귀결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마주침의 정치”이다.
누군가 글을 쓰기로 결심할 때, 그것은 어떤 불만이나 이의에서 비롯되고는 한다. 메리필드 역시 그렇다. 그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연유를 “도시에 대한 권리”란 전망이 오늘날 더 이상 시원찮은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인즉슨, “도시에 대한 권리는 일상생활에서 실존적으로 의미 있는 어떤 것이 되기에는 너무 고차원적으로 추상적”이고 또 “너무 광범위하면서도 동시에 너무 협소한 어떤 것, 너무 제한적이고 불만족스러우며, 집합적인 분노를 촉발하기에는 너무 공허한 기표記標인 어떤 것을 정치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작업 가설”이며 책에서 탐구하게 될 “테제”라고 말한다.”(18) 그러니까 그는 두 개의 기표 모두를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하나는 도시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권리이다. 우리는 이 두 개의 기표를 각각 도시적 삶에 대한 표상, 새로운 도시적 삶을 조직하고 창조할 주체라고 새겨볼 수 있다. (그런 것이라면) 저자는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전망에 담긴 두 가지의 사고, 즉 도시에서의 삶을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 그리고 그 도시에서의 빈곤하고 불행한 삶을 변형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주체를 상상하여야 할 것인가를 묻는 셈이다.
먼저 첫 번째의 과제. 메리필드는 “르페브르의 『도시적 혁명』이 출간된 이후의, 지구라는 행성에서 일어난 일들에 비추어 도시 이론을 재고하고, 특히 도시에 대한 권리와 관련하여 도시 정치를 재구성하고”(21) 싶다고 단언한다. 이때 그는 르페브르가 염두에 두었던 도시city란 것에서 벗어나 숫제 ‘도시’라는 용어 자체를 포기하면서 “뭔가 새로운 것, 뭔가 미래적이고, 생성 과정 중에 있는 도시를 포용하는 어떤 것”을 찾아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도시라는 것을 새로운 정치적 상상과 비평의 대상으로 구성하기 위해, 즉 도시를 이론적 대상으로 마름질하고, 그 비대상nonobject을 정치적 대상으로 되찾아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그럼 이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메리필드는 “도시city의 인식론을 떠나 도시적인 것the urban의 존재론으로 이동하는 움직임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출발하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도시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이해를 개발하려는 문제가 아니라 갈수록 도시화되어가는 세계에서 정동적인 존재와 씨름하는 문제”라고 부른다.(48) 더불어 르페브르라는 걸출한 도시 이론가가 내심 마음속에 품었던 요구가 “표준적인 사고틀을 포기하고, 시야를 재설정하고, 입체파 화가가 보았을 법한 것으로 도시를 재서술해 보라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눙치며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공간과 시간 자체가 자본주의의 구성물이며 시장이라는 우주를 옮겨 다니는 상품과 자본과 돈의 수량과 속도는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을 구부러트리거나 휘게 만들고 그 자체의 시공간적 차원을 창출한다”는 르페브르의 가르침을 새기며 행성 도시화라는 그의 독특한 개념을 내놓는다.(50)
그러나 행성 도시화는 장소와 도시에 관한 표상으로 흔히 간주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몇 에이커, 몇 평방미터라는 지리적인 물리적 실재도 아니고 건물, 구역, 거리, 행정적 구획처럼 정치적으로 관리하고 사회적으로 규율하기 위해 고안된 장소도 아니다. 물론 지대를 징수하고 입지에 따른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경제적인 가치로서의 장소도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공간적인 시대가 아니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저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시적인 것이란 그곳에 있지만 더 이상 그 자체의 이름으로 현전하지 않는, 그 자신의 실재로는 더 이상 가시화되지 않는 실재이자 개념”으로, 그것은 “내용이나 형태도 없이 점령 그 자체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 점령은 도시적 내재성의 실천the practice of urban immanence”을 표현한다는 것이다.(173)
이는 그가 각기 “공간의 초끈 이론”을 세웠던 두 인물이라고 추어올리는 르페브르와 카스텔의 도시 이론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낸 통찰이다. 르페브르가 공간이라는 독립변수를, 카스텔이 테크놀로지라는 독립변수를 일면적으로 강조했다면, 메리필드는 이 둘의 규정을 모두 수용하면서 “도시 공간의 역동성에 관한 전체론적 이론”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116) 그리하여 행성 도시화를 ‘네트워크 사회로, 추상-표현주의적 흐름의 공간’으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행성 도시라는 새로운 도시 공간에서의 삶을 표상함에 있어 관건은 중심을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적어도 저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중심성이란 개념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중심성에 관한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절대적 중심이 없는 곳, 유한한 공간에 지리적으로 위치하지 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논변을 좇자면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사회적 공간을 구축하고 조직하는 도시적인 것을 규정하는 행동의 장소”가 바로 새로운 중심성인 셈이다.(123) 그는 이러한 규범적인(뭉툭한) 서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시적인 비유를 동원하여 이를 보다 뚜렷이 마음속에 그려보도록 주문한다. 그는 “거미가 자기 신체의 연장으로 그물의 실, 즉 대칭적이거나 비대칭적인 구조로 분비되고 직조되는 비단결 같은 실을 자아내는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이때의 그물은 “거미의 영토인 동시에 그들의 행동의 도구이며, 그 자체의 사회적 네트워크”이다.(124) (그럼으로써 그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고 싶어한다. 중심성이라는 많이들 거북해 하는 그 개념을 버리지도 않고, 그 개념에 따라 다니는 혐의도 털어내면서, 운동 속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중심을 이론화하는 것이다.=>좀 더 논지를 잘 나타내기 위해 추가하겠습니다.) 그러나 중심성에 대한 그의 사유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대목은)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이나 맨해튼의 주코티 공원이 창조하는 중심성에 대한 서술일 것이다.(중심성을 서술할 때이다.) 그는 점령하기 운동이 새로운 중심성을 창조한다고 단언하면서 그때의 중심성이란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비활성적인 물리적 현전”(175)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운동들이 그 중심적 위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도시 공간을 표상한다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 공간에서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제기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행성 도시화라는 도시에 대한 표상의 전략은 그와 짝을 이루는 정치적 주체화의 전략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그는 중심성 개념을 재정의한 것처럼 시민권 개념 역시 새롭게 조작적으로 정의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상상하는 시민권은 “거리의 부정 및 먼 곳으로 손을 내미는 행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지각과 지평이 융합하는 지점, 양자의 변증법적 지점이며, 보기의 방식일 뿐 아니라 감정을 구조화하는 지점”이다.(125) 그리고 좌파나 우파나(좌파, 우파 할 것 없이) 편의적으로 가져다 쓰는 무력하고 희멀건 개념으로 전락한 시민권 개념을 대신하는 것으로 “우주의 정신적 시민권”을 내놓는다. 이는 어쩐지 허풍스럽고 사변적인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행성 도시화란 개념을 통해 말한 도시화의 차원의 변화를 가리킨 만큼, 그가 그런 개념을 찾아내는 것은 나름 일관된 논리적 결론일 수밖에 없다.(우주의 정신적 시민권이란 개념을 통해 시민권을 둘러싼 사유를 재구성하려는 의지 또한, 저자에게는 매우 일관된 몸짓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 바꾸도록 하겠습니다.)(그렇지만 행성 도시화라는 개념이 도시화의 차원이 변했다는 뜻을 함축한다면, 나름 일관된 논리로 시민권 개념에서도 그와 같은 변화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 영토, 장소란 것이 변화무쌍하게 신축하는, 즉 ‘지각이 여권을 대신하며, 지평선이 주거만큼이나 중요’해지는 시대가 오늘날이라면 그의 말마따나 시민권은 결국 행성적인 차원에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틀린 일은(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것이 칸트적인 세계시민의 권리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이로부터 어렵지 않게 칸트적인 세계 시민의 권리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저자는 그런 추상적인 규범으로서의 시민권 개념으로부터 빠져나간다.
그가 말하는 시민권은 지위나 객관적 현실의 공통성으로부터 추상되는 사회학적인 시민권도 아니고 정치철학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객관적인 현실적 상태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분배되고 보장되어야 할 그런 시민권도 아니다. 그는 권리를 담지하거나 제기하게 될 주체는 ‘계급 개념보다는 친화성affinity’을 토대로 할 가능성이 많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정신적 시민권은 친화성의 시민권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위대한 주체, 신화적인 역사의 주체인 노동계급이란 주체를 기각한다. 그리고 그를 대신할 주체를 작업장은 물론 주거공간을 비롯한 “우리가 지금 속해있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공간 전체”에서 거주함, 그로부터 빚어지는 주체성 자체에서 찾는다. 그때의 주체란 노동이라는 공통의 행위, 작업장이라는 공통의 소속의 장소, 계급의식이라는 공통의 의식성을 전제할 필요 없이(그리고 그런 것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고 그는 믿는다), 우리를 묶어 주는 무한히 다양한 ‘친화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체성, 아니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어떤 일관된 동일성으로부터 해방된 정체성, “일상생활에 잠복한 연합적 연대의 표현, 유연 정치affinity politics의 표현”으로서의, 정체성 없는 정체성이다.(135) 그리고 이는 생활의 통제력을 되찾고 참여 민주주의 형태로 이를 회복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는 욕망이다. 메리필드가 자신의 생각을 스피노자 식의 “공통 통념”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행성도시화라는 개념을 통해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표상을 얻고 중심성과 시민권을 재고하면서 새로운 주체성의 모델을 손에 넣었다면, 이는 대관절 어떤 정치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마주침의 정치’는 메리필드 버전의 헤테로토피아 노선이, 자신의 정치를 가리킬 때 선택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정치가 포함하는 에토스를 강조하기 위해 눈치 밝은 철학적 교양의 독자라면 익숙할 주장을 들려준다. 그에게 마주침의 정치란 “종착점을 상정하는 모든 목적론을 부정하는 테제”이며 “마주침은 어떤 신성한 마스터플랜도, 그 어떤 신성한 주체도 없는 과정”이다. “오직 한데 모이는 집단성, 그들 자체의 단일한 목표와 이 세계에 적절한 목표, 그리고 객관성 그 자체의 창출을 규정해 주는 순전한 공현존co-presences의 집단성만 있을 뿐”이다.(153)따라서 마주침의 정치는 그가 도시에서의 삶에 관한 새로운 표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도시적인 것은 마주침의 결과로 생긴 드라마의 장소이자 마주침의 드라마 그 자체를 마주치는 장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때, 이는 역력히 드러난다.(157) 그렇다면 이런 방향은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마주침의 정치로 옮겨가는 정치적 이동을 효과적으로 촉진하고 또 실현할 수 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주침이란 개념은 사람들이 인간 존재로 어떻게 한데 어울리느냐 하는 이야기, 집단이 왜 형성되고, 연대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유지되며, 여러 영역을 교차하는 정치가 도시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마주침은 눈을 깜빡거리는 것과 같고, 빛나는 우주적 성좌와도 같다. 마주침은 개방적인 형태(와 포럼)에, 역동적으로 구조화된 일관성에, 수동적인 상태로 미리 존재해 그냥 거기 놓여 있다기보다는 스스로를 만들어내는 배열에 결합하는, 다수성을 띤 참여자들의 표현과도 같다.”(105) 이는 아름답고 우아하다. 그렇지만 이처럼 친화성에서 비롯된 공통 통념이, 그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매인이 온다”는 구절을 거듭 인용하며 설득하고자 했던 것처럼, 과연 “마르크스주의적 계급의식 이상의 것, 그보다 더 깊은 어떤 것”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177) 그가 지하 경제의 주체들, 흔히 ‘시스템 D’이라(라) 부르는 경제 영역에서 생존하는 주체들(마약 판매상, 사기꾼, 행상인과 노점상들 같은 이들)의 재능과 의지력에 주목하자고 말할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친화성을 드러내는 애정에, 절묘한 순간에 응고되어 엉기는 매인에, 저기뿐 아니라 여기에 동시적으로, 혹은 거의 동시적으로 한데 모이는 신체들에 의존”할 때, “상상 속에서 경제적인 자기 역량 강화는 정치적인 집단 역량 강화와 마주칠 것”이라고 예언할 때,(예언하는 대목에서는) 아마 많은 이들은 숨을 고를 것이다. 그리고 “소통과 적기의 자기 조직화라는 거대한 행성적 그물망을 구성할 것”이라는 그의 어떤(일종의) 긍정적인 메시아주의를 설파할 때, 아연실색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212~213)
그토록 손쉽게 노동 해방이라는 급진 정치를 저버릴 수 있냐고, 그것이 창업과 자기 역량 강화를 통해 빈곤을 이겨내자는 신자유주의의 상투어로 채색된 프로그램과 다를 게 무어냐고 비난하는 건 물론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저자를 향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저자는 카프카의 우의寓意적인 소설 『성城』을 참조하며 스스로 “반란의 수수께끼”라고 부른 곤란을 돌파하자고 한다. 알다시피 소설의 주인공 K는 성으로 들어가려하지만 그의 입장은 끝없이 유예된다. 저메리필드는 K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오로지 성城의 기준에서만 바라볼 뿐 자신의 의지와 욕망의 편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메리필드가 말하는 반란의 수수께끼도 그런 것이다. 반란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반란을 인정의 논리를 통해 조망한다. 그러나 반란은 “그들의 기준”, “성城의 기준”,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기준”이 아닌 “우리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것이다.(301) 따라서 그는 도저한 낙관주의를 과시하며 헤테로토피아의 정치, 도시의 혁명을 조직하자고 촉구한다. 그가 말하는 도시 혁명은 “일종의 힉스 입자”로서 “지금껏 흩어져 있던 투쟁들과 알려지지 않은 시공간의 차원,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마이너스 공간의 양상들을 모두 통합”하는 것이다. 혁명은 대안적 정치 현실이나 자본을 분석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란의 수수께끼에 스스로 휘말린 채 혁명이 왜 지연되고 무엇에 의해 가로막혀 있는지 번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저자는 상상적 화용론을 활용하여 지금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 자신의 욕망, 자신의 살아가려는 의지를 발휘하여 행성 도시에서의 반란을 꿈꾸자고 말한다.
지난 해였던가, 어떤 글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글쓴이가(저자가)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오늘날 가장 왕성하게 또 주목할 만한 자본주의 역사적 분석을 생산하는 좌파 이론가들은 모두 지리학 출신이다.” 아마 그가 염두에 두었던 이들은 마이크 데이비스이거나 데이비드 하비 같은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앤디 메리필드 역시 그중의 한 명으로 끼워 넣는다 해서 그다지 억지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도 다른 이들 못지않게 도시와 장소, 공간이 처한 새로운 조건을 탐색하고 그것의 윤곽을 그려내며 이를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의 가능성과 연결하려 진력한다. 그는 정치적인 것과 도시적인 것은 분리할 수 없다는 서구 철학적 사유의 은밀한 흐름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살려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은 정치적 동물politikon zoon이란 점에 있으며 그 본성은 폴리스polis, 바로 도시에서 산다는 점에서 비롯된다는 말한 바 있다. 즉 도시는 언제나 정치의 문제였고 또 그 역도 참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을 곤구할 때 도시적인 것을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저자 역시 도시 공간에서의 삶을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를 집요하게 추궁하며 더불어 거의 막다른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도시 공간이며, 도시라는 장소가 우리의 정치적 사유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가? 최근 발표한 어느 글에서 프레더릭 제임슨(지나가면서 말하자면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고한 유토피아의 옹호자일 것이다)은, 오늘날 모든 것이 공간의 문제로 통하게 되었다고 환기한다. “우리 시대에 모든 정치는 땅덩어리real estate에 관한 것이다. (…) 포스트모던 정치는 본질적으로 지역적인 차원에서나 세계적 차원에서나 본질적으로 토지수탈에 관한 문제이다.”[F. Jameson, “The aesthetics of singularity”, New left review 92, 2015, p. 130.]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의아한 기분이 든다. 근대의 급진적인 정치적 상상을 이끌었던 시간이라는 차원을 대신해 모든 것이 공간(화)되었다는 그의 분석은, 적어도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 관한 것일 때 매우 놀라운 혜안을 보여준다.(그것이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 관한 것이라면 놀라운 혜안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유를 정치적 차원으로 연장해, 이제 정치의 문제가 숫제 공간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나친 과장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을 좇자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악명 높은 인클로저enclosure와 식민지 약탈에서부터 오늘날의 버려진 공장 지대, 정착촌과 난민 수용소, 거대한 규모의 슬럼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관을 한숨에 주파할 때, 무엇보다 무토지 농민의 투쟁에서부터 ‘점령하라’ 운동에 이르는 저항을 생각할 때, “오늘날 모든 것이 토지에 관한 것”이라는 제임슨의 발언은 더 이상 억지스럽지 않게 들린다.[같은 책, p. 131.] 그렇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오늘날 변화된 자본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정치적, 지각과 체험을 망라하는 미학적 지배가 공간을 통한(둘러싼) 갈등과 투쟁을 통해 나타난다면, 이러한 반역하는 공간은 어떤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초라하고 혼란스럽다. 대표의 정치와 계급 주체를 격렬하게 비난하며 등장하는 광장의 정치와 다중 주체란 이상은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뒷문으로 빠져나갔던 시간이 다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메리필드의 글 전체에, 다급한 어쩌면 초조한 어조로, 전류처럼 모든 페이지마다 흘러 다니는 사유의 전하電荷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의 개념, 긍정과 능동성을 비롯한 다양한 개념들의 도움을 빌며 자신의 모습을 들이미는 실천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어쩌면 ‘상상적 화용론’이라는, 언어철학적인 모델을 전용한 그의 정치적, 인식론적 모델 역시, 이런 실천의 긴급성을 전하려는 저자의 강한 의지가 투영된 어떤 윤리적인 수사들이 아닐까? 우리는 그러한 무례한 의구까지 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식의 태도를 가짜-능동성pseudo-activity이라고 지칭하며 그것의 잘못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경고했던 아도르노의 발언을 떠올리게 된다. 아도르노는 『부정 변증법 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행위 속에는 그것이 포함하는 적합성, 잠재성에 대한 관계가 존재하여야만 합니다. 특히 오늘날 결정적인 행위가 봉쇄당해 있고 이미 자주 충분히 설명했듯이 사유 자체가 마비되고 무력해졌기 때문에, 요행적인 실천chance practice이 일어나지 않는 사태들을 위한 대체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것이 실은 진정한 실천이 아니라는 점을 감지하면 할수록, 그들의 정신은 더욱 그것에 집요하고도 열정적으로 고착되어 버립니다. (…) 제 견해는 그런 행동은 행위를 촉발하기는커녕 가로막아 버리기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당한 실천의 가능성은 실천의 봉쇄에 대한 충실한 인식을 전제한다는 점을 덧붙이겠습니다. 우리가 그것의 가능한 실현을 통해 직접적으로 사유를 측량한다면, 결과적으로 사유의 생산적 힘은 족쇄에 결박당하고 말 것입니다. 실천적으로 될 수 있는 유일한 사유는 그를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실천을 통해 미리 제한받지 않는 사유입니다.[Th. W. Adorno, Lectures on negative dialectics: fragments of a lecture course 1965/1966, edited by Rolf Tiedemann, translated by Rodney Livingstone, Cambridge: Polity, 2008, pp. 53~54.>
그렇다면 우리는 아도르노의 충고를 이어받아 저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절대적으로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세계, 아도르노의 말을 빌자면 진정한 행위가 꽉 막혀 버린 것처럼 보이는 세계, 그런 세계를 바라보는 침울한 시선은 적극적 긍정과 능동적 실험의 에토스를 발휘하자는 다급한 열띤 목소리로 소란을 떨면서, 자신을 질식시키는 우울함으로부터 달아나고 스스로의 무력함을 애써 부인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것은 기우일 수도 있다. 아도르노 역시 잊지 않고 말하듯이 무의미한 불행을 종결시켜야 한다는 욕망은 진정 사유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메리필드 역시 그런 욕망으로 깊이 충전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잠재성, 현재라는 순간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에 덧붙일 것이라고는 당장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결단, 다시 매리필드 식으로 말하자면 능동적인 참여와 적극성일 뿐이라는 사유의 흐름에 대해, 의심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방금 언급했던 아도르노의 사유처럼 우리가 기꺼이 본받고 지지하여 왔던 사유의 흐름, 즉 현재라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비동시성을 사유하고 이를 통해 변혁을 모색하던 ‘변증법적’ 사유의 흐름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재성과 현실성의 변증법이라는 노선, 헤테로포티아의 노선이 알고 있는 현재라는 시간은, 동시성과 비동시성, 존재와 그것의 부정성이 항상 상기하는 새로운 시간을 상기하는 유토피아의 노선이 상상했던 시간성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개의 사유의 노선의 갈등은 비단 공간에 국한될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저자 역시 도시라는 공간적 사회관계로부터 출발해 우리 시대의 정치적 주체성에 이르는 사유를 경유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재미나게 읽는 비결은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우리 시대의 가장 첨예한 논쟁의 무대에 입회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장과 행간 사이에 비판적인 대화를 끼워 넣을 때, 우리는 이 책에서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의 노선과 헤테로토피아의 노선이라고 우리가 부른 두 가지 사유의 노선이, 물론 우리가 공간, 장소, 도시에서의 삶을 상상하고 변형하는데 투여될 수 있는 모든 사유를 망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두 개의 사유의 갈래로 나누어 볼 때, 급진적인 공간 이론이 우리 시대의 정치적 상상력과 만날 때 부딪치게 되는 쟁점들은 무엇인가를 짚어보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어떤 초월성도 없는 현재라는 내재적 시간을 애호하는 이들과 동시성 속의 비동시성에 유의하며 변증법적인 시간을 지지하는 이들, 우연적인 힘의 길항 속에서 독특한 것으로 출현하는 주체를 예찬하는 이들과 총체적인 규정의 효과로서 역사적 국면 속에 출현하는 주체에게 내기를 걸고 싶어 하는 이들.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거부하고 모든 공간 속에 권력과 대항권력이 공존한다고 보는 이들과 해방적인 주체들이 자신의 권력을 그러모으고 또 그것을 행사할 중심을 창안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아마 이러한 사유의 대차대조표를 계속해서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도시이다. 세계화된 이후의 세계에서의 도시이며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는 메갈로폴리스와 슬럼으로 위협받는 도시이며 자신이 포섭할 외부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될 도시 등등이다. 이러한 도시가 정치적 사유와 미학적 사유가 대면하여야 할 중요한 대상이란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시는 오늘날 정치에 관한 비판적 사유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시에 관해 사유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특수한 사유의 대상에 관한 사유가 아니라 실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사유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문인과 예술가, 급진적 정치가들은 모두 시간에 대해 곤구했다. 전위라는 이름, 이미 미래를 선취하고 다음의 시간을 앞당겨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그 이름이 알려주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연옥과도 같은 21세기의 초엽, 우리는 이제 장소와 공간을 마주하고 있다. 시간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알레고리를 찾아낸 이들처럼 우리에게 장소는 거의 모든 것의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매리필드는 그렇게 우리가 착수하여 할 사유의 노고 그리고 그 면모를 소개한다. 그를 편들든 편들지 않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반대할 대상으로서의 사유를 갖는 것조차 우리에겐 행운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도시에 관해 사유하고자 한다면 그와 함께 사유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함께 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즐거움이다. 더욱 좋은 일은 우리가 함께 할 이가 아주 솜씨 좋은 입담과 능청맞은 유머, 놀라운 상상력을 가진 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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