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질하는 자들의 이데올로기적인 미망(迷妄): 문화비평의 윤리를 생각하며


Shamir – On The Regular

“종의 안중에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추문의 병리학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파문이 있었다. 이름난 인터넷 논객이었던 몇몇의 데이트폭력을 둘러싼 언쟁으로 며칠간 시끌벅적했다. 그 이상으로 나는 이 사태들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흐릿하게 아니 어쩌면 부정확할 수도 있을 방식으로 그 사태들을 기억할 뿐이다. 표절은 나쁜 짓이고, 연인을 위협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 역시 나쁜 짓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것은 나쁜 짓이라는 확인으로 그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어떤 사태라고 부르는 것은 표절이나 폭력(?) 같은 행위가 오직 문제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문학인의 윤리이자 노동당에서 활동하는 진보적인 논객의 양심을 두고 사람들은 옥신각신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입씨름 전체가 사태의 불가결한 일부를 이룬다. 그게 어디 그들만의 일일 것이냐는 교활한 조소에서부터 똑같이 뒤가 구린 것들은 오늘 편하게 발 뻗고 잠들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아냥에 이르기까지 다들 훈수를 두고 대꾸를 한다. 수많은 이들이 엄청난 도덕적 열정을 투여하며 규탄하고 논란을 벌일 때 이는 심상찮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이는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되풀이되어 왔던 일이다. 이를테면 그것의 오늘날 비판의 표준적인 꼴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보인다.
매분마다 그 추문을 중개하고 개탄하며 혹은 은밀하게 그런 사태를 둘러싼 반응에 끼어들고 댓글을 달며 열정을 보이는 이들을 마주하는 것은 심란하고 거북한 일이다. 물고 늘어지는 사건과 인물 자체보다 오히려 그에 관한 소란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소동과 시비 속에는 어쩌면 우리를 들뜨고 흥분시키게 하는 사악한 무엇이 스며있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믿고 의지했던 어떤 인물이 부도덕한 행실을 한 데 대한 실망과 분노를 표현하는 것에서 비뚤어진 쾌감을 식별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동안 되풀이되어온 이러한 도덕적 추문과 소동, 비판을 대신한 비판 아닌 비판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이유는 여전히 있다.
헤겔은 그의 저작 여러 곳에서, 곧잘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하는, 시종의 사악한 양심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한 바 있다. 이를테면 ‘역사철학강의’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 심리학자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사생활에서 지니고 있는 특수한 사실들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인간인 이상 당연히 먹고, 마시고, 친구들과도 교제하고, 때로는 감동도 하고 격앙도 한다. ‘종의 안중에는 영웅은 없다(Fuer einen Kammerdienet gibt es keinen Helden)’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나는 전에 이에 덧붙여서 말했었다. ‘그것은 영웅이 영웅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종이 종이기 때문이다.’ 괴테는 내가 한 이 말을 10년 뒤에 가서 되풀이하고 있다. 종은 영웅의 장화를 벗기기도 하고 그의 잠자리를 돌보기도 한다. 또 그가 샴페인을 즐겨 마신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역사 기술에 있어서 이와 같은 종의 본성을 가진 심리학자에 의해 기술되는 역사적 인물은 화를 당할 것이다. 그 어떤 인물이라 해도 수평선 상으로 끌어내려져, 이러한 인정에 정통한 종의 도덕과 같은 줄에 세워지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그보다 몇 계단 더 격하되기도 한다.” G. W. F. 헤겔, ‘역사철학강의’, 권기철 옮김, 동서문화사, 2008, 41-2쪽.
여기에서 헤겔은 ‘추문의 병리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을 두고 빈정거린다. ‘종의 안중에 영웅은 없다’는 격언을 인용하며 그는 종들이 ‘영웅의 장화를 벗기기도 하고 그의 잠자리를 돌보기도’하고 ‘샴페인을 즐겨 마신다’는 것을 알고는 세상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본 모습을 오해하고 있다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종의 도덕에는 나름의 평등주의가 깃들어 있다. 그가 법복을 입고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이든 교단에 서서 지엄한 척 진리를 가르친다 자처하는 선생이든 모두 알고 보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시시한 치들이라는 것이다. 그자들 역시 맛난 음식을 보면 군침을 흘리고 잠자리에서는 교성을 내며 그 짓을 하는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이런 ‘도덕의 수평선’은 주인의 위선을 발견하고 고소해 마지않는 시종의 위선이 기대는 도덕의 기반이다. “역시 인간이란 다 똑같아”라고 냉소적으로 자조하며 우리는 뭔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자들을 조롱하고 기뻐한다. 좌파 지식인이라고 행세하고 다니지만 알고 연애를 할 때에는 손찌검을 일삼고 폭력적 행동을 일삼는 ‘찌질한’ 인간일 뿐이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자신의 능력과 대단한 수완으로 사업을 이루었다고 자처하지만 자기를 몰라본다고 승무원이나 부하직원에게 욕설과 폭력을 일삼는 쓰레기일 뿐이야. 운운. 그런 이들의 말을 듣고 헤겔은 이렇게 대꾸한다. “그러니까 네가 시종이지.”
주인의 심리적 특성 몇 가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조롱하고 비난함으로써 그를 비판하였다고 믿는 것이 왜 잘못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다. 주인이 주인인 것은 주인의 인격적 자질이나 면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가 주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어떤 인격적인 인물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복종하는 것은 그가 우연히 차지하고 있는 어떤 추상적인 자리, 지배와 복종을 조직하는 추상적인 사회관계에서의 어떤 위치일 뿐이다. 내가 복종하는 대상이 그 인물의 덕과 인품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자신을 여전히 시종의 자리에 묶어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판도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시종의 비판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주인과 대등한 척, 수평선상에 있는 것처럼 혼자 우쭐해하지만 이는 제 꾀에 스스로 속아 넘어간 것일 뿐이다. 그가 비판을 그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전혀 시종인 것이다. 주인의 심리적인 특성이나 자질을 비웃고 힐난하는 것이 주인을 비판하는 것은 주인의 자리를 전혀 의문시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비판하는 일은 주관적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 충분히 해냈다고 착각한다. 헤겔은 이를 “비천한 의식”이라고 부르지만 이를 가리키는 보다 적절한 이름은 천치일 것이다. 주인 몰래 낮잠을 자고 나선 보기 좋게 주인을 엿 먹였다고 즐거워하며 자신이 하인이 아니라 주인 모잖게 생각할 줄 알고 사는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하인은 자신이 얼마나 하인인 줄 모르는 천치이다. 그런 바보스런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것인 주인과 하인 관계의 규칙이라는 걸 모른 채 그것을 위반했다고 즐거워하는 일이야말로 진짜 천치스러운 짓 아닐까.
그러나 시종의 착각에 못잖은 반대의 착각도 존재한다. 정신분석학에서 자주 우려먹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마르크스도 언급하고는 했던, 자신이 왕이어서 왕인 줄 착각한하는 왕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자신이 왕이어서 왕인줄 아는 왕과 거지 주제에 자신이 왕이라고 착각하는 왕 가운데 누가 더 제 정신이 아닌지를 물어보도록 하자.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은 둘 다 거기에서 거기라는 것이다. 자신이 왕이라고 하는 비어있는 상징적인 위치를 우연히 떠맡고 있기 때문에 그는 왕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내면이나 외양에서 왕으로서의 인품과 외모가 있어 왕이 되었다고 믿는다면 그는 대단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거지이면서 왕이라고 믿고 헛소리를 해대는 왕인 줄 아는 미친 거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우리는 이러한 주인의 착각과 시종의 도덕이 평화롭게 동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런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사례가 리더십 담론일 것이다. ‘유연화된’ 신종 자본주의가 경영을 새롭게 나타내고 그리기 위해 도입한 신종 담론, 한 때 신경영담론으로 불리다 이제는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지혜로 자리잡은 경영 담론 가운데 대표적인 종목이 ‘리더십’이다.
리더십이란 경영이란 것이 기업주나 전문경영자가 위에서 명령을 내리고 지시를 하는 수직적인 위계 관계가 아니라 코칭(coaching)이란 개념이 느끼하게 역설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이 내면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충성과 협조에 따른 수평적이고 소통적인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도자, 명령가가 아니라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터나 학교, 공직에서의 권력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하려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는 지시, 명령, 강제와 같은 것이 경영이 아니라 소통, 존중, 자발성 같은 것이 경영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떠들어 댄다. 경영자들이 어떻게 하면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지침서와 프로그램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그 중에 몇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이 얼마나 코웃음을 칠만한 헛소리인지 밝히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간단한 사례를 떠올려 보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각자 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자는 ‘CEO’의 지시를 받은 노동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이는 국내 대기업에서 실제 행해졌던 일이기도 하다). 그가 회사 입구에서 자신의 명찰에 쓰인 이름을 보고 ◯◯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이 온전한 인격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사정은 정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전처럼 “이 봐, ◯◯대리”라고 부르는 것보다 그는 더 심한 인격적인 모욕을 느낀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여전히 그는 경영자의 변덕과 기분에 따라 생사가 좌우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지시에 따라 친구인 양 처신하도록 종용받는다. 그런 위선적인 코미디에 진지하게 참여하도록 종용받는다는 점에서도 수모스럽지만 더욱 모욕적인 것은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먹고살려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시늉이 아니라 심지어 내면에서 우러나는 존경에서 비롯된 것처럼 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형식적인 복종을 넘어 내면적인 자발성에 따른 충성을 바치도록 요구받는 셈이다. 다시 말해 사장이라는 상징적 지위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그에게 직접적인 인격적인 호의와 충성을 바치도록 겁박 당한다. 접객이나 대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판매나 영업, 서비스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감정 노동”이 서빙과 같은 도구적인 행위를 직접적인 친밀함을 교환하는 정서적인 교감으로 둔갑시키는 것도 이와 멀지 않을 것이다. 고객이 아니라 그는 나의 이웃과 벗처럼 대접해야 하는 인물이다.
아무튼 리더십이라는 신종 주인 담론보다 더 역겨운 것은 없다. 그러나 씁쓸한 일이지만 리더십 담론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정치 비판이라고 할 만한 것을 리더십 비판으로 대체하는 것이 규칙처럼 되었다. 얼마 전부터 정치의 잘못은 정치지도자의 리더십 부재이거나 일방독주의 리더십 문제로 순식간에 환원되기 일쑤이다. 야당 정치평론가의 논평에서부터 야당 성향의 언론매체, 시민단체 나아가 시위대까지 리더십을 비판하는 데 목소리를 모은다. 당연히 우리는 정치라는 제도화된 게임 자체는 문제 삼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란 것은 그 자체 좋은 것이고 모두가 그를 통해 온전히 자신을 대표할 수 있지만, 그것이 비민주적으로 왜곡된 것은 정치지도자의 소통 불능의 리더십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정치지도자를 뽑도록 조직되어 있는 그리하여 부득불 언제나 대표의 왜곡을 불가피하게 하는 정치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나 무지하다. 우리는 수시로 정치지도자를 조롱하고 세부적인 처신이나 몸짓, 패션 따위에 대해 저질스러운 농담을 행한다. 지도자나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에 대한 풍자는 위력적이고 또 중요한 비판의 방식이다. 그러나 풍자란 이를 보며 웃는 이들이 스스로 차지하고 있던 위치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자각을 동반할 때 그것은 풍자로서의 효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주관성의 탈구를 통해 자연스럽고 또 운명처럼 노예로서의 자기의식은 흔들리거나 동요한다. 그러나 풍자의 미학적이고 정치적 효력은 패러디가 습관처럼 되어버린 시대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시시한 개그 프로그램의 냉소적인 풍자처럼 즉 아무 것도 바뀔 것이 분명하므로 마음껏 풍자를 늘어놓는 것은 싱겁고 지루한 허위일 뿐이다. 아니면 미국에서 악명 높은 보수적 TV 채널인 팍스TV의 간판 프로그램인 <심슨 가족 The Simpsons>이 제 아무리 클린터과 빌 게이츠를 위시한 온갖 인물을 출연시키며 있는 자들의 위선과 착취에 대해 풍자적 비판을 퍼부어대도 아무런 상징적 효력을 발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을질”하는 자들의 도덕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인은 좋은 주인이라는 노예적 도덕이 우리 시대의 주인 비판의 레퍼토리라면 이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곳은 ‘갑질’ 비판일 것이다. 계급투쟁보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부르주아 비판이 훨씬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 자본주의 비판의 윤리적 서사의 골격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은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윤리의 객관성을 오해하고 어떤 대상에 대한 윤리적 비판을 인격적인 개인의 심리와 내면에서, 헤겔의 표현을 빌자면 주관적 ‘양심’에서 찾는다는 점에서도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비판을 통해 진정한 비판의 대상을 실종시킨다는 점에서도 당혹스러운 일이다. 땅콩 회항으로 유명한 어느 황당무계한 2세 경영자나 열정페이랍시고 개처럼 부려먹고 생색을 낸 어느 유명 패션디자이너를 둘러싼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고용주라는 이유로 전횡을 일삼는 이들의 갑질에 대하여 증오심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러한 갑질에 대한 증오가 불평등한 사회관계, 갑과을 사이의 주종관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는 핑계를 들어 갑질 비판에서 무언가 득을 보려는 짓은 일을 그르칠 뿐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주인은 좋은 주인이라고 은밀하게 가정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둘러싼 비판의 어려움을 퇴행적인 비판으로 대신하고 나아가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힘든 노고를 포기하도록 만든다.
“계급적 비평”은 한동안 성행하다 지금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고야 말았다. 이러한 비평이 신용을 잃고 온갖 거창한 철학적 비난에 밀려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런데 이런 계급적 비평이 맥을 못추게 된 데에는 계급적 모순을 부인하는 사변적 말장난 못잖게 계급적 비평 자체가 그만큼 쉽잖다는 점이 작용한다. 이는 근자에 철학자들이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공식을 빌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계급관계란 없다는 점에서 말미암는다. 계급관계의 비대칭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러한 비관계로서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이율배반으로 나타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가운데 오직 하나 만이 계급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투명한 객관적 사실의 세계로서의 계급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현실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개별적인 상품생산자들의 무정부주의적인 세계, 개별적인 기업가와 노동자들만이 존재하는 세계일뿐이다.
그럼 계급이란 무엇일까. 계급이란 소득, 지위, 의식, 관습 같은 공통의 요소들로부터 얻어낸 일종의 사회학적인 분류인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계급은 있어도 계급투쟁이란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경우 계급은 차이와 구별을 가리키는 개념이지 모순을 나타내는 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코포라티즘적인 관념이 상상하는 계급이란 개념과 모순 혹은 적대란 개념을 통해 매개된 마르크스주의적 계급이란 개념은 엄연히 다르다. 계급투쟁은 두 계급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 관계가 아니라 모순 관계이다. 코포라티즘은 계급 사이의 관계를 A라는 사회학적 집단과 B 혹은 반(反)A라는 사회학적 집단 사이의 관계로서 상상한다. 이런 발상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두 개의 사회집단을 이미 주어진 사실로서 다루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어진 사회적 사실로부터 각 집단의 이런저런 특징을 관찰하고 분류하여 계급의 정체성을 가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계급투쟁의 우위, 모순이란 개념을 통해 계급을 인식하는 이들에게 계급이란 개념이 가리키는 것은 다른 것이다. 흔한 오해처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짝패처럼 상보적이면서도 서로 대립하는 영원히 미워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 둘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순간 언제나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부르주아의 자기모순이 프롤레타리아이고 프롤레타리아의 자기모순이 바로 부르주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방금 언급한 계급관계의 비관계로서의 관계라는 이율배반을 생각해보면 한발짝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모순적 가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먼저 자본주의에서 계급은 오직 부르주아이다. 다음으로 자본주의에서 계급이 있다면 단지 프롤레타리아뿐이다. 첫 번째 부르주아만이 계급이라는 가정을 살펴보자. 이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자체 부르주아 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는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한다. 국가가 부르주아계급의 위원회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젠 충분히 반박된 경제주의적 환상에 근거한 도구주의적 국가관이라고 비난을 들을까봐 지레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국가의 자율성은 바로 국가가 도구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효과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도구일 수 있으므로, 계급적인 이해의 직접성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존재한다는 환상이 작동할 때에만 국가는 자율적이지 않은가. 아무튼 부르주아 국가를 통해 지배계급은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한다. 그들은 자신의 배타적이고 파당적인 이해를 일반적 이해로서 혹은 국가라는 공동체 전체의 이해로 만들어낸다. 그들은 국가의 성장과 발전, 안녕, 평화 등을 위해 국가를 장악하고 운영한다. 따라서 부르주아는 자신을 항시 전체로서 표상한다. 이 때 노동자는 자신을 국민의 일원으로서 대표할 뿐이다. 노동자는 적대적인 사회관계의 모순적인 항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여성(가족)부를 제외한 모든 부처가 남성부인 것처럼 노동을 대표하는 부분은 (고용)노동부이고 나머지는 모두 부르주아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하는 것, 즉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자신을 대표하는 것은 언제나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표상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논리를 만나게 된다.
이는 그 다음의 가정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해볼 수 있다. 먼저 부르주아는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할 수 없으며 영원히 그것을 금지 당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오직 개인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개별적인 이해를 좇아 침착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굳이 계급으로서 대표하기 위해 자신을 조직할 필요가 없다. 노동조합이 있거나 노동자당은 있어도 부르주아조합이나 부르주아 당이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 때 일체의 계급적 특색을 지운 채 자유당, 민주당, 공화당과 같은 이름을 붙이는 이유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이란 공식을 통해 통렬하게 조롱한 것이기도 하다. K. 마르크스, ‘자본 I-1’, 강신준 옮김, 길, 2008, 261-2쪽.
부르주아는 자신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해 파당적인 이해를 도모하며 스스로를 조직하고 자신의 욕구를 관철시킬 필요가 없다. 그는 주어진 세계의 이치를 좇으며 묵묵히 살아가는 시늉을 하면 족하다. 이는 자신의 주관적인 이해는 그들은 부분적인 이해인 것이 아니라 현실을 올바르게 고려한 객관적인 이해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들의 탐욕이 제지당하면 그들은 굳이 자신의 이해를 말할 필요도 없이 영업의 자유, 사용자 측의 평등한 권리 등을 역설하면 족하다.

프롤레타리아의 경우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자신을 대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이해를 대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의 낙원은 곧 착취적인 사회관계이기도 하다는 모순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고 그것이 가정하고 있는 욕구와 이해를 실현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를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바로 이 착취적 사회관계를 폐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모순적인 항을 이루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이 곧 사회 전체의 해방(착취적 사회관계의 폐지이자 새로운 사회관계의 수립)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은 보편적 계급이라는 터무니없는 형용모순적 주장이 출현하기도 했다. 보편적인 계급은 물론 난센스이다. 계급이라는 낱말 자체가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데도 그것이 곧 보편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인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모순적 현실을 올바로 상징화하는 것이기에 논리적으로도 참일 수밖에 없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앞의 가정과 동일한 결론,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자신을 대표하는 것은 언제나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표상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논리와 또 다시 만난다.
그렇다면 계급 관계는 비관계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만나는 게 되는 일은 없다. 농민, 자영업자, 외국인, 아동, 노인 같은 숱한 사회적 집단 가운데 하나로서 노동자이거나 코포라티즘적인 사회집단으로서의 노동자 집단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 역시 다르지 않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만나게 될 일은 없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맞서 자신의 투쟁을 조직할 때 그들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지극히 추상적인 사회현실을 만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제나 어긋난 만남이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급투쟁은 결코 인격적인 집단 사이의 만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당연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계급투쟁이 모순이라면 그것은 다른 말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상징적 매개를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역사적인 국면에서 계급적 관계가 독특한 사회적 블록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투쟁을 조직한다는 것은 이러한 상징적 매개를 고안하고 자신과 상대에 이름을 붙이며 그 사이의 갈등을 조직하기 위한 구호, 표어, 의례 등을 만들어내고 다양한 상상적 대상화를 덧붙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즈음에서 갑질하는 자본가란 상징적 매개가 왜 한계가 있는지 따져볼 수 있다. 그렇다. 분명 갑질하는 가진 자들이란 표상도 역시 착취적인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잘못이다. 이는 착취적 사회관계에 대한 비판을 도덕적 비판으로 치환한다. 나아가 그것은 비판의 불임성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직면하게 된다.
부정을 부정하기
“‘부정’은 사회적 환경에 대한 아름다운 영혼의 비판적 태도이며, ‘부정의 부정’은 아름다운 영혼 그 자체가 어떻게 자신이 거부하고자 꾀하는 사악한 우주에 의존하고 있는가-그리하여 그곳에 완전하게 참여하고 있는가에- 대한 통찰이다.” S. 지젝, ‘까다로운 주체’,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5, 129쪽.
지젝은 어느 글에서 주관적 비판이란 부정이 지닌 한계를 규정하며 이렇게 서술한다. 이는 헤겔의 유명한 ‘아름다운 영혼’에 대한 비판을 다시금 써먹는다. 알다시피 “아름다운 영혼”이란 추악한 사회관계에 연루되는 것을 불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회의 바깥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사회에 대한 추상적인 비판으로 비판을 대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우리 시대에 창궐하는 사회 비평 혹은 문화 비평의 모습이기도 하다. 진정성을 상실한 속물근성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것을 위시해 숱한 정신적 상태와 윤리적 태도를 겨냥한 비판은 그릇된 사회관계를 비판하는 것을 충분히 대신하는 듯한 시늉을 취한다. 그렇지만 지젝의 말처럼 그런 접근은 “자신이 거부하고자 꾀하는 사악한 우주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에 “완전하게 참여하고 있음”을 부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부정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그러한 추상적인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현실적인 부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부정의 부정’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이란 자신이 부정하고자 했던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 주어진 직접적인 현실을 부정하며 현실을 외부적인 대립물로 여기며 비난했던 자신의 경박한 생각을 반성하고 바로 현실과 화해함으로써 성숙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이란 추상적인 부정을 현실적인 부정으로 바꾸어냄으로써 부정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다.
아마 이런 점에서 급진적인 비판을 위한 원리를 집요하게 추구한 인물을 꼽자면 단연코 아도르노일 것이다. 이를테면 “문화비평과 사회”란 부제가 달린 아도르노의 ‘프리즘’이란 저작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첵은 추상적인 비판을 어떻게 다시 비판할 것인가라고 불러도 좋을 모토를 실천하는데 바쳐진 책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른다. “절망과 엄청난 괴로움이 존재하는 곳에서 단지 정신적인 것, 인류의 의식상태, 규범의 쇠퇴 따위만”을 발견하고 비평이란 이름으로 그 대상에 대해 깊이 안다고 거들먹대면서 “판단의 독립성을 위한 개념과 대상의 분리”를 자행하고 대상이 사물적 형태로 되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 그리하여 “문화비평은 마치 전시된 듯한 이념들의 수집에 호소하고, 정신, 삶, 개인 등의 고립된 범주들을 물신화”하는 것을 아도르노는 격렬히 비난한다. Th, 아도르노, ‘프리즘’, 홍승용 옮김, 문학동네, 2004, 8쪽.
그리고 우리는 그의 경멸을 오늘날 더욱 강하게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아도르노의 접근은 한마디로 주체는 객체라는 것이다. 내가 어떤 윤리적, 미학적인 태도를 통해 세계를 비난하려고 할 때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온전하게 수락하고 승인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러한 조건을 인정하면서 비롯된 비판은 언제나 불완전한 비판일 뿐 아니라 그릇된 비판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주체란 언제나 객관적인 사회관계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는 것을 유념하도록 경고한다.
아도르노가 일관되게 강조했듯이 내가 바깥 세계를 인식할 때 나의 주관성은 바로 세계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장황하게 외삽한 물신주의에 관한 철학적인 단편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필수적인 부분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는 많은 이들이 오해한 것처럼 자신이 전개하는 비판적 논증이 의지하고 있는 논리적인 전제들이나 인식론적인 가정을 밝혀주기 위해 끼워 넣은 철학적인 부록(附錄)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비판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인 것이다. 우리가 상품, 화폐, 자본, 이윤, 임금, 지대 등의 개념을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표상으로 간주하는 한 그것은 그러한 개념이 억압하는 모순을 인식하지 못한다. 예컨대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이며, 화폐는 보편적 등가와 교환수단의 모순이며, 자본은 산 노동과 죽어있는 노동의 모순이며, 임금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 상품 자체의 모순이란 것 등등을 억압한다. 그리고 그런 개념의 모순을 부정한 채 이를 현실을 객관적으로 표상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자체가 허위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리카르도 사회주의자들(불행히도 오늘날 대부분의 반자본주의자들은 리카르도주의자들이다)의 주장처럼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자신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이윤이란 형태로 빼앗긴다고 분개하는 도덕적인 비판은 비판이 아니다. 이는 노동과 임금이란 범주가 바로 자신이 비판하는 사회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온당하게 대접받지 못한다는 도덕적인 비난으로 비판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자본주의 비판이 노동의 입장에 서서 행해지는 비판이 아니라 노동 자체의 폐지란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노동이란 개념은 인간의 생산적인 활동 자체를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추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추상 자체가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조건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은 노동의 결실을 제대로 보상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노동이란 것 자체의 폐지를 겨냥하는 것이다. 인간이 행하는 온갖 생산적인 활동을 추상화할 때 우리가 손에 얻게 되는 매개된 개념이 노동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노동자에게 도덕적으로 아첨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고타 강령>에 대해 그토록 격분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노동은 모든 부와 문화의 원천이다. 그런데 유용한 노동은 오직 사회 속에서 그리고 사회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노동의 수익은 조금도 줄지 않은 그대로 평등하게 모든 사회 성원에게 귀속된다”는 고타강령의 서술에 대해 마르크스는 자제심을 잃고 펄펄 뛴다. K. 마르크스, “독일 노동자당 강령 논평”, ‘프롤레타리아 당 강령’, 편집부 편역, 소나무, 1987, 80쪽.
왜 그는 그토록 불에 덴 것처럼 야단법석을 치는 것일까. 노동자의 불행을 동정하고 그들이 온당하게 취급당하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뭐 그렇게 욕먹을 짓이란 말인가.
그러나 마르크스의 분노는 옳은 것이다. 이는 그런 비판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양심에 호소하며 노동자의 자기 노동에 대한 도덕적 자부심을 끌어내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수익의 공정한 분배”를 사회주의의 목표로 내세운데 대해 마르크스가 격렬히 비난을 퍼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정한 분배란 오로지 인간의 생산 활동이 노동이란 이름으로 추상되었을 때의 세계에서의 노동 결실에 대한 이야기이며 나아가 노동할 수 없는 이들, 노약자나 병든 이들 그리고 다른 이들보다 덜한 노동능력을 가지는 자들이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노동이란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활동, 예컨대 인간의 생존을 돌보는 숱한 여성의 활동은 고려되지 않는다. 당연히 마르크스는 노동의 가치에 따른 “평등권은 무릇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상 불평등권”이라고 비난한다. 앞의 글, 87쪽.
이는 자본가들의 과도한 탐욕을 비난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비판에도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피케티 식의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불평등화의 경향에 대한 비판은 거의 미친 주장처럼 여겨지던 마르크스의 ‘궁핍화’ 테제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것이고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충분한 비판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거짓이다. 자본주의는 소득 분배 구조의 불평등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득 분배의 구조를 필연화할 뿐더러 노동이란 범주로 편입되지 못하거나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규정된 활동을 배제하거나 저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른 체 한다는 점에서 나쁜 것이다. 고쳐 말해 노동이 온전히 자기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노동이란 개념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란 것이 언제나 자본주의적 객체 자체인 이유를 말해준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외부에서 물러난 채 우아한 척 그것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는 것이 그것에 깊이 연루되는 방식임을 설명해 준다. 자본주의는 사악한 체제라고 고발하는 가톨릭 교황의 발언은 제법 윤리적인 감동을 주지만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본주의 때리기가 한 때 대서특필되다 이제는 스타의 별난 발언, 아름다운 선행처럼 취급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떠올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까. 가톨릭 신자의 으뜸가는 지도자인 교황이 그렇게 발언하는데 왜 세상의 가톨릭 신자들은 자본주의란 악에 대하여 반항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건 잘못된 질문일 뿐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주관적인 도덕의 측면에서 얼마든지 자본주의를 욕하고 비난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그들은 객관적인 현실의 측면에서 얼마든지 자본가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주관적인 도덕과는 상관없는 외적인 현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원리를 좇아 충실하게 사업을 하면서 내면적으로 자본주의를 사악한 체제라고 비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구성적인 분열, 육체노동과 지적 노동의 분화야말로 자본주의가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원리라 할 수 있다. 부르주아는 얼마든지 도덕적인 비판을 즐길 수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전연 해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은 더욱 더 유용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 대한 감시와 비판의 대표적인 형태는 부패와의 전쟁, 청렴과 책무성이라는 윤리적 기준이다. 경영학자나 정치가, 시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가들은 이러한 우아한 자본주의 비판을 위해 다양한 윤리적 기준을 공급하여 왔다. 이를테면 사회적 책임 투자 같은 것이 그것이다. 기업의 영리활동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지만 그것이 자본가의 사익을 위해 분식회계와 같은 일을 저질러 선량한 투자자의 이해를 침해할 때,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악이 된다. 이윤추구행위 자체는 선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선한 행위를 교란시키고 정당한 이윤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악이다. 금융소비자의 권익을 온전히 챙겨주는 양심적인 투자기관은 좋지만 지나친 이자를 부과하여 노동자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약탈적 대부업자는 악이다. 그러나 TV의 광고를 볼 때마다 우리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서로를 부도덕하다고 고발하는 약탈적 대부업자의 윤리적인 경쟁이 약탈적 대부업자 자체의 도덕이기 때문이다. 한 달 내에 갚는 돈에 대해서는 이자를 요구하지 않으므로 진짜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너스레를 떠는 대부업자와 모두 돈을 빌려주지 않을 때 나의 커피숍, 빵집, 수예점을 열겠다는 당신의 꿈을 이루도록 기꺼이 돈을 빌려 드릴 테니 다른 일은 걱정 마시고 당신의 꿈을 위해 애쓰라는 대부업자는 서로 자신의 도덕을 으스댄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 자체가 얼마든지 선으로 뒤집혀지는 모습을 얼빠진 낯빛으로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방식 자체가 자본주의의를 윤리적으로 온전히 비판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본주의란 바로 그 도덕적 유희를 즐김으로써 번성한다는 수수께끼 앞에서 쩔쩔 맨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전노와 합리적 자본가를 구분한 마르크스의 지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화폐축장자가 광적인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데 반해 자본가는 합리적인 화폐축장자이다. 화폐축장자는 화폐를 유통에서 구출해 냄으로써 가치의 쉴새업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좀더 영리한 자본가는 화폐를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가치의 끊임없는 증식을 달성한다”고 꼬집는다. K. 마르크스, 앞의 책, 234쪽.
십원이 아까워 벌벌 떠는 구두쇠의 주관적인 인색함에 대해 조롱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신중하게 자신의 돈을 투자하여 어떻게 부를 효과적으로 얻을 것인가를 탐색하는 자본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거꾸로 기꺼이 칭찬을 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말하듯이 더 악한 행위는 바로 후자 쪽에 있다. 수전노의 주관적인 악에 대해 우리는 손쉽게 경멸을 쏟아낼 수 있지만 합리적인 자본가의 착취에 대해서는 기꺼이 응원을 보낸다. 이는 진정한 악인 객관적인 악에 대한 무지이다. 악은 주관적인 의식이 아니라 바로 객관적인 현실 자체에 있다. 그리고 그것에 깊이 연루되어 있으면서 자신을 합리적이고 공평무사한 척 처신하는 데 있다.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바로 그것을 겨냥하여야 한다. 객관적인 악은 주관적인 선량함이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럼 문화 비판 혹은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관적인 자세와 태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주관적인 도덕과 객관적인 현실이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들춰내는 것이다. 갑의 도덕적 주관성을 비판하면서 갑이 만들어낸 세계의 윤리를 온전히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갑이 도덕적일 때 세상은 더욱 악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함으로써 말이다. 
_말과활 에 기고한 글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