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론의 시좌


The Clash – London Calling

현실의 투명한 증언자, 청년세대?
얼마 전 ‘페이스북을 열었더니 “페친” 중 한 명이 어떤 기사를 링크하고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대꾸를 적어놓았다. 그를 언짢게 했다는 글이 뭔가 싶었다. 이름난 입시강사 출신의 교육운동가이고 야당에서 정치가로 활약하고 있기도 하는 어떤 이가 쓴 글이었다. 야권이 집권을 하려면 어떤 체질개선이 필요한지 고언하는, 시장의 정치마케터가 항용 읊어대곤 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썰”이었다. 그 글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어떤 분들은 일베를 그냥 무시하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게 맞을지 도 모르지요. 하지만 일베에 대한 무시가 청년에 대한 무지를 정당화해선 안됩니다. 일베 현상의 기저에 깔려있는 청년들의 상황과 의식의 변화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진보가 시급히 업데이트해야 할 지점입니다. 여의도 정치권이 청년들의 불안하고 고단한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여태까지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덧붙여 청년들의 자생적 반북의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정치연합이 다른 건 다 좋은데 북한에 대한 태도 때문에 지지하기 꺼려진다’는 젊은이들의 반응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청년들의 세대적 경험에 대한 몰이해, 실증의 무게에 대한 무감각, 역사인식 업데이트의 미비, 여기에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홀대가 더해질 때, 청년들은 야권에 대한 기대를 접거나 유보할 것이고 일베는 더 발호할 겁니다.” 이범, “일베 무시는 청년 무지”, <허핑톤포스트>, 2015년 7월 3일,
http://www.huffingtonpost.kr/bohm-lee/story_b_7718766.html
386세대에 속한 열혈 운동권이었고 여전히 노동당을 지지하는 진보적인 성향의 ‘페친’이, 이 글을 읽고 분개했던 건, 아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글을 두고 어떤 이는 “역대급” 일베론을 제기했다고 흥분했다지만 말이다. 북한 문제에 대한 인식의 개선, ‘뉴라이트’의 실증적 주장의 무게에 대한 인정 등을 요구하며 야권의 “업데이트”를 역설하는 그의 충정은 실용적인 셈법에 눈이 먼 ‘꾼’의 말장난이겠거니 넘어갈 수 있다. 집권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사유의 조작도 가능하다는 실용주의는 지저분한 발상이지만 그러겠거니 한 체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현실정치에서의 손익을 셈하는 잔꾀 이상으로 간주하면서 짐짓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유의 내용으로 자처한다면 이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수락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는 듯 보인다. 그가 진보다운 진보를 역설하는 자리에 서 있다고 자처한다는 점에서 사태는 더욱 가관이다. 그가 전개하는 논리나 기대는 전제들은 빈궁하고 형편없다. 실증의 무게를 역설할 때 그는 실증적인 것이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위장하는 뻔뻔스러운 알리바이라는 것을 모른 체한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가 경청도록 주문하는 뉴 라이트의 주장에서 실증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제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뉴라이트들이 식민지 시기와 ‘개발연대’ 시대에 어쨌든 성장, 발전이 있지 않았느냐, GDP가 오른 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느냐며 사실을 들이밀 때,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사실이 성장, 발전, GDP 증가와 같은 규범에 의해 항상 매개된 채 바라본 사실이라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다. 이를테면 이런 그로테스크한 실증적 주장이 범람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있다. 이를테면 어쨌든 사실의 측면에서 프랑스혁명은 전무후무한 살상이 있었던 정치적 테러가 아니냐고 비난하고, 파시즘은 어쨌든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끝내고 효율적인 성장을 이끌어낸 것은 맞지 않느냐고 윽박지르며,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를 지배하지 않았다면 감히 인도인들이 철도, 기계, 학교 등의 근대적 문명의 세계 속으로 입장할 수 있겠느냐고 열성적으로 떠들어댈 수 있다. 물론 그런 발언은 “사실적으로” 모두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맞다는 것은 사실을 사실로 구성하는 그 것, 현실을 성공적인 방식으로 주관적으로 매개하였을 때이다. 프랑스혁명을 보편사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자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득세할 때, 그것은 실증적인 사실의 고집스러운 진실이 아니라 순수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인 조작이라 할 수 있다. 서글픈 일이지만 오늘날 역사 서술에서의 수정주의는 그런 이데올로기적 조작을 사실의 힘으로 강변하며 너스레를 떠는 데 여념이 없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은 현실을 허구적 진실을 통해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현실을 보라!”라는 주문을 되뇌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두고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제기했을 때 이데올로그들이 전형적으로 비뚜름하게 반응하는 방식은 현실을 들먹이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원래 그런 거야.” 이데올로그의 상투적인 몸짓은 “현실을 보라”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실증적인 무게에 유의하라는 말은 이데올로기적 허위에 승복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갇혀있는 자들을 투명한 현실로 탈출시킨다는 핑계를 대고 이데올로기 중의 이데올로기인 현실이라는 이데올로기 혹은 실증적 세계라는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인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실증적으로 재현되어야할 대상이라고 역설할 때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한국전쟁은 누구의 잘못인가를 묻는 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시점을 택하느냐에 따라 분단과 그를 전후한 다양한 사태가 전혀 다른 사실로 재현된다는 것을 둘러싼 투쟁이다.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거부하고 현실에 눈을 뜨라고 말할 때, 이는 결국 현실은 주관적인 시점에 의해 매개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실증의 무게를 거론하며 이데올로기에 중독된 사고를 치료할 해독제를 처방할 때, 그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적 허위 그 자체이다.
이데올로그의 핵심적 특성은 존재하는 현실이 유일하게 옳은 현실이므로 그 현실 혹은 실증적 사태를 부인하는 것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는 일베가 실증적 무게를 중시하는 ‘팩트’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우익 이데올로그들인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런 탓인지 이념적인 것을 실증적인 것으로 털어내야 할 먼지처럼 취급하는 것이 유행인 지금, 먼 옛날 사르트르가 했던 미치광이 같은 발언은 새삼스럽기 짝이 없다. “모든 반공주의자는 개새끼”라는 그의 악명 높은 발언은 지금에서는 차라리 상쾌하게 들리기조차 한다. 이 발언에서 사르트르는 계몽된 자유주의자의 윤리적 미덕을 거부하는 ‘꼴통’처럼 보인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고 그러므로 공산주의를 악으로 보는 사람들과 공산주의를 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윤리적 상대주의에 참여하기를, 사르트르는 거절한다. 이는 사르트르가 은밀한 공산주의의 지지자였던 때문일까. 그런 가정을 따른다면 진짜 개새끼는 사르트르일 것이다. 자신의 가진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생각을 품은 이들을 악당이라고 비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생각한 것은 그런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었으리라.
반공주의는 공산주의, 이를테면 강제수용소를 버젓이 운영하면서도 착취 받는 자들의 낙원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그런 공산주의를 반박하고 거부하는 이념이나 정신적 자세가 아니다. 반공주의란 공산주의의 악덕을 핑계 삼아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세계가 가능한 유일한 현실임을 역설하는 윤리적, 정치적인 인식론적 시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공주의를 내세우는 자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윤리적 주장을 끌어들이면서 은연중에 인식론적인 곡예를 수행하였다.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의 악을 거부하는 시늉을 취하면서 자본주의적 현실의 불가역성, 그것의 유일한 실재성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윤리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을 감쪽같이 뒤섞는다. 따라서 반공주의의 사실주의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만이라고 말해야 옳다. 사르트르의 주장 역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멍청하고 맹목적인 두둔이 아니라 현실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유하는 악을 현실 사회주의에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윤리적 결백을 자랑하려는 자본의 윤리를 폭로하려했던 몸짓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앞선 인용한 주장에서 좌파가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는 엉뚱한 주장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이는 자신의 주장이 현실적임을 강변하려 뜬금없이 세대를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그는 “청년들의 상황과 의식의 변화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진보가 시급히 업데이트해야 할 지점”이라고 강변한다. 청년의 세대적 경험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런 세대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역사 인식의 변화 등은 정치가 현실에 맞춰 나아가기 위해 참조해야 할 황금률인 양 동원된다. 청년 세대의 자기의식은 정치가 반드시 좇아야 할 현실 그 자체의 상징으로 격상된다. 청년 세대의 눈높이에 맞춘 정치, 그들이 원하고 인식하는 바를 따르는 정치 운운의 주장은 정치 마케터들의 수사로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가 자신의 현실성을 가늠하기 위한 참조점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청년 세대일 때, 사정을 달리 헤아릴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실증의 무게를 그토록 옹호하는 이라면 청년에 대해서도 능히 실증적일 필요가 있다. 그럼 청년 세대는 객관적인 사실들의 세계로 규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현실 혹은 사실의 세계로 참고하는 청년이라는 대상의 현실은 기껏해야 여론조사 결과에 나타는 20대의 의식일 뿐이다. 결국 그는 사실을 자기의식으로 환원한다. 이는 너는 너가 생각하는 너라고 말하고서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사회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혼동하는 케케묵은 몸짓을 되풀이한다.
사회 속의 세대 혹은 사회의 예외로서의 청년 세대
“과잉소비가 있는 곳에서는 젊은 세대와 성인 세대 사이의 스펙타클적 대립이 기만적인 역할들 중의 으뜸이 된다. 이것이 기만적인 것은 성인-삶의 주인-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젊음-존재하는 것의 변화-은 현재 젊은 사람들의 특성이 결코 아닌 경제체제의 특성-자본주의의 역동성-이기 때문이다. 지배하고 젊음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사물들(상품들)이다. 사물들이 서로 대결하면서 서로 대체하는 것이다.”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유재흥 옮김, 울력, 2014, 59쪽.
“젊은이에 대한 다른 형태의 구별은 계급지배나 경제적 착취의 부차적인 결과가 아니라 현 체계의 가장 가공할만한 결과이다. 계급의 독점과 결정이 사회적인 의미작용의 제로항을 점점 더 제한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성인계급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비판적인 방식으로 코드의 이 비-장소의 자리를 차지한다. 도처에서 젊은이의 반란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비-장소가 모든 사회계층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 정치, 과학, 문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무책임이며, 말을 빼앗겼거나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반란이다.” J. 보드리야르, ‘생산의 거울’, 배영달 옮김, 백의, 1994, 132쪽.
인용한 글은 저 좋았던 1960-70년대의 청년 세대 담론의 극단적인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이란 이름으로 지칭되는 독특한 세대적 정체성은 세계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위치에 등극하였고 그를 둘러싸고 두 사람은 양립할 수 없는 주장을 내놓는다. 드보르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세대’란 것이 신종 스펙타클에 다름 아니라고 규정하며 세대라는 관념을 맹렬히 비난한다. 보드리야르는 ‘생산의 거울’에서 계급 및 생산의 관념론에 대립하는 갈등의 유물론을 역설하며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청년 세대의 반란에서 자본주의적 코드를 교란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한다. 둘의 주장은 상위(相違)를 이룬다. 이 때 흥미로운 점은 전자의 경우 세대를 전적으로 스펙타클 즉 표상으로 환원한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청년 세대를 물질적 현실성의 영역에 등록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사유를 이끈 주동기(leitmotif)라면 역사적 주체의 관념론, 현실이라는 지시대상의 최종적인 정박점으로서의 노동, 생산을 찾으려는 생산의 관념론에 맞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관념론에 대항하여 물질적 현실성을 담지하는 실재로서 청년을 비롯한 타자들을 내세운다.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반란과 모순의 표준이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준이 되는 혁명적인 주체도 없다. 따라서 체계를 생산과 착취의 양식을 문제 삼는 계급의 모순들과 체계를 코드로서 그리고 억압과 분리의 완전한 언어로서 문제 삼는 전복의 움직임을 변증법화하고 연결시키려는 희망은 역시 정치적인 의미지의 망상에 속한다.” J. 보드리야르, 앞의 글, 135쪽.
세대는 표상인가 현실인가. 거칠게 요약하자면 세대는 주관적인 의식인가 객관적인 현실인가. 둘은 이러한 세대를 둘러싼 아포리아를 둘러싸고 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간다. 오늘 우리 역시 똑같은 몸짓으로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번성했던 청년 세대 즉 68세대를 둘러싼 눈부신 신화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청년 세대의 이미지와는 지극히 거리가 먼 것임에 분명하다. 실업과 불완전고용은 물론 불안정한 삶으로부터 비롯된 고통을 호소하는 청년 세대의 비참은 청년 세대의 이미지를 뒤집어놓는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부성적 권위를 강제하는 제도에 반항하는 무정부적인 청년 세대는 이제 반값 등록금, 더 안정된 일자리를 요구하는 “찌질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를테면 반항적인 젊음으로 흠모되던 청년세대는 가련한 사회적 피해자로서의 청년세대란 모습으로 뒤집어졌다. 이는 세대가 처한 삶의 조건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바뀌어왔는지를 가리키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눈부시고 신났던 과거의 청년 세대와 불운하고 처량한 오늘날의 청년 세대의 대조적인 이미지는 바로 둘 사이에 놓인 역사적 시간의 거리를 나타낼 뿐인 셈이다. 그러나 그런 서술은 세대의 역사적인 초상을 대조하는 척 시늉하면서 세대 담론에 내장된 아포리아를 중화시켜 버린다. 둘은 전연 다른 청년 세대의 초상을 그려내는 척하지만 청년 세대라는 담론을 전유하면서 세대라는 담론이 발휘하는 기능을 공유한다. 그 기능이란 사회의 내적인 적대를 치환하는 것을 말한다.
특정한 연령대의 사회집단이 처한 삶의 조건을 열거한다고 해서 세대에 관한 충실한 표상을 이뤄냈다고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청년세대가 처한 조건과 그들의 의식적 특성이나 문화, 즉 청년세대란 주어에 딸린 술어적인 규정들을 열거하고 그것을 망라한다고 해서 세대를 규정하는 조건을 충분히 완료하였다고 말하기란 어렵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여 봤자 결정적인 질문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란 세대란 것이 있다면 왜 하필 청년 세대만이 있을 뿐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세대를 하나씩 열거하며 그 가운데 하나로서 청년세대를 꼽을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세대로서 주체화하는 세대는 청년 세대일 뿐이다. 세대라는 관점을 사회학적인 분류의 개념으로 사용해 다양한 연령대에 따라 세대들을 분류하고 그 가운데 하나의 종(種)으로서 청년 세대를 셈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연 문제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런 것이라면 청년 세대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 된다. 청년 세대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연령대에 따라 분류된 사회적 사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보았듯이 청년세대는 세대의 가짓수 중의 하나가 아니라 현실의 척도인 척 군림하기 때문이다.
청년 세대는 철학에서 말하는 “구별”에 해당되는 개념이 아니다. 혹은 약간의 철학적 사변을 동원한다면 청년 세대는 “즉자(卽自)”가 아니다. 청년 세대를 제외한 세대들은 단지 주어진 사실이지만 청년 세대는 자신을 주관화하고 자신을 다른 세대, 즉 기성세대와 대립시킨다. 따라서 연령대의 구별에 따라 만들어진 “세대”의 여러 가지 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청년은 느닷없이 자신을 “기성” 세대와 “대립”시킨다. 그리고 자신을 다른 세대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자체와 대립시키며 스스로를 주체화한다. 사실적 분류에 따른 한 가지 종인 청년 세대는 “우리 대 기성세대”라는 대립을 통해 자신을 주체화하면서 세대란 규정을 구별이 아닌 대립의 범주로 전환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세대라는 인구학적, 사회학적 코드를 청년 세대 대 사회라는 정치적 대립의 코드로 코드전환(trans-coding)한다. 그러므로 청년 세대라는 개념은 단순히 사회적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사변적인 조작을 수행한다. 이는 세대들 가운데 하나의 종으로서의 세대로서의 정체성,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세대적 정체성의 한 종에서 출발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다른 세대와 구별되는 일종의 예외로서 스스로를 규정한다. 청년 세대는 사회 ‘속(內)’의 세대인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벗어난 세대,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빼낸 채 자신을 사회와 대립시키는 세대이다. 유년, 청년, 성인, 노년 세대 등으로 이뤄진 세대의 종목 가운데 하나인 청년 세대는 자신을 세대의 종류 가운데 하나라는 위치로부터 벗어나 자신과 사회 자체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청년 세대는 다른 세대들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와 동일시된 “기성세대”와 자신을 대립시킨다. 그것이 “88만원 세대”이든 “오포세대”, “사토리 세대”, “달관 세대”,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아니면 앞서 보았던 전 시대의 “68세대”이든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들이 처한 객관적인 조건이 아무리 다르다해도 그들은 동일한 속성을 공유한다. 그들은 사회의 대립항인 한에서 세대이다. 사회의 내부 혹은 사회의 부분이 아니라 반사회적인 실재가 청년세대인 것이다.
이는 세대론이 왜 아포리아인가를 설명해준다. 세대론은 사회학적인 현실 개념인가 아니면 주관적 심리학에 속하는가. 세대에 관한 서술은 언제나 이 두 개의 극 사이에서 진동한다. 청년세대는 두 개의 위치를 동시에 점할 수 없다. 아니 둘을 종합하거나 중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대가 처한 객관적인 현실을 설명할 때 세대는 순전히 사회학적인 사실로 환원될 수 있다. 그렇지만 세대의 의식, 습속, 생활양식, 문화적 스타일 등을 통해 세대를 다른 세대와의 대립물로 내세울 때 때 청년세대는 주관적 심리의 세계로 이동한다. 그런데 이 때 주관적인 심리의 세계란 사회적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일종의 사변적인 조작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세대는 세대로서의 자기의식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인 세대의 문화적 정체성이란 말은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상하게 들린다. 노인이라는 세대적 위치, 그들의 생물학적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의식을 가정하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지만 청년 세대의 경우엔 사태가 다르다. 그의 사회적 실존과 그들이 가지는 의식 또는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알려진 것 사이에는 언제나 전자로부터 후자를 도출하기 어렵게 만드는 틈새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틈새가 다른 사회 “속의” 세대들과 사회와 자신을 대립시키는 청년 세대를 차별화시키는 결정적인 특성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차이 혹은 구별을 나타내는 개념인 세대라는 개념이 청년이란 낱말과 만날 때 그것은 인구학적인 사실이 아니라 문화적이면서 정치적인 반향을 갖는 개념으로 전환하고 만다. 이 때문에 우리는 청년 세대에 주의하게 된다. 청년 세대는 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사회의 내적 모순이 표상되는 “사회 속의 외부”이기 때문이다.
앞의 인용으로 돌아가 보자. 드보르는 세대의 이미지를 스펙타클의 하나로 규탄한다. 드보르의 말을 빌자면 “스펙타클은 이미지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이다. 혹은 그의 재치 있는 표현을 빌자면 “스펙타클은 철학을 현실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철학화한다.” 청년 세대라는 스펙타클도 역시 그런 것일지 모른다. 스펙타클이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사회적 관계라고 할 때 이는 청년세대란 스펙타클 역시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 혹은 청년 세대란 표상은 현실 자체를 철학화, 즉 현실 자체가 세대 간의 관계인 것처럼 추상화한다. 현실에 대한 표상은 그것이 표상하려고 하는 세계를 전제한다. 혹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런 전제를 구성한다. 그렇게 구성된 세계가 바로 청년세대 대 기성세대, 청년세대 대 나쁜 현실 간의 관계로 구축된 세계이다. 따라서 드보르가 젊음의 스펙타클을 거부하자는 요구를 납득할 수 있다. 그는 청년세대란 기표가 항상 사회적 적대 혹은 모순을 치환하는 역할을 한다고 비난한다. 젊은이라는 주체는 그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물신화된 주체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이 철학화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데 이르지는 못한다. 그는 청년 세대는 허위적인 주체가 아니라 현실의 허위성을 비판하려 만들어진 불가피한 역사적 허구라는 것을 부인하는데 급급하다.
그렇다면 드보르와 청년세대의 반란을 적극 옹호하는 보드리야르의 견해를 대조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평생 생산, 노동, 계급이라는 초월적인 기의, 자본주의에서 모든 의미의 형이상학적인 토대를 거부할 것을 요구한 철학자였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사유를 배경으로 의미작용을 규제하는 지배적인 코드로부터 벗어난 것,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의미작용의 제로항”을 대표하며 자본주의적 교환의 코드 바깥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청년 세대와 그들의 반란을 규정한다. 그렇지만 이 때 보드리야르는 모든 실체의 관념론을 거부하자는 자신의 좌우명에서 벗어나 청년세대를 실체화하고 만다. 그는 청년세대를 자본주의적 교환의 코드, 기호가치의 코드로부터 벗어난 타자로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논리를 배반한다. 그는 자본제적 교환이 억압하고 제거한 상징 교환(symbolic exchange), 즉 증여나 선물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 바 있던 교환의 원리를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청년 세대의 삶을 심미화한다. 이는 청년 세대 스스로가 자신을 자본주의 사회의 “야만인”, 자본주의적 소외로부터 벗어난 직접적인 쾌락과 욕망을 실현하는 삶으로서 자기 세대의 삶을 상상하였을 때 동원하던 인류학적인 신화를 고스란히 베낀다. 그러므로 눈곱만큼의 관념론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보드리야르의 포부는 세대의 관념론적 인간학으로 뒷걸음질치고 급기야 평범한 세대의 사회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주장에 대해 너무 인색하게 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세대를 다양한 세대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사회의 타자, 다시 그의 말을 빌자면 사회의 “비-장소”로서 인식하려 했다는 점에서 청년 세대의 저항을 사회학적 “세대문제”로 환원하는 유혹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청년세대를 사회적 적대를 떠맡는 주체-객체로서 실체화하여 버리고 만다. 청년세대는 연령, 생존조건, 문화적 취향, 생활방식 등의 구구한 술어적인 규정에서 도출되는 범주가 아니라는 것을 그 역시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내쫓았던 청년세대의 비규정성은 그가 “말을 빼앗겼거나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반란”이라고 말하는데서 나타나듯이 청년세대의 인간학적 속성이 되어 슬그머니 뒷문으로 들어오고야 만다.
세대의 리얼리즘을 넘어서기
그렇다면 청년 세대의 예외적인 지위, 세대이면서 동시에 비(非)세대이기도 한 청년 세대의 정체성은 사회적 사실의 세계에 속한 집단이면서 동시에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주관성으로서의 청년 세대라는 규정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아도르노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글인 『사회학과 심리학』에서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은 아포리아를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글의 제목처럼 사회학과 심리학은 통합되어야 하면서도 동시에 통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아포리아이다.
“사회학과 심리학의 분리는 허위이면서 또한 동시에 진실이다. 허위인 까닭은 그러한 분리가 전문가들로 하여금 둘이 분리된다는 사실에 의해서조차 요구되는 총체성에 대한 인식의 포기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진실인 이유는 그러한 분리가 개념을 통한 성급한 통일을 꾀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균열을 비타협적으로 기록하는 한 기 때문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사회학은 끊임없는 주관화의 경향에도 불구하고(막스 베버에서조차) 사회적 과정의 객관적 계기를 시야에서 놓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회학은 주체나 그의 자발적 충동을 완고하게 무시하려 들수록 오직 물화된, 유사-과학적인 찌꺼기(caput mortuum)와만 관계하게 된다. 그 때문에 과학의 이상이나 방법론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나타나지만 그러한 경향은 영원히 사회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엄밀한 객관성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적 절차를 통해 이미 매개되어 있는 최종적인 산물-여러 영역들과 요인들로 이뤄진-을 마치 실재적, 무매개적 대상인 양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는 사회가 빠진 사회학이며 사람들이 스스로와 두절되어 버린 상황의 복사판이다.” Th. W. Adorno, Sociology and Psychology, New Left Review 46, 1967. p. 78. F. 제임슨, ‘후기 마르크스주의’, 김유동 옮김, 한길사, 2000, 116-7쪽에서 재인용(번역은 수정).
여기에서 아도르노는 사회학과 심리학을 통합하거나 중재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렇게 둘을 조정하려고 시도할 때, 심리학(여기에서 아도르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다)은 통속적인 사회심리학 혹은 자아심리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자아심리학은 사회의 비합리성을 고지하는 무의식을 제거한다. 무의식은 의식적인 자아가 성립하기 위해 억압하여야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는 심적 과정의 두 가지 영역 사이의 ‘외재적’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적대 관계이고 이는 프로이트의 발견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쟁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프로이드는 수많은 심리학자 가운데 한 명에 그치고 만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은 반(反)-심리학이다. 그것은 심리현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 억압된 것의 귀환, 충동, 응축, 전치 등의 개념들이 알려주듯이) 그가 추적하는 심리적 역동은 자족적인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투쟁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도르노가 프로이드의 주장을 빌어 말하는 것처럼 정신‘종합’(psychosynthesis)이 아니라 정신’분석’(psychoanalysis) 만이 가능한 이유이다. “종합은 분리된 계기들을 그 연관성 속에서 결합하는 개별 사유행위가 아니라 주도적인 최상의 이념으로서 비판받아야 한다. 그런데 종합의 개념은 일반적 어법으로는 분석에 맞선 구성(Aufbau)으로서, 아마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 반대되는 이른바 정신종합이라는 것을 고안해냄으로써 가장 역겹게 나타났을 취지를 명백히 지니게 되었다.” Th. W.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1999, 233쪽. 다음에서의 정신종합에 대한 비판적 언급 역시 참조하라. Th. W. Adorno, Sociology and Psychology(part II), New Left Review 47, 1968, pp. 83-4.
심리 현상은 사실들의 전체로서 종합되기가 불가능하다. 이는 계급적 사회관계에 관한 ‘일반 이론’(아도르노라면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이라고 불렀을)을 통해 ‘계급투쟁’의 본질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급적) 사회관계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사실들의 관계로서 재현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의 배치를 규정하는 내적 적대는 그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숱한 배리(背理), 즉 경험적인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인 의식이나 선택 사이에서 나타나는 괴리, 이를테면 왜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들이 나치즘을 지지했는지, 왜 오늘날 미국의 노동자들이 ‘티파티’를 지지하고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국민전선’을 지지하는지, 청년세대들이 우경화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의 계급적 상태에 대한 의식의 왜곡, 자신의 객관적 상태에 대한 무지라는 변변찮은 도덕적인 비판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비난받는 허위의식은 외부에서 부과된 기만적인 의식이 아니라 내면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의식이다. 그런 점을 밝히지 못할 때 어떤 설명도 허술하고 오류에 머문다. 이것이 정신분석이 의식의 불가능성에 관한 이론이듯이 계급투쟁(혹은 이 말이 거북하다면 자본주의적 적대)이 계급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론이기도 한 이유이다. 계급이 사회학적 분류의 개념이라면 계급투쟁에서의 계급은 그런 실정적인(positive) 사실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자신의 동일성을 확보하게 되는 비대칭적인 항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 이는 지젝 같은 철학자가 수시로 라캉의 성 관계는 없다는 공식을 변주하면서 계급 관계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분석인가 종합인가. 그 물음은 전체를 조율하는 일반적이고 근원적인 원리가 있는가 아니면 모순을 통해 작동하는 우연적인 대립의 역사적 관계들이 있을 뿐인가를 묻는 것이다. 정신종합이 아니라 정신분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은 자신을 개인적 주체로 정립할 때 따르는 적대가 항상 구체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성관계는 없다는 말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초월적 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관계란 서로의 비대칭적인 모순을 조정하려는 안타깝고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는 세대론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청년 세대와 나머지 세대 즉 청년 세대와 기성세대의 불화란 사회적 적대가 나타나는 증상의 종류이다. 세대적 정체성이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내적 적대를 표상하기 위해 동원되는 역사적인 표상으로 작용한다. 청년세대의 저항과 반란의 아이콘이든 아니면 불운과 좌절의 아이콘이든 다르지 않다. 청년 세대는 세대라는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을 빌어 적대를 구체화하려 애쓴다. 자본주의의 내적 적대는 구체적인 실재로서의 세대 간 갈등이란 외적 적대로 자신을 규정할 수도 있다. 이 점이 세대 갈등의 강점과 약점을 규정한다. 자본주의의 내적 적대는 보편적이지만 세대 대립은 역사적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세적이다. 그것이 세대 대립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특정한 조건들이 결합하여 작용한 역사적 효과일 뿐이다.
세대 투쟁? 그것은 계급투쟁이 전치(傳置)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단,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진다면.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럼없이 세대 투쟁을 인정할 순간이 있음을 안다. 세대를 진정한 주체인 프롤레타리아를 감추고 청년을 그 주체로 대신하기에 허위적 표상이라고 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런 발상은 모순이 투명하게 자신을 표상한다는 관념론적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대의 선택이 옳은 것 역시 아니다. 세대 투쟁을 정당한 투쟁의 형태라고 맹목적으로 인정하는 것 역시 형편없는 생각이다. 특히 오늘날 세대는 더 이상 효과적으로 사회적 적대를 은유하지 못한다. 계급투쟁을 개인적 삶의 서사로 치환하였던 성장 소설의 세계 같은 것은 몰락한 지 오래이다. 이에 대한 분석은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F. 모레티, ‘세상의 이치: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 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
다시 말해 계통발생을 개체발생으로 서사화하는, 역사적 시대에 특수한 주체성의 형성을 청년의 성장 서사로 대신하는 문화적 표상은 이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청년은 이제 누구나 꿰찰 수 있고 모방할 수 있는 문화적 라이프스타일이 되어 소비된다. 젊음은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는 수많은 상품들의 상징적 명칭이다. 그런 판국에 젊음을 저항의 기표로 간주하는 것은 젊음 자체에서 저항적인 속성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여기는 물신주의에 불과하다. 젊음은 도전이고 반항이며 혁신이라는 헛소리를 되뇌는 TV 광고를 젊음은 겉늙은 낯빛을 띤 채 물끄러미 바라본다.
청년세대 담론의 리얼리즘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때 청년세대는 사회학적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는 인구학자의 머릿속에서 상상된 상투적인 통계적 사실의 묶음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세대란 어떤 문화나 의식으로 환원할 수도 없다. 특정한 사회적 사실로부터 연역되거나 도출될 수 없다는 점에서 청년 세대를 비(非)-세대로서의 세대로 규정하고 그들의 특별한 위치를 신화화하는 것은 지나간 역사적 시대의 청년문화의 신화를 지루하게 우려먹는 것에 불과하다. 청년 세대가 사회 내부의 외부로서 작용하는 독특한 역할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는 젊음은 그 자체 반항이라는 터무니없는 그리고 이미 효력 잃은 신화를 반복하는 데 머문다.
청년 세대 담론이 지속적으로 매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사회의 내적 적대가 주체화되는 독특한 방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주체화의 논리를 제외하면 세대 담론에서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그런 주체화의 논리와 거리를 두게 된다면 청년 세대는 고작해야 인구학적 사실로 환원되고 만다. 그리고 이는 예외적 세대로서의 위치를 반납하고 세대의 종 가운데 하나로 복귀한다.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청년 세대의 객관적 비참에 관한 분석과 서사가 꾸역꾸역 쏟아지지만 또한 우리는 의기소침하고 또한 반동적이기까지 한 청년 세대의 자화상 역시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청년 세대론의 역사적인 효력이 사실상 종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청년 세대 담론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보편성을 청년 세대라는 특수한 주체의 잠재성과 연결하려 애쓴다. 그렇지만 청년세대는 그러한 주체화의 가능성을 더 이상 떠맡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청춘이 희망이다”란 담론도 허위지만 “20대는 개새끼”란 담론도 허위이다. 그것이 허위인 이유는 청년세대에서 사회적 적대를 주체화하는 가능성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음을 두 주장 모두 부인하기 때문이다. 청년세대란 낱말에 깃든 윤리적 효력은 이제 소멸되었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청년 세대는 연령의 분류학과 같은 인구학적 범주로는 생명을 유지하겠지만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개념으로서는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아니다. 사회적 적대를 주체화하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누구인가는 항상 역사적 시간 속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_계간 문학선 2015년 가을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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