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가족: 금융화된 세계에서의 가족과 정동



양희은-알캉달캉

개인의 합리적 경제행동은 분명 경제적 계산과 이윤동기 이상의 어떤 무엇에서 비롯된다.
… 두려움(fear)이야말로 객관적 합리성의 보다 결정적인 주관적 동기를 이룬다.
그것은 매개된다.
오늘날 경제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라고 해서 당장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낙오자(déclassé)의 운명은 곧 드러난다.
… 경제적 행동 배후에 놓인 사회적 승인들이 오랜 동안 다른 금기들과 함께 내면화시켰던, 그리고 개인들 위에 표지를 남겨왔던, 쫓겨남에 대한 두려움.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이런 두려움은 제2의 자연이 된다.
그것은 철학이 오염시키지 않은 채 사용될 때 낱말 ‘존재(existence)’란 것이,
살아있음이라는 사실과 경제적 과정에서
자기보전의 가능성을 똑같이 의미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Th. W. 아도르노) Th. W. Adorno, Sociology and Psychology, New Left Review, 46, November-December, 1967, p. 71.(강조는 원저자).

우울한 가족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정리해고를 겪게 된 어느 여성노동자와 그의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겪은, 이틀 남짓의 시간에 관한 영화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부당한 일인 듯 보인다. 이는 영화의 화면이 여느 ‘사회적’ 사실로 환원할 수 없는 그녀의 감정적 격동을 제시하려 애쓴다는 점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것을 전하는 데 진력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비가시적이지만 또한 가시적이게 된 어떤 정동에 대한 영화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다르덴 형제의 특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롱테이크로 시작한다. 그것은 영화적 서사가 전개될 배경을 암시하는, 영화에서 흔히 설정 숏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는 역할과는 다르다. 설정숏은 영화적 서사가 전개되는 배경을 이해하게 하는 여러 가지 정보를 환유적으로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다르덴 영화에서 우리가 제공받는 것은 그런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영화에서 보게 되고 체험하게 될 것이 어떤 심리적 수수께끼임을 느닷없이 통보받는다.

우리는 무언가에 쫓기듯 초조한 낯빛으로 우왕좌왕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영화의 시작을 맞이한다. 그리고 곧 우리는 그녀의 이름은 산드라이며 자신이 일하던 태양열판 제조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처지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녀의 해고는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하는 것 등 가족의 생계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회사는 병가 끝에 복직하려는 그녀를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그녀를 해고하는 대신 두둑한 보너스를 받을 것인지를, 그녀의 직장동료들에게 택하도록 한 뒤였다. 회사는 아시아 지역의 회사들과 경쟁에 밀려 고전을 겪고 있기 때문에 둘 모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장의 지시로 그녀를 자를 것이라는 작업반장의 말에 따라 그녀의 해고를 받아들이고 보너스를 택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다시 투표를 통해 그녀를 택할지 보너스를 택할지 결정할 투표를 하게 된다. 그리고 산드라는 자신을 일하게 해 달라고 과거의 직장 동료들을 설득한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고작해야 하루 남짓의 시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의 종결부에 이른다. 투표는 끝났고 산드라의 옛 동료들은 그녀의 해고를 택한다. 계약직이므로, 일 년치 전기세를 낼만한 큰돈이므로, 아니면 집수리 비용에 큰 몫을 하므로 등의 이유로 보너스가 절박했던 이들은, 고민 끝에 선택을 한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찬반이 동수였고 규정에 따라 그녀는 해고되어야 할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사장은 그녀를 부르고 계약직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그를 대신해 그녀를 그 자리에 앉히겠다고 제안한다. 산드라는 이를 거절한다. 재계약을 안 하는 것이지 해고는 아니라는 사장의 말에, 그녀는 그것이 해고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회사를 떠난다. 이 때 그녀는 단호한 윤리적 평결을 내린다. 자신의 일자리를 위해 다른 계약직 노동자를 버리는 것은 해고이고 그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평결에 의해 직장에서 쫓겨날 처지에 이르게 되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그 위치를 뒤집는다. 평결의 대상이었던 처지에서 그녀는 평결의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과의 휴대전화 통화에서 ‘행복하다’는 말을 뱉는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우리는 신경안정제에 의지한 채 제어할 수 없는 우울과 심화에 허우적대는 한 인물의 모습으로부터 출발해 스스로 행복하다고 선언한 후 뚜벅뚜벅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의 풍경으로 끝나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에서 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윤리적인 유토피아를 목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윤리적 유토피아, 불안과 좌절의 정동에 휘둘리다 마침내 자신의 자유를 되찾고 그것을 제압하는 심상찮은 정동의 드라마. 그렇지만 그 유토피아는 아주 희박하고 순간적인 것일 뿐이다. 정작 우리가 압도되어 있는 정동의 세계는 그와 극히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영화에서 재현되는 노동자계급의 가족적 삶을 짓누르는 ‘경제적 정동(economic affect)’ 혹은 “금융적 정동(financial affect)” M. Konings, Financial Affect, Distinktion: Scanadinavia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 15, No. 1, 2014.
은 기괴한 자본주의적 일상생활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우리는 다음에서 금융화된 경제적 삶의 정동을 탐색할 것이다. 금융화(financialization)란 낯선 용어는 이제 경제학을 넘어 철학이나 문화연구, 사회학을 비롯한 숱한 영역에서 회자되는 낱말이 되었다. 이제 금융화란 개념은 더 이상 경제 현실(economic reality)의 변화를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인화의 윤리에서부터 심적 과정에 대한 해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러한 논의들을 참조하면서 한국 사회에서의 금융화, 특히 가족의 경제적 삶과 그에 연루된 개인의 정동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금융화, 그 가운데서도 가족적 삶의 금융화란 가족의 경제적 삶이 금융이라는 격자를 통해 표상되고 규율되고 관리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가족 문제는 실은 돈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족에게서의 돈이란 오직 삶에 가용할 수단을 마련하기 위한, 마르크스 식의 표현을 빌자면 사용가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돈일뿐이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 소비에 가용되는 돈의 차원과 화폐의 자기증식으로서의 자본이라고 할 때의 돈의 차원은 다른 것이다. 이를 라파비차스는 ‘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로 구분하기도 한다. C. Lapavitsas, Social foundations of markets, money and credit,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03. Money as Money and Money as Capital in a Capitalist Economy, A. Saad-Filho, ed. Anti-Capitalism: A Marxist Introduction, London & Virginia, Pluto Press, 2012.

그렇지만 그것이 돈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한, 다시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상품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형태로서의 화폐라는 가치형태를 취하는 한, 돈은 요술을 부릴 수 있다. 그것이 돈인 한 돈을 통한 돈의 가치 증식의 가능성, 즉 소비를 위한 돈이 아니라 미래에 보다 많은 가치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가치로서의 돈으로서 둔갑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렇지만 이는 적어도 노동자의 임금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은 소비를 위한 재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금융화는 이를 획기적으로 변이시킨다. 그리고 이는 시간과 정동의 관계를 새롭게 엮고 짜면서 가족생활을 새로운 금융적 배치 속으로 운반한다. 신자유주의적 가족은 금융화된 가족으로 바뀌고 그 가족은 불안하기만 하다.
2. 가계의 금융화, 소득의 수탈
금융화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리고 이는 단지 경제적 현상에 한정되지 않는다. 윤리적, 문화적, 철학적 사변의 쟁점으로서 나아가 정신분석을 비롯한 심리를 둘러싼 토론과 쟁점에서도 금융화를 둘러싼 논의는 무성하고 또한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모두 소개하고 요약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에서 금융화에 관한 논의는 희박하다. 한국자본주의가 금융화되었는가를 둘러싼 비판적 경제학자들 내부의 논쟁을 제외한다면 비경제학 분야에서 금융화와 문화의 관계를 둘러싼 주제에 관한 성과로는 강내희의 저작이 유일하다 할 수 있다. 강내희,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문화정치경제’, 문화과학사, 2014.
그럼에도 요약하자면 금융화는 현실에 대한 술어적인 규정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현재의 역사적 시대에서 조직되고 전개되는 모습을 규정하기 위한 정치적인 원근법이라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화란 금융이라는 경험적 대상 세계(은행, 투자은행, 국가, 도소매업자, 개인 소비자, 부채와 선물, 옵션, 파생상품, 월스트리트와 시티, 여의도 등)와 주체(정부, 기업, 금융업자, 노동자, 여성, 대중매체 등), 제도(국제금융기구, 중앙은행, 역외금융, 그림자금융, 미소금융, 금융 관련 시민운동, 여성주의 운동조직 등) 등을 어떻게 규정하고 그들 사이의 연관을 어떻게 분석, 표상할 것인가의 문제만으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융은 자본주의가 자신을 실현하는 다양한 요인들 사이의 관련과 그 배치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끄는 쟁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가계, 지역사회, 공동체, 국가는 물론 국제관계에 이르는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현실이 조직되고 변형되는 계기를 파악하도록 한다. 아래에서의 금융화에 관련한 서술은 상당 부분 필자의 다른 글을 참조한 것이다. 서동진, “착취의 회계학: 금융화와 일상생활 속의 신용물신주의”, ‘다른 삶은 가능한가: 마르크스주의와 일상의 변혁’,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회 엮음, 한울아카데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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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족의 돈: 화폐의 새로운 이미지
2015년 6월 금융감독원은, 마침내 마지막 권을 발감함으로써, 수년간에 걸친 <생애주기별 금융생활 가이드 북> 출간을 완료하였다. 가이드북은 2013년 7월 <생애주기별 금융생활 가이드 북 1: 미혼기 편>을 발간하기 시작해 2015년 6월 마지막 권을 발간함으로써 모두 완간되었다.
이 실용적인 책자를 간행하게 된 목적은, 발간사에서 언급하듯이, “성인 대상 금융교육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국내 금융현실에 적합한 한국형 생애주기별(미혼기, 신혼기, 자녀출산기 및 양육기, 자녀학령기, 자녀성년기, 자녀독립기 및 은퇴기) 라이프이벤트·재무목표·금융교육 성취기준 등으로 구성된 <생애주기별 금융교육 가이드라인>을 개발” “발간사”, <생애주기별 금융생활 가이드 북 5: 은퇴기 편>, 금융감독원, 2015.
하고 이를 통해 성인층의 금융 교육을 체계화하고 또한 이의 질적인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여기에서 국민이라는 주체를 ‘금융소비자’라는 범주의 주체와 등치하고 이제 새로운 이름을 걸친 그 주체에게 말을 건넨다. 국민적 주체란 이제 금융 소비자란 경제적이면서 문화적인 주체의 다르지 않은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 생활의 지침서는 다양한 재무적(financial), 윤리적, 정서적 규범을 내놓는다.
그렇지만 국민-주체와 금융-소비자 주체 사이에 놓인 거리는 상당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거리를 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의 전환 이후 형성된 통치 대상으로의 주체와 이전의 종속적인 발전 국가의 국민 주체 사이에 놓인 역사적, 정치적 차이로 식별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민=금융소비자라는 정체성의 등식은 금융화된 자본주의적 경제에서의 삶과 그것을 규율하는 정치적, 문화적 원리를 응축한다. <가이드북>은 추상적인 정치적인 주체(이를 테면 주권적인 정치적 주체이든 아니면 연대의 원리에 따라 결속된 ‘사회(Society)’의 성원으로서의 사회국가(social state) 국민-사회-국가의 특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E.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재발명’,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꾸리에, 2015.
의 일원(‘인구(population)’란 이름으로 지칭되기도 하고 혹은 푸코의 표현을 빌자면 생명정치적(bio-political) 주체 M. 푸코, ‘안전, 영토, 인구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로 불러도 좋을)가 아닌, 금융소비자라는 새로운 주체에게 말을 건넨다. 이때 금융소비자란 단순히 금융상품을 구매하고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인물이 아니다. 이를테면 앞서 인용한 <가이드북>은 이렇게 말을 건넨다.
“많은 사람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이후 노년기를 맞이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금융의사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전 생애에 걸쳐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직면할 수 있는 여러 금융문제에 대비해 미리 계획을 세우고, 현명한 의사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국민의 금융역량 향상을 위한 금융교육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 아무쪼록 이 책자가 널리 활용됨으로써 각 생애단계별 맞춤형 금융교육 기회가 보다 폭넓게 제공되고, 모든 국민이 평생에 걸쳐 안정된 금융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강조는 인용자) 앞의 글.
여기에서 국민이라는 주체에게 말을 건네지만 이때의 국민이란 일생동안 숱한 “금융 의사결정”을 내리는 개별화된 인격적 주체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세금을 납부하고 징집에 따르고 국가대표팀의 승부에 열광하는 민족 혹은 국민 주체와는 다른 주체임에 분명하다. 금융소비자로서의 국민은 ‘상상의 공동체’에 소속된 주체도 아니고 연대의 원리에 따라 공동의 생존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성원으로서의 성원 주체도 아니다. 이 주체는 자신의 생존과 재생산을 금융 혹은 금융적 실천이 제공하는 표상(생애주기, 신용, 금융이해력(financial literacy) 등)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금융적 수단과 상품들(세금우대, 연말정산, 연금, 신용카드, 저축, 펀드, 보험, 휴대전화 등)을 효과적으로 소비하고 활용함으로써 안녕과 안전을 도모해야하는 주체이다. 나아가 금융소비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라면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인생의 흐름에 따라 밀려오는 여러 가지 재무적 과업들”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라이프이벤트”를 관리하여야 하는 기업가적 주체(entrepreneurial subject)이다. 신자유주의의 지배적인 주체성의 유형으로서 기업가적 주체의 형성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
그렇지만 여기에서의 기업가적 주체란 자신의 금융 실천을 ‘사업(enterprise)’으로서 간주하고 그것을 모험이자 도전이라 생각하며 나아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위험(risk)을 적극 감수하며 살아가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기업가적 주체가 ‘자기(self)’를 윤리적으로 형성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금융소비자 역시 나름의 윤리적 정체성을 형성하여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했던 <가이드북>을 금융화된 현실에 대처하면서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인 교본으로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재무주치의, 재무전문가, 재무컨설턴트 등 숱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은 금융이해력과 관련한 지식, 노하우를 비롯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실용적인 기술적 지식을 제공하는데 머물지 않고 재무적 문제에 직면한 이들의 삶을 윤리적으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적극 담당한다. 이는 개인과 가족의 재무설계에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를 통해 금융소비자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나아가 이는 ‘금융이해력’을 높임으로써 똑똑한 금융주체가 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적극 지키는 똑똑한 시민을 길러 내고자 한다. 이는 시민운동으로서의 금융이해력 기르기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을 보라. 김주원, ‘금융복지상담과 사회적인 것의 (재)형성 : 사회적 기업 E의 금융복지상담사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4. 오승민, ‘가치투자의 수행성과 대중투자문화의 형성’,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5. 김주희, ‘한국 성매매 산업의 금융화와 여성 몸의 ‘담보화’ 과정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5.
수다한 시민운동단체는 ‘돈 문제’로 고민하는 시민들이 처한 상태를 ‘돈맹’, ‘금융맹’이라는 “맹(盲)(illiteracy)”으로 부르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또한 다양한 윤리적 결함을 교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재무주치의 분야의 스타이자 시민운동가로서 명성이 높은 제윤경의 대표적인 저작 가운데 하나인 ‘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가계부’에서 잘 드러난다. 제윤경, ‘불행한 재테크 행복한 가계부’, 티비, 2007. 그렇지만 이는 제윤경이 독점하는 독특한 서사 전략은 아니다. 이는 정부기관이든 아니면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나 시민운동이든 모두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금융에 의해 매개된 삶의 전기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돈맹, 금융맹에 해당되는 이의 인격적 정체성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그녀가 제시하는 “돈맹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돈맹에 해당되는 이들은 크게 6가지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그 6가지 유형의 돈맹은 돈에 대한 지식 혹은 이해력(literacy)로 환원할 수 없는 심리적 기질을 통해 정의된다.
이를테면 “대박형 돈맹”은 “대박에 대한 환상 속에 살고” 있어 “가계에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데도 상황판단은 미룬 채, 특히 부동산에 무모하게 투자하는” 이이다. 한편 “귀찮이형 돈맹”은 “매사에 돈돈하며 연연해하는 것이 싫고 돈관리에까지 부지런해야 하는 것은 너무 피곤하다고” 여기는 이이다. 그리고 “미래에 막연하게 낙관하면서 준비를 소홀히 하는” “낙관형 돈맹”도 있고, “돈에 연연해하는 최근의 세태를 속물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가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소외감을 느끼”는 “초연형 돈맹”도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돈맹의 유형을 규정할 때 우리는 그녀가 서사화하는 각 인물의 유형은 타산적인 공리적 주체이기는커녕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반성하는 윤리적 주체의 모습뿐 아니라 그 안에 독특한 감정적 투자를 행하는 정동적 주체의 모습 역시 바라보게 된다. 각각의 돈맹은 ‘무모’하고, ‘피곤해하며’ ‘낙관적’이며, ‘소외감을 느끼는’ 등의 감정적인 처지에 놓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앞의 글, 24-7쪽.(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그녀가 돈맹이라는 인물형(character)으로 제시하는 주체는 곧 감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림 한국재무설계센터의 “나의 재테크 진단과 분석”
(http://jemuplan.com/fn_test/test.asp)
그렇기 때문에 위의 그림이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듯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독특한 나의 “성향”, 정동적인 기질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재현된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인생의 재무적 과업들은 자신의 삶에 들이닥치는 ‘리스크’이기에 이를 제압하고 조정하기 위한 위험감수적인 모험적 태도는 언제나 그에 대처하는 다양한 정동과 짝을 이룬다. 그것은 이미 보았듯 초연함, 무모함, 피곤함, 소외감 등의 다양한 감정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금융화란 자신의 물질적 생존을 조직하도록 이끄는 데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경제적 (비)합리성((ir)rationality)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데올로기적 담화에서 가장 약삭빠른 점은 실재의 대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데 알고 보면 우리를 가차 없이 ‘감정(the emotive)’으로 돌려보낸다는 데에 있다. 이데올로기적 명제는 사태를 지칭하고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사태를 지칭하고 묘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사이비’ 명제 또는 ‘가상’ 명제를 보다 근본적인 ‘감정적’ 발언으로 해독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이데올로기적 언어는 소망하는 언어, 저주하는 언어, 두려워하는 언어, 욕하는 언어, 찬양하는 언어다. ‘진술적(constative)’ 발언처럼 보이는 것, 이를테면 ‘아일랜드인은 영국인들보다 열등하다’라는 발언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일랜드인들은 아일랜드로 갔으면 좋겠다’와 같은 ‘수행적(performative)’ 발언을 고려해야 한다.” 테리 이글턴,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김정아 옮김, 이앤비플러스, 2012, p. 221.
이글턴은 이데올로기적 담화의 특성을 진술적(constantive) 발화인 척하는 감정적, 수행적 발화임을 꼬집는다. 그러나 이런 면모는 가족생활의 재무적 관리를 책임진다고 자처하는 (과학적, 윤리적) 지식에서도 여지없이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동이라는 개념이 적극적으로 강조하듯이 금융화에 연루된 다양한 감정을 심리적 개인의 주관성으로 환원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P. T. Clough, The Affective Thrn: Political Economy, Biomedia, and Bodies, The affect theory reader, ed. M. Gregg & G. J. Seigworth,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0. 심리적 개인의 주관성으로서의 감정(emotion)과 구분되는 정동의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서동진, “금융화된 주체의 증오와 환멸 그리고 분노”, ‘감성사회’, 서동진 외, 글항아리, 2014.

이를테면 적금을 가입하러 은행에 들렸을 때 수익률이 높다고 권유하는 펀드에 가입할 때 따라야할 지침을 권유하는 재무주치의의 언표를 살펴보자. 펀드에 가입할 때 챙겨야 할 사항을 이야기하면서 제윤경은 펀드를 굴리는 자산운용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운용사의 투자철학’을 알아볼 것을 권한다.
“운용사마다 저마다의 투자철학이 있다. 그러므로 운용사를 선택할 때는 운용철학과 운용방침이 명확한 운용사를 골라야 하며, 일관성 있게 상품을 운용하는 회사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홈페이지에 실린 운용철학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국내M자산운용. 투자 의사결정 전 과정에서 ‘기본에 충실한 투자’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가치투자, 철저한 위험관리, 소수게임이라는 투자원칙을 설정하여 수익률의 안정성 및 지속성을 추구 … 가입하는 고객의 투자성향 또는 투자 기간에 따라 적절한 유형의 펀드를 선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놓은 수익을 위해서 위험(원금손실)을 감수할 수 있는 성향의 투자자라면 주식형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일정 시점 이후에 필요한 돈을 투자하는 경우 또는 안전한 투자를 원하는 투자라면 채권형 펀드가 바람직하다. … 옷의 소재와 색상이 다양하듯 펀드 스타일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 투자자는 옷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각자 자신의 성향에 맞는 스타일을 다양하게 선택해서 투자자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윤경, 앞의 책, 138-144쪽.
인용한 글에서 제윤경은 재무 설계와 관련한 조언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에서 그녀는 투자자와 금융기관(여기에서는 자산운용사)의 관계를 스타일의 매치로서 표상한다. 이 때 금융기관은 독특한 심리적인 개인인 양 표상된다. 운용사는 스스로의 ‘운용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가치투자를 우선하는 안정형이나 위험을 적극 감수하는 모험형과 같은 심리적인 유형으로 분류된다. 이는 투자자에게서도 동일하다. 펀드에 투자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패션에 비유된다. 패션에 비유되는 것은 펀드를 고르고 구성하는 것은 곧 스타일의 문제이다. 자신의 스타일을 반성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투자를 행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스타일이라는 용어로 치장된 개별적 심리적 성향과 마주한다. 수많은 금융적 실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펀드 투자에서 투자자를 특정한 심리적 성향으로 환원된 자기의 정체성과 짝을 맺는 것은 어쩌면 타산적이고 공리적인 합리성의 세계로서의 금융이라는 것과 어딘지 어긋나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금융적 실천을 직접적으로 심리적인 현상으로 환원하면서 그것의 ‘비합리성의 합리성’을 금융 분석의 제일원리로 채택하는 ‘행동금융학’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담화적 재현은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닐 것이다. 행동금융학은 경제가 억압하고 감금한 것으로서의 감정에서 벗어나 숫제 감정을 경제의 일차적인 동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행동금융학자로서 마침내 노벨상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실러의 저작들을 일단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R. 쉴러, ‘비이성적 과열’, 이강국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4. 행동금융학을 비롯한 오늘날 금융학 분야에서 과학적 표상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보라. L. 피오라몬티, ‘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 박지훈 옮김, 더좋은책, 2015. 이에 대한 간략한 논평으로는 서동진의 앞의 글을 참조하라.
그런데 여기에서 금융활동의 주체와 감정적 주체 사이에 상동성은 아닐 것이다. 앞 장에서 우리는 금융화가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임금 수탈인지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수탈은 방금 보았듯 가족생활의 금융화를 통해, 여성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의 개념을 빌자면 ‘사회적 재생산(social production)의 금융화’를 통해 전개되는 것이다. 금융적 실천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재무적인 지식, 기술, 수단, 의례 등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바로 가족임금이라는 이름으로 지급된 임금 소득을 통해 생명을 재생산하던 가족의 삶을 금융화하는 매개항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가족은 다양한 라이프이벤트와 화폐흐름을 교차하면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군집으로 표상된다. 그 결과 성인-남성-노동자-가장의 가족임금과 전업주부의 재생산노동(가사노동과 양육, 공양 등의 돌봄)을 통해 표상되던 발전국가 혹은 사회국가의 가족은 금융화된 가족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모습으로 표상되도록 강요당한다. 여성의 사회적 재생산의 금융화에 대한 논의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A. Roberts, Financing Social Reproduction, New Political Economy, No. 18, No. 1, 2013.
그리고 이제 모두 개인화된 화폐흐름을 통해 자기신의 화폐 소득을 자산으로서의 화폐로 상상한다. 또 이를 통해 미래의 화폐 흐름을 예상하고 자신의 생애를 상상하고 그로부터 비롯될 위험에 대처하여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이로부터 금융적 실천에 참여하는 주체는 독특한 정동적 주체의 모습으로 캐릭터화된다. 금융적 실천에 의해 생애주기로 분절된 삶의 궤적은 그에 상응하는 돈의 관리와 투자로 가시화된다. 이 모든 계기를 관통하는 것은 방금 보았듯이 삶의 위험을 적극적으로 감수하는 모험적인 기쁨과 유희를 즐기라는 요구와 그 주변을 집요하게 배회하는 근본적인 삶의 불안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장려되는 주체성의 모델과 결합된다. 기업가적인(entrepreneurial) 자아, 자기계발적인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돌보고 책임지라는 요구는 또한 제어할 수 없는 삶의 불안과 짝을 이룬다. 따라서 가족생활의 금융적인 배치(configuration)는 그에 조응하는 정동적 배치이기도 하다. 벌란트는 이를 신자유주의 시대의 공적인 감정(public feelings)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지만 벌란트를 비롯한 정동적 사회성의 분석은 인지적 지식의 세계에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범위를 제한한 하버마스와 달리 ‘체험’을 공공영역 나아가 대항공공영역의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하고 분석했던 네크트와 클루게의 선구적인 작업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O. Negt & A. Kluge, Public sphere and experience: toward an analysis of the bourgeois and proletarian public sphere, P. Labanyi et al., tran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오늘날 가족의 돈은 더 이상 소비를 위한 돈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미래의 소비를 위해 떼어내어 저축되어야 할 돈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소비를 위한 돈 역시 돈의 자기지시적인 규범, 돈을 통해 식별된 돈,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은 돈을 위한 돈이라는 규범에 종속된다. 우리는 긴요한 욕구의 만족보다는 그것이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기에 소비한다. 물론 소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돈이 아니라 저축을 통해 비축되는 돈 역시 주요한 몫을 차지하였던 것은 맞는 일이다. 그러나 그 때의 돈을 스스로 가치 증식하는 돈, 자본으로서의 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얼마간의 이자를 받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저축을 했다고 해도 그 때의 이자, 즉 불어난 돈이 저축 자체의 동기라 간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저축된 돈은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가족에서의 돈, 금융화된 가족생활에서의 돈, 투자(기)로서의 돈과는 사뭇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문화평론가인 러시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돈을 시간을 멈추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여기곤 한다. 심리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고전이 된 그의 책 ‘죽음의 부정’에서 은행잔고란 생존을 위한 정서적 대리물이라고 주장했다. 시간을 저축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돈을 저축한다는 것이다. 모아둔 시간은 그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모아둔 돈은 그 실체가 뚜렷하다. 소유가 누구였건, 날씨가 어떠했건, 어느 쪽이 전쟁에서 이겼건 황금은 변함없는 가치를 유지한다. 돈이 가치를 지녔던 것은 견고하고 지속이 가능해서였다.” D. 러시코프, ‘현재의 충격’, 박종성 외 옮김, 청림출판, 237쪽.

여기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두 가지 관념을 식별하게 된다. 먼저 시간과 돈의 관계이고 다음은 돈과 정동의 관계이다. 그는 견고하고 지속가능한 대상으로서의 돈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은행잔고를 생존을 위한 정서적 대리물이라고 말할 때 암시되는 저축된 돈과 정동의 관계를 가리킨다. 돈과 시간, 정동 사이의 관계란 점에서 오늘날 금융화된 가족의 돈은 전연 다른 역할을수행한다. 그리고 시간과 정동 그리고 돈 사이의 3항관계는 금융화된 세계, 그 가운데서도 중추적인 구실을 하게 될 가족생활을 지배하게 된다. 오늘날 발전된 나라들의 가계 대부분은 돈을 투자하고 관리하여야 할 대상으로 여기도록 종용받는다. 신용카드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고, 할부로 자동차와 휴대전화를 구매하며, 대출을 통해 주택을 마련하고, 확정기여형 연금 플랜이나 변액연금보험에 가입하거나 그리고 주식에 투자하고 실비보험에 가입하며 가족의 경제생활을 관리할 때, 가계는 이제 이전 시대의 자본주의에서의 “가정경제”처럼 더 이상 소비의 단위가 아니다. 알다시피 가정학(home economics)은 가정경제학이기도 하지만 또한 가족에 관한 특수한 역사적 시대의 사회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화된 가족생활은 이제 가정학 이후의 재무적 실천의 지식을 통해 표상되고 조절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가계의 특성을 살펴보며 이를 가족경제의 역사적 계보학적 분석과 연결하는 글로 다음을 참조하라. F. Allon, Home Economics: The Management of the Household as an Enterprise, Journal of Australian Political Economy, No. 68, 2011.
그것은 오늘날 전례 없는 금융적 실천이 실행되는 단위로 간주된다. 가계를 관리한다는 것은 수입과 소비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적절하게 소비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부에서의 화폐의 흐름을 예측하고 관리하는 일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가정경제는 이제 재무 설계와 관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식과 실천이 동원되고 실행되는 장(場)으로 전환된다. 더불어 개인과 가족 성원들이 겪게 될 인생사는 “생애주기”에서 비롯되는 숱한 “라이프이벤트”를 예측하고 이를 돈의 문제로 번역하는 일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가계의 재무적인 삶을 가시화하고 표상하며 나아가 관리하는 데 적합한 지식들이 끼어든다. 이는 흔히 돈맹(盲)이나 금융맹과 구분되는 금융 리터러시(financial literacy)이다. 그리고 보험, 연금, 펀드, 신용카드, 부동산 등의 것 즉 금융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단순히 경제적 생존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인권과 시민권의 문제로 여겨져 사회운동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성의 신용카드 발급을 여성평등 시민권 운동으로 조직했던 과거 미국 여성운동부터 오늘날 한국에서의 금융소비자 주권찾기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금융적 실천은 시민권을 내건다. 이를테면 어느 금융업자가 “월스트리트는 월마트처럼 되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면서 알려진 ‘금융의 민주화’란 표어는 가난한 노동자가계도 문턱 높은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알다시피 그 결과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인한 위기와 천문학적인 가계부채로 인한 빈곤이다. 그리고 이는 주택시장을 부양한다는 이름으로 LTV(주택담대출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를 완화하고 빚을 얻어 집을 사도록 요구받는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돈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야기한다. 시간의 부정(否定)이었던 돈은 이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축하고 요동치는 돈으로 대체된다. 이자라는 것이 미래를 할인함으로써 현재의 만족을 미루고 미래의 이윤을 위한 인내를 택한 데 대한 윤리적 대가를 지불했다고 한다면 따라서 그것은 청교도적인 윤리가 스며든 시간관에 의지했다면, , 오늘날 다양한 금융 상품이 재현하는 시간은 그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어느 학자가 짓궂게 자신의 책 제목을 택한 제목인 “The Future of Futures”에서 “future”는 말 그대로 오늘날 화폐의 모델로 기능하는 선물(先物, future)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E. Esposito, The Future of Futures: The Time of Money in Financing and Society, Cheltenham: Edward Elgar, 2011.
따라서 그 책의 제목은 “미래들의 미래”이기도 하지만 “선물들의 선물”로도 읽을 수 있다. 우연과 변덕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미래를 위한 안정을 제공하던 은행잔고는 이자의 형태를 통해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든든한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물은 그런 미래를 모른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가격의 지수들을 비교하고 차익을 실현하기 위해 순식간에 사고파는 정신병적인 찰나의 시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 시점에 계산된 미래, 결국 현재의 시점에 가격 설정된(pricing) 미래를 사고 팔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물은 미래를 완벽히 현재에 통합한다. 그리고 선물은 이제 환율거래나 폭발적으로 성장한 파생상품을 통해 여실히 나타나듯이 오늘날 화폐의 모델이 되어가고 있는 듯 보일 지경이다. 새로운 화폐 모델로서의 파생상품이라는 주장은 화폐의 다양한 기능(보편적 등가, 유통 및 지불 수단, 축장 수단 등) 가운데 세계화폐로서의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지만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후 화폐의 정체성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기한다. D. Bryan & M. Rafferty, Capitalism with derivatives: a political economy of financial derivatives, capital and class, Hampshire &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6. 한편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수정하면서 시간성의 붕괴 및 현재주의(presentism)와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관계를 통해 후기근대성(post-modernity)의 문화를 분석하고자 하는 제임슨의 글 역시 참조하라. F. Jameson, The Aesthetics of Singularity, New Left Review 92, March-April 2015.
그렇다면 이자가 아닌 선물을 통해 미래를 전유하고 관리하는 일은 놀랍게도 오직 현재의 순간으로 통합된 미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미래를 둘러싼 불안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든다. 앳킨스는 이런 점에서 가족생활의 금융화를 화폐의 ‘물질성’의 변화와 결합시킨다.
“금융화의 조건 하에서 은행과 여타 금융기관들은 인간노동력의 착취로부터 얻은 잉여가치가 아니라 개인 임금과 노동자들의 소득으로부터 특히나 신용부채의 다양한 형태로부터 얻어내는 이자 형태를 통해, ‘직접적으로’ 이윤을 얻어낼 수 있었다. 나아가 우리는 임금의 금융화는 개인 임금으로부터 이윤 추출의 새로운 형태뿐 아니라 임금의 물질성 자체의 변형과 연관되어 있음을 덧붙일 수 있다. 포디즘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력의 사용, 착취, (일부에서는) 재생산을 위해 화폐형태로 지불된 임금을 통해 보상을 받았다. 금융화된 포스트-포드주의에서 화폐 형태의 그런 속성들은 전환되었다. … 그리하여 금융화된 포스트-포드주의에서 화폐는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 매체나 수단으로서 작동하지 않고 대신 그 자체 교환가능해지며, 여느 상품이나 생산물처럼 작동한다.” L. Adkins & M. Dever, Housework, Wages and Money: The Category of the Female Principal Breadwinner in Financial Capitalism, Australian Feminist Studies, Vol. 29, No. 79, 2014, pp. 61.
(강조는 인용자)
앞서 언급했듯 노동자의 가계 소득인 임금은 사용가치를 얻기 위한 교환 수단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돈이 점점 더 거래가능한 자산(tradable asset)으로 간주되면서 가계는 차입을 통해 미래의 안전을 획득함은 물론 자신의 소득을 통제하고자 한다. 대출을 통해 집을 사고 자동차를 구매하며 주택을 저당잡고 그로부터 연금을 받으려 할 때, 돈은 신비한 대상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영원한 불안의 나락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미래를 합리적인 계산으로 지배하고자 하지만 곧 그것은 화폐의 운(fortune)으로 환원되는 세계에서 그리고 미래를 오늘의 선택을 통해 미리 규정해야 하는 세계에서, 불안은 핵심적인 정동이 될 수밖에 없다.
화폐 유토피아를 넘어서
“노동력이 가족재생산에서가 아니라 자본제적 생산의 조건 하에서 생산되어 진정한 상품(a true commodity)이 된다는 전망에 설 때, 국가와 자본주의적 기업가는 가정생활의 가장 친밀한 구석들까지 이미 침투하게 된다. 그들은 출생, 질병, 사망, 정동(affections)까지도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위협받게 된 가족은, 그것이 보존하는 몇몇 정동적 관계들 때문에, 개인적 자유의 마지막 보루 가운데 하나로서 여겨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허약한 요새인 바, 화폐 관계가 침식하는 영향을 버텨내도록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C. 메이야수, ‘자본주의와 가족제공동체: 여성, 곡창, 자본’, 김봉률 옮김, 까치, 1989, 156쪽.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이상적인 시민이란 것이 자신의 사회적 의무를 사적인 방식으로 임파워하는(empower) 개인이 되어버릴 때, 프라이버시란 탈출의 공간도 자본주의 바깥의 자율적인 공간도 아니다. 결국 자율성, 자유, 안전은 개인들이 자신의 경제적 삶을 통제하고 유연하며 탈규제된 경제에서 비롯되는 강화된 개인 경쟁과 시장 압력에 대처하려면 개발하도록 요구받는 기업가적인 능력들일 뿐이다. 한 때 옹호되었던 ‘가족의 안온함(safety of houses)’과 같은 주장은 오늘날 과다채무라는 구조적 필연성과 떼어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점점 더 채무적 수단과 그것의 규율에 종속되고 있다.”(강조는 인용자) F. Allon, The Feminisation of Finance, Australian Feminist Studies, Vol. 29, No. 79, 2014, p. 25.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속에 숨어있는 또 한 가지 생산양식인 가족제 생산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자본제적 생산양식은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하나의 제도에 생명재생산을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제도를 생명재생산의 임무에 가장 적합한 제도로서, 그리고 현재까지 그랬듯이 노동 특히 여성노동을 무보수로 동원할 수 있으며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애정을 착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제도로서 가족제도를 오늘까지 유지하고 있다.”, C. 메이야수, 앞의 글, 214쪽.
그는 제국주의와 종속국 사이에서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연관, 흔히 접합이라고 불렀던 것을 설명하면서 뜻하지 않게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도 역시 예외 없이 발견할 수 있는 숨겨진 생산양식을 발견했던 셈이다. 가족제 생산은 자본주의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일, 즉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을 위해 자율적인 경제 제도로서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빈법의 제정에서부터 사회부장 나아가 경제적 장 바깥에서의 자선, 박애 기구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시민사회로부터의 다양한 개입의 도움은 있었어도, 가족을 통한 사회적 재생산은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메이야수가 자신의 글에서 단언했던 가족제 생산의 자율성은 이제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인용한 알론의 글은 이 점을 역력히 말해준다. 메이야수가 가족이란 생명과 친밀성의 정동이 지배하는 곳이고 화폐관계로부터 침해받지 않은 곳이기에 자본제적 생산양식의 주변에서 그것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족제 생산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면, 알론은 더 이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녀는 화폐관계의 침해로부터 벗어난 가족이 아니라 과다채무를 통해 돈의 순환 속에 완벽히 통합된 가족을 고발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우리는 거의 재생산 노동의 대부분이 상품으로 매매되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를 둘러싸고 여성의 가사노동에 의해 제공되던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들이 상품이 되었을 때 이것이 가부장적 사회관계를 어떻게 재조직하는지 또 여성의 정체성과 관련해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이야기하는 여성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런데 가사노동의 탈가족화 혹은 상품화는 물론 육아에서부터 상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돈의 문제로 계산되고 표상되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재무적 행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적 재생산의 금융화, 가족생활의 금융화는 여성의 정체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남편이나 자녀들과 다르지 않은 적극적인 재무관리자가 되고 자신의 화폐 소득을 통해 가족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여성은 분명 ‘살림꾼’ 혹은 ‘알뜰한 주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성과 가족의 정체성에 대하여 지금 가까스로 윤곽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여성들이 이러한 가족-여성이라는 동일성의 자장에서 겪게 되는 정동의 혼란과 동요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이를테면 라캉 정신분석학자 뒤푸르는 신자유주의 인간학이라 할 만한 것을 분석하며 상징적 질서의 붕괴 이후의 세계, 포스트-오이디푸스의 세계에서의 주체성을 분석하는 흥미로운 책을 쓴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의 글에서 여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갱단이나 폭력조직에 가입하거나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데 전력하는 불량한 청년들에게 관한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뒤프르엑 제한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와 유사한 분석을 시도하는 많은 글들 역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D-R. Dufour, The Art of Shrinking Heads: The New Servitude of the Liberated in the Era of Total Capitalism, Cambridge & Malden: Polity Press, 2007.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산드라의 해고에 따른 우울은 바로 그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 불안을 제어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녀는 그 불안을 제어하는데 성공한다. 그것은 어떤 우연과 변덕에도 끄떡없는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사는 동료 노동자들의 집을 찾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수십 시간을 지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윤리적인 실체전환을 이룩한다. 그를 통해 그녀는 불안한 미래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 금융화된 가족생활에 부과된 미래와는 다른 미래를 쟁취한다. 물론 그 미래는 어떤 안정된 화폐적 수익, 미래의 자산 가치로 등기(登記)된 미래는 아닌다. 그것은 그렇게 화폐를 통해 실체화된 시간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외려 전적으로 비규정적이고 또 불명료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것이 비가시적이고 표상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희미한 흔적만을 찾아볼 수 있는 연대의 윤리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녀는 연대의 체험을 통해 미래에 깃든 잔인한 불안을 걷어낸다. 그렇지만 차라리 영웅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산드라의 미래는 우리가 결박된 미래와는 다른 것이다. 그녀가 과감하게 획득한 윤리적 유토피아는 실은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화폐의 유토피아, 수탈의 유토피아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다.
오늘날 금융화된 가족생활은 전처럼 가족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안온함’을 제거한다. 미래가 더욱더 깊이 현재의 선택과 결정에 통합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현기증나는 금융적 실천에 의해 매개되었을 때 개인과 가족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이면서도 사악한 나선형을 그리며 악화된다. 미래의 불안정을 제거하려는 몸짓은 현재와 미래 사이에 놓인 거리를 측정하고 그 사이에 안전한 디딤돌을 놓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현재의 자기반영적 몸짓, 현재라는 시점에서 표시된 미래의 다양한 가치들을 비교하고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 불안은 더욱 증폭되고 심화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과 원망을 금융화된 가족 생활의 핵심적인 정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심리적으로 실체화하지 않으면서 나아가 그것을 우리가 겪는 사회적 조건으로 간단히 환원하고 둘 사이에 상동성을 확인하는데 그치는 사이비 문화비평의 유혹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경제적 생존의 금융적 배치가 어떻게 가족생활을 규정하며 이것이 우리의 삶을 주관화하고 또 정동을 생산하며 제어하는지를 밝히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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