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물론과 문화연구 (1) – ‘시대구분’이라는 방법


AIR – LE SOLEIL EST PRES DE MOI (1999)

유물론의 약점은 지배 상황의 반성되지 않은 약점이다.
– Th.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1999, 288쪽.

문화연구-마르크스주의 혹은 문화연구-역사유물론

어지간한 문화연구 입문서치고 마르크스주의자의 이론적 성과를 문화연구의 주요한 이론적, 정치적 원천으로 기념하지 않는 글이 없다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국내에 번역된 주요한 문화연구 입문서들 역시 예외 없이 이러한 접근을 취한다. 이를테면 앤드류 밀너, 존 스토리와 존 피스크의 대표적 입문서들이 이에 해당된다. 반면 그래엄 터너 같은 경우엔 영국과 호주의 문화연구의 역사를 회고하며 문화연구의 이론적 궤적이 이데올로기 개념의 수정 및 재가공 그리고 그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과정으로 서술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앤드류 밀너, ‘우리시대 문화이론’, 이승렬 옮김, 한뜻, 1996.; 존 스토리 편, ‘문화 연구란 무엇인가’, 백선기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0; 존 스토리, ‘대중문화와 문화이론’, 박만준 옮김, 경문사, 2012, 스튜어트 홀, ‘문화, 이데올로기, 정체성’, 임영호 옮김, 컬처룩, 2015. 그래엄 터너, ‘문화 연구 입문’, 김연종 옮김, 한나래, 1995.
그람시, 알튀세르, 르페브르, 윌리엄스 등은 그렇다 치고 본격적인 문화연구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나 딕 헵디지(Dick Hebdige) 역시 모두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이력과 떼어놓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문화연구의 기원적인 출발점을 마르크스주의에 귀속시키는 것은, 제법 그럴 듯한 가설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물론 문화연구에 관한 계보학적 분석을 실행한다면 짐짓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문화연구에서 항용 거론되고 참조되는 방법과 범주, 인식론적 접근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유산과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계급(계급투쟁),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재생산, 상부구조, 물신주의, 상품화 같은 개념을 마주할 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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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때 문화연구는 방법 혹은 접근이라는 면에서 인류학이나 민속지, 문화주의, 정신분석학, 기호학,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로 마르크스주의를 환원한다. 인류학적 문화연구가 있고 커뮤니케이션 문화연구가 있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 문화연구란 것도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문화연구는 자율적인 학술적 담론으로서 자신의 동일성을 해치지 않은 채 다양한 분석 방법을 전유할 수 있다. 그 분석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그렇다면 문화연구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외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문화연구는 내생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이었다는 식의 가정은 지지받기 어려운 것으로 되어버린다. 문화연구는 자신이 전유하거나 참조할 수 있는 분석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마르크스주의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이러한 조작 과정을 거칠 때 마르크스주의는 다양한 학술적 담론 가운데 하나로 종별화된다. 마치 뷔페에서 음식을 골라먹듯이 문화연구를 위해 골라 쓸 수 있는 다양한 이론적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마르크스주의를 취급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문화연구가 자신의 접근방식 가운데 하나로 마르크스주의를 호명하면서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시늉을 하기도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몸짓은 문화연구에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는 현대 “사회”과학 안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온 것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회학에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전유일 것이다. 사회학의 교과서는 뒤르켐, 베버와 마르크스를 사회학의 이론적인 창립자 가운데 하나로 규정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이질성(heterogeneity)을 중립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를테면 사회학 입문서들의 고전이라 할 한편 고전 정치경제학에 대한 대립적인 반응 형태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학을 대질시키며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정치경제학의 대체물로서의 사회과학이라는 대당(opposition)을 주장하는 투르비언의 주장을 참조할 수도 있다. 그의 추론을 따를 때 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학이라는 가정은 난센스 그 자체가 된다. 그의 생각을 따르자면 사회학은 마르크스주의의 타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학이란 가정은 원을 네모로 만들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 요란 투르비언, ‘사회학과 사적유물론’, 윤수종 옮김, 푸른산, 1989. 한편 서구의 정치적 이념, 자유-보수-사회주의의 길항 속에서 사회과학의 역사적 형성을 살펴보는 월러스틴의 글 역시 참조하라. I. 월러스틴,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성백용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4.
역시 문화연구를 이론적 지식으로 환원하지 않고 이를 재생산하는데 관련된 학술적, 제도적, 매체적 실천을 고려하게 될 때, 그리고 문화연구가 흥기하는 동안의 역사, 정치적 정황을 살펴볼 때, 우리는 다른 결론으로 나아가는 길이 나 있음을 짐작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대학에서 학술적인 분과학문으로서 문화연구가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나 정체성의 정치를 비롯한 다문화주의의 흥기라는 정치적 형세의 변화와의 관련을 생각하여 볼 때, 문화연구라는 이론적 기획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외려 생각보다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초기의 문화연구를 결산하면서 도입하는 접근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문화연구라는 “욕망”을 읽기 위해 문화연구에 대한 문화연구를 주문하고 이른바 문화적 현상이자 실천으로서 문화연구라는 담론적 실천의 징후를 해석하고자 한다. F. Jameson, On ‘Cultural Studies’, Social Text, No. 34, 1993.
이를테면 문화연구라는 학제와 이론적 기획의 출현을 감안하려는 순간, 문화연구 “속의” 마르크스주의는 갑자기 문화연구에 “관한” 마르크스주의로 전환하게 된다. 희화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우리는 문화연구라는 문화적 상부구조는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화연구는 문화적 실천의 한 사례로서 문화연구를 추적하는 탐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떠올리면 결국 우리는 문화연구와 마르크스주의가 은밀한 동족 관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문화연구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를 문화연구와 역사유물론의 관계로 재서술하면 어떨까. 아마 사정은 제법 달리 보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유물론을 마르크스주의의 동의어로 볼 수 있다면, “문화연구/마르크스주의”라는 짝과 “문화연구/역사유물론”이라는 짝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문화연구와 역사유물론이라는 짝짓기는 어딘지 어색하고 거북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마치 서로 어울릴 수 없는 항들을 맞붙여 놓은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마르크스주의는 괜찮지만 역사유물론과 문화연구라라고 대응시키면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수다한 이론적 선택지 가운데 하나이거나 학술적인 이론의 종류(種類)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역사유물론은 문화연구에 대하여 처음부터 곤혹스러운 물음을 제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연구 역시 자신의 이론적 대상이라 할 문화의 자기동일성에 관해 항상 질문을 던져왔다. 그리고 무엇을 문화로 분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보다 큰 물음에 대해서도 부지런히 따져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제나 문화란 것이 자율적인 실재(entity)을 전제한다. 그리하여 문화연구는 문화와 다른 사회적 관계 및 실천과의 관계를 은밀히 괄호 속에 묶어둔다. 설사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고려할지라도 그것은 ‘구조적 차이’가 아니라 자율적인 대상들 사이의 추상적인 차이를 가리킬 뿐이다. F. 제임슨, ‘정치적 무의식: 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 이경덕• 서강목 옮김, 민음사, 2015, 49쪽.
그도 아니면 문화-외적인 실천들과 심급들은 단순히 ‘배경’으로서 간주될 뿐이다. 그리하여 문화는 정치, 경제, 문화 등과 같은 사회의 위상학적 배치 위에서 자율적인 하나의 자리를 배정받는다. 거칠게 말하면 그것은 실체화된다. 비록 그것을 실체화하는 것에 반대하여 문화에 관한 정의를 변경하고 확장하려 해도 그것은 언제나 문화라는 영역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보수하려는 몸짓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반면 역사유물론은 바로 그 문화의 자율성과 타율성을 규정하는 조건을 캐묻는 물음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악명 높은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비롯하여 헤게모니, 이데올로기, 담론, 신화 등의 개념은 모두 바로 이러한 문화의 동일성/비동일성, 문화적인 것의 규정/피규정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도 다시 간략히 살펴보겠지만 알튀세르의 인과성(특히 구조인과성(structural causality) 개념 역시 이러한 점에서 역사유물론을 개조함으로써 문화의 자율성과 타율성을 규정하고자 했던 시도로 다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역사유물론과 문화연구의 관계를 문화의 자율성/타율성이라는 쟁점을 통해 접근하고자 한다. 그리고 문화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특성을 적절히 파악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시대구분을 제안하고자 한다. 역사유물론이란 물질적 사회관계가 경제적, 정치적, 법률적, 문화적 실천을 규정하는가를 분석하고자 하는 이론적 기획, 혹은 줄여 말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어떻게 무한히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규정하고 분절하는가에 관한 접근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화적 대상, 실천, 의식(무의식)이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된다고 한다면 역사유물론은 그러한 규정(determination)에 관한 이론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규정(이는 사람들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정의될 것이다. 이를테면 아도르노라면 이를 ‘매개(mediation)’라 부를 것이며, Th. W.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홍승용 옮김, 1999.
알튀세르라면 이를 ‘구조인과성’이라고 정의하고 제임슨이라면 약호전환(transcoding)을 제시할 것이다)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대상의 역사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적인 성격이라는 것이 모든 것은 유위변전(有爲變轉)한다거나 모든 것은 과정 속에 있다는 식의 공허한 주장은 아닐 것이다. 그것의 역사적 성격은 시간적 연대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즉 통시적인 연속 위에만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공시적인 혹은 구조적인 규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규정의 이중성을 사고할 수 있는 효과적인 개념으로서 시기(period)와 시대구분(periodization)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는 역사유물론과 문화연구의 관계를 에워싼 주요한 쟁점들을 반성하고 그를 사고하기 위한 연속 작업 가운데 첫 번째 시도가 될 것이다. 추후로 나는 역사유물론과 문화연구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한 주제로서 시간성, 모순, 재현, 역사 등을 선택하고 이를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시대구분과 규정 (1): 발리바르의 사례
마르크스주의 문화연구자이자 문학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그의 글 곳곳에서 출몰하는 강박적이라 할만한 시대구분에 익숙할 것이다. 아마 오늘날 굳이 마르크스주의자는 물론이려니와 그와 다른 문화연구의 흐름 속에서도 문화 분석 자체의 방법으로서 시대구분을 고수하는 이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저널리즘적인 문화비평이나 사회비평에서는 사태가 적잖이 달라진다. 정보통신기술의 폭발적인 발전과 더불어 이른바 디지털 시대니 사이버시대, 웹2.0시대니 하는 다양한 기술적 단계를 배경으로 숱한 문화적 동일성의 변화를 예기하고 분석한다. 혹은 저성장, 불완전고용의 시대 등의 사회학적 시대구분을 배경으로 한 세대론의 분석 등 역시 끊임없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이러한 이론적 분석에서 시대구분의 과소와 대조적인 시대구분의 과잉은 물론 징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여기에서는 후자의 과잉된 시대구분과 비평적 글쓰기가 실은 시대구분이라기보다는 단지 자폐적인 ‘현재’의 분석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해두기로 한다. 한편 현재주의란 이름으로 역사성이 제거된 현재의 시간성이 창궐하는 세계로서 오늘날의 시간성의 문화를 분석하고 있는 다음의 글 역시 참조하라. 더글러스 러시코프, ‘현재의 충격 : 모든 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박종성, 장석훈 옮김, 청림출판, 2014.
그런 점에서 제임슨의 집요하게 강조하는 이는 달리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역저인 ‘포스트모더니즘,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의 제목을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 아울러 이에 대한 보충이자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변모 이후 후기자본주의에서의 문화에 대한 분석으로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글의 제목인 “단독성(singularity)의 미학”이 알려주듯이 이 글은 금융화, 역사적 시간성의 소멸,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미적 형태와 스타일의 변화의 총체적 연관을 해명하며, 후기자본주의 ‘단계’에서의 문화적 동일성을 추적한다. F. Jameson, The Aesthetics of Singularity, New Left Review 92, March-April 2015, pp. 101-132.
이 책은 시대구분 자체를 명시적으로 강조한다. 그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뒤이어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late capitalism)라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단계 혹은 시기에 대응하는 문화적 논리로 정의한다. 기업가적 혹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에 각각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대응한다면 후기자본주의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응한다는 식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역사적 단계와 그에 기반한 문화적 상부구조라는 서술 혹은 표상의 도식은 마르크스주의적 글쓰기에서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경제주의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세련되고 명민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가급적 이러한 서술을 기피한다. 그런 점에서 시대구분이라는 서술 방식을 고집하는 제임슨의 몸짓은 어딘지 기이할 수밖에 없다.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적 비평의 핵심적인 이론적 도구에 해당되는 것들, 예컨대 서사(narrative)로서의 문화와 그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으로서의 비평,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의 ‘지배 약호(master code)’로서의 (자본주의) 생산양식, 약호전환,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 유토피아 등은 자주 거론되고 주의가 기울여지는 편이다. 이러한 이론적 방법을 정식화하고 전개하는 주요한 작업으로 다음의 글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F. Jameson, Metacommentary, PMLA, Vol. 86, No. 1, 1971. pp. 9-18.; ‘맑스주의와 형식’, 여홍상•김영희 옮김, 창비, 2014.;’정치적 무의식: 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 앞의 글.; Valences of Dialectic, London & NY: Verso, 2009.
그렇지만 정작 그의 모든 저술을 관류하는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그에 해당할 만큼의 관심을 크게 기울이지 않는다. 이는 제임슨 자신이 시대구분을 하나의 개념이자 방법적인 도구로서 명시적으로 고립시켜 서술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단 예외가 있다면 시대구분을 모더니즘의 분석을 위해 필수적인 원리(maxim) 가운데 첫 번째 원리로 정의하고 이를 주해하는 글이다. F. Jameson, A singular modernity: essay on the ontology of the present, London & NY: Verso, 2002. 우리는 이 글에서 시대구분이 어떻게 문화의 자율성과 타율성을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접근일 수 있는지를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공시태와 통시태, 생산양식에 의한 규정, 역사적 인과성 등을 시대구분을 통해 접근하고자하는 ‘정치적 무의식’에서의 제임슨의 분석 역시 유의할 가치가 크다. F. 제임슨, “해석에 관하여”, ‘정치적 무의식’, 앞의 글, 17-128쪽.
“1960년대를 시대구분하기”와 같은 글에서 F. Jameson, Periodizing 60s, Ideologies of Theory, London & NY: Verso, 2009. 하지만, 외려 이 글은 다른 식으로 읽혀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1960년대 미국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 시대구분이라는 방법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훗날 그의 글에서 정식화되듯이 후기자본주의로의 이행기로서 그 시대의 문화를 분석할 때만 총체적인 변증법적인 비평이 가능함을 알리는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글은 1960년대라는 역사적인 시대에 펼쳐진 문화 현상을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글로 소비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문화비평적 접근으로서 시대구분의 의의를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앞서 언급한 “단독성의 미학”이나 “현존하는 마르크스주의” F. Jameson, Acutally Existing Marxism, Valences of Dialectic, op. cit. pp. 367-409.
같은 글에서도 역시 시대구분을 통한 문화연구의 의의를 완곡하게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 시대구분은 제임슨이 그의 주요 저서에서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연구의 방법에 견주어 특별히 의식적으로 강조되거나 부연된 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시대구분이 역사유물론적 문화연구의 핵심 원리로 간주될 수 있다면 이는 어떤 이유에서이며 그것은 어떤 점에서 역사유물론적인 분석의 요소를 함축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제임슨의 주장을 상대하기보다는 시대구분을 역사유물론의 원리로서 사색한 매우 드문 시도 가운데 하나인 에티엔 발리바르의 주장을 살펴보는 게 좋을 듯 싶다. 발리바르는 ‘자본을 읽는다’에서 역사유물론이 거부하고 비판해야 하는 결정적인 접근으로서 역사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한 바 있다. L. Althusser & E. Balibar, Reading Capital, Reading Capital, London & NY, Verso, 2009.
이는 알튀세르에 의한 “이론적 인간주의” 비판의 역사유물론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진화론적이면서도 목적론적인 역사철학적 사유를 대신해 모순에 의해 관통되는 구조화된 전체, 다시 알튀세르의 비유를 빌자면 ‘부재하는 원인(absent cause)’에 의해 과잉(과소)결정된 복합적 전체로서의 생산양식이라는 관점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부재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앞의 책과 다음의 발리바르의 글을 참조하라. E. Balibar, The Infinite Contradiction, Yale French Studies, No. 88, 1995.; Structural Causality, Overdetermination, and Antagonism, Postmodern Materialism and the Future of Marxist Theory, A. Callari & D. F. Ruccio, ed. Hanover, NH: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5. 과잉결정/과소결정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L. 알튀세르, 아미엥에서의 주장,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152-6쪽.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주의 이러한 역사주의적 관점과 역사유물론 사이의 거리는 알튀세르 학파의 고유한 이론적 관심사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접근 가운데 가장 알려진 W. 벤야민 역시 역사유물론과 역사주의의 차이를 벌여놓으며 역사유물론이라는 변증법적 비판을 위한 사유를 가다듬고자 진력했기 때문이다. W.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접하며 발리바르는 자신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분석을 제시한다. 그것이 ‘역사유물론 연구’에 수록한 논문인 “역사변증법에 대하여”이다. E. 발리바르, 역사변증법에 대하여, ‘역사유물론 연구’, 이해민 옮김, 푸른산, 1989.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시대구분이란 쟁점을 다룬다. “역사의 시대구분, 따라서 혁명적 이행에 대한 일체의 이데올로기적인(부르조아적) 문제설정과 확실하게 결별하기 위한, ‘생산양식’ 개념의 올바른 정의와 그에 필요한 방법.” 앞의 글, 199-200쪽.

그런데 이때의 시대구분이란 앞서 언급했던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단계라든가 구조화된 전체의 역사적인 생성과 소멸의 시기로서의 시대구분과는 다른 것이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대구분이란, 그 스스로의 표현을 빌자면 ‘혁명적 시기’와 ‘비혁명적 시기’(비이행기) 사이의 구분에 해당된다. 앞의 글, 230-1쪽.
그렇지만 이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단계로서의 시대구분과 전연 다른 주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단계 역시 이행과 비이행의 변증법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가능성을 담지한 혁명적 시기로서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억압하고 다른 방식을 통해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도모함으로써, 각 단계의 생산양식의 모순을 잠정적으로 해결하는 것 역시 이행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생산양식 내부에서 다른 단계로의 이행은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의 좌절이자 생산양식 자체의 내적 모순의 조정과 새로운 배치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단계는 그 내부에 이행과 비이행의 변증법을 감추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결국 발리바르는 생산양식 ‘내부에서의’ 이행과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라는 두 가지 이행 사이에서 동요한 셈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소멸과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통해서만 이행을 식별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계급투쟁을 분석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거나 아니면 제거한다.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재생산한다. 그것 없이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다른 구조적 결정의 형태를 통해 재생산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생산양식 ‘내부’에서의 이행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함에 있어 계급투쟁은 차이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동일성의 원리로서 동원된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계급투쟁 및 그것의 효과는 분석의 도구로서의 의의를 잃은 채 추상적인 규범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발리바르는 자신이 앞선 분석에서 사회구성체를 생산양식의 표현 혹은 실현으로 간주함으로써 생산관계의 우위라는 자신의 관점을 온전히 관철할 수 없게 되었음을 자기비판한다. 생산관계(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재생산되는가를 분석하기 위해, 이를테면 자본의 사회적 형태, 임노동의 재생산 형태, 국가 형태 등을 비롯한 다양한 생산관계의 요소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형되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면 계급투쟁의 분석이 필수적이지만 그는 이를 상대화하였던 셈이다.
발리바르 스스로 실토하듯 역사주의적 편향으로 기운 막대를 반대 방향으로 구부리는 과정에서, 그의 표현을 빌자면 “상대주의적” 편향, 구조주의적 편향을 범하게 되었던 셈이다. 그는 비이행의 시기에서 오직 생산양식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관성을 확인하는데 급급하였던 것이다. 이행의 가능성을 억압함으로써 비이행으로 전환한다는 그의 접근은 변화와 반복이라는 사변적 표상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이후의 생산양식으로 이행하지 않는 한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머무는 셈이다. 이는 결국 자신이 비판하고 넘어서고자 했던 시대구분의 관점, “역사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갇히도록 이끌어 버리고 만다. 앞의 글, 229쪽.
그렇지만 이제 발리바르는 이러한 시대구분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내가 ‘이행’에 강한 의미에서의 (그 구체적 형태의 필연적 현실성이란 면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역사’라는 성격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비이행’에는 (강한 의미에서의) 역사의 형태를 거부하고 바라든 바라지 않든 역사를 경제주의적 도식에 환원시킨다는 조건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라고 자기비판한다. 이는 역사를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의 시기에만 한정함으로써 “시대구분의 통상적 실천의 기초가 되는 이데올로기 자체의 포로”가 되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모든 비이행의 시기에는 구조적 동일성이 있다는 인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비판은 시대구분이란 쟁점에 대하여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일까. 발리바르는 이행기에만 역사를 부여하고 다른 시기 즉 비이행의 시기를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의 관계에 대해 혼란스런 이해를 야기했음을 뉘우친다. 알튀세르를 따라 역사의 본질의 자기표현과 실현의 과정으로서의 ‘표현적 인과성’이란 개념을 집요하게 부정하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정도 그러한 관점에 자신이 경사되고 말았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발리바르는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시작도 끝도 모르는 영원한 자연필연성, 자기동일성의 반복이라는 관점에 따라 구성된 역사에 관한 표상으로 간주했던 셈이다. 그리고 사회구성체를 이렇게 생산양식이라는 관점 속에서만 이해하려 애씀으로써 사회구성체를 생산양식의 접합이라는 관점으로 환원하고 결국 사회구성체 개념을 생산양식이란 개념을 통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즉 생산양식이 자신을 구체화하는 형태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비판을 통해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란 개념을, 발리바르는 구별하고 양자의 관계를 새롭게 정위한다. 이 때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은 알튀세르가 집요하게 강조한 ‘재생산’이라는 개념이 말해주듯이 생산양식을 현실적으로 실존하게 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생산양식이 본질이고 사회구성체는 그것의 현상(형태)인 것이 아니다. 외려 우리는 이러한 우열관계를 거꾸로 뒤집을 수도 있다. 생산양식의 동일성은 오직 사회구성체를 통한, 즉 다양한 심급 혹은 수준에서의 실천들이 접합되는 효과로서만 생산될 수 있다. 이럴 경우 재생산은 생산(양식)의 조건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사회구성체란 개념은 언제나 시대구분을 통해서만 확정될 수 있다.

시대구분과 규정 (2): 제임슨의 사례

발리바르가 이행기와 비이행기라는 이분법적 시대구분을 자기비판하려 했을 때, 우리는 이를 그러한 구분을 무효화하자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내에서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규정하는 사회구성체의 다양한 심급들 사이의 구조화된 총체를 분석함으로써 시대구분을 보다 구체화하자는 제안으로 읽어야 옳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관건은 계급(투쟁)을 역사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에 있어 계급이란 사회 내부에 있는 다양한 부분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이는 사회학적인 계급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역사유물론은 계급을 계급투쟁의 효과로서 파악한다. 그리고 계급으로서 각 계급이 자신을 주체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내적 모순을 조정하기 위한 시도의 효과로서 역사적으로 다양한 계급의 주체성을 정체화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레카리아트, 코그니타리아트, 호모 사케르(homo sacer), 몫 없는 자, 내재적 예외의 주체 등의 다양한 정치철학적인 주체 형상(figure)은 자본주의의 현 단계에서 계급투쟁의 효과를 지시하는 개념들이라고 여길 수 있다. 사회국가 혹은 복지국가의 쇠퇴와 조직된 노동자운동의 패배는 자본의 제한 없는 지배를 가능케 하였고, 노동자계급을 새로운 형태로 현실화한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주체화의 방식은 계급의 자기정체성의 변화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효과이다. 즉 계급투쟁의 효과는 새로운 형태로 계급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구분에 대한 발리바르의 접근에서 동시에 문화를 둘러싼 두 개의 통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다.
이는 먼저 문화의 타율성에 대한 흔한 가정, 문화는 경제를 반영한다는 반영이론에 대한 거부, 다음으로는 주체인 계급의 의식과 감성의 표현으로서의 문화라는 가정에 대한 거부이다. 전자의 한계를 피하기 위해 베버, 짐멜 혹은 일정 부분 루카치나 벤야민 등으로 이어이지는 경제와 문화의 상동성(homology), 즉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성과 문화의 자기동일성을 가정한다고 해서 그 한계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에 의한 ‘결정’이라는 기계적 유물론을 극복하는 시늉을 취하지만 문화와 경제의 분화/탈분화와 같은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지 않은 채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전연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물(상)화(reification)라는 주제가 바로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에 해당될 것이다. 물화란 테마는 자본주의의 도구적 합리성의 증대와 문화 및 예술에서의 미적 합리성(특히 모더니즘 예술에서의 다양한 특징, 예컨대 시각적 지각과 언어적 실천 자체의 대상화 등) 사이의 일치를 강조한다. 베버주의적 사회학의 후예들이었던 루카치와 짐멜에게서 나타나는 물화란 주제와 마르크스가 ‘자본’의 1권과 3권에서 제시한 물신주의 분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물화란 접근은 경제와 문화 사이의 동형성(isomorphism)이라는 유물론과는 거리가 먼, 여전히 신칸트주의적 주객평행론적 접근에 갇혀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한 물신주의는 극히 요약하여 말하자면 적대의 억압에 근거한 필연적 가상의 지배, 착취적인 사회관계를 부정하고 경제의 자연적 필연성(이것이 고전파 정치경제학과 신고전파 경제학이 말하는 경제 법칙이다)이라는 허구, 그러나 가짜라거나 착각이라는 뜻에서의 자의적인 주관적 허구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에서 객관적인 가상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분석은 다음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E.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윤소영 옮김, 문화과학사, 1995. 그리고 곧 번역될 하인리히의 글과 그에 대한 필자의 해제 역시 참조하라. M. Heinrich, An Introduction to the Three Volumes of Karl Marx’s Capital, Alexander Locascio trans. New York: Monthly Reivew Press, 2012.
그러므로 우리는 문화와 경제의 관계를 양자의 자족적이면서 자율적인 심급(instance) 혹은 수준들(levels) 사이의 규정 관계가 아니라 외려 경제와 문화가 각 시대에 자기동일성을 형성하게끔 하는 사회적 실천 자체를 탐색하여야 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정치가 외려 경제를 규정하거나 문화와 경제가 탈분화되어 문화가 경제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적 시대를 분절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에게 시대구분이란 개념에 이르게 한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시기는 바로 그러한 사회적 실천의 총체가 형성되고 반복되는 그 과정과 논리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분석은 후기자본주의라는 경제는 어떻게 문화에 반영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경제의 관계가 어떻게 재구성되는가에 대한 탐구 자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전환이 다양한 미적, 문화적 형태의 변화를 초래하고 그것은 특정한 주제와 범주, 장르, 감성의 유행을 형성함이 분석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한편 후자의 경우 우리는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계급의식이라는 신화적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언어학적 전회 혹은 담론적 전환 이후 거의 상식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주체의 개념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허황되다. 주체의 주어진 의식의 표현으로서의 문화라는 인간학적 가정은 거부될 수 있지만 담론이나 코드가 의식을 대체하는 것이 곧 주체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공식 문화를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의식과 태도, 감성을 표현하는 지배문화로 간주하고 노동자계급과 농민, 혹은 하위주체나 소수자의 문화를 대립 문화, 저항 문화로 간주하는 도식은, 물론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신화적 가정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로 생산양식의 내적 모순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사회적 실천의 효과는 새로운 주체를 형성한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문화연구의 위기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초기 영국 버밍엄 학파의 문화연구가 특권화하였던 반문화나 하위문화는 계급의 범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주체(위치)가 생산하는 문화적 약호, 실천, 양식 등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는 곧 여성이나 성소수자, 디아스포라 등의 주체-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러한 문화-주체의 동일성을 가정하고 문화연구를 지속한다는 것은, 문화연구의 학술 연구의 타성이란 보잘것없는 알리바이를 통해서만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앞에서 정치철학적 연구에서 다양한 주체성의 형상에 대한 사변적 탐색을 언급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계급적 주체로 환원할 수 없는 이질적이면서 자율적인 주체위치와 문화적 투쟁, 저항을 분석할 수 있던 행복한 시대가 아니다. 외려 우리가 오늘날 목격하는 것은 차라리 “애타게 주체를 찾아서”라고 말해도 좋을, 주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주체의 윤곽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주체의 부재를 메우는 것은 SNS를 비롯한 다양한 정보통신매체를 통해 일시적으로 관찰되었다가 사라지는 수많은 세대의 형상, 하위문화적 종족들의 형상들일 뿐인 듯하다. 그리고 이는 그 자체 깊이 탐색해 보아야할 징후이다. 그렇지만 이를 주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다양한 심리적, 문화적 정체성을 일시적으로 보유한 일시적으로 떠올랐다 곧 사라지고 마는 주체이다. 그러한 심리적, 정동적 주체에 대한 관심이 오늘날 문화연구의 주된 추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정동이나 감정연구를 통해 대표되는 현재의 문화연구의 대표적인 경향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M. Gregg & G. J. Seigworth ed. The affect theory reader,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0. S. Ahmed,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New York: Routledge, 2004.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김정아 옮김, 2010. 혹은 유사한 국내에서의 연구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김찬호,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문학과지성사, 2014. 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한병철, ‘심리정치: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문학과지성사, 2015. 최기숙 외, ‘감성사회: 감성은 어떻게 문화 동력이 되었나’, 글항아리, 2014.
그런 점에서 시대구분은 문화연구와 주체성 분석의 관계를 헤아려볼 수 있도록 하는 자극이 되어줄 수 있다.
“문화비평가는 문화에 결여된 문화를 갖추고 있다는 식의 그릇된 주장을 피하기 어렵다. 그의 허영은 문화의 허영에 도움을 준다. 즉 고발하는 제스처를 취할 때조차 그는 문화의 이념을 고립된 상태로, 의문시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고수하는 것이다. 그는 공격을 미뤄놓는다. 절망과 엄청난 괴로움이 존재하는 곳에서 단지 정신적인 것, 인류의 의식상태, 규범의 쇠퇴 따위만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문화비평은 그와 같은 것을 고집함으로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비록 무력하게나마 추구하는 대신 잊어버리고 싶어하며, 이로써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인관과 무관해져버린다.” Th. 아도르노, “문화비평과 사회”, ‘프리즘’, 홍승용 옮김, 2004. 8쪽.
“다양한 ‘역사이론’으로 위장한 채 자신을 전시하는 통시적 모형들이 창궐하는 것이 바로 현대의 특성이다. 우리는 다만 토인비나 슈펭글러의 체계, 에곤 프리델이나 로이스 멈포드의 문화사, 지크프리드 기디온이나 앙들레 말로의 장대한 예술적 종합, 그리고 좀더 최근에는 매클루언이나 미셀 푸코의 참신한 사상사적 적업들, 사회의 관료체제화에 대한 베버의 통찰이나 데이비드 리스먼의 유명한 ‘내향성/외향성’과 같은 일견 전문화된 사회학적 명제들, 이보 윈터스나 윈덤 루이스가 보여주는 도덕적•예술적 붕괴에 대한 묵시록적 통찰 등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지적 생활 일반이 가능한 한 가장 매끈한 ‘역사이론’의 모형을 설계, 완성해 팔아먹으려는 끊임없는 시도로 얼마나 점철되어 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브르똥은 “모두들 쬐끄만 ‘통찰’ 하나 가지고 해먹으려든다”고 비웃었다. 이는 소설을 염두에 두고, 또한 가끔 극소(極小)의 심리학적 ‘통찰’만으로 또 다른 소설‘세계’를 상술하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역사이론’의 번창은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문화적 질병의 징후인 것 같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현재보다 앞서가려는 시도이며, 또한 현재자체까지도 완결된 역사적 순간으로(어떤 새로운 감수성의 탄생으로, 처음에는 입문자들에게만 보이는 어떤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문화적 변환의 표시로, 혹은 단순히 새로운 유행의 바람결에 날리는 첫 지푸라기나 새로운 불경기의 첫지표가 아니라면 종말론적 재앙의 첫 표시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 배후에까지 사고해 들어가려는 시도이다. 또한 이것은 자기가 처한 역사책 자체 속에서 영원의 상(相) 아래서 궁극적으로 인준되기도 전에 그것을 명명하고 분류해보려는 시도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시간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와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유래하며, 삶의 역사성을 더욱 강렬하게 실존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환영하고 향유하는, 역사로서의 현재에 대해 맑스주의가 갖는 감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지적 작용이다.” F. 제임슨, ‘맑스주의와 형식’, 앞의 글, 372-3쪽.
방금 인용한 글은 아마 오늘날 우리가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문화비평의 사례들에 대한 논평으로서 매우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서 아도르노가 ‘문화비평(Kulturkritik)’ 그리고 제임슨이 ‘역사이론’이라고 지칭하는 문화분석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숱한 문화분석에 대해서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었다시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분석하기 위한 시도들은 “◯◯사회”와 같은 이름을 달고 꾸준히 출간되었다. 이는 숫제 하나의 문화현상인 것처럼 간주될 지경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수복 외, ‘사회를 말하는 사회’, 북바이북, 2014.
그렇지만 이는 역사로서의 사회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사회를 역사화할 수 없게 될 때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대개 감정의 주체나 심리의 주체에 의해 현상되는 세계)이 사회에 대한 표상 그 자체를 대신하게 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임슨이 “맑스주의란 단지 또 하나의 역사이론이 아니며 반대로 그런 역사이론의 종언 내지 폐기라는 것이다”라고 확언할 때, 우리는 상식과는 어긋난 그의 발언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게 된다. F. 제임슨, 앞의 글, 374쪽.
앞의 긴 인용에서 두 저자는 동일하게 문화와 경제의 동일성에 대한 분석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역사적 현재를 분위기(Bestimmung), 심리적 정체성(나르시시시즘의 문화, 속물근성의 문화, 타자지향의 문화 등), 감정의 구조 등으로 환원하며 현재로서 역사화하려는 시도를 꾸짖는다. 물론 이는 역사적 주체성의 분석의 한계를 고발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분노, 환멸, 모멸감, 수치심, 불안, 공포 등의 다양한 심리적 자질들을 통해 주체성의 분석을 완료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심리적 상태를 예민하게 탐지하고 제시하는 일은 문화연구의 주요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이를 단순히 역사적 현재에 대한 분석으로 완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적인 몽매에 가깝고 또 실천적인 허무주의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현재를 분절하려는 시도, 앞서 말한 대로라면, 시대구분이라는 방법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막연한 심리적 지형을 그려 보임으로써 오늘날의 문화적 정황에 대한 분석을 완결한 것처럼 간주하는 추세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시대구분은 말 그대로 연속적인 역사적인 시간을 각각의 단계로 분할하는 “분류의 방법”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단계를 규정함으로써 이를 시대구분할 때, 이는 자본주의의 발전의 통사(通史), 이를테면 통시적인 연대기의 눈금 위에서 구분된 시기의 단계적 연속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시대구분이 다양한 분류와 유형화의 기준(이를테면 자본의 구성 형태를 통해 본 경쟁, 독점, 세계화 등)을 참조하며 각 단계의 경험적 특징을 제시하는 것에 머문다면, 이는 단지 경험적인 기술적 묘사일 뿐이다. 이런 가정은 말 그대로 구분되는 각각의 시기를 발견하는 시늉을 하는 과정에 소급적으로 역사라는 대상의 동일성을 생산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동일한 역사적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의 역사적 차이는 각각 그 동일한 대상의 특성으로 환원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보편적인 모순을 가정하고 헤겔의 절대정신이나 베버 식의 이념형처럼 복잡다기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자신을 외화하거나 실현하는 근본적인 본질을 가정하고 만다. 역사적인 것을 그와 같은 식으로 이해하고 시대구분을 행할 때, 즉 역사적인 것이라는 객관적인 대상을 가정하고 그것을 특정한 시기에 따라 구분할 때, 그것은 시대구분하는 주체를 제외시킨다는 점에서도 잘못을 범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는 시대구분을 수행하는 주체, 역사적인 시대에 연루된 주체의 위치를 제외함으로써 역사 자체가 마치 투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전제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시대구분은 은밀하게 이데올로기적인 조작을 저지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런 연유로 시대구분은 ‘이데올로기 비판’이 될 수도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역사주의적 시대구분이 객관주의적 함정에 빠지고 결국 ‘기계적 유물론’이란 인식론에 빠져든 채 문화를 단순히 역사적 시대 혹은 경제의 반영인 것처럼 가정한다면 이를테면 모든 문화적 현상을 세세히 분석한 다음에 이를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호도하는 분석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원인은 이 때 초월적인 배경으로서 간주된다. 그리고 문화와 경제의 상동성(homology)을 가정함으로써 경제에 의한 규정 혹은 경제가 왜 그러한 문화를 생산하게 될 수밖에 없는지, 즉 어떻게 하여 경제는 그러한 역사적으로 독특한 문화를 낳게 되는지 묻는 ‘매개’를 설명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경제는 신자유주의적 문화를 낳는다는 식의 상투적 문화비평은 이른바 급진적 문화비평을 자처하는 거의 모든 분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른바 혐오, 환멸, 좌절, 우울 등의 심리현상을 문화연구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감정(정동) 연구 혹은 심리분석으로서의 신자유주의 문화비평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문화연구적 경향의 한계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꾸리에, 2014.
, 후자의 역사유물론적 시대구분은 문화라는 대상을 이중화한다. 그것은 주어진 객관적 대상으로서 문화적 실천, 의미, 제도, 양식 등을 인식하고자 애쓰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어진 객관적 현실을 전유하고 매개하려는 시도로서 파악함으로써 문화를 대상이자 주체로서, 물질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것으로서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아마 이는 변증법적 비평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헤겔-마르크스주의적 문화연구의 요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요약하는 주장은 처음에 거의 추문에 가까운 반응을 일으킨 제임슨의 다음과 같은 주장일 것이다. “역사는 텍스트가 아니며 지배적이건 그렇지 않건 건에 서사도 아니지만, 부재원인으로서, 텍스트의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면 우리에게 접근불가능하며, 역사와 실재에 대한 접근은 반드시 선행하는 텍스트화, 정치적 무의식 속에서의 서사화를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F. 제임슨, ‘정치적 무의식’, 41쪽. 아도르노의 거의 모든 글에서 엿보이는 이와 같은 접근은 이미 변증법적 비평으로서 역사유물론적 문화연구를 정초하는 ‘맑스주의와 형식’에서도 강변된 바 있던 주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변증법적 사유는 이중적으로 역사적이다. 즉 변증법적 사유가 취급하는 현상부터 역사적 성격을 지닐 뿐만 아니라, 또한 변증법적 사유는 그 현상을 이해하는데 사용된 개념을 그대로 녹여서 바로 그 개념의 부동성(不動性)을 역사적 현상으로 해석해야 한다.” F. 제임슨, ‘맑스주의와 형식’, 앞의 글, 390쪽. 물론 이는 또한 이 글에서 강조하고 있는 시대구분의 방법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구분된 시기 혹은 시기를 구분하기는 이러한 분석의 대상과 분석 주체의 역사성을 동시에 교차하고 양자의 매개와 접합을 판별함으로써 문화연구적인 분석의 대상과 범주, 개념, 표상 등을 확보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적이고 역사적 현실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다. 우리는 언어, 상징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적 매체를 통해 체험하고 인식한다. 문화연구는 물론 철학자처럼 이러한 문화적 매체를 의식, 이성, 사고, 정신 등과 같은 범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문화연구는 언어적이면서 비언어적인 기호(sign)나 코드, 담론, 의례, 아비투스(habitus) 등의 재현(체계)를 통해 문화를 이해한다. 의식에서 재현으로의 관점의 전환과 이를 매개한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적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F. Jameson, Singular Modernity, op. cit. pp. 52-7.
그렇지만 그러한 문화적 재현은 자신이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거나 지시하지 않는다.
이는 구조주의적 사유의 전환 이후 하나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주장일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것이 실재로부터 완전히 자율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재현으로부터 다른 재현으로의 전환이나 변형은 문화 자체의 내적 논리로부터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문화를 다른 영역이나 심급들(instances)과의 연관으로부터 떼어내어 이를 자율화하고 또 실체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연구는 문화라는 대상에 이중적으로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문화는 연구되고 분석되어야 할 대상이다. 한편 문화는 또한 재귀적으로 혹은 자기반성적으로 분석의 작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줄여 말하자면 문화는 문화의 분석의 작인(agent)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던 ‘문화연구에 대한 문화연구’라는 것도 바로 이를 이른다. 문화라는 대상을 분석하고 반성하기 위해 문화연구는 자신의 분석대상인 문화를 가져야 한다. 문화연구는 ‘문화 자체’라기보다는 분석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문화를 한정하여야 한다. 최근 유행하는 철학적 어법을 빌자면, 우리는 무한한 다양태(multiplicities)로서의 문화로부터 어떤 부분을 잘라 내거나 고립시키며 그것을 분석대상으로서의 문화로 제한한다. 그러므로 문화연구는 언제나 자신이 분석하는 대상을 규정하는 순간 그 자체 분석하는 문화로서 자신을 재귀적으로 반성한다.
그렇다면 대상으로서의 문화와 분석으로서의 문화로의 문화의 이중화를 사정(査定)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바로 그에 대한 답변으로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시대구분’이라 할 수 있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 동안 문화는 자신을 자연화한다. 다시 제임슨의 어법을 빌자면 문화는 자신을 일종의 역사적 선험(a priori), 즉 정치적 무의식으로서 자리매김한다. 문화를 분석하는 문화, 객체로서의 문화와 주체로서의 문화라는 이중적 문화 가운데 후자의 문화, 즉 주체의 문화는, 자신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간주하고 선험화, 실체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험적-경험적 이중체’(M. 푸코)로서의 문화를 다른 문화로 대체하게 될 때, 우리는 시기의 이행 혹은 시대구분을 행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적 시점은 오직 시대구분을 통해서만 드러나며, 시대구분은 바로 그러한 문화적 원근법의 피규정성, 즉 타율적인 규정을 밝힐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시대구분을 할 때 문화라는 대상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대상들과의 총체적인 연관 속에서 이해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 점에서 역사유물론은 언제나 시대구분을 요구한다. 그것은 문화연구에서 대상으로서의 문화와 주체로서의 문화라는 이중화의 변증법을 인식하도록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두제곱된 사고로서의 문화연구
제임슨은 분석 대상으로서의 문화와 분석에 참여하는 문화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비유적인 수사를 활용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솔기(seam)’ F. Jameson, Marxism and historicism, New Literary History, Vol. 11, No. 1, 1979, p. 42.
나 ‘유리판(glass pane)’ 등일 것이다. 이는 문화라는 대상을 인식할 때 그것이 어떤 인식과 체험의 구조를 통해 매개되는가를 가리키기 위한 유사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유리창을 통해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시야를 규정하는 유리창을 인식하지 못하듯이 대상으로서의 문화를 인식하도록 하는 문화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제임슨의 특장이라 할 수 있는 표현을 빌자면 ‘두제곱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두제곱된 사고를 제임슨은 이렇게 서술한다. “정신은 이제까지 해온 활동의 바깥에 섬으로써 자기 자신을 문제의 일부로 삼을 수 있게 되고, 종전의 딜레마를 대상의 저항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전략적 방식으로 그것에 대항하여 전개•배치된 주관축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면에서, 간단히 말해 주객관계의 작용을 이해하게 된다.” F. 제임슨, ‘맑스주의와 형식’, 359쪽.
매우 비의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서술은 앞서 말한 시대구분의 방법을 설명하면서 제시한 이율배반, 즉 문화는 타율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율적이라는 이율배반, 문화의 규정됨과 문화의 규정함 간의 모순을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인식하고 성찰하는 정신 자체를 영원한 정신의 본성이나 보편적인 인식의 기능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러한 정신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서 다루는 것이 두제곱된 사고이다. 즉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를 인식하는 정신 자체도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두제곱을 한다. 그리고 이는 문화연구에 더욱 적절한 것이다. 문화연구란 것 역시 문화라는 것을 항상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연구는 자신이 이해하고 분절하고자 하는 대상으로서의 문화를 규정함과 더불어 그러한 문화를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문화 자체 규정하고자 애써야 한다. 그것은 결국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어떤 문화의 지배적인 유형, 다시 제임슨 식의 표현을 빌자면 문화 코드가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인식하는 일이다.
문화는 언제나 역사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화는 의식이나 심리적 보편성, 정신적 원형 같은 것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문화는 끊임없는 변화를 겪지만 특정한 역사적 시기 동안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현실의 모순을 억압하거나 상상적으로 해결하면서 자신의 일관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문화연구는 문화를 분석하기에 앞서 연구 대상으로서의 문화를 자의적으로 재단할 수 없다. 문화는 언제나 타율적인 것으로 다른 영역 혹은 심급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동일성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구분은 바로 이러한 문화의 이율배반을 포착하고 분절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수단이다. 역사유물론이 문화의 자율성과 타율성을 규정하기 위한 이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면, 결국 시대구분은 역사유물론을 통한 문화연구의 결정적인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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