盛夏의 어느 週末


– 세네프 심사위원 회의를 마치고 Y씨를 만나 수다를 떨다가 차이밍 량의 <안녕, 용문객잔>을 다시 보았다(나는 부산에서 지난 해 이 작품을 보았다). 설친 잠 때문에 필시 졸거라는 짐작대로 초반 나는 잠시 고개를 주억대며 졸았던 듯 하다. 그렇지만 역시 <안녕, 용문객잔>은 대단하다. 구스 반 산트의 기이한 변화처럼 그의 변화도 이미 <하류>에서 예고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정착된 듯 보인다. 더 변화하기보다 그는 지금의 발견에서 잠시 더 머물 듯 하다. 그가 발견한 것은 아마 이미지의 정동(情動)을 생산해내는 영화의 능력일 것이다.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혹은 여기 한 컷의 이미지가 있다. 아니 여기에 지리한 하나의 씬이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약간의 정보가 있다. 불이 환이 켜진 마지막 날의 극장의 객석, 장마비가 자욱히 쏟아지는 극장 어귀의 스산한 모습, 침침한 불빛이 켜진 긴 낭하와 화장실의 문 등등. 그리고 그 이미지 안으로 가끔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이 過少한 정보 탓에 관객은 처음엔 지루해하고 조금은 불편하며 어색한 감정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지만 곧 우리는 그가 이야기를 할 의중이 없음을 깨닫는다.((너무 많은 지나침과 너무 적은 지나침 가운데서 후자에 대한 이야기는 드문 듯 하다.로트코나 말레비치의 그림에 대한 추상성 운운의 분석은 그런 점에서 잘못일 것이다. 그 그림은 적음이 너무 많거나 지나치게 적음으로 인해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것 아닐까? 그리고 왜 나는 이런 적은 것들에 이토록 많은 관심이 가는 걸까? 지나치게 화려하고 많은 캠프적인 아름다움에도 유혹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사실 그리 깊은 감동을 얻지는 못한다….언젠가 곱씹어볼 문제이다).
– 사실 그의 영화에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기억 속의 장면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처럼 회상될 때마다 장면은 다른 모습과 다른 정서적인 힘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사실 그 탓에 나는 그날 바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기억의 회상에 관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거의 기억의 절차를 기만한다. 기억은 노동에 가깝고 그 노동은 그 사건들의 뭉치를 기억하게 하는 서로 다른 강세를 가진 이미지들과 소리의 파편들과 함께 내 의식 속에서 조립된다. 따라서 기억은 애시당초 이야기를 모른다. 기억은 이야기가 되는데 실패한 것들을 계속 남겨두었다가 내 의식 속으로 자꾸 떠민다. 기억은 이미 완결되어 저장되어 있던 이야기를 다시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되지 못한 채 떠도는 장면들(어쩌면 그 말 뜻 그대로 기표(signifiant))을 내게 들이민다.
– 이를테면 내가 어제 술을 먹다 Y씨와의 대화에서 다시 떠올린 대여섯살 남짓의 기억의 한 장면, 하얀 법랑을 씌운 대야에 고여있던 핏물이 그렇지 않을까. 나는 누이의 실수로 어느 겨울날 시멘트로 쌓은 수돗가에 내동댕이쳐졌고, 오른쪽 이마가 으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내 오른쪽 눈썹은 비뚤어져있다. 여튼 스냅 숏처럼 엮인 내 기억 안에서 그 사고의 이전 장면은 굴다리가 있는 시장 통의 어느 가게 앞에 아버지가 펴놓은 난전이다. 아버지는 그 때 색색의 나일론사가 섞인 싸구려 겨울 양말을 팔고 있었고, 누이는 날 업고 그리로 갔던 듯 하다. 나는 비닐 위에 놓여있던 연두색과 감귤색의 나일론 양말들이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점프컷되어 횟가루가 쌓여있던 장의사 앞의 수돗가 근처가 생각나고 그 뒤로 난 저장된 장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까무러쳤던 나는 아마 외과에서 치료를 받다 잠시 의식이 깼던 모양이다. 그 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부시게 흰 하얀 법랑을 씌운 병원의 대야였고 그 안에 고인 내 핏물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떠오르는 그 장면은 애초부터 다른 장면으로부터 떼어내진 것이다. 다른 장면이 붙여졌다면 나는 그 장면을 회상할 때마다 다른 이야기와 감정에 사로잡히는 혼란을 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외톨이같은 장면은 기억의 순간에 내가 사로잡혀있던 느낌과 이야기 속으로 삽입되어 다른 정동의 장면으로 생산된다. 곰곰이 생각하면 그 장면은 매번 조금씩 다른 이야기와 함께 불려나온다. (6. 27.)
– <안녕, 용문객잔>은 구스 반 산트의 <제리(Gerry)>나 <엘리펀트(Elephant)>로의 이행과 흡사하다. 비트 세대의 적자인 구스 반 산트가 왜 <아이다호>의 음울하고 멜랑콜리한 고급 드라마에서 벗어나 <제리>로 갔을까. 광주의 어느 대학교에서 불과 몇 사람과 뒤섞여 본 <제리>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이 아연할만한 금욕적인 영화는 시종일관 길을 걷는 두 사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보여준다기보다는 들려주고 보여주며 종내엔 화면 안에 존재하는 인물과 동화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는 동일시가 아니다. 내가 화면 속의 인물과 같은 위치에서 세계를 지각하고 있고 그것을 매개하는 일차적인 통로가 카메라였다면 그것은 동일시겠지만, 사실 화면 안의 인물은 거의 아무 것도 보지않는다. 아니 볼 필요가 없다. 사건이 없기에 그는 말을 건넬 사람도 없고,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 참조할 어떤 사물도 없다. 그저 그는 걷고 있을 뿐이다. 아니 걷는 사람이 보여지지만 그것은 걸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걸음에 깃들어있는 감각을 보여준다. 걷는다는 사실 혹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화면을 지켜보는 한 화면은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그것은 언제나 걷는다는 동일한 사실을 끊임없이 전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지루함에 익숙해질 무렵 나는 문득 놀라게 된다. 나는 이제 걷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걸음에 깃들어 있는 감각의 세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비현실적으로 크게 들리는 발걸음 소리, 모래를 밟고 수풀을 헤칠 때의 미묘한 소리, 그리고 걸음의 강약 심지어 걸음 사이로 비쳐드는 빛의 강도까지 나는 어느새 감각한다. 그런 점에서 <제리>는 봄/보임의 영화가 아니라 감응 혹은 정동(affection)의 영화였다. 어떻게 달리 보도록 할 것인가, 봄(seening)이라는 행위 안에 작동하는 시각적인 법칙을 어떻게 철폐할 것인가. 이것이 지난 수십년간 (비판적) 영화 이론의 모토였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 전연 다른 영화들이 들어서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적어도 <와화장룡>과 <매트릭스> 이후 대중영화의 변화가 영화의 정체성을 위협에 빠트렸듯다면, <제리>는 그것을 아예 자신의 문제로 제시하는 듯 하다. 영화는 어떻게 정보를 전달하고 환영적인 사실을 인지하도록 하는가. 이런 반복된 물음에서 빠져나와 몇몇 감독들은 다른 물음을 던진다. 나는 그런 물음의 노선에 구스 반 산트 역시 서있다는 생각이다.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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