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도롱뇽이 되지 말자 – 생명의 윤리학 비판


아마 우리 시대에 가장 거룩한 성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며칠 전 58일간의 단식을 끝낸 지율 스님이 아닐까. 이름 없는 미물, 작은 짐승 한 마리에도 생명의 고결함을 발견한 사람, 도롱뇽의 삶을 파괴하고 살해하는 “막개발”을 고발한 외롭고 거룩한 영혼. 그는 천성산을 관통하는 공사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결행하였고 마침내 문재인이라는 청와대 청지기의 방문으로 단식은 해제되었다. 6조원을 투입한 국가의 대 역사(役事)에 맞서 외롭게 분투하느 스님의 고집과 결의는 충분히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한 마리의 도롱뇽에게서 문명의 잔인한 폭력, 죽음에의 위협을 발견하고 생명의 위엄을 방어하려는 이, 그가 던져주는 깊은 울림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자꾸 짓궂은 그러나 이유 있는 물음을 던지고 싶은 유혹에 빠져든다. 전신이 마비될 듯한 숭고한 윤리적 장면 앞에서 불경한 의구가 자꾸 꼼지락거린다.
괘씸한 일이겠지만 나는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떼를 쓰는 프랑스의 어느 여배우의 이유 있는 “윤리적인” 주장과 천성산 도롱뇽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지율 스님의 “윤리적인” 주장 사이에서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개고기를 먹는 타자의 풍속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서구 숙녀의 신경질적인 무례와 무지를, 우리는 매우 손쉽게 비난하다. 그렇지만 도롱뇽 사건(?)은 그런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이는 그런 시시한 문화적 사안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22분 빨리 가겠다고 누억년 동안 이뤄진 장엄한 자연의 업적을 간단히 파괴하는 문명의 힘에 대항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단식을 해제한 후에 지율 스님이 천성산 닷 컴에 올린 글처럼 이미 이긴 게임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긴다. 왜냐면 우리는 바로 그 생명의 위대함이란 편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 비슷한 글을 지율 스님은 게시판에 올렸다.
그렇지만 개에게서도 역시 삶의 위엄을 발견하는 브리짓 바르도는 왜 성스러우면 안 되는가. 물론 여기에는 윤리적이고 뭐고를 떠나 우리는 개의 생명의 위엄이란 것이 서구의 우아한 숙녀의 허영스런 삶을 치장하는 장식으로 전락한 것 때문에 불쾌하고 분개했을 것이다. 번지르한 서구 부르주아적 라이프스타일의 편에 서있음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났기에 그녀는 결국 진 게임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개발 문명을 향한 비판이든 타자의 야만적 풍속에 대한 비판이든 두 입장은 자신의 근거로 생명의 존엄을 끌어들이는데 있어 일치한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공명하는 윤리적인 태도를 문제삼고 싶어진다. 그래야 우리는 천성산 막개발에 맞선 지율 스님의 결단을 제대로 도울 윤리적인 입장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부안”에서 벌어졌던 투쟁에 제대로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 혹은 현자가 되어버린 전직 혁명 시인의 말을 빌자면 “살림”의 세계관.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윤리-정치적인 지상명령이 되어있다. 그러나 생명 혹은 삶의 존엄이라는 명령이 근대사회의 핵심적인 권력의 윤리였음을 즉 자본주의적 삶의 일차적인 원리였음을 망각해선 안될 것이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타인을 직접적인 인격적 예속 상태에 두었던 봉건 사회는 근대인에게 언제나 죽음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반면 모든 인격적인 예속에서 벗어난 채, 신민, 노예의 지위에서 벗어난 근대의 자유인에게서 우리가 떠올리는 근본적인 형상은 삶의 이미지이다. 이를 두고 푸코같은 이는 말년에 전근대 사회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사회라면 근대 사회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이런 그의 생각을 압축하는 유명한 도식이 바로 지금은 거의 우리 시대의 상투적인 현학적 용어가 되다시피한 “생권력(bio-power)”이다.
푸코의 생각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민들을 살게끔 한다(살게 하는 권력). 잘 먹고 잘 사는 것,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 국민의 장수와 건강을 목표로 삼는 것, 이것이 근대의 생권력의 목표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즉 죽음과 분리된 삶의 시간을 극대화하는 사회, 삶의 가치와 행복을 정점으로 밀어 올리는 사회, 포드주의적 복지국가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이 사회는 생권력을 통해 지탱되는 자본주의였다.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가 등장했다.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으로 대표되는 시대, 생물학의 시대인 후기 자본주의가 생권력 자체로 움직이는 사회라고 달리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푸코가 결코 미완의 유산으로 남겨놓은 후기의 모든 작업은 바로 이런 생권력의 비판에 할애되어 있었다. 말년의 푸코가 저항은 권력에 내재적이라는 절망적인 결론에서 탈출하기 위해 “존재의 미학”을 꿈꾸는 하찮은 자유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항간의 비난은 옳지 않다. 그에게 붙여준 권력의 미시물리학의 해부학자라는 명칭은 생명의 존엄이라는 윤리에 따라 행사되는 권력을 비판하는 기획을 인식할 때 오직 온당한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박정희 체제는 생권력의 화신이다. 박정희는 국민이 따뜻한 쌀밥을 배불리 먹게 하는 꿈을 꾸었던 도착적인 모습의 근대 군주였다. 그가 도착적이었던 것은 파시즘의 핵심적인 특성이 그렇듯이 살리기 위해 마음껏 죽였다는 점에 있다. 아리아 인종의 삶, 독일 국민의 생명을 위해 생식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인 논리(우생학과 사회위생학 등)를 동원했던 나치즘은 생명, 삶에 미친 권력이었다. 이처럼 박정희 체제도 역시 국가의 부강과 국민의 안녕을 위해 마음껏 죽일 수 있었다. 긴급조치와 반공법이라는 죽일 수 있는 군주적 권력은 번영과 행복이라는 근대적 생권력과 함께 회전하였다. 우리가 박정희 체제를 그토록 오랜 동안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는 애꿎은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살해하고 고문한 독재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았는가. 그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왜 불충분하고 불가능한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인권의 이름으로 장식된 추상적인 민주주의와 삶의 권리란 내용으로 충만한 “한국적 민주주의” 사이에서 엉거주춤 서있다. 그래서 박정희 체제의 유령은 죽지 않고 살아 날뛴다.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권력이 삶의 권력, 생명의 권력이라는 이 기묘한 역설을 깨트릴 때 진정 나치즘을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하듯이, 우리 역시 생권력으로서의 박정희 체제를 비판할 수 있을 때 지금 문제가 되는 “현대사 바로잡기”에 역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고한 생명을 죽인 권력이란 점에서 좌익과 우익은 다를 바 없다! 그래 친일부역자, 민족의 삶을 팔아먹은 반역자를 고발하라! 그러나 동시에 역시 생명을 죽인 또 다른 악인 좌익도 고발하라! 우리는 지금 이런 어처구니없는 공갈에 맞닥뜨려 있다(최근 한나라 당은 이런 협박을 내놓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물러나선 안 된다. 전체주의와 살육, 전쟁이라는 모든 역사적인 악의 기원에는 생명을 향한 위협이라는 악의 윤리가 있다는 협박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래 그들도 삶에 대한 존중, 인간의 얼굴이 없었다고 뇌아림으로써 둘을 은근슬쩍 뒤섞어선 안 된다. 인간적인 모습을 덧붙임으로써 더 나은 해방의 전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 패배적인 것은 없다. 한 포기의 풀에서도 지고한 생명의 향기를 느낀다는 윤리적인 농담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생명의 존엄이란 이름으로 파업할 권리를 가까스로 방어하고, 인권이란 이름으로 정치적 항변을 가까스로 보호하는 이 지긋지긋한 생명의 사회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생명의 존엄은 초월적인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의 논리이다.
지율 스님에게 우리는 간곡히 부탁해야 한다. 도롱뇽에게서 불성을 발견하기에 앞서 해방자 붓다의 모습을 발견하자고. 삶의 덧없음을 알려주며 자유를 추구하기를 설법하는 캘리포니아 선사들의 붓다가 아닌 붓다, 도롱뇽에게서 인간과 다름없는 생명의 위대함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생태철학의 붓다가 아닌 붓다. 지상 최대의 인도주의자에 불과했다면 붓다는 어느 사회에서나 흔하디 흔한 생명지상주의의 도덕군자에 불과하다. 동물학대반대운동론자를 우리 시대의 성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살고 죽는 생명의 차원으로 전락한 인간, 즉 죽는 존재로서의 동물-인간이 아니라 불사(不死)의 존재, 억겁을 거쳐도 결코 죽지 않는 인간, 자연의 흐름을 교란하며 분리되어 있는 예외적인 존재를 옹호한 붓다를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도롱뇽이 되어선 안된다. 우리는 이미 삶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사회,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사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럼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천성산의 도롱뇽, 시화호의 지네, 서해 갯벌의 지렁이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되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당연히 천성산의 막개발을 막아야 한다. 설악산의 산양을 지켜야 한다. 나아가 이라크의 전쟁을 막아야 한다. 이주노동자의 착취를 막아야 한다. 생계형 자살을 막아야 한다. 이에 맞서 투쟁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생명의 위엄, 삶의 존엄이란 이름으로 막을 수는 없다.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도모하는 사회적 권력의 윤리와 악착같이 웰빙에 매달리고 무병장수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소비자본주의적 개인의 윤리, 그 모두와 같은 차원으로 변화의 윤리를 내동댕이칠 수 없다. 알다시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윤리를 저버리기 시작했는가. 스웨덴형인지 네덜란드형인지 노사정 대타협을 향한 꿈이 이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유일한 꿈이라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더욱 악착같이 고용유연화를 하여 노동하는 삶의 질을 제고하고 (물론 그것은 대량실업과 고용불안정이라는 삶의 위협을 낳을 수 있으므로) 부디 죽지 말라고 덧 얹어주는 약간의 “사회안전망”, 그런 것이 우리의 윤리가 될 수는 없다. 빈사상태의 윤리를 소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진과 수양이 아닐 것다. 오히려 죽음을 무릅쓴 인간되기,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컬티즌에 기고한 글. 또 욕먹을 글을 썼다는 핀잔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렸다. 일전 당대비평의 특집호에 써먹으려했던 메모에서 한꼭지를 끄집어냈다. 확답이 있는 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심문하는 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도 불안하게 묻고 있는 물음, 그러나 분명히 확인된 물음, 답은 예비되어있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물음을 자꾸 던지며, 무책임해진다. 그럴 수록 초조감만 깊어간다. 며칠 이상한 두통에 시달렸다. 머리 전체에 열기가 가득한 편두통. 머리 전체가 바이스에 물려있는 듯한 멍청한 상태. 지난 원고를 쓰고 난 후유증같다. 어제는 작정하고 글을 읽지 않고 편히 쉬겠다 생각하고선 영화를 보고 맥주를 마시고 잠을 청했다. 조금은 나아진 듯?

8 thoughts on “제발 도롱뇽이 되지 말자 – 생명의 윤리학 비판”

  1. 요즘 섹스 앤드 시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섹스 앤 시티 언니들은 대체 자랄 생각을 안 하잖아요, 요새 우리다들 그런 거같아. 얼마전에 할아버지가 늙었다고 한탄하는 거 보고 좀 놀랐는데, 끊임없이 젊어지려고 하는 욕망이 죽음을 죽는 것보다 더 무섭게 하는 거 같아요. 요즘 내가 소심해진거랑도 관련이 있고.
    여러개의 높은 칸막이로 나뉘어진 서양화과 스튜디오에서 논문을 쓰고 있으면 (게다가 벽포함 바닥까지 하얀색으로 딱 정신병원), 다른 쪽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는 들리는 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이게 바로 개인주의화구나 팍팍 느껴졌어요. 설상가상으로 유리천장위로 억수로 비가 떨어지면서 ‘노아의 방주를 준비해야겠다는 비장한 의지까지.
    나르시우스가 연못으로 걸어들어갔을때, 우리는 저기 나무 뒤에 에코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요. 나르시우스 조차도 자신의 왜곡된 형상을 반추하고 으시될 그 누군가가 필요한데 ‘조무라기’ 에코라도 없었으면, 나르시우스도 자기애에 빠졌다가도 혼자임을 알고 머슥하고 집에 돌아가 양치하고 잤을꺼야. 튼 그런 이유서, 이 bio-power 가 미치게 날뛰는 건 개인주의화때문에라도 가속화가 붙었을꺼라 생각이.
    오빠, 제가 쓰고 있는 논문 주제가 ‘좋은 것만 말하는 사교관계, club culture sociality’ 인데, 오빠 글 보고 bio-power 와 ‘불멸의 존재’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 reference 할 책 좀 소개시켜주면 정말 도움이 될꺼 같아요. (푸코의 bio-power 을 더 발전 시킨 사람들이 누구에요? )
    마지막으로, 시간과 더불어 사는 헤스티아 여신이 오빠를 지켜주길 기도하면서.
    잊지 마세요, 느긋한 미소.

  2. 미대에서 논문쓰는 언니라면 뉠꼬.. 여튼 아는 이 누구겠지 하면 너무 무심한가요. 신원 확실한 분 입장 요망. ^^
    푸코의 생권력가지고 더듬거리는 사람, 아주 많지요. 추천하자면 누구 뭐래도 조지오 아감벤이지요. 지젝을 거쳐 소개된 이태리의 철학자인데, 워낙 영미 아카데미의 스타가 되다보니 조금 김이 새기도 하지요. 조금 이상한 일이긴 한데 이탈리아의 오페라이스모와 아우토노미(지금은 네그리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계열의 글을 묶어 출간한 국내의 서적에서 영어판에 수록되었던 그의 글이 빠져있었습니다. 조지오 아감벤은 철학자인데 그의 Homo Sacer가 아주 좋은 책이지요(도래하는 공동체같은 그의 또다른 역저를 포함해 그의 많은 대표적인 저작들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 꼽자면 영국의 통치성 학파라고 부를만한 일군의 학자들의 작업이 좋습니다. 선진자유민주주의(advanced liberal democracy)라고 번역할 만한 이름으로 탈근대사회의 정치체제의 특성을 분석합니다. 물론 그들의 주된 관심은 통치성 학파란 이름에서 드러나듯 후기 푸코의 통치성이란 관점에 근거합니다. 생권력이란 개념을 붙잡고 고민하던 후기의 푸코가 훈육사회론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특성을 분석하며 제시했던 일종의 이론적 프로그램에 가까운 개념이죠. 그들 역시 이 개념에 근거하여 후기 근대의 주체, 자아의 문제에 천착합니다. 물론 그것은 나의 나에 대한 태도라는 심리학적 주관성과는 전연 무관한 것입니다.
    또 하나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아주 훌륭한 것은 단연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입니다. 그는 생권력이란 개념에 비판적이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대조되는 입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자유>란 책은 후기근대의 소비주의적 주관성의 등장을 예리하게 통찰합니다. 그와 맞짝을 이루는 조금은 보수적이라고 할 (그는 언제나 지나간 좋은 노동자들의 공동체, 고향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툴툴댑니다) 리처드 세넷의 글 역시 좋습니다. 그의 책도 두 권이나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의 역저인 <공적 인간의 몰락>이 번역되지 않은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후기의 두 텍스트는 탈근대 자본주의에서 개인의 운명에 대한 놀라운 통찰입니다. 저는 그의 글쓰는 방식을 아주 좋아합니다. 너무 장황했네요. 도움이 되었길..^^

  3. It was that. Uhm.. I did never assume that SHE would be YOU. Anyway, thanks a lot to be faithful reader to my own dungeon with some trashes.

  4. 질문과 비판의 자격 여부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글 올립니다.
    다소 거친 언어가 될 것 같은데, 양해 바랍니다.
    평소에 POP님의 글을 자주 읽는 독자 정도로 이해해 주세요.
    평소 여느 글과는 달리, 이 글은 의식과잉이 빚어낸 비논리적 언설들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도룡뇽과 개고기, 지율과 바르도의 동등한 비교는 차치하고라도 “생명 혹은 삶의 존엄이라는 명령이 근대사회의 핵심적인 권력의 윤리였음을 즉 자본주의적 삶의 일차적인 원리였음을 망각해선 안될 것이다.”는 정언명령을 구사하는 님의 주장은 이 세상의 모든 대안은 <반자본주의>여야 한다는 선험적 전제가 아니고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율스님의 ‘천성산 지키기’가 님의 도마에 올라서 난도질당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지율스님이 신자유주의에 맞서지 않아서요? 개발과 속도에 맞선 지율스님의 투쟁이 왜 ‘공허한 생명윤리’를 전파하는 도사의 언술로 전락하는지 좀더 상세한 근거를 들어 주세요. 청와대 앞에서 단식할 때, 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지 않아서입니까? 지율스님의 투쟁이 신자유주의로부터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삶을 희석시켰다는 논리가 푸코를 들먹이면 다 옳은 말처럼 둔갑하는 건가요? 지율스님에게 해방붓다를 요구하신다면 님도 해방게이가 되어야 합니다. 님은 날마다 모든 사안에 대해서 해방게이로서 존재하고 있습니까? 지율스님은 천성산을 지켜내자,고 하신 겁니다. 그것이 해방붓다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도모하는 모든 일들이 다 해방예수처럼, 해방붓다처럼, 체 게바라처럼 해야만 하는지요? 해방붓다도 천성산을 지키자고 했을 겁니다.
    정말 상투적, 현학적 용어가 되어버린 ‘생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논리를 전화시키는 그 탁월한(?) 글솜씨에 찬사를 보냅니다. 도룡뇽으로부터 시작된 사유가 박정희나 나치의 생권력으로, 해방붓다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POP님이 글을 쓰는 이유가 궁금해졌어요. 현실과 유리된 생태주의는 문제가 있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를 왜 이런 방식으로 전개해야만 하는지… 지율스님의 투쟁에 동의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그 투쟁이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에서 신음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로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는 정도의 간단한 논리 아닙니까? 이런 정도의 얘기를 하기 위해서 지율스님 명망에 기대는 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룡뇽’이라는 상징화된 생명의 아우라를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동떨어진 생태주의자의 공허한 울림으로 바꿔치기하는 수법은 실로 가증스럽기까지 하군요.
    글을 쓰는 것은 님의 자유입니다. 허나, 강아지들이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이유의 글쓰기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 글에서 불쾌함을 느끼셨다면, 님의 글에서 불쾌함을 느꼈을 수많은 도룡뇽들을 생각해 보세요. 지율을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님이 걱정할 정도로 그 대단한 ‘신자유주의 질서’에 눈감았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계몽은 님과 같은 명망있는 문화비평가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계유지 수단이면 몰라도 단순한 현학의 과시라면 참으로 용서 안 되는 일이니까요. 님과 같은 부류의 수천의 문화비평가들의 현학적이고 자기과시적인 글보다는 지율스님이 행한 무언의 단식이 뭇 중생에게는 훨씬 가치 있는 일입니다.
    평소 님의 글에서 많은 감화를 받았기에 결례를 무릅쓰고 남깁니다. 님이 이 글 마지막에 사족으로 남긴 그 ‘무책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 역시 성찰하겠습니다

  5. 굳이 걸음하여 글을 남겨주신 데 대한 답변을 드려야할 듯 하여, 몇 줄 남깁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번연한 삶의 참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굳이 지율 스님이 천성산 도롱뇽을 살리자는 이야기를 왜 끌어들이며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현학적인 사변을 즐기냐는 핀잔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신자유주의적인 현실이 초래한 삶의 신음을 생명의 윤리로 되바꿔서는 안된다는 그 간단한 주장을 하려고 지율 스님의 간곡하고 진정한 선의를 남용하고 모욕했으며, 그런 점에서 제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그만큼의 글로 받아들이고 제 현학에 농락당한 기분이셨다면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대개 이만한 시비들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고 그래서 그다지 생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제 현학 탓인지 글이 역시 제대로 읽히지 않았군나 하는 자괴감이 큽니다.
    그러나 오해는 바로 잡지요. “이 세상의 모든 대안은 <반자본주의>여야 한다는 선험적 전제가 아니고 무엇인지 궁금’하며 “지율스님의 ‘천성산 지키기’가 님의 도마에 올라서 난도질당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항의에 대하여 대꾸하지요. 이 세상의 모든 대안은 반자본주의여야한다고 굳이 밝힌 적도 없는데 그렇게 읽으셨다니, 맞는 말입니다. 그렇게 강변하는 것은 부끄럽지만 제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선험적인 논리인 것이 아니라 제 주장이지요. 지율 스님도 숭고한 보편적인 윤리를 육화하는 성인인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행위를 하고 입장을 실천하는 주체입니다. 그를 그만큼의 자리에서 읽어야 겠지요. 뭇 중생, 이름 없는 측은한 미물, 고통받는 대상 운운을 들먹이며 제 주장을 윤색하는 것은 강아지같은 문화비평가의 현학적 냉소주의보다 더 비난받아 마땅할 태도라고 봅니다.
    강아지같은 문화비평가들이야 그래도 괜히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기라도 하지만, 멍청한 윤리적 주술은 뻔하고 지루한 그리고 거의 노예적인 “선험적인” 도덕률에 따르도록 종용하고 결국 현실은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이 되고 맙니다. 세계에 대한 오직 우리의 개인적인 도덕적인 결단이 문제가 된다면 문제는 얼마나 단순합니까. 세상은 세상과 더불어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체를 함께 만들어 냅니다. 나쁜 자본주의 현실이 있고 그와 무관한 채 이를 관망하는 개인들의 집합이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제 생각에 지율 스님에게 투사하는 많은 이들의 도덕은 시중에 흔하디 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아주 진하고 쩌릿한 이야기는 휴먼 다큐 아무거나 집으면 넘치도록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도덕은 넘쳐나지만 제 표현으로는 “입장”은 희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이주노동자의 삶에 연민과 동정을 갖기는 쉽지만 이를 계급투쟁으로 인식하는 것(물론 이는 모두 신자유주의의 결과일뿐이라는 기계적인 환원론을 들먹이며 그것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구는 냉소적인 태도와 구별해야겠지요)은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소수자 인권의 문제로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처리되고, 급기야 우리 시대의 수많은 사회적인 현안이 인권화되며,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에 의해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과 대립이 인권이라는 윤리적인 규범에 의해 중재되는 일을 지극히 혐오합니다.
    제가 지율 스님을 수용하고 지지하는 우리 시대의 기류에,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비판적인 사유에 대하여 간섭하려는 이유는 이런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 의도는 간단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생태적 윤리는 과연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지율 스님도 당연히 역사적 논리의 외부에서 자신의 윤리적인 입장을 자리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달리 말해 그도 입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모른다면 우리는 그의 개인적으로 선한 의도와 무관하게 그의 입장이 영유되고 조직되는 자리를 찾아 이해해야 겠지요. 자본주의가 인간을 소외시키는 문명을 낳으므로 약간 반자본주의적이기 때문에 생태운동을 지지하자는 일부 사회주이자라든가 조화로운 균형잡힌 공동체적 세계를 파괴한 야만적 문명을 규탄하는 근본적 생태주의자라든가 모두 제겐 억지일 뿐입니다. 아우슈비츠는 왜 나쁜가. 인간을 죽이는 절대악을 행사하였으므로, 생명의 존엄을 짓밟았으므로, 운운으로 주장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매우 나쁜 짓입니다. 박정희 시대의 많은 무고한 죽음과 고문을 인권의 이름으로 청산하고 보상하자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매우 나쁜 짓입니다. 그 모든 입장에 깃들어있는 삶에의 의지, 죽음과 삶의 대비는 절대 선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근대 자본주의 권력의 특성이 삶을 조장하고 숭배하며 죽음을 꺼리고 멀리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런 저의 생각이 푸코에 빚지고 있기에 그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내가 푸코를 좀 알지 하는 잘난 체를 하기 위해 상투어인 생권력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비약입니다. 미시권력 운운을 주장하며 자본주의 비판의 김을 빼기 위해 동원되는 헛소리 가운데 하나가 생권력이 아니었나요. 권력은 도처에 있다, 저항은 권력에 내재적이다 운운의 주장을 뇌아림으로써 비판을 명목론적인 주장으로 곤두박질치게 한 것이 그간 생권력이란 용어를 소비하는 방식 아니었나요. 제가 푸코의 생권력에 관한 주장을 인용한 것은 전연 그런 주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외려 안녕, 장수, 건강, 복지, 행복추구 등의 이름으로 조직되는 자본주의적 권력의 형태와 실천을 보자는 것이고 그것이 국가정책, 관료제도, 학교와 기업, 수용시설, 사회사업, 박애기관 등의 형태 안에서 어떻게 실행되는가 규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이를테면 구빈원은 아주 아름다운 선행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도덕의 감옥에서 풀어놓고 자본주의적인 계급관계 안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노동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를 발명하고 근면과 성실, 자수성가의 윤리를 만들어내는 도덕적인 제도 아닌가요. 저는 우리 시대의 생태주의가 자본주의 비판에 가해지는 일종의 윤리적인 위협을 극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맑스주의자는 생태주의를 신종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라고 공격하거나 아니면 계급 문제가 생태 문제에 우선한다고 견강부회하는 식의 주장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무관합니다. 생태주의는 어떤 “입장”인가.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왜 자본주의적인 삶의 윤리와 공명하는가, 더 투박하게 말하자면 생태주의는 왜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구성하는가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그런 물음에 대한 제 입장입니다. 물론 그것을 요령있게 밝히지 못한 것은 제 무능입니다.
    – “님과 같은 부류의 수천의 문화비평가들의 현학적이고 자기과시적인 글보다는 지율스님이 행한 무언의 단식이 뭇 중생에게는 훨씬 가치 있는 일입니다”라는 겸손한 어투에 대해 덧붙이는 것으로 글을 맺겠습니다. 타인의 선의를 존중하지 않는 무뢰한으로 필자를 평가하는 것은 무슨 용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더 가슴아프게 하는 일은 왜 자신의 주장을 위해 비굴하게 스스로를 뭇 중생이라고 폄하냐는 것입니다. 왜 타인의 무지에 대해 공박하고, 예상되는 비난을 무릅쓰고 진실의 입장을 견지하려는 반중생적인 행위를 각오하지 않나요. 저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이 우리 시대의 병적인 태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문학권력을 비판한 어떤 문학평론가가 관련 출판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반론이 아니라 해를 끼쳤다는 데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법정출두요구서였다고 합니다. 저는 반론이 없는 그런 침해의 규탄, 상처의 호소가 우리 시대의 논쟁의 공간이라고 봅니다. 이 글로 마음이 아팠다면 죄송하지만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제 생각에 모든 주장은 찌르고 움직여야 합니다.
    “서동진님, 제발 도룡뇽이 되지 마세요. 반자본주의와 노동해방 투쟁에 일로매진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렇지만 모두 도롱뇽이 되지 말아야겠지요.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인간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을 때 우리는 도롱뇽으로 전락하지 않겠지요. 님도 부디 도롱뇽이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반자본주의와 노동해방 투쟁에 일로매진하겠습니다. 그것이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윤리적 헤게모니를 가지지 못하게 되어 소소한 개인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치부되는 굴욕이 있지만, 어쩌겠습니까. 반자본주의와 노동해방투쟁의 한계였던 것을. 더욱 매진하여 님같은 이를 인간으로 만들어야 겠습니다.
    – 덧붙여, 이 사이트는 제가 지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일종의 은페된 공간입니다.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출입을 않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이 공간에서 저는 논쟁을 벌이고 싶지도 않고 또한 논쟁 자체를 피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곳에서 적당한 기회를 빌어 행하는 게 좋을 성 싶습니다.

  6. 답변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지율 스님도 숭고한 보편적인 윤리를 육화하는 성인인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행위를 하고 입장을 실천하는 주체입니다”라고 해 놓고, 지율스님의 싸움을 아직도 윤리차원으로만 국한해서 인식하고 있는 점,
    -‘생권력’과 ‘생태주의’의 차이를 모르시진 않을 텐데, 양자를 교묘히 교차시키는 의도,
    – 생태주의의 반자본주의적 성격에 대한 간과.
    -‘반자본주의’의 환원론에 기댄 문화비평의 위험요소.
    -현학적이기 이전에 전달이 잘 안 되는 난삽한 논리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점.
    (이 글에 대한 중평이 그렇습니다.)
    -출입금지에 대한 섭섭함
    등에 대해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쯤에서 멈추겠습니다.
    “모든 주장은 찌르고 움직여야 한다.”는 충고 잊지 않겠습니다.
    말이 가시가 되어 전달된 점, 반성하고 있습니다.
    마음 불편하게 한 점,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출입하지 않겠습니다.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7. 제게 대하여 험하는 듯한 말을 들었을 때 대뜸 치미는 불쾌감에서 저 역시 헤매는 터라 언짢기는 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재주 없으면서도 써달라는 글을 호구지책으로 꾸준히 쓰는 터라 여기저기서 많이 얻어터집니다. 그 덕에 조금씩 단련되어가는 중입니다. 다시 따지고 싶다는 점, 메모하여 주셨는데 제가 미욱해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깜냥 짐작대로 읽고 간단히 답변하는 걸로 이 대화를 접겠습니다.
    지율스님의 주장을 다시 재윤리화한다는 주장, 잘 모르겠습니다. 지율스님의 주장의 입장에서 제가 읽은 것은 생명의 파괴, 삶의 존엄이란 것이었습니다. 많은 생태주의자들의 주장 안에 일종의 그런 윤리적인 공리가 있지요.. 저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생정치의 논리를 반복하는 한 그리고 생정치란 것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대상을 생명/삶을 누리는 주체로 규정하는 것인 한 이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권력’과 ‘생태주의’의 차이를 모르시진 않을 텐데, 양자를 교묘히 교차시키는 의도..란 부분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무얼 교차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생태주의는 곧 생권력이다? 이렇게 교차했다구요? 지율스님이 제시하는 입장을 우리 시대의 생태주의의 대표적인 한 예로 여길 수 있다면 그것의 입장은 생권력의 논리와 다름 없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의 입장을 해석한 것이지 교묘히 교차한 것은 아닙니다.
    생태주의의 반자본주의적 성격이란 이야기는 너무 식상합니다. 제가 그에 대해 모를 리 있겠습니까. 알다시피 친환경적인 아파트와 유기농 샴푸에서부터 생태적 합리화에 따른 국가발전모델까지 무수한 생태 담론의 소비가 있습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도 역시 생태주의를 소비합니다. 저 역시 자본주의가 자연, 기술, 생명, 생산 등에 있어 새로운 관련을 강요하였고 그것이 불행과 재난을 초래하였음을 통감합니다. 그렇지만 노동운동 더하기 생태운동 식의 관점은 우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였고 공해를 유발했으며 생태계를 교란하였다는 주장은 또한 알다시피 자본가들이 더 애용하는 입장입니다. 친환경적인 상품, 생태적인 기업환경, 윤리경영의 이념 등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새로운 입장입니다. 더 근본적인 생태주의를 꿈꾸자는 주장은 않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생명의 존엄, 행복의 권리라는 생권력의 에토스,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정치적 합리성에서 분리된 반자본적 생태주의의 윤리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반자본주의 환원론에 기댄 문화비평의 위험성은 글쎄요,… 그건 답할 수 없겠습니다. 반자본주의 환원론이란 주장은 논리학적인 냄새가 나지만 또한 정치적인 말의 “사용”이기도 하지요. 저는 반자본주의적 환원론은 자본주의적 화용론 그 자체라고 봅니다.
    난삽한 논리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점(중평이라는 지적, 굳이 지적않으셔도 되는 일입니다. 귀있고 눈있으니 그런 소릴 왜 못듣고 못보겠습니까), 계속 분발하겠다는 약속 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적극적인 자기비판은 자기의 생각을 표현할 개념을 아직 발명하지도 못한 채 헤매고 있다는 점, 글은 사유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글이 사유를 만든다는 점을 아직 철저히 깨우치지 못한다는 점 등입니다. 저는 <좋은 생각>이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나오는 감동적인 저자들의 능력을 높이 사지만 그런 글이 가치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제 결벽이겠지만 없는 사고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 글은 언제나 비판이어야 한다는 점이 제가 글을 허둥대는 꼴로 만들어 버리는지도 모르겠다는 “우아한” 알리바이가 생각납니다. 소극적인 자기비판이라면 제 글이 제 몸인지라, 체질 개선이 쉽잖다는 거죠. 저는 제 빈약한 체중조차 늘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 게으른 탓이거나 반복강박에 매달리거나 그런 것이겠지요. 그냥 Soma님은 서툰 놈이 서툰 글을 쓴 것이라고 여겨주세요. 그리고 출입금지에 대한 섭섭함. 뜻맞는 이들끼리 놀겠다는 패거리 의식이 아니라 그냥 잘 아는 사람들끼리 부담 없이 속내 털어놓은 자리를 만들려는 평범한 동기일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여기에서 저는 벌거벗으려 가능한 애쓰고 있거든요. 여튼 좋은 인연이었습니다. 님도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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